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33년 2월 27일 여걸 남자현 체포
1933년 2월 27일 오후, 당시에는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도시였던 하르빈의 도외정양가 거리.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일본 경찰들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그들은 한 중국인 거지 행색의 노파를 쫓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행인들 사이를 헤치고 달아나던 노파를 향해서 일본 경찰이 몸을 날렸다. 남루한 옷의 노파가 쓰러졌다. 깊이 눌러쓴 모자를 벗기자 유난히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을 발하는 조선 할머니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름은 남자현. 그녀는 중국 옷 속에 조선 옷을 입고 있었다. 그건 여자 옷이 아니었다. 묻어 있는 피도 남자현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40년 전 의병으로 나섰다가 전사한 남편의 유품이었다.
1872년생이니까 당시 우리 나이로 예순 둘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요즘에야 환갑 잔치도 생략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현 자신이 결혼한 나이대로만 자식들 결혼시켰으면 증손자를 볼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녀는 열아홉 살에 시집을 갔다. 알콩달콩 잘 살던 남편이 뜻밖에 세상을 떠난 건 1896년이었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우예 집에 앉아 있을 수 있겠노. 지하에서 다시 보자. ” 이 말을 남기고 의병으로 나간 남편이 덜커덕 전사한 것이다. 당시 남자현은 임신 중이었다.
나이 스물 넷에 청상과부가 되어 버린 남자현은 유복자를 낳아 기르면서 시부모를 홀로 모셨다. 고향이 경상북도 영양에다가 아버지는 정3품을 지낸 양반, 남편의 가문도 일대에서 문명(文名) 드높은 의성 김씨 집안이었으니 여필종부 삼종지도의 한자성어는 몸에 밴 정도가 아니라 뼈에 새겼을 터. 양잠도 하고 길쌈도 하며 혼자서 삶을 버텨낸 남자현은 마을에서 주는 효부상까지도 받은 모범적인(?) 지어미에 며느리에 어머니였다. 그렇게 나이 마흔 일곱 쯤 되었으면, 이제 외아들 장가 들이고 손주 재롱 볼 욕심을 낼 즈음이었을 것이다. 수명 짧았던 그때가 아닌 요즘에라도 나이 마흔 중반 넘으면 인생 다 산 것 같이 행세하는 이들이 지천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나이에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919년 3.1 운동이 계기였다. 조선 천지를 뒤흔든 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장성한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그녀는 독립군 단체 가운데 하나였던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독립군 수발에 나선다. 그녀의 활약이 두드러진 사건 중의 하나가 1926년의 길림 대검거 사건이다. 도산 안창호가 길림 지역 조선인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북경을 거쳐 길림으로 와서 동문 밖 대동공장에서 강연을 가지고자 했는데 5백명의 동포가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사실을 안 장작림은 공장을 포위하고 참가자 거의 전부를 체포해 버렸다. 안창호, 오동진,김동삼 등 독립운동의 동량같은 이들이 무더기로 체포됐고 장작림이 이들을 일본에 넘겨 버린다면 기둥뿌리가 흔들릴 판이었다. 이때 남자현은 대책위원회를 꾸려 동분서주했고 안창호 등이 풀려나는데 공을 세운다.
또 독립운동단체들이 기호파다 서북파다 파벌을 짓고 다투다가 심지어 피를 보는 지경까지 이르자 남자현은 금식기도 후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써서 파벌 관계자들을 불렀고 눈물로 호소하는 남자현의 열정에 감동한 (또는 압도되어 버린) 남자들은 서둘러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로 활약하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남자현은 또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온 남편의 원수를 직접 갚고자 했고 1926년 4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여덟 발을 가지고 국내로 잠입한다. 목표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중년의 아주머니를 의심할 경찰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사이토를 죽이려 한 사람이 있었다. 송학선. 동네 뒷산에서 소나무를 상대로 칼 찌르기 훈련을 거듭한 그는 돌아간 순종을 조문하러 오는 사이토를 노려 차에 뛰어들었지만 그의 칼에 피를 쏟은 것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들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경비가 부쩍 강화되어 남자현은 사이토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다시 독립군의 어머니로 살아가던 그녀는 1932년 만주국 조사를 위해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만주국 수도 신경(장춘)을 방문했을 때 손가락을 끊어 혈서를 써서 리튼 조사단에게 전하고자 했지만 배달 사고로 실패한다. 그때 반일 의도를 가지고 리튼 조사단에게 접근하려다가 일본 관헌에 걸려 죽음을 당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던만큼 그것은 손가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드디어 다음 해, 남자현은 또 한 번의 거사를 준비한다. 바로 일본의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를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예순 할머니가 폭탄을 던질 힘이 없었으니 무토와 함께 자폭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데, 그 무기를 전달받으러 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 후 남자현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일본 경찰의 모진 심문을 받았고 “적이 주는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단식을 시작한다. 단식이 열흘을 넘어서고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자 일제는 병보석으로 남자현을 풀어 준다. 이미 남자현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남자현은 자신이 가진 돈 249원을 내놓으면서 49원을 가족들에게, 그리고 나머지 2백원에 대해서는 이렇게 유언한다. “만일 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이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남자현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두 개가 썩둑 잘려나간 그 손을 내밀면서 그녀는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이것이나 찾아야지” 리튼 조사단에게 한국의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와 함께 보내고자 했던 그녀의 손가락은 배달 사고 와중에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버려졌다. 남자현은 죽음의 목전에 다다라 그것을 찾고 싶다고 했다. 신혼의 꿈을 간직한 채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비록 곱지는 않더라도 온전한 손을 내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1933년 2월 27일 남편의 피묻은 옷을 몸에 걸치고 그 위로 중국인 복색을 하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폭탄을 받으러 가던 한 할머니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그 해를 넘기기 전에 한많은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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