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9년 5월 19일 zp케말파샤생일을 만들다
지금은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치닫고 있는 멜 깁슨이지만 그도 파릇파릇할 때가 있었다. 그 무렵 찍은 영화가 <갈리폴리>라는 영화다. 호주 출신인 그로서는 뜻깊은 영화라고 할만한 것이, <갈리폴리>는 터키의 지명인 ‘갈리폴리’에서 영연방군 일원으로 출전한 호주와 뉴질랜드군이 떼죽음을 당하고 패했던 일을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갈리폴리는 25만 연합군의... 목숨을 삼켰을 뿐 아니라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계획했던 영국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의 목을 날린 전투였기도 했고 바야흐로 한 명의 영웅의 탄생을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영웅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터키의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수입한 기뢰를 갈리폴리 인근 해안에 깔아 영국 해군의 기세를 꺾었으며,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고 상륙한 연합군을 기관총으로 물리쳤다. “진격을 바라지 않는다. 그 자리를 고수하다가 죽어라.” 케말 파샤의 독전은 간단하지만 무서웠고, 그 자신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방어전에 나섰다. 이 전통은 6.25때 참전한 터키군에게도 이어졌는지 터키군들은 장교가 어느 지점에 모자를 놔 두면 결코 그 선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죽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이 갈리폴리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 장군은 터키의 구원자로 떠오른다. 동북쪽으로 달려가서는 러시아 군을 대파했으니 가히 터키의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한때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가 된 지 오래였고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었다. 마침내 투르크는 1918년 항복함으로써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태는 그에 머물지 않았다.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투르크를 압박했고 수백년간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 왔던 그리스도 복수의 칼을 들이밀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고 케말은 1919년 5월 19일 북부의 항구 삼순에 도착하지만 그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국내 질서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외국의 침략에 무기력한 정부를 불신임한다..... 이제 우리는 제국의 허물을 벗고 터키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케말은 이날을 투르크 혁명의 첫발로 보고, 이 날을 아예 자신의 생일로 삼는다.
외국에 허약한 정부일수록 국내 반정부 인사에게는 엄정한 법이라, 죽어가던 투르크 정부도 케말의 군복을 벗기고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등 케말을 응징(?)하지만 무스타파 케말을 잡으러갈 병력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케말은 나아가 투르크를 점령한 모든 외국군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투르크 국민들에게 촉구하며 일어선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프랑스군과 아르메니아군 그리스군이 이미 투르크를 죄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케말의 전설은 바야흐로 시작이었다. 그는 투르크군을 지휘하며 일단 그리스군을 박살냈다. “우리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역을 지킨다. 그 영역은 우리의 조국 전체이다.” 투르크 민중들도 그에 호응하여 게릴라전으로 연합군을 맞섰고 민병대만으로 도시를 사수하기도 했다. 결국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 팻말이 붙은 침대에서 탈출한다.
국가원수가 된 케말은 또 하나의 업적을 남긴다. 그것은 투르크라는 나라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다. 신정일치의 왕국에서 세속의 공화국으로, 다민족을 지배하던 제국을 터키 민족의 공화국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터키어를 기록할 문자도 아랍 문자에서 로마자 알파벳으로 바꿔 버렸다. 심지어 이슬람의 뿌리 깊은 나무였던 투르크에서 종교적 복장을 억제하면서 서구 복장을 권장했고, 남녀합동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발표했던 법령 하나는 케말의 고민을 엿보게 한다. “모든 창녀는 반드시 히잡 (무슬림 여인들이 머리를 가리는 천)을 착용해야 한다.” 히잡을 금지하지는 않으면서, 히잡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교묘한 언사. 그래서 오늘까지도 터키에서는 대통령 후보의 가족이 히잡을 쓴 것이 상대방의 공격 대상이 될 정도로 세속화된 공화국이 형성된다.
그런데 말이 공화국이지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였고 케말은 독재자라는 이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쿠르드 족의 독립 투쟁을 진압할 때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었고, 투르크 제국 말과 공화국 초기에 걸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그의 그림자가 일부 드리워져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터키인들은 터키 의회가 그에게 바친 성 ‘아타투르크’ (투르크의 아버지) 그대로 그를 존경하고, 그에 대한 비판조차 금기시하고 있다. 그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터키도 없다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헛갈리기도 한다. 완벽히 몰락한 왕국, 산지사방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는 열강과 근린국들의 침공에 허덕이는 나라에서 케말이 해 낸 일의 미덕과 그가 이룬 변화의 크기가 자리한 한 쪽, 정적을 용인하지 않았고 모든 언론을 검열했으며 철권을 휘두르기도 했던 ‘개발독재자’로서의 또 다른 쪽 사이에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박정희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다. 박정희의 악행에 치를 떨고, 그의 손에 목매달리고 고문당하고 인생 망가진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를 반성하지 않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 따님의 꿈은 좀처럼 같이 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 어찌 되었든 박정희의 18년 치세에 대한민국은 엄청난 변화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박근혜를 지지하고 박정희를 추억하는 현상은 무척 기괴하긴 하지만 그걸 어리석다고 치부만 해서는 더 큰 것을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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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19일 zp케말파샤생일을 만들다
지금은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치닫고 있는 멜 깁슨이지만 그도 파릇파릇할 때가 있었다. 그 무렵 찍은 영화가 <갈리폴리>라는 영화다. 호주 출신인 그로서는 뜻깊은 영화라고 할만한 것이, <갈리폴리>는 터키의 지명인 ‘갈리폴리’에서 영연방군 일원으로 출전한 호주와 뉴질랜드군이 떼죽음을 당하고 패했던 일을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갈리폴리는 25만 연합군의... 목숨을 삼켰을 뿐 아니라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계획했던 영국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의 목을 날린 전투였기도 했고 바야흐로 한 명의 영웅의 탄생을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영웅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터키의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수입한 기뢰를 갈리폴리 인근 해안에 깔아 영국 해군의 기세를 꺾었으며,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고 상륙한 연합군을 기관총으로 물리쳤다. “진격을 바라지 않는다. 그 자리를 고수하다가 죽어라.” 케말 파샤의 독전은 간단하지만 무서웠고, 그 자신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방어전에 나섰다. 이 전통은 6.25때 참전한 터키군에게도 이어졌는지 터키군들은 장교가 어느 지점에 모자를 놔 두면 결코 그 선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죽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이 갈리폴리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 장군은 터키의 구원자로 떠오른다. 동북쪽으로 달려가서는 러시아 군을 대파했으니 가히 터키의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한때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가 된 지 오래였고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었다. 마침내 투르크는 1918년 항복함으로써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태는 그에 머물지 않았다.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투르크를 압박했고 수백년간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 왔던 그리스도 복수의 칼을 들이밀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고 케말은 1919년 5월 19일 북부의 항구 삼순에 도착하지만 그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국내 질서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외국의 침략에 무기력한 정부를 불신임한다..... 이제 우리는 제국의 허물을 벗고 터키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케말은 이날을 투르크 혁명의 첫발로 보고, 이 날을 아예 자신의 생일로 삼는다.
외국에 허약한 정부일수록 국내 반정부 인사에게는 엄정한 법이라, 죽어가던 투르크 정부도 케말의 군복을 벗기고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등 케말을 응징(?)하지만 무스타파 케말을 잡으러갈 병력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케말은 나아가 투르크를 점령한 모든 외국군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투르크 국민들에게 촉구하며 일어선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프랑스군과 아르메니아군 그리스군이 이미 투르크를 죄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케말의 전설은 바야흐로 시작이었다. 그는 투르크군을 지휘하며 일단 그리스군을 박살냈다. “우리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역을 지킨다. 그 영역은 우리의 조국 전체이다.” 투르크 민중들도 그에 호응하여 게릴라전으로 연합군을 맞섰고 민병대만으로 도시를 사수하기도 했다. 결국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 팻말이 붙은 침대에서 탈출한다.
국가원수가 된 케말은 또 하나의 업적을 남긴다. 그것은 투르크라는 나라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다. 신정일치의 왕국에서 세속의 공화국으로, 다민족을 지배하던 제국을 터키 민족의 공화국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터키어를 기록할 문자도 아랍 문자에서 로마자 알파벳으로 바꿔 버렸다. 심지어 이슬람의 뿌리 깊은 나무였던 투르크에서 종교적 복장을 억제하면서 서구 복장을 권장했고, 남녀합동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발표했던 법령 하나는 케말의 고민을 엿보게 한다. “모든 창녀는 반드시 히잡 (무슬림 여인들이 머리를 가리는 천)을 착용해야 한다.” 히잡을 금지하지는 않으면서, 히잡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교묘한 언사. 그래서 오늘까지도 터키에서는 대통령 후보의 가족이 히잡을 쓴 것이 상대방의 공격 대상이 될 정도로 세속화된 공화국이 형성된다.
그런데 말이 공화국이지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였고 케말은 독재자라는 이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쿠르드 족의 독립 투쟁을 진압할 때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었고, 투르크 제국 말과 공화국 초기에 걸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그의 그림자가 일부 드리워져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터키인들은 터키 의회가 그에게 바친 성 ‘아타투르크’ (투르크의 아버지) 그대로 그를 존경하고, 그에 대한 비판조차 금기시하고 있다. 그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터키도 없다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헛갈리기도 한다. 완벽히 몰락한 왕국, 산지사방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는 열강과 근린국들의 침공에 허덕이는 나라에서 케말이 해 낸 일의 미덕과 그가 이룬 변화의 크기가 자리한 한 쪽, 정적을 용인하지 않았고 모든 언론을 검열했으며 철권을 휘두르기도 했던 ‘개발독재자’로서의 또 다른 쪽 사이에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박정희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다. 박정희의 악행에 치를 떨고, 그의 손에 목매달리고 고문당하고 인생 망가진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를 반성하지 않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 따님의 꿈은 좀처럼 같이 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 어찌 되었든 박정희의 18년 치세에 대한민국은 엄청난 변화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박근혜를 지지하고 박정희를 추억하는 현상은 무척 기괴하긴 하지만 그걸 어리석다고 치부만 해서는 더 큰 것을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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