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9년 4월 13일 암리차르 학살
거대한 대륙 인도에는 그만큼 볼 것이 많지만 시크교도들의 성지인 암리차르의 황금사원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시크교의 네 번째 구루 (뭐라고 번역을 해야 할지)인 람다스가 만든 연못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이 되어고 다섯 번째 구루 아루잔 데브가 그 연못 가운데 사원을 지은 것이 황금 사원의 시작이다. 아프가니스탄 등의 침공으로부터 여러 번 파괴되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어졌고 1802년에는 지붕에 750킬로그램의 금이 씌워졌다. 황금사원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50곳 ” 가운데 여섯 번째에 올랐는데 여기에 들어가려면 신발부터 벗어야 한다. 하지만 시크교도들이 하도 반들반들 닦아 놔서 맨발도 불편하지는 않다고 한다.
암리차르는 펀잡 지방에 속하는데 이 지역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그 영토가 분할되었다. 그래서 암리차르에서 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이다. 여기서는 닭벼슬 모양의 군모를 쓴 인도군과 그처럼 요란하지는 않아도 인도에는 지지 않으려는 각오가 투철한 파키스탄군의 국기 하강식 세레모니가 화려하게(?) 펼쳐져 뭇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이 군인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허벅지가 얼굴에 닿도록 다리를 들어올리면서 행진한다. 그 높이가 국격을 상징하는 듯. 이렇게 말하니 인도에 한 한 달 가 있은 것 같지만 구글을 1분 검색했을 뿐, 나는 꿈에도 이곳에 간 적이 없다.
하지만 암리차르에 가게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황금사원에서 걸어서도 얼마 거걸리지 않는다는 잘리언왈라 바그다. 1919년 4월 13일 적게는 300명, 많게는 2천여명의 인도인들이 죽어나갔던 암리차르 학살의 현장이다. 1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영국은 자치의 확대 등 당근을 제시하며 인도를 회유했고 인도인들은 2백만 명이 넘는 병력과 막대한 전비를 내어 영국의 전쟁을 도왔다. 하지만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안면을 바꿨다.
되레 영국은 뻔히 예상되는 인도의 반영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로울래트법을 제정한다. 이다. 인도의 치안상황과 그 대책을 조사하기 위하여 임명된 위원회(위원장 로울래트)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이 법의 정식 명칭은 ‘무정부 혁명 분자 단속법’이었다. 이 법은 구속영장 없는 체포와 재판을 거치지 않는 투옥을 인정하는 등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탄압책을 골자로 하고 있다. 피와 땀을 흘려놓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인도인의 저항은 거세게 일어났고 영국은 이 로울래트 법을 한시법으로 하겠다는 둥 유화책을 구사하기도 하지만 전쟁 수발에 진력이 나고 피폐해진 인도 민중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으로 끓어올랐다. 당연히 영국의 긴장도 높아졌다.
펀잡의 암리차르의 잘리언왈라 바그. 1919년 4월 13일은 일종의 종교적 축일이었다. 시 외곽으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광장을 메웠다. 남녀노소 수천 명이 광장에 들끓고 있었지만 그들은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 것도 몰랐다. 28000제곱미터의 광장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통로가 여섯 개 있었지만 다섯 개는 너무 좁아 쓸모가 없었고, 하나는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다이어 준장은 그의 군대에 사격 명령을 내렸다.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이어는 집회금지령을 어기고 광장에 모인 범죄자들에게 ‘교훈’을 줄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후일 “1560발을 발사해서 1516명이 죽었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증언했던 그의 명령은 잔혹했다. 한 병사가 공중을 향해 총을 쏘자 그는 벼락같이 소리친다. “여기 뭐하러 왔나?” 총알을 피해 인도인들은 우물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우물에서 발견된 시체만 150구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다이어 준장은 유죄를 선고받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정글북’의 저자인 루디아드 키플링은 그를 ‘인도의 구원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연금을 기금을 모았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격노하여 노벨상을 받았을 때 기사 작위를 반납했고, 간디는 이 사건 이후 본격적인 대영 항쟁에 나서게 된다. 사건 다음 날 다이어가 우르두 어로 인도인들에게 행한 연설에는 단순 무식 과격의 극치를 달리는 제국주의 군인의 오만함이 고스란히 복사되어 있다. “분명히 대답하라. 전쟁이냐 평화냐...... 내 말에 복종하고 가게 문들을 열어라.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는다...... 내 명령에 복종하게 될 거다.”
다이어는 이 사건으로 별반 처벌받지 않았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 1927년에 죽었는데 4년 뒤 일본 식민지였던 조선의 합천에서 환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사람을 죽여 버린 그 잔인함과 그러고도 책임 추궁받지 않고 되레 호의호식하면서 잘 먹고 잘 산 것이며 그 비길데 없는 뻔뻔함까지, 어제도 선거하러 모습을 드러낸 생활수급자 전 영감과 그 성정이 어찌 그리 비슷한지. 하지만 인도인은 한국인과는 달리 암리차르의 복수를 일부 성공시킨다. 당시 펀잡 부총독이었으며 인도인 탄압에 앞장섰던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1940년 인도인 우담 싱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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