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0년 2월 24일 민족의 대표 백용성 열반
3.1절의 민족대표는 33인이었다. 알다시피 그들은 지역이나 사회 각계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종교계의 대표들이었다. 서양 신부들이 전권을 쥐고 있던 카톨릭은 여기에서 빠졌고(그래서 기독교인들이 3.1 운동이 벌어진 뒤 성당에 뛰어들어 너희들은 조선 사람 아니냐며 따지는 일도 벌어졌다.) 유림의 대표도 없었다. 33인을 구성한 것은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그리고 불교 2명이었다. 불교 대표의 2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 넣은 사람은 만해 한용운, 그리고 백용성이었다.
백용성은 1864년생이고 열 여섯에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이미 열 네 살에 출가했다가 난리가 난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하산한 적이 있으니 불가와의 인연이 어지간히 깊었던 것 같다. 그는 각지의 명산대찰을 돌면서 수행하면서 세 번씩이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마흔 넷 되던 해에는 조선 천지가 좁았던지 중국과 만주를 순례하면서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그때 조선 불교를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던 중국 승려에게 했다는 말은 꽤 통쾌하다. “하늘의 해와 달이 중국의 해와 달만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의 법도 천하의 공동인 것인데 왜 그걸 그대 나라 것이라고만 하는가?”
한일병탄이 이뤄지던 즈음, 그는 하동의 칠불암에서 수행 중이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하동 장에 나갔다가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온다. “나라가 망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방 수좌들은 땅을 치고 울었고 어떤 이는 쇠스랑으로 방을 파헤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라가 망했는데 수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이후 백용성은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닌 중생과 함깨 깨닫기 위하여” 서울로 하산한다.
그런데 불교계 주류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령이 일본 승려의 노력으로 1895년 해제된 이래 불교계의 분위기는 다분히 친일적이었고, 사찰령 반포 등으로 일제가 불교계를 회유하면서 그 주류가 일본의 통치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백용성이 처음 출가했던 해인사의 주지 이회광은 아예 조선 사원을 일본의 조동종과 합치려는 시도까지 했던 것이다.
백용성이 서울에 나타난 것은 이 시기였다. 그는 대각사를 세우고 선학원을 열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다. 첩첩산중의 절간에서나 행하던 선(禪)이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한 것은 백용성의 공이 크다고 한다. 3년만에 3천명의 신도가 모여들었다니 기독교로 치면 대단한 부흥사였던 셈이다. 한용운도 백용성이 초빙한 강사 중의 하나였는데 3.1운동을 앞두고 한용운이 민족대표로서의 참여를 권유하자 도장을 갖다 맡기며 흔쾌히 응했다. 백용성은 1년 6개월 징역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는데 그는 거기서 하나의 충격을 경험한다. 기독교 목사들이 죄다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죄다 한문으로만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옮길 것을 결심한다.
“내가 만일 먼저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의 나침반을 지으리라. 이렇게 결정하고 세월을 지내다가 출옥하여 모모인과 협의하였으나 한 사람도 찬동하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반대의 이유는 간단했지만 뿌리 깊은 것이었다. 옛날 카톨릭이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이유였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막은 이유였다. “우리만 알면 됐지 왜 번역을 해서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하지만 백용성은 그 뜻을 꺾지 않았다. ‘삼장역회’를 조직하는 한편, 스스로 경을 번역하고 그 성과물을 보급해 나갔다,. “모든 중생이 정법을 깨달아 가치 성불하기를 원하고 이 경을 번역합니다.” 1921년에는 금강경이 한글로 나왔고 28년에는 화엄경이 우리 글로 중생들에게 선보였다. ‘세종대왕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어 대처승들이 판을 치는 분위기에 분노했지만 동시에 권력에 아부하고 백성들의 등을 쳐 왔던 절집들의 부패에도 결기를 세웠다. “불교는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라 아편 독과 다름없다 하니 나는 조석으로 생각함에 수치스런 마음을 이길 수 없다.” 일제 시대는 조선 불교의 위기라고 할 만한 시기였다.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억압받으면서 몸에 밴 노예 근성은 수행자로서의 자질을 떨어뜨렸고 바로 뒤를 이어 들어선 일제는 효율적으로 불교를 통제하면서 조선 불교의 타락을 부채질했다. 백용성은 참선과 계율을 강조하면서 그 주류의 흐름에 맞섰고, 심지어 부처의 가르침도 현실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절간에 들어앉아 사하촌 토색질이나 일삼던 무위도식의 승려들에게 죽비를 떨어뜨렸다.
“부처님께서는 승려가 농사나 장사하는 것을 금하셨으나 오늘날에는 도저히 빌어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 우리는 괭이를 들고 호미를 가지고 힘써 일하고 농사를 지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자.....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갈 수 있음으로써 종교에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하자.” 그에게 불교의 개혁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일이었고, 그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본인 스스로 금광도 운영하기도 했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자에게 머리 숙여 기생하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 있었던 조선 불교의 주류에서 그가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 제자 중에도 밀정들이 들끓었고, 어떤 제자는 스승이 출판하라고 맡긴 원고를 돈 든다며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1940년 초, 백용성은 “사자 뱃속에 벌레가 생겼으니 사자가 쓰러질 것 같다.,”면서 자신의 열반을 예고했고 2월 24일 제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입적했다. 자신을 사자에 비유했거니와, 그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 더 암담해져만 가던 불교계의 행보를 홀로 저지하고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던 지극히 외로운 사자였다. 그 사자가 오늘에 다시 환생한다면 그는 또 뭐라고 부르짖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원대로 대처승들을 몰아내고 비구승들이 한국 불교의 주류를 장악했지만 그 지도층의 행태란 백용성이 맞섰던 세력들과 그닥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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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월 24일 민족의 대표 백용성 열반
3.1절의 민족대표는 33인이었다. 알다시피 그들은 지역이나 사회 각계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종교계의 대표들이었다. 서양 신부들이 전권을 쥐고 있던 카톨릭은 여기에서 빠졌고(그래서 기독교인들이 3.1 운동이 벌어진 뒤 성당에 뛰어들어 너희들은 조선 사람 아니냐며 따지는 일도 벌어졌다.) 유림의 대표도 없었다. 33인을 구성한 것은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그리고 불교 2명이었다. 불교 대표의 2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 넣은 사람은 만해 한용운, 그리고 백용성이었다.
백용성은 1864년생이고 열 여섯에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이미 열 네 살에 출가했다가 난리가 난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하산한 적이 있으니 불가와의 인연이 어지간히 깊었던 것 같다. 그는 각지의 명산대찰을 돌면서 수행하면서 세 번씩이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마흔 넷 되던 해에는 조선 천지가 좁았던지 중국과 만주를 순례하면서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그때 조선 불교를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던 중국 승려에게 했다는 말은 꽤 통쾌하다. “하늘의 해와 달이 중국의 해와 달만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의 법도 천하의 공동인 것인데 왜 그걸 그대 나라 것이라고만 하는가?”
한일병탄이 이뤄지던 즈음, 그는 하동의 칠불암에서 수행 중이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하동 장에 나갔다가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온다. “나라가 망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방 수좌들은 땅을 치고 울었고 어떤 이는 쇠스랑으로 방을 파헤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라가 망했는데 수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이후 백용성은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닌 중생과 함깨 깨닫기 위하여” 서울로 하산한다.
그런데 불교계 주류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령이 일본 승려의 노력으로 1895년 해제된 이래 불교계의 분위기는 다분히 친일적이었고, 사찰령 반포 등으로 일제가 불교계를 회유하면서 그 주류가 일본의 통치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백용성이 처음 출가했던 해인사의 주지 이회광은 아예 조선 사원을 일본의 조동종과 합치려는 시도까지 했던 것이다.
백용성이 서울에 나타난 것은 이 시기였다. 그는 대각사를 세우고 선학원을 열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다. 첩첩산중의 절간에서나 행하던 선(禪)이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한 것은 백용성의 공이 크다고 한다. 3년만에 3천명의 신도가 모여들었다니 기독교로 치면 대단한 부흥사였던 셈이다. 한용운도 백용성이 초빙한 강사 중의 하나였는데 3.1운동을 앞두고 한용운이 민족대표로서의 참여를 권유하자 도장을 갖다 맡기며 흔쾌히 응했다. 백용성은 1년 6개월 징역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는데 그는 거기서 하나의 충격을 경험한다. 기독교 목사들이 죄다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죄다 한문으로만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옮길 것을 결심한다.
“내가 만일 먼저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의 나침반을 지으리라. 이렇게 결정하고 세월을 지내다가 출옥하여 모모인과 협의하였으나 한 사람도 찬동하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반대의 이유는 간단했지만 뿌리 깊은 것이었다. 옛날 카톨릭이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이유였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막은 이유였다. “우리만 알면 됐지 왜 번역을 해서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하지만 백용성은 그 뜻을 꺾지 않았다. ‘삼장역회’를 조직하는 한편, 스스로 경을 번역하고 그 성과물을 보급해 나갔다,. “모든 중생이 정법을 깨달아 가치 성불하기를 원하고 이 경을 번역합니다.” 1921년에는 금강경이 한글로 나왔고 28년에는 화엄경이 우리 글로 중생들에게 선보였다. ‘세종대왕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어 대처승들이 판을 치는 분위기에 분노했지만 동시에 권력에 아부하고 백성들의 등을 쳐 왔던 절집들의 부패에도 결기를 세웠다. “불교는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라 아편 독과 다름없다 하니 나는 조석으로 생각함에 수치스런 마음을 이길 수 없다.” 일제 시대는 조선 불교의 위기라고 할 만한 시기였다.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억압받으면서 몸에 밴 노예 근성은 수행자로서의 자질을 떨어뜨렸고 바로 뒤를 이어 들어선 일제는 효율적으로 불교를 통제하면서 조선 불교의 타락을 부채질했다. 백용성은 참선과 계율을 강조하면서 그 주류의 흐름에 맞섰고, 심지어 부처의 가르침도 현실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절간에 들어앉아 사하촌 토색질이나 일삼던 무위도식의 승려들에게 죽비를 떨어뜨렸다.
“부처님께서는 승려가 농사나 장사하는 것을 금하셨으나 오늘날에는 도저히 빌어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 우리는 괭이를 들고 호미를 가지고 힘써 일하고 농사를 지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자.....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갈 수 있음으로써 종교에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하자.” 그에게 불교의 개혁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일이었고, 그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본인 스스로 금광도 운영하기도 했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자에게 머리 숙여 기생하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 있었던 조선 불교의 주류에서 그가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 제자 중에도 밀정들이 들끓었고, 어떤 제자는 스승이 출판하라고 맡긴 원고를 돈 든다며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1940년 초, 백용성은 “사자 뱃속에 벌레가 생겼으니 사자가 쓰러질 것 같다.,”면서 자신의 열반을 예고했고 2월 24일 제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입적했다. 자신을 사자에 비유했거니와, 그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 더 암담해져만 가던 불교계의 행보를 홀로 저지하고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던 지극히 외로운 사자였다. 그 사자가 오늘에 다시 환생한다면 그는 또 뭐라고 부르짖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원대로 대처승들을 몰아내고 비구승들이 한국 불교의 주류를 장악했지만 그 지도층의 행태란 백용성이 맞섰던 세력들과 그닥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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