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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7 르완다 대학살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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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4년 4월 7일 르완다 대학살의 시작

아프리카 중부에 자리잡은 르완다와 부룬디 일대에는 여러 부족이 어울려 살았다. 인구의 80퍼센트를 넘는 후투족과 15퍼센트 정도의 투치, 그리고 산악지대의 트와 족과 키 작은 종족으로 유명한 피그미까지. 이 중 투치족은 이디오피아 쪽에서 남하한 용맹한 집단으로서 르완다 왕국을 형성하여 나머지 부족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특별한 경계...가 존재하지는 않았고 같은 말을 쓰고 같이 소 치고 농사지으면서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전 아프리카를 토막낸 제국주의 시대는 르완다에도 닥쳐 왔다. 르완다와 브룬디는 제국주의의 막차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차대전 때 독일이 패망한 뒤로는 벨기에의 손에 넘어갔다. 자국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에게 오줌을 눴다는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이 상징하듯, 유럽에서는 툭하면 짓밟히고 줘 터지는 작은 나라였지만 벨기에는 오늘날의 콩고 일대 등 자국의 수십 배 넓이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르완다는 그 일부였다.

지배자들의 동서고금에 걸친 금언대로 벨기에인들은 “분할시켜 통치한다.” (Devide an Rule)의 원칙을 철저하게 실천한다. 그때껏 별 구별 없이 살아가던 투치와 후투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벨기에였다. 후투와 투치의 존재 자체가 이 벨기에의 차별 정책의 산물이라는 학자도 있다. 벨기에 정부는 신분증에 후투와 투치를 명기하도록 했고 그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소수 투치족을 우대하고 그들의 손을 빌려 다수인 후투족을 지배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2차대전 뒤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이 오면서 르완다에도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는데 그를 주도한 것이 투치족이었다. 그러자 벨기에는 안면을 바꿔 후투족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후투족은 지금껏 자신들 위에 올라타 있던 투치족에게 칼을 간다. 1959년 후투족은 투치족을 공격했고 투치족들을 몰아내고 1962년 후투족 주도하의 독립이 선포된다.

다수인 후투족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들은 또 역으로 투치족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후투족은 투치족보다 우월한 종족이며, 후투족은 투치족과 결혼해서도, 투치족을 고용해서도, 투치족을 동정해서도 안된다는 등의 ‘후투 10계명’은 그 황당한 역차별의 일단을 증거한다. 하지만 투치족도 만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웃나라로 도망간 투치족들은 저항 조직을 결성하여 1990년 회심의 반격을 가하지만 프랑스와 벨기에가 자국 교민 보호를 이유로 개입하여 ‘일단 멈춤’ 상태에 들어가고 1993년 UN의 개입으로 해외 저항 조직을 포함한 투치족의 국내 복귀를 조건으로 한 평화 협약이 체결된다. 불안한 균형.

외줄 위의 광대같은 균형이 쨍 소리를 내면서 깨진 것은 1994년 4월 6일이었다. 르완다의 후투족 대통령 하비아리마나와 이웃나라 부룬디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누군가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떨어지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후투족은 이를 투치족의 소행으로 몰아부쳤지만 후일 이 비행기의 프랑스 승무원들의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투치족과의 권력 분점을 반대하는 쪽에서 비행기를 격추했다는 판결이 나왔다.
어쨌건 두 나라의 대통령이 몰살된 그 다음 날, 1994년 4월 7일 후투족은 투치족을 향한 무시무시한 인간사냥의 칼을 치켜든다. 후투족 민병대는 수도 키갈리 곳곳을 차단하고 후투족 색출에 나섰고, 라디오에서는 “투치 바퀴벌레들을 죽여라.”는 선동을 주문처럼 반복해서 읊어댔다. 순박한 농부, 친절한 교사, 엄숙한 목사들이 인간백정이 되어 칼을 휘둘렀고 마치 이삭 자르듯 이웃이었던 이들의 목을 잘라 나갔다. 공포에 질린 투치족의 일부가 후투족 기독교 목사에게 온갖 예를 다해 구원의 편지를 보냈을 때 그들이 받은 답신은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신은 당신들을 부인한다.” 르완다의 한 ‘목사’는 후일 5천명을 살해한 죄로 체포되기도 한다. 필립 고레비치라는 이가 쓴 <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라는,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소름끼치는 재구성을 보면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하루에 약 만 명씩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것도 독가스같은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라 칼과 낫, 몽둥이에 의해서. 정확한 희생자 수는 하느님도 모를 것이다.

원래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이들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또 그들이 점유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지분에 따라 ‘근본부터 다른’ 적대하고 배타해야 할 누군가로 규정되고 규정받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의 최대치를 르완다는 보여 주었다. 아프리카 토인들이 미개해서 그렇다고 혀를 찰 일은 전혀 아니다. 불과 60년 전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 양측은 각 정부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싹쓸이하는 데에 수완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행정력을 동원한 학살은 남한 정부가 먼저 시작했다. 남한 정부 스스로 갱생의 길을 열어주겠다고 조직한 보도연맹원들과 좌익사범들을 싸그리 죽여 버리라는 명령이 전쟁 초기의 정신없는 후퇴 과정에서도 매우 충실히 진행됐던 것이다. 그 시절 르완다의 농민들에게 아득한 나라 코리아에서 벌어진 소식이 전해졌다면 그들은 “그 황인종들은 사람도 아닌가보다.”라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요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이런 저런 오가는 말들을 듣노라면 기실 불안해진다. 전통적이고 유구한 좌우 또는 진보와 보수의 구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이슈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모세가 바다 가르듯 정연하게 갈라서고, 그 양쪽에 대한 적대심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떠한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 증오감이 무슨 형태로 발현될 것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더구나 르완다에 필적하는 대학살이 벌어졌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니게 되는 불안감은 화들짝 일상의 잠을 깨우기도 한다. 특히 르완다의 대학살이 시작이었던 오늘같은 날에는.

위에 언급한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후투족 민병대가 어느 여학교에 난입, 후투족 따로 투치족 따로 모일 것을 요구한다. 물론 바퀴벌레 투치들을 강간한 뒤 죽여 버릴 심산. 그 살기등등한 마체테 (정글용 칼) 앞에서 여학생들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르완다인일 뿐이에요.” 그리고 총질과 매질로 그 중 많은 이가 목숨을 잃는다. 후투와 투치 포함하여. 그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사람에게서 희망을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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