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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2.20 코리아 판타지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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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8년 2월 20일 코리아 판타지 초연

2월 19일에 대한제국 애국가 얘기를 했으니, 오늘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얘기해 보는 게 좋겠다. 1938년 2월 20일 우리나라의 국가의 선율이 담긴 <코리아 판타지>가 처음으로 지구상에 울려 퍼졌다. 그 장소는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지닌, 이웃나라 영국에 허구헌날 쥐어 터지고 짓밟히고 그 폭정 하에 수십만이 굶어죽고 해외로 탈출해야 했던 기구...한 역사의 나라 에이레의 수도 더블린이었다.

대한제국에서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는 다양한 가사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프란츠 에케르트의 애국가는 공식적으로 전파되었지만 각 학교마다 지방마다 다른 가사로 불리워지는 노래가 따로 있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가사의 원형은 윤치호 또는 민영환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는데, 윤치호 쪽이 더 유력한 것 같다.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가 안창호의 권유에 의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되고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로 바뀌고 몇몇 구절들이 수정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정착해 갔다고 한다. 문제는 멜로디였다.

어떤 가사는 영국 국가이자 찬송가 멜로디였던 "God Save the King"을 빌려오기도 했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불리운 것은 역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의 멜로디를 딴 것이었다. 배재학교 영어 교사의 제의였다고 하는데 별 생각 있어 보이지 않는 그 제안은 그 이후 근 반 세기 동안 조선이자 '대한' 사람들의 한과 의지를 담아 냈다. 해방 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동해물과 백두산이'도 올드랭사인 멜로디였고, 국군이 북진했을 때 국군을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의 환영가도 역시 그 가락이었다.


193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던 음악가 안익태는 여기에 못내 불만이 있었던 것 같고 애국가 가사를 자신의 작품 <코리아 판타지>에 담았다. 그런데 일찍이 친일교사 추방운동으로 무기정학을 먹은 적도 있는 안익태, 애국가를 작곡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수백 번 읊었을 안익태에게는 이상한 면도 있었다. 굳이 미국인들에게는 '익태 안'이 아니라 '에키타이 안'이라고 지칭하고 다녀 그를 돌봐주던 한국인 선배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는 것.


1935년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조선인 선수들을 만난다. 손기정도 신의주 사람이었지만 평안도 말씨 억세게 쓰는 이 깡마른 안경쟁이가 '조선의 응원가'라고 내미는 악보에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손기정이 스터디움에 달려들어올 때에도 안익태는 몇 안되는 재독 조선인들과 함께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불렀다고 한다. 적어도 그 순간의 안익태의 '우리 나라 만세'는 조선 만세였을 것이다. 그리고 더블린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코리아 판타지>를 처음 무대에 올리던 무렵, 그는 그렇게 얘기했다. "한국인들은 투쟁심이 아일랜드 사람들보다 부족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일랜드는 지금 자유국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지나치게 평화적(?)인 조선인이었다. 목메어 불렀던 노래 속 조국의 압제자의 행각을 찬양하는 음악회를 지휘했던 것이다. 2006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에 재학 중이었던 송병욱이 공개한 동영상 속에서 '에키타이 안'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홀에서 열린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베를린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며 자신이 작곡한 축전음악 '만주국'을 연주하고 있다. 이 음악은 안익태의 연보나 작품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곡이었다. 더 찝찝한 것은 이 실종(?)된 음악의 선율이 코리아 판타지 최종 완성본에 일부 삽입됐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 축전 음악을 독일에서 지휘하기도 하는 등 친일적 활동을 한 증거가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코리아 판타지의 합창 부분이 대한민국 국가가 된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가 친일 행위를 했건 안했건 일제 시대 교민들이 올드랭사인에 맞춰 애국가 부르는 것을 보며 저 노래에 내가 곡을 만들리라 다짐했던, 그리고 외국인 합창단에게 한국어 발음을 교육시켜 가며 코리아 판타지를 지휘했던 음악가에게 그것은 감동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감동을 안익태는 다소 엉뚱하게 푼다. "박사님의 허락없이 제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교향시 <한국>을, 위대한 영웅이자 위대한 애국자로 존경하는 한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시며, 생긴 지 얼마되지 않고 할 일 많은 우리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이승만 박사께 헌정합니다. - 안익태, 1954년 8월 25일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된 악보 중) 그리고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 1호 문화포장을 수여하여 답한다.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는 윤치호는 젊었을 때의 개화의 열정이 좌절당한 후 영어로 일기를 쓰는 고상한 지식인으로서 비루한 조선을 한탄하며 살다가 결국 친일파로 전락했고, 그 작곡가 역시 처음의 뜻은 가상하였으되, 그 생애를 밝히면 밝힐수록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애국가를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6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노래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비를 걸자면야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하는 해방가의 작곡가 김성태부터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의 작사자 윤해영이 온전할 수 없고, 그들을 비판할 수야 있지만 노래를 지울 수야 없지 않은가.

내가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애국가는 1980년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 도청 앞에 운집한 수만 명의 군중들이 불렀던 애국가였다. 방석모를 쓰고 카빈총을 든 청년이 그야말로 긍지와 기쁨으로 터져나갈 듯 한 마디 한 마디를 부르던 장면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때 청년은 그 생명을 '길이 보전'할 수 있었을까. 애국가의 선율이 처음으로 웅장한 합창으로 울려 퍼진 날, 그의 애국가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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