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마지막 자존심 즈엉 반민
작년에도 베트남 패망 또는 해방의 날을 짤막하게 얘기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세세한 얘길 해 봐야겠다. 1973년 초 미국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베트남에서 사실상 손 뗄 것을 선언한 이래 남베트남의 운명은 사실 결정되어 있었다. 이 평화협정으로 키신저와 월맹 협상 대표 레둑토에게 나란히 노벨 평화상이 수여됐지만 레둑토가 단호히 거부했던 것은 그 서막이었다. 병력 110만. 공군력으로만 보면 세계 4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남베트남 정부였지만, 어느 정부에게건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일진대 남베트남 정부의 하늘은 너무도 흐렸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월남 지도층과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베트남에 헌신했던 ‘호 아저씨’와의 대비는 그대로 ‘닭둘기’와 공작새였다.
1974년 10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세를 결정했고 12월 사이공 코 앞의 (서울-대전 정도 거리의) 푸옥록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그래도 미국이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한 월맹군은 공세를 확대한다. 이제는 게릴라를 통한 국지적 소요가 아니라 정규군을 동원한 ‘조국 통일 공세’가 펼쳐진 것이다. 남베트남군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사병들은 싸우고 있는데 장교와 고위 장성들이 먼저 내빼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말로는 무척 용감했다. 요즘 한국식 표현으로 하면 ‘입보수’라고나 할까.
“미국이 우리를 돕지 않겠다면 떠나가게 내버려두라. 갈 테면 가라고 하라. 인도적 약속을 망각하게 내버려두라”면서 미국의 배신을 성토하며 사임한 응웬 반티우 대통령은 몇 톤의 금괴를 챙겨서 ‘나도 갈테야’ 군단에 합류했다. 4월 25일 떤선 공항 앞에서 한 인사가 열변을 토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과 함께 떠나는 비겁자는 가게 하라. 베트남을 사랑하는 이는 남아서 싸우자” 응웬 카오키 부통령이었다. 그 결연한 연설을 들으며 총 불끈 움켜쥐고 “그렇다. 어쨌든 내가 사랑하는 조국과 가치를 위해 싸우자.”고 눈을 빛낸 남베트남 장병도 여럿이었으리라. 그런데 응웬 카오키도 동맹국 한국의 초대 대통령의 역사를 공부했던 모양이다. 저 비감한 연설을 끝으로 그 역시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북베트남군은 “군화가 없어 맨발에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호치민 슬리퍼를 신고 식량이라고는 소금만 섭취한” (월남에서 억류된 이대용 공사의 회고) 강행군으로 남베트남의 수도를 죄어 들어왔다. 썩은 고목에 핀 꽃도 있는 법, 영웅적인 저항도 있었고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다한 남베트남 고위 장성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가장 빛나는 이는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 즈엉 반 민이었다.
독재로 이름 높았던 응오 딘 디엠 형제를 제거하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그는 4월 28일 다시 몰락해가는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다. 미국은 죽은 자식 고추만지는 심정으로 즈엉 반 민에게 마지막 방안을 제시한다. 이미 틈이 벌어지고 있던 중국과 북베트남 관계를 활용하여 “남베트남 정권 대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표, 즈엉반민의 ‘민족화해와 화합파’를 모두 아우르는 중립정부를 세워 북부의 레주언을 총리로 하는 친소파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한겨레 구수정 전문위원의 글 중에서.... 이 글의 내용은 구수정 전문위원의 취재 내용을 문대성 식으로 인용한 것이다.)
사이공 최후의 날 아침, 프랑스 정부의 특사인 바뉘셈 소장이 즈엉반민 대통령을 찾았다. “바뉘셈은 미국을 버리고 베이징을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24시간만 버텨달라고 민 장군을 설득했지. 그러면 중국이 하노이에 압박을 가해서 정전협정을 끌어낼 거라고.” (응웬흐한 보좌관) 하지만 즈엉 반민은 거부했다. 그리고 응웬흐한에게 이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젠 나더러 중국에 나라까지 팔아먹으라는군.”
가망없는 전쟁이지만 남베트남에 여전히 충성하는 군대도 수십만이었다. 전세는 기울었어도 고양이 앞에서 너 죽고 나 죽자고 쥐약 먹는 쥐는 있는 법이다. 오늘날의 북한 정권처럼. 그 참극을 막은 것이 즈엉 반 민이었다. 즈엉 반 민은 4월 30일 남베트남 최후의 날 9시 30분 다음의 메시지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한다. “ 본인은 동포들을 대표해, 우리 베트남인들의 화해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불필요한 유혈을 막기 위해 민족의 화합을 제의한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전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침착하게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나는 또 혁명군 전사들에게 사격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이곳에서 임시 혁명정부를 기다릴 것이다.”
그 이후 우리가 익히 본 풍경이 펼쳐졌다. 오전 11시 정각. 북베트남군의 탱크 부대가 대통령궁 정문을 짓부수며 진입했다. 응오 딘 디엠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쥐었지만 북베트남과의 투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미국의 노여움을 사 정권을 잃은 바 있던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 즈엉 반 민은 일어서서 북베트남군을 맞는다. “당신들이 왔군요.” 이틀 뒤 풀려나는 그들에게 남베트남 노동당 간부였던 전반짜는 이런 말로 즈엉 반민과 이별을 고한다.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다. 우리 베트남 민족이 미국을 이긴 것이다.”
대개 역사는 승장을 기억하고, 승리의 순간을 기록한다. 하지만 항상 패장은 있었고 패망의 순간도 그에 따라붙는다. 그리고 때로는 빛나는 승리보다는 현명한 패배가 희생을 줄이고 이후 역사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얘기했던 남북 전쟁의 로버트 리가 그랬고, 오늘 오전 항복 선언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기자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소. 인명을 구해야 하오.”라고 비통하게 토로하던 거한 (남베트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180센티미터를 넘는 장신이었음) 즈엉 반민의 오늘은 그 인생 가장 참혹한 날이었지만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날이기도 했다.
북베트남군이 들이닥치는 순간. 가운데 팔 건 남자가 즈엉 반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