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8년 6월 2일 사상 최악의 월드컵 종료
올림픽 가운데 정치적으로 이용된 최악의 올림픽이라면 베를린 올림픽을 든다. 5공 시절 김영삼이었던가가, 88 올림픽을 베를린 올림픽에 비교해 올림픽에 목숨 걸던 5공 정권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도 있었다. 월드컵 가운데에도 그런 월드컵이 있었다. 가장 정치적으로 오염되었을 뿐 아니라 , 단순한 정치 권력에 대한 부역을 넘어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치다시피 ...했던 검은 월드컵이 있었다. 1978년 6월 2일 폐막된 아르헨티나 월드컵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호르헤 비델라.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그는 그 이후 지속된 ‘더러운 전쟁’ 즉, 반대파들에 대한 잔인한 숙청과 고문, 학살의 총지휘자였다. 그의 치세에 실종된 이들만 해도 최대 3만명을 헤아리는데 죽이다가 죽이다가 나중에는 마취제를 놓고 비행기에 태워서는 대서양에 내던지기까지 했다니 가히 상상을 절하는 시기였다 하겠다. 이런 나라에서도 월드컵이 열린 것이다. 물론 비델라의 목적은 그 10년 뒤 열릴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의 대머리 지도자의 그것과 같았다. ‘축구(스포츠)를 통한 국민의 정치적 관심 소멸’
처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군 장성이긴 했지만 비델라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비델라는 컬러 티븨의 전면 송출 (아르헨티나 국내외 모두)을 원했는데 조직위원장은 그를 거부했다. 이윽고 조직위원장은 ‘좌익 게릴라’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그 뒤를 이어 조직위원장을 맡은 이는 비델라의 심복이었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우승”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입김과 검은 돈이 그를 위한 레드 카펫을 깔기 시작했다.
첫 경기였던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헝가리 대표팀은 어이없이 두 명이 퇴장을 당했고 아르헨티나는 첫승을 챙겼다. 걸출한 스타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 팀과도 대결을 벌였는데, 완벽한 찬스에서 아르헨티나 선수가 손으로 프랑스 선수를 잡아채는 상황에서도 멀거니 지켜보는 주심을 두고서야 천하의 플라티니인들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깐깐하기로 소문났던 심판이 주관한 경기에서는 이탈리아에게 일격을 당한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당시 경기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한 토너멘트가 아니라 2차 리그전의 1위가 결승을 치르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년도 우승팀인 서독, 당대 최강팀 네덜란드, 아르헨티나를 꺾은 전력의 이탈리아가 한 조로 몰린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폴란드 페루를 상대했는데 브라질과는 악전고투 끝에 0대0으로 비겼고 폴란드는 물리쳤다. 결국 조 1위는 브라질과 폴란드 전, 아르헨티나 페루 전의 승패와 골득실 여부에서 결정나게 됐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두 경기가 동시간에 벌어져야 하는 것은 상식일진대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가 ‘먼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복장터지는 브라질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3대1로 페루를 이겼다. 아르헨티나가 결승에 가려면 네 골 차 이상을 이겨야 했다. 여기서 월드컵 사상 최악의 거래가 일어난다.
아르헨티나는 급거 페루에 곡물 수만톤과 수천만 달러의 현금을 ‘원조’하게 되고 페루팀 골키퍼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가 전격 기용되는가 하면, 페루의 공격수들은 유난히 헛발질을 벌이고 최종 수비수가 공격진에 가세하는 희한한 포메이션을 보이게 된다. 결과는 6대0이었다. 브라질 사람들 다혈질이라는 거 순 거짓말이다. 한국 같으면 선전포고를 했을 것이다. 브라질은 그렇게 결승행 티켓을 잃었다.
결승 상대는 네덜란드였다. 4년 전 독일에게 당한 뼈아픈 역전패를 딛고 이번에는 우승을 거머쥐겠다고 나선 오렌지 군단이었지만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의 만행에 항의하며 불참한 요한 크루이프도 아쉬웠고 뭣보다 툭하면 반칙 호각을 불어대는 아르헨티나의 열 두 번째 선수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연장까지 간 끝에 아르헨티나는 3대1로 우승을 차지한다. 역대 최악의 월드컵의 종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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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월 2일 사상 최악의 월드컵 종료
올림픽 가운데 정치적으로 이용된 최악의 올림픽이라면 베를린 올림픽을 든다. 5공 시절 김영삼이었던가가, 88 올림픽을 베를린 올림픽에 비교해 올림픽에 목숨 걸던 5공 정권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도 있었다. 월드컵 가운데에도 그런 월드컵이 있었다. 가장 정치적으로 오염되었을 뿐 아니라 , 단순한 정치 권력에 대한 부역을 넘어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치다시피 ...했던 검은 월드컵이 있었다. 1978년 6월 2일 폐막된 아르헨티나 월드컵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호르헤 비델라.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그는 그 이후 지속된 ‘더러운 전쟁’ 즉, 반대파들에 대한 잔인한 숙청과 고문, 학살의 총지휘자였다. 그의 치세에 실종된 이들만 해도 최대 3만명을 헤아리는데 죽이다가 죽이다가 나중에는 마취제를 놓고 비행기에 태워서는 대서양에 내던지기까지 했다니 가히 상상을 절하는 시기였다 하겠다. 이런 나라에서도 월드컵이 열린 것이다. 물론 비델라의 목적은 그 10년 뒤 열릴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의 대머리 지도자의 그것과 같았다. ‘축구(스포츠)를 통한 국민의 정치적 관심 소멸’
처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군 장성이긴 했지만 비델라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비델라는 컬러 티븨의 전면 송출 (아르헨티나 국내외 모두)을 원했는데 조직위원장은 그를 거부했다. 이윽고 조직위원장은 ‘좌익 게릴라’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그 뒤를 이어 조직위원장을 맡은 이는 비델라의 심복이었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우승”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입김과 검은 돈이 그를 위한 레드 카펫을 깔기 시작했다.
첫 경기였던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헝가리 대표팀은 어이없이 두 명이 퇴장을 당했고 아르헨티나는 첫승을 챙겼다. 걸출한 스타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 팀과도 대결을 벌였는데, 완벽한 찬스에서 아르헨티나 선수가 손으로 프랑스 선수를 잡아채는 상황에서도 멀거니 지켜보는 주심을 두고서야 천하의 플라티니인들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깐깐하기로 소문났던 심판이 주관한 경기에서는 이탈리아에게 일격을 당한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당시 경기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한 토너멘트가 아니라 2차 리그전의 1위가 결승을 치르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년도 우승팀인 서독, 당대 최강팀 네덜란드, 아르헨티나를 꺾은 전력의 이탈리아가 한 조로 몰린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폴란드 페루를 상대했는데 브라질과는 악전고투 끝에 0대0으로 비겼고 폴란드는 물리쳤다. 결국 조 1위는 브라질과 폴란드 전, 아르헨티나 페루 전의 승패와 골득실 여부에서 결정나게 됐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두 경기가 동시간에 벌어져야 하는 것은 상식일진대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가 ‘먼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복장터지는 브라질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3대1로 페루를 이겼다. 아르헨티나가 결승에 가려면 네 골 차 이상을 이겨야 했다. 여기서 월드컵 사상 최악의 거래가 일어난다.
아르헨티나는 급거 페루에 곡물 수만톤과 수천만 달러의 현금을 ‘원조’하게 되고 페루팀 골키퍼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가 전격 기용되는가 하면, 페루의 공격수들은 유난히 헛발질을 벌이고 최종 수비수가 공격진에 가세하는 희한한 포메이션을 보이게 된다. 결과는 6대0이었다. 브라질 사람들 다혈질이라는 거 순 거짓말이다. 한국 같으면 선전포고를 했을 것이다. 브라질은 그렇게 결승행 티켓을 잃었다.
결승 상대는 네덜란드였다. 4년 전 독일에게 당한 뼈아픈 역전패를 딛고 이번에는 우승을 거머쥐겠다고 나선 오렌지 군단이었지만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의 만행에 항의하며 불참한 요한 크루이프도 아쉬웠고 뭣보다 툭하면 반칙 호각을 불어대는 아르헨티나의 열 두 번째 선수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연장까지 간 끝에 아르헨티나는 3대1로 우승을 차지한다. 역대 최악의 월드컵의 종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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