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53년 5월 17일 향린교회 창립
나라는 깨어졌으나 민둥산과 한강물은 말없이 솟아 흘렀고, 망가진 도시에도 봄은 오니 초목은 푸르렀다. 어찌 살아갈까 막막함은 꽃조차 눈물을 짓게 하고 이별한 이들 생각하니 새들도 소스라치는데, 휴전선 포화는 사흘도 쉬지 않고 불을 뿜으니 전방 나간 아들놈 편지 만금과 같네. 허연 머리를 긁었더니 머리가 짧아져 애꿎은 빗만 버린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19...53년 봄 서울에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노래했을 게다. 1953년 서울은 절망의 도시였다.
아직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은 1953년 5월 17일 지금은 중국집 동보성이 거창하게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얼키설키 나무로 잇고 종이로 대충 벽을 바른 집 안에서 떨리는 기도 소리가 들려 왔다. 집 안에는 6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가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한 교회의 창립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원래 그 일대에 향린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었고 '향기로운 이웃'이라는 뜻이 달가왔던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 교회의 이름을 향린교회라고 짓는다. 전쟁 이전부터 그들은 독특한 신앙의 공동체를 꾸려오던 그들이 마침내 '평신도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인 홍창의는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 한 순간이여, 감격의 눈물 내 앞을 가리우니 말없이 핀 저 꽃의 향기로움이여. 우리의 기도소리 저 나라로 옮기소서."
평신도 교회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뜻은 간단하다. 교역자를 따로 두지 않고 교인 모두가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교회인 것이다. 목사도 장로도 없이 평신도만 있고, 설교가 아니라 의료, 음악 등 자신이 가진 달란트로 선교에 나서는 교회, 그것이 평신도 교회 향린교회였다. 이후 향린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60년을 버티게 된다.
그 세월을 평신도교회로 보낸 것은 아니어서 목사님도 몇 분이 오셨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당연한 다툼도 있었고 분열도 있었지만 향린교회는 한국 현대 기독교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남는다.
사형 선고 앞에서도 "영광입니다!"를 부르짖었던 열혈청년 김병곤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 박노해에게 "박형 교회 한 번 나가 볼랍니까?"라고 우렁우렁 권했던 교회였으며, 최초의 12인 중의 한 명이자 한신대 교수로서 정권에 의해 두 번씩이나 해직을 당하고, 감옥 들어가기를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했던 안병무의 혼이 담긴 교회였으며,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기나긴 이름이 출생신고를 했던 교회였으며, 심야토론 때 북한에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담임 목사가 붙들려가자 안기부 앞에서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를 찬송하던 교인들의 교회였고, 언젠가 파고다 공원의 박정희 현판 글씨 '삼일문'을 떼낸 사람들이 그 현판을 들고 몸을 의탁한 소도(?)였던 교회였다.
명동 언덕에 명동 성당이 솟아 한낮 찌는 더위를 면할 그늘이 되어 주었다면 명동 초입의 향린교회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 시대에 필요한 예언자와 용사들과 의로운 백성들의 목을 채워 주었다 할 것이다.
이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은, 특히 기존의 교회의 때가 묻은 (?)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 번 정도는 기절초풍하게 된다. 교회 들어갈 때 국가보안법 철폐하라는 플래카드에 어리벙해졌다가 예배 시작을 알릴 때 난데없는 징을 치는 목사님을 보며 눈이 크게 떠지고, 얼쑤 지화자 닐니리야 나오는 국악찬송가에는 입을 딱 벌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련회까지 참가한다면, 아마 술자리가 암암리에 (라고 쓰고 대놓고라고 읽는다) 벌어지는 모습에 까무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 주자 주님께서 최초로 행하신 기적이 술 주자 주님을 만드신 기적이었음을 기억한다면 그닥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경악해 마지 않는 일이며 어떤 이들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며 사실이라면 자신의 장을 지지겠노라 침을 튀기는 일이지만, 나는 이 교회의 집사다. 그리고 연식(?)으로 따지면 웬만한 교인보다도 더 오래 이 교회를 유령처럼 다녀 왔었다. 하지만 여전히 관찰자 시점에 그치고 있다. 그렇게 고고한 성품은 아닌데 왜 그렇게 스며들지 못하는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성령의 은사가 부족하달밖에.
어쨌건 그 와중에 이 교회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고, 지금은 자신은 하느님 같은 거 안믿는다며 시건방진 소리 대기권을 찌르는 아들 녀석과 딸 아이 세례를 모두 이 교회에서 치렀다. 그 세월 동안 향린교회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환송해 주었고, 대추리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촛불 시위 때는 주황색 향린교회 깃발 휘날리며 날밤을 지샜고, 화재가 난 구룡 마을에 가서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터전을 제공해 주었다.
비록 나의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내가 그 교회의 유령인 것조차 때론 버겁게 황공한, 향린교회의 생일을 축하한다
tag : 산하의오역
1953년 5월 17일 향린교회 창립
나라는 깨어졌으나 민둥산과 한강물은 말없이 솟아 흘렀고, 망가진 도시에도 봄은 오니 초목은 푸르렀다. 어찌 살아갈까 막막함은 꽃조차 눈물을 짓게 하고 이별한 이들 생각하니 새들도 소스라치는데, 휴전선 포화는 사흘도 쉬지 않고 불을 뿜으니 전방 나간 아들놈 편지 만금과 같네. 허연 머리를 긁었더니 머리가 짧아져 애꿎은 빗만 버린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19...53년 봄 서울에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노래했을 게다. 1953년 서울은 절망의 도시였다.
아직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은 1953년 5월 17일 지금은 중국집 동보성이 거창하게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얼키설키 나무로 잇고 종이로 대충 벽을 바른 집 안에서 떨리는 기도 소리가 들려 왔다. 집 안에는 6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가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한 교회의 창립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원래 그 일대에 향린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었고 '향기로운 이웃'이라는 뜻이 달가왔던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 교회의 이름을 향린교회라고 짓는다. 전쟁 이전부터 그들은 독특한 신앙의 공동체를 꾸려오던 그들이 마침내 '평신도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인 홍창의는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 한 순간이여, 감격의 눈물 내 앞을 가리우니 말없이 핀 저 꽃의 향기로움이여. 우리의 기도소리 저 나라로 옮기소서."
평신도 교회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뜻은 간단하다. 교역자를 따로 두지 않고 교인 모두가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교회인 것이다. 목사도 장로도 없이 평신도만 있고, 설교가 아니라 의료, 음악 등 자신이 가진 달란트로 선교에 나서는 교회, 그것이 평신도 교회 향린교회였다. 이후 향린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60년을 버티게 된다.
그 세월을 평신도교회로 보낸 것은 아니어서 목사님도 몇 분이 오셨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당연한 다툼도 있었고 분열도 있었지만 향린교회는 한국 현대 기독교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남는다.
사형 선고 앞에서도 "영광입니다!"를 부르짖었던 열혈청년 김병곤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 박노해에게 "박형 교회 한 번 나가 볼랍니까?"라고 우렁우렁 권했던 교회였으며, 최초의 12인 중의 한 명이자 한신대 교수로서 정권에 의해 두 번씩이나 해직을 당하고, 감옥 들어가기를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했던 안병무의 혼이 담긴 교회였으며,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기나긴 이름이 출생신고를 했던 교회였으며, 심야토론 때 북한에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담임 목사가 붙들려가자 안기부 앞에서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를 찬송하던 교인들의 교회였고, 언젠가 파고다 공원의 박정희 현판 글씨 '삼일문'을 떼낸 사람들이 그 현판을 들고 몸을 의탁한 소도(?)였던 교회였다.
명동 언덕에 명동 성당이 솟아 한낮 찌는 더위를 면할 그늘이 되어 주었다면 명동 초입의 향린교회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 시대에 필요한 예언자와 용사들과 의로운 백성들의 목을 채워 주었다 할 것이다.
이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은, 특히 기존의 교회의 때가 묻은 (?)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 번 정도는 기절초풍하게 된다. 교회 들어갈 때 국가보안법 철폐하라는 플래카드에 어리벙해졌다가 예배 시작을 알릴 때 난데없는 징을 치는 목사님을 보며 눈이 크게 떠지고, 얼쑤 지화자 닐니리야 나오는 국악찬송가에는 입을 딱 벌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련회까지 참가한다면, 아마 술자리가 암암리에 (라고 쓰고 대놓고라고 읽는다) 벌어지는 모습에 까무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 주자 주님께서 최초로 행하신 기적이 술 주자 주님을 만드신 기적이었음을 기억한다면 그닥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경악해 마지 않는 일이며 어떤 이들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며 사실이라면 자신의 장을 지지겠노라 침을 튀기는 일이지만, 나는 이 교회의 집사다. 그리고 연식(?)으로 따지면 웬만한 교인보다도 더 오래 이 교회를 유령처럼 다녀 왔었다. 하지만 여전히 관찰자 시점에 그치고 있다. 그렇게 고고한 성품은 아닌데 왜 그렇게 스며들지 못하는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성령의 은사가 부족하달밖에.
어쨌건 그 와중에 이 교회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고, 지금은 자신은 하느님 같은 거 안믿는다며 시건방진 소리 대기권을 찌르는 아들 녀석과 딸 아이 세례를 모두 이 교회에서 치렀다. 그 세월 동안 향린교회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환송해 주었고, 대추리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촛불 시위 때는 주황색 향린교회 깃발 휘날리며 날밤을 지샜고, 화재가 난 구룡 마을에 가서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터전을 제공해 주었다.
비록 나의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내가 그 교회의 유령인 것조차 때론 버겁게 황공한, 향린교회의 생일을 축하한다
tag : 산하의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