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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2.17 작은 거인 김태식 세계를 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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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1980.2.17 작은 거인 김태식 세계를 누이다.

오늘은 밤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옛날 글을 그대로 옮겨 옴.


봄이 왔으되 봄같지 않았던 80년 서울의 봄을 전후하여, 꼬마 권투팬이었던 나는 낙담의 한숨과 환호의 비명을 번갈아 내지르고 있었다. 80년 신년 벽두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3차 방어전의 금자탑을 세웠던 김성준이 일본의 듣보잡에게 타이틀을 허무하게 내 주었지만 그 한 달 뒤에는 독일병정 김태식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그 바로 1주일 후 당연히 롱런할 줄 알았던 왼손 스트레이트의 달인 김상현이 경기 종료 4분을 못참고 캔버스에 드러누웠고 광주에서 피바람이 몰아치던 5월 18일에는 무려 5차 방어까지 문제없이 끝냈던 최고의 테크니션 박찬희가 오꾸마 쇼지의 보디 공격에 썩은 고목처럼 주저앉아 버렸다.


그 숱한 경기와 쟁쟁한 이름들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는 바로 김태식이었다. 독일병정이라는 별명 그대로 풍차같이 휘두르는 좌우훅을 무기로 돌진에 돌진을 멈추지 않는 인파이터였던 그가 1980년 2월 17일 루이스 이바라라는 이름의 챔피언과 벌인 경기는, 인파이터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연타란 이렇게 치는 것이라는 것을 수십만의 촛불처럼 화려하고 휘황하게 선보인 경기였고 만석보 터지듯 속시원하게 사람들의 속을 뚫어 버린 게임이었다.

1회전 공이 울린 순간 나는 이바라의 스피드에 경악했다. 분명히 왼손잡이로 알고 있었는데 이바라는 레프트 잽을 날리면서 왼쪽으로 돌면서 김태식을 헛갈리게 했다. 키도 한 뼘은 더 큰데다 리치도 적잖이 긴 이바라와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김태식은 흡사 검은 메뚜기와 하얀 풍뎅이 같았다. 계속 풍뎅이를 놀리면서 날카로운 잽을 던지며 링을 빙빙 돌던 메뚜기가 멈칫했던 것은 1라운드가 중반을 갓 넘은 뒤의 일이었다. 강원도 묵호 바닥을 평정했었다는 김태식의 주먹이 이바라의 턱을 흔들었고 뒷걸음치던 이바라는 로프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폭풍이 시작됐다. 윙윙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롱훅과 어퍼컷이 이바라의 턱과 복부에 꽂힐 때마다 이바라는 움씰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케이오율이 90퍼센트가 넘던 돌주먹의 눈부신 궤적이 인정사정 돌보지 않고 이바라의 온몸 구석구석에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뜻밖의 행운이 뒤따랐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환호가 공 소리를 묻어 버려서 1라운드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이바라는 김태식의 샌드백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바라가 항의할 정신머리조차 빼앗겨서 그렇지, 그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권투팬이라면 알 것이다 30초가 얼마나 긴 시간인지.




폭풍은 2라운드에도 이어졌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 게 아니라 집중호우에 뼈속까지 젖어버린 이바라는 흐느적거리다가 무릎을 꿇었고 결국 길게 드러누워 버렸다. 장충체육관 지붕이 날아갈 듯한 환호가 장내를 메웠다. 이런 장쾌한 승리는 드물었다. 홍수환의 4전 5기는 너무 극적이어서 얼떨떨했고, 김상현과 박찬희는 잘한다 싶긴 해도 이렇게 폭풍같이 상대를 몰아부쳐서 곤죽을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관중들은 김태식이 인터뷰를 끝내고 퇴장한 뒤에도 흥분에 빠져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강원도 출신 재벌들은 앞을 다투어 김태식에게 아파트와 승용차를 선물하고 그걸 소리 높여 광고했다. "독일병정" 김태식의 돌진과 분투는 실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김태식의 1차 방어전 상대는 같은 체급의 또 다른 챔피언 박찬희가 고전했던 필리핀의 아르넬 아로살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를 이바라처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라이벌에 대한 우월감과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 보려는 맘이 있었으리라. 구름처럼 모여든 관중과 TV 앞에서 오픈 게임부터 줄줄이 보고 앉았던 동네 사람들도 그런 기대감으로 충만하였으리라. 그러나 아르넬 아로살은 허리가 유연하기로 소문난 필리핀 복서 가운데에서도 그 허리의 부드러움이 문어처럼 출중한 선수였다.


김태식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와 와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이바라 때처럼 그 환호가 이어지지는 못했다. 바람이 올 때마다 스러졌다가 일어서는 갈대처럼 아로살은 장수말벌 날개짓같은 소음을 내는 김태식의 주먹을 허리 위로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로살이 내뻗은 주먹 한 방에..... 김태식은 몇 달 전의 이바라 형상으로 로프에 내몰리고 말았다. 어찌 어찌 판정으로 이기긴 했지만, 독일 병정 김태식, 상대를 통쾌하게 두들겨 부순 KO왕 김태식의 턱뼈는 불쌍하게 깨져 있었다. 의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결사의 투혼"이었지만 그리 영광스러운 상처는 아니었다.

그래도 김태식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아로살 때는 실수한 것이고 이제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이봐라~~~~" 하면서 이바라 꼴로 들부수어 주리라는 믿음은 누구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진실로 웃기지도 않는 방해자가 등장했다. 그 방해자는 다름아닌 스포츠라면 사죽을 못쓰는 육사 골키퍼 출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다.

광주의 피를 꿀꺽꿀꺽 먹고 자란 이 흡혈귀들은 차라리 햇볕 아래서 십자가와 키스를 하면 했지, 미국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싫어하는 변종이었던 바, 아파르트헤이트로 이름 높던 남아공과의 교류를 막던 UN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했는데, WBA 랭킹 1위 명 도전자 피터 마테블라가 하필이면 남아공 사람이었던 것이다.


국보위는 이유 불문 김태식과 마테블라와의 대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타이틀 박탈 위기에 놓인 김태식은 챔피언으로서의 어드밴티지 다 버리고 미국의 LA로 날아가서 마테블라와 결전을 치러야 했다. 글러브도 김태식의 파괴력이 잘 반영될 수 있고 항상 껴 왔던 6온스짜리가 아니라 LA 현지 규정에 따라 8온스짜리를 껴야 했다. 과정도 험난했고 상황도 조석변개했지만 김태식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의 권투에 환호하는 한국 사람들은 LA에도 넘쳐났다. 적어도 그날 경기장의 소재지는 LA가 아니라 서울특별시 나성구였다.


7라운드에서 김태식은 그로기에 몰렸다. 피터 마테블라의 주먹이 김태식을 난타했고 6온스 글러브를 끼었더라면 김태식이 먼저 캔버스에 나뒹굴 뻔 할 정도의 위기였다. 하지만 마테블라의 체력이 떨어지면서 독일 병정 김태식의 그 무서운 롱 훅이 점차 먹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환호도 덩달아 커졌다. 아이를 무등태운 채 아이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읏쌰 읏쌰를 외치던 교민의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타국에 이민와서 온갖 설움과 무시를 당하고 살던 한국인들은 이바라를 혼절시키던 김태식의 폭풍이 자신들의 가슴 속 설움의 건더기와 찌꺼기들을 홍수처럼 쓸고 가 버리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14라운드....... 김태식은 이바라와의 대전을 거의 재연하는 데 성공했다. 소나기 펀치..... 도끼같은 롱 훅과 갈고리같은 어퍼컷이 쉴새없이 터져나왔고 마테블라는 로프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최후의 공격은 화려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못되었던 것이다.

판정은 엉뚱했다. 내가 보기에는 김태식이 분명히 이긴 경기였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첫 부심이 매긴 점수가 발표되었을 때 경기장은 달나라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김태식이 이겼다는 판정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점수가 발표되자 경기장은 거친 야유로 뒤덮였다. 그때 무척 짜증스럽고 얄밉게 들리는 종 소리가 들렸다. 땡 땡 땡 땡 땡..... 마치 "조용히 해 이것들아" 라고 일갈하는 듯한 종 소리였다. 세 번째 심판도 마테블라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번엔 분노의 함성이 일었지만 분명히 미국인이 치는 듯한 종 소리가 또 그 함성을 조롱했다. 땡 땡 땡 땡 땡.... 입 닥쳐 이거뜨라.... 경기는 끝났어.

김태식...... 온 나라를 들뜨게 하고 고단하고 분주한 미국 교민들까지도 열 일 제쳐놓고 몰려들게 만들만큼 매력 넘치는 파이팅을 했던 김태식의 타이틀은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갔다. 그 뒤 김태식은 절치부심 새 챔피언이 된 안토니오 아벨라에게 재도전을 했지만 자신이 무너뜨렸던 이바라보다도 더 참혹한 모습으로 무너졌다. 이바라는 그래도 저항을 하다가 무너졌지만 김태식은 아벨라의 강력한 주먹을 맞고는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리고 허둥거리다가 버둥거리며 엎어졌다. 그날 김태식은 그가 자랑하는 롱 훅을 단 한 방도 아벨라의 몸뚱이에 꽂지 못했다. 화려했던 승리만큼 참혹한 패배였다.



김태식이 이바라와 벌인 경기는 지금도 그때를 추억하는 이들에게는 기가 막힌 술안주가 된다. 야 그때 정말.... 허허로이 주먹을 휘두르며 그때를 재연하는가 하면 불쌍하기 그지없던 루이스 이바라의 이름까지도 부록으로 기억 속에 담겨 내려오고 있다. 슈거레이 레너드가 헌즈를 잡을 때 퍼부었던 연타보다 화끈하고, 장정구의 변칙적이고 쌈박질같은 막무가내 주먹보다는 훨씬 예술적이었던 그의 롱훅 세례는 사람들의 뇌리에 그만큼 각인됐고, 두고두고 그리움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사실상 김태식의 최대의 약점도 바로 그 롱훅이었다. 롱훅을 휘두르다보니 당연히 턱이 열렸고 그 턱이 아로살에 의해 깨졌고 아벨라에게는 끔찍할 정도의 횡액을 당했으며 결국 그는 뇌수술을 받아가며 권투 인생을 접어야 했다. 이바라처럼 왼손잡이 주제에 변칙으로 골려주겠다고 나대다가 된 주먹 한 방을 허용하는 객기를 만나거나 라운드가 끝나는 공 소리를 주심도 선수도 듣지 못해 근 30초를 더 두들겨 팰 수 있는 행운을 잡았을 때, 그의 롱훅은 역사에 남는 빛을 발했고, 장쾌한 기억으로 길이길이 박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까다롭거나 되레 그를 능가하는 주먹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한국 권투사에서 가장 참혹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던 것이 김태식 권투였다.

슬픈 것은 그가 롱훅 위주의 복싱을 했던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어려서 사고를 당해 부러진 오른 손 엄지 손가락을 부실하게 치료하는 바람에 손가락이 굳어져 버렸고, 구부러지지 않는 엄지에 지장을 덜 주는 타법을 연마하다 보니 결국은 롱훅을 휘두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지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익힌 기술이었고 막강한 파괴력을 동반하였기에 김태식을 구름 위로 올려 놓았던 롱훅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화려함 뒤에는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검은 동굴의 그림자가 항상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이 김태식의 빛이자 그림자였고, 영광이자 아픔이었으며, 추억이자 악몽이었다.

살아가면서 화려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화려함을 집어삼킬만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을 넘어서 집단에게도 마찬가지다. 툭하면 그때가 좋았다며 추억하고 그때가 재연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는 것은 좋으나, 상대가 이바라일 때 김태식이었던 것처럼, 시와 때가 다르고 상황과 배경이 다른 지점에서 그날의 영광만을 되뇌며 그 재연을 현실화시겨 보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불쾌해지고 불행해질 수 있는 망상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나마 김태식은 굳어버린 엄지 손가락이라는 슬픈 사연이라도 있었지만 펄펄 살아 숨쉬는 멀쩡한 손가락 가지고 "그때와 같은" 롱훅에 한 번이라도 걸려라고 붕붕대는 건 복고도 아니고 추억에 사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어리석음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세상은 바뀌고 선수도 변한다. 사각의 링에 오르는 것은 항상 김태식과 이바라가 아니다. 그런데 누가 올라오든 이바라랑 할 때의 장쾌함만 떠오른다면? 그는 결국 패배만을 경험할 뿐일 것이다. "좋았던 시절"에 젖어 사는 사람은 결코 좋은 날을 만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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