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83년 2월 25일 기수를 남으로 돌려라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공습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이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떨려 나오고 있었다. 오늘이 15일 (민방위훈련일)인가 달력을 들추던 사람들은 다음 방송 멘트에 그만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 공습,폭격, 인천, 실제 등등의 단어들이 눈과 귀를 동시에 찔러 왔다. 아이들은 놀라서 울지도 못했고 교사들은 수업 도중에 교무실로 달음박질쳤다. 무작정 짐보따리를 싸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집은 부산이었는데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도망가려는 것이었을까) 전쟁 이후 30년을 '북괴의 위협'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공습경보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이었다.
군인들은 더했다. 소대장들은 비상!을 부르짖으며 휘하 병력들을 끌어모았고 탱크병들은 위장막을 걷었다. 핏발선 눈들 사이에는 두 단어가 번갈아 어른 거리고 있었다. "전쟁"과 "엄마". 이 시기 군에 있었던 사람들은 1968년 군복무를 했던 이들이 김신조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하듯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초긴장의 5분을 빚어낸 사람 조선 인민군 공군 대위 이웅평이었다.
다행히 공습경보는 5분만에 해제됐다. 이웅평이 몰고 온 미그 19기가 안전하게 수원비행장에 내린 것이다.
당시는 팀스프리트 훈련 중이었다. 이를 북침 훈련으로 규정한 북한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팀스프리트에 대응하는 군사행동을 전개했다. 평남 개천에서 훈련차 떠오른 미그기 편대 가운데 한 대가 별안간 기수를 남으로 돌린 것은 10시 30분이 좀 넘어서였다. 이웅평은 고도 100미터로 초저공비행을 하면서 동료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연평도에서 한국 공군기를 만난다.
" 가끔 비행기 수신기로 남한 방송을 듣고 자유로운 한국생활을 동경하면서, 북한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구나하는 생각에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그는 전두환 정권에게는 일종의 횡재였다. 미지의 전투기였던 중국제 미그 19기가 쌩쌩하게 품안에 날아든 것도 좋아 죽겠는데 "자유를 찾아 귀순한 괴뢰군 조종사"라니. 군사독재정권으로서는 평생 동안이라도 이웅평을 업고 다니고 싶었을 것이다. 4월 14일 여의도에서 벌어진 행사는 그 하이라이트였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무려 130만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 '이웅평 환영대회'를 연 것이다. 말이 130만이지 당시 서울 인구 일곱 명 중 한 명은 그곳에 있었다는 말이다. 거기서 이웅평은 주민등록증과 정착금을 전달받고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흔든다.
그는 한국 공군으로 소속을 바꾸고 군 생활을 계속한다. 또 단란한 가정도 꾸민다. 하지만 그는 조종 주특기는 받지 못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짐작은 간다. '한 번 배신한 사람'에게 어떻게 이쪽의 비행기 조종간을 맡길 만큼 당시의 세상은 너그럽지 못했다. (이후 남쪽으로 온 다른 인민군 조종사는 조종 주특기를 받는다)
그는 7남매의 장남이었다. 그가 밝힌 이유로 넘어왔든 다른 이유가 있었든 그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겪어야 했을 형극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왜 남한에서 월북자 가족들이 겪은 고통 때문에. 하물며 팬텀기 하나 몰고 넘어간 조종사의 가족? 상상하기도 싫다. 그는 그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 대한 편견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번을 삽질하고 한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이웅평은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간경화증에 시달렸다. 그를 가르친 교수의 딸이자 온갖 편견을 무릅쓰고 그와 결혼한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병세는 악화됐고 그럴수록 그의 스트레스는 험악하게 나타났다. 떠나온 조국의 복수는 그의 평생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거의 생명을 포기해 가던 그는 장기기증자의 간을 이식하는 데에 동의하면서 재생의 희망을 찾지만 그것도 잠시 이식한 간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2002년 20년을 채우지 못한 남녘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가 왜 기수를 남으로 돌려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역시 분단이라는 거대한 장벽 아래 짓눌려야 했던 불행한 영혼이었다. 그의 출현만으로 수천만이 얼어붙었던 분단의 시대의 풍운아였다. 가족들을 버리고 휴전선을 넘어야 했고 떠나온 조국에 대한 편견에 괴로와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조국에서도 편안하지 못했던 분단된 나라의 젊은이였고 중년이었다.
그가 이남 땅에 출현한지 30년을 헤아리는 오늘, 아직도 "5호 담당제"가 이웃을 감시하기 위한 장치이며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고 자식이 부모를 짓밟는 사회가 이북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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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25일 기수를 남으로 돌려라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공습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이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떨려 나오고 있었다. 오늘이 15일 (민방위훈련일)인가 달력을 들추던 사람들은 다음 방송 멘트에 그만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 공습,폭격, 인천, 실제 등등의 단어들이 눈과 귀를 동시에 찔러 왔다. 아이들은 놀라서 울지도 못했고 교사들은 수업 도중에 교무실로 달음박질쳤다. 무작정 짐보따리를 싸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집은 부산이었는데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도망가려는 것이었을까) 전쟁 이후 30년을 '북괴의 위협'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공습경보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이었다.
군인들은 더했다. 소대장들은 비상!을 부르짖으며 휘하 병력들을 끌어모았고 탱크병들은 위장막을 걷었다. 핏발선 눈들 사이에는 두 단어가 번갈아 어른 거리고 있었다. "전쟁"과 "엄마". 이 시기 군에 있었던 사람들은 1968년 군복무를 했던 이들이 김신조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하듯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초긴장의 5분을 빚어낸 사람 조선 인민군 공군 대위 이웅평이었다.
다행히 공습경보는 5분만에 해제됐다. 이웅평이 몰고 온 미그 19기가 안전하게 수원비행장에 내린 것이다.
당시는 팀스프리트 훈련 중이었다. 이를 북침 훈련으로 규정한 북한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팀스프리트에 대응하는 군사행동을 전개했다. 평남 개천에서 훈련차 떠오른 미그기 편대 가운데 한 대가 별안간 기수를 남으로 돌린 것은 10시 30분이 좀 넘어서였다. 이웅평은 고도 100미터로 초저공비행을 하면서 동료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연평도에서 한국 공군기를 만난다.
" 가끔 비행기 수신기로 남한 방송을 듣고 자유로운 한국생활을 동경하면서, 북한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구나하는 생각에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그는 전두환 정권에게는 일종의 횡재였다. 미지의 전투기였던 중국제 미그 19기가 쌩쌩하게 품안에 날아든 것도 좋아 죽겠는데 "자유를 찾아 귀순한 괴뢰군 조종사"라니. 군사독재정권으로서는 평생 동안이라도 이웅평을 업고 다니고 싶었을 것이다. 4월 14일 여의도에서 벌어진 행사는 그 하이라이트였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무려 130만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 '이웅평 환영대회'를 연 것이다. 말이 130만이지 당시 서울 인구 일곱 명 중 한 명은 그곳에 있었다는 말이다. 거기서 이웅평은 주민등록증과 정착금을 전달받고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흔든다.
그는 한국 공군으로 소속을 바꾸고 군 생활을 계속한다. 또 단란한 가정도 꾸민다. 하지만 그는 조종 주특기는 받지 못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짐작은 간다. '한 번 배신한 사람'에게 어떻게 이쪽의 비행기 조종간을 맡길 만큼 당시의 세상은 너그럽지 못했다. (이후 남쪽으로 온 다른 인민군 조종사는 조종 주특기를 받는다)
그는 7남매의 장남이었다. 그가 밝힌 이유로 넘어왔든 다른 이유가 있었든 그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겪어야 했을 형극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왜 남한에서 월북자 가족들이 겪은 고통 때문에. 하물며 팬텀기 하나 몰고 넘어간 조종사의 가족? 상상하기도 싫다. 그는 그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 대한 편견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번을 삽질하고 한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이웅평은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간경화증에 시달렸다. 그를 가르친 교수의 딸이자 온갖 편견을 무릅쓰고 그와 결혼한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병세는 악화됐고 그럴수록 그의 스트레스는 험악하게 나타났다. 떠나온 조국의 복수는 그의 평생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거의 생명을 포기해 가던 그는 장기기증자의 간을 이식하는 데에 동의하면서 재생의 희망을 찾지만 그것도 잠시 이식한 간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2002년 20년을 채우지 못한 남녘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가 왜 기수를 남으로 돌려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역시 분단이라는 거대한 장벽 아래 짓눌려야 했던 불행한 영혼이었다. 그의 출현만으로 수천만이 얼어붙었던 분단의 시대의 풍운아였다. 가족들을 버리고 휴전선을 넘어야 했고 떠나온 조국에 대한 편견에 괴로와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조국에서도 편안하지 못했던 분단된 나라의 젊은이였고 중년이었다.
그가 이남 땅에 출현한지 30년을 헤아리는 오늘, 아직도 "5호 담당제"가 이웃을 감시하기 위한 장치이며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고 자식이 부모를 짓밟는 사회가 이북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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