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날이 날이니만큼 작년에 올렸던 거 살 붙여서 올림
1919년 3월 1일 최인과 신철
이렇다 할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3천리 강토를 일본에게 통째로 내 준 이래 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의의 노예였다. 일제의 탄압은 교묘하고도 철저했고 경찰 대신 헌병을 투입하여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다잡았다. 그 가운데 등장한 ‘조선 태형령’은 일본의 무단 통치의 야만성을 증명한다. 원래 태형은 갑오경장 때 사라졌지만 일본은 ‘조선인에 한해’ 태형을 부활시킨 것이다. 즉결처분권까지 보유한 헌병들은 사람을 잡아들여 곤죽을 만들어 버리는 일을 예사로 했다. “조선놈들은 맞아야 한다.”는 말은 이때쯤 그 생명력을 얻었을 게다.
그러던 중 터져 나온 1919년 3월 1일의 3.1 운동은 일제 시대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게 벌어진 항일 투쟁이었다. 조선의 치안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일본 관헌들, 조선 팔도 어느 집 안방에서 바늘이 떨어져도 우리는 알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일본 헌병들은 이 날 두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일이 잘못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잘 되려면 엎어져보니 삼밭이더라고, 3.1 운동이 이렇듯 성공적으로 폭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실로 엉뚱한 오해와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도 작용을 했다. 우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오해다. 윌슨이 제창한 14개조에는 “식민지에서 통치하는 정부의 주장과 통치를 당하는 국민들의 이익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말은 있지만 민족 자결(自決)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았고, 그나마 그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발칸 반도의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그 선언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우리도 뭔가 해 보자는 움직임의 자양분이 됐다.
거기에 고종 황제가 죽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독살은 아닌 듯 하지만 일본인들이 말을 들어먹지 않는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전체 조선을 뒤덮었다. 수십만 군중이 덕수궁 앞을 뒤덮었고 장사꾼들은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대한제국의 옛 신하들도 서울로 올라와 통곡했고 상복 입은 백성들은 각기 동서남북으로 황제 계신 곳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하면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를 최대로 끌어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거사가 들통 날 위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이름도 참람한 이완용 이하 전직 고관들에게 동참을 호소한 것은 그 중의 하나다. 이완용을 만난 것은 손병희였다. 도대체 이완용 같은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몰라도 손병희는 이완용에게 ‘민족대표’로서의 동참을 요구했고, 구한말 최고의 수재 중의 하나인 이완용은 구렁이 열 마리쯤은 휘감긴 언어로 제의를 거절한다.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알긴 아는구나)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오.(응?)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뭐라고?) ”
3.1 운동이 터지자 바로 낯빛을 바꿔 조선인들의 자중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하며 일본 제국주의 편을 드는 그였지만 그는 끝내 거사 사실을 일본 당국에 알리지는 않았다. 혹시나 일이 성공했을 때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나마 한 조각 남았던 양심 때문이었을까.
또 한 번의 절대절명의 위기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던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신철에게 독립선언서가 포착되었을 때 왔다. 뭔가 낌새를 챈 듯 주변을 맴돌던 그가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에 별안간 들이닥쳐 인쇄된 기미 독립 선언서를 확보하고 돌아간 것이다. 하필이면 그 악질 신철이란 말인가. 최린은 눈 앞이 아득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를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날의 상황은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지만 가장 극적인 것으로 골라서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최린은 마주앉은 신철에게 다짜고짜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때 신철의 대답은 “조선 사람입니다.”였다. 최린은 5천원이라는 거금을 내밀며 (쌀 한 가마가 40원이었다)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자 신철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일의 누설 여부가 내 입에만 달린 일이라면 걱정 말고 일을 진행하시오” 그리고 고등계 형사 신철은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며 정중하지만 무거운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핑계를 대어 만주로 출장을 떠났고 일이 터진 후 체포되자 자살했다. 과연 신철의 침묵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역시 조선 사람이었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과 고등계 형사 신철까지도 그 입에 자물쇠를 단 가운데 조선 민족은 역사적인 3월 1일을 맞게 된다. “우리의 의요 생명인” 날이요 “한강물이 다시 흐르고 백두산이 높았던 날”, 백정부터 기생까지 조선 독립을 부르짖으며 떨쳐 일어서고, 저 멀리 인도의 네루가 옥중에서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청춘 남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것은 네게 큰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던 그 위대한 날이.
그런데 신철에게 손가락을 찌르며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를 묻던 최린은 완전히 변절하여 일제 말기에는 내선일체의 선봉장으로서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고 조선 청년들을 윽박지르게 된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 나와서 그는 3.1 운동을 뼈아프게 회상하며 자신의 죄상을 고백한다,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재판을 받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소에 묶고 능지처참해 달라.” 허다한 친일파 가운데에서 최인만큼 처절하게 자신의 죄상을 인정한 이도 드물다.
그때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그의 눈에는 무엇이 스쳐 지나갔을까. 두루마기를 입은 고등계 형사 신철이 묵묵히 일어나 큰절을 하고 나가던 그 뒷모습이 밟히지 않았을까. 고등계 형사도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민족적 양심을 명색 민족 대표랍시고 나대던 자신이 끝내 내버렸던 사실이 못내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기미년 3월 1일 바라보았던 찬란한 여명과 그 이후 죽어간 숱한 청춘들이 회한으로 가득한 최인의 노구를 덮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날이 날이니만큼 작년에 올렸던 거 살 붙여서 올림
1919년 3월 1일 최인과 신철
이렇다 할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3천리 강토를 일본에게 통째로 내 준 이래 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의의 노예였다. 일제의 탄압은 교묘하고도 철저했고 경찰 대신 헌병을 투입하여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다잡았다. 그 가운데 등장한 ‘조선 태형령’은 일본의 무단 통치의 야만성을 증명한다. 원래 태형은 갑오경장 때 사라졌지만 일본은 ‘조선인에 한해’ 태형을 부활시킨 것이다. 즉결처분권까지 보유한 헌병들은 사람을 잡아들여 곤죽을 만들어 버리는 일을 예사로 했다. “조선놈들은 맞아야 한다.”는 말은 이때쯤 그 생명력을 얻었을 게다.
그러던 중 터져 나온 1919년 3월 1일의 3.1 운동은 일제 시대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게 벌어진 항일 투쟁이었다. 조선의 치안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일본 관헌들, 조선 팔도 어느 집 안방에서 바늘이 떨어져도 우리는 알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일본 헌병들은 이 날 두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일이 잘못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잘 되려면 엎어져보니 삼밭이더라고, 3.1 운동이 이렇듯 성공적으로 폭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실로 엉뚱한 오해와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도 작용을 했다. 우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오해다. 윌슨이 제창한 14개조에는 “식민지에서 통치하는 정부의 주장과 통치를 당하는 국민들의 이익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말은 있지만 민족 자결(自決)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았고, 그나마 그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발칸 반도의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그 선언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우리도 뭔가 해 보자는 움직임의 자양분이 됐다.
거기에 고종 황제가 죽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독살은 아닌 듯 하지만 일본인들이 말을 들어먹지 않는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전체 조선을 뒤덮었다. 수십만 군중이 덕수궁 앞을 뒤덮었고 장사꾼들은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대한제국의 옛 신하들도 서울로 올라와 통곡했고 상복 입은 백성들은 각기 동서남북으로 황제 계신 곳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하면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를 최대로 끌어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거사가 들통 날 위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이름도 참람한 이완용 이하 전직 고관들에게 동참을 호소한 것은 그 중의 하나다. 이완용을 만난 것은 손병희였다. 도대체 이완용 같은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몰라도 손병희는 이완용에게 ‘민족대표’로서의 동참을 요구했고, 구한말 최고의 수재 중의 하나인 이완용은 구렁이 열 마리쯤은 휘감긴 언어로 제의를 거절한다.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알긴 아는구나)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오.(응?)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뭐라고?) ”
3.1 운동이 터지자 바로 낯빛을 바꿔 조선인들의 자중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하며 일본 제국주의 편을 드는 그였지만 그는 끝내 거사 사실을 일본 당국에 알리지는 않았다. 혹시나 일이 성공했을 때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나마 한 조각 남았던 양심 때문이었을까.
또 한 번의 절대절명의 위기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던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신철에게 독립선언서가 포착되었을 때 왔다. 뭔가 낌새를 챈 듯 주변을 맴돌던 그가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에 별안간 들이닥쳐 인쇄된 기미 독립 선언서를 확보하고 돌아간 것이다. 하필이면 그 악질 신철이란 말인가. 최린은 눈 앞이 아득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를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날의 상황은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지만 가장 극적인 것으로 골라서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최린은 마주앉은 신철에게 다짜고짜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때 신철의 대답은 “조선 사람입니다.”였다. 최린은 5천원이라는 거금을 내밀며 (쌀 한 가마가 40원이었다)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자 신철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일의 누설 여부가 내 입에만 달린 일이라면 걱정 말고 일을 진행하시오” 그리고 고등계 형사 신철은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며 정중하지만 무거운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핑계를 대어 만주로 출장을 떠났고 일이 터진 후 체포되자 자살했다. 과연 신철의 침묵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역시 조선 사람이었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과 고등계 형사 신철까지도 그 입에 자물쇠를 단 가운데 조선 민족은 역사적인 3월 1일을 맞게 된다. “우리의 의요 생명인” 날이요 “한강물이 다시 흐르고 백두산이 높았던 날”, 백정부터 기생까지 조선 독립을 부르짖으며 떨쳐 일어서고, 저 멀리 인도의 네루가 옥중에서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청춘 남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것은 네게 큰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던 그 위대한 날이.
그런데 신철에게 손가락을 찌르며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를 묻던 최린은 완전히 변절하여 일제 말기에는 내선일체의 선봉장으로서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고 조선 청년들을 윽박지르게 된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 나와서 그는 3.1 운동을 뼈아프게 회상하며 자신의 죄상을 고백한다,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재판을 받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소에 묶고 능지처참해 달라.” 허다한 친일파 가운데에서 최인만큼 처절하게 자신의 죄상을 인정한 이도 드물다.
그때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그의 눈에는 무엇이 스쳐 지나갔을까. 두루마기를 입은 고등계 형사 신철이 묵묵히 일어나 큰절을 하고 나가던 그 뒷모습이 밟히지 않았을까. 고등계 형사도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민족적 양심을 명색 민족 대표랍시고 나대던 자신이 끝내 내버렸던 사실이 못내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기미년 3월 1일 바라보았던 찬란한 여명과 그 이후 죽어간 숱한 청춘들이 회한으로 가득한 최인의 노구를 덮어버리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