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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2.29 포니 신화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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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6년 2월 29일 포니 신화의 개막

퀴즈 하나 내 보자. 1951년 전쟁통에 정부는 피난민 수송을 위해 60여 대의 버스와 트럭을 이용한 운수 영업을 허가했다. 이 요금이 얼마였을까?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꼬불꼬불 국도를 타고 험한 고개를 넘나들어 서울 부산을 잇던 그 고생길의 요금은 3만 4천환. 쌀 한 가마니에 8만환 할 무렵이었으니 요즘의 비행기값 정도로 비쌌던 셈이다. 미군이 버리고 간... 트럭을 개조하고 두드려 맞춰 만든 버스가 귀한 대접을 받으며 거리를 누볐고, 미군의 지프 엔진 갖다 붙이고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시발’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나라였다. 그만큼 차가 귀했던 것이다. 더구나 국산차라면.

이후의 자동차 공업 역사를 읊어 대는 것은 좀 지루한 일이고, 1967년 상공부가 발표한 ‘자동차 사업 허가 기준’을 통해 한국 자동차 공업의 당시 현주소를 짐작해 보자., “자동차 조립 및 제조에 대해서는 선진외국과 기술 제휴를 한 업체로서 제휴처가 제품의 성능을 보장한다는 조건을 구비한 업체에 한하여 허가한다.” 즉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열악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 지침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외국 기업을 잘 물어 온다면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이 지침에 환호한 것이 자동차 산업에 꿈이 있던 현대건설 회장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은 워싱턴에 있던 동생 현대건설 상무 정세영에게 긴급전문을 때린다. “포드로 가서 당신네와 제휴하겠다는 뜻을 전달해라.”

GM과 포드는 일본 시장과 중국 시장의 교두보로서 한국 진출을 꾀하고 있었고 현대는 전통적으로 제휴보다는 해당 기업을 매수하거나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쪽을 택하던 GM보다는 포드를 선호했고 포드도 이에 응해서 마침내 제휴가 성립한다. 그리고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한다. 그런데 포드와의 제휴로 인한 성적표는 영 좋지 않았다. 야심차게 생산한 코티나의 경우 성능이 영 시원치 않아 택시 기사들이 차 반납 운동을 벌일 정도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69년 12월 정부가 ‘자동차 국산화 3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38%에 불과한 자동차 국산화율을 3년 동안에 무슨 수를 쓰든 100%로 올려놓으라는 의미였다. 안되면 되게 하는 것이 정의인 군대식 사고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당시 국내 최대의 자동차사인 신진자동차, 아세아자동차, 현대자동차는 필사적인 경쟁 체제에 돌입한다.

현대는 제휴사 포드와 심각한 마찰을 일으켰다. 포드 쪽에서 현대의 엔진 생산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파열음 끝에 현대와 포드의 기술 제휴 관계는 깨졌다. 다음 상대는 일본의 미쓰비시였다. 일본 자동차 업계 후발 주자였던 미쓰비시는 한국과의 기술 제휴를 마다하지 않았고 엔진 및 트랜스 미션에 대한 기술 제휴 협약을 체결한다. 또 국내 독자 모델 개발을 위해 이탈리아의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 기술진을 연수시킨다. 중요한 기술은 철저히 숨기고 도면 복사조차 허락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그려서 베끼는 형극을 겪으면서도 한국 고유의 자동차 모델의 꿈은 꺾이지 않았고, 그 결과 1974년 토리노 자동차 박람회에서 한 자동차가 출품된다. ‘포니’였다.



정주영은 “무슨 차가 꽁지가 빠진 닭 같냐?” 라고 탐탁지 않아 했던 날렵하다기보다는 투박해 보이는 이 차의 이름은 ‘아리랑’이나 기타 다른 한글 이름을 가질 뻔도 했지만 해외시장을 고려하여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가 됐다. 73년 1월 시험삼아 만든 첫 포니가 탄생을 했고 이후 성능 테스트 결과 100 Km 에 이르는 시간은 27초였고 연비도 브리사 등 경쟁 차종에 앞섰다. 드디어 1976년 2월 29일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포니가 처음으로 출고되어 세상에 나선다. (생산은 조금 먼저 이뤄지긴 했지만) 정세영 사장은 연단에 오르긴 했지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한다. 그도 그랬겠지만 일본으로 이탈리아로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불청객 노릇을 하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혔던 노동자들도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포니가 자신의 아들처럼 반가왔으리라.

그렇게 감격의 조랑말이 탄생한 얼마 후 정주영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한다. 그건 미국 대사 스나이더였다. 조선호텔에서 마주한 미국 대사는 정주영에게 국내 고유 모델 생산의 중지를 종용하면서 미국 자동차의 조립 생산을 권유한다. 그럴 경우 지원을 아끼지 않겠지만 만약 거절할 경우 국내외에서 현대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협박까지 곁들인 권유였다. 이때 정주영은 이를 거절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정훈에 따르면 (2001.9.23 프레시안 기사) 정주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 예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가 건설에서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저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만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나는 보람을 삼을 것입니다.”

정주영 혼자서 포니를 만든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청춘을 바치고 피땀 흘려 자동차에 열정을 바친 노동자들의 공도 정주영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국산 고유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는 뚝심을 발휘하고, 미국 대사와의 독대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던 정주영 형제의 노력을 그저 돈벌이를 위한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 활동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아니 돈벌이를 위한 작업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매우 가치있는 일이었다.

1976년 2월 29일 대중 앞에 나온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 많은 이들의 첫 마이카였고, 애환과 꿈과 기쁨과 슬픔을 오랫 동안 함께 했던 자동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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