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6년 4월 28일 어느 대학생의 부모님 전상서
“아버지 어머니
... 저를 믿어 주십시오. 이 글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알게 되실 일을 준비하기 위해 무척 피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돌이켜보면 아주 피곤하고 힘들고 바쁘게 보낸 3년 2개월의 대학 생활이지만 저는 저의 기득권이 포기되고 구속이 되더라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이땅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교도소 안에서도 고민하고 나와서도 변혁 해방 운동에 이 몸을 바칠 것입니다.
충격이 크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주 여유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하면서도 아주 열심히 싸울 것이고, 성실히 고민할 것입니다. 경찰에게는 지난 수요일부터 쭉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얘기해 주세요. 수면의 부족과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저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서 글로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저는 해방된 주체로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이번 일은 저 스스로가 주동적으로 만든 일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면회가 가능하겠지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창 시절 학생회관에 밥 먹으러 가면 툭하면 위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주먹만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사실 상투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새벽이 밝아 옵니다,”로 시작해서 어머니의 그리운 품 운운하다가 “저는 어머님의 아들이면서 민중의 아들이자 조국의 아들” 등의 표현으로 마무리되는 편지들이 수도 없이 붙여졌던 시절이었다. 대개 이 편지들이 나붙은 이유는 ‘정리’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현장이라 불리우던 공장으로, 또는 다른 곳으로 존재 이전을 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 “나 잡아가라~~~” 고 민정당 연수원이나 기타 관공서를 습격, 점거하거나 시위를 주도하기 직전 쓴 글들이었던 것이다. 위의 학생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구치소에 가면 면회가 가능하다던가, 경찰이 오면 이러저러하게 대처해 달라든가 하는 문구로 보아 이 학생이 각오하고 있던 것은 체포와 투옥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체포되지도 않고 투옥되지도 않는다. 경찰이 그의 집에 찾아와 미주알 고주알 캐묻는 일도 없었다. 1986년 4월 28일 지금은 네온사인 휘황한 유흥가가 되어 버린 신림사거리에서 전방입소 시위 반대를 외치던 그 학생은 불길에 휩싸인 채 땅으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죽을 마음이 없었고 그럴 시도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 몸에 불을 당겼다. 다가오면 분신하겠다는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군홧발을 들이미는 전경 앞에서 그의 몸은 불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의 이름은 김세진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재호도 그 뒤를 따랐다. 83학번. 두 용띠 청년은 글자 그대로 화룡(火龍)이 되어 아스팔트를 녹이며 몸부림차다가 며칠 뒤 그 짧은 생들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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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8일 어느 대학생의 부모님 전상서
“아버지 어머니
... 저를 믿어 주십시오. 이 글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알게 되실 일을 준비하기 위해 무척 피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돌이켜보면 아주 피곤하고 힘들고 바쁘게 보낸 3년 2개월의 대학 생활이지만 저는 저의 기득권이 포기되고 구속이 되더라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이땅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교도소 안에서도 고민하고 나와서도 변혁 해방 운동에 이 몸을 바칠 것입니다.
충격이 크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주 여유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하면서도 아주 열심히 싸울 것이고, 성실히 고민할 것입니다. 경찰에게는 지난 수요일부터 쭉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얘기해 주세요. 수면의 부족과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저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서 글로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저는 해방된 주체로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이번 일은 저 스스로가 주동적으로 만든 일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면회가 가능하겠지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창 시절 학생회관에 밥 먹으러 가면 툭하면 위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주먹만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사실 상투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새벽이 밝아 옵니다,”로 시작해서 어머니의 그리운 품 운운하다가 “저는 어머님의 아들이면서 민중의 아들이자 조국의 아들” 등의 표현으로 마무리되는 편지들이 수도 없이 붙여졌던 시절이었다. 대개 이 편지들이 나붙은 이유는 ‘정리’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현장이라 불리우던 공장으로, 또는 다른 곳으로 존재 이전을 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 “나 잡아가라~~~” 고 민정당 연수원이나 기타 관공서를 습격, 점거하거나 시위를 주도하기 직전 쓴 글들이었던 것이다. 위의 학생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구치소에 가면 면회가 가능하다던가, 경찰이 오면 이러저러하게 대처해 달라든가 하는 문구로 보아 이 학생이 각오하고 있던 것은 체포와 투옥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체포되지도 않고 투옥되지도 않는다. 경찰이 그의 집에 찾아와 미주알 고주알 캐묻는 일도 없었다. 1986년 4월 28일 지금은 네온사인 휘황한 유흥가가 되어 버린 신림사거리에서 전방입소 시위 반대를 외치던 그 학생은 불길에 휩싸인 채 땅으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죽을 마음이 없었고 그럴 시도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 몸에 불을 당겼다. 다가오면 분신하겠다는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군홧발을 들이미는 전경 앞에서 그의 몸은 불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의 이름은 김세진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재호도 그 뒤를 따랐다. 83학번. 두 용띠 청년은 글자 그대로 화룡(火龍)이 되어 아스팔트를 녹이며 몸부림차다가 며칠 뒤 그 짧은 생들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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