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886년 5월 31일 피어난 배꽃 네 번째 배꽃
메리 벤턴이라는 이름에서 얘기를 시작해보자. 1832년 미국 메사츄세츠.주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나이 스물 하나에 결혼하여 스크랜턴이라는 성을 얻는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그녀는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은 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일생의 결단을 한다. 예일 의대를 나온 의사 아들과 어머니 모두 선교사가 되어 듣도보도 못한 은자의 왕국 조선으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 스크랜튼의 나이 쉰을 넘긴 때였다.
그녀가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885년이었다. 갑신정변의 회오리가 몰아친 것이 그 전해였고 임오군란의 분노가 터진 것이 3년 전이었다. 조선의 정정은 극히 불안했고 외국인에 대한 눈길은 고운 쪽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많았다. 굳은 각오를 하고 코리아를 찾은 스크랜튼 가족도 일본에 머물며 형세를 지켜볼 정도였으니.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온 믿음의 화신들에게 현해탄은 별 것이 못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한양에 입성한다. 가족이 정착한 것은 서울 주재 외국 공관과 선교사들의 근거지인 정동이었다. 거기서 스트랜튼 부인은 특별한 아이디어 하나를 얻는다.
"그해 10월 정동의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천여평을 매입했다.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달 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 이 애기는 훗 날 이화여전의 교장이 된 앨리스 아펜젤러인데 그날 밤은 어찌나 추웠던지 애기를 자리에 눕히지 못하고 밤새 스크랜턴 부인이 안고 재웠다. 이때 부인은 이렇듯 추운 방에서 고생하 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애기들을 위해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던 것이다" (이화 70년사)
여자는 온전한 사람으로 쳐 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글을 비하해서 여자나 쓰는 글이라 하여 암클이라고 군시렁대던 나라였지 않은가. 그런 세상에서 조선 여자를 그것도 노란머리 푸른눈의 양도깨비 외국인이 가르친다는 것은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면.부녀자들은 창문을 닫고 숨었고 아이들은 울며 달아났다." (스크랜튼 부인)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디에든 진취적인 인물이 있어 물꼬를 트는 법, 외국어를 배워 장차 왕비의 통역이 되어 보겠다는 어느 관리의 소실이 학당 문을 두드린 것이다. 1886년 5월 31일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성은 남산에서 돌 던지면 열에 서넛은 맞을 김씨였던 이 '김부인'은 그로부터 오랜 역사를 이어갈 이화학당, 이화학교의 첫 학생으로 기록되지만 3개월만에 병으로 학업(?)을 그만둬 버렸다. 두 번째 학생은 "절대 미국으로 데려가니 않는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하고서야 맡을 수 있었던 가난한 집 딸아이였고 세번째 학생은 버려진 콜렐라 환자들 틈에서 거둬온 모녀 중 딸아이였다. 스크랜튼이 이들을 데려오는 일을 도왔던 인부들은 남편도 버린 모녀를 돕는 스크랜튼 부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삯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힘겹게 학생들을 모시면서 꾸려가던 이화학당에 네 번째로 피어난 배꽃이 있었다. 이름은 촌스러움의 극치이지만 그 성정은 조선 여성의 장점은 다 갖고 태어난 듯한 김점동이라는 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펜 젤러 선교사의 집에서 잡무를 보던 이였기로 양도깨비들에 대한 공포 없이 열 살의 나이에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영특하고 총명했던 그녀는 금새 외국어를 깨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의 통역 노릇을 하는데 거기서 그녀는 또 한 번의 알깨기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여의사 로제타가 수술로 언청이를 훌륭하게 고쳐내는 것을 목격한 일이었다. 원래는.의술에 큰 관심이 없던 그녀는 이 일로 의학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의사가 되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혼인하는 방식도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조선식 결혼 적령기인 열일곱살에, 김점동은 로제타 선생의 남편인 윌리엄 홀의 일을 돕던 성실한 청년 박유산을 소개 받게 된다. 그런데 김점동의 집에서 박유산의 신분이 낮다고 반대했는데 김점동은 뜻을 굽히지 않고 박유산과 결혼한다. 이 선택이 탁월한 것이었음은 곧 밝혀진다.
김점동은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 공부를 했다. 나이 열 세 살에 세례를 받은 이후 그녀는 본명 김점동보다 세례명 에스더로 즐겨 불리웠고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니 미세스 박, 즉 박에스더가 된 그녀가 의사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의 후원자 로제타 선생의 친정 농장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그를 뒷바라지한다.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박에스더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00년 6월이었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학위를 받기 20여일 전, 1900년 5월 28일 남편 박유산은 고된 노동 끝에 얻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기쁜 일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고, 그 다음으로 기쁜 일은 에스더 당신을 만난 일이라” 하며 묵묵히 일하고 그 돈으로 자신의 공부를 돕던 남편의 죽음 앞에서 김점동이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박에스더는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철석같이 했던 것 같다. 안정된 미국의 의사 자리를 마다하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통역으로 근무했던 보구여관 (최초의 여성 병원) 의사가 되어 병이 들어도 의사에게 보일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을 도왔고, 열 달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 후 역시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의 기홀 병원으로 옮긴 뒤에는 쉬지 않고 인근의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료 진료 활동을 펼치는 한편 간호사 양성소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10여년을 보낸 뒤 박에스더는 그녀를 의사로 만들기 위해 농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다가 남편을 쓰러뜨린 바로 그 병마, 결핵에 걸려 세상을 뜬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결핵으로 죽어간 의사 부부를 안타까와하던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양성소를 세우는 한편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최초로 발행하게 된다.
1886년 5월 31일 한 배움의 터전이 빈약하게 세워졌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배울 사람을 간청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네 번째 배꽃은 짧으나 화려하게 피어나 그 이후 100년이 넘는 역사를 비춘다. 언젠가 이화여대에서 “이대의 사위들”이라는 거창한 행사를 기획했을 때 고관대작과 온갖 재벌들과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총출동할 것이라는 기사를 본 바 있는데, 나는 그 모두보다도 박유산의 이름을 앞에 두고 싶다. 아내의 꿈을 위하여 자신을 버린 남자, 그만큼 자랑스런 ‘이화의 사위’가 또 어디 있으려고. 이화여대 창립 126주년에 김점동, 박에스더와 박유산을 생각한다.
1886년 5월 31일 피어난 배꽃 네 번째 배꽃
메리 벤턴이라는 이름에서 얘기를 시작해보자. 1832년 미국 메사츄세츠.주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나이 스물 하나에 결혼하여 스크랜턴이라는 성을 얻는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그녀는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은 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일생의 결단을 한다. 예일 의대를 나온 의사 아들과 어머니 모두 선교사가 되어 듣도보도 못한 은자의 왕국 조선으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 스크랜튼의 나이 쉰을 넘긴 때였다.
그녀가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885년이었다. 갑신정변의 회오리가 몰아친 것이 그 전해였고 임오군란의 분노가 터진 것이 3년 전이었다. 조선의 정정은 극히 불안했고 외국인에 대한 눈길은 고운 쪽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많았다. 굳은 각오를 하고 코리아를 찾은 스크랜튼 가족도 일본에 머물며 형세를 지켜볼 정도였으니.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온 믿음의 화신들에게 현해탄은 별 것이 못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한양에 입성한다. 가족이 정착한 것은 서울 주재 외국 공관과 선교사들의 근거지인 정동이었다. 거기서 스트랜튼 부인은 특별한 아이디어 하나를 얻는다.
"그해 10월 정동의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천여평을 매입했다.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달 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 이 애기는 훗 날 이화여전의 교장이 된 앨리스 아펜젤러인데 그날 밤은 어찌나 추웠던지 애기를 자리에 눕히지 못하고 밤새 스크랜턴 부인이 안고 재웠다. 이때 부인은 이렇듯 추운 방에서 고생하 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애기들을 위해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던 것이다" (이화 70년사)
여자는 온전한 사람으로 쳐 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글을 비하해서 여자나 쓰는 글이라 하여 암클이라고 군시렁대던 나라였지 않은가. 그런 세상에서 조선 여자를 그것도 노란머리 푸른눈의 양도깨비 외국인이 가르친다는 것은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면.부녀자들은 창문을 닫고 숨었고 아이들은 울며 달아났다." (스크랜튼 부인)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디에든 진취적인 인물이 있어 물꼬를 트는 법, 외국어를 배워 장차 왕비의 통역이 되어 보겠다는 어느 관리의 소실이 학당 문을 두드린 것이다. 1886년 5월 31일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성은 남산에서 돌 던지면 열에 서넛은 맞을 김씨였던 이 '김부인'은 그로부터 오랜 역사를 이어갈 이화학당, 이화학교의 첫 학생으로 기록되지만 3개월만에 병으로 학업(?)을 그만둬 버렸다. 두 번째 학생은 "절대 미국으로 데려가니 않는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하고서야 맡을 수 있었던 가난한 집 딸아이였고 세번째 학생은 버려진 콜렐라 환자들 틈에서 거둬온 모녀 중 딸아이였다. 스크랜튼이 이들을 데려오는 일을 도왔던 인부들은 남편도 버린 모녀를 돕는 스크랜튼 부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삯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힘겹게 학생들을 모시면서 꾸려가던 이화학당에 네 번째로 피어난 배꽃이 있었다. 이름은 촌스러움의 극치이지만 그 성정은 조선 여성의 장점은 다 갖고 태어난 듯한 김점동이라는 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펜 젤러 선교사의 집에서 잡무를 보던 이였기로 양도깨비들에 대한 공포 없이 열 살의 나이에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영특하고 총명했던 그녀는 금새 외국어를 깨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의 통역 노릇을 하는데 거기서 그녀는 또 한 번의 알깨기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여의사 로제타가 수술로 언청이를 훌륭하게 고쳐내는 것을 목격한 일이었다. 원래는.의술에 큰 관심이 없던 그녀는 이 일로 의학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의사가 되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혼인하는 방식도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조선식 결혼 적령기인 열일곱살에, 김점동은 로제타 선생의 남편인 윌리엄 홀의 일을 돕던 성실한 청년 박유산을 소개 받게 된다. 그런데 김점동의 집에서 박유산의 신분이 낮다고 반대했는데 김점동은 뜻을 굽히지 않고 박유산과 결혼한다. 이 선택이 탁월한 것이었음은 곧 밝혀진다.
김점동은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 공부를 했다. 나이 열 세 살에 세례를 받은 이후 그녀는 본명 김점동보다 세례명 에스더로 즐겨 불리웠고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니 미세스 박, 즉 박에스더가 된 그녀가 의사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의 후원자 로제타 선생의 친정 농장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그를 뒷바라지한다.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박에스더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00년 6월이었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학위를 받기 20여일 전, 1900년 5월 28일 남편 박유산은 고된 노동 끝에 얻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기쁜 일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고, 그 다음으로 기쁜 일은 에스더 당신을 만난 일이라” 하며 묵묵히 일하고 그 돈으로 자신의 공부를 돕던 남편의 죽음 앞에서 김점동이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박에스더는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철석같이 했던 것 같다. 안정된 미국의 의사 자리를 마다하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통역으로 근무했던 보구여관 (최초의 여성 병원) 의사가 되어 병이 들어도 의사에게 보일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을 도왔고, 열 달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 후 역시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의 기홀 병원으로 옮긴 뒤에는 쉬지 않고 인근의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료 진료 활동을 펼치는 한편 간호사 양성소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10여년을 보낸 뒤 박에스더는 그녀를 의사로 만들기 위해 농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다가 남편을 쓰러뜨린 바로 그 병마, 결핵에 걸려 세상을 뜬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결핵으로 죽어간 의사 부부를 안타까와하던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양성소를 세우는 한편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최초로 발행하게 된다.
1886년 5월 31일 한 배움의 터전이 빈약하게 세워졌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배울 사람을 간청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네 번째 배꽃은 짧으나 화려하게 피어나 그 이후 100년이 넘는 역사를 비춘다. 언젠가 이화여대에서 “이대의 사위들”이라는 거창한 행사를 기획했을 때 고관대작과 온갖 재벌들과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총출동할 것이라는 기사를 본 바 있는데, 나는 그 모두보다도 박유산의 이름을 앞에 두고 싶다. 아내의 꿈을 위하여 자신을 버린 남자, 그만큼 자랑스런 ‘이화의 사위’가 또 어디 있으려고. 이화여대 창립 126주년에 김점동, 박에스더와 박유산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