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7년 5월 23일 쏟아지는 빗발 뚫고
87년 6월 항쟁을 다룬 만화 가운데 <100℃>가 있다. 만화가 최규석의 역작으로 한 가난한 집안의 남매를 축으로 87년 6월 항쟁이 터져나오기까지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고 충실히 담아낸 작품이다. 만화를 보다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이 당선됐는데 이 사람은 투쟁의 머리띠를 동여매기보다는 집회에서 장기자랑 대회를 연다거나 하는 등 ‘...날나리’같이 굴어서 원성을 산다. 때가 어느 땐데 이러고 앉았느냐는 학생들의 힐난에 날나리 총학생회장은 홀연 결연한 표정이 되어 말한다.
“기존의 투쟁방식이 가진 한계는 이미 충분히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나요. 우리가 돌 던질 때 일반 학우들이 함께 하던가요. 아니죠. 그들은 우리를 피해서 가 버립니다. 그들이 역사도 현실도 모르는 바보라서 그런 겁니까. 우리의 방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그의 배경에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표어가 빛난다. ‘혁명으로 제헌의회’ 보다는 백 배는 더 가슴에 와 닿았으며 이른바 대중노선을 주창하던 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가장 절실히 드러났던 그 구호. 투쟁의 모범을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하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은 총학생회장을 통해 외화된다. 그리고 그 총학생회장이 어느 날 집회에서 열변을 토한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거리에 나갑시다. 모두 팔짱을 끼고 누워 버립시다.” 그리고 학생들은 쏟아지는 비와 군홧발의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종로 거리에 드러눕는다. 이 빗속의 연와 시위는 1987년 5월 23일 거리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만화 속으로 옮긴 것이다. (이 시위는 거의 고대 단독시위였는데 만화 속의 총학생회장 이미지는 이인영 총학생회장과 좀많이 다르다.)
이 시위는 광주항쟁 기념 주간에 기획된 시위였다. 보통 시위 나갈 때에는 몇 시에 어디 몇 시에 어디 집결지가 알려지게 마련인데, 87년 5월 23일의 시위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른바 ‘택’은 간단했다. “돌아오지 않는다.” 만화 속에서처럼 길바닥에 드러누워 전원 연행된다는 옥쇄 시위였다. 즉 발이 빠르건 싸움을 잘하건 일단 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찰에게 끌려가 개 맞듯이 맞고 고학년일 경우는 구속도 각오해야 하는 조금은 무모한 시위가 감행된 것이다. 광주에서 사람들을 죽인 너희들이 우리 친구 종철이도 죽였다. 이제 우리도 한 번 죽여 보라고 이마를 들이미는 시위였다.
1987년 5월 23일 탑골공원 앞. 뻔히 아는 얼굴들이 모른체 하면서 긴장한 발걸음을 옮기고 경찰의 감시의 눈동자도 칼날처럼 번득이던 오후 2시 (3시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더라) 마침내 태극기가 종로 거리에 펼쳐졌다. “나와! 나와!” 학생들은 일시에 거리로 몰려들었다. 보통은 대오를 형성하고 행진을 하거나 경찰에 맞서야 할 테지만 학생들은 일제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흐리고 간간히 비가 오던 날씨는 장대비로 바뀌어 팔짱 깍지 끼고 드러누운 학생들 위로 들이부었다. 1학년들을 시위에 참여시키지 않은 과나 서클이 많아서 1학년들은 인도에 서서 선배들이 누운 채 하늘을 향해 내뻗는 팔뚝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경찰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잠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본연의 자세를 되찾고 연와대열로 뛰어들었다. 방패질이 시작됐고 군홧발이 어지러이 내려찍혔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노래는 비명으로 틀어막혔다. 악착같이 버티던 학생들의 팔짱은 우악스런 발길질에 풀려 나갔고 머리채 잡히고 곤봉을 맞으며 끌려갔다. 보다못한 시민들이 나섰다.
만화 <100℃>에서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을 지켜보던 한 시민이 빗 속에 우산을 접는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차도로 내려가서 백골단의 머리를 우산으로 후려친다. “왜 학생들을 때리는 거냐. 학생들이 뭘 잘못했어.” 그러자 사람들이 합세한다. “애들 풀어줘. 죄없는 애들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또 죽이려고? 우리 보는 데서 죽여 봐!” 끌려가는 선배들을 보고 울부짖던 1학년들이 경찰들에게 달려들다가 나란히 닭장차에 처박히기도 했고,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는 와중에 1학년더러 너희들은 참가하지 말라고 했지 않냐며 호통 치는 선배도 있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연행됐다.
바로 7개월 전 무려 1천2백명이 넘는 학생들을 동시에 구속시킨 전력이 있는 정부인지라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긴 했는데 그들을 제대로 조사할 경황이 없어진 경찰이 거의 모두를 훈방으로 내보낸 것이다.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랄까. 새벽녘까지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쏟아지는 빗발 뚫고 오던 무거운 어깨 말없이 동녘 응시하던 동지의 젖은 눈빛 이제사 터오니 당신의 깃발로 두견으로 외쳐 대던 사선의 혈기로 약속한다 그대를 딛고 전진하는 새벽. 어느 새 닥친 조국의 아침 그대를 기억하리라.”
87년 5월 23일의 종로 시위는 6월 항쟁의 전초전과 같았다. 화염병과 돌멩이 말고도 경찰을 압도할 수 있는 무기가 있고, 그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음을 실감했던 시위였고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을 공유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구호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그 시위 이후 고대생들은 6.10 항쟁 출정식에서 지금도 가끔씩 꺼내드는 감동적인 풍경에 직면하게 된다. 뾰족구두 신고 팔랑 치마 입고 심지어 양산까지 쳐든 여학생들이 각자의 과 깃발을 찾아 울퉁불퉁한 잔디 스탠드를 뒤뚱거리며 누비고 학교 내 거의 모든 학생들이 모여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부르짖는 장관의 일원이 된 것이다.
오늘날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외치던 이들 중 일부가 국민의 열 걸음보다 자기 당파의 한 걸음에 목숨을 거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그들이 진보의 걸림돌 정도가 아니라 덫이 되고 있다고 해도, 87년 5월 23일 쏟아지는 비 속에서 드러누워버린 학생들의 외침과 울음은 우리 역사라는 척박한 땅에 내리부어진 튼실하고 기름진 거름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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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23일 쏟아지는 빗발 뚫고
87년 6월 항쟁을 다룬 만화 가운데 <100℃>가 있다. 만화가 최규석의 역작으로 한 가난한 집안의 남매를 축으로 87년 6월 항쟁이 터져나오기까지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고 충실히 담아낸 작품이다. 만화를 보다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이 당선됐는데 이 사람은 투쟁의 머리띠를 동여매기보다는 집회에서 장기자랑 대회를 연다거나 하는 등 ‘...날나리’같이 굴어서 원성을 산다. 때가 어느 땐데 이러고 앉았느냐는 학생들의 힐난에 날나리 총학생회장은 홀연 결연한 표정이 되어 말한다.
“기존의 투쟁방식이 가진 한계는 이미 충분히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나요. 우리가 돌 던질 때 일반 학우들이 함께 하던가요. 아니죠. 그들은 우리를 피해서 가 버립니다. 그들이 역사도 현실도 모르는 바보라서 그런 겁니까. 우리의 방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그의 배경에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표어가 빛난다. ‘혁명으로 제헌의회’ 보다는 백 배는 더 가슴에 와 닿았으며 이른바 대중노선을 주창하던 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가장 절실히 드러났던 그 구호. 투쟁의 모범을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하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은 총학생회장을 통해 외화된다. 그리고 그 총학생회장이 어느 날 집회에서 열변을 토한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거리에 나갑시다. 모두 팔짱을 끼고 누워 버립시다.” 그리고 학생들은 쏟아지는 비와 군홧발의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종로 거리에 드러눕는다. 이 빗속의 연와 시위는 1987년 5월 23일 거리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만화 속으로 옮긴 것이다. (이 시위는 거의 고대 단독시위였는데 만화 속의 총학생회장 이미지는 이인영 총학생회장과 좀많이 다르다.)
이 시위는 광주항쟁 기념 주간에 기획된 시위였다. 보통 시위 나갈 때에는 몇 시에 어디 몇 시에 어디 집결지가 알려지게 마련인데, 87년 5월 23일의 시위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른바 ‘택’은 간단했다. “돌아오지 않는다.” 만화 속에서처럼 길바닥에 드러누워 전원 연행된다는 옥쇄 시위였다. 즉 발이 빠르건 싸움을 잘하건 일단 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찰에게 끌려가 개 맞듯이 맞고 고학년일 경우는 구속도 각오해야 하는 조금은 무모한 시위가 감행된 것이다. 광주에서 사람들을 죽인 너희들이 우리 친구 종철이도 죽였다. 이제 우리도 한 번 죽여 보라고 이마를 들이미는 시위였다.
1987년 5월 23일 탑골공원 앞. 뻔히 아는 얼굴들이 모른체 하면서 긴장한 발걸음을 옮기고 경찰의 감시의 눈동자도 칼날처럼 번득이던 오후 2시 (3시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더라) 마침내 태극기가 종로 거리에 펼쳐졌다. “나와! 나와!” 학생들은 일시에 거리로 몰려들었다. 보통은 대오를 형성하고 행진을 하거나 경찰에 맞서야 할 테지만 학생들은 일제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흐리고 간간히 비가 오던 날씨는 장대비로 바뀌어 팔짱 깍지 끼고 드러누운 학생들 위로 들이부었다. 1학년들을 시위에 참여시키지 않은 과나 서클이 많아서 1학년들은 인도에 서서 선배들이 누운 채 하늘을 향해 내뻗는 팔뚝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경찰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잠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본연의 자세를 되찾고 연와대열로 뛰어들었다. 방패질이 시작됐고 군홧발이 어지러이 내려찍혔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노래는 비명으로 틀어막혔다. 악착같이 버티던 학생들의 팔짱은 우악스런 발길질에 풀려 나갔고 머리채 잡히고 곤봉을 맞으며 끌려갔다. 보다못한 시민들이 나섰다.
만화 <100℃>에서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을 지켜보던 한 시민이 빗 속에 우산을 접는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차도로 내려가서 백골단의 머리를 우산으로 후려친다. “왜 학생들을 때리는 거냐. 학생들이 뭘 잘못했어.” 그러자 사람들이 합세한다. “애들 풀어줘. 죄없는 애들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또 죽이려고? 우리 보는 데서 죽여 봐!” 끌려가는 선배들을 보고 울부짖던 1학년들이 경찰들에게 달려들다가 나란히 닭장차에 처박히기도 했고,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는 와중에 1학년더러 너희들은 참가하지 말라고 했지 않냐며 호통 치는 선배도 있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연행됐다.
바로 7개월 전 무려 1천2백명이 넘는 학생들을 동시에 구속시킨 전력이 있는 정부인지라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긴 했는데 그들을 제대로 조사할 경황이 없어진 경찰이 거의 모두를 훈방으로 내보낸 것이다.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랄까. 새벽녘까지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쏟아지는 빗발 뚫고 오던 무거운 어깨 말없이 동녘 응시하던 동지의 젖은 눈빛 이제사 터오니 당신의 깃발로 두견으로 외쳐 대던 사선의 혈기로 약속한다 그대를 딛고 전진하는 새벽. 어느 새 닥친 조국의 아침 그대를 기억하리라.”
87년 5월 23일의 종로 시위는 6월 항쟁의 전초전과 같았다. 화염병과 돌멩이 말고도 경찰을 압도할 수 있는 무기가 있고, 그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음을 실감했던 시위였고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을 공유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구호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그 시위 이후 고대생들은 6.10 항쟁 출정식에서 지금도 가끔씩 꺼내드는 감동적인 풍경에 직면하게 된다. 뾰족구두 신고 팔랑 치마 입고 심지어 양산까지 쳐든 여학생들이 각자의 과 깃발을 찾아 울퉁불퉁한 잔디 스탠드를 뒤뚱거리며 누비고 학교 내 거의 모든 학생들이 모여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부르짖는 장관의 일원이 된 것이다.
오늘날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외치던 이들 중 일부가 국민의 열 걸음보다 자기 당파의 한 걸음에 목숨을 거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그들이 진보의 걸림돌 정도가 아니라 덫이 되고 있다고 해도, 87년 5월 23일 쏟아지는 비 속에서 드러누워버린 학생들의 외침과 울음은 우리 역사라는 척박한 땅에 내리부어진 튼실하고 기름진 거름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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