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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19 에케르트 3대의 인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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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1년 2월 19일 프란츠 에케르트 3대 인연의 시작

국사 교과서에서는 구한말 외국인들의 이권 탈취 현황을 적시한 대목이 나온다. 경의선은 프랑스 (후에 일본) , 운산 금광은 미국, 그리고 당현 금광은 독일 등등의 목록이 그것인데 독일이 차지한 당현 금광을 시찰하기 위해 1899년 뜻밖의 귀빈이 독일에서 조선을 방문한다. 독일 황제의 동생인 하인리히였다. 이때 독일은 덕국(德國)이라 불리웠던 바, ‘덕국 친왕’의 방한은 구한말 최대의 국빈 행사였다. 고종 황제는 성대한 잔치를 벌여 그를 환영하는데 하인리히는 고종 황제에게 색다른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그는 25명의 군악대를 대동했던 바, 프로이센 독일 특유의 절도 있는 자세와 휘황한 음악은 고종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훨씬 전에 러시아 황제 대관식을 다녀온 민영환이 군악대 창설을 건의한 기억도 떠올린 고종 황제는 군악대를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독일 음악 교사도 요청했다.

그로부터 2년 뒤 1901년 2월 19일 큰 키에 멋진 수염의 한 남자가 고종 황제 앞에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한다. 그 이름은 프란츠 에케르트. 그때 나이 마흔 아홉의 중년이었는데 그는 동아시아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나이 스물 일곱 살에 일본 해군 군악대의 고문으로 파견되어 무려 20년을 일본에서 지냈으며 오늘날의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까지 작곡한 사람이었다. 그 후 독일로 복귀한 에케르트는 베를린 군악대장으로 취임했는데 또 다시 극동의 한 왕국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는 지금의 허리우드 극장 자리에 음악 학교를 설립하고 군인 등을 차출하여 맹훈련을 시킨다. 음악 이론과 실기를 병행한 이 교육을 통해 서양 음악에 전혀 문외한이던 은자의 왕국 젊은이들은 서양식 악보의 콩나물과 트럼펫 소리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에케르트는 “한국인들이 음악에 천부적 재질이 있고 일본인보다도 훨씬 낫다.”고 즐거워했다고 하는데 에케르트의 노력과 한국인들의 재능이 시너지 효과를 냈는지 고종 황제 앞에 첫 인사를 드린 지 7개월 만에 화려한 결실을 내놓는다.

9월 7일은 고종의 생신이었다. 경운궁에는 대소신료들과 국내 주재 해외 공관원들이 총집결했다. 이날 에케르트의 군악대는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첫 연주를 한다. “단지 4개월의 연습으로 한국인이 이렇게 서양 음악을 잘 연주할 줄이야..... 이 정도 실력의 악대라면 곧 극동 최고의 악대가 될 것이다.”(영문 잡지 Korea Review 중 )는 찬사가 나올만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그 날, 에케르트는 또 하나의 역작을 선보인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서양의 외교 사절들의 귀에도 낯선 음율이 흘러나왔고 그 뒤를 이어 한국인 중창단이 노래를 시작했다.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 갓치 살으시고 (해안에 쌓인 모래알만큼 오래 사시옵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에케르트는 대한 제국 국가를 부탁받고 조선의 음악을 알기 위해 궁중 아악과 민간의 음악을 들으며 악상을 떠올렸고, 궁중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하여 그 음악과 소리를 들으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심지어 비오는 날의 빗소리, 천둥 소리까지도 빼놓지 않을 만큼 조선을 깊이 연구한 끝에 애국가를 만들었다. 그래서 에케르트의 애국가는 조선의 음계를 바탕으로 했고, 청중들의 귀에도 쉽사리 순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 들어도 그렇다. 서양 음악가가 지은 것 같지 않은 우리 가락풍이 만져질 듯 느껴지니까. 고종 황제도 대만족이었다. 에케르트는 태극 3등급 훈장을 수여받는다.

그러나 3년 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는 식물국가가 된다. 에케르트의 애국가를 널리 보급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민영환이 자결로 생을 마친 것처럼, 대한제국 애국가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한일합방 이전 1909년 이미 전라남도 관찰사 신응희가 이런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각 학교에 훈령을 내려 기부금과 애국가 부르는 것을 엄금하라.” 그리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이후에는 당연한 결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에케르트는 한일합방 후에도 독일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대한제국 군악대가 이왕직 양악대로 격하되었어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이 되면서 그 입지가 좁아지고, 이왕직 양악대가 해체된 뒤에도, 위암에 걸려 위중한 때에도 그는 조선인들에게 음악 교육 시키기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은 뒤에도 한국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그는 구한말 세워진 프랑스어 학교의 교사 에밀 마르텔을 사위로 맞았다. 이 에밀 마르텔도 한국과의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1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 군으로 참전하여 장인의 나라 군대 (그 처남은 독일군이었다) 와 싸운 뒤 1920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경성제대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했고, 2차대전 말기 서양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중국으로 피했다가 해방 뒤 또 한국에 와서 살다가 죽었다. 그의 집이 바로 이기붕의 집으로서 4.19 때 불타버린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리운 바로 그 집이었다고 한다.

마르텔의 딸, 즉 에케르트의 외손녀 가운데 한 명은 수녀가 됐다. 지금 대구에 있는 베니딕토 수녀원은 원래 함경남도 원산에 있었고, 에케르트의 외손녀 마르텔 수녀는 그 일원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공산화와 한국 전쟁 와중에 북한 정권의 포로 신세가 됐고 수용소로 끌려가 참담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 기간 중 무려 28명의 외국인 신부와 수녀가 목숨을 잃었다. 총살당하기도 하고 병으로 죽기도 했다. 마르텔 수녀는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협상 끝에 동독을 거쳐 서독으로 돌아갔으나 그녀는 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봉사하다가 1988년 대구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원산과 덕원 일대의 수도원을 초토화시키고 신부와 수녀들을 괴롭혔던 함경남도 정치보위부 1과장 김석형은 1960년 이래 남한 하늘 아래 있었다. 남파간첩으로 내려와 체포된 후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비전향 장기수로 송환된 김석형도 얼마 전 죽었다.

1902년 2월 19일 고종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프란츠 에케르트와 그 후손 3대는 이 땅에서 일어난 비극과 희극, 그리고 굴곡진 역사의 마디마디를 체험하고 에케트르의 애국가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에케르트는, 그리고 그의 사위는, 그리고 그 외손녀는 정말 한국과 무슨 인연이 있었길래, 그런 가족사를 지니게 됐을지 사뭇 궁금하다. 시간 나면 한 번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가 봐야겠다. 들어보시라 대한제국 애국가다.

http://www.youtube.com/watch?v=4DYfJwHq8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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