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9년 4월 27일 땅벌 작전
지금은 그 이름이 장히 시들었지만, 한때 서울의 밤문화를 선도하던 7공자의 일원으로서 온갖 사치와 향락을 부리던 재벌 그룹 회장이 있었다. 이른바 재벌 2세였던 그의 일화는 차고 넘치지만 하나만 소개해 본다. 젊은 날의 그가 제주도에 나타나 그룹 회사의 제주 지사장에게 거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등 분탕질을 치자 그 횡포에 분노한 제주 지사장은 분연히 일어나 시외전화를 돌려 회장에게 직보한다. 충심어린 부하 직원의 호소를 들은 회장은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너 사표 내 시키야. 내 아들이 내 재산 쓰겠다는데 니가 왜 난리야.”
그런 환경에서 자라 대한민국에서 손 꼽는 대그룹의 총수가 된 그는 밤하늘의 별 같은 신화와 전설을 남겼지만 그 중에는 특이한 이력 하나가 있다. 대기업 총수로서는 특이한 범죄 피해자로서의 이력이다. 1979년 4월 27일 반포에 있던 그의 으리으리한 저택은 무장강도의 습격을 받는다. 그런데 이 무장강도단의 인적구성은 아주 특이했다. 대부분 대졸의 인텔리들이었고, 전과가 있는 이도 있었지만 절도나 강도 등 이른바 잡범들과는 거리가 먼 시국 전과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카빈총과 실탄을 빼돌리는 대담함을 보였고, 강도짓을 할 때에도 나름 치밀한 계획을 갖고 실행에 옮겼다. 고위 공직자 집에 침입해서 금도끼 등 패물을 빼앗은 것은 ‘봉화산 작전’이었고, (금도끼라니.... 혹시 산림청장 아니었을까? 신령님 만나 금도끼 은도끼 다 얻은 거 아닐까?) 문제의 그룹 회장의 집을 털고자 한 계획은 ‘땅벌 작전’이었다. 이들은 남민전, 즉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 준비위원회의 조직원들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반유신 투쟁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독재 정권에 빌붙어 떡고물 엄청 챙겨드시던 재벌가에 대한 응징에도 있었다. 땅벌 작전에 가세한 조직원 가운데에는 시인 김남주도 있었고, 이번에 국회의원이 된 이학영도 있었다.
대담하고 치밀했다고는 하지만 원체 범죄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인지라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일단 그들은 경비원을 제대로 제압하지도 못했다. 묶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결박이 튼튼하지 못해 경비원은 그를 풀고 강력하게 저항했고 결국 조직원 중 누군가가 그를 칼로 찌르고 말았다. 얼마 전 경기일보에 난 기사에 따르면 전치 3주였다고 하고 ‘중태에 빠뜨렸다’는 얘기도 있으니 어느 쪽이 맞는가는 좀 헛갈리지만 어쨌건 그들은 강도상해범으로의 범죄를 구성한다.
거기다 혁명가(?)로서의 보안 의식도 좀 낮은 편이었다. 대화 와중에 혁명 군자금 운운한 것이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경비원의 귀에 들어갔고 이 정보는 부랴부랴 달려온 이근안 이하 수사팀의 귀를 토끼귀처럼 쫑긋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는 일망타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 강도 미수범을 넘어 무시무시한 반국가조직의 일원으로 구속, 기소됐다. 남민전 사건이 공식화한 것이다. 이 조직의 혐의자 가운데에는 지금은 영 스타일을 구겼지만 한때 여당의 실세였던 이재오도 있었고, 진보신당 당대표였던 홍세화도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 보면 그들의 행동은 사실 미친 짓이다. 4.11 총선에 경기 군포 지역에서 79년의 강도미수범 이학영이 출마했을 때, 상대 후보였던 검사 출신은 ‘강도상해범을 국회의원으로 둘 수 없다’고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액면가로 보면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물론 그 날선 공격 때문에 왕년의 땅벌 작전 수행자 중의 하나가 경비원을 찌른 것은 이학영이 아니라 나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어쨌건 무장강도범의 일원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 분명하게 더 직시해야 할 것은 그들이 미쳤다면 당시의 세상은 더 미쳐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이라는 칼을 들고 헌정을 강도질한 유신 체제의 수괴였다. 제멋대로 헌법을 바꾸고 국민으로부터 대통령 뽑을 권리를 앗아갔으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체를 죽음으로 응징할 수 있었고 그 권리를 실제로 행사했던 시대의 ‘국사범’이라고 해야 옳다.
박정희의 공과는 세월이 더 흐른 뒤에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적어도 79년 4월의 동토의 공화국 대한민국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 죽여도 까딱 없는데 우리도 싹 밀어버립시다.”가 통하는 나라였으며, 초등학교 1학년인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여러분 경찰 아저씨는 제복만 입고 있지 않아요. 집에서 형이나 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밖에서 따라 하면 사복 입은 경찰 아저씨들이 잡아가요.”라고 애타게 말하게 했던 나라였고, 노조 결성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입에 똥이 처넣어지고, 타이밍 먹고 철야는 일도 아니었던 나라였다. 그리고 그 과실은 연예인들과 놀아나면서 서울의 밤 문화를 선도하고, 각지의 그룹 지사의 금고를 제 주머니 돈으로 알고 쓰던 귀공자들같은 부류들에게로만 돌아가던 나라였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사람 없다는 속담을 익히 아는 우리로서 사흘씩이나 굶어야 했던 시대의 강도라면 좀 다르게 평가해야 하듯, 적어도 그 시절의 감옥같던 공화국, 좀 불려 말하면 요즘 수구우익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북한의 통제사회와 맞먹는 감시사회, 그리고 부패사회를 꾸리던 국가에서 일어난 ‘땅벌 작전’에 대해서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과연 내가 유신 시대에 청년이었다면, 그리고 양순하고 말 잘 듣고 모범적인 젊은이였다면 나는 그를 자랑할 수 있을까.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착한 것이 흉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그랬는데 저 강도들은.... 이라고 손가락질할 때 그 선함과 양순함과 타의 모범이 됨은 결국 비겁이라는 단어 하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