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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4.15 거문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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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85년 4월 15일 거문도 사건



 1885년 3월 멀리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의 팬제 (지금은 키르키스탄 땅이라고 하는데) 라는 오아시스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러시아군과 영국군이 훈련을 시킨 아프가니스탄군의 대결. 러시아군은 일찍이 영국군에게도 참패를 안긴 바 있는 억센 아프간 전사들을 “최후의 1인까지” 전멸시키는 승리를 거둔다. 러시아 군 사망자 40명, 아프간 전사자 600명. 이에 바짝 긴장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수십 년 동안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워 왔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러시아가 진출한다는 것은 영국의 보배로운 식민지 인도의 동요를 뜻했다.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의 말투부터 달라졌다. “우리는 제국의 일부인 인도와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의 주권을 놓고 우리의 권위와 신념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4월 9일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이 서슬의 불똥이 튄 것은 난데없는 극동이었다. 4월 14일 영국 해군성은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해 있던 영국 함대 사령관 도웰 제독에게 함대를 출동시켜 ‘포트 해밀턴 (Port Hamilton)'을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명령을 지체없이 시행되어 4월 15일 영국 전함 아가멤논 호, 페가수스 호, 파이어브랜드 호는 ’포트 해밀턴‘에 닻을 내리고 영국 깃발을 꽂는다. 이 포트 해밀턴은 다름아닌 조선의 거문도였다. 여수와 제주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고, 현대 행정구역상으로는 여수시에 들어가고 과거에는 전라도 고흥 땅에 속했지만, 거리로는 제주와 더 가까운 곳. 거문도를 영국 해군이 포트 해밀턴으로 부르면서 눈여겨본 것은 이미 1840년대부터였다.



 거문항은 이른바 우묵배미 항구로서. 바다의 천연요새다. 동도, 서도, 고도의 3개 섬이 파도를 막아서서 항구는 항상 호수처럼 잔잔하다. 섬 넓이도 충분하고 물도 넉넉하게 나서 해군 기항지로서의 이점 뿐 아니라 이곳을 점거한다면 블라디보스톡에 기지를 둔 러시아의 해군의 목을 죄는 전략적 가치도 있었다.



 섬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영국 해군 이전에도 러시아 해군도, 미국 해군도 이곳에 기항하여 주민들과 접촉한 적이 있다. 이때 미국 해군 장교에 따르면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 때문에 차마 떠나기가 싫은” 섬이었다. 이렇듯 거문도 (당시로는 삼도나 삼호도 등으로 불리웠다. 거문도는 영국이 떠난 뒤에 붙여진 이름) 사람들에게 양코배기들은 그렇게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관리도 없고 수비군도 없었던 거문도에 영국군은 아무 저항 없이 상륙했다. 그들은 이렇게 보고했다. “러시아 함대는 보이지 않음.” 즉 이들은 러시아가 1년에 1/4은 얼어있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에 만족하지 않고 남하하리라 여겼고, 거문도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바, 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 점령으로 세계가 진동했고 러시아는 격노했으며 영국은 아예 막사를 짓고 장기 점령 준비에 들어갔으되 이 사실을 한 달이 넘게 까맣게 모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조정이었다. 영국은 청나라와 일본 정부에 4월 20일 점령 통고를 하지만 조선 정부에게 이 사실이 전달된 것은 한 달 동안이나 뒤였고, 그나마 조선 조정은 거문도가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강화도 근처의 주문도를 말하는 거 같습니다.”라는 게 구한말의 그나마 유능한 대신으로 평가받는 김윤식의 판단이었으니 더 할 말이 없겠다.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권을 가졌음을 만방에 과시하는 가운데 조선 조정에 훈수를 두면서 거문도 문제를 조정했다. 조선 조정도 ‘외교적 해결’에 힘을 기울였다. “귀국에서 아국의 해밀턴(거문도)을 빌어 잠시 동안 주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섬은 우리 국토 중 가장 긴요한 땅으로서 (어머머! 며칠 전까지 몰라놓고!) 비단 귀국뿐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의 요청이 있다 할지라도 이를 허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귀국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고 서로의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의미에서 더 이상 이런 제의를 말아 주기를 바랍니다.” (5월 20일 김윤식이 영국측에 보낸 공문) 정황을 완전히 파악한 이후 보낸 두 번째 공문은 자못 비장하다. “귀국과 같이 국제우의에 돈독하고 만국공법에 밝은 신사국가가 어찌 이러한 의외의 부당행위를 하였는지 실망과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전의 이해가 아무리 중하다 할지라도 세계 만방이 공유해야 할 공법을 앞설 수 없습니다....... 귀국에서 어떠한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이러한 합리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폐방 역시 그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또 이 사실을 세계 각국에 성명하여 그 공론을 들을 것입니다.”



 이 공문을 받은 영국 외무성과 해군성은 배를 쥐고 웃었을 것 같다. “야 조선에서 좌시하지 않겠다는데? 여수에서 전라좌수영 목선이라도 출동시키려나 본데? 아니면 주문도에 가서 우리 함대 찾는 거 아냐?” 그들은 섬 주민들에게 일당 넉넉히 줘 가면서 기지 시설은 물론 테니스 코트까지 지어놓고 신사답게 테니스를 치면서 아예 눌러앉을 태세를 취했다. 조선이 다방면으로 외교전을 펼쳤지만 별반 무소용이었다. 끝내 영국이 떠난 것도 조선의 외교 탓이라기보다는 정세의 변화 탓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 평화 협정이 이루어졌고 거문도가 중간 기항지로는 몰라도 조차지로 군항을 건설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다가 “그럼 우리도 조선의 다른 섬을 점령하겠다.”는 열강의 압박까지 이어지자 그제야 영국은 거문도에서 물러난 것이다.



 127년 전 4월 15일 유니언 잭을 들고 거문도에 상륙했던 영국군을 떠올려 본다. 러시아 함대도 열흘 넘게 섬을 장악한 바 있고, 미군 또한 그랬고 영국의 한 선장은 “동북아의 군함과 무역선 중간기착지로서 최고의 조건을 가진 이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영국은 그를 현실화시켰지만 조선 조정은 그 섬의 전략적 가치는 기본적인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교적 해결’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그나마 청나라에 기댄 것이었고, 영국은 조선의 대응에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만국 공법과 국제 우의’ 따위는 거문도에서 많이 잡히는 갈치 지느러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제주도에서 강정 해군 기지 반대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나는 이해한다. 절차상의 문제, 그리고 설득력의 문제에서 정부가 많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그 어느 세력이 집권을 하고 나라를 이끌든 국방에 대한 고민과 전략적 사고는 필요하다고 보며, 그 대안이라는 것이 ‘평화’와 ‘외교’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강정이 전략적으로 옳으냐 그르냐의 논쟁하자는 게 아니다. 강정이 아니라면 어디가 되어야 할 것이며, 과연 우리에게 국방력이란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강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칼을 쳐서 낫을 만들고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건 좋은데, 그렇게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를 19세기의 영국이든 21세기의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국제 관계의 변천과 자국의 이익에 따라 건드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고, 그 해결책이 ‘평화’와 ‘만국 공법’과 ‘외교력’이 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건 1885년의 거문도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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