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21년 6월 4일 해골이 부른 동맹휴학
경성의전은 서울의대의 전신이다. 요즘도 내 자식이 서울 의대 다닌다는 사람들 보면 어깨에 뽕이 솟아나는 것이 보이거니와 식민지 조선 경성에서 경성의전생이라 함은 가히 엘리트 중의 초절정 엘리트들이었다. 집안들도 좋았을 것이고 머리는 조선팔도에서 알아주는 수재들만이 모였을터, 그런데 이 경성의전생들이 일치단결하여 1921년 6월 4일 동맹파업을 일으킨다. 발단은 ...5월 26일의 해부학 교실에서 비롯된다. 해부학 강의실이 비좁았던 관계로 학생 전부가 다 들어가지 못하고 특별히 지원하는 사람 중에서 본과 5명 청강생 여자 1명 특별과 4명 함계 10명이 실물 해골을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해부학 교수 구보(久保)가 씩씩거리며 교실로 들이닥친다.
" 해부실에 있는 두개골 한 개가 없어졌다. 이게 웬일이냐 어제 들어갔던 조선 학생들 다 나와!"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이 해골 내놓으라고 덤비는 것도 이상한데 그 해골수집가가 조선인 학생들일 것이라 단정짓는 구보에게 어이가 상실되는 판이었다. 그런데 구보의 입에서 잇따라 튀어나오는 말은 학생들의 어처구니에 이어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리게 하기에 넉넉했다.
"너희들 조선 사람은 원래 해부학상으로 야만에 가까울 뿐 아니라 너희의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정녕 너희들 중에서 가져간 게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라면 초절정 엘리트건 두메산골 목동이건 단군의 자손의 입에서는 똑같은 말이 그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뭐 이런 쪽발이 시키가 다 있어! " 경성의전생들도 격노했다. 그래도 경성의전생들은 범생이들답게 당장 교수 멱살을 잡기보다는 대표자를 뽑아 교수실로 들여보내 민족적 모욕행위에 대해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구보 교수는 원래 신경질적인 품성으로 유명했던 바, 나름 당당하게 들어선 조선 학생 대표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제대로 말을 들어주지도 않으니 대표단은 항의 한 마디 제대로 전달 못하고 쫓겨 나오고 말았다. 이 꼴을 본 학생들의 머리속은 분노로 표백되고 말았다. 구보인지 구두짝인지 너 두고 보자.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경성의전 일본인 학생들이 모임을 가지고 자신들이 해골을 가져갈 이유가 없다고 외치며 조선인들에게 그 혐의를 몰아간 것이다. 드디어 분노에 불이 화악 당겨졌다. 이것들이 선생이나 학생이나 매한가지로 놀고 있어.
조선 학생들도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이 일은 그냥둘수 없고 저것들을 그냥 둘 수 없다. 핏대를 세우려는 판인데 우에다라는 일본인 교수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강당에 들어와 덮어놓고 해산하라고 우겼다. "아니 센세이! 일본 학생들은 맘대로 모여 멋대로 떠드는데 우리는 모이지도 못합니까. 우리가 야만족이라 그렇소?" 그래도 우에다는 막무가내였다. "교수가 나가라면 나가야지 웬 말이 많은가." 마침내 강당은 울부짖는 학생들과 교수들 교직원들이 뒤엉킨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조선 학생들의 기세에 교직원들이 퇴장한 후 조선 학생들은 매우 간단하나 절절한 요구 사항 두 개를 내건다. 1. 구보교수의 말에 조선인은 해부학상으로나 국민성으로나 야만됨을 면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선생은 마땅히 학생 일동에게 그 자세한 연구를 학리상으로 강의하여 들려 줄 것. 그리고 구보교수의 교수는 받지 아니 할 터이니 속히 조치하라는 것이었다. 2가지 조건을 사무실에 제출하고 48시간 안에 가부간 처단이 없으면 일반 조선인 학생은 동맹휴학을 하겠다 하였는데 학교측은 요지부동이었고 마침내 1921년 6월 4일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들은 전면 파업에 들어간다.
그 맹휴 선언문을 보면 울분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분통이 글자마다 맺힌다. ."구보박사는 말하기를 부정한 행위를 한 자는 반드시 조선인 중에 있는 것은 의심할 바도 아니다. 그는 조선 민족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그의 역사를 돌아 보더라도 분명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말이 조선인 학생인 생등에게 어떠한 찔림이 되었을지는 사실의 진상을 아는 자는 짐작할 만하다. 생등은 박사가 교수할 때에 걸핏하면 조선 민족은 야만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논하는 근거가 박약함에 놀람이 실로 한두 번이 아니었지마는 이는 박사의 천성이 신경질임에 그 허물을 돌리고 생 등은 매우 넓게 생각하여 참고 지내 왔도다.
그 본으로 한 두 가지를 말할진대 일찌기 조선의학회(朝鮮醫學會)에서 조선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과 근육의 발달의 열등임을 증명하여 이것으로써 곧 민족의 야만됨을 단언하다가 어떠한 교수의 반박을 받은 일도 그 하나이오, 또 박사는 겨우 세 명의 조선 사람의 통계로써 교근(咬筋)이 양호한 즉 야만민족이라고 공식으로 의학회상에서 발표하다가 즉석에서 통렬한 질문을 당한 따위도 그 하나이오, 또 해부학상에 문명이라 인정하는 단두(短頭)도 조선인에게 한하여는 야만이라고 하고 소아의 양육상에 관계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어찌 그 근거가 박약하다 이르지 아니 하리오."
요즘은 외국인들에게 장히 모질다 소리 듣고 사는 우리는 90년전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생김새의 특징을 들어 야만족이라 낙인찍혔고 표정의 특이함 때문에 인간같지 않은 종족으로 폄하되었고 무엇이 없어지면 당연히 우리 탓으로 돌려지고 그것은 그 미개한 역사로 증거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구보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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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4일 해골이 부른 동맹휴학
경성의전은 서울의대의 전신이다. 요즘도 내 자식이 서울 의대 다닌다는 사람들 보면 어깨에 뽕이 솟아나는 것이 보이거니와 식민지 조선 경성에서 경성의전생이라 함은 가히 엘리트 중의 초절정 엘리트들이었다. 집안들도 좋았을 것이고 머리는 조선팔도에서 알아주는 수재들만이 모였을터, 그런데 이 경성의전생들이 일치단결하여 1921년 6월 4일 동맹파업을 일으킨다. 발단은 ...5월 26일의 해부학 교실에서 비롯된다. 해부학 강의실이 비좁았던 관계로 학생 전부가 다 들어가지 못하고 특별히 지원하는 사람 중에서 본과 5명 청강생 여자 1명 특별과 4명 함계 10명이 실물 해골을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해부학 교수 구보(久保)가 씩씩거리며 교실로 들이닥친다.
" 해부실에 있는 두개골 한 개가 없어졌다. 이게 웬일이냐 어제 들어갔던 조선 학생들 다 나와!"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이 해골 내놓으라고 덤비는 것도 이상한데 그 해골수집가가 조선인 학생들일 것이라 단정짓는 구보에게 어이가 상실되는 판이었다. 그런데 구보의 입에서 잇따라 튀어나오는 말은 학생들의 어처구니에 이어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리게 하기에 넉넉했다.
"너희들 조선 사람은 원래 해부학상으로 야만에 가까울 뿐 아니라 너희의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정녕 너희들 중에서 가져간 게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라면 초절정 엘리트건 두메산골 목동이건 단군의 자손의 입에서는 똑같은 말이 그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뭐 이런 쪽발이 시키가 다 있어! " 경성의전생들도 격노했다. 그래도 경성의전생들은 범생이들답게 당장 교수 멱살을 잡기보다는 대표자를 뽑아 교수실로 들여보내 민족적 모욕행위에 대해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구보 교수는 원래 신경질적인 품성으로 유명했던 바, 나름 당당하게 들어선 조선 학생 대표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제대로 말을 들어주지도 않으니 대표단은 항의 한 마디 제대로 전달 못하고 쫓겨 나오고 말았다. 이 꼴을 본 학생들의 머리속은 분노로 표백되고 말았다. 구보인지 구두짝인지 너 두고 보자.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경성의전 일본인 학생들이 모임을 가지고 자신들이 해골을 가져갈 이유가 없다고 외치며 조선인들에게 그 혐의를 몰아간 것이다. 드디어 분노에 불이 화악 당겨졌다. 이것들이 선생이나 학생이나 매한가지로 놀고 있어.
조선 학생들도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이 일은 그냥둘수 없고 저것들을 그냥 둘 수 없다. 핏대를 세우려는 판인데 우에다라는 일본인 교수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강당에 들어와 덮어놓고 해산하라고 우겼다. "아니 센세이! 일본 학생들은 맘대로 모여 멋대로 떠드는데 우리는 모이지도 못합니까. 우리가 야만족이라 그렇소?" 그래도 우에다는 막무가내였다. "교수가 나가라면 나가야지 웬 말이 많은가." 마침내 강당은 울부짖는 학생들과 교수들 교직원들이 뒤엉킨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조선 학생들의 기세에 교직원들이 퇴장한 후 조선 학생들은 매우 간단하나 절절한 요구 사항 두 개를 내건다. 1. 구보교수의 말에 조선인은 해부학상으로나 국민성으로나 야만됨을 면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선생은 마땅히 학생 일동에게 그 자세한 연구를 학리상으로 강의하여 들려 줄 것. 그리고 구보교수의 교수는 받지 아니 할 터이니 속히 조치하라는 것이었다. 2가지 조건을 사무실에 제출하고 48시간 안에 가부간 처단이 없으면 일반 조선인 학생은 동맹휴학을 하겠다 하였는데 학교측은 요지부동이었고 마침내 1921년 6월 4일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들은 전면 파업에 들어간다.
그 맹휴 선언문을 보면 울분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분통이 글자마다 맺힌다. ."구보박사는 말하기를 부정한 행위를 한 자는 반드시 조선인 중에 있는 것은 의심할 바도 아니다. 그는 조선 민족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그의 역사를 돌아 보더라도 분명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말이 조선인 학생인 생등에게 어떠한 찔림이 되었을지는 사실의 진상을 아는 자는 짐작할 만하다. 생등은 박사가 교수할 때에 걸핏하면 조선 민족은 야만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논하는 근거가 박약함에 놀람이 실로 한두 번이 아니었지마는 이는 박사의 천성이 신경질임에 그 허물을 돌리고 생 등은 매우 넓게 생각하여 참고 지내 왔도다.
그 본으로 한 두 가지를 말할진대 일찌기 조선의학회(朝鮮醫學會)에서 조선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과 근육의 발달의 열등임을 증명하여 이것으로써 곧 민족의 야만됨을 단언하다가 어떠한 교수의 반박을 받은 일도 그 하나이오, 또 박사는 겨우 세 명의 조선 사람의 통계로써 교근(咬筋)이 양호한 즉 야만민족이라고 공식으로 의학회상에서 발표하다가 즉석에서 통렬한 질문을 당한 따위도 그 하나이오, 또 해부학상에 문명이라 인정하는 단두(短頭)도 조선인에게 한하여는 야만이라고 하고 소아의 양육상에 관계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어찌 그 근거가 박약하다 이르지 아니 하리오."
요즘은 외국인들에게 장히 모질다 소리 듣고 사는 우리는 90년전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생김새의 특징을 들어 야만족이라 낙인찍혔고 표정의 특이함 때문에 인간같지 않은 종족으로 폄하되었고 무엇이 없어지면 당연히 우리 탓으로 돌려지고 그것은 그 미개한 역사로 증거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구보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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