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동서로 분열되고 또 정황제니 부황제니 팔뚝걷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로마 제국을 통일한 후 천년의 수도 로마를 제쳐 두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 유럽의 끝이자 아시아의 시작,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제국이 쓰러져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된 뒤에도 로마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의 요새화된 성벽 속에서 천년의 수명을 더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1453년 봄 한때 이탈리아로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했던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성벽 안으로 쪼그라들었고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셀주크 투르크인을 공포에 질리게 했던 중장기병대의 위력은 바람같은 전설이 된지 오래였다. 성벽 밖에는 떠오르는 태양같은 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대군이 그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하에 콘스탄티노플을 들이치고 있었다.
투르크 제국의 기분 나쁜 '관행'대로 왕좌에 오르자마자 자기 동생들부터 없앴던 술탄 메메드는 이번에야말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지워버리겠다는 듯 작심을 하고 고립된 성을 몰아부쳤다. 자신이 개발한 대표가 견고한 성벽을 부술 수 있노라 자신하는 헝가리 출신의 기독교인이 나타났을 때 메메드는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마몬을 섬기는 것이 분명했던 헝가리인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할만큼의 재물로 그 대포를 확보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메메드의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는 아무래도 배를 산으로 옮긴 일이지 싶다. 콘스탄티노플을 면한 바다의 입구는 빈틈없이 드리운 쇠사슬과 함대들로 수비되고 있었는데 메메드는 황소와 말과 사람을 총동원하여 배들을 끌고 산 넘고 들 지나 쇠사슬의 뒤편 바다에 부려 놓은 것이다.
성벽에 늘어선 몇 안되는 비잔틴 제국의 용사들과 서유럽 용병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이 사수하고자 하는 천년제국의 종말을 직감했다. 저렇게까지 정복욕을 불태우는 젊은 무슬림 군주를 제어할 방법은 예수가 부활하여 천군천사를 이끌고 오는 수 밖에는 없었다.
도시를 완벽하게 포위한 15만의 투르크 대군은 메카를 향해 기도했다. 그 허다한 군상들이 한 방향을 향해 엎드리고 코를 바닥에 박는 모습은 수비군에게는 또 하나의 공포였다. 경건한 침묵은 그 뒤에 다가설 살육의 함성보다 컸고 그들의 일치된 머리 숙임은 칼질보다도 두렵게 눈가를 파고들었다. 메메드 2세가 3일간의 야그마 즉 약탈을 허했다는 것은 이미 수비군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1453년 5월 29일이 온지 얼마 안 되던 한밤중,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어둠과 사람의 바다 앞에 고립된 섬 같은 성벽 앞으로 함성의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그런데 공격의 선봉에 선 이들의 복장과 장비는 좀 특이했다. 그들은 투르크군 특유의 반월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갑옷 같은 것은 쇳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그들은 투르크의 '비정규군' 바슈바조우크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무슬림도 있었지만 그리스부터 독일까지 다양각색의 유럽 국가에서 온 기독교인들도 부지기수였다. 무슨 이유로든지 고향을 떠나야 했던, 자신이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가보다는 눈 앞의 전리품이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었던 이 불우한 군대에게 투르크가 가장 풍족하게 지급했던 무기는 다름아닌 공성용 사다리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헌병 부대를 배치해서 물러서는 바시바조우크들을 가차없이 베어넘겼다.
그들의 임무는 소모전이었다. 생활 용어로 말하면 "적의 총알을 낭비케 하는 총알받이"였다.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다가 화살이나 끓는물의 희생자로 바뀌어 해자를 메우고 적군을 피로하게 하고 무기를 고갈시키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술탄 메메드에게는 아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치러야 하는" 고깃값에 지나지 않았다. 갑옷도 줄 필요가 없고 무기라면 사다리 정도만 지급하면 되는 싸구려 병력은 교대 병력 없이 고군분투하던 비잔틴 수비군의 기세를 약화시키는데 효율만점의 도구였다. 마치 이윤이라는 성벽을 향해 돌격하는 '비정규직' 군단처럼.
메메드가 그들의 희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오늘날 비정규직 부리는 회장님들 생각하면 금새 알 수 있으므로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바시바조우크 부대 뒤에서 돌격 명령을 기다리던 정규군들, 아나톨리아 부대와 술탄 직속의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 부대에게 바시바조우크들의 돌격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하는 점이다. 술탄과 같은 마음으로 "승리를 위해서 저런 건 희생도 아니야."라고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간혹 물러서는 바시바조우크들을 베어 넘겼을까. 아니면 저들이 다 죽으면 이제 내가 죽겠지 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처자를 떠올리며 눈물지었을까. 쟤들은 바시바조우크고 나는 예니체리다~~ 하면서 긍지 서린 어깨를 펴고 방패를 두들기고 있었을까. 결국 술탄의 장기판의 말들에 불과했던 그들은 어떻게 싸웠고,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바시바조우크들의 시체를 넘어 아나톨리아 보병들과 예니체리들의 돌격까지 이어졌고, 투르크군은 미처 수비군이 잠그지 못한 성문 하나를 장악한다. 그것은 한 제국의 몰락의 물꼬와도 같았다. 십자가 깃발 대신 초승달의 깃발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나부끼면서 한 역사가 저물었다.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는 드물게 용감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도시의 창건자와 이름이 같은) 는 마지막까지 칼을 들고 싸우다 시신도 없이 시체더미 중의 하나로 생을 마쳤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메메드를 예니체리들이 호위했고 그들은 거치적거리는 바시바조우크들의 시신들을 발길로 걷어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동서로 분열되고 또 정황제니 부황제니 팔뚝걷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로마 제국을 통일한 후 천년의 수도 로마를 제쳐 두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 유럽의 끝이자 아시아의 시작,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제국이 쓰러져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된 뒤에도 로마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의 요새화된 성벽 속에서 천년의 수명을 더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1453년 봄 한때 이탈리아로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했던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성벽 안으로 쪼그라들었고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셀주크 투르크인을 공포에 질리게 했던 중장기병대의 위력은 바람같은 전설이 된지 오래였다. 성벽 밖에는 떠오르는 태양같은 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대군이 그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하에 콘스탄티노플을 들이치고 있었다.
투르크 제국의 기분 나쁜 '관행'대로 왕좌에 오르자마자 자기 동생들부터 없앴던 술탄 메메드는 이번에야말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지워버리겠다는 듯 작심을 하고 고립된 성을 몰아부쳤다. 자신이 개발한 대표가 견고한 성벽을 부술 수 있노라 자신하는 헝가리 출신의 기독교인이 나타났을 때 메메드는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마몬을 섬기는 것이 분명했던 헝가리인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할만큼의 재물로 그 대포를 확보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메메드의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는 아무래도 배를 산으로 옮긴 일이지 싶다. 콘스탄티노플을 면한 바다의 입구는 빈틈없이 드리운 쇠사슬과 함대들로 수비되고 있었는데 메메드는 황소와 말과 사람을 총동원하여 배들을 끌고 산 넘고 들 지나 쇠사슬의 뒤편 바다에 부려 놓은 것이다.
성벽에 늘어선 몇 안되는 비잔틴 제국의 용사들과 서유럽 용병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이 사수하고자 하는 천년제국의 종말을 직감했다. 저렇게까지 정복욕을 불태우는 젊은 무슬림 군주를 제어할 방법은 예수가 부활하여 천군천사를 이끌고 오는 수 밖에는 없었다.
도시를 완벽하게 포위한 15만의 투르크 대군은 메카를 향해 기도했다. 그 허다한 군상들이 한 방향을 향해 엎드리고 코를 바닥에 박는 모습은 수비군에게는 또 하나의 공포였다. 경건한 침묵은 그 뒤에 다가설 살육의 함성보다 컸고 그들의 일치된 머리 숙임은 칼질보다도 두렵게 눈가를 파고들었다. 메메드 2세가 3일간의 야그마 즉 약탈을 허했다는 것은 이미 수비군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1453년 5월 29일이 온지 얼마 안 되던 한밤중,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어둠과 사람의 바다 앞에 고립된 섬 같은 성벽 앞으로 함성의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그런데 공격의 선봉에 선 이들의 복장과 장비는 좀 특이했다. 그들은 투르크군 특유의 반월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갑옷 같은 것은 쇳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그들은 투르크의 '비정규군' 바슈바조우크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무슬림도 있었지만 그리스부터 독일까지 다양각색의 유럽 국가에서 온 기독교인들도 부지기수였다. 무슨 이유로든지 고향을 떠나야 했던, 자신이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가보다는 눈 앞의 전리품이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었던 이 불우한 군대에게 투르크가 가장 풍족하게 지급했던 무기는 다름아닌 공성용 사다리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헌병 부대를 배치해서 물러서는 바시바조우크들을 가차없이 베어넘겼다.
그들의 임무는 소모전이었다. 생활 용어로 말하면 "적의 총알을 낭비케 하는 총알받이"였다.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다가 화살이나 끓는물의 희생자로 바뀌어 해자를 메우고 적군을 피로하게 하고 무기를 고갈시키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술탄 메메드에게는 아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치러야 하는" 고깃값에 지나지 않았다. 갑옷도 줄 필요가 없고 무기라면 사다리 정도만 지급하면 되는 싸구려 병력은 교대 병력 없이 고군분투하던 비잔틴 수비군의 기세를 약화시키는데 효율만점의 도구였다. 마치 이윤이라는 성벽을 향해 돌격하는 '비정규직' 군단처럼.
메메드가 그들의 희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오늘날 비정규직 부리는 회장님들 생각하면 금새 알 수 있으므로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바시바조우크 부대 뒤에서 돌격 명령을 기다리던 정규군들, 아나톨리아 부대와 술탄 직속의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 부대에게 바시바조우크들의 돌격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하는 점이다. 술탄과 같은 마음으로 "승리를 위해서 저런 건 희생도 아니야."라고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간혹 물러서는 바시바조우크들을 베어 넘겼을까. 아니면 저들이 다 죽으면 이제 내가 죽겠지 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처자를 떠올리며 눈물지었을까. 쟤들은 바시바조우크고 나는 예니체리다~~ 하면서 긍지 서린 어깨를 펴고 방패를 두들기고 있었을까. 결국 술탄의 장기판의 말들에 불과했던 그들은 어떻게 싸웠고,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바시바조우크들의 시체를 넘어 아나톨리아 보병들과 예니체리들의 돌격까지 이어졌고, 투르크군은 미처 수비군이 잠그지 못한 성문 하나를 장악한다. 그것은 한 제국의 몰락의 물꼬와도 같았다. 십자가 깃발 대신 초승달의 깃발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나부끼면서 한 역사가 저물었다.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는 드물게 용감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도시의 창건자와 이름이 같은) 는 마지막까지 칼을 들고 싸우다 시신도 없이 시체더미 중의 하나로 생을 마쳤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메메드를 예니체리들이 호위했고 그들은 거치적거리는 바시바조우크들의 시신들을 발길로 걷어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