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4년 4월 14일 <고래사냥> 부산 개봉
도사인지 거지인지 분간이 안가는 거지왕초와 요즘 말로 많이 찌질한 대학생, 거기에 말을 잃어버린 창녀가 펼치는 로드 무비 <고래사냥>은 많은 이들의 추억이라는 바다 속의 섬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서울에 비해 늦었던 시절, <고래사냥>은 3월 31일 개봉한 서울에 비해 2주일 늦게 부산에서 개봉됐다. 학교에서 보여주는 단체 관람을 제외하면 극장이 학생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 시절 (학생주임이 언급한 금지구역은 극장,롤러스케이트장, 전자오락실, 탁구장 등등 학생이 갈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이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독서실 간다고 거짓말을 치고 개봉하던 날 이 영화를 봤었다. 서울에서 한창 관객몰이를 하며 온갖 뉴스를 장식했던 터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환했고, 어찌 됐던 보자!는 합의가 아이들끼리 이뤄졌던 터였다. 중학생 관람이 어려웠던 영화였던 것 같은데 어찌 어찌 보게 됐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당시 부산 사람들 영화 보는 기준은 좀 특이했다. 서울 사람들이 거들떠도 안본 중국 무협 영화나 어설픈 코미디가 부산에서는 대박을 터뜨리는 일도 많았고, 서울에서 뜻밖의 흥행을 보인 예술 영화 같은 건 부산에 왔다가 사람 하나 없이 파리들만 왱왱거리면서 감상하는 비극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하지만 <고래사냥>은 달랐던 것 같다. 당시 부산에서의 한국영화 최고 관객 기록은 그 20년 전 1965년 만들어진 <저 하늘에도 슬픔이>였는데 그 수가 9만 8천 명이었다. 그런데 4월 14일 개봉 후 한 달 반만에 13만 명을 돌파, 무려 20년만에 ‘관객 수 10만’을 넘어서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나와 몇 명의 친구들도 그 13만 명 중의 하나였다.
허구헌날 여자한테 차이는 소심한 대학생 병태를 맡은 것은 가수 김수철이었다. <못다핀 꽃 한 송이>를 부르며 기타 뚱땅거리던 키 작은 가수는 배창호 감독이 말한대로 “그 모습 그대로 병태”였다. 거지 의상을 구하기 위해 남대문 시장을 몇 바퀴를 돌다가 어느 행려병자의 옷을 얻고 환호성을 질렀다는 안성기는 그야말로 도인의 풍모였다. 그리고 가슴 위쪽의 파인 부분을 살짝 드러내어 사춘기 중학생들 침을 꼴깍꼴깍 삼키게 했던 이미숙의 요염함(?)도 오래 잔상에 남았다.
영화를 보던 중 한 녀석이 불쑥 옆구리를 찔렀다. “야 근데 대체 고래는 언제 나오노?” 사실 보러 갔던 아이들 대부분은 명작 동화에서 봤던 허먼 멜빌의 ‘백경’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지왕초와 찌질이 대학생과 실어증 걸린 창녀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7번 국도를 내달릴 때 언뜻언뜻 보이는 그 파란 바다를 보면서 이제야말로 저들이 포경선에 타고 작살을 쏘아대지 않을까 어렴풋한 기대를 했지만 웬걸 고래 닮은 이대근 (포주)가 등장해서 그들과 사투를 벌이긴 했고 찌질하던 대학생 병태가 불굴의 용기를 과시하는 것이 감동적이긴 했지만, 이미숙이 말문이 터지고 눈 멀어가던 어머니에게 안경을 씌워드리는 것으로 ‘고래사냥’이 끝나는 게 아닌가. "고래는 먼바다 속이 아니라 내 맘속에 있어요.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 하는 김수철의 독백만 남기고.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오면서, 한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고래는 안나오고 고래같은 사람들은 나오더라 씨.” ‘고래사냥’이라는 묘한 느낌의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고 최인호가 작사하고 송창식이 작곡한 노래 <고래사냥>이 대학생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유신시대부터였다. 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대학생 ‘병태’는 등장했고 역시 무기력한 대학생 병태와 그 친구가 찾아나선 것도 “예쁜 고래 한 마리”였으니까. ‘체육대회’로 모든 학교가 휴강을 하고 교수는 “응원 연습(?)을 하러갈 사람은 가도 좋다. 출석 체크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병태는 창밖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응원 연습’에 참가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장면에서 보듯 영화 속에서조차 데모를 데모라고 말할 수 없고, 대학생들에게까지 바리깡을 들이밀며 장발 단속을 하던 시대, 대학생들이 떠나고자 한 동해 바다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는 무지갯빛보다 많은 색깔의 의미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쁜 고래’ 뿐 아니라 집채같은 몸집으로 송사리같은 대학생 개인 개인, 그 사회를 살던 젊음들을 압살시키던 ‘고래’같은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 내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고래같이 생긴’ 이대근이 자신으로부터 도망간 창녀를 잡기 위해 일행 앞에 나타났을 때 찌질이 병태, 거지 왕초를 만나 고래 사냥을 떠나기 전 낸다는 용기가 자신을 모욕했던 여자 뺨을 때리는 것이 다였던 그가 피칠갑이 되어 포주 일행에게 저항하고 달라붙고 그 무릎을 잡고 매달릴 때의 병태는 경찰이 장발단속을 할 때 “왜 불러?”의 배경 음악 속에 줄행랑을 치던, ‘체육대회’를 고민하며 바라보기만 하던 병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있었던 것도 같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과 같은 노래 <고래 사냥>이 한 소절도 등장하지 않을만큼, 시대는 아직 엄혹했다. 고래사냥은 ‘염세주의, 퇴폐주의’의 명목으로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고, 거지 왕초 안성기가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 때에도, 동해 바다를 따라 난 국도를 내달릴 때에도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의 호쾌한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수철이 새로이 만든 ‘젊은 그대’는 이 영화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 (심지어 까까머리 중학생까지)에게도 가슴을 트이게 하는 숨구멍으로 남았다. “거치른 들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아 아 태양같은 젊은 그대 젊은 그대”
1984년 4월 14일 <고래사냥> 부산 개봉
도사인지 거지인지 분간이 안가는 거지왕초와 요즘 말로 많이 찌질한 대학생, 거기에 말을 잃어버린 창녀가 펼치는 로드 무비 <고래사냥>은 많은 이들의 추억이라는 바다 속의 섬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서울에 비해 늦었던 시절, <고래사냥>은 3월 31일 개봉한 서울에 비해 2주일 늦게 부산에서 개봉됐다. 학교에서 보여주는 단체 관람을 제외하면 극장이 학생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 시절 (학생주임이 언급한 금지구역은 극장,롤러스케이트장, 전자오락실, 탁구장 등등 학생이 갈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이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독서실 간다고 거짓말을 치고 개봉하던 날 이 영화를 봤었다. 서울에서 한창 관객몰이를 하며 온갖 뉴스를 장식했던 터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환했고, 어찌 됐던 보자!는 합의가 아이들끼리 이뤄졌던 터였다. 중학생 관람이 어려웠던 영화였던 것 같은데 어찌 어찌 보게 됐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당시 부산 사람들 영화 보는 기준은 좀 특이했다. 서울 사람들이 거들떠도 안본 중국 무협 영화나 어설픈 코미디가 부산에서는 대박을 터뜨리는 일도 많았고, 서울에서 뜻밖의 흥행을 보인 예술 영화 같은 건 부산에 왔다가 사람 하나 없이 파리들만 왱왱거리면서 감상하는 비극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하지만 <고래사냥>은 달랐던 것 같다. 당시 부산에서의 한국영화 최고 관객 기록은 그 20년 전 1965년 만들어진 <저 하늘에도 슬픔이>였는데 그 수가 9만 8천 명이었다. 그런데 4월 14일 개봉 후 한 달 반만에 13만 명을 돌파, 무려 20년만에 ‘관객 수 10만’을 넘어서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나와 몇 명의 친구들도 그 13만 명 중의 하나였다.
허구헌날 여자한테 차이는 소심한 대학생 병태를 맡은 것은 가수 김수철이었다. <못다핀 꽃 한 송이>를 부르며 기타 뚱땅거리던 키 작은 가수는 배창호 감독이 말한대로 “그 모습 그대로 병태”였다. 거지 의상을 구하기 위해 남대문 시장을 몇 바퀴를 돌다가 어느 행려병자의 옷을 얻고 환호성을 질렀다는 안성기는 그야말로 도인의 풍모였다. 그리고 가슴 위쪽의 파인 부분을 살짝 드러내어 사춘기 중학생들 침을 꼴깍꼴깍 삼키게 했던 이미숙의 요염함(?)도 오래 잔상에 남았다.
영화를 보던 중 한 녀석이 불쑥 옆구리를 찔렀다. “야 근데 대체 고래는 언제 나오노?” 사실 보러 갔던 아이들 대부분은 명작 동화에서 봤던 허먼 멜빌의 ‘백경’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지왕초와 찌질이 대학생과 실어증 걸린 창녀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7번 국도를 내달릴 때 언뜻언뜻 보이는 그 파란 바다를 보면서 이제야말로 저들이 포경선에 타고 작살을 쏘아대지 않을까 어렴풋한 기대를 했지만 웬걸 고래 닮은 이대근 (포주)가 등장해서 그들과 사투를 벌이긴 했고 찌질하던 대학생 병태가 불굴의 용기를 과시하는 것이 감동적이긴 했지만, 이미숙이 말문이 터지고 눈 멀어가던 어머니에게 안경을 씌워드리는 것으로 ‘고래사냥’이 끝나는 게 아닌가. "고래는 먼바다 속이 아니라 내 맘속에 있어요.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 하는 김수철의 독백만 남기고.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오면서, 한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고래는 안나오고 고래같은 사람들은 나오더라 씨.” ‘고래사냥’이라는 묘한 느낌의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고 최인호가 작사하고 송창식이 작곡한 노래 <고래사냥>이 대학생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유신시대부터였다. 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대학생 ‘병태’는 등장했고 역시 무기력한 대학생 병태와 그 친구가 찾아나선 것도 “예쁜 고래 한 마리”였으니까. ‘체육대회’로 모든 학교가 휴강을 하고 교수는 “응원 연습(?)을 하러갈 사람은 가도 좋다. 출석 체크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병태는 창밖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응원 연습’에 참가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장면에서 보듯 영화 속에서조차 데모를 데모라고 말할 수 없고, 대학생들에게까지 바리깡을 들이밀며 장발 단속을 하던 시대, 대학생들이 떠나고자 한 동해 바다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는 무지갯빛보다 많은 색깔의 의미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쁜 고래’ 뿐 아니라 집채같은 몸집으로 송사리같은 대학생 개인 개인, 그 사회를 살던 젊음들을 압살시키던 ‘고래’같은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 내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고래같이 생긴’ 이대근이 자신으로부터 도망간 창녀를 잡기 위해 일행 앞에 나타났을 때 찌질이 병태, 거지 왕초를 만나 고래 사냥을 떠나기 전 낸다는 용기가 자신을 모욕했던 여자 뺨을 때리는 것이 다였던 그가 피칠갑이 되어 포주 일행에게 저항하고 달라붙고 그 무릎을 잡고 매달릴 때의 병태는 경찰이 장발단속을 할 때 “왜 불러?”의 배경 음악 속에 줄행랑을 치던, ‘체육대회’를 고민하며 바라보기만 하던 병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있었던 것도 같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과 같은 노래 <고래 사냥>이 한 소절도 등장하지 않을만큼, 시대는 아직 엄혹했다. 고래사냥은 ‘염세주의, 퇴폐주의’의 명목으로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고, 거지 왕초 안성기가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 때에도, 동해 바다를 따라 난 국도를 내달릴 때에도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의 호쾌한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수철이 새로이 만든 ‘젊은 그대’는 이 영화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 (심지어 까까머리 중학생까지)에게도 가슴을 트이게 하는 숨구멍으로 남았다. “거치른 들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아 아 태양같은 젊은 그대 젊은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