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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4.16 조승희 때 우리는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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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의 비극

2007년 4월 16일 버지니아 공대에서 일어난 대형 총기 학살 사건 뉴스를 처음 접한 것은 사무실 안에서였다. 네이버와 다음과 엠파스에 연속부절로 뜨는 뉴스들을 초 단위로 읽으면서 일하는 동료들에게 읊어 주었는데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저마다 한 마디씩 토해내기 시작했다. "미국이란 나라 참 이상하다." 류의 탄식에서 왕년에 경남 의령에서 일어났던 ...경찰관 우범곤의 총기 난사 사건까지 들먹여지면서 말들이 분분한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로 화제의 중심이 점차 옮겨 갔다. "걔 백인이야?" "백인은 아니래..... 아시아계라는데......" 그때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던 몇 명의 몸이 움찔하면서 몇 프레임 차이로 똑같은 반문이 튀어나왔다.

"걔 어느 나라 애냐?"

그 가시에 찔린 듯한 반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을 것 같다. 아시아계라니 혹시나 한국인이 아닐까 하는 당연한 의문도 있을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개망신이다 하는 낭패감도 섞일 것 같고, 더하여 미국에 재미교포든, 유학생이든 머물고 있는 친척이 하나도 없는 경우가 오히려 더 드문 형편에 '버지니아 쌍권총 학살사건'의 사이코가 한국인이라면 그 파장이 얼마나 될지에 대한 걱정도 포함되어 있었을 게다.

"중국인 같다는데?"

이 답변 하나로 그 움찔함은 정리됐다. 정작 미국인들이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분해서 판단해 줄까 하는 의구심은 논외로 하고, 그때부터 이야기의 축은 총기 난사 사건이 수시로 일어나는 미국 사회에 대한 탄식으로 다시 옮겨 갔고, 그에 더해서 약간 묘한 뉘앙스의 책임론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 중국놈 참...... 중국놈들이 한 번 돌면 저런다니까."

한국인이 아니라는 우리들만의 안도감(?)은 밤 늦게 브라운관을 장식한 주먹만한 글자의 속보에 산산조각이 났다. 한국인 조승희. 그 자막의 획 하나 하나,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속에서도 유난히 크게 들렸던 코리언 스튜던트의 발음 기호 하나 하나가 낭창낭창한 사시나무 가시가 돼서 귀에 와 박혔으니까. "아이고 하필이면 한국 사람이냐."는 걱정부터 더럭 뇌리에 떨어졌다. 즉 2억 정 가까운 총기가 자유로이 유영해 다니며 초등학생으로부터 저격테러범에까지 거침없이 몸을 맡기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 같은 건 삼천리 밖으로 사라지고, 범인의 국적과 같다는 것만으로 영문을 알 수 없는 걱정과 가해자로서의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뭉실거리며 일어났던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상당수의 친지들도 맘에 걸리고 9.11 이후 아랍계 사람들에게 가해졌다는 행동들에 대한 으스스한 소문들이 스멀거리며 되살아났다. 당장 미국인들이 코리아 타운에 살인마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난입할 것 같고, 안그래도 양키들한테 설움 받고 사는 한국 사람들이 곱배기로 맘 고생 하겠다 싶어 이마에 주름을 모으게 됐던 것이다.

백두백의의 내가 이랬을진대 나라의 외교를 책임진다는 사람들의 마음도 꽤나 급했으리라. 국적이 밝혀지자마자 애도와 유감의 성명을 낸 건 그렇다고 치는데, 주미 한국 대사의 32일 금식 제안에 이어 다음과 같은 대화까지 오갔다는 것은 그분들의 마음이 급하다 못해 방향감각을 상실해 버린 듯 했다.

" 조문사절단 구성을 검토하고 있다. 언제쯤 가면 되나."(정부 당국자)
"그럴 필요 없다. 한국계 이민자가 사고 낸 거지 한국이 사고 낸 게 아니다. 모국이 상황에 끼어드는 것은 좋지 않다." (미 국무성 당국자)

미국인으로부터 "서방예의지국"이라는 칭호라도 받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저 과공에 대해 혀를 차면서 나는 내 자신은 왜 그리 당황했을까에 대해 생각을 기울여 봤다. 그때 그 낭패감은 무엇일까. 왜 그렇게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을까. 미국에 친지가 살고 있기 때문일까. 외국 사람들은 북핵 위기 때 한국을 전시상황으로 생각했다는데, 나 역시 이 사건 터진 후의 사태에 대해 지레 겁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고민 후에 슬며시 끼어든 명제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미국 영주권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초등학교엔가 학적부가 보관되어 있는 조승희라는 이름의 한국인이라는 것이었고, 그의 개인적 특성을 넘어 한 집단과 범죄자를 동일시하는 해괴한 공동체의식(?)에 사로잡히는 습관 자체가 다분히 한국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국 범죄 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지존파 사건 때 추석상에 둘러앉아 있던 친지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역시 00도 놈들이야." 하는 혐오스럽기까지 한 투덜거림을 필두로, 어떤 사건이 터지면 이상하게도 그 출신지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예측이 빗나가면 그만이지만 그 예상이 맞아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러면 그렇지. 하여간......"을 연발하던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났던 처지로서는 미국인들도 당연히 그와 같으리라 지레 짐작하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어떤 사태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는 이들이 책임자를 자처해야 했던, 그리고 무슨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어느 지역 사람이냐가 제일 처음 물어지고, 혹시나 우리 지역은 아닐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2007년 나의 낭패감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족 가운데 악질 하나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서 전체 조선족 추방하라는 목청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고, 외국인 범죄율 (내국인 범죄율에 비해 낮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 같은 통탄이 무르익는 나라에서, 어쩌면 2007년 이맘때 한국 정부와 일부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과공'의 풍경은 일종의 본능적인 회피가 아니었을까. "버지니아 택의 살인마가 한국인이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내가 느낀 공포란 우리가 익히 해 본 짓거리와, 당해 본 짓거리를 상상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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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4.17 조진수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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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2.4.17 조진수의 실종

1970년 대구의 한 중학교에서 2층 유리창을 닦던 한 학생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국전 상이용사의 4남매 중 장남으로 똑똑하고 듬직하여 가족의 기대를 받던 학생이었지만 허무하게 생명을 잃고 말았다. 요즘 같으면 학교측의 관리 소홀이 인정될 테지만 5층 유리창틀에 아무 안전장치 없이 걸터앉아 유리를 닦았던 내 기억으로 미뤄봐도 그저 사망자의 실수로 인정됐을 것 같고, 원...통한 가족들은 소송까지 걸었지만 패소한다. 집안 말아먹으려면 정치 아니면 소송을 하라는 격언은 그때도 마찬가지여서 집안은 더욱 기울고 식구들은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법대에 가서 억울한 사람을 돌보겠노라고 다짐한 막내가 있었다. 서울법대 81학번으로 그 꿈을 이룬 그의 이름은 조진수였다.

그런데 입학 후 그는 내리 세번 휴학을 한다. 즉 그 기간 동안 서울대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니지는 않았지만 법대 내에서 학년 대표를 맞는 등 활달하게 생활했고 의식화 서클로 분류되는 서클에도 가입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1982년 4월 17일 기거하던 독서실에서 "건장한 세 남자가 찾아와 함께 나갔다."는 독서실 총무의 증언 이후 세상에서 증발했다. 지방에 있었던 가족들은 뒤늦게 조진수를 찾기 시작했지만 종적은 간곳이 없었다.

세 명의 건장한 남자를 따라갔다는 증언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처음엔 '가출' 신고를 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던 어머니의 조심성이었다. 남편은 한국전 상이용사였지만 오빠는 당시 대구 경북에 흔했던 보도연맹원이었고 어느날 아들처럼
누군가와 함께 나간 뒤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서슬이 푸르다 못새 손으로 만지면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던 전두환 집권 초기, 정치적 실종 문제를 제기하기엔 가족의 깜냥이 너무 작았다. 어머니는 하나 남은 둘째 아들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실종된 막내의 책이며 유품이며를 죄다 버리고 있었다.

오늘은 컴컴한 독서실에서 자신을 찾아온 세 명의 남자와 함께 길을 나선 청년이 사라진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다. 그 실종의 이유는 짐작하는 이에 따라 다르다. 가족은 정치적 실종이라고 믿고 있고 그에 공감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떤 이는 그가 말못할 고민을 품고 그걸 술로 풀며 괴로와했고 81년 가을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사는 술인데 안 먹을 거요?"라는 식으로 말하여 주변을 놀래킨 적도 있다고 증언한다. 그가 떠돌이가 되어 부산에서 변사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조진수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한 독서실 총무의 신원도 행방도 30년 세월의 늪 속으로 사라졌다. 장래가 촉망되던 법대생 조진수는 아무런 종적도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과 민가협, 그리고 81학번 지인들의 도움으로 일종의 '사설탐정' 격으로 오마뉴스 기자들이 특별취재반을 가동했지만 손에 잡힌 진실은 없었다. (오늘의 '오역'은 그 취재 기사 내용을 갖다 베낀 것임을 밝혀 둔다)

 그런데 엉뚱한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 노진수의 최후를 안다는 이의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북파공작원 출신이던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조진수를 납치해 죽여서 강원도 고성의 저수지에 던져 버렸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범인으로 지목된 이들의 알리바이는 확실했고 저수지의 물을 빼도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북파공작원 내부의 알력으로 인한 허위제보였다. 그런데 누명을 쓸 뻔했던 이의 증언을 들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 당시 다른 정치 테러를 한 적은 있어도 운동권 학생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보사가 그들을 암적 존재라고 말하고 죽여서 수장하라고 시켰다면 주저없이 실행했을 것이다."

그가 자행한 정치 테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에게는 명령하지 않았지만 기꺼이 사람 때려 죽여 밧줄 묶어 수장시킬 기세의 물리력을 넘치게 보유했던 이들이 즐비했던 시절 과연 그런 명령은 내려진 적이 없을까.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진 이들은 대관절 얼마나 될까.

공포는 무엇보다 오래 기억되며 심지어 유전되기도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의 실종 앞에서 어머니가 허겁지겁 한 행동이 문제될만한 물건을 치우는 것이었음은 뭘 말하겠는가. 잠시 나갔다 오마 나간 오빠가 돌아오지 않았던 날의 공포가 고압전기처럼 조진수의어머니를 감싸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매우 의아한 것이 있다. 왜 평범한 대학생들이 실종되고 엉뚱한 곳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허리에 콘크리트를 매고 헤엄치다가 자살(?)하고 "모처에서 나왔다"는 한마디에 사색이 되고 술자리에서 말한마디 하기 두려웠던 날의 공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공화국의 대통령을 꿈꾸면서도 자신의 아버지의 야만적 행각은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여자가 '선거의 여왕'이 되고 , "저 새끼 싸가지없네 조져"를 부르짖는 민간인 사찰보다 인터넷 방송에서 지껄인 헛소리가 더 문제시되는 이 공포의 실종을 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30년 전 오늘 한 젊은이가 세 명의 건장한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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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4.18 야마모토 이소로쿠 격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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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 격추

1943년 4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 전 해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이후로 알루샨 열도에서 과달카날까지 전 태평양을 호령하던 일본의 기세는 완연히 꺾여 가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일본의 암호를 미국측이 고스란히 해독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일본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는데 미국측의 철저한 연막 작전도 한몫을 했다. 이를...테면 암호 해독을 통해 목표물이 설정되면 반드시 공습에 앞서서 정찰기를 근처에 출동시켰다. 즉 일본군으로 하여금 “우리 암호가 노출됐다!”는 의심을 하지 않고 “재수없게 정찰기에 걸렸다!”라고 여기게 만든 것이다.

그러던 중 1943년 4월 17일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던 요원이 심각한 얼굴로 상관을 찾았다. 해독된 내용은 입이 벌어질만한 일이었다. 진주만 공격의 총지휘관이었고 일본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비행기를 타고 남태평양 각처의 일본군을 순시하고 있었는데, 4월 18일의 일정이 출발지와 도착지는 물론 분 단위의 비행계획, 동행자, 호위 전투기 병력까지도 상세하게 기록된 전문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통령 보고 사항이었다. 루즈벨트는 해군 장관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탄 비행기를 격추시키라고 명령했고, 미 해군은 그 명령을 이행한다. 야마모토의 비행기는 비행 도중 ‘우연히’ 발각되어 격추당한 뒤 밀림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일본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꾸는 죽었다.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에 참가했다가 손가락 몇 개를 잃은 손으로도 물구나무서기를 곧잘해서 친구들을 즐겁게 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파시즘의 광기로 치닫던 일본에서 보기 드문 합리적인 장교였다. 진주만 공격을 퍼부은 뒤 환호하는 부하들 틈에서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깨운 건 아닌가”라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는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그가 미국과의 전쟁을 얼마나 미친 짓으로 보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예화는 많다. 진주만을 치러 나간 지휘함 안에서도 그는 이미 공격 준비에 나선 부하들에게 미국과의 극적인 합의가 도출되면 공격을 중지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부하 나구모 제독 이하 공명심 그득한 장교들이 “한 번 누던 오줌발을 어떻게 멈추느냐.”라고 반발하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렇게 소리친다. “이 명령을 받고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내게 사표를 보내라. 페리 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온 이래 일본 해군이 함대를 건설한 건 오로지 평화를 위해서였다.”

또 전쟁 발발 전 일본이 ‘귀축미영’ (미국과 영국을 낮춰 부르는 호칭)과의 전쟁 불사를 호언하던 무렵, 야마모토는 “정말로 미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미치광이들이 있기는 있구나.” 라고 탄식하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동경은 세 번쯤 불바다가 될 것이다.”고 푸념하고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 영국 5 일본 3의 비율로 함대 규모를 제한한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 후 왜 우리가 3이냐고 방방 뜨는 젊은 일본 해군 장교들에게 “야. 우리가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영국 미국이 5로 묶인 거야. 만약 정말 군비경쟁이 벌어진다면 우린 10대 1로 벌어질 수 밖에 없다니까?”라고 현실을 일깨워주던 지휘관이었다. “나에게 3천만개의 죽창을 다오. 세계를 정복해 보이겠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자신감이 난무하고 까짓거 전쟁 한 번 하자는 군부강경파가 민간 정부의 수상을 파리 잡듯 죽여 버리던 시절,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시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일본 육군은 그를 죽이겠다고 별렀고 해군 장관은 결국 연합함대의 사령관으로 그를 피신(?)시켜야 했던 것이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인생 행로를 지켜보자면 논쟁과 대립 속에서는 언제나 득세할 수 밖에 없는 강경론자들 앞에서 한 온건파가 직면해야 했던 비극의 모든 것이 보인다. 겁쟁이로 몰리기도 하고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편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나내는 꼴을 목도하기도 하고, 승패가 뻔한 전쟁을 어떻게 피하려고도 하지만 그에 본질적인 저항을 하지는 못하고 결국 “개전 1년 동안은 무슨 수를 쓰든 버틸 거니까 그 다음은 알아서 하시오.”라는 식으로 자신이 바보라고 생각했던 부류에 동참하고, 그 지략을 다해 바보들의 행진의 선봉이 되는 온건파.

말도 안되는 논리와 억지를 부리는 이들을 경멸했지만, 희생이 클 수 밖에 없는 폭격기의 근접 공격 방식을 변경하자는 부하의 주장을 “기백이 부족하다”고 거절하는, 그리고 총사령관의 몸으로 졸병들 사기를 높이겠다고 최전방을 누비다가 그만 죽음을 맞았던, 꼴통 일본군의 일원일 수 밖에 없던 온건파.

야마모토는 전쟁의 끝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쟁의 소용돌이를 제거하려는 노력보다는 소용돌이에 스스로 휘말려 들어가는 선택을 했고 그 어쩔 수 없는(?) 선택 속에 일본은 300만이 넘는 목숨을 잃어야 했다. 다시금 온건파라는 개념을 생각해 본다. 역사 속에서 용기를 와치는 것은 항상 강경파였지만 진실로 유용했고 또 절실했던 것은 오히려 온건파의 용기가 아니었을까. 야마모토는 자신의 혜안을 미련한 용기와 맞바꾸는 쪽으로 선택을 했고, 이는 그와 일본 모두의 비극으로의 달음박질의 디딤대가 된다. 문득 고민이 된다. 과연 그런 일은 야마모토에게만 일어났을 것인가.

1960.4.19 어느 국민학생의 죽음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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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0년 4월 19일 어느 국민학생의 죽음과 시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최루탄 눈에 박힌 김주열이 떠올랐다. 3월 15일 역사에 남을 부정선거를 목도했던 국민들은 급기야 사람을 죽여 바다에 내던진 정권에 대한 임계점을 넘어선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오히려 조용한 것은 대학가였다. 4월 4일 전북대에서 시위가 있었지만 서울의 대학생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히려 고등학생들이 거리에 뛰어나와 "형님들 비겁하십니다!"를 부르짖고 있던 판이었다.  그 기묘한 침묵을 깬 것이 4월 18일 고대생들의 시위였다.  일설에 따르면 대학생들의 연합 시위가 4월 21일로 암암리에 합의되어 있었는데 성미 급한 고대가 먼저 치고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던 고대생들을 깡패들이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분노의 방아쇠가 앞당겨졌고, 4월 19일은 우리 헌법과 역사에 길이 남을 날로 정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서울 중심가는 각지에서 몰려나온 대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들의 시위대에 뒤덮인다.  바로 전날 고대생 시위에서 뿌려진 유인물의 내용은 이런 것들이었다.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이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즉 이승만 물러가라는 얘기나 정권 퇴진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하지만 4월 19일 마침내  “우리나라 대한 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올" 그 이름,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동국대생들은 경무대로 가자!" 스크럼을 짠 동국대생들을 선봉으로 데모대는 경무대 앞으로 몰려갔다.  경찰의 1차 저지선이 뚫렸고 2차 저지선이 무너졌다.  그리고 경무대로 가는 마지막 3차 저지선의 코앞까지 시위대가 밀어닥쳤을 때 경찰의 총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 4.19의 시작이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갔다.  차마 총을 쏘기야 하랴 했던 군중들은 자신들을 다스렸던 권력의 야수성에 아연실색했다.  대한민국 국립 경찰이 국민들의 가슴을 겨냥해 총을 쏜 것이다. 

 이 와중에 한 초등학생이 쓰러졌다.  전한승.  48년 4월 14일생. 전중현씨의 2남 6녀 중 장남으로 서대문구 충정로에 살았으며, 수송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4시 20분경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국회의사당으로 행진하는 데모대와 마주치자 가방을 앞에 놓아두고 박수 치며 응원했다. 경찰이 호통을 치자 잠깐 뒤로 빠졌다가 다시 대열 앞으로 나와 박수를 쳤다. 그것이 괘씸했던 것일까 전한승은 얼굴과 머리에 직격탄을 맞고 거리에 나뒹굴었다.  곧바로 수도의대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5시경 숨을 거두고 만다. 산수를 좋아하고 용감한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아이는 그렇게 죽었다.  4.19 최연소 희생자였다. 

 그로부터 1주일 뒤 4월 26일 계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두 가지의 감동적인 시위가 발생한다.  하나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각 대학 교수단의 시위였고 하나는 전한승 학생이 다녔던 수송국민학생 1백여 명의 시위였다.  그들은 탱크가 진주한 서울 시내에서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고 절규했다.  고사리손으로 어깨동무를 하고서 주먹을 불끈 쥔 아이, 눈 꼭 감은 채 뭔가 외치고 있는 아이, 겁먹은 표정으로 옆 급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 그들의 위로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그리고 그 대열에 분명히 있었음직한 한 소녀 수송국민학생 강명희는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시로 자신의 동료를 앗아간 4월 19일을 노래했다.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과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1967.4.22 한국 여자농구 세계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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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4.23 네바다 핵실험 그리고 존 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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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23일 네바다 핵실험 그리고 존 웨인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는 핵무기의 미국 독점 시대가 끝난 것을 의미했다. 여차하면 너는 죽는다는 일방적인 으름장이 통하던 시대가 거하고 우습게 놀면 나도 쏜다는 대결 국면의 시작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도 프랑스도 핵실험을 서두르고 있었다. 1952년에는 영국도 핵실험을 성공시킨다. 이제 미국의 선택은 더 크고 더 강력한 핵무기 개발이었다. 1952년 4월 23일 그때껏 있었던 핵실험 가운데 가장 대규모의 핵실험이 펼쳐진다.



 핵실험이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이 핵폭발을 언론을 통해 생중계했다. 불과 폭발 장소 16킬로미터 밖에서 기자들이 찍은 내용은 그대로 전파를 탔고 폭발 장소로부터 불과 100여 킬로미터 남짓 떨어졌던 라스베가스 시민들은 티브이 속의 폭발을 보며 무서워하기보다는 호기심을 폭발시켰다. ‘원자의 도시’로 불린 라스베이거스는 관광객들을 위해 핵실험 날짜와 전망이 좋은 장소까지 안내하는 대단한 친절도를 보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의 위력을 경험하긴 했으나 그 후유증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소련도 마찬가지여서 주민들을 불러앉혀 놓고 원폭을 터뜨리며 소비에트의 힘을 찬양하던 미치광이짓도 불사해다 하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52년에는 네바다에서의 핵실험이 그야말로 참새 방앗간 드나들듯 행해졌다. 4월 23일의 최대규모 실험에 이어 일종의 전술무기인 핵대포 실험도 감행됐다. 미국은 당시 교착 상태에서 지루한 고지전으로 이어가던 한국에서 이 무기를 쓰고 싶어했고, 이승만도 그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이 양반, “공산당을 한 놈도 이 산하에 남길 수 없으니 정히 떨어뜨릴 수 없다면 내 머리 위에 떨어뜨리기를 바란다.”고 망발했다고 하는 소문도 있는데 차마 믿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1954년 네바다 주 핵폭탄 실험 장소로부터 200킬로미터 떨어진 유타의 사막 지대에 한 떼의 영화 촬영진이 몰려들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마초이자 극우적인 사고를 지녔던 것으로 유명한 존 웨인과 여배우 수잔 헤이워드도 함께 왔다.



 해괴하게도 <정복자>라는 이 영화에서 존 웨인이 맡은 역은 칭기즈칸이었다. 그리고 수잔 헤이워드는 타타르 공주였다. 칭기즈칸같은 위대한 정복자가 검은 눈에 찢어진 눈의 동양인일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쓸만한 동양인 배우가 없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해괴한 것은 몽골병 엑스트라들은 또 몽땅 인디언들을 썼다. 금발의 칭기즈칸이 몽골로이드인 인디언들을 이끌고 말달리는 이 희한한 풍경의 영화가 어떤 흥행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설마 쫄딱 망했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일어난 비극보다 더 슬프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스탭들, 배우들, 엑스트라들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우선 감독 딕 파우엘이 암으로 쓰러진다. 존 웨인도 폐암에 걸려 폐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고 수잔 헤이워드는 피부암 자궁암 유방암이 세트로 들이닥쳐서 악전고투했고 영화 스탭 200여 명 가운데 절반이 백혈병에 걸리는 등,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이 이 영화 <정복자>의 스탭들을 정복해 버렸다. 물론 암세포가 그런 속성이 있긴 하지만 수술을 통해 암세포를 제거해도 다른 부위에서 암세포가 돋았다. 폐를 잘라냈던 존 웨인은 결국 대장암에 걸려 사망한다. 그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인디언들은 그 일대에 사는 부족이었는데 이들은 전멸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것은 1952년 오늘을 필두로 일어났던 핵실험이었다. 네바다 핵실험장은 캘리포니아 등 인구 밀집 지역에 인접해 있었던 바 풍향이 그쪽과 반대되는 방향이며 인적이 드문 유타 쪽으로 향할 때를 잡아 핵실험을 벌였고 그 죽음의 먼지들이 유타의 불모지대이며 <정복자> 감독이 보기에 “몽골과 꼭 닮은 분위기의” ‘스노 캐니언’에 떨어졌던 것이다. “몽골군은 기병대”였다는 것이 감독의 생각이라 수백 필의 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욱한 흙먼지를 날렸고 “몽골군들은 씻지 않았다.”고 해서 제대로 씻어내지도 않았다고 하니 (또 그럴 시설도 없었겠고) 그들은 그야말로 방사능 물질로 샤워에 칠갑을 했던 셈이었다. 영화 <정복자>의 비극은 그렇게 벌어졌다. 물론 미국 정부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핵폐기장 건설 반대 시위가 불거졌을 때마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디든 세워져야 한다면 충분한 보상과 설득을 통해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원자력으로 뿜어낸 전기를 물 쓰듯 하고 앉았으면서 어디든 핵폐기장을 지을 수 없다면 대관절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는 것이 내 문제의식이었다. 하지만 일본 대지진 이후 발생한 원자력 발전소 참화와 철부지같은 북한 정권의 핵실험을 보면서 좀 생각이 바뀌고 있다. 어렸을 때 본 SF 소설에서 까마득한 미래의 주인공이 20세기의 역사를 돌이키면서 한 소리, “원자력은 인류에게 칼을 주었지. 그걸로 자살을 하라고.”라는 뇌까림이 새삼 떠올랐을 뿐 아니라, 원자력을 꿈의 에너지라고 우기는 선전에 혹하기에는 일본의 비극이 바로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절대 안전”하다는 당국의 말만 믿고 불꽃놀이 보듯 버섯구름을 구경했던 소련 사람들과 핵실험장으로부터 2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니만큼 핵물질이라고는 꿈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존 웨인과 수잔 헤이워드의 비극이 나에게, 우리에게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원자력 폐쇄를 외치자니 컴퓨터 절대 제 때 안 끄고 불 훤히 켜놓고 나가서 마누라한테 벼락맞는 내 전기 습관부터가 골치다. 아직은 원자력 폐쇄 외칠 정도의 깜냥은 안되지만 ‘전기 중독’으로부터 일단 벗어나는 습관부터 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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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24 우리 학교 조선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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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8년 4월 24일 한신교육투쟁

일본의 ‘한신’ 지역은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한 인구 밀집 지대다. 일본은 크게 관동과 관서 지역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그 중 관서 지역의 중심에 해당하는 오사카와 고베, 즉 한신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래 재일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1948년 4월 재일교포들의 역사에서 기억에 남는 사건이 벌어진다.

... 공부하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조선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 정착한 재일교포는 태평양전쟁 말기,200만이 넘고 있었다. 해방이 된 후 많은 이들이 귀국했으나 약 60만 여명은 일본에 남아 있었다. 그 대부분이 귀국을 희망했지만 점차 험악해져 가는 한반도 정세가 그들의 발을 묶었고, 어처구니없는 귀국 조건이 그들을 망설이게 했다. ‘매카사 겐스이’ (맥아더 원수)의 GHQ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내린 지침에 따르면 재일교포들이 반출할 수 있는 재산은 현찰로 1천엔, 물건으로 250파운드(약110Kg)가 전부였다. 1천엔이라고 해 봐야 쌀 한 가마도 못되는 것이었으니 숫제 옷 한 벌만 걸치고 귀국하라는 것과 진배없었다.

일본에 생활 터전을 가진 재일교포들은 대부분 일본에 눌러앉게 됐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인들을 특징짓게 하는 열정 중의 하나 ‘교육’이었다. 해방 직후 재일교포들이 난감해 했던 문제는 조선어 교육 문제였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자식들이 조선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조선 학교가 세워졌고 민족 교육이 교포들의 힘을 모아 시행됐다. ‘국어강습회’가 곳곳에서 열렸고 조선인연맹 사무실이나 폐쇄된 공장 등을 빌려 이뤄지던 것이 조선 학교로 확대되어 일본 전국에 약 500여곳, 학생 수는 6만을 헤아리게 된다. 그런데 재일 조선인들의 조직이 좌경화하면서 GHQ와 일본 당국은 이를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공안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고, 1948년 1월 24일, 일본 교육 실정법 위반을 들어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리고 일본 학교로 편입할 것을 명령했다.

“해방된 우리 민족이, 우리 민족 교육을 하겠다는데 왜 금지한단 말인가.” 재일교포들의 울분은 폭발했다. 재일조선인연맹 (조련)은 즉각 이를 거부하면서 3.1 운동 기념일에 발맞춰 이에 저항할 것을 선언했고 달을 넘겨 4월 하순, 23일과 24일 재일교포들이 밀집해 살던 한신 지역에서는 4.24 한신 교육투쟁으로 불리는 거대한 항쟁이 벌어진다. 23일에는 수천 명의 재일 조선인 시위대와 일본 공산당원들이 오사카 부 지사를 장악했고 오사카 성 주변 곳곳에서 봉홧불을 피우면서 경찰과 맞섰다. 공원에는 약 2만 명의 재일교포가 모여 기세를 올렸고 26일 또 한 번 오사카 부청으로 돌격해 들어가지만 진압되고 만다.

24일 효고에서는 더 큰 일이 벌어졌다. 조련은 효고현 지사실에서 벌어지는 조선학교 폐쇄 관련 밀담의 정보를 입수했고 이에 격노한 약 100명의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이 효고현청 내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지사 응접실을 점거해 비품등을 파손시킨 후, 벽을 깨어 지사실에 진입해 키시다 유키오 지사를 감금했다. 성난 시위대의 요구 앞에서 키시다 유키오는, '학교 폐쇄령의 철회', '조선인 학교 폐쇄 가처분의 취소', '조선인학교 존속의 승인', '체포된 조선인의 석방' 을 약속했지만 점령군 미군과 일본 정부는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효고는 미 헌병 사령부 관할 하에 들어갔다. 미군과 일본 경찰은 철저한 진압에 나섰고 시위는 해산된다. 23일과 24일 양일간에 두 명의 재일교포가 죽었다. 그 중 오사카에서 경찰의 총에 뒷머리를 맞아 죽은 김태일은 불과 열 여섯 살이었다. 그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일곱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조선학교를 지켜라!”고 부르짖으면서 시위의 선봉에 섰고 결국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열 여섯 공장 직공이 지켜내려고 했던 ‘교육’은 무엇이었을까.

1948년 5월 5일 조련의 교육대책위원장과 문부대신 사이에 "교육기본법과 학교 교육법을 준수한다", "사립학교의 자주성의 범위 안에서 조선인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하고, 조선인 학교를 사립학교로서 인가한다"라는 내용의 각서가 교환되면서 4.24 한신교육투쟁은 상처 많은 승리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이 일본 각지의 조선학교다. 치마 저고리 교복을 입기 위해, 우리 말 교육을 받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목숨 걸고 싸운 결과이지만 정작 반도의 한쪽은 그에 무심했다. 민족 교육을 하는 이들에게 붉은 페인트칠을 하기 바빴고, 그들이 얼마나 힘겹게 그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는가를 신기할 정도로 외면했다. 심지어 재일교포들이 반도의 다른쪽을 선택해서 귀국하겠다고 하자 무장 테러리스트를 파견하여 그를 방해할만큼 못나게 굴었다.

하지만 반도의 한쪽은 조금 달랐다. 나 자신 그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함에도 북한이 재일교포들에게 성의를 다했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폭격으로인해 ‘석기 시대로 돌아간’ 나라를 재건하는 와중에도 재일교포들의 민족학교에 돈을 보냈고, 책을 보냈고 그들을 포용하려고 애썼다. 장군님 초상화 비맞는다고 울부짖는 조선 처자에게는 참 딱하다는 마음 금할 수 없어도, 민족학교에 내걸린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는 납득이 가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가장 어려운 시절 그들을 도왔던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조국이었으니까.

<우리 학교>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역시 비슷한 과거를 겪으며 세워졌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조선학교 중의 하나를 담은 작품이다. 매우 긴 분량이지만 길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일본이라는 바다의 섬으로서, 고집스레 누구도 지켜봐주지 않는 정체성을 지키려 애써온 한 인간 집단의 애환, 긍지, 절망, 희망 모든 것이 느껴지는 다큐멘터리다. 기회 있으면 꼭 보시기를...... 다음은 우리 학교를 노래한 시 하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허남기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교사는 아직 초라하고
교실은 단 하나뿐이고

책상은
너희들이 마음놓고 기대노라면
삑하고 금시라도
찌그러질것 같은 소리를 내고
문창엔 유리 한장 넣지를 못해서
긴 겨울엔
사방에서
살을 베는 찬바람이
그 틈으로 새여들어
너희들의 앵두같은 두뺨을 푸르게 하고


그리고 비오는 날엔 비가
눈내리는 날엔 눈이
또 1948년 춘삼월엔
때 아닌 모진 바람이
이 창을 들쳐
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공부까지 못하게 하려 들고
그리고 두루 살펴보면
백이 백가지 무엇 하나
눈물 자아내지 않는것이 없는
우리 학교로구나

허나
아이들아
너희들은
니혼노 각고오요리 이이데스 하고
서투른 조선말로
-우리도 앞으로
일본학교보다 몇배나 더 큰 집 지을수 있잖느냐고
되려
이 눈물많은 선생을 달래고
그리고
또 오늘도 가방메고
씩씩하게 이 학교를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비록 교사는 빈약하고 작고
큼직한 미끄럼타기 그네 하나
달지 못해서
너희들 놀 곳도 없는
구차한 학교지마는
아이들아
이것이 단 하나
조국 떠나 수만리 이역에서
나서자란 너희들에게
다시 조국을 배우게 하는
단 하나의 우리 학교다

아아
우리 어린 동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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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4.25 가투 와 삽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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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8년 4월 25일 가투와 삽질

1988년 4월 25일 오후 내 가슴은 뛰고있었다 .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 수업 한 시간을 날려먹은 채 나는 학교 앞에서 명동으로 가는 34번 버스를 기다리면서 530 명동 상업은행 이라는 단어를 주문처럼 되뇌고 있었다 . 정거장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눈들을 빛내고 있었는데 신입생들도 많아서 나도 동문을 둘씩이나 만났다
...
그들은 이른바 '가두투쟁'을 나가는 이들이었다 내 기억에 88년 신학기 이후 첫 가투였다. 같이 있던 87형이 목소리에 힘을 팍 주며 말했다 . “앞으로 명동으로 출퇴근하게 될 거다. 사안이 사안인만큼.” 그럼 무슨 사안이었던가. 그걸 말하자면 얘기는 87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의 친구이자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됐다. 조선일보의 고바우 만화에서도 “죽쒀서 개 준다”고 안타까워했거니와 6월항쟁을 바로 6개월 전에 치룬 나라에서 군부독재의 수장 중 하나인 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것은 그 자체로 황당한 일이었으며 그 결과 요즘 용어로 하면 '멘붕'이 집단적으로 발생했다 그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김영삼이었다 . 그는 자신과 김대중을 동시에 돌려앉힌 대통령 선거를 원천적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 그리고 3.15부정선거에서 4.19 까지 한달이 걸렸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그와 김대중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까맣게 잊은 채.

물론 공명정대한 선거는 절대로 아니었다. 공정선거감시단이 습격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군인들은 내놓고 1번을 찍으라는 압박을 받았다 구로구청에서는 의심이 가는 투표함을 두고 점거농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십 년 집권한 군사파쇼가 36퍼센트 정도의 득표력이 없었을까. 결국 87년 12월의 노태우 당선은 그 거대한 항쟁을 일으켰으되 두 보수 야당 정치인의 단일화조차 이뤄내지 못한 대한민국 국민의 패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김영삼처럼 그 패배를 믿을 수 없었다.

“내 주위에는 노태우 찍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노태우가 당선되느냐?” 는 주관적인 분노가 버젓이 정세 분석 문건에 오르는 가운데, ‘컴퓨터 부정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내가 대학 가서 처음으로 받은 ‘고대문화’ 28집의 서두는 그 ‘컴퓨터 부정’의 증거랍시는 TV 화면 캡쳐들이 장식하고 있었다. 시간은 경과했는데 득표수가 왔다 갔다 하고 김대중의 표는 되레 줄고 노태우의 표는 늘어 있더라 하는 등등이 ‘컴퓨터 부정설’의 근거였다. 그러니까 이에 따르면 선거 자체가 컴퓨터 속에서 기획되고 작성된 부정선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믿는 사람들은 정말로 철석같이 믿었다. 애초에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함께 술 먹는 선배들조차 강력하게 그렇다고 우기니 ‘반신반의’ 모드로 접어들었는데 1988년 4월 25일 생판 엉뚱한 사건이 하나 터진다.

선거 전날 선거 방송 연습을 하던 제주 MBC에서 그만 그 과정을 송출해 버린 것이다. 즉 아무개 몇 표, 아무개 몇 표 등등을 입력하고 수정하고 하는 과정이 방송 전파를 탔다는 뜻이다. 마침내 증거가 나왔다!!!! 컴퓨터 부정설에 극히 회의적이던 나조차 흥분했다. “정말이었구나!” 이건 정말 데모할 일이다. 나도 이제 대학생으로 데모 한 번 해 보겠구나.

학생회관 내에 도청 장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선배들은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입을 꼭 닫은 채 칠판에 530 명동이라고 쓰는 것으로 집결 장소를 알렸다. 다섯 시 반 명동....이라고 중얼거렸다가 지금은 공무원하고 계신 선배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그렇게 가투가 벌어졌고 내 동아리 동기 한 명과 선배 한 명이 잡혀갔다가 훈방됐다. 물론 훈계방면이 아니라 구타 후 방면이었지만. 그 시위에서 ‘아지’를 맡은 분 중의 하나가 까마득한 선배였던 허인회 선배였다. 입학하자마자 문무대 입소해야 했던 날,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1학년들에게 “저기 서관 유리창이 깨집니다. 줄을 멘 선배가 메가폰을 들고 내려옵니다......”하면서 80년대의 전설을 부르짖어 우리들의 넋을 빼 놓았던 그 선배가 내 앞에서 시위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결연했다. “내일도, 모레도 명동에서 만납시다. 이 부도덕한 정권의 숨통을 끊어 놓읍시다.”

다음 날 선거는 탈없이 치러졌다. 그런데 당연히 컴퓨터 부정의 증거로 들이밀어져야 할 선거 결과가 드러나자 ‘컴퓨터 부정’은 자라목처럼 쑥 들어가고 말았다. 1당이야 민정당이었지만 김대중의 평민당이 제 1야당으로 부상했고, 김영삼의 통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민정당을 압도하며 여소야대를 이룬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명동에서 만날 일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후속 시위도 없었다. 되레 ‘민의의 승리’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명동에서 부정선거 한다고 도로 점거하고 난리를 친 일원으로서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여 선배에게 이 내막을 캐물었을 때 선배의 답은 이랬다. “우리의 투쟁으로 컴퓨터 부정을 그만둔 게 아닐까?” 글쎄 그 답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는 각자 판단에 맡긴다.

언로가 막힌 곳에서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고, 철석같이 기대했던 승부가 허망한 실패로 낙찰되었을 때 이른바 ‘멘붕’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음모론 역시 마약과 같은 성분이 있어서 한 번 맛들리기 시작하면 보다 더 자극적인 것에 끌리기 마련이고, 현실과 환각을 혼동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멘붕 상태에서 사람들은 곧잘 눈 앞의 현실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또 그 믿음을 부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되고, 급기야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벽에 부딪쳐 코가 깨지고, 자신과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상실해 가게 된다.

1988년 4월 25일. 나와 내 선후배 동료들이 벌이는 용감한 가투를 떠올리면 문득 온몸에 간지럼이 돋는다. 동시에 요즘 내 트윗 타임라인을 뒤덮는 많은 트윗 가운데 어쩌면 그렇게 그때랑 똑같이 발언하는 분들이 많은지에 생각이 미치면 그 간지럼이 소름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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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26 서글픈 이름 강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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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1년 4월 26일 서글픈 이름 강경대

1991년 봄은 한국 현대사에서 잊지 못할 봄 중의 하나다. 그리고 4월 26일은 그 선연하고도 끔찍한 봄의 시작이었다. 서울 명지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돌연 연행되고 학생들이 '구출투쟁'에 나서고 화염병과 최루탄이 분주히 오가는 풍경은 80년대 이래 낯익은 풍경이었다. 교문 밖으로 전투조가 나가 싸우는데 일단의 전경들이 그 뒤통수를 치려고 돌아들었다. 이를 본 명지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 교문 앞에서 싸우던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달음박질쳤고 전경들은 그를 추격했다.

고려대학교 담벼락에는 철제 난간이 있었는데 이는 시위시에 도로로 내려져 학교로 도망들어오는 퇴로로 즐겨 사용되었다. 명지대도 비슷했던.듯 신입생은 사자에 쫓기는 영양처럼 사력을 다해 도로에 드리운 난간을 향해 달렸지만 담장 바로 밑에서 전경들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무엇에 그리 화나 있었던지 사복 체포조였던 전경들은 무자비한 쇠파이프질을 퍼부었고 순하고 착했던, 훌쩍 커버린 아들의 고추 좀 보자고 아버지가 짖궂은 농담을 하자 그게 농담인줄도 모르고 바지를 훌러덩 벗으며 “인제는 보여 달란 말씀 마세요.”라고 억울해하던 고지식한 청년은 몇 분 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 후 병원에 옮겨졌으나 깨어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난다.

백주에 경찰이 학생을 때려죽였다! 음습한 고문실도 아니고 경찰서 취조실도 아닌 학교 담벼락 앞에서 경찰이 학생을 때려 죽였다! 아연실색한 분노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당장 다음날 연세대학교에는 만명이넘는 대학생들이 모여 경찰과 일대 공방전을 벌였다. 명동은 다시금 최루탄으로 뒤덮였으며 강경대의 초상을 가슴에 품은 학생들의 비장한 사진은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다. 많은 학생들은 6월항쟁의 재판을 꿈꾸었고 노태우 정권의 종말도 멀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시민들은 강경대의 죽음을 안타까와했지만 정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전두환 때의 미욱함을 교훈 삼아 노태우 정권은 내무장관을 즉시 교체하고 상해치사범들을 발빠르게 구속했다. ”내 친구가 맞아죽었다.”는 절규는 ”안됐다만 더 이상 어떻게?”의 현실 앞에 주춤해 가고 있었다.

이 괴리 사이에서, 터질듯한 분노와 움직이지 않는 대중의 사이에서 극단적인 참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4월 29일 전남대학교 박승희 학생을 필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분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경원대 안동대 전민련 간부 광주 고교생 그리고 분신의 이유를 종잡기 어려운 아주머니까지. 신문 보기가 무서웠다. 안타까움은 답답함으로 답답함은 대상없는 화딱지로 전화돼 갔다. ”전대협에서 씨바 더 이상 죽지 말라고 죽으면 개새끼라고 선언이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니냐? ” 애꿎은 동기에게 전화로 이렇게 퍼부었던 기억이 난다.

가장 안된 일은 그렇게 제 몸을 까맣게 태우며 죽어간 이들이 그 무시무시한 고통을 감수하며 외쳤던 주장들이 대중들로부터 멀어진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의 죽음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에 동화되기보다는 몸서리를 쳤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그 극단성에 전율했다. 열사의 뜨거움은 넘쳐났으나 그들과 일반 국민들과의 사이에는 북해의 냉류가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모든 죽음과 시위는 신임 총리가 맞은 계란과 밀가루로 깨끗이 마감됐다. 슬프디 슬픈 봄의 끝이었다.

체육대회 가는 버스 안 이름모를 들꽃이 길가에 그득하다. 명지대 노래패 신입생 강경대도 이런 꽃들과 술 향기에 취해 그가 즐겨 불렀다는 노래를 고창했겠지.. 역사의 부름앞에 부끄러운.자 되어 조국을 등질.수 없어 나로부터 가노라.....

꽃다지를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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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금은 세상에 몇 권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대학 입학식 치르고 갈 데가 없어서 정말 갈 데가 없어서 가입한 동아리가 하필이면 이상한 노래 부르는 동아리였는데, 지금은 각자 참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는 선배들이 기타 뚱땅거리며 노래 가르쳐 주는 책이 있었지요. 그 책 뒷표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워낙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 정확한 문구는 아닐 겁니다만 대충 다음과 같았습니다. “문화는 단순한 투쟁의 도구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삶이 바닥으로부터 와해될 때 그 와해시키는 세력에 대한 투쟁의 무기로 쓰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화’라는 태평양처럼 넓은 뜻의 단어 대신에 ‘노래’를 넣어 봅니다. 사실 노래란 인간의 희노애락과 결부된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새겨진 문신과도 같다 하겠지요. ‘와 이래 좋노 와 이래 좋노’ 하는 민요를 부르다보면 그게 노래인지 환호인지 모를 것 같고, 실연당한 다음에 듣는 대중가요는 어찌 그리 다 내 마음을 노래한 것 같았던지, 또 월드컵 때 오 필승 코레아 부르면 무슨 태엽을 감은 듯 어깨가 들썩이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희노애락 아니 삼라만상을 담은 것 같은 노래가 단순한 투쟁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얼마나 무식한 얘기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래가 기쁨을 돋구고 슬픔을 위로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있겠죠. 노래는 혼자서만 부르는 게 아닐 경우가 많으니까요. 나의 희노애락이 아니라 더 많은 나, 나 아닌 나들의 감정을 담을 때, 즉 사회적 성격을 담아내는 훌륭한 그릇이 될 때도 많으니까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 마라부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씩씩한 노래까지 말입니다. 더구나 “삶이 바닥으로부터 와해될 때 그 와해시키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풍자와 결의를 담은 노래라면 이미 단순한 ‘도구’는 아니겠죠. 자신을 지키고 주변에 용기를 불러 일으키고 오만한 상대방 앞에서 쳐들 수 있는 방패이며 칼일 수가 있는 거겠죠.



노래방에서 부를라치면 그 기나긴 가사 탓에 온갖 야유에 시달리기 일쑤인 고 김광석의 <나의 노래>는 바로 그 노래의 힘을 아름답고 함축적으로 묘사한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게는 <나의 노래>보다는 거칠 수도 있고 직설의 까칠함이 남아있을지언정, 노래의 의미를 굵고도 강하게 깨우쳐 주는 노래 한 곡이 더 있습니다. 꽃다지가 부른 <노래여 나의 삶이여>라는 노래입니다.



먼길 걸어온 우리에겐 언제나 변함없이 곁에 있던 노래 있어

땀과 눈물 어린 오선지위엔 아직은 못 다이룬 꿈과 사랑이

하지만 슬플 때 흘렸던 나의 눈물과

기쁠 때 보여준 너의 환한 웃음 싣고

굳게 손잡아준 모든 이의 꿈을 새겨 이제 들꽃처럼 끝없이 피어나리니

노래여 우리의 삶이여 어둠속에서 더욱 밝게 비춰준

노래여 우리의 꿈이여 끝내 온 세상에 울려 퍼지리

하지만 쓰러져간 벗들의 맑은 영혼과

오늘을 살아갈 너와 나의 다짐 싣고

따스히 보아준 모든 이의 희망 새겨 이제 강물처럼 끝없이 흘러가리니

노래여 우리의 삶이여 어둠속에서 더욱 밝게 비춰준

노래여 우리의 꿈이여 끝내 온세상에 울려 퍼지리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가끔 제 나이가 믿기지 않습니다. 대체 어느 세월에 40대 중반을 바라보고, 아들 딸은 어느 새 제 키를 추월했거나 육박한단 말입니까. 나는 지금도 미팅할 수 있을 것 같고, 여차하면 기타 치고 노래하면서 날밤 그냥 깔 거 같은데. 하지만 세월은 갔고, 나이는 먹었습니다. 변진섭의 “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한 노래는 어림짝도 없는 희망이었고, 김광석의 야유처럼 세상은 “우 너무 쉽게.... 우 너무 빨리 변해”만 갔지요. 시인 신석정의 시 <꽃덤불>처럼 그간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 버린 벗도 ,멀리 떠나 버린 벗도, 몸을 팔아 버린 벗도, 맘을 팔아 버린 벗도” 많았고 말입니다.



노래도 그랬습니다. 한때 대학생들이 어설픈 코드 짚어 가며 배우려 애쓰던 노래들은 사라호 태풍처럼 밀어닥치는 변화 속에서 잊혀지고 사라지고 우리 기억 속에서 멀리 떠나 버린 것들이 많았죠. 가장 공교로운 것은 “그 삶을 바닥으로부터 와해시키려는 세력”은 온전한데 그에 대한 과감하고도 단호한 삶의 표현이었던 노래들마저 희미해졌던 겁니다. 저 위에 언급한 꽃다지의 노래 <노래여 나의 삶이여>가 나왔던 것은 90년대 초중반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현실을 다짐하고 스스로를 재우치는 노래였으나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예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뒤 근 20년 동안 풍요로와진만큼 각박해지고, 화려한만큼 칠흑같아진 대한민국의 뒤켠에서 불평불만에 그득하지만 자신만 그로부터 해방되면 그만이었던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노래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래를 멈추지 않아온 <꽃다지>의 여정을 미리 내다본 독백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솔아 푸르른 솔아>가 집회장보다는 노래방에서 더 많이 불리울 것 같고 조금 심각한 가사 같으면 “분위기 깬다.”는 일갈을 듣기 딱 좋은 요즘, 우직하게 스스로 부르고 싶은 노래,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지켜 왔던 <꽃다지>가 다음 주 목요일과 금요일 오후 8시 홍대 근처 상상마당에서 다시 그들의 노래를 펼칩니다. 어떤 노래들을 부르겠냐구요. 무슨 신곡이 나왔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작년에 제가 들었던 노래 가사 몇 부분으로 답을 대신해 보고자 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하고 복잡한 세상 앞에서 우린 무너졌지. 이리로 저리로 불안한 미래를 향해 떠나갔고 손에 잡힐 것 같던 그 모든 꿈들도 음~ 떠나갔지...... 젊음은 흘러가도 우린 점점 늙어간다 해도 우리 가슴 속 깊이 서려 있는 노랜 잊지 말게., 노랜 잊지 말게” (정윤경 작사 작곡, ‘당부’ 중) ,


“.... 방조제 너머의 너는 진정 나인지. 이 안에 갇혀 버린 나는 진정 바다인지. 다시 갯벌로 돌이키지 못하는 세월을. 더 이상 너에게 내 숨결이 닿을 수 없고, 여리고 여리던 속살도 딱딱히 굳어 버렸어..... 난 바다야 난 바다야. 굳은 살에 새살 돋는 난 살아 있는 바다야. 난 바다야. 난 바다야. 죽음마저 이겨낸 난 자유로운 바다야. 날 바다로 바다로.” (‘바다’ 중)



“돈과 돈 속에 나를 죽이고 돈과 돈 속에 내 꿈을 죽이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미친듯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게 내 운명인걸. 죽도록 싸워야 하지. 살아남기 위해서, 죽도록 싸워야 하지. 나는야 파이터 파이터 파이터.” (Fighter 중에서)



가슴 속에 서린 노래가 가물가물하게 꼬물거리는 분들이라면, 바다였지만 갯벌과 멀어져 버린 말 뿐인 바다가 된 분들이라면, 돈 놓고 돈 먹기에 하루 해가 저무는 파이터들이라면 한 번쯤 노래가 자신의 삶이라고 20년 전에 이미 노래했던 이들의 오늘을 함께 지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의 영탄에 적합할 일일 것입니다. 다음 주 목 금, 3일과 4일 밤 8시 홍대 상상마당입니다. 공연 제목은 <혼자 울지 말고>랍니다. “.....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 내 인생을 위해서 싸워야 할테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힘을 모으자 혼자 울지 말고 혼자 울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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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4.27 땅벌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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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9년 4월 27일 땅벌 작전



 지금은 그 이름이 장히 시들었지만, 한때 서울의 밤문화를 선도하던 7공자의 일원으로서 온갖 사치와 향락을 부리던 재벌 그룹 회장이 있었다.   이른바 재벌 2세였던 그의 일화는 차고 넘치지만 하나만 소개해 본다.  젊은 날의 그가 제주도에 나타나 그룹 회사의 제주 지사장에게 거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등 분탕질을 치자 그 횡포에 분노한 제주 지사장은 분연히 일어나 시외전화를 돌려 회장에게 직보한다.  충심어린 부하 직원의 호소를 들은 회장은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너 사표 내 시키야.  내 아들이 내 재산 쓰겠다는데 니가 왜 난리야.”  

 

 그런 환경에서 자라 대한민국에서 손 꼽는 대그룹의 총수가 된 그는 밤하늘의 별 같은 신화와 전설을 남겼지만 그 중에는 특이한 이력 하나가 있다. 대기업 총수로서는 특이한 범죄 피해자로서의 이력이다. 1979년 4월 27일 반포에 있던 그의 으리으리한 저택은 무장강도의 습격을 받는다.  그런데 이 무장강도단의 인적구성은 아주 특이했다.  대부분 대졸의 인텔리들이었고,  전과가 있는 이도 있었지만 절도나 강도 등 이른바 잡범들과는 거리가 먼 시국 전과자들이었다. 

 

 그들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카빈총과 실탄을 빼돌리는 대담함을 보였고, 강도짓을 할 때에도 나름 치밀한 계획을 갖고 실행에 옮겼다.  고위 공직자 집에 침입해서 금도끼 등 패물을 빼앗은 것은 ‘봉화산 작전’이었고, (금도끼라니.... 혹시 산림청장 아니었을까? 신령님 만나 금도끼 은도끼 다 얻은 거 아닐까?) 문제의 그룹 회장의 집을 털고자 한 계획은 ‘땅벌 작전’이었다.   이들은 남민전, 즉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 준비위원회의 조직원들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반유신 투쟁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독재 정권에 빌붙어 떡고물 엄청 챙겨드시던 재벌가에 대한 응징에도 있었다. 땅벌 작전에 가세한 조직원 가운데에는 시인 김남주도 있었고, 이번에 국회의원이 된 이학영도 있었다. 

 

 대담하고 치밀했다고는 하지만 원체 범죄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인지라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일단 그들은 경비원을 제대로 제압하지도 못했다.  묶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결박이 튼튼하지 못해 경비원은 그를 풀고 강력하게 저항했고 결국 조직원 중 누군가가 그를 칼로 찌르고 말았다.  얼마 전 경기일보에 난 기사에 따르면 전치 3주였다고 하고 ‘중태에 빠뜨렸다’는 얘기도 있으니 어느 쪽이 맞는가는 좀 헛갈리지만 어쨌건 그들은 강도상해범으로의 범죄를 구성한다. 

 
 거기다 혁명가(?)로서의 보안 의식도 좀 낮은 편이었다.  대화 와중에 혁명 군자금 운운한 것이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경비원의 귀에 들어갔고 이 정보는 부랴부랴 달려온 이근안 이하 수사팀의 귀를 토끼귀처럼 쫑긋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는 일망타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 강도 미수범을 넘어 무시무시한 반국가조직의 일원으로 구속, 기소됐다. 남민전 사건이 공식화한 것이다.  이 조직의 혐의자 가운데에는 지금은 영 스타일을 구겼지만 한때 여당의 실세였던 이재오도 있었고, 진보신당 당대표였던 홍세화도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 보면 그들의 행동은 사실 미친 짓이다. 4.11 총선에 경기 군포 지역에서 79년의 강도미수범 이학영이 출마했을 때, 상대 후보였던 검사 출신은 ‘강도상해범을 국회의원으로 둘 수 없다’고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액면가로 보면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물론 그 날선 공격 때문에 왕년의 땅벌 작전 수행자 중의 하나가 경비원을 찌른 것은 이학영이 아니라 나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어쨌건 무장강도범의 일원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 분명하게 더 직시해야 할 것은 그들이 미쳤다면 당시의 세상은 더 미쳐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이라는 칼을 들고 헌정을 강도질한 유신 체제의 수괴였다. 제멋대로 헌법을 바꾸고 국민으로부터 대통령 뽑을 권리를 앗아갔으며,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체를 죽음으로 응징할 수 있었고 그 권리를 실제로 행사했던 시대의 ‘국사범’이라고 해야 옳다. 


 박정희의 공과는 세월이 더 흐른 뒤에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적어도 79년 4월의 동토의 공화국 대한민국은 “캄보디아에서는 수백만 죽여도 까딱 없는데 우리도 싹 밀어버립시다.”가 통하는 나라였으며, 초등학교 1학년인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여러분 경찰 아저씨는 제복만 입고 있지 않아요.  집에서 형이나 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밖에서 따라 하면 사복 입은 경찰 아저씨들이 잡아가요.”라고 애타게 말하게 했던 나라였고,  노조 결성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입에 똥이 처넣어지고, 타이밍 먹고 철야는 일도 아니었던 나라였다.   그리고 그 과실은 연예인들과 놀아나면서 서울의 밤 문화를 선도하고, 각지의 그룹 지사의 금고를 제 주머니 돈으로 알고 쓰던 귀공자들같은 부류들에게로만 돌아가던 나라였다.


 사흘 굶어 도둑질 안하는 사람 없다는 속담을 익히 아는 우리로서 사흘씩이나 굶어야 했던 시대의 강도라면 좀 다르게 평가해야 하듯, 적어도 그 시절의 감옥같던 공화국, 좀 불려 말하면 요즘 수구우익들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북한의 통제사회와 맞먹는 감시사회, 그리고 부패사회를 꾸리던 국가에서 일어난 ‘땅벌 작전’에 대해서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음은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과연 내가 유신 시대에 청년이었다면, 그리고 양순하고 말 잘 듣고 모범적인 젊은이였다면 나는 그를 자랑할 수 있을까.  자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착한 것이 흉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그랬는데 저 강도들은.... 이라고 손가락질할 때 그 선함과 양순함과 타의 모범이 됨은 결국 비겁이라는 단어 하나로 귀결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1985.4.28 어느 청년의 부모님 전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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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6년 4월 28일 어느 대학생의 부모님 전상서

“아버지 어머니

... 저를 믿어 주십시오. 이 글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알게 되실 일을 준비하기 위해 무척 피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저는 아주 행복합니다.

돌이켜보면 아주 피곤하고 힘들고 바쁘게 보낸 3년 2개월의 대학 생활이지만 저는 저의 기득권이 포기되고 구속이 되더라도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이땅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교도소 안에서도 고민하고 나와서도 변혁 해방 운동에 이 몸을 바칠 것입니다.

충격이 크시겠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주 여유있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주도하면서도 아주 열심히 싸울 것이고, 성실히 고민할 것입니다. 경찰에게는 지난 수요일부터 쭉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얘기해 주세요. 수면의 부족과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저의 생각을 차분히 정리해서 글로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저는 해방된 주체로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고 이번 일은 저 스스로가 주동적으로 만든 일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치소로 이송되면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면회가 가능하겠지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창 시절 학생회관에 밥 먹으러 가면 툭하면 위와 비슷한 내용의 편지가 주먹만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사실 상투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새벽이 밝아 옵니다,”로 시작해서 어머니의 그리운 품 운운하다가 “저는 어머님의 아들이면서 민중의 아들이자 조국의 아들” 등의 표현으로 마무리되는 편지들이 수도 없이 붙여졌던 시절이었다. 대개 이 편지들이 나붙은 이유는 ‘정리’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현장이라 불리우던 공장으로, 또는 다른 곳으로 존재 이전을 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 “나 잡아가라~~~” 고 민정당 연수원이나 기타 관공서를 습격, 점거하거나 시위를 주도하기 직전 쓴 글들이었던 것이다. 위의 학생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구치소에 가면 면회가 가능하다던가, 경찰이 오면 이러저러하게 대처해 달라든가 하는 문구로 보아 이 학생이 각오하고 있던 것은 체포와 투옥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체포되지도 않고 투옥되지도 않는다. 경찰이 그의 집에 찾아와 미주알 고주알 캐묻는 일도 없었다. 1986년 4월 28일 지금은 네온사인 휘황한 유흥가가 되어 버린 신림사거리에서 전방입소 시위 반대를 외치던 그 학생은 불길에 휩싸인 채 땅으로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죽을 마음이 없었고 그럴 시도를 할 생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제 몸에 불을 당겼다. 다가오면 분신하겠다는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군홧발을 들이미는 전경 앞에서 그의 몸은 불덩이로 변해 버렸다. 그의 이름은 김세진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재호도 그 뒤를 따랐다. 83학번. 두 용띠 청년은 글자 그대로 화룡(火龍)이 되어 아스팔트를 녹이며 몸부림차다가 며칠 뒤 그 짧은 생들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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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4.29 46년의 분단 46일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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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1년 4월 29일 46년의 분단 46일의 통일


 대학 들어가서 낯선 것 중의 하나는 ‘연호’였다. 튀어 보이고 싶은 욕구라고 하기엔 좀 비장한 연호들이 대자보와 문건과 심지어 자판기 커피 컵에까지 수놓여 있었다. ‘분단조국’이나 ‘통일염원’까지는 대수롭잖게 넘겼는데 ‘미제강점’이며 ‘광주민중항쟁’ 같은 연호 앞에선 좀 긴장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전노협 원년’이니 뭐 이런 것들은 그냥 양념처럼 존재했었고. 1991년은 ‘분단조국’의 연호로 따지면 47년이 되지만 만으로 따지면 해방되고 미국과 소련군 양군이 들어와 삼팔선을 그은 지 만 46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 봄, 46일간의 ‘작은 통일’이 펼쳐진다.


 시작이랄까 연원이랄까 1989년 연이은 방북 파장으로 얼어붙어 있던 남북의 분위기가 사뭇 부드러워졌던 것은 90년 북경 아시안 게임부터였다. 89년도에 이미 남북 단일팀을 위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깃발을 정하는 일부터 난항이었다. 남측은 흰색바탕에 녹색 한반도지도가 그려지고 그 아래에 KOREA 라는 문구를 새긴 기를 제시했고 북측은 흰색바탕에 황토색 한반도지도에다가 KORYO 즉 고려를 영문으로 새긴기를 제시했다. 남과 북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결국 흰색바탕에 파란색 한반도지도가 새겨진 깃발로 합의를 도출해 낸다. 이른바 한반도기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남과 북은 각각 북경아시안게임에 별개로 참가해서 한반도기의 공식적인 사용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뽀빠이 이상용과 북한 응원단장이 어우러진 모습에서 보듯, 한껏 달아오른 현장에서 하얀 바탕의 하늘색 한반도기는 응원의 깃발로 종종 수줍게, 때론 힘차게 휘날렸다. 그러던 중 드디어 한반도기가 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낼 기회가 있었다.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였다.


 여자 탁구에 관한한 중국은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도 모자라는 우주 최강의 만리장성이었다. 그나마 개인전에서는 간혹 수나라 군대 때려잡은 살수대첩처럼 개가를 올린 적도 있었지만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는다는 것은 하늘에 별을 다는 일과 진배없는 일이었다. 그때껏 중국은 단체전 8연패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물론 이에리사라는 스타를 내세워 한국 대표팀이 중국을 이긴 적도 이긴 적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탁구 좀 친다는 남과 북 모두에게 중국은 요즘 인터넷 용어로 ‘넘사벽’이었다.


 이전의 대회에서도 안면이 있고 간단한 대화 정도는 나눴다고 하지만 남과 북의 선수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대회 이후 두 번째 케이스로 출범했던 세계 청소년 축구 단일팀에서는 선수 구성부터 각별한 신경전이 이뤄졌고 어느 쪽이 감독을 맡느냐에 대해서도 팽팽했거니와 지바에서도 크게 다른 형편은 아니었다. ‘분희 언니’라고 부르자 ‘정화 동무’로 맞받은 어색함 속에서 현정화 홍차옥 리분희 유순복으로 이뤄진 남북 단일팀은 승승장구 결승에 진출했다. 북한 선수들이 부담을 느끼던 유럽 선수들을 해치운 것은 현정화였고, 간염에 걸린 몸을 무릅쓰고 분전하여 한국 선수들을 감동시킨 것은 리분희였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었다. 그 선봉에는 탁구의 마녀 18세의 덩야핑이 서 있었다. 스포츠 즐겨 보았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떠올리기 싫은 몇 개의 이름들이 있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 축구팀 골키퍼 아르무감(원숭이같은 긴팔로 한국팀의 슛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중국의 여자농구 헐크 진월방 등등, 그 대열에서도 덩야핑은 한국 선수들을 매번 좌절시켰던 ‘마녀’였고 이 마녀는 빗자루 대신 라켓을 타고 다니며 이후 세계 대회 우승만 18번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 마녀가 맥없이 거꾸러진다. 마녀를 물리친 것은 남한의 에이스 현정화도 아니고 북한의 고참 리분희도 아닌 홍안의 함경도 처녀 유순복이었다. 현정화에 따르면 "약 먹은 것처럼 공을 쳤다. 한 포인트를 따내곤 한 40~50㎝씩 점프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약 먹었다는 표현이 틀리지도 않은 것이 그 뒤로 유순복이 언감생심 덩야핑을 물리친 적은 없었다. 아마도 약 먹었으리라. 사상 최초로 재일본거류민단과 조총련이 한데 모여 환영식을 열고 만찬을 베풀며 경기장에서 한 깃발 아래에서 백발 성성한 1세부터 우리말 서툰 3세들까지 코리아를 부르짖는 그 모든 분위기가 약이었으리라.



 현정화도 질수 없다는 듯 중국 국내 선발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예 가오준을 눌렀다. 게임 스코어 2대0. 한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 눈 앞에 있었지만 중국은 중국이었다. 현정화 리분희 양 에이스가 나선 복식에서 졌고 현정화마저 중국의 덩야핑에게 덜미를 잡혔다. 다시 유순복이었다. 1991년 4월 29일 탁구선수대회 여자단체 결승전 마지막 경기에 나서는 유순복이 화면에 잡혔을 때 아련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파트 아래층에서 함께 TV를 지켜보는 가족들인 듯 했다. “유순복! 유순복! 유순복!” 작달막하고 동그란, 현정화처럼 매섭지도 않고 리분희처럼 노련해 보이지도 않는 뭉툭한 처녀는 세계랭킹 2위 가오준을 만났다.



 운명은 2세트에서 갈렸다., 유순복은 천리마의 기세로 백핸드를 휘두르고 속도전의 스피드로 스매시를 매겨 1세트를 따냈고 2세트를 맞았는데 중국의 가오준은 2세트 들어서 막강한 ‘가오’를 잡기 시작했다. 유순복은 17대 12까지 몰렸다. 승리까지 4점을 남겨 둔 상황에서 갑자기 유순복은 또 약을 먹은 듯 했다. 한 점 한 점 유순복은 거짓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동점을 이뤘을 때 그때까지 흥분을 자제하고 있던 나는 펄쩍펄쩍 뛰었고 급기야 가오준을 잡아버린 순간 내가 마치 유순복인양 마루에 드러누워 버렸다. 재일교포들은 하염없이 울면서 만세를 불렀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스탠드에 일어서서 무엇 만세인지 모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처음으로 이룬 단일팀이 중국을 꺾고 세계를 제패하다니. 참으로 상서로운 징조로 보였고, 문익환 목사님의 싯귀 “통일은 됐어!”가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해로 끝이었다. 3년 뒤 남북은 불바다와 피바다의 협박을 교환하며 얼어붙었고 미국은 실제로 북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미국인들 소개령까지 내렸다. 강릉에는 잠수함이 표착해서 그 무장 대원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면서 북으로 도망갔다. 또 소떼를 몰고 정주영 회장이 갔고, 대한민국 대통령과 조선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 손을 치켜들기도 했고 금강산도 수십만이 갔지만 요즘은 또 쥐새끼를 부르짖는 북한과 김정은을 표적지로 삼는 남한으로 되돌아와 있다. 평화와 적대의 핑퐁게임. 91년 이후 우리는 그짓을 해 왔었다.



 지바의 영웅 현정화 감독의 말은 그래서 슬프다. “정치적인 이벤트를 할 바에야 차라리 단일팀 같은 거 하지 말고 각자 국가를 인정하고 사는 게 낫다는 마음이 굳혀졌다.” 그리고 그 다음 말에는 무조건 공감한다. “(통일을) 원하는 것도 있고 그냥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 북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장기적으로는 준비를 해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빠져서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도와줘야 한다. 정말로 손을 떼어버리는 상태까지 가면 안 되지 않나.”



 다음 주말에는 영화 <코리아>를 보러 가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지바의 진짜 영웅 유순복이 조연이 된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사진 속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유순복이다,.

1975.4.30 남베트남의 마지막 자존심 즈엉 반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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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마지막 자존심 즈엉 반민

 작년에도 베트남 패망 또는 해방의 날을 짤막하게 얘기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세세한 얘길 해 봐야겠다.  1973년 초 미국이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베트남에서 사실상 손 뗄 것을 선언한 이래 남베트남의 운명은 사실 결정되어 있었다. 이 평화협정으로 키신저와 월맹 협상 대표 레둑토에게 나란히 노벨 평화상이 수여됐지만 레둑토가 단호히 거부했던 것은 그 서막이었다.  병력 110만. 공군력으로만 보면 세계 4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남베트남 정부였지만, 어느 정부에게건 백성의 마음이 곧 하늘일진대 남베트남 정부의 하늘은 너무도 흐렸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월남 지도층과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베트남에 헌신했던 ‘호 아저씨’와의 대비는 그대로 ‘닭둘기’와 공작새였다. 


 1974년 10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총공세를 결정했고 12월 사이공 코 앞의 (서울-대전 정도 거리의) 푸옥록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그래도 미국이 움직이지 않음을 확인한 월맹군은 공세를 확대한다. 이제는 게릴라를 통한 국지적 소요가 아니라 정규군을 동원한 ‘조국 통일 공세’가 펼쳐진 것이다.  남베트남군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사병들은 싸우고 있는데 장교와 고위 장성들이 먼저 내빼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말로는 무척 용감했다.  요즘 한국식 표현으로 하면 ‘입보수’라고나 할까.


 “미국이 우리를 돕지 않겠다면 떠나가게 내버려두라. 갈 테면 가라고 하라. 인도적 약속을 망각하게 내버려두라”면서 미국의 배신을 성토하며 사임한 응웬 반티우 대통령은 몇 톤의 금괴를 챙겨서 ‘나도 갈테야’ 군단에 합류했다. 4월 25일 떤선 공항 앞에서 한 인사가 열변을 토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과 함께 떠나는 비겁자는 가게 하라. 베트남을 사랑하는 이는 남아서 싸우자” 응웬 카오키 부통령이었다.  그 결연한 연설을 들으며 총 불끈 움켜쥐고 “그렇다. 어쨌든 내가 사랑하는 조국과 가치를 위해 싸우자.”고 눈을 빛낸 남베트남 장병도 여럿이었으리라.  그런데 응웬 카오키도 동맹국 한국의 초대 대통령의 역사를 공부했던 모양이다.  저 비감한 연설을 끝으로 그 역시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북베트남군은 “군화가 없어 맨발에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호치민 슬리퍼를 신고 식량이라고는 소금만 섭취한” (월남에서 억류된 이대용 공사의 회고) 강행군으로 남베트남의 수도를 죄어 들어왔다.  썩은 고목에 핀 꽃도 있는 법, 영웅적인 저항도 있었고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다한 남베트남 고위 장성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가장 빛나는 이는 남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 즈엉 반 민이었다.


 독재로 이름 높았던 응오 딘 디엠 형제를 제거하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그는 4월 28일 다시 몰락해가는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다. 미국은 죽은 자식 고추만지는 심정으로 즈엉 반 민에게 마지막 방안을 제시한다.  이미 틈이 벌어지고 있던 중국과 북베트남 관계를 활용하여 “남베트남 정권 대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표, 즈엉반민의 ‘민족화해와 화합파’를 모두 아우르는 중립정부를 세워 북부의 레주언을 총리로 하는 친소파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한겨레 구수정 전문위원의 글 중에서.... 이 글의 내용은 구수정 전문위원의 취재 내용을 문대성 식으로 인용한 것이다.)

사이공 최후의 날 아침, 프랑스 정부의 특사인 바뉘셈 소장이 즈엉반민 대통령을 찾았다. “바뉘셈은 미국을 버리고 베이징을 따르겠다고 선언하고 24시간만 버텨달라고 민 장군을 설득했지. 그러면 중국이 하노이에 압박을 가해서 정전협정을 끌어낼 거라고.” (응웬흐한 보좌관) 하지만 즈엉 반민은 거부했다. 그리고 응웬흐한에게 이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젠 나더러 중국에 나라까지 팔아먹으라는군.”


 가망없는 전쟁이지만 남베트남에 여전히 충성하는 군대도 수십만이었다.  전세는 기울었어도 고양이 앞에서 너 죽고 나 죽자고 쥐약 먹는 쥐는 있는 법이다. 오늘날의 북한 정권처럼.  그 참극을 막은 것이 즈엉 반 민이었다.  즈엉 반 민은 4월 30일 남베트남 최후의 날 9시 30분 다음의 메시지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한다.  “ 본인은 동포들을 대표해, 우리 베트남인들의 화해에 대한 깊은 신념으로, 불필요한 유혈을 막기 위해 민족의 화합을 제의한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전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침착하게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 나는 또 혁명군 전사들에게 사격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해 이곳에서 임시 혁명정부를 기다릴 것이다.”


 그 이후 우리가 익히 본 풍경이 펼쳐졌다.  오전 11시 정각. 북베트남군의 탱크  부대가 대통령궁 정문을 짓부수며 진입했다.  응오 딘 디엠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정권을 쥐었지만 북베트남과의 투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미국의 노여움을 사 정권을 잃은 바 있던 남베트남 최후의 대통령 즈엉 반 민은 일어서서 북베트남군을 맞는다.  “당신들이 왔군요.”  이틀 뒤 풀려나는 그들에게 남베트남 노동당 간부였던 전반짜는 이런 말로 즈엉 반민과 이별을 고한다.  “우리에게 승자와 패자는 없다. 우리 베트남 민족이 미국을 이긴 것이다.”


 대개 역사는 승장을 기억하고, 승리의 순간을 기록한다.  하지만 항상 패장은 있었고 패망의 순간도 그에 따라붙는다.  그리고 때로는 빛나는 승리보다는 현명한 패배가 희생을 줄이고 이후 역사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얘기했던 남북 전쟁의 로버트 리가 그랬고, 오늘 오전 항복 선언을 발표하면서 프랑스 기자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 없소. 인명을 구해야 하오.”라고 비통하게 토로하던 거한 (남베트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180센티미터를 넘는 장신이었음) 즈엉 반민의 오늘은 그 인생 가장 참혹한 날이었지만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날이기도 했다.


 북베트남군이 들이닥치는 순간.  가운데 팔 건 남자가 즈엉 반 민

1945.5,2 베를린의 붉은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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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5년 5월 2일 베를린의 붉은 깃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그리고 또 그만큼의 사람이 모르고 있듯,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격렬한 충돌은 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었다. 히틀러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미군의 참전이었다기보다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늪에 발을 디민 일이었고, 소련은 수천만 명의 인명을 내던진 끝에 독일을 침략을 분쇄하고 마침내 연합국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독일의 수도 베를린 시로 돌격해 들어간다. 베를린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소련군은 가물거리는 독일의 저항을 마음껏 짓밟았다.

최후의 격전이 벌어진 곳 중의 하나는 독일 국회의사당이었다. 이 건물은 매우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범인인지 알 수 없는 정신이상자가 국회의사당에 방화한 사건은 히틀러의 독재를 가속화했다. 히틀러가 장광설을 퍼부을 때 하일 히틀러 소리 요란했던 이곳은 1945년 5월 그 지하실에서 저항하던 독일군의 처참한 최후를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그 지붕에서 적군의 깃발이 기세 좋게 휘날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그것은 2차대전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역사에 남았다. 에브게니 칼데이라는 유태계 러시아 사진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와 자매들을 살해한 독일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이미지적인 복수를 이룬 셈이다.

1945년 5월 2일 폐허 더미가 내려다보이는 독일 국회의사당 옥상에 한 병사가 올라서서 대형 붉은 기를 흔드는, 이 강렬한 인상의 사진은 기실 철저하게 연출된 사진이었다. '이오지마의 성조기'로 미국이 막대한 국채 수익을 벌어들이고 애국적 분위기를 드높이는 것을 똑똑히 봤던 소련 당국은 칼데이에게 그와 유사한 사진을 요구했고 칼데이는 꼼꼼한 계산과 설정을 통해 이 사진을 찍었다. 깃발 자체는 식탁보 세 개를 연결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셔터를 눌러 얻은 컷들 가운데 골라낸 사진이었다. 또 깃발을 움켜쥔 병사는 스탈린의 고향 그루지아 사람이었다.

연출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의 한 장으로 남기에 충분했던 이 사진에는 또 하나의 일화가 따라붙는다. 옥상 구조물에 올라 깃발을 흔드는 병사를 떠받치는 장교의 팔이 문제였다. 장교의 양 손목에는 손목시계가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시계는 한쪽에만 차는 법, 당연히 한쪽은 당시 소련군에게 흔했던 '전리품'의 소산이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북한을 점령했던 소련군도 시계에 대한 애착(?)을 발휘하여 손목시계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는데, 베를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전 세계에 소비에트의 영광을 전파할 이 사진에 망할 놈의 장교란 녀석이 손목 시계 두 개를 빛내고 있으니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일찍이 사진 속 스탈린의 주변에서 트로츠키를 비롯한 숙청자들의 모습을 없애 버린 소련 당국은 시계 하나쯤은 우습게 지워 버릴 수 있었고, '전리품'은 사진 속에서 말소된다. 그후로도 오랫 동안 이 비밀은 지켜졌다. 냉전이 끝나고 난 뒤 칼데이가 사진 원본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링컨 대통령의 전속 사진사였던 매튜 브래디의 단언대로 "카메라는 역사의 눈"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눈처럼 매우 어정쩡한 속임수에도 쉽게 넘어가기도 하고 많은 착시고 일으킨다. 우리가 익히 아는 감격의 서울 수복 사진, 두 명의 국군 장병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그 사진은 1950년 감격의 9월에 촬영된 것이 아니라 7년 뒤에 촬영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1950년에 촬영된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파괴활동을 벌이던 베트콩을 사살하는 '사이공의 도살자' 사진으로 반전 여론을 들끓게 했던 에디 아담스의 말은 그래서 경청할만하다.

"아직도 사진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사람들은 사진을 믿지만, 사진도 거짓말을 한다. 굳이 조작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사진은 반쪽의 진리일 뿐이다.”

우리에게도 '반쪽의 진리'의 가공할만한 위력은 여전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무릎녀 사건"을 비롯해서 사진 한 장, 이미지 하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일러 주는 사례는 매우 많다. "천황에게 머리 굽히는 이명박"과 "고이즈미가 머리 숙이는 노무현"의 대비는 그래서 매우 불만스러우며, "호주머니에 손 찌른 노무현"을 굳이 부각시켰던 보수 신문들의 심통은 그래서 마뜩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1945년 5월 2일 한 역사가 연출됐다. 해로운 연출도 아니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도 없으며 조작이라고 부르기도 뭐하지만 애덤스의 말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진임에는 분명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무엇이든 의심해 볼 필요는 있다. 인간과 인간의 피조물을 통틀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존재는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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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5.3 인천에 모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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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일 해방구(?) 인천의 사람들 1985년 2.12 총선은 정국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관제야당으로 불리우던 민한당은 새롭게 부상한 신민당이라는 블랙홀에 허무하게 빠져들어갔다. 신민당은 여당이었던 민정당과 맞먹을만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고, 그들은 2.12 총선 1주기를 맞아 71년 이래 대한민국 국민의 숙원 중 하나였다 할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명 서명 운동을 시작할 것을 결의한다. 부산에서 이 행사가 열렸던 것은 서면의 대한극장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지닌 일종의 정신 질환으로 추정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강력한 혐오감은 적어도 그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김대중의 육성 연설이 쩌렁쩌렁 스피커를 울렸고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박수가 터져 나왔었으니까. 


개최 주체는 당연히 신민당이었지만 그 판에 뛰어든 것은 신민당원 뿐이 아니었다. 학생들,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자가 된 학생들, 재야 단체 등 당시 전두환에 맞서 싸우던 거의 모든 세력이 개헌촉구 대회의 주력을 이뤘다. 쌍방간에 윈윈할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보수야당 신민당은 ‘과격한’ 그룹의 참여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특히 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으로 대변되는 대학가의 비극 이후 그 눈살 찌푸림은 더욱 노골화됐다.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전두환과 만난 자리에서 과격한 좌익 세력에 대해 공통적인 우려를 표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격 세력’ 쪽도 신민당에 눈살을 찌푸리긴 마찬가지였다. “니들이 고와서 함께 한 줄 아니?”


 86년 5월 3일은 인천 지역 개헌 추진위원회 인천경기지부 결성대회 날이었다. 신민당 인천 지역 관계자들도 가슴 설레며 기다린 날이었겠지만 그들 말고도 무지하게 많은 이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지역 학생운동 그룹은 물론, 경인가도를 따라 늘어선 공장 지대에 촘촘히 박혀 있던 ‘위장취업자’들과 그들의 동지가 된 노동자들, 각종 재야 단체 회원들에게는 총동원령이 내려져 있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학생과 재야 중심이었던 시위에 노동자들이 대거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대회 시작도 전, 이미 수천 명 규모의 시위대가 시민회관 앞에 형성돼 있었다. 집회에 참가했던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정동근의 꼼꼼한 회고에 따르면 5.3에 참여한 ‘조직 대오’로 사회운동 진영 1천여명, 노동운동 2천여명, 학생운동 4천여명으로 추산하고 신민당원 등 나머지 주체들을 2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즉 조직 참가자가 1만. 그리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약 5만 정도의 시위대가 집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 인천 시내는 “단군 이래 최대의 화염병”으로 뒤집힌다. 민정당사가 불탔고 신민당 승용차도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신민당 대표부는 이 난리법석 와중에 정작 자신들이 주인이었던 개헌 추진 대회를 치르지도 못했다. 


이날 TV 뉴스에서는 한 장면이 대략 스무 번도 넘게 리플레이됐다. 운 나쁘게 시위대에게 포위된 페퍼포그에 매달린 한 전경을 수십 명의 각목 부대가 잔인하게 두들겨 패는 광경이었다, 물론 시위대가 한 번 잡히면 “일단 맞고” 시작하는 시절이었고, 그 끔찍한 경찰의 폭력성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였지만, 그 장면에서 악마는 각목부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악마들은 메인 뉴스 시간 내내 반복해서 브라운관에 출현했다. “저게 학생이냐?” 일대 검거 선풍이 불었다. 보안사와 안기부, 경찰의 삼총사는 경쟁을 하듯 찍어 두었던 이들을 뜰채로 건져 냈고 서빙고에서, 남산에서, 장안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소리와 사람 살 타는 냄새, 그리고 두들겨 패는 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그 와중에 등장하는 한 사람에 대한 회고는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5.3 인천 사태 3일 후 보안사 수사팀에 체포됐었다. “그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전기고문과 고춧가루 물 먹이기 고문을 당했다. 견디다 못해 엉터리 약도를 그려 주자 앰뷸런스에 싣고 그리로 데려갔다가 속은 것을 알고는 앰뷸런스 안에서 전기방망이로 온몸을 지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 후 법정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모두진술에서 2시간 동안 전두환 정권을 맹폭했다. 전두환 이름 앞에다가 매번 ”광주학살과 군사반란을 저지르고“라는 수식어를 달아붙였다. 실로 용기백배해주는,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진술이었다. 당시 변호사가 내게 물었다. ”저 사람은 평소 뭘 먹고 살았길래 저렇게 힘이 좋아요?“” ( 유시춘씨의 증언)


이 기운차고 견결했던 사람의 이름은 김문수다. 맥빠지는 소리들이 귀에 어른거리지만, 김문수가 맞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만큼 헌걸차고 용맹한 투사도 없었다. 26년이라는 세월은 참 길고도 매정했던 것 같다. 인천 5.3 당일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차명진 의원의 젊은 날도 있었고, 요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는 장기표씨는 그 선봉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요즘 보면 새누리당 체질같기도 한 박계동 전 의원도 이 사건의 여파로 구속됐다.

이쯤 되면 역시 “사람의 죽을 때를 보아야 한다.”는 옛 그리스의 현자 솔론의 말은 기가 막히게 맞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지만 우리는 그 사람 변했네 라는 말을 일삼아 하고 살기도 한다.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진 가운데 인천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없었지만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사람들 , 체포되어 전기찜질을 당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 과거에 무색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슬프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저쪽으로’ 넘어간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제딴엔 견결하게 진보진영에 남아 있다고 자부하는 주제에 대리투표부터 소스 열람까지 부정선거 백화점을 차린 주사파들 역시 김문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날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인천 거리를 누비던 ‘자민투’ 소속 학생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오늘날 “자 자 할머니 찍으시고...... 어 안되면 내가 대신 투표해 드리지 뭐,” 따위로 놀고 자빠진 자들이 운동을 합네 진보를 합네 놀고 자빠지고 있었음을 어제 오늘 우리는 잘 알게 되지 않았는가. 86년 5월 3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참 스산하다.

1980.5.4 티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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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4일 티토, 부러운 이름의 최후 


남북을 다 합친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의 면적은 22만 제곱
킬로미터다. 그리고 그 가운데 70 퍼센트가 산지다. 이 조건과 가장 비슷한 나라를 꼽으라면 지금은 갈기갈기 찢겨 사라진 한 나라를 들 수 있겠다. 그건 유고슬라비아다. 왕년의 유고슬라비아의 넓이는 25만 제곱 킬로미터에 역시 70퍼센트는 산악 지대였다. 국토의 조건은 비슷한지 모르나 그 안의 내용물(?) 즉, 국민들의 구성은 180도 달랐다. 비록 일본과 여진, 몽골, 거란, 위구르 피까지 섞였을망정 어쨌든 단일 언어와 문화를 지닌 단일민족이 살아가던 한반도와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그야말로 삼선짬뽕같은 나라였다. 


가톨릭을 신봉하는 크로아티아, 그리스 정교를 믿는 슬라브족의 나라 세르비아, 한때 유럽 대륙을 호령했던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자를 말해 주는 보스니아에다가 알바니아인들도 적잖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 선 나라가 유고슬라비아였다. 이 나라를 표현하는 말 중의 하나를 들어보자. ”1개의 연방, 2개의 문자(라틴/키릴), 3개의 종교(가톨릭/정교회/이슬람), 4개의 언어(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 5개의 민족(4+보스니아), 6개의 공화국(5+몬테네그로), 7개의 접경국"


우리와 유고슬라비아와는 몇 개의 공통점이 더 있다. 외국의 무수한 침략을 받아 왔으며 또 그 와중에 내부 구성원들끼리 처참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2차대전 중 독일이 침략했을 때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도들은 그에 붙은 민병대 우스타시를 창설했고 이 우스타시는 독일 나찌군들도 경악할 잔인함을 발휘하며 유태인과 나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을 학살했다. 우스타시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그 집무실 책상에 학살된 자들의 눈알 20킬로그램을 상시 두고 다녔다는 전언이 있을 정도니 알쪼다. 


그에 맞선 좌익 빨치산들도 점차 세력을 키웠으니 그 대표가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다. 티토는 그의 많은 가명 중의 하나였다. 스탈린조차 죽을 때까지 그를 ‘발터’라는 가명으로 기억하고 불렀거니와 그 때문에 그는 한때 김일성이 받았던 오해를 받는다. “저 티토가 그 티토 맞아? 아닌 거 같은데?”


그는 강철같은 의지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빨치산을 이끌었고, 나찌와 우스타시, 그리고 독일에 저항하는 목표는 같으나 좌익에 더 적대적이었던 우익 빨치산 체트닉 모두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공산주의자를 탐탁지 않아 했던 미국과 영국의 일치된 지원을 받을 만큼의 역량을 보여 주었다. 티토는 자신의 조국을 자신의 무력으로 해방한 몇 안되는 지도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물론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처럼 사회주의 조국 소련에 한때 충성했다.


가장 문제 많은 지도자가 다스리던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공산주의자들의 헌신적인 충성을 받았던 것은 일종의 비극이기까지 하다. 독일 공산당은 “나찌당이 집권하면 서방 세계를 휩쓸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이 여유있게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는 스탈린의 한 마디에 나찌에 대한 저항을 실질적으로 조직해 내지 못한다. 중국 공산당이 뼈를 깎고 피를 토하며 대장정을 벌이고 장개석 군과 맞서는 동안 소련은 요지부동으로 장개석 정부를 지지했다. 또 소련의 지시 한 마디에 만리타향의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원수로 갈려 죽고 죽이는 참극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했다. 그건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이었다.


티토 자신도 그랬다. “감옥에서 끝없는 고문과 부당한 처우에 시달리면서 힘들게 지냈지. 그때 우리를 지켜 주었던 유일한 희망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투쟁하던 목표를 꽃피울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믿음이었어......1934년 출감한 이후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모스크바 방송을 들었다네. 거기서 복음을 들었지. 크렘린 궁의 시계 소리와 힘차게 들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심금을 울렸어. 노동자의 천국 소련의 위대함을 듣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다네.” 

당시의 공산주의자 태반이 그랬다. 그 절대적인 믿음 위에서 스탈린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때려죽이고 매달아 죽이고 쏘아죽였으며 그 시산혈해 위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했다. 그 피비린내가 자신의 코를 찔러도, 그 참극을 직접 목도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은 그 교조,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믿음과 추앙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점에서 티토는 달랐다.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무력으로 조국을 해방시킨 티토는 외국 군대의 유고슬라비아 진주를 막아 냈고, 사회주의 조국 소련의 일방적인 지시에도 절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련 체제를 연구하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회주의의 고향 소련을 지극히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 조국을 그보다 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스딸린 대원수 만세를 부르짖고 있던 김일성보다 앞선 ‘주체사상가’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사회주의 조국의 지도자는 속이 얕고도 강퍅했다. 자신의 입 안의 혀같이 놀지 않는 이들은 모조리 혓바늘처럼 골치 아픈 존재로 취급했고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공산주의자 지도자 티토의 나라를 코민포름에서 축출했을 뿐 아니라 티토를 개인적으로 죽이려고 암살단까지 파견했다. 이에 티토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 “"나를 죽이라고 사람을 자꾸 보내지 마시오. 벌써 다섯 명이나 붙잡았는데...... 중지하지 않으면 나도 모스크바에 한 사람 보낼 거요. 나는 딱 한 사람만 보낼 거요. 더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는 빨치산 투쟁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등의 천조각들을 유고슬라비아라는 그럴 듯한 식탁보로 짜낸 정치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가 그때껏 자신을 지탱해 왔고, 믿어 왔으며, ‘복음’으로 여겼던 대상에 대하여 반항할 수 있었던 데에서 인간 티토의 탁월함을 본다. 앞의 두 일에 비해 쉬워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죽어간 이들은 사실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많다. 그러나 자신이 지켜온 ‘교조’로부터 유연하게 벗어나고, 그 교조에 대해 저항하며 자신과 자신의 동지들의 이익과 독립을 지킨 예는 오히려 많지 않은 것이다. 1980년 5월 4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티토는 그 일을 했다. 


교조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터내셔널가를 복음처럼 들었던 티토가 있었듯 단파방송을 들으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한민전의 기치를 높이 올려라 조국의 해방이 동터오른다” 가사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물 떨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인정한다. 그러나 인민들이 대량으로 굶어 죽고, 지금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식량난 속에서도 핵무기 개발과 인공위성 쏘아올리기에 돈을 때려붓고 있는 왕정국가의 현실을 보면서도 그 교조를 버리지 못한다면, “이제 그만하시오. 이건 주석님의 뜻이 아니잖소?”라고 묻지 못하고 미련하게 상부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것을 대견한 일로 아는 치들이라면, 현실에 눈 감은 채 신념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우리의 공적은 과오보다 크다.”운운하는 이들은 티토에게 다음과 같은 욕설을 면하기 어려우리라. “쓰레기들”

1954.5.7. 디엔비엔푸의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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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의 한국인

시민 혁명의 나라 프랑스지만 식민 지배의 끈질김과 잔혹함, 그리고 집착은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웠다. 독일에게 맥없이 무너진 뒤 일본에게 자신의 식민지를 무력하게 내 줬지만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는 또 다시 그 추잡한 발길을 베트남에 들이밀었다. 여기에 단호하게 대응해 싸운 게 호지명의 월맹이었고, 초기에는 월등한 화력을 앞세워 기세를 올리던 프랑스군은 끈질기게 게릴라전으로 맞서는 월맹군에게 점차 수세에 몰려 갔다.
...
프랑스군은 이 판세를 역전시킬 원대한 작전 하나를 세운다. 중국이 월맹을 지원하는 보급 루트가 인근의 라오스를 관통하는 것에 착안, 라오스 인근의 디엔비엔푸 지역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그를 장악하고 월맹의 보급루트를 차단하여 월맹의 목을 죄겠다는 것이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프랑스 외인부대를 비롯한 정예병력이 하늘을 덮는 낙하산으로 디엔비엔푸에 내렸고 월맹군은 일단 후퇴했다. 프랑스 군 사령관 나바르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마초적 발언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전쟁이란 건 여자와 같아서 덮칠 줄 아는 자에게 몸을 맡긴다고!”

그러나 나바르가 덮친 건 여자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월맹군은 기가 질린 것도, 마냥 후퇴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차근차근 병력을 집중시켰고, 맨등으로 포탄을 지고, 자전거로 박격포를 나르고, 사람의 몸을 이어 늪의 다리를 만들면서 프랑스군에 대한 포위망을 소리없이 완성시켜 갔다. 현재 백 살이 넘어 생존하고 있는 월맹군의 명장 보구엔지압 장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를 확정지은 다음에야 포위 공격을 시작했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베트남 민족해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고지대에서 내려퍼붓는 월맹군의 포격은 나폴레옹 이래 빛나는 공훈을 세웠던 프랑스 포병대를 침묵시켰고 급기야 프랑스 포병 사령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수없이 죽어 나가면서도 월맹군들은 쇠심줄처럼 디엔비엔푸를 죄어 들어갔고 마침내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은 전면 항복한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끝이었다.

이 전투에는 프랑스의 정규군은 물론 프랑스가 운용해 온 외인부대들도 대거 투입됐다. 여기에는 ‘프랑스 대대’라고 해서 한국 전쟁 때 참전한 부대원들도 있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서 전설적인 용맹성을 과시한 바 있는데 1951년 1월 25명의 프랑스군이 총검 돌격을 감행하여 인민군 1개 대대를 혼비백산 쫓아낸 일은 그 대표적이다. 이에 감동한 미군은 은성 훈장으로 그 공훈을 기렸는데 프랑스 지휘관 몽클라르 중령 (원래는 장성인데 대대를 지휘하느라 스스로 강등했다는)은 “총검 돌격은 보병의 기본인데 뭘 훈장까지 주고 그러나” 하며 잘난체(?)를 했다는 후문이다.

이 용맹한 부대도 한국 전선을 떠나서 디엔비엔푸에 배치됐다가 쓴맛을 보게 되는데, 한국을 떠날 때 프랑스 대대에는 한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경도 함주가 고향이었던 전병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무작정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온 이후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된 그는 프랑스대대의 행정병으로 배속됐고 그들과 함께 2년간 전투를 치른다. 휴전은 됐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타향살이 신세였던 그는 프랑스 장교의 제의로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베트남 땅을 밟고 디엔비엔푸의 참극의 현장에 있게 된다. 디엔비엔푸의 혈전에서 그와 함께 베트남으로 왔던 한국인들은 거의 전사했지만 그는 살아남는다. 디엔비엔푸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손을 뗀 뒤 그는 이번에는 알제리로 배치된다. 프랑스 식민지 경영 역사의 가장 큰 오점, 알제리 전투에서 제국주의 군대의 일원으로 싸우게 된다. 뭐 이런 기구한 인생이 다 있을까.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알제리 인들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썼고 그를 벗을 길이 없자 탈영을 선택했다. 1960년 그는 체포됐고 외인부대원으로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 훈장은 물론이고 프랑스 국적까지도. 그 이후 프랑스에서 살면서, 트럭 운전도 하고 제빵 기술도 배워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는 여지껏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 어떤 서류에는 북한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서류는 그를 남한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 어느 쪽에도 그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는 한국말을 거의 잊었지만 가끔 한국 물건 파는 슈퍼에 가서 라면을 사서 끓여 먹으면서 고향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가 한국에 있을 때에는 라면 같은 것이 없었지만, 한국 라면 특유의 매운 맛이 까마득히 숨어 있던 그의 옛 미각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 백기가 휘날리기 전의 전황은 그야말로 지옥같은 백병전이었다.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각오로 월맹군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프랑스군의 마지막 거점 이자벨 고지가 떨어졌다. 그 와중에 시체로 변한 사람 가운데에는 어쩌다 프랑스군의 일원이 되어 영문도 모르는 나라 베트남까지 와서 누구인지도 모를 적과 싸운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알제리까지 싸우다가 지금은 무국적자로 프랑스에 살고 있다. 한반도는 참으로 풍운의 땅이었고, 거기 살았던 이들의 운명도 여러 바람에 휘날렸다.


윗 끄적임은 중앙일보 2008년 4월 14일자, 그리고
http://blog.ohmynews.com/gompd/tag/%EB%94%94%EC%97%94%20%EB%B9%84%EC%97%94%20%ED%91%B8 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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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5.9 위대한 부통령의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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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1년 5월 9일 위대한 부통령의 사임



‘대한민국 부통령’이라는 단어는 웬지 낯설다. 하지만 한국의 50년대는 정,부통령의 시기였다. 대통령은 이승만 혼자서 독상을 차렸지만, 부통령은 인촌 김성수부터 만송 이기붕까지 여러 인물들이 번갈아 자리를 지켰다.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이름을 꼽으라면 역시 성재 이시영을 들지 않을 수 없겠다. 그는 온 집안이 독립운동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경주 이씨 집안 6형제 중의 한 사람이다. 이시영이 속한 경주 이씨 백사공파(이항복의 후예)는 무려 9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그야말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다. 이시영의 아버지도 이조판서였다. 조선 팔도 어느 대갓집에 견줘도 그 떵떵거림이 수그러들지 않을 이 명문가의 형제들 가족 60여명은 요즘 물가로 따지면 수백억에 해당하는 재산을 처분한 후 압록강을 건넜고 이후 치열한 항일투쟁에 나선다. 우리 역사에서 정말로 진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가문이었다. (이를 주도한 이회영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해야 할 것 같고)



6형제 가운데 살아서 해방을 본 것은 이시영이 유일했다. 한때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로 잘나가던 신하였던 그가 36년의 일제 강점기를 버텨내고 해방을 맞았을 때의 나이는 이미 일흔 여덟이었다. 이승만조차 성재 어른이라고 존대할 정도의 연륜이었다. 다섯 형제를 이국 땅에 묻고 자신도 죽을 고생을 하고 온 처지였지만 권력의 중심에서도 이시영이라는 인물됨은 흔들림이 없었다. 청렴결백의 표상이었고, 이승만의 절대권력 앞에서도 할 말을 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1951년 5월 9일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범죄 중의 하나인 국민방위군 사건을 비판하며 국민에게 전하는 글을 남긴 후 사임한다. 전쟁을 치른다는 나라의 정부가 자국의 젊은이들 수만 명을 생으로 얼려 죽이고 굶겨 죽였던 이 엄청난 사건을 통절하게 규탄하는 그의 성명에는 서릿발 같은 선비의 기상이 뚝뚝 떨어져 글자 한 자 한 자가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 나는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배치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데다가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그렇듯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한다.“



얼마나 한스러웠을 것인가. 자신의 형제들을 다 잡아먹혀가며 이루고자 한 해방된 조국. 그나마 반쪽으로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자신이 부통령을 맡고 있는 공화국 정부는 자신의 동량같은 청년들을 건사하기는 커녕 길거리의 원혼으로 만들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힐 돈은 기생들의 치마폭과 장군들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래놓고도 국방장관의 친구에게는 무죄가 선고되는 판이었으니 노구의 그가 겪어야 했을 실망과 분노는 오죽했을까.


 부통령을 그만둔 순간부터 그의 가족들은 반넘어 굶어야 했다. 서울 중구 일대 2만 평의 땅을 소유했던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후예들은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를 타고넘어야 했다. 이시영의 둘째 아들 이규열은 피난지 부산에서 병으로 숨을 거뒀고 그 딸은 소아마비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됐다. 그 뒤를 이어 이시영이 서거하고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뒤에도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서울로 이사와서도 스무 번도 더 이사다니며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했다. 어엿한 경기고등학생이 된 손자는 생활고로 대학에 등록할 수 없었고, 가난에서 탈출해보고자 캐나다로 이민간 손자는 중환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월간조선 2008년 5월호에 나온다. 한국 축구가 브라질을 이기는 확률로 월간조선도 좋은 일을 한다. 물론 마냥 좋으면 월간조선이 아니다. 남북협상에 반대한 이시영의 면모를 부각시킨 그들이 원하는 것은 빨갱이 싫어한 애국자 이시영이었던 것이다)



2008년 당시 아흔 아홉 살이던 며느리는 이시영의 묘 앞에 움막을 짓고 32년째 묘소를 관리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며느리의 소원은 국립묘지로의 이장이었다. 그것도 안된다면 묘역이라도 이제 국가가 관리해 줬으면 한다고 했다. 이승만의 수족으로 악질 노릇을 도맡아 했던 김창룡도, 전두환 경호실장하던 안현태도 묻혀 있고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의 주역들도 간다면 말리지 못할 국립묘지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은 그때껏 들어가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쯤되면 개그콘서트의 불편한 진실의 소재감이 될 것도 같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61년 전 백발 성성한 대한민국 부통령이 남긴 일갈을 다시 음미해 본다. “사람마다 이를 그르다하되 고칠줄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시비를 논하는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잡으려하지 않는다......... 이 말이 왜 자꾸 곱씹어지는지 모르겠다.

1961,5.16 이한림 장군의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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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이한림 장군의 5.16


선글라스를 낀 작달막한 투스타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군이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를 건넜다. 그들이 방송국을 장악한 뒤 숙직 아나운서를 시켜 발표한 대로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일부가 행동을 개시한 순간이었다. 한강 다리를 지키던 헌병대는 쿠데타군에 가담한 해병대의 기세에 눌려 다리를 내 주었고 불과 3천 명에 불과했던 쿠데타 군은 삽시간에 ...서울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손아귀에 쥐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각 책임제 하의 실권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뛰어들어 머리카락 보일까 꽁꽁 숨어 있었다. 대통령 윤보선이 쿠데타 소식을 접한 후 일성은 “올 것이 왔구나. ”였다. 올 것(?)이 왔는데 그를 막아야 할 사람은 수녀 치마폭에서 나올 줄 몰랐으니 볼짱 다 본 셈이었다.

하지만 쿠데타군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물론 군 곳곳에 쿠데타에 호응하는 이들이 박혀 있었지만 60만 대군 중 쿠데타군 측이 동원한 병력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5월 16일 새벽 3시 강원도 1군 사령관 관사에서 쿠데타 소식을 듣고 잠에서 쌔어나 “이런 괘씸한 놈들”이라고 부르짖은 1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의 휘하의 병력은 수십만 명이었다. 하필이면 전날, 5월 15일은 제1군, 즉 제 1 야전군의 창설 기념일이었다. 당연히 장면 총리도 참석했었고 군 고위 지휘관들이 집결한 축하 분위기에서 술잔도 적잖이 오간 터였다. 그런데 만주군 동기이며 오랜 동안 친구였고빨갱이로 몰려 죽다 살아났을 때에는 밤새 통음하며 위로한 적도 있었던 박정희 녀석이 바로 그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한림은 분노했다.

예나 지금이나 제 1야전군이라면 한국군 최강의 병력이다. 이들이 움직인다면 해병대 몇 명이 껍적거리는 쿠데타군은 간단히 진압될 수 있었다. 이한림은 1군단장 임부택에게 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병력을 이동하여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쿠데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만 내려온다면 언제건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들은 연락이 닿질 않았다. 총리는 앞서 말했듯 수녀원에서 머리카락 보일까 숨어 있었고, 국방장관도 소식이 없었으며 육군 참모총장은 쿠데타군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진압을 시작한다면 국군끼리 피를 볼 일이었고,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으로서 ‘출동하라’ 한 마디면 족하겠는데 그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윤보선 대통령, 내각 책임제 하의 사징적인 대통령이던 윤보선의 특사가 1군 사령부에 닿았다. 대통령의 친서는 공자님 말씀이되 알멩이는 없는 소리였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군의 불통일로 대공역량을 감소 시켜서는 안됩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파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됩니다. 귀하는 무엇보다도 공산군의 남침 대비에 만전을 기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이한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해졌을 것이다. 한국군끼리 피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문제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헌정을 무너뜨린 상황 아닌가. 그런데 불상사나 희생은 안된다니 뭐 이런 손발 묶고 자유형 헤엄치기가 있는가 말이다. “한국군끼리 충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명제에다가 대통령의 명령까지 곁들여지니 이건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원도까지 날아온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쿠데타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이미 이한림의 결기는 힘이 빠져 있었다. 이한림은 5월 17일 국기 하기식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장병 여러분,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비극의 시간이 왔습니다. 나 는 근본적으로 군의 정치에의 개입을 반대합니다. 있어서도 안되고 용서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내 생각이나 내 의지와는 관계 없이 대세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한군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시기에 내란으로 치달을 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부득이 나는 쿠데타 반대 입장에서 묵인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음을 여러 장병들에게 알립니다.”

이로써 불법적인 쿠데타를 막아설 민주공화국의 무력은 사라졌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하리라 여긴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의 그의 위치는 명확히 반란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 이한림은 자신의 친구 박정희를 막아서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히 맞는 말 같지만 너무나도 무책임한 소리,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선 안된다”는 대통령의 친서 앞에 그 결심은 무뎌졌고, 결국 이후 근 30년에 이르는 군부 통치의 서막은 활짝 열리고 만다.

어느 때에나 마찬가지다. 공자님 말씀하기는 참 쉽다.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성찰이 필요하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거기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봐야 아무 도움이 안되는 우리 모두의 과오인 것이라고 폼 잡기는 정말로 쉽다.

하지만 대개 역사에서 이런 공자님 말씀들은 대개는 누군가의 장식품으로만 빛나게 마련이고 사실은 최악의 상황으로 이끄는 지름길 노릇도 불사한다. 바로 윤보선이 한 소리였다. 국군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훌륭했으나 그 국군이 헌정질서를 밧다리 한판으로 무너뜨릴 때에 사용될 수 있는 명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2012년 5월 16일 50여년 전 쿠데타군이 긴박한 분위기에서 한강다리를 건너던 날, 민주주의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 다 같이 성찰해보자,”는 말이 때로는 무지하게 어리석은 것처럼 말이다.

이한림 장군은 며칠 전 아흔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명복을 빌며 5.16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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