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61년 5월 16일 이한림 장군의 5.16
선글라스를 낀 작달막한 투스타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들이 방송국을 장악한 뒤 숙직 아나운서를 시켜 발표한 대로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일부가 행동을 개시한 순간이었다. 한강 다리를 지키던 헌병대는 쿠데타군에 가담한 해병대의 기세에 눌려 다리를 내 주었고 불과 3천 명에 불과했던 쿠데타 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쥐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각 책임제 하의 실권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뛰어들어 머리카락 보일까 꽁꽁 숨어 있었다. 대통령 윤보선이 쿠데타 소식을 접한 후 일성은 “올 것이 왔구나. ”였다. 올 것(?)이 왔는데 그를 막아야 할 사람은 수녀 치마폭에서 나올 줄 몰랐으니 볼짱 다 본 셈이었다.
하지만 쿠데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물론 군 곳곳에 쿠데타에 호응하는 이들이 박혀 있었지만 60만 대군 중 쿠데타군 측이 동원한 병력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5월 16일 새벽 3시 강원도 1군 사령관 관사에서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잠에서 쌔어나 “이런 괘씸한 놈들”이라고 부르짖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휘하의 병력은 수십만 명이었다. 하필이면 전날, 5월 15일은 제1군, 즉 제 1 야전군의 창설 기념일이었다. 당연히 장면 총리도 참석했었고 군 고위 지휘관들이 집결한 축하 분위기에서 술잔도 적잖이 오간 터였다. 그런데 만주군 동기이며 오랜 동안 친구였고빨갱이로 몰려 죽다 살아났을 때에는 밤새 통음하며 위로한 적도 있었던 박정희 녀석이 바로 그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한림은 분노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 1야전군이라면 한국군 최강의 병력이다. 이들이 움직인다면 해병대 몇 명이 껍적거리는 쿠데타군은 간단히 진압될 수 있었다. 이한림은 1군단장 임부택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병력을 이동하여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쿠데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만 내려온다면 언제건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들은 연락이 닿질 않았다. 총리는 앞서 말했듯 수녀원에서 머리카락 보일까 숨어 있었고, 국방장관도 소식이 없었으며 육군 참모총장은 쿠데타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진압을 시작한다면 국군끼리 피를 볼 일이었고,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으로서 ‘출동하라’ 한 마디면 족하겠는데 그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윤보선 대통령, 내각 책임제 하의 사징적인 대통령이던 윤보선의 특사가 1군 사령부에 닿았다. 대통령의 친서는 공자님 말씀이되 알멩이는 없는 소리였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군의 불통일로 대공역량을 감소 시켜서는 안됩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됩니다. 귀하는 무엇보다도 공산군의 남침 대비에 만전을 기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이한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해졌을 것이다. 한국군끼리 피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문제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헌정을 무너뜨린 상황 아닌가. 그런데 불상사나 희생은 안된다니 뭐 이런 손발 묶고 자유형 헤엄치기가 있는가 말이다. “한국군끼리 충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제에다가 대통령의 명령까지 곁들여지니 이건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원도까지 날아온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쿠데타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이미 이한림의 결기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한림은 5월 17일 국기 하기식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 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에의 개입을 반대합니다. 있어서도 안되고 용서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여러 장병들에게 알립니다.”
이로써 불법적인 쿠데타를 막아설 민주공화국의 무력은 사라졌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의 그의 위치는 명확히 반란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한림은 자신의 친구 박정희를 막아서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히 맞는 말 같지만 너무나도 무책임한 소리,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선 안된다”는 대통령의 친서 앞에 그 결심은 무뎌졌고, 결국 이후 근 30년에 이르는 군부 통치의 서막은 활짝 열리고 만다.
어느 때에나 마찬가지다. 공자님 말씀하기는 참 쉽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거기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봐야 아무 도움이 안되는 우리 모두의 과오인 것이라고 폼 잡기는 정말로 쉽다.
하지만 대개 역사에서 이런 공자님 말씀들은 대개는 누군가의 장식품으로만 빛나게 마련이고 사실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끄는 지름길 노릇도 불사한다. 바로 윤보선이 한 소리였다. 국군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훌륭했으나 그 국군이 헌정질서를 밧다리 한판으로 무너뜨릴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명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2012년 5월 16일 50여년 전 쿠데타군이 긴박한 분위기에서 한강다리를 건너던 날,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다 같이 성찰해보자,”는 말이 때로는 무지하게 어리석은 것처럼 말이다.
이한림 장군은 며칠 전 아흔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명복을 빌며 5.16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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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이한림 장군의 5.16
선글라스를 낀 작달막한 투스타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들이 방송국을 장악한 뒤 숙직 아나운서를 시켜 발표한 대로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일부가 행동을 개시한 순간이었다. 한강 다리를 지키던 헌병대는 쿠데타군에 가담한 해병대의 기세에 눌려 다리를 내 주었고 불과 3천 명에 불과했던 쿠데타 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쥐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각 책임제 하의 실권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뛰어들어 머리카락 보일까 꽁꽁 숨어 있었다. 대통령 윤보선이 쿠데타 소식을 접한 후 일성은 “올 것이 왔구나. ”였다. 올 것(?)이 왔는데 그를 막아야 할 사람은 수녀 치마폭에서 나올 줄 몰랐으니 볼짱 다 본 셈이었다.
하지만 쿠데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물론 군 곳곳에 쿠데타에 호응하는 이들이 박혀 있었지만 60만 대군 중 쿠데타군 측이 동원한 병력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5월 16일 새벽 3시 강원도 1군 사령관 관사에서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잠에서 쌔어나 “이런 괘씸한 놈들”이라고 부르짖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휘하의 병력은 수십만 명이었다. 하필이면 전날, 5월 15일은 제1군, 즉 제 1 야전군의 창설 기념일이었다. 당연히 장면 총리도 참석했었고 군 고위 지휘관들이 집결한 축하 분위기에서 술잔도 적잖이 오간 터였다. 그런데 만주군 동기이며 오랜 동안 친구였고빨갱이로 몰려 죽다 살아났을 때에는 밤새 통음하며 위로한 적도 있었던 박정희 녀석이 바로 그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한림은 분노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 1야전군이라면 한국군 최강의 병력이다. 이들이 움직인다면 해병대 몇 명이 껍적거리는 쿠데타군은 간단히 진압될 수 있었다. 이한림은 1군단장 임부택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병력을 이동하여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쿠데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만 내려온다면 언제건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들은 연락이 닿질 않았다. 총리는 앞서 말했듯 수녀원에서 머리카락 보일까 숨어 있었고, 국방장관도 소식이 없었으며 육군 참모총장은 쿠데타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진압을 시작한다면 국군끼리 피를 볼 일이었고,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으로서 ‘출동하라’ 한 마디면 족하겠는데 그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윤보선 대통령, 내각 책임제 하의 사징적인 대통령이던 윤보선의 특사가 1군 사령부에 닿았다. 대통령의 친서는 공자님 말씀이되 알멩이는 없는 소리였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군의 불통일로 대공역량을 감소 시켜서는 안됩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됩니다. 귀하는 무엇보다도 공산군의 남침 대비에 만전을 기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이한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해졌을 것이다. 한국군끼리 피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문제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헌정을 무너뜨린 상황 아닌가. 그런데 불상사나 희생은 안된다니 뭐 이런 손발 묶고 자유형 헤엄치기가 있는가 말이다. “한국군끼리 충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제에다가 대통령의 명령까지 곁들여지니 이건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원도까지 날아온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쿠데타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이미 이한림의 결기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한림은 5월 17일 국기 하기식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 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에의 개입을 반대합니다. 있어서도 안되고 용서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여러 장병들에게 알립니다.”
이로써 불법적인 쿠데타를 막아설 민주공화국의 무력은 사라졌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의 그의 위치는 명확히 반란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한림은 자신의 친구 박정희를 막아서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히 맞는 말 같지만 너무나도 무책임한 소리,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선 안된다”는 대통령의 친서 앞에 그 결심은 무뎌졌고, 결국 이후 근 30년에 이르는 군부 통치의 서막은 활짝 열리고 만다.
어느 때에나 마찬가지다. 공자님 말씀하기는 참 쉽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거기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봐야 아무 도움이 안되는 우리 모두의 과오인 것이라고 폼 잡기는 정말로 쉽다.
하지만 대개 역사에서 이런 공자님 말씀들은 대개는 누군가의 장식품으로만 빛나게 마련이고 사실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끄는 지름길 노릇도 불사한다. 바로 윤보선이 한 소리였다. 국군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훌륭했으나 그 국군이 헌정질서를 밧다리 한판으로 무너뜨릴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명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2012년 5월 16일 50여년 전 쿠데타군이 긴박한 분위기에서 한강다리를 건너던 날,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다 같이 성찰해보자,”는 말이 때로는 무지하게 어리석은 것처럼 말이다.
이한림 장군은 며칠 전 아흔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명복을 빌며 5.16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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