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9년 5월 30일 안공근의 실종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상징같은 존재라면 단연 안중근 의사다. 침략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도 사건이려니와, 그 후 재판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격렬한 웅변, 그리고 일본 간수들과 변호인까지 감동시킨 고매한 인격과 뛰어난 경륜은 독립운동가의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 안씨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가운데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당시 평안도 진남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 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 이후 온 가족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도왔던 빌렘 신부를 따라 독일에 유학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 됐고, 무려 6개 국어에 통달한 임시정부의 국제통이자 정보통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김구의 측근이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 등을 배출한 한인애국단의 핵심 간부였다.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원으로서 거사를 완수할 것을 선서한 곳이 바로 안공근의 집이었고 태극기 앞에 선 윤봉길의 마지막 사진은 안공근의 아들 안낙생이 찍은 것이었다. 또 그는 여러 무술에 능했던 바, 친일 행각을 벌이는 조선인들을 직접 처단하는 암살 조직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1939년 5월 30일 갑자기 증발했다. 치과에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선 후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도 찾지 못했다. 안공근의 딸은 중화민국 주석의 아내 송미령에게 진상을 밝혀 줄 것을 호소했지만 중화민국 정보기관의 수사도 헛되이 안공근은 영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납치 살해한 범인들의 정체는 대개 두 방향으로 모아졌다. 첫째는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국제 간첩 나북검의 소행이다. 일제 밀정을 추적하던 안공근이 나북검이 일제 밀정과 만나 정보를 전달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이 사실을 안 나북검이 상해에서 중경까지 추적하여 안공근과 교분이 있던 중국 관리 조웅으로 하여금 안공근을 불러내게 한 후 살해하여 폐광에 버렸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범 김구 또는 임시정부 내 기호계열의 소행이라는 설이다.
기실 백범 김구는 대외가 아닌 독립운동 내부의 다툼에 있어서도 암살 등의 수단을 즐겨 활용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제공한 공금유용을 이유로 중견 독립운동가를 없앤 것이 김구였고, 그 외에도 임정 내의 반대 세력이나 좌익들과는 피차 살벌한 음모전을 펼치기 일쑤였다. 이 와중에 안공근이 공금을 유용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김구와 소원해지고, 안공근 또한 김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김구의 측군이 먼저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김구가 자신의 최측근으로 오래 활동했던 안공근, 개인적으로 사돈간이기까지 한 안공근이 한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기로서니 ‘제거’까지 시켰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김구가 안공근을 크게 힐난했던 것은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만 모시고 왔던 일에서 비롯된다. 김구는 안공근을 다시 들여보내 안 의사 가족을 모시고 오게 하려 했지만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만 겨우 데리고 탈출했다. 이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에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되지만 김구는 의외로 단호했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김구의 우려가 아주 틀리지는 않았던 것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 안중근의 가족들은 그대로 ‘내선일체’의 표본으로 이용되어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를 하며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아버지가 구름을 치며 통곡할 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안준생은 이 일로 ‘호부의 견자’로 치부된 가운데 한국전쟁통에 쓸쓸히 죽었고, 일본에 투항하기를 종용했던 안중근의 사위 황일청은 해방 후 피살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939년 5월 30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안공근의 자식들 가운데 3남인 안민생은 평화통일 운동을 하다가 5.16 혁명 후 10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장남 안우생은 김구의 북한 방문 때 함께 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반역과 지조와 좌와 우에 걸쳐진 안중근 가족들의 가족사는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닐는지.
1939년 5월 30일 안공근의 실종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상징같은 존재라면 단연 안중근 의사다. 침략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도 사건이려니와, 그 후 재판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격렬한 웅변, 그리고 일본 간수들과 변호인까지 감동시킨 고매한 인격과 뛰어난 경륜은 독립운동가의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 안씨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가운데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당시 평안도 진남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 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 이후 온 가족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도왔던 빌렘 신부를 따라 독일에 유학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 됐고, 무려 6개 국어에 통달한 임시정부의 국제통이자 정보통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김구의 측근이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 등을 배출한 한인애국단의 핵심 간부였다.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원으로서 거사를 완수할 것을 선서한 곳이 바로 안공근의 집이었고 태극기 앞에 선 윤봉길의 마지막 사진은 안공근의 아들 안낙생이 찍은 것이었다. 또 그는 여러 무술에 능했던 바, 친일 행각을 벌이는 조선인들을 직접 처단하는 암살 조직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1939년 5월 30일 갑자기 증발했다. 치과에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선 후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도 찾지 못했다. 안공근의 딸은 중화민국 주석의 아내 송미령에게 진상을 밝혀 줄 것을 호소했지만 중화민국 정보기관의 수사도 헛되이 안공근은 영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납치 살해한 범인들의 정체는 대개 두 방향으로 모아졌다. 첫째는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국제 간첩 나북검의 소행이다. 일제 밀정을 추적하던 안공근이 나북검이 일제 밀정과 만나 정보를 전달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이 사실을 안 나북검이 상해에서 중경까지 추적하여 안공근과 교분이 있던 중국 관리 조웅으로 하여금 안공근을 불러내게 한 후 살해하여 폐광에 버렸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범 김구 또는 임시정부 내 기호계열의 소행이라는 설이다.
기실 백범 김구는 대외가 아닌 독립운동 내부의 다툼에 있어서도 암살 등의 수단을 즐겨 활용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제공한 공금유용을 이유로 중견 독립운동가를 없앤 것이 김구였고, 그 외에도 임정 내의 반대 세력이나 좌익들과는 피차 살벌한 음모전을 펼치기 일쑤였다. 이 와중에 안공근이 공금을 유용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김구와 소원해지고, 안공근 또한 김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김구의 측군이 먼저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김구가 자신의 최측근으로 오래 활동했던 안공근, 개인적으로 사돈간이기까지 한 안공근이 한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기로서니 ‘제거’까지 시켰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김구가 안공근을 크게 힐난했던 것은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만 모시고 왔던 일에서 비롯된다. 김구는 안공근을 다시 들여보내 안 의사 가족을 모시고 오게 하려 했지만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만 겨우 데리고 탈출했다. 이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에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되지만 김구는 의외로 단호했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김구의 우려가 아주 틀리지는 않았던 것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 안중근의 가족들은 그대로 ‘내선일체’의 표본으로 이용되어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를 하며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아버지가 구름을 치며 통곡할 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안준생은 이 일로 ‘호부의 견자’로 치부된 가운데 한국전쟁통에 쓸쓸히 죽었고, 일본에 투항하기를 종용했던 안중근의 사위 황일청은 해방 후 피살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939년 5월 30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안공근의 자식들 가운데 3남인 안민생은 평화통일 운동을 하다가 5.16 혁명 후 10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장남 안우생은 김구의 북한 방문 때 함께 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반역과 지조와 좌와 우에 걸쳐진 안중근 가족들의 가족사는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