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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3.27 방위병의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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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7년 3월 27일 방위병의 유서


 우리의 최근 4반세기의 정치 체제를 결정했던 6월 항쟁의 해 1987년, 박종철의 죽음과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 틈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가 점차 무르익어가던 3월 27일, 박종철의 고향 부산의 한 야산을 오르던 등산객은 뜻밖의 모습에 기절초풍한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사복차림이었지만 짧은 머리는 그 당시 저녁 나절 거리를 메우던 단기 사병, 속칭 방위병 중의 하나임을 짐작케 했다. 신원 확인 결과 방위병이 맞았다. 이름은 장재완.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청년이었다. 86년 1월 군번이니까 4개월 되면 제대였던 장재완 일병이 목숨을 끊은 것이다.


 부검 결과 외상은 없었고 등산객이 그를 발견하기 직전에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됐다. 애인이 고무신을 바꿔 신은 것도 아니었고, 고참에게 괴롭힘을 당할 짬밥은 넘어선 터였다. 부대에서 사고를 쳤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결했다. 가족들은 물론 부대 관계자들도, 심지어 친구들도 왜 그가 죽었는지 갈피를 잡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3일 뒤 부산대학교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두 통의 유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유서의 내용은 읽는 사람의 손을 부들부들 떨게 하기에 충분할만큼 충격적이었다.


 “저는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83학번으로 86년 1월 방위병으로 입소하여 군 복무를 하던 중, 본인의 중대한 과오로 인해, 조직을 보위코저 나의 육체적 생명을 단절합니다.....(중략) 적들의 야수와 같은 손길이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이 우리 혁명과 조국통일을 조금이라도 앒당기는 계기가 된다면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요. (하략) ”



 진상은 이랬다. 장재완은 3월 23일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가방을 두고 내렸다. 가방에는 자신의 이름이 오버로크로 튼튼하게 새겨진 군복과, 요즘의 국방부가 봐도 눈이 벌개질 사회과학도서, 그리고 각종 문건 등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장재완 자신이 가입해 있던 학생운동 조직의 가명 명단같은 것이 들어 있다는 말도 있다.) 이 가방을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장재완은 25일 부대로 출근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돈을 빌린 것이 그의 마지막 행적이었고, 그 뒤 그는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예감대로 가방은 이미 보안대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실수를 죽음으로 갚은 셈이다.



 전두환이라는 깡패 두목이 대통령으로 차고앉았던 정권과 장면으로 맞섰던 한 젊은이로서 그 입장에 처했을 때의 공포감과 낭패감은 짐작이 간다. 당시 보안대는 무소불위 그 자체였다 서울의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이들의 죽음같은 기억을 되새길 필요는 없겠지만, 보안대, 그것도 군인으로서 보안대와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은 독사와 키스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자신 하나면 어떻게든 버텨 볼 수도 있었겠지만, 동료들까지 자신 때문에 끔찍한 일을 당하고 조직도 일망타진될 생각에 미쳤을 때 그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쉽게 다가설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의 책임감(?)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의 ‘혁명’과 ‘조국통일’ 따위가 무엇이든지간에 그런 식으로 목숨을 끊는 것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은 성큼 다가온 총선에서 80년대의 이력을 휘장과 발판으로 삼아 의회 권력에 도전하려는 여러 명의 486에게 그들 역시 살아냈던 80년대의 참혹한 시절을 되새김과 아울러 자신의 목숨을 끊어 가면서까지 보위하려 했던 가치의 무게를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다. 이 글을 볼 이는 거의 없겠지만.



 인물도 좋고 언변도 뛰어나고 사회과학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장(長)짜리 직함 쌓고 별도 달았던 80년대의 스타들이 대접받는 ‘젊은 피’로 ‘새로운 인재’로 수혈되고 수용되어 여의도에 입성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경로고, 나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길인지도 모른다.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들의 무거운 몸을 무등 태워 대중들에게 연설할 수 있게 도와 주었던 평범한 친구들, 의장님 보위하겠다고 맨몸으로 덤벼들다가 ‘경관폭행’ 및 ‘공무집행방해’의 잡범으로 별을 달아야 했던 이들, 그놈의 ‘의장님’ 구출 투쟁을 하다가 한쪽 눈에 최루탄 조각이 박혀 버린 내 동기를 비롯한 많은 보통 학생들, 자신의 실수를 괴로워하다가 끝내 죽음까지 불사해야 했던 장재완 같은 이들의 피눈물을 제발덕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기쁨’에 더 신경이 팔릴 때, 돈 심부름이나 하고 삼성 장학금 받아 쓸 때, 장재완을 비롯하여 너무나 평범했으나 뒤틀린 세상을 눈 감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이지 못했던 이들은 또 한 번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재완으로 하여금 내가 왜 저런 것들 때문에 죽었나 땅을 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2011년 현재 장재완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은 확인이 안된다) 사유는 그가 어느 조직에 속해 있었는지,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옛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그 친구들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증언을 거절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결국 장재완이 목숨과 바꾸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가족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고, 우리 사회 또한 그의 행적을 인정하지도, 발견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의 또 한 통의 유서는 부모님께 보내는 것이었다. 유서에는 경직되고 설익은 ‘투쟁적’ 문구들도 많지만, 장재완은 그의 유서를 가족에 대한 인사로 끝맺고 있다. “..... 그리고 형님 취직이 빨리 되어야지요. 재열이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십시오, 재포도 열심히 하라고 하시구요. 아버님 어머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형 잘있어 미안하다 정말로. 재열아 재포야 가는 형이 밉지. 그래도 난 가야 해. 너희도 이 형의 죽음을 빨리 깨우치길 바래. 부모님 형님 말씀 잘 들어라. 아버님 어머님 전 이만 떠나렵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불효자식 재완 올림” 참으로 평범한, 이를데없이 범상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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