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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3.28 우치무라 간조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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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0년 3월 28일 우치무라 간조의 야망

일본의 홋카이도는 일본 내에서 발전이 더딘 지역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는 바, 이를 위하여 일본 정부는 협조를 구했다. 이때 미국에서는 농업 관련의 전문가인 메사추세츠 농대 학장 윌리엄 클라크를 보내 준다. 그로부터 1년간 삿뽀로에서 체류하면서 삿뽀로 농업 대학을 설립했던 그는 선진 문물과 지식의 전달자이면서 열정적인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솔선수범하며 학교 건설과 교육에 힘쓴 클라크는 제자들의 감동과 존경의 대상이었고 그의 감화로 1기생 전원이 기독교에 귀의한다. 1년 뒤 클라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여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이 유명한 말을 남긴다. “Boys! Be ambitious!"

클라크와는 인연이 없었지만 그가 귀국한 뒤 들어온 2기생 중에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며 동경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가졌지만 경제적 여건상 삿뽀로까지 오게 된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우치무라 간조. 그는 선배들의 강압에 가까운 기독교 선교를 받으며 생활했고, 자신도 기독교에 흥미를 느껴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서양 선교사에게 의존하는 기독교가 아닌 일본의 독립적인 기독교를 추구했고, 설교를 포함한 모든 예배와 교회 행정을 자신들의 주체적인 참여로 해결하고자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서도 그는 “두 개의 J만을 사랑한다.” 고 했을 정도였다. 두 개의 J란 Jesus와 Japan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국 일본을 사랑하는 방식은 먼 훗날 인근의 나라의 목회자들처럼 집권자의 조찬기도회에서 통성 축복을 하거나 “대통령님은 기름 부은 자” 따위로 집권자들에게 아양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진가는 1891년 1월 9일 그가 교편을 잡고 있던 동경제일고등중학교에서 발휘된다.

그날은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 반포일이었다. 학교에서는 단상에 천황 초상화와 교육칙어를 모셔 두고 각 구성원들이 90도로 절하는 해괴한 (그들로서는 엄숙한) 의식을 벌였는데 우치무라 간조 선생님은 어이없게도 그 앞에서 고개만 까닥했을 뿐, 그 이상의 예를 갖추지 않는다. 좌중이 술렁이는 가운데 격한 분노의 외침도 터져나왔지만 우치무라의 허리는 굽혀지지 않았다. 당장 동료 교사와 학생들부터 난리가 났다.

집에는 돌이 날아들었고 매스컴은 이 ‘불경죄’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 즐비한 가운데 도망을 다녀야 했고 여관에 투숙할 때에는 가명을 써야 했다. 그즈음 우치무라는 폐렴에 걸려 있었는데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만 아내가 폐렴이 옮아 덜컥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직장도 잃고 아내도 잃어버린 최악의 상황. 하지만 우치무라 간조는 굴하지 않고 일본의 기독교, 일본인을 위한 기독교를 계속 설파해 나갔다. 또한 지상의 권세에 굴하지 않고 곧은 소리를 하는 것은 그의 일생 내내 지속된 십자가 지기였다.

러일전쟁에서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여 온 일본 국민들이 환호작약하는 가운데에도 그는 이렇게 예언에 가까운 일갈을 남겼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늙은 대신의 가슴에 한 개의 훈장을 추가하고, 그 품에 몇 명의 젊은 미희를 안겨주는 것 이상, 이 전쟁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본은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침략자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지각이 있는 일본사람이라면 기뻐하기는커녕 나라의 장래를 위해 통곡해야 할 날이다. 일본은 계속 전쟁에 나설 것이고 그 댓가를 치룰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민비가 살해되었을 때에는 “일본의 대실패”라 통탄했고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강탈했을 즈음에는 “일본은 영토를 늘림으로서 영혼을 잃었다.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민족을 생각한다.”며 애통해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세상을 피하려고 하지 마라. 세상을 이겨야 한다....... 사람은 희망의 동물이다 앞을 바라봄이 자연스럽지 뒤를 돌아봄은 자연스럽지 않다. 희망은 건전하며 회고는 불건전하다.” 죽은 뒤에 요단강 건너가 만날 천국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악덕과 패륜이 그치지 않는 세상일망정, 그 세상을 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서양의 논리에 찌들지 않은 일본의 기독교를 설파하면서도 일본의 악덕에 휘말리지 않는 그에게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했다. 김교신, 함석헌 등이 그들이었다.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을 받으면서도 조국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熱血), 이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다면 쏟아 바쳤을 경모(敬慕)의 염(念)을 그에게 바쳤을 것이다.”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은 김교신에게 그대로 이어졌던 바, 김교신은 서양의 교리와 선교사의 권위에서 벗어난 조선의 기독교를 추구하고자 했고, 이는 과거 숭명사대했던 사대부들 이상으로 숭서양사대하던 기독교 목사들에게 반발을 산다. 그로 인해 한국 기독교사에서 김교신은 곧잘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활약과 발언은 자주 외면당했다. 일제 시대에 그가 토해냈던 열변은 오늘날 들어도 방금 짜낸 젖소의 우유처럼 신선하다.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없는 형식의 껍질이요, 그 진보적이라는 것은 세속주의이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조차도 되지 못한다. 한 수양소요, 한 문화기관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던가?" (성서조선 1935.12)

김교신을 길러 내고 함석헌에게 영향을 주고, 참삶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등불이 되었던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광란이 종말을 향한 질주를 시작하기 직전, 1930년 3월 28일 세상을 뜬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참으로 거대한 야망이었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한 클라크는 우치무라를 직접 대하지 못하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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