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19.3.29 기생 김향화의 대한독립만세
태릉갈비가 왜 유명하며 홍릉갈비며 정릉갈비며 하는 상호들이 많을까. 그것은 왕릉이나 왕비릉에는 제사가 잦았던 바,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고기들이 젯상에 자주 올랐으므로 그 주변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조리하는 법을 수이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한 수원갈비도 그렇다. 슬프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자주 방문했고 항차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했던 정조의 존재 때문에 고기 구경할 일이 많았던지라 수원갈비가 명성을 얻었다는 것이다.
고기가 있으면 또한 따르는 것이 음주와 가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더욱 즐겁게 하는 데에 동원되는 것이 기생이었으리라. 수원에도 많은 기생들이 있었다. 일제 통치가 시작된 이후 기생들은 권번이라는 조직에 편입되어 이른바 위생 검사부터 개인적 신상명세까지 행정적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한달에 한번씩 위생검사 즉 성병검사가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검사처인 자혜병원은 정조의 위폐와 어진이 모셔져 있던 화령전과 왕이 머물던 봉수당 자리였다.
"말하는 꽃"이라 불리우던 기생들이지만 하늘같이 받들던 옛날 임금님의 위패가 엄존하던 곳에 일본인 의사들이 진을 치고 기생들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에는 심사가 뒤틀렸으리라. 수원 권번 소속 가운데 두번째 왕언니였고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고 기록된 스물 셋의 기생 김향화는 그 포한을 가슴 속 깊이 포개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원 일대의 술집은 문을 닫았고 기생이고 광대고 죄다 일손을 놓았다. 즉위한지 근 반세기, 망국의 황제일망정 격변을 함께 한 군주는 민중들에게 심후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덕수궁 앞은 상복 입은 조선인들의 통곡으로 뒤덮였다. "우리도 올라가자! 황제폐하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자." 김향화를 비롯한 20여명의 기생들은 상복 입고 나무비녀 꽂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타 덕수궁 앞에서 호곡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울음같은 만세소리가 폭발했고 그 폭음은 삼천리 방방골골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 19일 한 신문에는 한반도 남쪽의 유서깊은 도시에서 일어난 한 만세 시위 기사가 실렸다. 진주의 기생 6명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한이 없다’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가장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이 가장 용감하게 일어서는 이 나라의 희한한 역사 한 자락이 또 펼쳐진 것이다. 수원 기생들도 이 기사를 보았으리라.
3월29일은 수원 권번 소속 기생들의 검진일이었다. 기생 33명은 함께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여기도 33명) 병원 가는 길에 기생들을 단속하고 못살게 굴던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우는 애도 순사 온다면 그치고 조선인들에 대한 태형(매질)이 합법이던 시절,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일본 경찰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행동을 벌인다. 그 정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이다. 장구에 맞춰 소리를 부르던, 술 사내들 속을 녹이던 그 간드러진 음성들은 칼날처럼 경찰서를 겨누며 수원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3월25일부터 수원 인근이 조용하지 않았었지만 기생들이 이러고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제 경찰은 곧 잔인한 진압에 들어갔다. 10대의 소녀도 포함된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짓밟히고 끌려가자 지켜보던 시민들도 울컥했다. 기생들의 독립만세를 들으며 얼마나 부끄러웠으랴. 얼마나 그 얼굴이 뜨거웠으랴. 시위는 과격해졌고 돌이 날고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 역시 잔학을
더했으니 4월의 제암리 학살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김향화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지만 그녀가 감옥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징역 선고 기사 후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본명이 순이였던 김향화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혹은 감옥에서 시들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단지 고은 시인이 그의 기생 독립단이라는 시 속에서 그녀를 보존하고 있을 뿐.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을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1919.3.29 기생 김향화의 대한독립만세
태릉갈비가 왜 유명하며 홍릉갈비며 정릉갈비며 하는 상호들이 많을까. 그것은 왕릉이나 왕비릉에는 제사가 잦았던 바,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고기들이 젯상에 자주 올랐으므로 그 주변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조리하는 법을 수이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한 수원갈비도 그렇다. 슬프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자주 방문했고 항차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했던 정조의 존재 때문에 고기 구경할 일이 많았던지라 수원갈비가 명성을 얻었다는 것이다.
고기가 있으면 또한 따르는 것이 음주와 가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더욱 즐겁게 하는 데에 동원되는 것이 기생이었으리라. 수원에도 많은 기생들이 있었다. 일제 통치가 시작된 이후 기생들은 권번이라는 조직에 편입되어 이른바 위생 검사부터 개인적 신상명세까지 행정적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한달에 한번씩 위생검사 즉 성병검사가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검사처인 자혜병원은 정조의 위폐와 어진이 모셔져 있던 화령전과 왕이 머물던 봉수당 자리였다.
"말하는 꽃"이라 불리우던 기생들이지만 하늘같이 받들던 옛날 임금님의 위패가 엄존하던 곳에 일본인 의사들이 진을 치고 기생들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에는 심사가 뒤틀렸으리라. 수원 권번 소속 가운데 두번째 왕언니였고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고 기록된 스물 셋의 기생 김향화는 그 포한을 가슴 속 깊이 포개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원 일대의 술집은 문을 닫았고 기생이고 광대고 죄다 일손을 놓았다. 즉위한지 근 반세기, 망국의 황제일망정 격변을 함께 한 군주는 민중들에게 심후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덕수궁 앞은 상복 입은 조선인들의 통곡으로 뒤덮였다. "우리도 올라가자! 황제폐하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자." 김향화를 비롯한 20여명의 기생들은 상복 입고 나무비녀 꽂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타 덕수궁 앞에서 호곡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울음같은 만세소리가 폭발했고 그 폭음은 삼천리 방방골골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 19일 한 신문에는 한반도 남쪽의 유서깊은 도시에서 일어난 한 만세 시위 기사가 실렸다. 진주의 기생 6명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한이 없다’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가장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이 가장 용감하게 일어서는 이 나라의 희한한 역사 한 자락이 또 펼쳐진 것이다. 수원 기생들도 이 기사를 보았으리라.
3월29일은 수원 권번 소속 기생들의 검진일이었다. 기생 33명은 함께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여기도 33명) 병원 가는 길에 기생들을 단속하고 못살게 굴던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우는 애도 순사 온다면 그치고 조선인들에 대한 태형(매질)이 합법이던 시절,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일본 경찰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행동을 벌인다. 그 정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이다. 장구에 맞춰 소리를 부르던, 술 사내들 속을 녹이던 그 간드러진 음성들은 칼날처럼 경찰서를 겨누며 수원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3월25일부터 수원 인근이 조용하지 않았었지만 기생들이 이러고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제 경찰은 곧 잔인한 진압에 들어갔다. 10대의 소녀도 포함된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짓밟히고 끌려가자 지켜보던 시민들도 울컥했다. 기생들의 독립만세를 들으며 얼마나 부끄러웠으랴. 얼마나 그 얼굴이 뜨거웠으랴. 시위는 과격해졌고 돌이 날고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 역시 잔학을
더했으니 4월의 제암리 학살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김향화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지만 그녀가 감옥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징역 선고 기사 후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본명이 순이였던 김향화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혹은 감옥에서 시들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단지 고은 시인이 그의 기생 독립단이라는 시 속에서 그녀를 보존하고 있을 뿐.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을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