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터진 폭탄
전라북도 정읍은 그렇게 큰 고장이 아니지만 전라도 다른 고을에 비해서 유명세를 탄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백제 때부터 ‘정읍사’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달하 노피곰 도샤..... 아으 다롱디리. 조선 말엽 동학 운동의 본고장이었고 호남의 교통의 요지였던 이 정읍의 이름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또 한 번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다.... 어떤 거물이 정읍에 들러서 한 발언이 폭탄처럼 전국을 들쑤셔 놓은 것이다. 그 거물의 이름은 이승만이었다. 1945년 10월 그가 귀국했을 때 그가 한 말은 그 이후 수십년간 ‘대동단결’을 주창하는 이들에게 즐겨 쓰이는 명구였다. “뭉치면 삽네다 흩어지면 죽습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해방 후 헤아릴 수 없는 단체와 조직들이 범람하여 그 가입 성원 수를 다 합치면 2천만 인구를 훌쩍 뛰어넘던 시절에 그 말은 일종의 복음처럼 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또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한 세기 전 독립협회 시절부터 큰 이름이었다. 해방 후 좌우를 망라한 모든 조직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내지 주석으로 꼽히고 있었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맡기자고 주장하여 임시정부를 발칵 뒤집어놓고 탄핵당한 경력이나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켰던 과거와는 별개로 그는 독보적인 민족의 지도자로 꼽혔다. 그에 감동해서일까. 그는 귀국 후 그의 평생 행태로 비추어 믿어지지 않는 말까지 남긴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이걸 카사노바의 순결선언에 비해야 할지 가카의 “가장 도덕적인 정부”론에 비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는 않는데 하여간 그땐 그랬다.
1945년 말, 해방된지 얼마 안된 나라에 5년간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무척 왜곡되었던)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두고 일사불란한 반대 투쟁이 조직되었다가 좌우가 분열되고 극심한 혼란에 접어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후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소련이 삼상결정 반대자들을 배제하라고 요구하고 미국은 이에 반대하여 지리한 입씨름이 벌어지는 가운데 결렬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팻말에 불과했던 38선은 점차 굳어져 가고 있었고 분단이란 꿈에도 생각지 않던 사람들의 가슴에도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거 나라 허리가 잘리는 거 아닌가?”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교착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고 발언한다. 그의 자율적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는 곧 밝혀진다. 각지를 돌아다니던 이승만이 1946녅 6월 3일 정읍에 도착했을 때 그는 향후 한국 현대사에서 지대한 의미가 있는 말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었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며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입네다.”
이것이 유명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다. 이른바 분단의 첫 단추였다고 지탄받는 정읍 발언이지만, 팩트로만 보면 그건 첫 단추의 오명을 쓰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다. 공개된 구 소련 자료에 따르면 1945년 9월 20일,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장악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이미 스탈린은 이런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미 군정은 공식적으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배척했다, 군정장관 러치가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거품을 물 정도였다. 그리고 최초의 남한 단독 정부론으로서 당시만 해도 분단을 꿈도 꾸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이승만은 자신의 정읍 발언을 ‘허보’(虛報)라 일컬으며 발을 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그 발언대로 움직인다. 1948년 2월 남북협상파와 이승만이 미국 하지 중장의 주재로 마주했을 때 김규식은 “조국의 분단이 결정되는 이때에 우리가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터이니 염려 말라”고 맞받았던 것이다.
몇 년 전 황학동 골동품 시장을 촬영하는데 한 노점상이 벌인 좌판 위에 낡은 레코드판이 놓여 있었다. 어떤 커버 그림도, 사진도 없는 하얀 표지에는 사인펜으로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승만 정읍 발언 실황 녹음” 이름 모를 노점상은 빼뚤빼뚤한 글씨로 그 역사적 육성을 담아 놨었다. 꽤 무거운 값을 매겨 놓아 가벼운 지갑으로선 어쩔 수 없었지만 가끔 1946년 6월 3일 정읍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사람들에게 “안되면 남쪽이라도!”를 부르짖던, 그리고 스탈린의 지령과 더불어 남북 분단의 시초를 열었던 이승만 특유의 비음이 귀에 쟁쟁해지기도 한다. 한 번 들어라도 봤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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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터진 폭탄
전라북도 정읍은 그렇게 큰 고장이 아니지만 전라도 다른 고을에 비해서 유명세를 탄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백제 때부터 ‘정읍사’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달하 노피곰 도샤..... 아으 다롱디리. 조선 말엽 동학 운동의 본고장이었고 호남의 교통의 요지였던 이 정읍의 이름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또 한 번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다.... 어떤 거물이 정읍에 들러서 한 발언이 폭탄처럼 전국을 들쑤셔 놓은 것이다. 그 거물의 이름은 이승만이었다. 1945년 10월 그가 귀국했을 때 그가 한 말은 그 이후 수십년간 ‘대동단결’을 주창하는 이들에게 즐겨 쓰이는 명구였다. “뭉치면 삽네다 흩어지면 죽습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해방 후 헤아릴 수 없는 단체와 조직들이 범람하여 그 가입 성원 수를 다 합치면 2천만 인구를 훌쩍 뛰어넘던 시절에 그 말은 일종의 복음처럼 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또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한 세기 전 독립협회 시절부터 큰 이름이었다. 해방 후 좌우를 망라한 모든 조직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내지 주석으로 꼽히고 있었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맡기자고 주장하여 임시정부를 발칵 뒤집어놓고 탄핵당한 경력이나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켰던 과거와는 별개로 그는 독보적인 민족의 지도자로 꼽혔다. 그에 감동해서일까. 그는 귀국 후 그의 평생 행태로 비추어 믿어지지 않는 말까지 남긴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이걸 카사노바의 순결선언에 비해야 할지 가카의 “가장 도덕적인 정부”론에 비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는 않는데 하여간 그땐 그랬다.
1945년 말, 해방된지 얼마 안된 나라에 5년간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무척 왜곡되었던)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두고 일사불란한 반대 투쟁이 조직되었다가 좌우가 분열되고 극심한 혼란에 접어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후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소련이 삼상결정 반대자들을 배제하라고 요구하고 미국은 이에 반대하여 지리한 입씨름이 벌어지는 가운데 결렬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팻말에 불과했던 38선은 점차 굳어져 가고 있었고 분단이란 꿈에도 생각지 않던 사람들의 가슴에도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거 나라 허리가 잘리는 거 아닌가?”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교착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고 발언한다. 그의 자율적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는 곧 밝혀진다. 각지를 돌아다니던 이승만이 1946녅 6월 3일 정읍에 도착했을 때 그는 향후 한국 현대사에서 지대한 의미가 있는 말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었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며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입네다.”
이것이 유명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다. 이른바 분단의 첫 단추였다고 지탄받는 정읍 발언이지만, 팩트로만 보면 그건 첫 단추의 오명을 쓰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다. 공개된 구 소련 자료에 따르면 1945년 9월 20일,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장악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이미 스탈린은 이런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미 군정은 공식적으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배척했다, 군정장관 러치가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거품을 물 정도였다. 그리고 최초의 남한 단독 정부론으로서 당시만 해도 분단을 꿈도 꾸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이승만은 자신의 정읍 발언을 ‘허보’(虛報)라 일컬으며 발을 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그 발언대로 움직인다. 1948년 2월 남북협상파와 이승만이 미국 하지 중장의 주재로 마주했을 때 김규식은 “조국의 분단이 결정되는 이때에 우리가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터이니 염려 말라”고 맞받았던 것이다.
몇 년 전 황학동 골동품 시장을 촬영하는데 한 노점상이 벌인 좌판 위에 낡은 레코드판이 놓여 있었다. 어떤 커버 그림도, 사진도 없는 하얀 표지에는 사인펜으로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승만 정읍 발언 실황 녹음” 이름 모를 노점상은 빼뚤빼뚤한 글씨로 그 역사적 육성을 담아 놨었다. 꽤 무거운 값을 매겨 놓아 가벼운 지갑으로선 어쩔 수 없었지만 가끔 1946년 6월 3일 정읍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사람들에게 “안되면 남쪽이라도!”를 부르짖던, 그리고 스탈린의 지령과 더불어 남북 분단의 시초를 열었던 이승만 특유의 비음이 귀에 쟁쟁해지기도 한다. 한 번 들어라도 봤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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