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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5.9 위대한 부통령의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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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1년 5월 9일 위대한 부통령의 사임



‘대한민국 부통령’이라는 단어는 웬지 낯설다. 하지만 한국의 50년대는 정,부통령의 시기였다. 대통령은 이승만 혼자서 독상을 차렸지만, 부통령은 인촌 김성수부터 만송 이기붕까지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자리를 지켰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이름을 꼽으라면 역시 성재 이시영을 들지 않을 수 없겠다. 그는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경주 이씨 집안 6형제 중의 한 사람이다. 이시영이 속한 경주 이씨 백사공파(이항복의 후예)는 무려 9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그야말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다. 이시영의 아버지도 이조판서였다. 조선 팔도 어느 대갓집에 견줘도 그 떵떵거림이 수그러들지 않을 이 명문가의 형제들 가족 60여명은 요즘 물가로 따지면 수백억에 해당하는 재산을 처분한 후 압록강을 건넜고 이후 치열한 항일투쟁에 나선다. 우리 역사에서 정말로 진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가문이었다. (이를 주도한 이회영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해야 할 것 같고)



6형제 가운데 살아서 해방을 본 것은 이시영이 유일했다. 한때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로 잘나가던 신하였던 그가 36년의 일제 강점기를 버텨내고 해방을 맞았을 때의 나이는 이미 일흔 여덟이었다. 이승만조차 성재 어른이라고 존대할 정도의 연륜이었다. 다섯 형제를 이국 땅에 묻고 자신도 죽을 고생을 하고 온 처지였지만 권력의 중심에서도 이시영이라는 인물됨은 흔들림이 없었다. 청렴결백의 표상이었고, 이승만의 절대권력 앞에서도 할 말을 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1951년 5월 9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중의 하나인 국민방위군 사건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긴 후 사임한다. 전쟁을 치른다는 나라의 정부가 자국의 젊은이들 수만 명을 생으로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던 이 엄청난 사건을 통절하게 규탄하는 그의 성명에는 서릿발 같은 선비의 기상이 뚝뚝 떨어져 글자 한 자 한 자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얼마나 한스러웠을 것인가. 자신의 형제들을 다 잡아먹혀가며 이루고자 한 해방된 조국. 그나마 반쪽으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자신이 부통령을 맡고 있는 공화국 정부는 자신의 동량같은 청년들을 건사하기는 커녕 길거리의 원혼으로 만들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힐 돈은 기생들의 치마폭과 장군들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래놓고도 국방장관의 친구에게는 무죄가 선고되는 판이었으니 노구의 그가 겪어야 했을 실망과 분노는 오죽했을까.


 부통령을 그만둔 순간부터 그의 가족들은 반넘어 굶어야 했다. 서울 중구 일대 2만 평의 땅을 소유했던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후예들은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를 타고넘어야 했다. 이시영의 둘째 아들 이규열은 피난지 부산에서 병으로 숨을 거뒀고 그 딸은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됐다. 그 뒤를 이어 이시영이 서거하고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에도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울로 이사와서도 스무 번도 더 이사다니며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했다. 어엿한 경기고등학생이 된 손자는 생활고로 대학에 등록할 수 없었고, 가난에서 탈출해보고자 캐나다로 이민간 손자는 중환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월간조선 2008년 5월호에 나온다. 한국 축구가 브라질을 이기는 확률로 월간조선도 좋은 일을 한다. 물론 마냥 좋으면 월간조선이 아니다. 남북협상에 반대한 이시영의 면모를 부각시킨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빨갱이 싫어한 애국자 이시영이었던 것이다)



2008년 당시 아흔 아홉 살이던 며느리는 이시영의 묘 앞에 움막을 짓고 32년째 묘소를 관리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며느리의 소원은 국립묘지로의 이장이었다. 그것도 안된다면 묘역이라도 이제 국가가 관리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이승만의 수족으로 악질 노릇을 도맡아 했던 김창룡도, 전두환 경호실장하던 안현태도 묻혀 있고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의 주역들도 간다면 말리지 못할 국립묘지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그때껏 들어가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쯤되면 개그콘서트의 불편한 진실의 소재감이 될 것도 같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61년 전 백발 성성한 대한민국 부통령이 남긴 일갈을 다시 음미해 본다.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하지 않는다......... 이 말이 왜 자꾸 곱씹어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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