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2년 5월 하순 거제도와 이학구
지난 연휴에 경주와 거제를 다녀왔다. 아름다운 섬 거제에는 볼 것도 많지만 그 가운데 전혀 아름답지 않은 역사의 흔적 하나가 압도적인 규모로 재연되어 있다. 그것은 포로수용소 공원이다. 거제도를 세계 만방에 알린 것은 바로 6.25당시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로서였다. 급증하는 포로 수용을 위해 수용소를 확보해야 했던 미군은 처음에는 제주도를 검토했지만 최고 17만명...에 이른 포로를 제주도에 풀어놓을 경우 원래 인구에 더하여 포화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점과 보급의 어려움 등을 들어 포기했고 한국 제 2의 섬 거제도를 포로수용소로 만든다.
1952년 5월 하순, 즉 내가 아이들과 함께 거제를 돌아보던 때로부터 60년을 거슬러 올라간 무렵 거제도 포로수용소 인근에는 일대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장비를 동원하여 포로수용소 근처의 민가들을 깡그리 때려 부수고 있었다. 이유는 포로수용소장 ‘황소’ 보트너의 명령이었다. “24시간 내에 민간인들은 외지로 이주하라.” 5월 내내 지속되고 있던 포로수용소 사태에 대한 대책 중 하나였다. 인민군 포로들은 간도 크게도 포로수용소장 돗드 준장을 납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그 후임 콜슨 준장이 포로들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렇게 만만하면 ‘미쿡’이지 미국이 아니다.
미군은 즉시 돗드와 콜슨의 별 견장을 어깨에서 떼내고 대령으로 불명예 제대시켰다. 그리고 투입한 것이 단호하기로 이름난 (북한 포로들 입장에서는 무섭기로 소문난) 황소 보트너였다. 보트너는 무장 병력을 동원하여 반항하는 포로들을 진압하고 휘날리던 인공기를 땅에 팽개쳤으며 인공기를 게양하는 포로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가 내린 명령 중의 하나는 수용소 인근 민가 철거였다. 북한은 포로수용소 내 친공 포로들에게 제2전선 구축을 명령하고 위장 항복을 통해 끄나풀을 수용소에 진입시키는가 하면 피난민으로 위장한 공작원까지 거제에 침투시켜 포로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보트너는 그에 대한 대책으로 “민가 전부 철거”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1116세대 1600 동의 민가가 며칠 사이에 사라졌다.
하루 아침에 고향 마을을 "24시간 안에 떠나야 했던“ 거제도민들의 아픔을 떠올려 보는 와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덧붙여 떠올라 왔다. 북한 인민군 총좌 (우리 계급으로 하면 준장급) 이학구라는 사람이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친공포로들의 형식상 수괴였다. 일단 그는 포로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 경로를 보면 그 ‘수괴’ 지목이 자연스럽지만은 않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고 인민군들 역시 ‘멘탈 붕괴’에 빠져 허물어지던 그 즈음, 자신이 참모장으로 있던 사단의 사단장을 권총으로 쏘고 남한으로 넘어온다. 아마도 결사항전을 외치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단장에 대한 반항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의 귀순의 의미는 계급도 계급이거니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작전 명령서에서 더 큰 의의를 지닌다. 그 작전 명령서는 6.25가 북한에 의해 촉발된 전면전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미 아군의 사단장을 쏘고 적의 편에 항복한 고위 장교는 왜 또 다시 자신이 등졌던 편을 위해 싸워야 했을까. 우선 그는 한국군 장교로 편입되기를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가 된 마당에 그와 맞바꾸거나 최소한 급이 맞는 포로를 세팅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는 포로로 생활해야 했다. 그런 불만도 있었을 것이고, 혹자는 친공 포로들의 무자비한 협박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거제도 앞바다에는 쏟아붓는 똥통 속에서 나온 사람의 팔다리들이 둥둥 떠다녔다고 하니 협박은 매우 걸쭉하고도 차가왔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지켜 봤던 인사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만 아니라면 매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었던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지향점을 바꾼다. 물론 실질적인 지령과 조직은 북한에서 파견된 이들이 도맡아 했지만 이학구는 총좌로서 친공포로들의 구심이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될대로 되라”? “미워도 다시한 번? ” “그래도 내이름은 공산당” ?
이학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송환 포로 명단에 끼었고, 북한으로 돌아가지만 머지않아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조국이었지만 조국은 그에게 따뜻한 곳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는 남도 북도 안심하고 찾을 수 없게 된 사람이었다. 사단장을 쏘고 적에게 투항한 참모장을 북한이 어떻게 환영할 것이며, 친공포로들의 수괴를 어찌 대한민국의 품에 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남도 북도 달갑지 않아 제 3국을 택했던 76인의 포로들 틈에도 이학구는 끼지 못했다
1952년 5월 하순 거제도와 이학구
지난 연휴에 경주와 거제를 다녀왔다. 아름다운 섬 거제에는 볼 것도 많지만 그 가운데 전혀 아름답지 않은 역사의 흔적 하나가 압도적인 규모로 재연되어 있다. 그것은 포로수용소 공원이다. 거제도를 세계 만방에 알린 것은 바로 6.25당시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로서였다. 급증하는 포로 수용을 위해 수용소를 확보해야 했던 미군은 처음에는 제주도를 검토했지만 최고 17만명...에 이른 포로를 제주도에 풀어놓을 경우 원래 인구에 더하여 포화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점과 보급의 어려움 등을 들어 포기했고 한국 제 2의 섬 거제도를 포로수용소로 만든다.
1952년 5월 하순, 즉 내가 아이들과 함께 거제를 돌아보던 때로부터 60년을 거슬러 올라간 무렵 거제도 포로수용소 인근에는 일대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장비를 동원하여 포로수용소 근처의 민가들을 깡그리 때려 부수고 있었다. 이유는 포로수용소장 ‘황소’ 보트너의 명령이었다. “24시간 내에 민간인들은 외지로 이주하라.” 5월 내내 지속되고 있던 포로수용소 사태에 대한 대책 중 하나였다. 인민군 포로들은 간도 크게도 포로수용소장 돗드 준장을 납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그 후임 콜슨 준장이 포로들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렇게 만만하면 ‘미쿡’이지 미국이 아니다.
미군은 즉시 돗드와 콜슨의 별 견장을 어깨에서 떼내고 대령으로 불명예 제대시켰다. 그리고 투입한 것이 단호하기로 이름난 (북한 포로들 입장에서는 무섭기로 소문난) 황소 보트너였다. 보트너는 무장 병력을 동원하여 반항하는 포로들을 진압하고 휘날리던 인공기를 땅에 팽개쳤으며 인공기를 게양하는 포로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가 내린 명령 중의 하나는 수용소 인근 민가 철거였다. 북한은 포로수용소 내 친공 포로들에게 제2전선 구축을 명령하고 위장 항복을 통해 끄나풀을 수용소에 진입시키는가 하면 피난민으로 위장한 공작원까지 거제에 침투시켜 포로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보트너는 그에 대한 대책으로 “민가 전부 철거”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1116세대 1600 동의 민가가 며칠 사이에 사라졌다.
하루 아침에 고향 마을을 "24시간 안에 떠나야 했던“ 거제도민들의 아픔을 떠올려 보는 와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덧붙여 떠올라 왔다. 북한 인민군 총좌 (우리 계급으로 하면 준장급) 이학구라는 사람이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친공포로들의 형식상 수괴였다. 일단 그는 포로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 경로를 보면 그 ‘수괴’ 지목이 자연스럽지만은 않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고 인민군들 역시 ‘멘탈 붕괴’에 빠져 허물어지던 그 즈음, 자신이 참모장으로 있던 사단의 사단장을 권총으로 쏘고 남한으로 넘어온다. 아마도 결사항전을 외치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단장에 대한 반항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의 귀순의 의미는 계급도 계급이거니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작전 명령서에서 더 큰 의의를 지닌다. 그 작전 명령서는 6.25가 북한에 의해 촉발된 전면전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미 아군의 사단장을 쏘고 적의 편에 항복한 고위 장교는 왜 또 다시 자신이 등졌던 편을 위해 싸워야 했을까. 우선 그는 한국군 장교로 편입되기를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가 된 마당에 그와 맞바꾸거나 최소한 급이 맞는 포로를 세팅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는 포로로 생활해야 했다. 그런 불만도 있었을 것이고, 혹자는 친공 포로들의 무자비한 협박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거제도 앞바다에는 쏟아붓는 똥통 속에서 나온 사람의 팔다리들이 둥둥 떠다녔다고 하니 협박은 매우 걸쭉하고도 차가왔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지켜 봤던 인사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만 아니라면 매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었던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지향점을 바꾼다. 물론 실질적인 지령과 조직은 북한에서 파견된 이들이 도맡아 했지만 이학구는 총좌로서 친공포로들의 구심이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될대로 되라”? “미워도 다시한 번? ” “그래도 내이름은 공산당” ?
이학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송환 포로 명단에 끼었고, 북한으로 돌아가지만 머지않아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조국이었지만 조국은 그에게 따뜻한 곳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는 남도 북도 안심하고 찾을 수 없게 된 사람이었다. 사단장을 쏘고 적에게 투항한 참모장을 북한이 어떻게 환영할 것이며, 친공포로들의 수괴를 어찌 대한민국의 품에 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남도 북도 달갑지 않아 제 3국을 택했던 76인의 포로들 틈에도 이학구는 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