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0년 4월2일 최초의 조인(鳥人)의 추락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른 것이 1903년이었다고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세계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극동의 한 나라에 비행기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꼭 10년 뒤인 1913년이었다. 일본 해군 중위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였다. 그런데 그 날짜 선택이 매우 고약하다. 1913년 8월... 29일이었다. 즉 경술국치 3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의 하늘을 날아올랐던 것이다. “조선놈들아. 니들이 비행기를 알아?”라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래봐야 수십 초 정도 밖에 체공하지 못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입을 벌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일본놈들 역시 대단한데.”
1차대전을 겪으며 비행기와 비행 기술 모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곡예비행쇼를 펼침으로써, 돈도 벌고 세계일주 여행도 하던 비행사들이 있었다.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17년 한국에 왔는데, 그가 보여 준 비행은 4년 전 나라하라가 낑낑대며 떠올라 1분도 못 버티고 화급하게 내려왔던 ‘비행의 추억’을 그야말로 어린애 걸음마로 만들어 버렸다. 떨어질 듯 다시 떠오르고 뒤집었다 엎었다를 자유자재로 하는 스미스의 비행기를 찬탄 속에 지켜보던 군중들 가운데 우리 나이로 열 일곱살인 휘문고보 학생 하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의 이름은 안창남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까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0년 봄에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한다. 그런데 그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비행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거리 비행(도쿄-마쓰에), 2천 미터 상공에서 한 시간 머물기, 5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엔진을 끄고 활공으로 착륙하는 세 가지 어려운 시험에서 안창남은 수석이자 유일한 조선인으로 합격한다.
조선인이 허다한 일본인들을 제치고 일본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있다는 뉴스는 조선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사이클 경주 때마다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엄복동과 더불어 안창남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안창남 또한 “ 한번 반가운 고국의 공중에 날아 보고저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여름부터 여러 차례 본사에 향하여 직접과 간접으로 주선하여주기를 간청하였음으로” 동아일보는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위원회를 결성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안창남은 마침내 1922년 12월 5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강호’가 떠오른다. 동포들의 돈으로 마련된 비행기에는 조선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을 미루자는 말도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거니와 ‘금강호’는 날씨가 추우면 제 기능을 발휘 못하는 비행기였다. ) 그때 안창남은 고집한다. 경성 인구 1/6이 지금 여기 몰려들었는데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실제로 안창남 본인도 최초로 고국의 하늘을 난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 곳의 하늘을 날아볼고’하여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우며 지냈습니다. 참으로 동경이나 대판같은 크나큰 시가가 내 발 밑에 아름아름 내려다 보일때 나는 몇 번이나 비행기 머리를 서편으로 돌리고 조선쪽을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의도에서 발표한 안창남의 성명)
그는 일본에서도 유능한 조종사였고 훌륭한 비행술 교관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죽을 뻔한 일을 겪긴 했으나 그건 운이 나빴다고 치고, 일본에서 비행 학교 교육자로서, 조종사로서의 전도는 양양한 것이었다. 일본 최초의 조종사 면허 합격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망명을 택한다. 그 이유는 그의 비행 소감의 일단에서 엿볼 수 있다.
“경성의 하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최초로 조선의 하늘에 떠오른 비행사는 아름다운 고국의 풍광에 감탄하면서도 그 고국에 드리운 식민의 그림자를 명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의 형제’들이 절도나 강간범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 않았겠는가.
그는 보장된 미래를 떨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여운형의 소개로 군벌 염석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를 키워내는 교관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1930년 4월 2일 나이 서른의 꽃다운 죽음이었다. 그는 여의도에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 비행학교에도 우리 곳(조선) 청년이 세 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 외에도 배우게 해 달라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든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디까지든 내 힘껏 가르쳐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용이히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넓디나 넓은 비행장 한귀퉁이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몇번이나 따라 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추락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하 미련과 아울러 “더 가르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 슬프고도 아까운 죽음이 있던 날로부터 90여년이 지난 오늘 아침 나는 부산에서 출마했다는 한 전직 주사파랍시는 한 국회의원 후보의 망발을 들었다. “30년대 후반의 우리 조상들은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930년 부귀영화 떨치고 고국을 위해 뭔가 하려다 죽어간 안창남에게 이 국회의원 후보는 “10년 뒤에는 다 바뀐다니까요. 그때 비행기 보고 환성지르던 어린애들 다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게 돼요.”라고 설복할 자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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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2일 최초의 조인(鳥人)의 추락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른 것이 1903년이었다고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세계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극동의 한 나라에 비행기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꼭 10년 뒤인 1913년이었다. 일본 해군 중위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였다. 그런데 그 날짜 선택이 매우 고약하다. 1913년 8월... 29일이었다. 즉 경술국치 3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의 하늘을 날아올랐던 것이다. “조선놈들아. 니들이 비행기를 알아?”라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래봐야 수십 초 정도 밖에 체공하지 못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입을 벌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일본놈들 역시 대단한데.”
1차대전을 겪으며 비행기와 비행 기술 모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곡예비행쇼를 펼침으로써, 돈도 벌고 세계일주 여행도 하던 비행사들이 있었다.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17년 한국에 왔는데, 그가 보여 준 비행은 4년 전 나라하라가 낑낑대며 떠올라 1분도 못 버티고 화급하게 내려왔던 ‘비행의 추억’을 그야말로 어린애 걸음마로 만들어 버렸다. 떨어질 듯 다시 떠오르고 뒤집었다 엎었다를 자유자재로 하는 스미스의 비행기를 찬탄 속에 지켜보던 군중들 가운데 우리 나이로 열 일곱살인 휘문고보 학생 하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의 이름은 안창남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까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0년 봄에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한다. 그런데 그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비행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거리 비행(도쿄-마쓰에), 2천 미터 상공에서 한 시간 머물기, 5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엔진을 끄고 활공으로 착륙하는 세 가지 어려운 시험에서 안창남은 수석이자 유일한 조선인으로 합격한다.
조선인이 허다한 일본인들을 제치고 일본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있다는 뉴스는 조선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사이클 경주 때마다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엄복동과 더불어 안창남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안창남 또한 “ 한번 반가운 고국의 공중에 날아 보고저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여름부터 여러 차례 본사에 향하여 직접과 간접으로 주선하여주기를 간청하였음으로” 동아일보는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위원회를 결성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안창남은 마침내 1922년 12월 5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강호’가 떠오른다. 동포들의 돈으로 마련된 비행기에는 조선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을 미루자는 말도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거니와 ‘금강호’는 날씨가 추우면 제 기능을 발휘 못하는 비행기였다. ) 그때 안창남은 고집한다. 경성 인구 1/6이 지금 여기 몰려들었는데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실제로 안창남 본인도 최초로 고국의 하늘을 난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 곳의 하늘을 날아볼고’하여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우며 지냈습니다. 참으로 동경이나 대판같은 크나큰 시가가 내 발 밑에 아름아름 내려다 보일때 나는 몇 번이나 비행기 머리를 서편으로 돌리고 조선쪽을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의도에서 발표한 안창남의 성명)
그는 일본에서도 유능한 조종사였고 훌륭한 비행술 교관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죽을 뻔한 일을 겪긴 했으나 그건 운이 나빴다고 치고, 일본에서 비행 학교 교육자로서, 조종사로서의 전도는 양양한 것이었다. 일본 최초의 조종사 면허 합격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망명을 택한다. 그 이유는 그의 비행 소감의 일단에서 엿볼 수 있다.
“경성의 하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최초로 조선의 하늘에 떠오른 비행사는 아름다운 고국의 풍광에 감탄하면서도 그 고국에 드리운 식민의 그림자를 명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의 형제’들이 절도나 강간범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 않았겠는가.
그는 보장된 미래를 떨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여운형의 소개로 군벌 염석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를 키워내는 교관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1930년 4월 2일 나이 서른의 꽃다운 죽음이었다. 그는 여의도에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 비행학교에도 우리 곳(조선) 청년이 세 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 외에도 배우게 해 달라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든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디까지든 내 힘껏 가르쳐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용이히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넓디나 넓은 비행장 한귀퉁이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몇번이나 따라 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추락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하 미련과 아울러 “더 가르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 슬프고도 아까운 죽음이 있던 날로부터 90여년이 지난 오늘 아침 나는 부산에서 출마했다는 한 전직 주사파랍시는 한 국회의원 후보의 망발을 들었다. “30년대 후반의 우리 조상들은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930년 부귀영화 떨치고 고국을 위해 뭔가 하려다 죽어간 안창남에게 이 국회의원 후보는 “10년 뒤에는 다 바뀐다니까요. 그때 비행기 보고 환성지르던 어린애들 다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게 돼요.”라고 설복할 자신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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