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한 기자가 진지하게 물었다. “위대한 정치인이 되기 위하여 어떤 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시가를 깊숙이 빨아들여 내뿜은 뒤 처칠은 무게 있게 대답했다. “10년 후를 내다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오.” 대영제국 최대의 정치인의 한 마디를 놓칠세라 기자는 재빠르게 펜을 놀렸다. 처칠은 그걸 기다려 준 후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자질은, 10년 후 자기 예상이 왜 틀렸는지를 해명할 줄 아는 능력이오”
영국인 특유의 블랙 유머일 수도 있겠지만 기실 처칠은 진심을 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정치는 미래를 생산하고 설계하는 드문 직업 중 하나다. 물론 오늘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고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일과 보다 먼 내일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 보다 밝은 미래를 준비케 하는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어디 갑마다 제갈량이고 을마다 이율곡이랴. 그 예상이 적중하여 온갖 찬양 찬사 속에 표정관리하는 일보다는 터무니없이 빗나간 예상 때문에 스타일과 인상이 코 푼 휴지처럼 구겨지는 일이 더 흔할 것이다. 그때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용기 있게 고백하고, 무엇이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는지를 분석하여,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또 내놓아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인의 업적일 것이다. 하일 처칠.
오늘 불현듯 처칠의 어록을 뒤적이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어느 정치인 때문이다. 빙빙 돌리지 말고 곧게 펴자. 그는 통합진보당 유시민 대표다. 나는 그의 영민함을 존경한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문장가고, 폭넓은 독서와 공부를 바탕으로 한 식견 또한 그에 필적함을 인정한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 적잖은 반감이 있을망정 그의 행보에 발병 나기를 빌 정도는 아니며, 훌륭한 정치인으로 이름을 남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가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통합진보당 (이하 통진당이라고 부른다. 진보당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하진 말라. 진보신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국회의정지원단에서 진행된 강정마을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지금 진행되는 공사는 중단돼야 한다. 그 다음 새로운 해군 기지 건설이 필요한지 논의해 보고, 필요하다 하더라도 유치를 원하는 지역이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곳을 찾아서 해야지 도민의사에 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2007년 그가 대통합민주신당 예비 대통령 후보로서 제주도에 와서 한 발언을 늘어놓겠다. “현재 규모의 해군 기지는 오히려 (작아서)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함대급 장성 지휘관이 오는 해군 기지여야 한다.....전략적 차원에서도 해군 기지가 필요하다,. 대양해군력의 전초기지로서, 심장으로서 새롭게 부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얘기했고, 아울러 기자들 앞에서 중국 해군력과 일본 해군력에 대해 상세한 브리핑까지 했다.
왜 오늘은 이 말하고 어제는 저 말 했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유시민 대표는 2002년에는 제주도는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섬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2007년 그를 뒤집은 바 있고 나는 그것도 탓하지 않는다. 문제는 근거다. 사람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 하다못해 화장실 다녀오기 전과 뒤가 다른데 시민운동단체 회원이나 시사프로그램 사회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정권의 핵심으로서 이전에는 상상 못하던 정보에 접근하게 되고,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의 원대한 고민을 누려 본 이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정치인에게 “남아일언중천금”은 악덕이다. 남아일언일센트라고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발언을 수정할 줄 아는 것이 오히려 가치로운 것이요, 그리고 처칠이 말한 바대로 그 수정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정치인의 자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2007년 주장이 설득력 있었다고 본다. 비록 ‘틀렸을망정 내가 왜 틀렸는지를 얘기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자질을 보여 준 것이다.
2012년 그는 또 발언을 뒤집었다. 정확하게 5년을 주기로 그는 같은 대상을 두고 또 말을 바꾸었다. 일관성의 문제는 아니다. 누차 말했듯 일관성이란 원래 라면처럼 후룩 먹기는 좋아도 영양가는 적은 법이다. 단지 전환과 번복의 합리성을 따져야 할 뿐이다. 적어도 그가 훌륭한 정치인이 되려면, 아니 정치인의 기본을 갖추려면 이제 2007년 그가 했던 발언들을 그 스스로 논파해야 한다. “중국 일본 해군력 센 거 사실입니다. 근데 우리가 해군력 증강해 봐야 상대가 됩니까? 그냥 우리는 평화적으로 가야 합니다.”라고 고백하고서 “그럼 그때는 왜 그랬느냐?”라는 질문에 “솔직히 무능했습니다. 그냥 해군이 하자고 해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든지, “노무현 대통령 대양해군론 그거 참 웃기는 꿈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을 못 말린 게 참 한스럽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왕년의 정치적 주군을 비판하든지, 하다못해 “그때 강정은 안와봤는데 오늘 와 보니 구럼비 바위 진짜 아름답고 죽어도 기지 못 짓겠습디다”고 머리를 긁던지, 죽도 밥도 아니라면 문득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젯밤 꿈에 충무공이 나와서 제주도는 아니니라 했다고 하든지, 무슨 근거든 대야 할 거 아닌가 말이다.
“새로운 해군기지가 필요한지 논의”하자니. 유시민 대표는 그럼 참여정부 국무회의 참가자로서 그토록 무위도식했단 말인가. 보건복지부 업무에 바빴다고 치자. 그럼 한 나라의 예비 대통령 후보로서 그런 검토도 없이 “전략적 가치”를 논하는 무리수를 두었단 말인가. “주민에 반한” 기지를 반대한다는 건 이해하겠다. 그렇다면 참여정부 때 있었던 주민 동의 절차는 죄다 사기와 협잡이었다는 사실부터 고백하고서야 말이든 쌈이든 입에 들고 날 일이다. 지난 정권, 그렇게 나무로 깎은 등신들의 정권이었는가? 봉하마을에 잠들어 계신 그 분, 그렇게 멍청하고 허무맹랑한 분이었는가? 참여 함여 하더니 주민 동의 사기 쳐서 받아내는 협잡꾼 정권이었단 말인가. 대관절 유시민 대표 자신 핵심 인사로 참여했던 참여정부 5년을 어떻게 이렇게 모욕하고 짓밟으며 제주도 바닷물에 거꾸로 처박을 수 있는가.
이 부분에서 나는 유시민 대표의 해명을 기다린다. 그 논리와 근거가 정교하고 이유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의 변신에 박수를 보낼 용의가 있다.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는 필요하던 사업이 왜 지금은 만고 천덕꾸러기 사업으로 걷어치워야 하는 일이 되었는지에 대한 멋진 해답으로 나를 설득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는 유시민 대표를 정치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또 다른 용도를 말하자면, 여기에 대한 해명이라도 들어 놔야 유시민 대표나 그가 지지하는 누군가가 대통령이 됐을 때 또 “어 해군 기지 하긴 해야겠는데요?”라고 할 때 반박할 자료라도 건지지 않겠는가.
도대체 2007년 유시민 대표의 발언은 무엇이 틀렸으며, 오늘 그의 말은 왜 타당한가. 이 대답은 꼭 들어야겠다., 유시민 대표가 아니라면 그를 존경하여 따르는 분들의 해명이라도 좋다. 다시 한 번 처칠을 들먹인다. 정치인의 자질은 10년 뒤를 내다보는 판단뿐 아니라 그 판단이 틀렸을 때 그를 해명하고 보완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다. 유시민 대표가 그 자질에 걸맞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나로 하여금 열렬한 ‘애국자’를 만들 뿐이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네크라소프의 싯귀를 인용한 것이 유시민 대표 아니었던가. 적어도 나는 지금 무척 슬프고 노엽다. 나는 그런 애국자는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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