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91년 4월 29일 46년의 분단 46일의 통일
대학 들어가서 낯선 것 중의 하나는 ‘연호’였다. 튀어 보이고 싶은 욕구라고 하기엔 좀 비장한 연호들이 대자보와 문건과 심지어 자판기 커피 컵에까지 수놓여 있었다. ‘분단조국’이나 ‘통일염원’까지는 대수롭잖게 넘겼는데 ‘미제강점’이며 ‘광주민중항쟁’ 같은 연호 앞에선 좀 긴장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전노협 원년’이니 뭐 이런 것들은 그냥 양념처럼 존재했었고. 1991년은 ‘분단조국’의 연호로 따지면 47년이 되지만 만으로 따지면 해방되고 미국과 소련군 양군이 들어와 삼팔선을 그은 지 만 46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 봄, 46일간의 ‘작은 통일’이 펼쳐진다.
시작이랄까 연원이랄까 1989년 연이은 방북 파장으로 얼어붙어 있던 남북의 분위기가 사뭇 부드러워졌던 것은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부터였다. 89년도에 이미 남북 단일팀을 위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깃발을 정하는 일부터 난항이었다. 남측은 흰색바탕에 녹색 한반도지도가 그려지고 그 아래에 KOREA 라는 문구를 새긴 기를 제시했고 북측은 흰색바탕에 황토색 한반도지도에다가 KORYO 즉 고려를 영문으로 새긴기를 제시했다. 남과 북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결국 흰색바탕에 파란색 한반도지도가 새겨진 깃발로 합의를 도출해 낸다. 이른바 한반도기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남과 북은 각각 북경아시안게임에 별개로 참가해서 한반도기의 공식적인 사용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뽀빠이 이상용과 북한 응원단장이 어우러진 모습에서 보듯, 한껏 달아오른 현장에서 하얀 바탕의 하늘색 한반도기는 응원의 깃발로 종종 수줍게, 때론 힘차게 휘날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한반도기가 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기회가 있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였다.
여자 탁구에 관한한 중국은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도 모자라는 우주 최강의 만리장성이었다. 그나마 개인전에서는 간혹 수나라 군대 때려잡은 살수대첩처럼 개가를 올린 적도 있었지만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는다는 것은 하늘에 별을 다는 일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때껏 중국은 단체전 8연패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물론 이에리사라는 스타를 내세워 한국 대표팀이 중국을 이긴 적도 이긴 적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탁구 좀 친다는 남과 북 모두에게 중국은 요즘 인터넷 용어로 ‘넘사벽’이었다.
이전의 대회에서도 안면이 있고 간단한 대화 정도는 나눴다고 하지만 남과 북의 선수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대회 이후 두 번째 케이스로 출범했던 세계 청소년 축구 단일팀에서는 선수 구성부터 각별한 신경전이 이뤄졌고 어느 쪽이 감독을 맡느냐에 대해서도 팽팽했거니와 지바에서도 크게 다른 형편은 아니었다. ‘분희 언니’라고 부르자 ‘정화 동무’로 맞받은 어색함 속에서 현정화 홍차옥 리분희 유순복으로 이뤄진 남북 단일팀은 승승장구 결승에 진출했다. 북한 선수들이 부담을 느끼던 유럽 선수들을 해치운 것은 현정화였고, 간염에 걸린 몸을 무릅쓰고 분전하여 한국 선수들을 감동시킨 것은 리분희였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었다. 그 선봉에는 탁구의 마녀 18세의 덩야핑이 서 있었다. 스포츠 즐겨 보았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떠올리기 싫은 몇 개의 이름들이 있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 축구팀 골키퍼 아르무감(원숭이같은 긴팔로 한국팀의 슛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중국의 여자농구 헐크 진월방 등등, 그 대열에서도 덩야핑은 한국 선수들을 매번 좌절시켰던 ‘마녀’였고 이 마녀는 빗자루 대신 라켓을 타고 다니며 이후 세계 대회 우승만 18번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 마녀가 맥없이 거꾸러진다. 마녀를 물리친 것은 남한의 에이스 현정화도 아니고 북한의 고참 리분희도 아닌 홍안의 함경도 처녀 유순복이었다. 현정화에 따르면 "약 먹은 것처럼 공을 쳤다. 한 포인트를 따내곤 한 40~50㎝씩 점프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약 먹었다는 표현이 틀리지도 않은 것이 그 뒤로 유순복이 언감생심 덩야핑을 물리친 적은 없었다. 아마도 약 먹었으리라. 사상 최초로 재일본거류민단과 조총련이 한데 모여 환영식을 열고 만찬을 베풀며 경기장에서 한 깃발 아래에서 백발 성성한 1세부터 우리말 서툰 3세들까지 코리아를 부르짖는 그 모든 분위기가 약이었으리라.
현정화도 질수 없다는 듯 중국 국내 선발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예 가오준을 눌렀다. 게임 스코어 2대0. 한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 눈 앞에 있었지만 중국은 중국이었다. 현정화 리분희 양 에이스가 나선 복식에서 졌고 현정화마저 중국의 덩야핑에게 덜미를 잡혔다. 다시 유순복이었다. 1991년 4월 29일 탁구선수대회 여자단체 결승전 마지막 경기에 나서는 유순복이 화면에 잡혔을 때 아련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파트 아래층에서 함께 TV를 지켜보는 가족들인 듯 했다. “유순복! 유순복! 유순복!” 작달막하고 동그란, 현정화처럼 매섭지도 않고 리분희처럼 노련해 보이지도 않는 뭉툭한 처녀는 세계랭킹 2위 가오준을 만났다.
운명은 2세트에서 갈렸다., 유순복은 천리마의 기세로 백핸드를 휘두르고 속도전의 스피드로 스매시를 매겨 1세트를 따냈고 2세트를 맞았는데 중국의 가오준은 2세트 들어서 막강한 ‘가오’를 잡기 시작했다. 유순복은 17대 12까지 몰렸다. 승리까지 4점을 남겨 둔 상황에서 갑자기 유순복은 또 약을 먹은 듯 했다. 한 점 한 점 유순복은 거짓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동점을 이뤘을 때 그때까지 흥분을 자제하고 있던 나는 펄쩍펄쩍 뛰었고 급기야 가오준을 잡아버린 순간 내가 마치 유순복인양 마루에 드러누워 버렸다. 재일교포들은 하염없이 울면서 만세를 불렀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스탠드에 일어서서 무엇 만세인지 모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처음으로 이룬 단일팀이 중국을 꺾고 세계를 제패하다니. 참으로 상서로운 징조로 보였고, 문익환 목사님의 싯귀 “통일은 됐어!”가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해로 끝이었다. 3년 뒤 남북은 불바다와 피바다의 협박을 교환하며 얼어붙었고 미국은 실제로 북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미국인들 소개령까지 내렸다. 강릉에는 잠수함이 표착해서 그 무장 대원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북으로 도망갔다. 또 소떼를 몰고 정주영 회장이 갔고, 대한민국 대통령과 조선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 손을 치켜들기도 했고 금강산도 수십만이 갔지만 요즘은 또 쥐새끼를 부르짖는 북한과 김정은을 표적지로 삼는 남한으로 되돌아와 있다. 평화와 적대의 핑퐁게임. 91년 이후 우리는 그짓을 해 왔었다.
지바의 영웅 현정화 감독의 말은 그래서 슬프다. “정치적인 이벤트를 할 바에야 차라리 단일팀 같은 거 하지 말고 각자 국가를 인정하고 사는 게 낫다는 마음이 굳혀졌다.” 그리고 그 다음 말에는 무조건 공감한다. “(통일을) 원하는 것도 있고 그냥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장기적으로는 준비를 해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빠져서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도와줘야 한다. 정말로 손을 떼어버리는 상태까지 가면 안 되지 않나.”
다음 주말에는 영화 <코리아>를 보러 가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지바의 진짜 영웅 유순복이 조연이 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사진 속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유순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