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것 용서할 수 없는 것
생애 최악의 감기에 콜록거리는 중 누군가 내 이름을 들먹이며 중얼거리는 걸 듣고 화들짝 놀랐다. “아무개 넌 끝났어.” 아무리 장기간 기침을 해 댔기로서니 그렇게 심한 말을! 수분연히 일어나는데 알고 보니 동료가 든 이름은 ‘김용민’이었다. 나는 목사의 손자고 그쪽은 목사 아들이고, 나보다 두 배는 돼지 같긴 하지만 외양도 대충 비슷하고, 이름까지 유사하니 이거 참 동지의식이라 할지 애매한 감정이 스멀거리고 돋아났다.
‘목사 아들 돼지’ 김용민이 감옥에 간 정봉주의 대타로 느닷없이 ‘국회의원 후보’가 됐을 때 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딴지일보 총수께서 평가하신 바에 따르면 ‘천재적 편집’으로 나꼼수라는 상품을 띄웠던 PD이며, 실제 나꼼수의 F4로서 활약한 것은 분명하지만 김용민 ‘의원’이란 아직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한 일이라곤 공중파 프로그램몇 개 MC밖에 없는 이도 버젓이 국회의원 뱃지 달고 거들먹거리는 나라가 대한민국인데 말이다. 그에 비하면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창 박빙의 승부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던 그가. 갑자기 “끝났다”는 탄식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다름아닌 그의 막말 때문이었다. 8년 전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그가 내뱉었던 정도 이하의 막말들이 칼춤을 추면서 그에게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악명 높은 미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참상들과 미군의 만행을 보고 그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선을 넘어도 많이 넘었고, 심해도 보통 이상으로 심했다.
트윗에서 어떤 분께 그런 비유는 드는 것이 아니라는 훈계를 듣고 찔끔했으나, 그를 무릅쓰고 막말의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상에 아무리 분노한다 하더라도, 그 의분에 차서 “일본 왕세자비를 납치해서 윤간을 하고, 명동 거리 다니는 일본 여자들 유영철 같은 거 풀어서 확 어떻게 하자.”고 얘기하는 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측은한 눈길로 그를 쳐다볼 것이다. 인권을 짓밟은 이들이라고 해서 그들과 같은 방식의 복수를 운운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인권 침해이고, 되레 자신이 편든답시는 피해자에게도 폐가 되는 일이다. 동시에 자신도 똑같은 괴물이 되는 행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는 관대하기로 했다. 8년 전 그 혈기가 더욱 왕성할 때, 그저 찧고 까부는 인터넷 방송에서 쏟아부었던 생각 없는 말들인데다가 그가 우리의 복사왕 문대성처럼 우렁찬 거짓말로 국민들의 뺨을 돌려차대지 않고 정중하게 자신의 생각 없었음을 사과한 덕이고, 정말로 그가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적어도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을 한 번 더 생각하고자 했다면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보았다. 막말로 왕년에 막말 안해 본 사람은 없지 않은가.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 때려잡는 경찰들을 “찢어죽이고 싶던” 사람은 한둘이 아니고,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고 노래한 이도 서너 명이 아닐진대. 그 막말에 일일이 책임을 지우다가는 대한민국 국회는 유령의 집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관대한 나를 매우 편협하게 만드는 분들이 계시다. 다름아닌 김용민의 일부 지지자들이다. 이 사안에서 가장 명백한 것은 김용민이 잘못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대함을 발휘하는 쪽을 택하기는 했으되, 그의 인권적 감수성을 문제 삼아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전혀 무리한 의견이 아니다. 김용민은 그 요구에 더욱 허리를 굽혀야 하고, 정말 잘못되었다, 젊은 날의 무람함이었으니 뼈 속 깊이 각인하고, 다시는 그런 망발을 일삼지 않을 것인즉, 기회를 달라고 호소해야 정답인 것이다. 그런데 김용민의 일부 지지자들은 정확하게 그 대척점을 향해 돌진한다.
그들이 첫 번째 증명하고자 한 것은 미국이 얼마나 나쁘고, 미군들이 얼마나 사악한 행동을 했느냐는 점이었다. 그 덕에 오랫 동안 잊고 살던 끔찍한 풍경들을 여러 컷 다시 보게 됐다. 그들의 뜻은 이렇게 나쁜 놈들이었으니 김용민이 한 막말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건 바빌로니아 시대 함무라비 왕이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일 뿐이다. 미국이 저지른 범죄는 그 사악함의 정도가 아니라 인간 일반에 대한 무례와 폭력이라는 지점에서 단죄되고 규정되는 것이다. 저쪽이 저렇게 사악했으니 우리가 이 정도 한 걸 용납하라는 요구는 정수리 사이에 솟은 악마의 뿔이 우리는 저쪽보다 훨씬 짧다고 자랑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김용민의 지지자들은 “저들이 이렇게 나빴으니 김용민의 잘못을 용서하라.”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발 더 나아간다. “미군의 만행이 담긴 이 사진들을 보고 김용민처럼 욕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트윗에서는 내 눈을 의심했거니와, 김용민의 행동이 무엇이 문제냐는 식의 논리가 무성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용민이 나꼼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일깨웠는데, 겨우 이런 문제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는 적반하장이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것이다. 아울러 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입진보 또는 순결주의자, 심지어 ‘조중동의 프레임에 걸린 자’로 몰아붙이는 얼치기 종교재판관이 납신 것이다.
그들이 즐겨 인용한 경구 중의 하나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것이다. “그만큼 우리를 위해 싸워 줬으면 비 올 때 같이 맞아줘도 되잖아.” 일단 김용민이 나꼼수 이외에 얼마만큼 우리를 위해 싸워 줬는지는 차치하자. 그건 생각 따라 인도의 카스트처럼 천차만별일 테니까. 하지만 우리를 위해 싸워 준(?) 공덕이 있는 이와 비는 함께 맞아줘도 좋겠지만, 비를 같이 맞는다는 것은 그의 과오와 오류를 인정하고 그 재발을 방지하는 약속이자 다짐으로써 이뤄지는 일이지, 그의 잘못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변호하거나 그 잘못을 지적하는 의견에 욕설을 퍼붓는 행위가 아니다. 단언컨대 그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홍수난 집에서 함께 물을 엎지르는 행위다.
물론 국회의원 한 석 중요하다. 더구나 참 쳐다보기도 싫은 저 쉰내나는 극우 정당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금덩이만큼이나 소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한 석을 위해서 우리가 못내 지켜야 할, 버리지 말아야 할, 그리고 추구해야 할 인간의 존엄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훼손된다면 그건 다이아몬드 광산을 폭파시키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대상이 라이스라고 해서 유영철같은 걸 시켜서 강간한 뒤에 어쩌고 하는 막말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어기는 일이다. “너희들은 훨씬 심했어! 우린 양반이라고!”라고 대거리하고 싶겠지만 조금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건 빨갱이들의 심장에 죽창을 박던 우익들이 뇌까리던 소리였다. “북한이 저렇게 지독하니까 우리도 이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설교하던 꼴통 윤리 교사의 망발이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상대성 원리(?)를 극복하는 과정이었지 않은가.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인간의 권리와 존엄, 그것을 무시하는 언어와 행동에 대하여 반대하고 그 범위 안에서 서로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나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노정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김용민이라는 국회의원 후보 때문에 그 원칙이 흔들리고 “김용민 사퇴하라는 것들은 다 친미파!”라는 식의 딱지가 난무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김용민을 찍어야 하며, 왜 새누리를 반대해야 하며, 왜 정권교체를 이뤄야 하는가. 도대체 뭘 위해서?
거듭 말하지만 나는 김용민이 사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8년 전의 막말에 대해 뼈저린 책임을 지고, 그의 표현대로 평생의 짐으로 가져갈 일이다. 그리고 “비 좀 같이 맞아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섣부른 어깨동무를 걸기보다는 자신의 막말에 담겼던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무시를 쓸개 삼아 핥으면서, 그 막말이 가져왔던 파장과 아픔을 가시섶 삼아 그 위에 올라 지역 구민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자신을 사랑해요 외치는 지지자들에게 자신은 분명 잘못했으며 그 죄를 사퇴가 아니라 국회의원으로서 갚음할 기회를 구할 것임을 천명하고, 사퇴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겸허하게 고개 숙인다고 선언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쯤은 되어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진보’편의 국회의원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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