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199년 4월 6일 사자왕의 최후
영국 왕 헨리 2세는 꽤 영걸이었다. 잉글랜드 플란타지네트 왕조의 첫 왕으로서 프랑스에도 프랑스 왕 부럽지 않은 영토를 확보한 (사실 그는 프랑스 인이라 해야 옳고 프랑스어를 말했지만) 군주였다. 하지만 자식복만큼은 꽝이었다. 장남 헨리(이름이 같은)는 아버지에게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지만 이때 다른 자식들도 그 형 편을 들어 아버지의 수염을 뽑으려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헨리 2세는 막내 존만큼은 아끼고 사랑했는데 왕위가 존에게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둘째 리처드가 아버지의 철천지 라이벌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손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도 열받아 죽을 지경인데 그토록 사랑하던 존이 형 리처드한테 붙었다는 소식까지 들리자 헨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리처드가 바로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다. 그 숱한 무용담과 전설의 주인공으로서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 사자왕 리처드 1세인 것이다. 유달리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의 전형적인 무장인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189년,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해에 그는 머나먼 곳으로 원정을 떠난다. 십자군에 참여한 것이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래 100여년간 지탱해 오던 기독교도들의 거점이 아랍의 영웅 살라딘에 의해 허물어져갔고, 마침내 예루살렘도 이슬람의 손에 되돌아간 시점이었다. “성지탈환!”을 외쳤지만 리처드가 원했던 것은 전쟁인지도 모른다.
이 십자군 전쟁에서 아랍의 쿠르드 족 영웅 살라딘과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중세 기사도의 전설을 창조하며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리처드가 말을 잃고 싸우는 것을 본 살라딘은 왕의 품위를 지켜 준다는 뜻으로 말을 보내기도 했고, 리처드가 고열로 고생할 때에는 과일과 얼음을 가져다 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멧돼지같은 리처드도 살라딘에게 존경의 념을 품게 된다.
일진일퇴를 반복했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고 살라딘과 평화 협상을 맺는다.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되 기독교 순례자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협상의 골자였다. 살라딘은 “두 백성의 기쁨은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이 협상을 기뻐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 십자군 원정을 위해서 “런던도 팔아치울 기세”로 전비를 마련했던 그는 별반 전리품도 없이 귀향선을 타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자왕 아닌가.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전한다. “3년이다. 3년의 휴전 후에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되찾고 말 것이다.” 그러자 살라딘은 답을 보낸다. “내가 예루살렘을 잃는다면 당신에게 잃을 것이다.”
폼나긴 하지만 얻은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원정을 끝내고 오는 리처드의 길은 험난했다. 일찍이 자신이 “어딜 공작의 깃발이 국왕의 깃발과 나란히 하는고?”라고 부르짖으면서 그 깃발을 진흙탕에 처박은 바 있던 바로 그 백작, 레오폴드에게 사로잡혀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처박혔다.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난 그는 반역을 꾀한 동생 존을 무릎 꿇렸고 이어서 또 프랑스 왕과 전투를 치르다가 허무하게 가슴에 화살이 꿰뚫려 죽고 만다. 1199년 4월 6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는 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않았던 영국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땅에서 평생을 보냈고, “춥고 비오는” 영국 땅에는 딱 반 년 정도 머물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멋진 기사도를 발휘하기 위해 나간 전쟁의 모든 전비는 대개 영국인들의 몫이었고,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지불했던 몸값도 결국은 백성들의 피땀을 짜낸 돈이었다. 평생을 싸움박질만 했지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젬병이었던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였다. 그런데도 십자군 참전의 휘광, 그리고 살라딘과의 영웅담, 중세 기사도의 전설 등등으로 인해 리처드 1세는 영국 역사에서 사랑받는 왕으로 남아 있다. 영화 <로빈 훗>에서 막판에 카리스마 한칼로 등장하며, 오랫 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이며, 영국인들은 무슬림들도 “사상 최고의 용사”라며 두려워했던 리처드 1세에 대해 애정을 쏟았다.
전혀 백성에게 이롭지 않았고 되레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으면서도 리처드1세는 영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용맹무쌍한 중세 기사의 대표로, 결국은 돌아와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회복하는 왕으로 남아 있다.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서 쌓아올려진 이미지 덕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멍청했고 결국 영국 왕실이 그 이름을 쓰는 것을 영원히 포기한 실지왕(失地王) 동생 존과 상대적으로 비교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루같은 이미지, 그리고 상대적으로 낫다는 비교우위 속에서 영어는 거의 쓰지도 않았을 영국 왕이자 프랑스의 귀족 리처드는 그 실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위대한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런데 적고 보니 이상하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1199년 4월 6일 사자왕의 최후
영국 왕 헨리 2세는 꽤 영걸이었다. 잉글랜드 플란타지네트 왕조의 첫 왕으로서 프랑스에도 프랑스 왕 부럽지 않은 영토를 확보한 (사실 그는 프랑스 인이라 해야 옳고 프랑스어를 말했지만) 군주였다. 하지만 자식복만큼은 꽝이었다. 장남 헨리(이름이 같은)는 아버지에게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지만 이때 다른 자식들도 그 형 편을 들어 아버지의 수염을 뽑으려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헨리 2세는 막내 존만큼은 아끼고 사랑했는데 왕위가 존에게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둘째 리처드가 아버지의 철천지 라이벌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손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도 열받아 죽을 지경인데 그토록 사랑하던 존이 형 리처드한테 붙었다는 소식까지 들리자 헨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리처드가 바로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다. 그 숱한 무용담과 전설의 주인공으로서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 사자왕 리처드 1세인 것이다. 유달리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의 전형적인 무장인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189년,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해에 그는 머나먼 곳으로 원정을 떠난다. 십자군에 참여한 것이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래 100여년간 지탱해 오던 기독교도들의 거점이 아랍의 영웅 살라딘에 의해 허물어져갔고, 마침내 예루살렘도 이슬람의 손에 되돌아간 시점이었다. “성지탈환!”을 외쳤지만 리처드가 원했던 것은 전쟁인지도 모른다.
이 십자군 전쟁에서 아랍의 쿠르드 족 영웅 살라딘과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중세 기사도의 전설을 창조하며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리처드가 말을 잃고 싸우는 것을 본 살라딘은 왕의 품위를 지켜 준다는 뜻으로 말을 보내기도 했고, 리처드가 고열로 고생할 때에는 과일과 얼음을 가져다 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멧돼지같은 리처드도 살라딘에게 존경의 념을 품게 된다.
일진일퇴를 반복했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고 살라딘과 평화 협상을 맺는다.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되 기독교 순례자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협상의 골자였다. 살라딘은 “두 백성의 기쁨은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이 협상을 기뻐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 십자군 원정을 위해서 “런던도 팔아치울 기세”로 전비를 마련했던 그는 별반 전리품도 없이 귀향선을 타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자왕 아닌가.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전한다. “3년이다. 3년의 휴전 후에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되찾고 말 것이다.” 그러자 살라딘은 답을 보낸다. “내가 예루살렘을 잃는다면 당신에게 잃을 것이다.”
폼나긴 하지만 얻은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원정을 끝내고 오는 리처드의 길은 험난했다. 일찍이 자신이 “어딜 공작의 깃발이 국왕의 깃발과 나란히 하는고?”라고 부르짖으면서 그 깃발을 진흙탕에 처박은 바 있던 바로 그 백작, 레오폴드에게 사로잡혀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처박혔다.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난 그는 반역을 꾀한 동생 존을 무릎 꿇렸고 이어서 또 프랑스 왕과 전투를 치르다가 허무하게 가슴에 화살이 꿰뚫려 죽고 만다. 1199년 4월 6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는 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않았던 영국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땅에서 평생을 보냈고, “춥고 비오는” 영국 땅에는 딱 반 년 정도 머물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멋진 기사도를 발휘하기 위해 나간 전쟁의 모든 전비는 대개 영국인들의 몫이었고,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지불했던 몸값도 결국은 백성들의 피땀을 짜낸 돈이었다. 평생을 싸움박질만 했지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젬병이었던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였다. 그런데도 십자군 참전의 휘광, 그리고 살라딘과의 영웅담, 중세 기사도의 전설 등등으로 인해 리처드 1세는 영국 역사에서 사랑받는 왕으로 남아 있다. 영화 <로빈 훗>에서 막판에 카리스마 한칼로 등장하며, 오랫 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이며, 영국인들은 무슬림들도 “사상 최고의 용사”라며 두려워했던 리처드 1세에 대해 애정을 쏟았다.
전혀 백성에게 이롭지 않았고 되레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으면서도 리처드1세는 영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용맹무쌍한 중세 기사의 대표로, 결국은 돌아와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회복하는 왕으로 남아 있다.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서 쌓아올려진 이미지 덕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멍청했고 결국 영국 왕실이 그 이름을 쓰는 것을 영원히 포기한 실지왕(失地王) 동생 존과 상대적으로 비교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루같은 이미지, 그리고 상대적으로 낫다는 비교우위 속에서 영어는 거의 쓰지도 않았을 영국 왕이자 프랑스의 귀족 리처드는 그 실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위대한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런데 적고 보니 이상하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