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아 게으름.. 1983년 3월2일 교복자율화의 시작
1983년 3월 2일 나는 당시 중학교 2학년에 진입하고 있었다. 개학이었던 이날은 사뭇 특별한 날이었다. 지난 1년 내내 입었던 시커먼 교복과 교모, 매 맞을 때 살을 칭칭 감아돌던 얇은 하복 교복을 다시 입지 않게 된 날이었던 것이다. 즉 교복 자율화 첫날이었다. 겨울이 돼도 반드시 교복 안에 뭘 껴 입으면 입었지 바깥에는 입지 못하게 했던 억압의 세월은 가고, 형형색색의 잠바 가운데 아무거나 걸치고 가면 되는 희한한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만 것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동천(더럽기로 악명높았던 지역 하천)물도 춤을 춘다.” 는 것이 당시 친구의 일성.
물론 1년 전에는 두발 자율화가 시행됐다. 하지만 그건 자율화라기보다는 완화에 가까웠다. 박박머리를 겨우 면한 ‘3센티미터’와 ‘귀를 조금이라도 덮으면 안된다’ 등등 졸렬한 규정들이 많았고 수시로 자와 바리깡을 대동한 학생부 교사들의 순시가 잇따랐으니 그를 ‘자율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심했다. 하지만 교복자율화는 달랐다. 옷값으로 규제를 할 수도 없고, 그 외양을 딱히 구분할 방법이 없었으니 진정한 자율화라 할 만했다. 그저 집에서 입던 평상복을 걸치고 등교하면 됐던 것이다.
그 부산물 가운데 몇 개를 들어보자. 우선 거수 경례가 사라졌다. 딱 1년 입었던 교복 시대 학교는 완벽한 병영이었다. 등교할 때 칼라에 3자 붙인 3학년 선도부가 호랑이처럼 버티고 서 있었고 배지와 명찰 복장 상태를 검열했다. 그 3자에다가 ‘선도’ 완장은 가히 육군 병장의 포스에 가까웠던지라 3자를 보면 어김없이 거수경례가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물론 좀 불려 말하면 수첩만한 명찰을 달고 다니게 하는 등 학년을 구분짓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으나 검정 제복 위의 3자와 스펙스 잠바 (프로스펙스 잠바 짝퉁)위의 명찰은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이다.
또 1학년 때 실시하던 ‘환경미화검열’ 방식도 없어졌다. 교장 이하 학생주임 교육주임 과학주임 등등 교사들이 각 반을 돌 때 반장이 총원 몇 현원 몇 결석 몇 이하 환경미화검열 준비 끝!을 외치던 것이 종식된 이유는 그야말로 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복 입은 애들이 거수경례는 커녕 고개 꾸벅 숙이는데 이게 뭐냔 말이다. 먼 훗날 나는 훈련소에서 이 환경미화검열이 ‘내무사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다못해 조회 때 구령 “연대 차렷!”도 바뀌었다. 교복 입고 교모 쓰고 열을 지은 상태에서 연대 차렷이지, 형형색색 청바지 ‘써지오바렌테’부터 부산진시장 ‘루마제’ (구루마제 -> 리어카제) 바지까지 널린 마당에 연대는 무슨. 그냥 ‘전체 차렷’으로 슬그머니 변신해 갔다. 학교에서 군대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83년은 전두환의 대머리가 서슬푸르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그가 우리 중학교 옆에 있는 대양고무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오전수업 2시간을 빼먹고 교실 밖으로 화장실도 못갔다. 경호원들이 복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학생부 교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던 그의 시절에 왜 이런 ‘자율화’가 이루어졌을까. 우선 전두환 자신이 광주의 피비린내를 동반한 불법적인 정권 탈취범으로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탈각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놓았다는 측면 (그래서 통행금지 철폐가 수십년 만에 이루어졌다)이 있다. 두 번째로 이 분의 교육적 뚝심을 들 수 있겠다. 최규하 정부 때 문교부 장관이며 이화여대 총장을 오래 지낸 김옥길씨다. 교복의 자율화 실시는 1983년 이규호 장관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처음 교복자율화를 개진했던 사람은 김옥길 장관이었던 것이다.
김옥길 장관은 비록 5개월여의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취임 직후 ‘교복자율화’를 결정했다. 교육계는 갑작스러운 발표에 그야말로 벌집 쑤신 듯 했다. 중학생이라면 응당 까까중이 되어야 했고, 교복을 차려 입어야 ‘학생답다’고 했던 수십년 세월이 한 번에 망가지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계는 표현하기 죄송하지만 꽉 막힌 분들이 주도권을 잡고 계셨다. 장관실까지 쳐들어온 어느 사립여고의 교장이 장관에게 던진 말에서 우리는 그 한 단면을 본다.
“교복을 자율화하라고 했으면 지침을 주셔야지 그냥 지시만 하면 어떡하느냐”
즉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되며 무슨 옷은 허용하되 무슨 옷은 금지시킨다는 지침을 주셔야 학생 지도가 될 게 아니냐는 한심하다 못해 그 한심함이 기특하기까지 한 항변이었다. 김옥길 장관은 복장이 터졌던지 기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설명을 한다. “교복 자율화는 교육의 자율화를 상징하는 겁니다. 교육자율화 깃발을 어디에 꽂으면 교육자들이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교복이라는 언덕에 꽂은 거라구요. 이래도 못알아들으시겠습니까.”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지금도 학생들도 규제받고 통제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권리를 천명한 정도인 ‘인권조례’를 두고 이 난리가 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사복을 입고 만두집에서 만두를 먹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혀를 찼다. “머리 길고 사복 입으니 저게 학생이냐?” 그 사람 눈에는 사복을 입은 학생이란 금새 탈선하고 망가지고 말 말세의 전조로 보였을 것이다.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얘기하면 “내 아들 동성애자 만들거냐?”고 눈 뒤집는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교복을 1년 입어보고 교복자율화를 맞아 본 사람으로서 고 김옥길 장관에게 사의를 표하며, 오늘날에도 유효한 고인의 훈계 한 마디를 오늘날의 ‘꽉 막힌’ 사람들에게 들려드린다.
“교육이란 각자가 지닌 소질을 캐내고 그 장점을 어떻게 키워 주느냐에 달린 겁니다. 명령으로는 안되고 획일은 더더욱 안 됩니다. 자율이란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제약받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도덕율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책임없는 자율이 아니라 적당히 조절하고 제어하는 행위입니다........ 자율에 앞선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율을 위한 훈련이란 난센스지요.” 아 제발 좀 옳은 말씀은 좀 기억하고 살자. 적어라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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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게으름.. 1983년 3월2일 교복자율화의 시작
1983년 3월 2일 나는 당시 중학교 2학년에 진입하고 있었다. 개학이었던 이날은 사뭇 특별한 날이었다. 지난 1년 내내 입었던 시커먼 교복과 교모, 매 맞을 때 살을 칭칭 감아돌던 얇은 하복 교복을 다시 입지 않게 된 날이었던 것이다. 즉 교복 자율화 첫날이었다. 겨울이 돼도 반드시 교복 안에 뭘 껴 입으면 입었지 바깥에는 입지 못하게 했던 억압의 세월은 가고, 형형색색의 잠바 가운데 아무거나 걸치고 가면 되는 희한한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만 것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동천(더럽기로 악명높았던 지역 하천)물도 춤을 춘다.” 는 것이 당시 친구의 일성.
물론 1년 전에는 두발 자율화가 시행됐다. 하지만 그건 자율화라기보다는 완화에 가까웠다. 박박머리를 겨우 면한 ‘3센티미터’와 ‘귀를 조금이라도 덮으면 안된다’ 등등 졸렬한 규정들이 많았고 수시로 자와 바리깡을 대동한 학생부 교사들의 순시가 잇따랐으니 그를 ‘자율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심했다. 하지만 교복자율화는 달랐다. 옷값으로 규제를 할 수도 없고, 그 외양을 딱히 구분할 방법이 없었으니 진정한 자율화라 할 만했다. 그저 집에서 입던 평상복을 걸치고 등교하면 됐던 것이다.
그 부산물 가운데 몇 개를 들어보자. 우선 거수 경례가 사라졌다. 딱 1년 입었던 교복 시대 학교는 완벽한 병영이었다. 등교할 때 칼라에 3자 붙인 3학년 선도부가 호랑이처럼 버티고 서 있었고 배지와 명찰 복장 상태를 검열했다. 그 3자에다가 ‘선도’ 완장은 가히 육군 병장의 포스에 가까웠던지라 3자를 보면 어김없이 거수경례가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물론 좀 불려 말하면 수첩만한 명찰을 달고 다니게 하는 등 학년을 구분짓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으나 검정 제복 위의 3자와 스펙스 잠바 (프로스펙스 잠바 짝퉁)위의 명찰은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이다.
또 1학년 때 실시하던 ‘환경미화검열’ 방식도 없어졌다. 교장 이하 학생주임 교육주임 과학주임 등등 교사들이 각 반을 돌 때 반장이 총원 몇 현원 몇 결석 몇 이하 환경미화검열 준비 끝!을 외치던 것이 종식된 이유는 그야말로 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복 입은 애들이 거수경례는 커녕 고개 꾸벅 숙이는데 이게 뭐냔 말이다. 먼 훗날 나는 훈련소에서 이 환경미화검열이 ‘내무사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다못해 조회 때 구령 “연대 차렷!”도 바뀌었다. 교복 입고 교모 쓰고 열을 지은 상태에서 연대 차렷이지, 형형색색 청바지 ‘써지오바렌테’부터 부산진시장 ‘루마제’ (구루마제 -> 리어카제) 바지까지 널린 마당에 연대는 무슨. 그냥 ‘전체 차렷’으로 슬그머니 변신해 갔다. 학교에서 군대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83년은 전두환의 대머리가 서슬푸르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그가 우리 중학교 옆에 있는 대양고무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오전수업 2시간을 빼먹고 교실 밖으로 화장실도 못갔다. 경호원들이 복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학생부 교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던 그의 시절에 왜 이런 ‘자율화’가 이루어졌을까. 우선 전두환 자신이 광주의 피비린내를 동반한 불법적인 정권 탈취범으로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탈각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놓았다는 측면 (그래서 통행금지 철폐가 수십년 만에 이루어졌다)이 있다. 두 번째로 이 분의 교육적 뚝심을 들 수 있겠다. 최규하 정부 때 문교부 장관이며 이화여대 총장을 오래 지낸 김옥길씨다. 교복의 자율화 실시는 1983년 이규호 장관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처음 교복자율화를 개진했던 사람은 김옥길 장관이었던 것이다.
김옥길 장관은 비록 5개월여의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취임 직후 ‘교복자율화’를 결정했다. 교육계는 갑작스러운 발표에 그야말로 벌집 쑤신 듯 했다. 중학생이라면 응당 까까중이 되어야 했고, 교복을 차려 입어야 ‘학생답다’고 했던 수십년 세월이 한 번에 망가지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계는 표현하기 죄송하지만 꽉 막힌 분들이 주도권을 잡고 계셨다. 장관실까지 쳐들어온 어느 사립여고의 교장이 장관에게 던진 말에서 우리는 그 한 단면을 본다.
“교복을 자율화하라고 했으면 지침을 주셔야지 그냥 지시만 하면 어떡하느냐”
즉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되며 무슨 옷은 허용하되 무슨 옷은 금지시킨다는 지침을 주셔야 학생 지도가 될 게 아니냐는 한심하다 못해 그 한심함이 기특하기까지 한 항변이었다. 김옥길 장관은 복장이 터졌던지 기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설명을 한다. “교복 자율화는 교육의 자율화를 상징하는 겁니다. 교육자율화 깃발을 어디에 꽂으면 교육자들이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교복이라는 언덕에 꽂은 거라구요. 이래도 못알아들으시겠습니까.”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지금도 학생들도 규제받고 통제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권리를 천명한 정도인 ‘인권조례’를 두고 이 난리가 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사복을 입고 만두집에서 만두를 먹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혀를 찼다. “머리 길고 사복 입으니 저게 학생이냐?” 그 사람 눈에는 사복을 입은 학생이란 금새 탈선하고 망가지고 말 말세의 전조로 보였을 것이다.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얘기하면 “내 아들 동성애자 만들거냐?”고 눈 뒤집는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교복을 1년 입어보고 교복자율화를 맞아 본 사람으로서 고 김옥길 장관에게 사의를 표하며, 오늘날에도 유효한 고인의 훈계 한 마디를 오늘날의 ‘꽉 막힌’ 사람들에게 들려드린다.
“교육이란 각자가 지닌 소질을 캐내고 그 장점을 어떻게 키워 주느냐에 달린 겁니다. 명령으로는 안되고 획일은 더더욱 안 됩니다. 자율이란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제약받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도덕율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책임없는 자율이 아니라 적당히 조절하고 제어하는 행위입니다........ 자율에 앞선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율을 위한 훈련이란 난센스지요.” 아 제발 좀 옳은 말씀은 좀 기억하고 살자. 적어라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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