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의 오역
1943년 2월 18일 독일의 백장미 피어나다
1943년 초, 전 유럽을 집어삼킬 듯 하던 나찌 독일의 기세는 꺾였다.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악전고투하던 독일 6군이 항복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것이다.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였고, 이 이후 독일은 노도와 같은 소련의 반격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점만 해도 독일은 막대한 영토와 인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스탈린그라드의 패전이 독일의 패망의 전조라고 보기엔 아직 전쟁의 참혹한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찌의 독일 지배 시대는 광기의 암흑이 철저하게 북해부터 알프스까지의 독일 땅을 뒤덮었던 시기였다. 독일 국가에 등장하는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 (독일 최고!)”라는 단어는 독일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히틀러의 광기를 목전에서 본 독일 군부의 경우 여러 차례 쿠데타나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독일 국민들 일반의 반나찌 운동은 미미하고 빈약했다. 그러나 아무리 광기가 한 시대를 집어삼켰다 해도, 이성의 빛이란 가시처럼 그 식도를 긁는 법이다. 1943년 2월 18일 그 가시가 옹골차게 솟아났다. 하필이면 히틀러가 어설픈 폭동을 일으키며 역사에 그 이름을 알렸던 도시, 뮌헨에서였다.
단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다. 나찌 1939년부터 이른바 안락사 정책을 표방했다. 아리안 족의 우수한 혈통에 거치적거리는 존재인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 불치병 걸린 이 등에 대한 안락사를 적극 권장한 것이다. 불치병 걸린 아내가 눈물로 남편을 설득하여 자신에게 죽음의 주사를 놓게 한 후 행복하게(?) 죽어가는 영화도 버젓이 상영되었다. 뮌스터 주교 아우구스트 폰 갈렌은 이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히틀러에게 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여러분이나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여 양심에 충실하려면 생명과 자유, 그리고 가정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보다는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나찌 선전상 괴벨스는 갈렌을 죽여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기독교와의 마찰을 고려하여 생각을 고쳐먹고서 1941년 8월 이른바 ‘T4작전’ (안락사 작전)을 중단하지만, 그 노하우는 그대로 남아 유태인과 슬라브, 집시 등의 대학살에 수용된다.
갈렌 주교의 연설문을 복사해서 유인물로 만들어 돌리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스 숄이라는 의대생이 있었다. “누군가 드디어 큰 소리로 외칠 용기를 갖게 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가진 자유주의자 밑에서 자란 한스였지만 여느 청소년들처럼 나찌 유겐트 대원이 되었고, 1936년 노동절 때에는 당당히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기수로 선발될 정도로 촉망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점차 극심해져 가는 인종 말살과 파시스트의 광기 앞에서 한스는 나찌에 대한 그의 충성을 철회한다. 그는 자신에 동조하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알렉산더 슈모렐과 함께 ‘백장미’라는 반정부 유인물을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한다. 그 두 번째 유인물에서 백장미단은 이렇게 선언한다.
“폴란드를 점령한 이래 3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독일인들은 아둔한 잠 속에서 이러한 파시스트의 범죄를 조장한 셈이다… 사람마다 나는 이러한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나는 양심에 꺼릴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유죄, 유죄, 유죄이다! ” 독일인들의 머리를 때리는 죽비였고, 등짝을 휘갈기는 채찍이었다.
이 유인물을 우연히 한때 열렬한 나찌 소녀단원이었던 동생 소피가 보게 된다. 일찍이 “히틀러는 조국에 위대함과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갖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던 어린 나찌 소녀단원이었지만 그녀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그녀는 오빠에게 나는 듯이 달려가는데 그만 오빠의 방에서 문제의 유인물을 발견하고 만다. 오빠는 만류했지만 소피는 완강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백장미의 일원이 된다. 그들은 두 세 번 유인물을 뿌리고 뮌헨 시내 곳곳에 낙서를 남겼다. “어떠한 국가라도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정부를 가져야 함을 잊지 말라.”
백장미단의 활동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943년 1월 나찌 뮌헨지구당 지도자 파을 기슬러는 대학생들의 야유에 직면해야 했다. “30만 독일 청년이 스탈린그라드의 제물이 됐다. 총통 고맙다!” 학생들의 야유는 곧 시위로 이어졌다. 나찌들의 촉각이 곤두설 밖에. 1943년 2월 18일은 맑디 맑은 목요일이었다. 백장미 단원들은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밤새 긁어낸 유인물이 눈처럼 대학의 가로수길을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학교의 급사는 열혈 나찌 당원이었고, 그가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게슈타포를 부르면서 백장미는 꺾이고 만다.
스무 살을 갓 넘은 청년들에게 나찌는 추호의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가지 판사’로 이름 높은 판사를 배정했고 법정에서 하일 히틀러 경례를 올려부친 그는 학생들에게 “훌륭한 독일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준엄하게 물었다. 아 그때 잉게 숄이 남긴 한 마디는 너무나 당연해서 탁월하다. “누구든 시작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만 우리처럼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죠.”
나찌는 그들을 체포한 지 단 4일만에 사형을 집행한다. 교도관들은 사형 직전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여 담배 한 대를 나눌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오른 것은 소피였다. 재즈를 좋아하던 평범한 여대생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태도가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그리고 한스가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유 만세”였다. 칼날이 떨어졌고 백장미들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독일이 가장 부끄러웠던 시기를 조금이나마 가릴 수 있는 장미꽃이 되어 남아 있다. 그들이 외쳤던 한 마디는 21세기의 한국 국민에게도 여운이 크다. “당신은 독일의 모든 것이 당신과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당신이 독일이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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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18일 독일의 백장미 피어나다
1943년 초, 전 유럽을 집어삼킬 듯 하던 나찌 독일의 기세는 꺾였다.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악전고투하던 독일 6군이 항복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것이다.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였고, 이 이후 독일은 노도와 같은 소련의 반격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점만 해도 독일은 막대한 영토와 인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스탈린그라드의 패전이 독일의 패망의 전조라고 보기엔 아직 전쟁의 참혹한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찌의 독일 지배 시대는 광기의 암흑이 철저하게 북해부터 알프스까지의 독일 땅을 뒤덮었던 시기였다. 독일 국가에 등장하는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 (독일 최고!)”라는 단어는 독일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히틀러의 광기를 목전에서 본 독일 군부의 경우 여러 차례 쿠데타나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독일 국민들 일반의 반나찌 운동은 미미하고 빈약했다. 그러나 아무리 광기가 한 시대를 집어삼켰다 해도, 이성의 빛이란 가시처럼 그 식도를 긁는 법이다. 1943년 2월 18일 그 가시가 옹골차게 솟아났다. 하필이면 히틀러가 어설픈 폭동을 일으키며 역사에 그 이름을 알렸던 도시, 뮌헨에서였다.
단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다. 나찌 1939년부터 이른바 안락사 정책을 표방했다. 아리안 족의 우수한 혈통에 거치적거리는 존재인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 불치병 걸린 이 등에 대한 안락사를 적극 권장한 것이다. 불치병 걸린 아내가 눈물로 남편을 설득하여 자신에게 죽음의 주사를 놓게 한 후 행복하게(?) 죽어가는 영화도 버젓이 상영되었다. 뮌스터 주교 아우구스트 폰 갈렌은 이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히틀러에게 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여러분이나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여 양심에 충실하려면 생명과 자유, 그리고 가정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보다는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나찌 선전상 괴벨스는 갈렌을 죽여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기독교와의 마찰을 고려하여 생각을 고쳐먹고서 1941년 8월 이른바 ‘T4작전’ (안락사 작전)을 중단하지만, 그 노하우는 그대로 남아 유태인과 슬라브, 집시 등의 대학살에 수용된다.
갈렌 주교의 연설문을 복사해서 유인물로 만들어 돌리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스 숄이라는 의대생이 있었다. “누군가 드디어 큰 소리로 외칠 용기를 갖게 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가진 자유주의자 밑에서 자란 한스였지만 여느 청소년들처럼 나찌 유겐트 대원이 되었고, 1936년 노동절 때에는 당당히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기수로 선발될 정도로 촉망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점차 극심해져 가는 인종 말살과 파시스트의 광기 앞에서 한스는 나찌에 대한 그의 충성을 철회한다. 그는 자신에 동조하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알렉산더 슈모렐과 함께 ‘백장미’라는 반정부 유인물을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한다. 그 두 번째 유인물에서 백장미단은 이렇게 선언한다.
“폴란드를 점령한 이래 3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독일인들은 아둔한 잠 속에서 이러한 파시스트의 범죄를 조장한 셈이다… 사람마다 나는 이러한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나는 양심에 꺼릴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유죄, 유죄, 유죄이다! ” 독일인들의 머리를 때리는 죽비였고, 등짝을 휘갈기는 채찍이었다.
이 유인물을 우연히 한때 열렬한 나찌 소녀단원이었던 동생 소피가 보게 된다. 일찍이 “히틀러는 조국에 위대함과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갖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던 어린 나찌 소녀단원이었지만 그녀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그녀는 오빠에게 나는 듯이 달려가는데 그만 오빠의 방에서 문제의 유인물을 발견하고 만다. 오빠는 만류했지만 소피는 완강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백장미의 일원이 된다. 그들은 두 세 번 유인물을 뿌리고 뮌헨 시내 곳곳에 낙서를 남겼다. “어떠한 국가라도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정부를 가져야 함을 잊지 말라.”
백장미단의 활동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943년 1월 나찌 뮌헨지구당 지도자 파을 기슬러는 대학생들의 야유에 직면해야 했다. “30만 독일 청년이 스탈린그라드의 제물이 됐다. 총통 고맙다!” 학생들의 야유는 곧 시위로 이어졌다. 나찌들의 촉각이 곤두설 밖에. 1943년 2월 18일은 맑디 맑은 목요일이었다. 백장미 단원들은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밤새 긁어낸 유인물이 눈처럼 대학의 가로수길을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학교의 급사는 열혈 나찌 당원이었고, 그가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게슈타포를 부르면서 백장미는 꺾이고 만다.
스무 살을 갓 넘은 청년들에게 나찌는 추호의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가지 판사’로 이름 높은 판사를 배정했고 법정에서 하일 히틀러 경례를 올려부친 그는 학생들에게 “훌륭한 독일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준엄하게 물었다. 아 그때 잉게 숄이 남긴 한 마디는 너무나 당연해서 탁월하다. “누구든 시작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만 우리처럼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죠.”
나찌는 그들을 체포한 지 단 4일만에 사형을 집행한다. 교도관들은 사형 직전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여 담배 한 대를 나눌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오른 것은 소피였다. 재즈를 좋아하던 평범한 여대생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태도가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그리고 한스가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유 만세”였다. 칼날이 떨어졌고 백장미들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독일이 가장 부끄러웠던 시기를 조금이나마 가릴 수 있는 장미꽃이 되어 남아 있다. 그들이 외쳤던 한 마디는 21세기의 한국 국민에게도 여운이 크다. “당신은 독일의 모든 것이 당신과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당신이 독일이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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