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7년 2월 28일 2.28의 비극
지금은 대만이라 부르는 나라의 왕년의 호칭은 에누리없는 '자유중국'이었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공'에 밀려 대만섬에 밀려나 있긴 하지만 이제나 저제나 대륙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자유중국'은 우리의 첫째 가는 우방이었다. 동네 중국집에 걸려 있던 청천백일기는 성조기만큼이나 친숙했고, 깃발 옆에 모셔져 있던 한 깡마른 대머리의 얼굴도 선명하다. 그가 ...장개석 (장제스라고 표기해야 하는데 그냥 장개석이 입에 붙는다.) 총통이었다. 지금 돌이키면 좀 궁금해지기도 한다. 정말 우리 동네 화교 아저씨는 장개석을 존경해서 그 사진을 모셔 놓고 있었던 것일까.
추측컨대 그 답은 반반이다. '중공군'과 싸워 수없는 피를 흘린 나라에서 자신이 '중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유중국'의 신봉자임을 밝혀야 했던 알리바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하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반공 독재 국가의 국적을 가지고 또 하나의 쌍둥이 반공 독재 국가에서 터잡고 살아가던 그들의 처지로 '장개석 총통'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같은 측은함이 둘이다. 그리고 그 측은함은 결국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자유중국'과 '자유대한'은 그럴 수 없는 쌍둥이였다. 아울러 '조선인민공화국' 역시 비껴가지 않는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건, 듣는 사람이건 대화 중 ‘蔣介石, 中正, 先總統’류의 단어가 나오면 순간적으로 차렷 자세를 취하여 蔣公에게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리고 작문을 할 일이 있다면 글의 마지막은 ‘이 모든 것은 선총통 장공의 영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라고 맺어 주는 게 좋고, ‘先總統 蔣公’이라는 문장을 사용할 때엔 반드시 선총통 다음에 한 칸을 띄고 장공이라고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경죄에 걸릴 수 있다.” (어느 대만인 친구의 이야기 - <세계의 역사기념시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 중)
낄낄거림이 즉시 튀어나오는 이야기지만 이것은 거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국가원수모독죄가 엄존했고, 운동 선수들이 타이틀을 따거나 수상을 하면 어김없이 "대통령 각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멘트해야 할 때가 있었고, "봄바람과 함께 떠나시더니 가뭄을 해갈하는 봄비로 돌아오십니다."라며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찬미하던 TV 뉴스가 있었으며 어느 도지사는 대통령에게 라이타 불 붙이다가 그만 불길이 지나치게 높았던 바람에 경호실장에게 죽을만큼 두들겨 맞은 일도 있었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선총통 장공의 영도에 의해 이뤄졌다."는 얘기는 휴전선 북쪽의 나라에서는 아직도 상식인 형편이니 이 어찌 형제애가 끓어오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자유중국'이 대만에 똬리를 틀기 직전, 그러니까 아직 대륙에서 공산군과 국부군이 자웅을 겨루던 무렵의 1947년 2월 28일, 대만에서는 이후의 '자유중국'을 규정짓는 한 비극이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만은 반 세기 동안의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중국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만 '본성인' (즉 대륙 본토 출신 아닌 대만 토박이들)에게 그 해방은 주인의 교체에 불과했다. 모든 산업 시설과 행정 조직이 대륙 출신들에 의해 장악됐다. 풍년이 들어도 곡식은 모조리 대륙 출신들의 창고 아니면 본토로 흘러들어가 대만인들은 쫄쫄 굶어야 했다. 특히 대만 지사 진의의 활약(?)은 대단했다. 진의는 담배, 종이, 가스, 석유, 설탕 등에 전매제를 실시했고 그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러던 중 1947년 2월 27일 사단이 터진다. 담배를 밀매하던 한 대만인 노파 린지앙메이가 전매청 직원들에게 적발된 것이다. 노파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지만 전매청 직원들은 용서가 없었다. 급기야 계속 울며 매달리는 노파를 권총으로 찍어 버렸다. 이 행동은 지켜보던 대만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저런 나쁜 놈들! 너희들은 부모도 없느냐?" 전매청 직원들은 성난 인파를 피해 도망가다가 권총을 쏜다.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음 날 운명의 2월 28일 대만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살인자를 처벌하라. 그들은 전매총국 타이뻬이 분국을 장악하고 시위를 벌인다. 정부의 대답은 헌병대의 기관총 난사였다. 수십 명이 거리에서 피 흘리며 쓰러졌고 대만인들의 분노는 대만 섬 전체를 뒤덮는다. 경찰서가 점령됐고 행정관서가 시민들 손에 들어갔다. 3월 2일 사건을 주도한 임헌당 등 대만 지식인들은 ‘2ㆍ28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금지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촉구했다. 타이뻬이 참의회도 계엄의 해제와 군경의 발포금지, 정부와 공동처리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행정 책임자 진의는 타협의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장개석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한다.
장개석의 21사단은 마치 1948년의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처럼, 1980년 광주의 공수부대와 20사단처럼 대만 기륭항에 상륙했다. 그리고는 중공군들에게는 판판이 깨져나가던 분풀이라도 하듯 대만 사람들을 사냥한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가운데 거리에 나타난 모든 시민들이 과녁이 됐고 집 안에까지 군인들이 난입하여 사람들을 끌어내어 총살했다. 골목에는 시체들이 담 높이로 쌓였다. 이때 죽은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지금도 모른다. 20만 명에 가깝다는 설도 있지만 2만 명은 족히 희생되었다는 것이 통설. 그로부터 2년 뒤 장개석은 대륙에서 쫓겨 나와 2.28 사건의 시체더미들이 흙 속에서 썩어가던 대만 땅 위에 자신의 정부를 세운다. '자유중국'의 시작이었다. 역시 자유라는 단어의 팔자는 기구하다. 별의 별 시러베들이 다 그 이름을 참칭하며 그 이름 뒤에서 수많은 무고한 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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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28일 2.28의 비극
지금은 대만이라 부르는 나라의 왕년의 호칭은 에누리없는 '자유중국'이었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공'에 밀려 대만섬에 밀려나 있긴 하지만 이제나 저제나 대륙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자유중국'은 우리의 첫째 가는 우방이었다. 동네 중국집에 걸려 있던 청천백일기는 성조기만큼이나 친숙했고, 깃발 옆에 모셔져 있던 한 깡마른 대머리의 얼굴도 선명하다. 그가 ...장개석 (장제스라고 표기해야 하는데 그냥 장개석이 입에 붙는다.) 총통이었다. 지금 돌이키면 좀 궁금해지기도 한다. 정말 우리 동네 화교 아저씨는 장개석을 존경해서 그 사진을 모셔 놓고 있었던 것일까.
추측컨대 그 답은 반반이다. '중공군'과 싸워 수없는 피를 흘린 나라에서 자신이 '중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유중국'의 신봉자임을 밝혀야 했던 알리바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하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반공 독재 국가의 국적을 가지고 또 하나의 쌍둥이 반공 독재 국가에서 터잡고 살아가던 그들의 처지로 '장개석 총통'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같은 측은함이 둘이다. 그리고 그 측은함은 결국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자유중국'과 '자유대한'은 그럴 수 없는 쌍둥이였다. 아울러 '조선인민공화국' 역시 비껴가지 않는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건, 듣는 사람이건 대화 중 ‘蔣介石, 中正, 先總統’류의 단어가 나오면 순간적으로 차렷 자세를 취하여 蔣公에게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리고 작문을 할 일이 있다면 글의 마지막은 ‘이 모든 것은 선총통 장공의 영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라고 맺어 주는 게 좋고, ‘先總統 蔣公’이라는 문장을 사용할 때엔 반드시 선총통 다음에 한 칸을 띄고 장공이라고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경죄에 걸릴 수 있다.” (어느 대만인 친구의 이야기 - <세계의 역사기념시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 중)
낄낄거림이 즉시 튀어나오는 이야기지만 이것은 거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국가원수모독죄가 엄존했고, 운동 선수들이 타이틀을 따거나 수상을 하면 어김없이 "대통령 각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멘트해야 할 때가 있었고, "봄바람과 함께 떠나시더니 가뭄을 해갈하는 봄비로 돌아오십니다."라며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찬미하던 TV 뉴스가 있었으며 어느 도지사는 대통령에게 라이타 불 붙이다가 그만 불길이 지나치게 높았던 바람에 경호실장에게 죽을만큼 두들겨 맞은 일도 있었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선총통 장공의 영도에 의해 이뤄졌다."는 얘기는 휴전선 북쪽의 나라에서는 아직도 상식인 형편이니 이 어찌 형제애가 끓어오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자유중국'이 대만에 똬리를 틀기 직전, 그러니까 아직 대륙에서 공산군과 국부군이 자웅을 겨루던 무렵의 1947년 2월 28일, 대만에서는 이후의 '자유중국'을 규정짓는 한 비극이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만은 반 세기 동안의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중국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만 '본성인' (즉 대륙 본토 출신 아닌 대만 토박이들)에게 그 해방은 주인의 교체에 불과했다. 모든 산업 시설과 행정 조직이 대륙 출신들에 의해 장악됐다. 풍년이 들어도 곡식은 모조리 대륙 출신들의 창고 아니면 본토로 흘러들어가 대만인들은 쫄쫄 굶어야 했다. 특히 대만 지사 진의의 활약(?)은 대단했다. 진의는 담배, 종이, 가스, 석유, 설탕 등에 전매제를 실시했고 그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러던 중 1947년 2월 27일 사단이 터진다. 담배를 밀매하던 한 대만인 노파 린지앙메이가 전매청 직원들에게 적발된 것이다. 노파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지만 전매청 직원들은 용서가 없었다. 급기야 계속 울며 매달리는 노파를 권총으로 찍어 버렸다. 이 행동은 지켜보던 대만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저런 나쁜 놈들! 너희들은 부모도 없느냐?" 전매청 직원들은 성난 인파를 피해 도망가다가 권총을 쏜다.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음 날 운명의 2월 28일 대만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살인자를 처벌하라. 그들은 전매총국 타이뻬이 분국을 장악하고 시위를 벌인다. 정부의 대답은 헌병대의 기관총 난사였다. 수십 명이 거리에서 피 흘리며 쓰러졌고 대만인들의 분노는 대만 섬 전체를 뒤덮는다. 경찰서가 점령됐고 행정관서가 시민들 손에 들어갔다. 3월 2일 사건을 주도한 임헌당 등 대만 지식인들은 ‘2ㆍ28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금지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촉구했다. 타이뻬이 참의회도 계엄의 해제와 군경의 발포금지, 정부와 공동처리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행정 책임자 진의는 타협의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장개석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한다.
장개석의 21사단은 마치 1948년의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처럼, 1980년 광주의 공수부대와 20사단처럼 대만 기륭항에 상륙했다. 그리고는 중공군들에게는 판판이 깨져나가던 분풀이라도 하듯 대만 사람들을 사냥한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가운데 거리에 나타난 모든 시민들이 과녁이 됐고 집 안에까지 군인들이 난입하여 사람들을 끌어내어 총살했다. 골목에는 시체들이 담 높이로 쌓였다. 이때 죽은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지금도 모른다. 20만 명에 가깝다는 설도 있지만 2만 명은 족히 희생되었다는 것이 통설. 그로부터 2년 뒤 장개석은 대륙에서 쫓겨 나와 2.28 사건의 시체더미들이 흙 속에서 썩어가던 대만 땅 위에 자신의 정부를 세운다. '자유중국'의 시작이었다. 역시 자유라는 단어의 팔자는 기구하다. 별의 별 시러베들이 다 그 이름을 참칭하며 그 이름 뒤에서 수많은 무고한 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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