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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6.7 의병장 이인영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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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9년 6월 7일 의병대장 이인영 체포

대전이라는 도시는 원래 조선 500년 내에는 없던 도시다. 충청도의 중심도시는 언제나 충주, 청주 그리고 공주나 홍주 정도였지 대전이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한밭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그러나 경부선이 완성되고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09년 쯤에는 일본의 헌병대가 진주해 있었는데 1909년 6월 7일 헌병대에 마...흔 살 가량의 한 사람이 잡혀 들어왔다. 부친 성묫길에 잡혀 왔다는 남자의 이름은 이시영이라 했으나 이미 일본 관헌들은 이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인영이다. 대어를 낚았군”

이인영은 1868년생이다. 태어난 곳은 경기도 여주, 민비의 고향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그는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주로 강원도 지역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수십 차례 싸웠지만 다음 해에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권고를 받고는 의병을 해산한다. 싸우겠다고 일어선 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임금이 해산하라니 기껏 일어선 의병들을 흩어 버리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일어난 의병 대부분이 그랬다. 유인석이 그랬고, 최익현은 진격 도중 진위대와 마주치자 임금의 군대와는 싸울 수 없다며 체포된다. 임금을 거역한다는 것은 하늘이 두쪽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양반 유생들이었던 것.

그 후 오랫 동안 경상도 문경에 은거하던 이인영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고종의 강제 퇴위 후 강원도 원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 등이었다. 그들은 이인영에게 자신의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청한다. 이인영의 군사적 재질을 가졌다기보다는 그의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을미의병장 이인영의 이름이. 그런데 이인영은 망설인다. 아버지가 중한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경구를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란 조선의 유학자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구실이었다. 아니 유생뿐이랴. 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려 들었던 오페르트에 따르면 자기 임무를 방기한 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던 조선 병사가 마을에 이르러서는 “우리 아버지는 살려 주시오.”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하니 말이다., . 그러나 이은찬은 나흘을 버티며 이인영을 설득한다.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란 그에 비하면 가벼운 일인데 어떻게 공사를 미루겠습니까.”

결국 이인영은 이은찬에게 설득당하여 몸을 일으킨다. 이인영은 관동창의대장의 기치를 올리고 전국은 물론 해외동포에까지 격문을 뿌려 일본에 저항할 것을 호소한다. 그 격문은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전명운 장인환도 이 격문을 읽으며 몸을 떨었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군인을 모조리 없애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그는 수도 진공 작전을 설파했다. “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孤獨)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데 있은즉, 각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로 경기 땅을 쳐들어가면 온 천하는 모두 우리 것이 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각 도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게 되는데 그 중 적지않은 수가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었다. 즉 당시 대한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의 태반이 가세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인영은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격문을 보내지 않았다. 수백년간 서북 사람들을 차별했고 두만강이라면 지구 끝의 오지쯤으로 알고 그곳 사람들을 무시했던 조선 유생들의 몹쓸 관념을 이인영 역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에서는 정봉준이 평안도에서는 방인관이 수십 명씩을 이끌고 양주로 왔다.

그 의기는 가상했으나 이인영은 끝내 자신을 지배했던 옛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찍이 그의 의병 동료였던 유인석이 상놈 의병장이 양반 의병장에게 개긴다고 상놈 의병장의 목을 쳐 버리고, 자신의 부대에 동학군 혐의가 있는 자가 낀 것을 알고는 역시 목을 베어 버린 것처럼, 그는 신돌석같은 용맹하지만 애석하게도 평민인 의병장이 자신과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용인하지 못했고,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부대는 서울 진공 작전에서 배제되고 만다.

그러나 일본군도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군사를 지휘했던 왕산 허위의 300여 병력이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지만 일본군의 반격에 휘말려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며 짚신발 절며 절며 한많은 망우리 고개를 떠나야 했다. 다시 절치부심 한양 땅을 넘보는 와중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인영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총대장이 3년상을 치러야 한다며 진영을 떠나겠다고 한 것이다. 그 자리에 모인 의병들 가운데 상당수는 처자식이 배를 곯고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늙으신 부모 병들어 오늘 내일 하는 이도 하나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는 쥐뿔만큼도 없지만 그래도 망해 가는 나라 붙들어 보겠다고 화승총 잡고 발 부르터 가면서 산 넘고 물 건너 양주까지 왔는데 총대장은 아버지가 죽었다고 낙향해 버렸다. ““나라에 불충한 자는 어버이에게 불효요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나라에 불충이니, 효는 충이니 하는 것은 그 도가 하나요 둘이 아니니라.”

아버지 3년상 치른 후 의병을 다시 일으키겠다던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체포되고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교수형을 당한다. 그는 끝까지 옛날 사람이었다. 일본인들의 악형 앞에서도 꿋꿋하게 버텨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마지막 요구는 “일본 왕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적국의 왕을 만나 대의명분으로 그를 설득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을까. 이인영의 ‘헌신성’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한 점 의심할 것이 없다. 다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지나치게 예스럽고 고루하며 완고하였을 뿐이다. 그 가치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행동들은 결국 이인영 자신과 그를 따라 몰려든 수천 명의 인생,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을 허무하게 붕괴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세상이 헌신과 진정성만으로 바뀌었다면 삼백 예순 다섯 번도 더 바뀌었을 것이지만, 세상은 헌신과 진정성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도 냉혹하게 묻는다. 오늘날에는 이인영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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