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4년 5월 21일 공수단 법원 습격 사건
박정희 대통령의 산적한 과오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전통을 완전히 와해시켰다는 데에 있다. 제 1공화국 때만 해도, 김병로 대법원장 이하 사법부의 권위는 늠연하게 살아 있었고, 정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판결로 정부의 부아를 돋구는 일도 흔치 않게 있었다. 물론 독재가 강화되면서 조봉암 사형 판결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도 나오지만 대체로 1공화국 ...당시의 사법부는 큰 틀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장군이 등장한 후 사법부의 위상은 급전직하한다. 박정희에게 사법부란 자신이 사단장일 때 법무 참모 정도의 개념에 불과했던 것 같다.
국가재건 비상조치법으로 꼬장꼬장한 판사들을 내쫓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법관 수백명을 불러들여 ‘군사혁명의 의의’ 따위를 교육한 것은 물론, 모든 공무원들에게 양복 대신 ‘국민복’을 강요하면서 법관들에게도 예외를 주지 않은 것까지도 그렇다고 치는데, 법원 복도에 테이프를 붙여 놓고 좌측통행을 명령한 것은 좀 해도 해도 너무했지 싶다. 후일 인혁당 관련자에게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린 민복기 역시 회고에서 “민주주의 국가이미 사법부의 독립을 내세우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사에 대추 밤 놓듯이 구색을 맞춘 정도”라고 할 정도니 알쪼다. 숫제 박정희가 1962년 5월 대법원장에게 내려보낸 ‘지시각서’는 사단장이 법무참모 혼내는 문구다.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으로 혁명정신과 동떨어진 재판을 했다.... 일부 법관들이 중대한 국가적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권리 위에 땅을 치고 우는 약자들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 양심의 가책이 없이.....”
민정 이양 후 박정희의 정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졸속적인 한일회담이 추진되던 1964년 5월 20일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는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 놓는다......”로 시작하는 김지하의 조시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에 의하면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고 할 지경으로 신랄하고 날카로웠다. 이 장례식(?) 시위에서 경찰은 180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을 체포,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그런데 영장 담당 양헌 판사는 일부 피의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상식적인 이유로 구속 영장을 기각한다. 지극히 상식적이며 법관의 의무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죄를 지었다는 증거 없이 인신을 구속할 수 있단 말인가.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으르대서 작성한 조서 앞에서는 더욱.
그런데 5월 21일 새벽 4시 30분 서울 서소문 법원 청사에는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온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착한 군용 구급차에서 뛰어내린 건 13명의 얼룩무늬 군인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카빈총을 휘두르며 법원에 난입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수위 앞에서 그들은 숙직 법관을 찾아 내라고 다그쳤다.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전날 일부 영장을 기각했던 양헌 판사였다. 양헌 판사가 퇴근한 것을 안 이들은 즉각 차를 돌려 동소문동에 있던 양헌 판사 집으로 향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안되면 되게 하기보다는 안되는 짓 골라하는 대한민국 공수단이었다. 드디어 현직 판사의 집에 총과 수류탄을 찬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아마 양 판사는 처음에는 전쟁이 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월남민 출신에다가 현직 판사니 6.25의 예로 비추어 볼 때 완연한 인민재판 깜이었으니 불현듯 들이닥친 군인들을 인민군으로 착각하진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그들은 판사를 윽박질렀다. “데모 학생 영장을 왜 기각했소. 영장 서명을 약속하시오.” 그들은 급기야 수류탄을 꺼내 판사 코 앞에 들이밀고 협박한다. “우린 돌아가도 죽으니 여기서 자폭하겠소.”
파장은 컸다. 대법원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조처를 행하겠다고 약속했고 법원장들과 판사들도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국회에서도 대통령 탄핵 소추안까지 꺼내들며 정부에게 대들었지만 박정희의 태도는 오불관언 그 자체였다. “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과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13일 뒤 6.3 사태를 낳는 한 계기가 됐고, 판사 집에 쳐들어간 군인들은 6월 6일 동아일보까지 쳐들어가 난리를 치고서야 솜방망이나마 처벌을 받는다. 그나마도 그 행동을 직접 지휘한 최문영 대령과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은 무죄였다.
양헌 판사는 그로부터 10년 뒤 1971년 세칭 서울대생 신민당사 난입 사건에서도 법원 안팎의 압력을 무릅쓰고 전원 무죄 판결을 내린다. 양헌 판사에 따르면 지검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고유예만 돼도 참겠다. 하지만 무죄 나오면 가만히 안두겠다.” 결국 정권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유신 직전, 양헌 판사는 법복을 벗는다. 양심있는 판사의 이유 있는 퇴장. 그것은 우리 나라 사법 암흑시대의 또 다른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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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21일 공수단 법원 습격 사건
박정희 대통령의 산적한 과오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전통을 완전히 와해시켰다는 데에 있다. 제 1공화국 때만 해도, 김병로 대법원장 이하 사법부의 권위는 늠연하게 살아 있었고, 정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판결로 정부의 부아를 돋구는 일도 흔치 않게 있었다. 물론 독재가 강화되면서 조봉암 사형 판결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도 나오지만 대체로 1공화국 ...당시의 사법부는 큰 틀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장군이 등장한 후 사법부의 위상은 급전직하한다. 박정희에게 사법부란 자신이 사단장일 때 법무 참모 정도의 개념에 불과했던 것 같다.
국가재건 비상조치법으로 꼬장꼬장한 판사들을 내쫓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법관 수백명을 불러들여 ‘군사혁명의 의의’ 따위를 교육한 것은 물론, 모든 공무원들에게 양복 대신 ‘국민복’을 강요하면서 법관들에게도 예외를 주지 않은 것까지도 그렇다고 치는데, 법원 복도에 테이프를 붙여 놓고 좌측통행을 명령한 것은 좀 해도 해도 너무했지 싶다. 후일 인혁당 관련자에게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린 민복기 역시 회고에서 “민주주의 국가이미 사법부의 독립을 내세우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사에 대추 밤 놓듯이 구색을 맞춘 정도”라고 할 정도니 알쪼다. 숫제 박정희가 1962년 5월 대법원장에게 내려보낸 ‘지시각서’는 사단장이 법무참모 혼내는 문구다.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으로 혁명정신과 동떨어진 재판을 했다.... 일부 법관들이 중대한 국가적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권리 위에 땅을 치고 우는 약자들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 양심의 가책이 없이.....”
민정 이양 후 박정희의 정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졸속적인 한일회담이 추진되던 1964년 5월 20일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는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 놓는다......”로 시작하는 김지하의 조시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에 의하면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고 할 지경으로 신랄하고 날카로웠다. 이 장례식(?) 시위에서 경찰은 180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을 체포,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그런데 영장 담당 양헌 판사는 일부 피의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상식적인 이유로 구속 영장을 기각한다. 지극히 상식적이며 법관의 의무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죄를 지었다는 증거 없이 인신을 구속할 수 있단 말인가.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으르대서 작성한 조서 앞에서는 더욱.
그런데 5월 21일 새벽 4시 30분 서울 서소문 법원 청사에는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온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착한 군용 구급차에서 뛰어내린 건 13명의 얼룩무늬 군인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카빈총을 휘두르며 법원에 난입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수위 앞에서 그들은 숙직 법관을 찾아 내라고 다그쳤다.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전날 일부 영장을 기각했던 양헌 판사였다. 양헌 판사가 퇴근한 것을 안 이들은 즉각 차를 돌려 동소문동에 있던 양헌 판사 집으로 향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안되면 되게 하기보다는 안되는 짓 골라하는 대한민국 공수단이었다. 드디어 현직 판사의 집에 총과 수류탄을 찬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아마 양 판사는 처음에는 전쟁이 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월남민 출신에다가 현직 판사니 6.25의 예로 비추어 볼 때 완연한 인민재판 깜이었으니 불현듯 들이닥친 군인들을 인민군으로 착각하진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그들은 판사를 윽박질렀다. “데모 학생 영장을 왜 기각했소. 영장 서명을 약속하시오.” 그들은 급기야 수류탄을 꺼내 판사 코 앞에 들이밀고 협박한다. “우린 돌아가도 죽으니 여기서 자폭하겠소.”
파장은 컸다. 대법원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조처를 행하겠다고 약속했고 법원장들과 판사들도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국회에서도 대통령 탄핵 소추안까지 꺼내들며 정부에게 대들었지만 박정희의 태도는 오불관언 그 자체였다. “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과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13일 뒤 6.3 사태를 낳는 한 계기가 됐고, 판사 집에 쳐들어간 군인들은 6월 6일 동아일보까지 쳐들어가 난리를 치고서야 솜방망이나마 처벌을 받는다. 그나마도 그 행동을 직접 지휘한 최문영 대령과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은 무죄였다.
양헌 판사는 그로부터 10년 뒤 1971년 세칭 서울대생 신민당사 난입 사건에서도 법원 안팎의 압력을 무릅쓰고 전원 무죄 판결을 내린다. 양헌 판사에 따르면 지검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고유예만 돼도 참겠다. 하지만 무죄 나오면 가만히 안두겠다.” 결국 정권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유신 직전, 양헌 판사는 법복을 벗는다. 양심있는 판사의 이유 있는 퇴장. 그것은 우리 나라 사법 암흑시대의 또 다른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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