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2002.3.26 어느 여성 장애인의 죽음

$
0
0
산하의 오역

2002.3.26 어느 여성장애인의 죽음

그녀는 기지촌에서 자랐습니다. 그 사연 많은 곳에서 형성된 그녀의 가족들 역시 사연이 많아요. 2녀 1남의 3남매는 한배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는 모두 달라요. 거기다가 오빠는 백인 혼혈이었지요. '양공주'에 대한 시선은 본인에게만 머물지 않지요. 그녀도, 오빠도, 여동생도 말못할 모욕들을 어려서부터 당하면서 컸어요. 언젠가 만났던 기지촌 출신의 여성은 그런 말을 합디다. "동물원 스컹크 알아요?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보다가도 이내 어휴 냄새 하며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가잖아요. 그때 그 스컹크가 되는 기분이라면 이해가 되겠나요."

아마 그녀도 그랬을 겁니다. 어린 나이, 그리고 그 뒤 예민한 나이가 됐을 때 그 시선들이 얼마나 예리한 면도칼이 되어 그 여린 가슴을 쑤시고 도려냈겠어요. 오래 참았죠 열 여섯 살까지면. 열 여섯에 그녀는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시설에 들어가죠. 그녀는 뇌성마비 5급 장애인이었거든요. 사실 5급이면 그다지 일상 생활엔 지장이 없는 정도입니다. 다리를 절고 언어장애가 좀 있는 정도죠. 그렇다고 의사소통이 안되는 건 아니고. 시설이고 복지관이고 성년이 되면 거기 머물러 있기 어려운 건 아시죠. 그나마 사회의 보호는 거기까지니까.

그녀도 살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어요. 녹녹찮은 몸으로 좌판을 벌이고 어눌한 말로 손님을 부르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죠. 그런데 그를 위해 야학에 적을 두면서 그녀가 일찍이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을 접하게 돼요. 올림픽한다고 온 동네를 쓸어버리는 바람에 집도 절도 잃어버린 철거민들을 만난 거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축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던 그녀가 또 다른 불행아들을 만나고 함께 울고 웃었던 순간은 그녀 삶에서 많지 않았던 행복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집을 잃어버리고 농성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공부가 사치에 가까웠고 검정고시 준비하던 그녀는 되레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습니다. 그 가운데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었는데,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어요. 그때 그 아이가 남긴 한 마디는 그녀의 가슴을 찢어 놓습니다. "선생님처럼 편안하게 다니고 싶어요." 그 어린 영혼의 이루지 못한 소망을 위하여, 자신과 같은, 또는 그 이상의 고통을 지고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바람을 위하여, 그녀는 장애인 운동가가 됩니다.

2001년이었나 저는 지하철 시청역 선로를 점거한 장애인들을 촬영한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부르짖으며 장애인들이 선로를 점거하고 쇠사슬로 몸들을 묶어 버린 거지요. 그때 전경들은 진압보다는 진압 뒤의 연행 과정에서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그냥 휠체어 경우는 네 명이, 전동 휠체어 경우는 예닐곱명의 장정이 달라붙고 낑낑대면서 지하 몇 층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려야 했으니까요. 그녀 또래의 한 장애인이 제게 했던 말은 선명해요. "우리가 시민들 발을 한 시간 묶었다지만 우리는 평생 발을 묶여 살았어요." 아마 그녀도 어디에선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을 겁니다.

그녀에게 뜻밖의 인연이 찾아와요. 장애인 운동 와중에 만난 사법고시 준비생과 사랑에 빠진 거죠. 남자 또한 한쪽팔에 장애가 있었어요. 장애 있는 사람들끼리 오손도손 살아보고픈 소망에 부풀었고 아이도 생겼지만 둘은 거대한 장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시댁의 완강한 반대였지요. 한쪽팔은 시들었지만 똑똑한 내 아들의 상대로 향용 쓰는 말로 근본도 모를 뇌성마비 장애인은 어림도 없단 뜻이었겠죠. 그 잔인하기까지 한 반대 끝에 그녀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습니다. 뇌성마비 환자에게 치명적이라는 전신마취를 하고서요.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남자와 꿈에 그리던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습니다. 하지만 시집살이는 맵다못해 독했습니다. 사람들은 참 묘해요. 자신에게 어떤 마뜩잖은 부분이 있을 때 비슷한 사람에게서 위안을 삼기보다는 되레 그에게 화풀이를 해 버리는 걸 참 많이 봤으니까.
시집살이도 시집살이지만 그녀에게는 더 무서운 일이 닥칩니다. 출산 과정에서 또 해야 했던 마취의 후유증이 나타난 거예요. 좀 부자연스러워도 보행에는 지장이 없던 그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습니다. 그녀의 장애등급은 수직 상승합니다. 1급으로요. 시어머니는 허덕이는 몸으로 걸레질을 하던 그녀에게 칼을 던집니다. 그걸로 목숨 끊으라고. 이 일로 그녀는 실어증까지 걸리죠.

남편은 곧 이혼을 요구합니다 몸도 몸이고 그에 따라 일어나는 가정불화를 핑계삼은 것이었지만 사실 남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죠. 이혼 소송 끝에 위자료와 아이를 볼 권리를 확보하지만 그 권리를 제대로 향유하지는 못해요. 위자료는 차일피일이었고 아이는 아예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이에 분노한 그녀는 아이를 찾아오기 위해 소송을 비롯하여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어야 양육권 소송에 유리하다는 조언을 듣고는 작심을 하고 돈도 모으죠. 동시에 예전 동지들과 함께 장애인 운동에도 다시 나섭니다. 2001년 장애인 이동권 연대 투쟁에도 그녀가 함께 했다니까 어쩌면 저와 그녀는 한 장소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때문에 그랬을까요. 공무원들이 좋지 않은 소식으로 그녀를 연이어 방문합니다. 통장에 잔고가 있으면 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다든가 수급자가 아니면 임대아파트를 비워야 한다든가 하는 정중한 통고는 그녀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생활수급자 신분을 지키기 위해 돈벌이의 수단이었던 노점을 포기하지만 그녀에게 지급된 돈은 한 달에 26만원. 아파트관리비와 약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었죠 하물며 아이를 찾아오기 위한 양육권 소송에 필요한 경제적 자립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일을 하려면 터전이 무너지고 터전을 지키자니 무기력의 늪 이상은 아니고 보고픈 아이를 찾을 길은 가없이 멀어져만 가고. 결국 그녀, 최옥란은 서른 여섯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02년 3월 26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을 짧게나마 돌아보면서 세상에 태어나 모진 꿈만 꾸다 간 그녀의 삶에 슬퍼하기보다, 그 와중에도 세상과 싸우고 명동성당 차디찬 바닥, 지하철 선로에 몸 묶은 투지를 기리기보다 버르장머리없게도 저는 제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먼저 감사했습니다. 이 나라에 장애인으로, 그리고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그 가냘픈 기쁨의 온기가 다한 후 대한민국의 장삼이사 그 누구도 당장 장애인이 되고 중환자가 된다면 그와 그 자식들의 운명이란 그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으리라는 불길한 직감에 오들오들 떨게 되지만 말입니다.

최옥란은 자신도 장애인이었지만 "선생님처럼 편하게 다니고 싶어요"라고 자신을 부러워하는 아이의 말에 통곡했고 그들보다는 편안한 자신의 몸을 움직여 여러가지 일을 했고 세상의 벽을 향해 뇌성마비의 몸을 부딪쳐 갔었지요. 문득 성한 두 다리가 오무라듭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의 오늘 한 여성 장애인이 사위어 갔습니다

1987.3.27 방위병의 유서

$
0
0
산하의 오역

 

1987년 3월 27일 방위병의 유서


 우리의 최근 4반세기의 정치 체제를 결정했던 6월 항쟁의 해 1987년, 박종철의 죽음과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 틈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가 점차 무르익어가던 3월 27일, 박종철의 고향 부산의 한 야산을 오르던 등산객은 뜻밖의 모습에 기절초풍한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사복차림이었지만 짧은 머리는 그 당시 저녁 나절 거리를 메우던 단기 사병, 속칭 방위병 중의 하나임을 짐작케 했다. 신원 확인 결과 방위병이 맞았다. 이름은 장재완.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을 마치고 입대한 청년이었다. 86년 1월 군번이니까 4개월 되면 제대였던 장재완 일병이 목숨을 끊은 것이다.


 부검 결과 외상은 없었고 등산객이 그를 발견하기 직전에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됐다. 애인이 고무신을 바꿔 신은 것도 아니었고, 고참에게 괴롭힘을 당할 짬밥은 넘어선 터였다. 부대에서 사고를 쳤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결했다. 가족들은 물론 부대 관계자들도, 심지어 친구들도 왜 그가 죽었는지 갈피를 잡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3일 뒤 부산대학교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두 통의 유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유서의 내용은 읽는 사람의 손을 부들부들 떨게 하기에 충분할만큼 충격적이었다.


 “저는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83학번으로 86년 1월 방위병으로 입소하여 군 복무를 하던 중, 본인의 중대한 과오로 인해, 조직을 보위코저 나의 육체적 생명을 단절합니다.....(중략) 적들의 야수와 같은 손길이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이 우리 혁명과 조국통일을 조금이라도 앒당기는 계기가 된다면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요. (하략) ”



 진상은 이랬다. 장재완은 3월 23일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가방을 두고 내렸다. 가방에는 자신의 이름이 오버로크로 튼튼하게 새겨진 군복과, 요즘의 국방부가 봐도 눈이 벌개질 사회과학도서, 그리고 각종 문건 등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장재완 자신이 가입해 있던 학생운동 조직의 가명 명단같은 것이 들어 있다는 말도 있다.) 이 가방을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장재완은 25일 부대로 출근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돈을 빌린 것이 그의 마지막 행적이었고, 그 뒤 그는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예감대로 가방은 이미 보안대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실수를 죽음으로 갚은 셈이다.



 전두환이라는 깡패 두목이 대통령으로 차고앉았던 정권과 장면으로 맞섰던 한 젊은이로서 그 입장에 처했을 때의 공포감과 낭패감은 짐작이 간다. 당시 보안대는 무소불위 그 자체였다 서울의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이들의 죽음같은 기억을 되새길 필요는 없겠지만, 보안대, 그것도 군인으로서 보안대와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은 독사와 키스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자신 하나면 어떻게든 버텨 볼 수도 있었겠지만, 동료들까지 자신 때문에 끔찍한 일을 당하고 조직도 일망타진될 생각에 미쳤을 때 그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쉽게 다가설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그의 책임감(?)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의 ‘혁명’과 ‘조국통일’ 따위가 무엇이든지간에 그런 식으로 목숨을 끊는 것에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은 성큼 다가온 총선에서 80년대의 이력을 휘장과 발판으로 삼아 의회 권력에 도전하려는 여러 명의 486에게 그들 역시 살아냈던 80년대의 참혹한 시절을 되새김과 아울러 자신의 목숨을 끊어 가면서까지 보위하려 했던 가치의 무게를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다. 이 글을 볼 이는 거의 없겠지만.



 인물도 좋고 언변도 뛰어나고 사회과학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장(長)짜리 직함 쌓고 별도 달았던 80년대의 스타들이 대접받는 ‘젊은 피’로 ‘새로운 인재’로 수혈되고 수용되어 여의도에 입성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경로고, 나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길인지도 모른다.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들의 무거운 몸을 무등 태워 대중들에게 연설할 수 있게 도와 주었던 평범한 친구들, 의장님 보위하겠다고 맨몸으로 덤벼들다가 ‘경관폭행’ 및 ‘공무집행방해’의 잡범으로 별을 달아야 했던 이들, 그놈의 ‘의장님’ 구출 투쟁을 하다가 한쪽 눈에 최루탄 조각이 박혀 버린 내 동기를 비롯한 많은 보통 학생들, 자신의 실수를 괴로워하다가 끝내 죽음까지 불사해야 했던 장재완 같은 이들의 피눈물을 제발덕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기쁨’에 더 신경이 팔릴 때, 돈 심부름이나 하고 삼성 장학금 받아 쓸 때, 장재완을 비롯하여 너무나 평범했으나 뒤틀린 세상을 눈 감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이지 못했던 이들은 또 한 번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재완으로 하여금 내가 왜 저런 것들 때문에 죽었나 땅을 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2011년 현재 장재완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은 확인이 안된다) 사유는 그가 어느 조직에 속해 있었는지, 무슨 활동을 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옛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그 친구들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증언을 거절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달래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말 못할 사연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결국 장재완이 목숨과 바꾸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가족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고, 우리 사회 또한 그의 행적을 인정하지도, 발견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의 또 한 통의 유서는 부모님께 보내는 것이었다. 유서에는 경직되고 설익은 ‘투쟁적’ 문구들도 많지만, 장재완은 그의 유서를 가족에 대한 인사로 끝맺고 있다. “..... 그리고 형님 취직이 빨리 되어야지요. 재열이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십시오, 재포도 열심히 하라고 하시구요. 아버님 어머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형 잘있어 미안하다 정말로. 재열아 재포야 가는 형이 밉지. 그래도 난 가야 해. 너희도 이 형의 죽음을 빨리 깨우치길 바래. 부모님 형님 말씀 잘 들어라. 아버님 어머님 전 이만 떠나렵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불효자식 재완 올림” 참으로 평범한, 이를데없이 범상한 청년이었다.



tag :

1930.3.28 우치무라 간조의 야망

$
0
0
산하의 오역

1930년 3월 28일 우치무라 간조의 야망

일본의 홋카이도는 일본 내에서 발전이 더딘 지역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는 바, 이를 위하여 일본 정부는 협조를 구했다. 이때 미국에서는 농업 관련의 전문가인 메사추세츠 농대 학장 윌리엄 클라크를 보내 준다. 그로부터 1년간 삿뽀로에서 체류하면서 삿뽀로 농업 대학을 설립했던 그는 선진 문물과 지식의 전달자이면서 열정적인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솔선수범하며 학교 건설과 교육에 힘쓴 클라크는 제자들의 감동과 존경의 대상이었고 그의 감화로 1기생 전원이 기독교에 귀의한다. 1년 뒤 클라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데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여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이 유명한 말을 남긴다. “Boys! Be ambitious!"

클라크와는 인연이 없었지만 그가 귀국한 뒤 들어온 2기생 중에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며 동경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가졌지만 경제적 여건상 삿뽀로까지 오게 된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우치무라 간조. 그는 선배들의 강압에 가까운 기독교 선교를 받으며 생활했고, 자신도 기독교에 흥미를 느껴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서양 선교사에게 의존하는 기독교가 아닌 일본의 독립적인 기독교를 추구했고, 설교를 포함한 모든 예배와 교회 행정을 자신들의 주체적인 참여로 해결하고자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서도 그는 “두 개의 J만을 사랑한다.” 고 했을 정도였다. 두 개의 J란 Jesus와 Japan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국 일본을 사랑하는 방식은 먼 훗날 인근의 나라의 목회자들처럼 집권자의 조찬기도회에서 통성 축복을 하거나 “대통령님은 기름 부은 자” 따위로 집권자들에게 아양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진가는 1891년 1월 9일 그가 교편을 잡고 있던 동경제일고등중학교에서 발휘된다.

그날은 메이지 천황의 교육칙어 반포일이었다. 학교에서는 단상에 천황 초상화와 교육칙어를 모셔 두고 각 구성원들이 90도로 절하는 해괴한 (그들로서는 엄숙한) 의식을 벌였는데 우치무라 간조 선생님은 어이없게도 그 앞에서 고개만 까닥했을 뿐, 그 이상의 예를 갖추지 않는다. 좌중이 술렁이는 가운데 격한 분노의 외침도 터져나왔지만 우치무라의 허리는 굽혀지지 않았다. 당장 동료 교사와 학생들부터 난리가 났다.

집에는 돌이 날아들었고 매스컴은 이 ‘불경죄’ 사건을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 즐비한 가운데 도망을 다녀야 했고 여관에 투숙할 때에는 가명을 써야 했다. 그즈음 우치무라는 폐렴에 걸려 있었는데 아내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만 아내가 폐렴이 옮아 덜컥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직장도 잃고 아내도 잃어버린 최악의 상황. 하지만 우치무라 간조는 굴하지 않고 일본의 기독교, 일본인을 위한 기독교를 계속 설파해 나갔다. 또한 지상의 권세에 굴하지 않고 곧은 소리를 하는 것은 그의 일생 내내 지속된 십자가 지기였다.

러일전쟁에서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승리하여 온 일본 국민들이 환호작약하는 가운데에도 그는 이렇게 예언에 가까운 일갈을 남겼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늙은 대신의 가슴에 한 개의 훈장을 추가하고, 그 품에 몇 명의 젊은 미희를 안겨주는 것 이상, 이 전쟁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본은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침략자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지각이 있는 일본사람이라면 기뻐하기는커녕 나라의 장래를 위해 통곡해야 할 날이다. 일본은 계속 전쟁에 나설 것이고 그 댓가를 치룰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민비가 살해되었을 때에는 “일본의 대실패”라 통탄했고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강탈했을 즈음에는 “일본은 영토를 늘림으로서 영혼을 잃었다. 나라를 잃고 슬퍼하는 민족을 생각한다.”며 애통해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세상을 피하려고 하지 마라. 세상을 이겨야 한다....... 사람은 희망의 동물이다 앞을 바라봄이 자연스럽지 뒤를 돌아봄은 자연스럽지 않다. 희망은 건전하며 회고는 불건전하다.” 죽은 뒤에 요단강 건너가 만날 천국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악덕과 패륜이 그치지 않는 세상일망정, 그 세상을 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서양의 논리에 찌들지 않은 일본의 기독교를 설파하면서도 일본의 악덕에 휘말리지 않는 그에게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했다. 김교신, 함석헌 등이 그들이었다.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을 받으면서도 조국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熱血), 이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다면 쏟아 바쳤을 경모(敬慕)의 염(念)을 그에게 바쳤을 것이다.”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의 가르침은 김교신에게 그대로 이어졌던 바, 김교신은 서양의 교리와 선교사의 권위에서 벗어난 조선의 기독교를 추구하고자 했고, 이는 과거 숭명사대했던 사대부들 이상으로 숭서양사대하던 기독교 목사들에게 반발을 산다. 그로 인해 한국 기독교사에서 김교신은 곧잘 이단으로 간주되었고, 그의 활약과 발언은 자주 외면당했다. 일제 시대에 그가 토해냈던 열변은 오늘날 들어도 방금 짜낸 젖소의 우유처럼 신선하다.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없는 형식의 껍질이요, 그 진보적이라는 것은 세속주의이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조차도 되지 못한다. 한 수양소요, 한 문화기관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던가?" (성서조선 1935.12)

김교신을 길러 내고 함석헌에게 영향을 주고, 참삶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등불이 되었던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광란이 종말을 향한 질주를 시작하기 직전, 1930년 3월 28일 세상을 뜬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참으로 거대한 야망이었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한 클라크는 우치무라를 직접 대하지 못하였지만.

1919.3.29 기생 김행화의 만세

$
0
0
산하의 오역

1919.3.29 기생 김향화의 대한독립만세

태릉갈비가 왜 유명하며 홍릉갈비며 정릉갈비며 하는 상호들이 많을까. 그것은 왕릉이나 왕비릉에는 제사가 잦았던 바, 당시로서는 매우 귀했던 고기들이 젯상에 자주 올랐으므로 그 주변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 조리하는 법을 수이 익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명한 수원갈비도 그렇다. 슬프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자주 방문했고 항차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했던 정조의 존재 때문에 고기 구경할 일이 많았던지라 수원갈비가 명성을 얻었다는 것이다.

고기가 있으면 또한 따르는 것이 음주와 가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더욱 즐겁게 하는 데에 동원되는 것이 기생이었으리라. 수원에도 많은 기생들이 있었다. 일제 통치가 시작된 이후 기생들은 권번이라는 조직에 편입되어 이른바 위생 검사부터 개인적 신상명세까지 행정적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는 한달에 한번씩 위생검사 즉 성병검사가 의무적으로 시행되었는데 하필이면 그 검사처인 자혜병원은 정조의 위폐와 어진이 모셔져 있던 화령전과 왕이 머물던 봉수당 자리였다.

"말하는 꽃"이라 불리우던 기생들이지만 하늘같이 받들던 옛날 임금님의 위패가 엄존하던 곳에 일본인 의사들이 진을 치고 기생들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에는 심사가 뒤틀렸으리라. 수원 권번 소속 가운데 두번째 왕언니였고 "검무, 승무, 정재춤과,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막힐 것이 바이없고, 갸름한 듯 그 얼굴에, 죽은깨가 운치 있고, 탁성인 듯 그 목청은, 애원성이 구슬프며, 맵시동동 중등 키요, 성질 순화 귀엽더라."고 기록된 스물 셋의 기생 김향화는 그 포한을 가슴 속 깊이 포개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원 일대의 술집은 문을 닫았고 기생이고 광대고 죄다 일손을 놓았다. 즉위한지 근 반세기, 망국의 황제일망정 격변을 함께 한 군주는 민중들에게 심후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덕수궁 앞은 상복 입은 조선인들의 통곡으로 뒤덮였다. "우리도 올라가자! 황제폐하께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자." 김향화를 비롯한 20여명의 기생들은 상복 입고 나무비녀 꽂고 경부선 열차에 올라타 덕수궁 앞에서 호곡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울음같은 만세소리가 폭발했고 그 폭음은 삼천리 방방골골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 19일 한 신문에는 한반도 남쪽의 유서깊은 도시에서 일어난 한 만세 시위 기사가 실렸다. 진주의 기생 6명이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한이 없다’고 시위를 벌인 것이다. 가장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이 가장 용감하게 일어서는 이 나라의 희한한 역사 한 자락이 또 펼쳐진 것이다. 수원 기생들도 이 기사를 보았으리라.

3월29일은 수원 권번 소속 기생들의 검진일이었다. 기생 33명은 함께 길을 나섰다. (하필이면 여기도 33명) 병원 가는 길에 기생들을 단속하고 못살게 굴던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우는 애도 순사 온다면 그치고 조선인들에 대한 태형(매질)이 합법이던 시절, 김향화와 33인의 기생들은 일본 경찰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행동을 벌인다. 그 정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이다. 장구에 맞춰 소리를 부르던, 술 사내들 속을 녹이던 그 간드러진 음성들은 칼날처럼 경찰서를 겨누며 수원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3월25일부터 수원 인근이 조용하지 않았었지만 기생들이 이러고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제 경찰은 곧 잔인한 진압에 들어갔다. 10대의 소녀도 포함된 기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짓밟히고 끌려가자 지켜보던 시민들도 울컥했다. 기생들의 독립만세를 들으며 얼마나 부끄러웠으랴. 얼마나 그 얼굴이 뜨거웠으랴. 시위는 과격해졌고 돌이 날고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인들 역시 잔학을
더했으니 4월의 제암리 학살로 그 절정을 맞게 된다.

김향화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지만 그녀가 감옥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징역 선고 기사 후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본명이 순이였던 김향화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혹은 감옥에서 시들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단지 고은 시인이 그의 기생 독립단이라는 시 속에서 그녀를 보존하고 있을 뿐.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을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1976.3.30 팔레스타인 땅의 날

$
0
0
산하의 오역

1976년 3월 30일 팔레스타인 “땅의 날”

교회에 다니지는 않더라도 주일학교라도 가 보고 성경 몇 줄 읽어 본 사람에게도 친숙한 지명이 있다. ‘갈릴리’다. 예수가 누빈 주요한 포교의 현장이며, 예수는 12 제자 가운데 11명을 이곳에서 거둔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행해진 것도 갈릴리였고, 믿음이 부족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풍덩 빠진 곳은 갈릴리 호수였다.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는 팔복(八福)의 산상수훈이 베풀어진 곳도 산 위라고 하기에는 조금 뭐한,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이었다.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확실히 유대인들의 터전이었고 밥줄이었고, 삶의 무대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 반항하여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선 크고 작은 반란에 진저리를 친 로마 황제의 추방령으로 유대인들이 제국 곳곳, 또는 동방으로 흩어지면서 이곳은 유대인 아닌 이들의 거처가 된다. 그렇게 속절없는 세월이 2천년 가까이 흘렀다.

오랜 동안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누대의 고향으로 알고 살아온 팔레스타인에 별안간 불한당같은 다비드의 깃발들이 꽂히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였다. 세계대전을 벌이는 와중에 다급했던 영국이 유태인들과 아랍인들 양쪽에 전혀 다른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근거로 유대인들은 천대받고 차별받던 유럽을 벗어나 수천 년 전 자신의 조상들이 천신만고 끝에 차지했던(또는 차지했다고 주장하는)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뒤통수 맞은 아랍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그 이후 팔레스타인은 총성과 비명의 광란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된다. 이스라엘 국방장관을 지낸 샤론의 말은 이스라엘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를 웅변으로 드러내 준다. “우리를 나치 이스라엘이라 불러도 관계없다. 죽은 성자보다는 산 나치가 낫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이스라엘 독립과 더불어 수십만의 난민이 생겨났고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유럽에서 독일인들에게 당했던 그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억압에 나선다. 철조망을 치고, 벽을 쌓았으며 히틀러가 아리안 인종의 ‘레벤스라움’ 즉 생활 영역을 요구했던 것처럼 유태인들의 정착촌은 스스럼없이 아랍인들의 땅으로 파고들었다. 갈릴리는 이스라엘 독립과 함께 이스라엘 땅이 됐다. 그나마 그 주변은 아랍 국들이 장악하고 있어 이제나 저제나 이스라엘을 물리칠 초승달 군대의 희망이 있었으나 6일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인근의 골란 고원까지 장악해 버림으로써 갈릴리에서의 이스라엘의 입지는 공고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던 버릇 그대로를 또 다시 실천에 옮긴다.

“갈릴리의 유대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계획은 갈릴리에 50개의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는 갈릴리 지역의 인구 분포 주류를 팔레스타인인에서 유대인으로 바꿔 놓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이러한 ‘알박기’를 통해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유대인의 ‘실효적 지배’를 실현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거나 재산을 잃어야 했다. 이스라엘 당국의 노골적이고도 사악한 토지 몰수 정책에 대응하여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일대 반대 투쟁을 계획한다. 1976년 3월 30일이었다.
봉화는 갈릴리에서 올랐지만 시위는 갈릴리에 한정되지 않고 이스라엘 전역으로, 서안 지구로, 가자 지구로,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퍼져나간다. 갈릴리의 아랍 주민들에게 각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연대’를 보여 준 것이다. 항상 하나되어 숙적 이스라엘을 격멸하겠다고 찰떡같이 말했지만 늘 결정적일 때 주저하거나 또는 너무 서두르거나 엇박을 내서 이스라엘 에게 개떡처럼 망신을 당했던 아랍국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인민들은 “당신들은 우리들이다”면서 시위에 가담했다.

4천 명 이상의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서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진압했고, 그 결과 6인의 팔레스타인인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단결된 그들의 모습에 스스로 감동받았다. 시위 지도자 타우피크 지아드의 외침은 그 감동의 축약이자 선언이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지역간의 차이도, 종교 분파도 없을 것이며, 팔레스타인 민족의 일부로써 단일한 아랍 소수민족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3월 30일은 ‘땅의 날’로서 기념된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팔레스타인 인들은 대규모 시위와 문화제가 열려 팔레스타인의 생존을 과시하고 그 의지를 증거한다. 이미 압도적인 무력의 보유자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에 대하여 자신들의 독립과 자유를 요구하면서 그들은 해마다 돌아오는 오늘 땅의 날을 기념한다


tag :

1920.3.31 조선 태형령 페지 -행동으로 얻은 볼기의 자유

$
0
0

산하의 오역


1920.3.31 조선 태형령 폐지 - 행동을 통해 얻은 볼기짝의 자유



 뭔가 일이 안 풀리거나 꼴같잖은 꼴을 봤을 때 ‘넨장할.....’,이라는 감탄사(?)를 내뱉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젠장’이라는 감탄사(?) 역시 이 ‘넨장할’ 또는 ‘넨장맞을’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 넨장의 어원은 난장(亂杖)이다. 즉 넨장할 또는 넨장맞을의 뜻은 장형(杖刑)에서 매의 굵기와 종류와 쳐야 할 부위를 가리지 않은 채 마구 두들겨 팰 일이라는 뜻이다. 매를 때려 사람을 징벌하는 일의 역사는 유구하다. 21세기의 한국에서도 교사라는 분들이 ‘매를 금지하면 교육이 안된다.’고 떠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의 호통과 “저놈을 매우 쳐라.”의 선고는 갑오경장 때 일단 막을 내렸다. 죄인에 대한 형벌에서 태형을 제외한 것이다. 일본보다는 늦었지만 중국보다는 빨랐다. 중국은 중화민국이 서기 전까지 태형 제도가 살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19세기에 폐지됐던 태형은 20세기에 되살아난다. 일본 총독부에 의해서였다. 경술국치가 있던 그 해에 떨어진 범죄 즉결령에 따르면 즉결권을 가진‘경찰서장, 헌병분대장 및 분견소장’들은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야 할 죄, 구류·과료’에 해당한 경우 혐의자를 태형에 처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12년 3월에는 아예 ‘조선 태형령’을 선포한다.



이에 따르면 태형은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해야 할 자에 대해 정상이 있을 때와 100원 이하의 벌금 및 과료에 처할 자가 일정한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자산이 없을 때 부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본 총독부는 자애롭게도(?) 여자는 이 태형에서 제외하여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에 한하도록 하였다. 조선인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하루에 태 30대를 기준으로 하되 1·2회 나눠 집행토록 하는가 하면, 꼭 ‘마실 물’을 주어야 한다고 규정했고 매를 때리다가 ‘냉각’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그리고 이 수치스런 광경은 비밀로 한다는 친절까지도 베풀었다. 거미줄에 걸린 파리에게 베푸는 거미의 선의라고나 할까. 먹이를 삼키면서 흘리는 악어의 눈물이라고나 할까.


 일본에는 1882년 사라진 태형이었건만 일본 관헌들은 이 태형령 하에서 마음놓고 조선인들을 두들겨 팼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조선인들은 천하의 등신들이었다. 한 나라가 송두리째 남의 나라에 넘어갔건만 주먹 부르쥐고 일어선 것은 낫 들고 도끼 흔드는 일부 농민들과 말단의 병사들이었을 뿐이고 일본인들이 생각하기에 할복을 해야 마땅하고, 아니면 최소한 싸우다가 죽어야 할 왕이나 최고급 양반들은 양순히 일본의 ‘보호’를 받아들이거나 되레 속곳 벗고 발가벗은 모습으로 자신들에게 아양을 떨고 있었다. 저런 배알도 없는 것들에게 나으리 나으리 하며 굽신거리는 나약한 무골충들에게 무엇을 거리낀단 말인가. “조선놈들은 맞아야 정신이노 차린다데스.”



 순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도 일제 시대를 경험한 이모가 “순경 온다 순경!”이라고 경찰에 대한 공포로 울음을 그치게 했던 기억이 있거니와, 주재소 순사에게 걸리면 일단 ‘맞고 시작’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다반사였다. 어지간한 범죄나 시비는 태형으로 끝냈다. 재판과 행형 시스템에 드는 경비가 부족한 이유가 컸지만, 그 근저에는 겁 주면 겁 먹고,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는 양순한 조선인들에 대한 멸시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



‘경찰범처벌규칙’ 87개조 가운데 한 가지에 해당할 경우에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이런 조항들이 있다.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2조). 함부로 대중을 취합하여 관공서에 청원 또는 진정을 남용하는 자 (19조) 불온한 연설을 하거나 또는 불온문서·도서·시가詩歌를 제시·반포·낭독하거나 큰 소리로 읊는 자 (20조) 이유 없이 관공서의 소환에 불응하는 자.(30조) 경찰관서에서 특별히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사항을 위반하는 자 (32조) 즉 일본 당국이 보기에 껄끄러운 행동을 하는 이들은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었고, 그들이 벌금을 낼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어김없이 태형이었다.



“경찰이 범죄자로 지목한 모든 사람은 사법에 정해진 절차에 의하지 않고 바로 체포하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친족이나 친구에 주련株連하여 사실의 유무와 경중을 불문하고 신문에 앞서 혹형을 가하였다. 그 결과 인사불성이 되게 하여 여러 날을 감금한 뒤에 비로소 심문하였다.” (박은식)


“까불면 맞는다.”를 고수하던 일본이 태형령을 거둔 것은 1920년 3월 31일 오늘이었다. 우리는 그 전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다. 밟으면 꿈틀하는 지렁이보다도 못하다고 여기던 조선인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던 3.1 항쟁이었다. 일부 별종을 제외하면, 일본인들이 때리는 매에 아이쿠 아이쿠 울부짖고 눈물 훔칠 줄만 아는 약종으로만 치부했던 조선인들이 총칼 앞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조선 인민 대중이 그 우두머리를 졸졸 따르는 들쥐같지만은 않으며, 자신들의 권리와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 줄 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매로만 다스린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3.1 운동 후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태형제 폐지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도록 한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매질에 맛들려 있던 총독부 관료들은 “조선의 실정과 민도에 비해 너무 이르다.” (참 내, 이 논리가 21세기 학교 교사들에 의해 반복되다니)고 반대하지만 사이토는 이를 무릅쓰고 조선 태형령 폐지를 결정한다. “본 형벌과 같이 육체에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것은 현대문명사상에 의한 형벌의 성질과 어긋날 뿐아니라 현재 조선인은 현저하게 향상 자각했고 그 민도(民度)가 옛날같지 않기에 태형을 폐지하여 기본형인 징역 또는 벌금으로 임하는것도 형정상 조금도 지장이 없다고 인식한 까닭이다.” 조선인들의 향상(?)된 민도를 보여 준 것은 바로 조선인들의 행동이었다. 일어서야 할 때 일어설 줄 알고, 주먹을 쥘 때 쥘 줄 알고, 소리쳐야 할 때 소리칠 줄 안다는 것을 증명한 3.1 항쟁이었다. 우리 민족은 그렇게 볼기짝의 자유를 얻었다.



2011년 오늘에 이르러 다시금 행동을 통해 얻어낸 권리와 자유를 생각한다. 비단 일제가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 어느 세상의 지배층도 그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들이 다스리고 지배하는 인민들에게 선의를 베푼 적은 없다. 우는 아이에게 젖 주고, 밟으면 꿈틀이라도 해야 발걸음을 조심하는 법이다. 대한민국 제 6공화국의 이명박 정부는 자신에게 권력을 준 국민을 사찰했다. 국헌을 준수할 것을 선서한 맹약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헌법이 규정한 감시당하지 않을 국민의 권리를 짓밟았다. 그러고도 “80퍼센트는 전임 정부가 한 것”이라는 포항 과메기도 웃다가 배 터져 죽을 변명을 변명이라고 하고 앉았다. 노무현 정부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충성도를 별점으로 매겼더란 말인가.



공무원이나 공무를 담임할 자의 태도나 능력, 평판과 자질을 점검하고 조사하는 일은 천국의 정부도 한다. 그러나 그 판단 기준을 자신에게 순종하느냐 거스르느나에 두고, 거기서도 한 발 더 나아가서 자신에 대한 충성도가 옅으냐 짙으냐로 별점을 매기고 못마땅한 이들은 잡아들여 곤욕을 치르게 했다면 이것은 악마의 정부가 하는 일이며, 볼기짝을 까고 몽둥이를 치지 않았을망정 공화국의 시민에게 정신적 태형을 가하는 야만에 다름 아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정부가 한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분노가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에이 세상이 다 그렇지 하고 넘어간다면 우리는 일본 순사가 부르는데 왜요?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맞고도 어 운수 나쁜 날이구나 침 한 번 뱉고 넘어갔던, 나무로 깎은 등신같은 조선인들에 다름아니게 될 것이다. “조선놈들은 맞아야 정신차린다데스”라고 지껄이던 일본 순사는 “걱정하지 말고 신상 다 뒤져. 조사하면 다 나와. 이명박 때도 별 일 있었나 뭐.”라고 자신만만해하는 통치자로 현신하게 될 것이다.



국민사찰 인권유린 이명박 정권 타도하자. 촛불 시위 때에도, 또는 이명박 정부가 무슨 삽질을 할 때에도 개인적으로 ‘타도’를 입에 담은 적은 없었다. 밉든 곱든 선거로 뽑힌 정권이고, 공화국의 국기와 헌법을 현저히 유린하지 않는 한 쉽사리 타도를 외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 정권은 기어코 그 말을 들을 자격에 도달하고 말았다. 나라의 시침을 송두리째 수십 년 전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의 볼기짝을 때렸다. 모질고 혹심하게 볼기짝을 까고 난장을 쳤다. 행동하지 않으면 권리도 없다 그 매든 손을 비틀고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허구헌날 볼기짝을 까고 아이고 아이고 소리나 내는 바보 천치로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조선 태형령이 폐지된 3월 31일, 다시금 묻고 싶다.



 



tag :

1970.4.1 포항의 기적 시작

$
0
0
산하의 오역

1970년 4월 1일 포항의 기적 시작

2011년 세상을 떠난 많은 이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크게 걸린 사람을 든다면 박태준을 들 것 같다. 그는 또 다른 의미의 한국 현대사였다. 와세다 대학의 기계공학도였지만 해방 후엔 군문에 들어 군인으로서 6.25를 치렀다. 함경북도 청진까지 올라갔다가 눈보라 휘날리는 흥남부두까지 내려오는 동안 생사의 기로에 여러 번 섰다. 생도와 교관으로 처음 만나 평생 인연...을 맺은 박정희는 5.16 쿠데타 당시 박태준을 거사에서 제외하는 대신 일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자신의 가족들을 부탁한다. 그만큼 박태준은 박정희의 신뢰를 받았다.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있으면 자기도 큰일나니까)바라며 군복을 벗은 박정희를 따라 박태준도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정치보다는 경제 쪽으로 활용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던 것 같다. 박태준에게 대한중석 사장을 맡겼고 박태준은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낸다. 그 뒤 박태준이 맡은 임무는 실로 불가능을 넘어서서 불가사의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종합제철소의 설립이었다. 종합제철소 설립 시도는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다섯 번이나 실패로 돌아갔다. 5개국 8개 회사로 조직됐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도 와해됐다. IBRD의 보고서도 한국에 제철소는 가망이 없다고 판정했다. 박태준이 미국으로 날아가 IBRD를 설득했으나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박태준의 아이디어가 미친 것은 대일청구권 자금. 그러나 대일청구권 자금은 농어업에만 투자할 수 있는 것으로 양국 국회의 비준이 끝난 상황. 박태준은 일본으로 직접 가서 이 문제를 조정하고 일본 제철사의 지원까지 받아낸다. 이때 도움을 준 일본의 야하타 제철이 청일전쟁 때 청나라의 배상금을 바탕으로 세워진 회사라는 것 또한 역사의 장난같은 아이러니. 이렇게 영일만 허허벌판에 제철소의 씨나마 뿌릴 수 있게 된 박태준이 제창한 것이 ‘우향우 정신’이었다. 이 제철소를 만드는 돈은 선열들의 피땀값이니 이걸 모래사장에 헛되이 쓸어 넣는다면 우리 역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로 뛰어들어 죽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1970년 4월 1일 만우절의 거짓말같은 일이 현실화된다. 한가한 어촌 마을을 쓸어버린 허허벌판 위에서 포항제철 기공식이 대통령과 부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연설한다. “.......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장 건설을 시작하는 여러분들에게는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어렵고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장 이하 전사원들이 일치 단결해서 우리 민족의 하나의 역사적 사업이 될 수 있는 이 포항 종합 제철 공장을 여러분들 손으로 완공한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이 공장을 훌륭한 공장으로 건설해 주기를 부탁해마지 않습니다.“

연설 도중에도 세찬 바닷 바람에 실린 모래들이 행사장을 뒤덮을 듯 날아다녔고 참석자 중에는 이 공장이 과연 지어질 수 있을까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포항은 모래 바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루 종일 작업한 것이 자고 일어나면 모래투성이에 엉망이 되는 일도 다반사였고 박정희 자신 브리핑을 받다가 눈이고 코고 가리지 않고 들어가는 모래 때문에 재채기를 하지 않고는 못배겼다고 하니 말 다하지 않았겠는가. 어느 날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그답지 않은 불안한 어투로 물었다고 한다.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 되기는 되는 기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천하의 박태준도 그날 위경련을 일으킬만큼 신경이 곤두섰다고 한다. 그렇게 상황은 열악했고 조건은 험난했다.

그 이후 잘 알려진 박태준의 성공시대를 일일이 적을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의 포스코의 위용과 허허벌판의 영일만을 비교해 볼 때 그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움직임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할 것이다.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포철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폭넓은 공감을 얻는다. 중국의 등소평이 일본의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했을 때 이나야마의 간단한 답변은 유명하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소?”

물론 그 성공시대의 이면에는 지휘봉이 부러져라 안전모를 내리치고 툭하면 조인트를 까고 다니고 공기 단축을 위해 살인적인 밤샘 작업을 불사하던 ‘사무라이’같은 박태준의 모습도 존재한다. 그조차 포항제철 건설현장에서 들이마신 모래와 석면 때문에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을진대, 포항제철 공사 현장에서 일했던 그 수많은 노동자들은 어떠했을까도 마땅히 고민해 볼 문제다. 이순신이 추앙을 받지만 그 빛나는 승리는 손바닥에 피 흘려 가며 노 저은 이들과 목숨 걸고 활시위 당기고 포 쏜 수군들의 노력으로 빚어진 것이듯이, 박태준 개인에게 포철의 신화의 영광이 드리우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용감한 수군이 있고 아무리 성실한 노잡이가 있었더라도 결국 전투를 지휘하는 이순신이 없었을 때 조선 수군은 물에 뜬 나무판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나는 1970년 4월 1일 그야말로 ‘사즉생, 생즉사’의 마음으로 영일만에 섰던 박태준의 앙다문 입술에 경의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큰 역사를 이루고도 그가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한 것은 별로 없었다. 자신의 주군 박정희에 대해 충성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박정희를 무조건 옹호하지도 않았고, 한겨레 신문 창간 때는 "그런 목소리도 있어야 한다"면서 거액을지원해 주었다고도 한다.


흔히들 아주 용렬하고 무식한 나눔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분류하기도 한다. 그 두 집단 속에 섞여 있는 아주 많은 짜가들과 탐욕들을 걸러내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 과문의 탓이겠지만 박태준은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그보다는 수렴해야 할 것이 더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었는가 하는 판단을 한다. 1970년 4월 1일 그는 허허벌판의 영일만에 서 있었다.



tag :

1930.4.2 최초의 조인의 추락

$
0
0
산하의 오역

1930년 4월2일 최초의 조인(鳥人)의 추락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오른 것이 1903년이었다고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세계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극동의 한 나라에 비행기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꼭 10년 뒤인 1913년이었다. 일본 해군 중위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였다. 그런데 그 날짜 선택이 매우 고약하다. 1913년 8월... 29일이었다. 즉 경술국치 3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의 하늘을 날아올랐던 것이다. “조선놈들아. 니들이 비행기를 알아?”라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래봐야 수십 초 정도 밖에 체공하지 못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입을 벌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일본놈들 역시 대단한데.”

1차대전을 겪으며 비행기와 비행 기술 모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가운데 비행기를 타고 곡예비행쇼를 펼침으로써, 돈도 벌고 세계일주 여행도 하던 비행사들이 있었다. 아트 스미스라는 미국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17년 한국에 왔는데, 그가 보여 준 비행은 4년 전 나라하라가 낑낑대며 떠올라 1분도 못 버티고 화급하게 내려왔던 ‘비행의 추억’을 그야말로 어린애 걸음마로 만들어 버렸다. 떨어질 듯 다시 떠오르고 뒤집었다 엎었다를 자유자재로 하는 스미스의 비행기를 찬탄 속에 지켜보던 군중들 가운데 우리 나이로 열 일곱살인 휘문고보 학생 하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되고야 말겠다.” 그의 이름은 안창남이라고 했다.

그는 학교까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20년 봄에 오구리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한다. 그런데 그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비행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최초의 비행사 자격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거리 비행(도쿄-마쓰에), 2천 미터 상공에서 한 시간 머물기, 5백 미터 상공에서부터 엔진을 끄고 활공으로 착륙하는 세 가지 어려운 시험에서 안창남은 수석이자 유일한 조선인으로 합격한다.

조선인이 허다한 일본인들을 제치고 일본 최고의 비행사가 되어 있다는 뉴스는 조선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사이클 경주 때마다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엄복동과 더불어 안창남은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한다. “조선 사람의 재주가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뛰어나고 조선 민족의 문명이 세계 어떠한 민족보다 앞섰던 것은 광휘있는 우리의 과거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라. 다만 일시의 쇠운으로 한참동안 쇠퇴한 일이 있었으나 원래 탁월한 선조의 피를 받은 조선인은 이제 모든 구속의 멍에를 벗고 세계 민중이 다투는 무대 위에서 장쾌한 그의 재주를 발휘코자하는 중이다.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인 비행기에 대하여 우리 조선 사람으로 첫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당년 20세의 청년으로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안창남군이라”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안창남 또한 “ 한번 반가운 고국의 공중에 날아 보고저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지난 여름부터 여러 차례 본사에 향하여 직접과 간접으로 주선하여주기를 간청하였음으로” 동아일보는 안창남군 고국방문비행위원회를 결성하고, 비행기 구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인다. 안창남은 마침내 1922년 12월 5만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에서 ‘금강호’가 떠오른다. 동포들의 돈으로 마련된 비행기에는 조선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많이 불어 비행을 미루자는 말도 나왔다. (후에 밝혀진 일이거니와 ‘금강호’는 날씨가 추우면 제 기능을 발휘 못하는 비행기였다. ) 그때 안창남은 고집한다. 경성 인구 1/6이 지금 여기 몰려들었는데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실제로 안창남 본인도 최초로 고국의 하늘을 난다는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 언제나 언제나 내 고국에 돌아가 내 곳의 하늘을 날아볼고’하여 고국 그리운 정에 혼자서 눈물을 지우며 지냈습니다. 참으로 동경이나 대판같은 크나큰 시가가 내 발 밑에 아름아름 내려다 보일때 나는 몇 번이나 비행기 머리를 서편으로 돌리고 조선쪽을 바라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의도에서 발표한 안창남의 성명)

그는 일본에서도 유능한 조종사였고 훌륭한 비행술 교관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죽을 뻔한 일을 겪긴 했으나 그건 운이 나빴다고 치고, 일본에서 비행 학교 교육자로서, 조종사로서의 전도는 양양한 것이었다. 일본 최초의 조종사 면허 합격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는 끝내 망명을 택한다. 그 이유는 그의 비행 소감의 일단에서 엿볼 수 있다.

“경성의 하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최초로 조선의 하늘에 떠오른 비행사는 아름다운 고국의 풍광에 감탄하면서도 그 고국에 드리운 식민의 그림자를 명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대문 감옥의 형제’들이 절도나 강간범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 않았겠는가.

그는 보장된 미래를 떨치고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여운형의 소개로 군벌 염석산 아래서 중국인과 한국인 비행사를 키워내는 교관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에 비행기 사고로 숨지고 만다. 1930년 4월 2일 나이 서른의 꽃다운 죽음이었다. 그는 여의도에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 비행학교에도 우리 곳(조선) 청년이 세 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 외에도 배우게 해 달라는 청년이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든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디까지든 내 힘껏 가르쳐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용이히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넓디나 넓은 비행장 한귀퉁이에서 내 손목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몇번이나 따라 울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 추락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생명에 대하 미련과 아울러 “더 가르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 슬프고도 아까운 죽음이 있던 날로부터 90여년이 지난 오늘 아침 나는 부산에서 출마했다는 한 전직 주사파랍시는 한 국회의원 후보의 망발을 들었다. “30년대 후반의 우리 조상들은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930년 부귀영화 떨치고 고국을 위해 뭔가 하려다 죽어간 안창남에게 이 국회의원 후보는 “10년 뒤에는 다 바뀐다니까요. 그때 비행기 보고 환성지르던 어린애들 다 일본을 조국으로 생각하게 돼요.”라고 설복할 자신이 있을까.



tag :

용서할 것 용서할 수 없는 것

$
0
0

 용서할 것 용서할 수 없는 것 



 생애 최악의 감기에 콜록거리는 중 누군가 내 이름을 들먹이며 중얼거리는 걸 듣고 화들짝 놀랐다. “아무개 넌 끝났어.” 아무리 장기간 기침을 해 댔기로서니 그렇게 심한 말을! 수분연히 일어나는데 알고 보니 동료가 든 이름은 ‘김용민’이었다. 나는 목사의 손자고 그쪽은 목사 아들이고, 나보다 두 배는 돼지 같긴 하지만 외양도 대충 비슷하고, 이름까지 유사하니 이거 참 동지의식이라 할지 애매한 감정이 스멀거리고 돋아났다.


 ‘목사 아들 돼지’ 김용민이 감옥에 간 정봉주의 대타로 느닷없이 ‘국회의원 후보’가 됐을 때 나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 딴지일보 총수께서 평가하신 바에 따르면 ‘천재적 편집’으로 나꼼수라는 상품을 띄웠던 PD이며, 실제 나꼼수의 F4로서 활약한 것은 분명하지만 김용민 ‘의원’이란 아직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한 일이라곤 공중파 프로그램몇 개 MC밖에 없는 이도 버젓이 국회의원 뱃지 달고 거들먹거리는 나라가 대한민국인데 말이다. 그에 비하면 자격이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창 박빙의 승부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던 그가. 갑자기 “끝났다”는 탄식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다름아닌 그의 막말 때문이었다. 8년 전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그가 내뱉었던 정도 이하의 막말들이 칼춤을 추면서 그에게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악명 높은 미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참상들과 미군의 만행을 보고 그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선을 넘어도 많이 넘었고, 심해도 보통 이상으로 심했다.



 트윗에서 어떤 분께 그런 비유는 드는 것이 아니라는 훈계를 듣고 찔끔했으나, 그를 무릅쓰고 막말의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참상에 아무리 분노한다 하더라도, 그 의분에 차서 “일본 왕세자비를 납치해서 윤간을 하고, 명동 거리 다니는 일본 여자들 유영철 같은 거 풀어서 확 어떻게 하자.”고 얘기하는 이가 있다면 사람들은 측은한 눈길로 그를 쳐다볼 것이다. 인권을 짓밟은 이들이라고 해서 그들과 같은 방식의 복수를 운운하는 것은 또 하나의 인권 침해이고, 되레 자신이 편든답시는 피해자에게도 폐가 되는 일이다. 동시에 자신도 똑같은 괴물이 되는 행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는 관대하기로 했다. 8년 전 그 혈기가 더욱 왕성할 때, 그저 찧고 까부는 인터넷 방송에서 쏟아부었던 생각 없는 말들인데다가 그가 우리의 복사왕 문대성처럼 우렁찬 거짓말로 국민들의 뺨을 돌려차대지 않고 정중하게 자신의 생각 없었음을 사과한 덕이고, 정말로 그가 그 문제점을 인식하고 적어도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을 한 번 더 생각하고자 했다면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보았다. 막말로 왕년에 막말 안해 본 사람은 없지 않은가. 무방비 상태의 노동자 때려잡는 경찰들을 “찢어죽이고 싶던” 사람은 한둘이 아니고,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고 노래한 이도 서너 명이 아닐진대. 그 막말에 일일이 책임을 지우다가는 대한민국 국회는 유령의 집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관대한 나를 매우 편협하게 만드는 분들이 계시다. 다름아닌 김용민의 일부 지지자들이다. 이 사안에서 가장 명백한 것은 김용민이 잘못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대함을 발휘하는 쪽을 택하기는 했으되, 그의 인권적 감수성을 문제 삼아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전혀 무리한 의견이 아니다. 김용민은 그 요구에 더욱 허리를 굽혀야 하고, 정말 잘못되었다, 젊은 날의 무람함이었으니 뼈 속 깊이 각인하고, 다시는 그런 망발을 일삼지 않을 것인즉, 기회를 달라고 호소해야 정답인 것이다. 그런데 김용민의 일부 지지자들은 정확하게 그 대척점을 향해 돌진한다.

 

그들이 첫 번째 증명하고자 한 것은 미국이 얼마나 나쁘고, 미군들이 얼마나 사악한 행동을 했느냐는 점이었다. 그 덕에 오랫 동안 잊고 살던 끔찍한 풍경들을 여러 컷 다시 보게 됐다. 그들의 뜻은 이렇게 나쁜 놈들이었으니 김용민이 한 막말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건 바빌로니아 시대 함무라비 왕이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일 뿐이다. 미국이 저지른 범죄는 그 사악함의 정도가 아니라 인간 일반에 대한 무례와 폭력이라는 지점에서 단죄되고 규정되는 것이다. 저쪽이 저렇게 사악했으니 우리가 이 정도 한 걸 용납하라는 요구는 정수리 사이에 솟은 악마의 뿔이 우리는 저쪽보다 훨씬 짧다고 자랑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김용민의 지지자들은 “저들이 이렇게 나빴으니 김용민의 잘못을 용서하라.”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여러 발 더 나아간다. “미군의 만행이 담긴 이 사진들을 보고 김용민처럼 욕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트윗에서는 내 눈을 의심했거니와, 김용민의 행동이 무엇이 문제냐는 식의 논리가 무성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용민이 나꼼수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일깨웠는데, 겨우 이런 문제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는 적반하장이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것이다. 아울러 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입진보 또는 순결주의자, 심지어 ‘조중동의 프레임에 걸린 자’로 몰아붙이는 얼치기 종교재판관이 납신 것이다.



 그들이 즐겨 인용한 경구 중의 하나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것이다. “그만큼 우리를 위해 싸워 줬으면 비 올 때 같이 맞아줘도 되잖아.” 일단 김용민이 나꼼수 이외에 얼마만큼 우리를 위해 싸워 줬는지는 차치하자. 그건 생각 따라 인도의 카스트처럼 천차만별일 테니까. 하지만 우리를 위해 싸워 준(?) 공덕이 있는 이와 비는 함께 맞아줘도 좋겠지만, 비를 같이 맞는다는 것은 그의 과오와 오류를 인정하고 그 재발을 방지하는 약속이자 다짐으로써 이뤄지는 일이지, 그의 잘못을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변호하거나 그 잘못을 지적하는 의견에 욕설을 퍼붓는 행위가 아니다. 단언컨대 그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홍수난 집에서 함께 물을 엎지르는 행위다.



 물론 국회의원 한 석 중요하다. 더구나 참 쳐다보기도 싫은 저 쉰내나는 극우 정당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금덩이만큼이나 소중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한 석을 위해서 우리가 못내 지켜야 할, 버리지 말아야 할, 그리고 추구해야 할 인간의 존엄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훼손된다면 그건 다이아몬드 광산을 폭파시키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대상이 라이스라고 해서 유영철같은 걸 시켜서 강간한 뒤에 어쩌고 하는 막말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어기는 일이다. “너희들은 훨씬 심했어! 우린 양반이라고!”라고 대거리하고 싶겠지만 조금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건 빨갱이들의 심장에 죽창을 박던 우익들이 뇌까리던 소리였다. “북한이 저렇게 지독하니까 우리도 이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설교하던 꼴통 윤리 교사의 망발이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상대성 원리(?)를 극복하는 과정이었지 않은가.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인간의 권리와 존엄, 그것을 무시하는 언어와 행동에 대하여 반대하고 그 범위 안에서 서로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며, 나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노정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김용민이라는 국회의원 후보 때문에 그 원칙이 흔들리고 “김용민 사퇴하라는 것들은 다 친미파!”라는 식의 딱지가 난무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김용민을 찍어야 하며, 왜 새누리를 반대해야 하며, 왜 정권교체를 이뤄야 하는가. 도대체 뭘 위해서? 



 거듭 말하지만 나는 김용민이 사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8년 전의 막말에 대해 뼈저린 책임을 지고, 그의 표현대로 평생의 짐으로 가져갈 일이다. 그리고 “비 좀 같이 맞아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섣부른 어깨동무를 걸기보다는 자신의 막말에 담겼던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무시를 쓸개 삼아 핥으면서, 그 막말이 가져왔던 파장과 아픔을 가시섶 삼아 그 위에 올라 지역 구민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자신을 사랑해요 외치는 지지자들에게 자신은 분명 잘못했으며 그 죄를 사퇴가 아니라 국회의원으로서 갚음할 기회를 구할 것임을 천명하고, 사퇴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겸허하게 고개 숙인다고 선언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쯤은 되어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진보’편의 국회의원이 되지 않겠는가.



tag :

1997.4.3 이태원 살인 사건

$
0
0
산하의 오역

1997년 4월 3일 이태원 살인 사건

1997년 4월 3일 밤 10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는 버거킹 1층 남자화장실. 뭔가를 본 남자 손님이 구역질을 하면서 화장실을 튀어나왔고, 이윽고 한 젊은 여자가 달려들어갔다가 바로 다시 나온 뒤 울부짖는다 “구급차 좀 불러 주세요.” 화장실에는 한 대학생이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죽어 있었다. 살해범은 잔인했다.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깊게 팬 상처는 아홉 개. 뒤에서 목을 세 번 찔렀고 피해자가 돌아보자 심장을 두 번, 쓰러진 뒤엔 다시 목을 네 번 씩이나 찔렀다.

범행 현장에 있던 혼혈 미국인 아서 패터슨과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패터슨은 미8군 기지로 들어가 피가 묻은 옷을 불에 태우고 범행에 사용한 칼을 버렸으나, 다음날 익명의 제보를 받은 범죄 수사대(CID) 요원에게 체포된다. 에드워드 리는 아버지의 추궁을 받고 범죄를 시인, 변호사와 함께 검찰에 자수한다.

4월 6일 미국 출장을 다녀온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패터슨이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자 에드워드를 추궁했고, 에드워드가 범죄를 시인하자 변호사를 만난 후 4월 8일 검찰에 자수한다. 하지만 패터슨과 에드워드는 서로 상대방이 피해자를 살인했고 자신은 옆에 있기만 했다며 범행을 부인했고, 결국 당시 수사기관은 두 명 모두 처벌하지 못한다. 검찰은 젊은 남자가 저항은 커녕 반항흔조차 남기지 못하고 칼에 아홉 차례나 찔렸다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완력이 우세하기 때문이라고 봤고, 단신의 페터슨보다는 거구의 에드워드에 더 혐의점을 둔다. 거짓말탐지기 결과도 에드워드에게 불리했다. 1심 판결은 에드워드에게 무기징역, 2심은 20년을 선고하지만 대법원에서 이 판결이 뒤집힌다. 증거불충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2년만에 에드워드는 무죄로 풀려난다. 증거 인멸 및 불법무기 소지 정도로 형을 살았던 페터슨은 출국 금지가 당국의 착오로 해제된 틈을 타서 잽싸게 미국으로 튀어 버린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는 사건, 바로 ‘이태원 버거킹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가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지금 일본에서 한창 뜨고 있는 장근석이 맡은 역이 페터슨이다. 그리고 그의 재미교포 친구가 에드워드였다. 이 영화는 당시에도 큰 파장을 낳았지만 그 이후로도 이미 가라앉은 듯 보였던 사건들을 수면으로 부상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결국 범인을 밝혀 내지도, 제대로 처벌하지도 못했던 한국 사법 당국에 대한 질타와 더불어,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열망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2009년 12월 29일 검찰도 미국에 범죄인 인도 신청을 한다.

2009년 2년간의 재판 후 무죄를 선고받고 미국으로 갔던 에드워드 리가 다시 귀국한다. 그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며, 그를 위해 재수사에 협조하겠다고 밝힌다. 패터슨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이유는 당시 페터슨이 성년이었기에 사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 미성년자인 자신에게 책임을 미룬 것이라고 얘기했다. 2011년 5월 한국 검찰은 페터슨이 미국 현지에서 폭행 혐의로 구속된 것을 파악하고 범죄인 인도를 대비한 보완 수사에 착수한다. 수사 결과는 페터슨이 범인이라는 것.

범행 당시 반항조차 못하고 칼에 찔렸다는 이유로 거구의 에드워드가 범인으로 지목됐지만 그때 피해자가 배낭을 메고 있었다는 것이 간과된 결과였다. 배낭을 낚아챌 경우 키가 작은 페터슨이라 하더라도 피해자가 꼼짝못하는 상황에서 칼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피 몇 방울 밖에 튀지 않았지만 페터슨의 옷은 피를 뒤집어썼다는 점, 주변 인물의 증언도 확보했다. 검찰은 또 페터슨에게 칼을 건넨 것은 에드워드였으며 살인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주변에서 동향을 살피는 등 적극 가담했음도 밝혔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기소할 수 없었고 작년 12월 22일 검찰은 페터슨을 살인혐의로 기소한다. 공소시효를 넉 달 앞둔 상황이었지만 검찰은 모처럼 쓸만한 생각을 해 낸다.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모면할 목적으로 해외로 도피하면 출국 시점부터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조항을 근거로 올해 4월 2일로 끝나는 공소시효를 연장시킨 것이다.

미국 법정은 작년의 발표에서 2012년 4월 4일, 그러니까 사건이 발생한지 15년하고도 1일을 더한 날, 페터슨 한국 송환 공판 기일을 확정했다고 했다. 아마 이것이 연기되지 않았다면 가부간에 결판이 날 것이다. 페터슨은 “처벌을 모면할 목적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라 미국인이 미국으로 간 것 뿐”이라며 공소시효 만료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미 미국 법원이 “보석도 가석방도 안되는” 중범죄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상 송환 가능성도 작지 않다. 아들의 갑작스럽고 황망한 죽음으로 죽음 이상의 고통을 당해 왔던 가족들에게 올해 4월 2일은 4월 3일 아들의 기일만큼이나 끔찍할 수 있는 해였다. 살인의 공소 시효가 15년이니 그 날이 지난다면 페터슨이 혀를 빼물고 내가 죽였다고 놀려도 처벌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15년 전 죽어간 한 대학생의 원혼은 여전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이제는 그 진상을 밝히고 죄인을 처벌하여 15년간 피를 토해 왔을 젊은이의 원혼을 위로하게 될 것인가.

tag :

1199.4.6 사자왕 리처드의 최후

$
0
0
산하의 오역

1199년 4월 6일 사자왕의 최후

영국 왕 헨리 2세는 꽤 영걸이었다. 잉글랜드 플란타지네트 왕조의 첫 왕으로서 프랑스에도 프랑스 왕 부럽지 않은 영토를 확보한 (사실 그는 프랑스 인이라 해야 옳고 프랑스어를 말했지만) 군주였다. 하지만 자식복만큼은 꽝이었다. 장남 헨리(이름이 같은)는 아버지에게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지만 이때 다른 자식들도 그 형 편을 들어 아버지의 수염을 뽑으려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헨리 2세는 막내 존만큼은 아끼고 사랑했는데 왕위가 존에게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둘째 리처드가 아버지의 철천지 라이벌 프랑스 왕 필립 2세와 손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도 열받아 죽을 지경인데 그토록 사랑하던 존이 형 리처드한테 붙었다는 소식까지 들리자 헨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리처드가 바로 유명한 사자왕 리처드다. 그 숱한 무용담과 전설의 주인공으로서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 사자왕 리처드 1세인 것이다. 유달리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의 전형적인 무장인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189년, 그런데 바로 그 다음 해에 그는 머나먼 곳으로 원정을 떠난다. 십자군에 참여한 것이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래 100여년간 지탱해 오던 기독교도들의 거점이 아랍의 영웅 살라딘에 의해 허물어져갔고, 마침내 예루살렘도 이슬람의 손에 되돌아간 시점이었다. “성지탈환!”을 외쳤지만 리처드가 원했던 것은 전쟁인지도 모른다.

이 십자군 전쟁에서 아랍의 쿠르드 족 영웅 살라딘과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중세 기사도의 전설을 창조하며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리처드가 말을 잃고 싸우는 것을 본 살라딘은 왕의 품위를 지켜 준다는 뜻으로 말을 보내기도 했고, 리처드가 고열로 고생할 때에는 과일과 얼음을 가져다 주는 호의를 베풀기도 한다. 멧돼지같은 리처드도 살라딘에게 존경의 념을 품게 된다.

일진일퇴를 반복했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고 살라딘과 평화 협상을 맺는다. 이슬람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되 기독교 순례자들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협상의 골자였다. 살라딘은 “두 백성의 기쁨은 신만이 아실 것”이라고 이 협상을 기뻐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했다. 이 십자군 원정을 위해서 “런던도 팔아치울 기세”로 전비를 마련했던 그는 별반 전리품도 없이 귀향선을 타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자왕 아닌가.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전한다. “3년이다. 3년의 휴전 후에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되찾고 말 것이다.” 그러자 살라딘은 답을 보낸다. “내가 예루살렘을 잃는다면 당신에게 잃을 것이다.”

폼나긴 하지만 얻은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원정을 끝내고 오는 리처드의 길은 험난했다. 일찍이 자신이 “어딜 공작의 깃발이 국왕의 깃발과 나란히 하는고?”라고 부르짖으면서 그 깃발을 진흙탕에 처박은 바 있던 바로 그 백작, 레오폴드에게 사로잡혀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포로가 되어 감옥에 처박혔다.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난 그는 반역을 꾀한 동생 존을 무릎 꿇렸고 이어서 또 프랑스 왕과 전투를 치르다가 허무하게 가슴에 화살이 꿰뚫려 죽고 만다. 1199년 4월 6일이었다.

그런데 사실 리처드는 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않았던 영국 왕이었다. 그는 프랑스 땅에서 평생을 보냈고, “춥고 비오는” 영국 땅에는 딱 반 년 정도 머물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멋진 기사도를 발휘하기 위해 나간 전쟁의 모든 전비는 대개 영국인들의 몫이었고,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지불했던 몸값도 결국은 백성들의 피땀을 짜낸 돈이었다. 평생을 싸움박질만 했지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젬병이었던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였다. 그런데도 십자군 참전의 휘광, 그리고 살라딘과의 영웅담, 중세 기사도의 전설 등등으로 인해 리처드 1세는 영국 역사에서 사랑받는 왕으로 남아 있다. 영화 <로빈 훗>에서 막판에 카리스마 한칼로 등장하며, 오랫 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왕이 바로 리처드 1세이며, 영국인들은 무슬림들도 “사상 최고의 용사”라며 두려워했던 리처드 1세에 대해 애정을 쏟았다.

전혀 백성에게 이롭지 않았고 되레 실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으면서도 리처드1세는 영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용맹무쌍한 중세 기사의 대표로, 결국은 돌아와 간신배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회복하는 왕으로 남아 있다.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서 쌓아올려진 이미지 덕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멍청했고 결국 영국 왕실이 그 이름을 쓰는 것을 영원히 포기한 실지왕(失地王) 동생 존과 상대적으로 비교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루같은 이미지, 그리고 상대적으로 낫다는 비교우위 속에서 영어는 거의 쓰지도 않았을 영국 왕이자 프랑스의 귀족 리처드는 그 실정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위대한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런데 적고 보니 이상하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1994.4.7 르완다 대학살의 시작

$
0
0

산하의 오역

1994년 4월 7일 르완다 대학살의 시작

아프리카 중부에 자리잡은 르완다와 부룬디 일대에는 여러 부족이 어울려 살았다. 인구의 80퍼센트를 넘는 후투족과 15퍼센트 정도의 투치, 그리고 산악지대의 트와 족과 키 작은 종족으로 유명한 피그미까지. 이 중 투치족은 이디오피아 쪽에서 남하한 용맹한 집단으로서 르완다 왕국을 형성하여 나머지 부족들을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에 특별한 경계...가 존재하지는 않았고 같은 말을 쓰고 같이 소 치고 농사지으면서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전 아프리카를 토막낸 제국주의 시대는 르완다에도 닥쳐 왔다. 르완다와 브룬디는 제국주의의 막차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차대전 때 독일이 패망한 뒤로는 벨기에의 손에 넘어갔다. 자국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에게 오줌을 눴다는 오줌싸개 소년의 동상이 상징하듯, 유럽에서는 툭하면 짓밟히고 줘 터지는 작은 나라였지만 벨기에는 오늘날의 콩고 일대 등 자국의 수십 배 넓이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르완다는 그 일부였다.

지배자들의 동서고금에 걸친 금언대로 벨기에인들은 “분할시켜 통치한다.” (Devide an Rule)의 원칙을 철저하게 실천한다. 그때껏 별 구별 없이 살아가던 투치와 후투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벨기에였다. 후투와 투치의 존재 자체가 이 벨기에의 차별 정책의 산물이라는 학자도 있다. 벨기에 정부는 신분증에 후투와 투치를 명기하도록 했고 그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소수 투치족을 우대하고 그들의 손을 빌려 다수인 후투족을 지배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2차대전 뒤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이 오면서 르완다에도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는데 그를 주도한 것이 투치족이었다. 그러자 벨기에는 안면을 바꿔 후투족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후투족은 지금껏 자신들 위에 올라타 있던 투치족에게 칼을 간다. 1959년 후투족은 투치족을 공격했고 투치족들을 몰아내고 1962년 후투족 주도하의 독립이 선포된다.

다수인 후투족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들은 또 역으로 투치족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후투족은 투치족보다 우월한 종족이며, 후투족은 투치족과 결혼해서도, 투치족을 고용해서도, 투치족을 동정해서도 안된다는 등의 ‘후투 10계명’은 그 황당한 역차별의 일단을 증거한다. 하지만 투치족도 만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웃나라로 도망간 투치족들은 저항 조직을 결성하여 1990년 회심의 반격을 가하지만 프랑스와 벨기에가 자국 교민 보호를 이유로 개입하여 ‘일단 멈춤’ 상태에 들어가고 1993년 UN의 개입으로 해외 저항 조직을 포함한 투치족의 국내 복귀를 조건으로 한 평화 협약이 체결된다. 불안한 균형.

외줄 위의 광대같은 균형이 쨍 소리를 내면서 깨진 것은 1994년 4월 6일이었다. 르완다의 후투족 대통령 하비아리마나와 이웃나라 부룬디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누군가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떨어지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후투족은 이를 투치족의 소행으로 몰아부쳤지만 후일 이 비행기의 프랑스 승무원들의 유족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투치족과의 권력 분점을 반대하는 쪽에서 비행기를 격추했다는 판결이 나왔다.
어쨌건 두 나라의 대통령이 몰살된 그 다음 날, 1994년 4월 7일 후투족은 투치족을 향한 무시무시한 인간사냥의 칼을 치켜든다. 후투족 민병대는 수도 키갈리 곳곳을 차단하고 후투족 색출에 나섰고, 라디오에서는 “투치 바퀴벌레들을 죽여라.”는 선동을 주문처럼 반복해서 읊어댔다. 순박한 농부, 친절한 교사, 엄숙한 목사들이 인간백정이 되어 칼을 휘둘렀고 마치 이삭 자르듯 이웃이었던 이들의 목을 잘라 나갔다. 공포에 질린 투치족의 일부가 후투족 기독교 목사에게 온갖 예를 다해 구원의 편지를 보냈을 때 그들이 받은 답신은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신은 당신들을 부인한다.” 르완다의 한 ‘목사’는 후일 5천명을 살해한 죄로 체포되기도 한다. 필립 고레비치라는 이가 쓴 <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라는,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소름끼치는 재구성을 보면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하루에 약 만 명씩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것도 독가스같은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라 칼과 낫, 몽둥이에 의해서. 정확한 희생자 수는 하느님도 모를 것이다.

원래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이들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 또 그들이 점유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지분에 따라 ‘근본부터 다른’ 적대하고 배타해야 할 누군가로 규정되고 규정받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비극의 최대치를 르완다는 보여 주었다. 아프리카 토인들이 미개해서 그렇다고 혀를 찰 일은 전혀 아니다. 불과 60년 전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 양측은 각 정부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싹쓸이하는 데에 수완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행정력을 동원한 학살은 남한 정부가 먼저 시작했다. 남한 정부 스스로 갱생의 길을 열어주겠다고 조직한 보도연맹원들과 좌익사범들을 싸그리 죽여 버리라는 명령이 전쟁 초기의 정신없는 후퇴 과정에서도 매우 충실히 진행됐던 것이다. 그 시절 르완다의 농민들에게 아득한 나라 코리아에서 벌어진 소식이 전해졌다면 그들은 “그 황인종들은 사람도 아닌가보다.”라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요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이런 저런 오가는 말들을 듣노라면 기실 불안해진다. 전통적이고 유구한 좌우 또는 진보와 보수의 구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이슈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모세가 바다 가르듯 정연하게 갈라서고, 그 양쪽에 대한 적대심의 불길이 들불처럼 번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떠한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 증오감이 무슨 형태로 발현될 것인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더구나 르완다에 필적하는 대학살이 벌어졌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니게 되는 불안감은 화들짝 일상의 잠을 깨우기도 한다. 특히 르완다의 대학살이 시작이었던 오늘같은 날에는.

위에 언급한 책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후투족 민병대가 어느 여학교에 난입, 후투족 따로 투치족 따로 모일 것을 요구한다. 물론 바퀴벌레 투치들을 강간한 뒤 죽여 버릴 심산. 그 살기등등한 마체테 (정글용 칼) 앞에서 여학생들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르완다인일 뿐이에요.” 그리고 총질과 매질로 그 중 많은 이가 목숨을 잃는다. 후투와 투치 포함하여. 그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사람에게서 희망을 얻기도 한다.





tag :

부산은 호구다?

$
0
0

 보따리 둘러메고 서울 온 것도 거지반 25년이고, 부산 살았던 시간보다 서울살이가 길어진 것도 꽤 오래 전입니다. 그래도 혀에 밴 부산 말투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 30년을 가든 40년을 가든 저는 롯데 자이안츠 팬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삽질을 하고 개발로 축구하는 거 같고, 집게발로 농구하는 거 같아도, 8888577을 몇 년을 해도 죽어도 롯데 살아도 롯데지요.

 롯데가 처음으로 우승하던 게 1984년이었지요? 지금은 하늘나라 간 최동원이 혼자서 4승 다 따오고 유두열이 쓰리런홈런 빵 쳐서 삼성 사자 눈두덩을 시퍼렇게 그쪽 유니폼 색깔로 만들어 놨지 않겠습니까. 근데 그 다음 해 2월에 부산은 또 한 번 전국을 들었나 놨다 했던 거 기억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1985년 2.12 총선이라꼬.


 85년 초봄, 고삐리 올라가는 나이였는데 동네 학교에서 열린 합동유세장 갔다가 와 이거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광주 학살부터 시작해서 전두환이 무슨 짓을 했던가, 외채는 얼마고, 전두환 처삼촌이 누구고 등등 전에는 감히 돌지 못하던 얘기들이 유세장에 아주 만개를 하는데 무서워가지고 말이죠. 선거 결과는 대박이었지요. 물론 여당인 민정당이 1당을 했지만도 창당한지 얼마 안되는 신한민주당이 50석인가 먹으면서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겁니다.



 그 중에서도 부산은 화려했습니다. 그때는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았는데, 제가 살던 부산진구에서는 아 글쎄 민정당 현역의원이 2등도 못하고 똑 떨어졌고요, 부산 중,동,영도에서도 민정당 후보가 야당표가 갈리는 와중에서도 2등 턱걸이 못하고 영도 앞바다에 고마 빠져 버렸지요. 부산 선거구가 여섯 개인가 그랬는데, 그 중에 딱 한 군데만 여당이 1등으로 붙었지 다른 데는 전부 야당이 1등이었지요. 그런 곳은 전국에 부산 뿐이었습니다. (마산도 하나 있었던가) 서울도 2등으로는 거의 민정당을 붙여 줬었거든요. 그때 돌던 말이 있습니다. “서울에는 서울 사람이 살고, 부산에는 부산 양반이 산다.” 그 시절 부산은 가히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최동원같은 존재였습니다.


 영화 <퍼펙트 게임> 보셨나요? “이기던 지던 최동원이 게임은 최동원이 끝냅니더 왜 최동원이니까!” 하고 일갈하던 그 포스로 부산은 전국에 호령을 했습니더.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부산이 끝낸다. 와? 부산이니까!” 그 시절 살던 부산 사람들은 아마 다음의 경구를 아스라한 전설로 기억할 겁니다. “부산하고 마산이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 멀리는 3.15 마산 의거부터 부마항쟁을 거쳐서 위에 말한 85년 2.12를 지나서 87년 6월까지. 부산은 정국을 좌우하는 도시였고, 그만큼 활력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였지요. 87년 6월에 서면에서 초량 KBS까지 대로를 장악하고 몇날 밤을 새워가며 데모해서 전두환을 기절초풍하게 했던 장면은 부산 현대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87년 6월이 롯데 자이안츠의 92년 같습니더. 야구 명문의 절정이자 하강의 시작. 그리고 민주화의 상징 도시로도 동일한.



 롯데 자이안츠는 그 팬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단이라고 말들 합니다. 팬들은 그렇게 충성을 다하고 일편단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롯데 자이안츠 파이팅을 외치는데, 서울 사는 나도 롯데가 4등이라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이놈의 롯데 구단은 대관절 어땠던가요. 선수들 단물 빼묵고 버리는 거는 1등, 구단 눈에 거슬리면 스타건 뭐건 방출, 선수들 연봉하고 팬 서비스가 소태처럼 짠 것은 8개 구단 중 으뜸에다가 팬들의 호소와 여망에는 마이동풍. 꼴찌를 하든 5등을 하든 별 관심이 없어 뵈고, 아무리 그런들 부산 시민들은 롯데 팬일 수밖에 없으니, 불만 있으면 야구장 오지 말라는 투의 배짱. 어디 말할 게 하나 둘이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보기에 부산에는 그런 존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예 새누리당입니다. YS가 호랑이 잡으려고 들어갔다가 자기가 호랑이가 되어버린 호랑이굴 민자당이었고, 신한국당이었고, 한나라당이었고, 이번에 새누리당이 된 그 정당을, 90년 이후 부산 시민 여러분은 롯데 자이안츠모냥 엉성시럽게 응원해 왔지요. 충성을 다했지요. 개죽을 쑤건 피죽을 쑤건 미워도 너밖에 없다고 매달렸지요. 노무현 같은 사람이 나와도 사정없이 떨어뜨렸지요. 부산 북구에 노무현 유세하는데 얼라들하고 개새끼 몇 마리 앞에서 연설하던 모습 지금도 선연합니다. 언젠가 사직구장에 촬영 갔을 때 롯데 상대로 안타치는 마해영이보고 배신자라고 욕하던 (누가 누굴 배신했는데?) 꼬라지처럼 정말 바보스러울만큼 충성을 다했었지요.



 20년이 넘도록 새누리당에 충성을 다한 부산 시민 여러분. 한 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지금 부산이 어떻게 변했는가. 대한민국 제2의 도시가 어떻게 됐으며, 한때 부산이 일어나면 대한민국 정국이 바뀐다 등등하던 그 기세는 어찌 쪼그라들었으며,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됐나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살율, 고령화율, 실업률은 단연코 1위, 은행대출금액 1위. 출산율, 고용률, 문화 활동기반 시설은 전국에서 꼴찌. 정몽주도 이렇게 일편단심하다가는 한 번쯤 내가 잘못된 거 아이가 한 번 고개를 돌아볼 것이고 춘향이도 아몽룡 이 자슥 사깃꾼 아이가 의심해 볼 겁니다. 강산도 두 번 변한 20년이면 한 번쯤은 여러분 충성의 대상에 대해 의심하고 추궁해 봐야 할 때가 된 거 아닙니까.



 이번에 새누리당이 부산에서 벌이는 일들을 보면서 저는 기함을 했습니다. 아무리 부산 시민들을 ‘잡아놓은 물고기’ 취급을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저런 카드들을 내밀고 고수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혀를 차다가 꼬일 지경이었지요. 적장이 와서 승부를 내자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데 어차피 버거운 상대이니 철모르는 어린 아이 내보내서 져도 아플 것 없고 이기면 천행이라는 심보로 내세운 손수조 후보가 그렇고, 표절을 넘어서서 복사학 학위를 딴 듯 보이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내 강의 한 번 들어보시라.”면서 부산 시민들 볼따구니를 돌려차기하고 있는 문대성 후보가 그러하고, “30년대 이후 우리 선조들은 자신의 조국을 일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 하태경 후보가 그렇습니다.


 새누리당은 손수조 후보를 내세우면서 문재인 후보를 이겨도 본전, 지면 패망이라는 궁지에 빠뜨렸다고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부산 시민 여러분의 자존심 또한 그 궁지에 몰린 셈입니다. 문재인이 이겨 봐야 그 선택의 의미는 폄하될 것이고, 손수조가 이긴다면 스물 일곱 살의 아무런 경력도 없고 신뢰도 가지 않는 젊은이를 오로지 새누리에 대한 팬심으로 뽑은 꼴통 도시민으로 떨어질 뿐이니까요. 문대성 후보나 하태경 후보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만약 수도권에서 출마했더라면 장담컨대 그들은 배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이 버티는 건 부산이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은 말뚝만 세워도 부산 시민들이 찍어 줄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겁니다. 즉 여러분을 바지 저고리로 보고 있는 겁니다. 꼴찌를 하든 삽질을 하든 사직구장을 찾아 찢어진 신문지 들고 목이 터져라 외칠 사람들은 올해도 올 거라고 오불관언하는 롯데 구단처럼 말입니다.


왜 그 장단에 여전히 놀아나십니까. 왜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코 베이십니까. 왜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왜 선거 때만 되면 바보가 되십니까. 85년 민정당 후보 떨어뜨리기로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야당 후보들에게 절묘하게 표를 나눠 주던 정치 의식이 왜 ‘못무도 (먹어도) 새누리’의 고장난 레코드에 갇히고, 부산이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던 호연지기는 왜 박근혜 공주 한 번 왔다 가면 헤벌레 하는 난쟁이의 순정으로 후퇴했습니까. 태종대 파도 소리 자장가 삼아 세계로 뻗어가는 꿈을 꾸다가 부화도 못한 낙동강 청둥오리 알이 되어 남해로 흘러가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로이스터 감독을 구단 멋대로 잘라 버리고 롯데 자이언츠가 계속 허우적거릴 때 부산 시민 여러분은 ‘무관중 경기라도 조직하자.’면서 그 무기력과 무성의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제 딱 그만큼이라도 행동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아도 속아도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면서 교활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그러고도 자신은 순정파이노라 착각하는 미련한 여인이 될 뿐입니다. 잃어도 잃어도 화수분처럼 돈 갖다 바치는 노름판의 호구가 될 뿐입니다. 저는 내 고향 사람들이 호구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tag :

1975.4.9 사법 사상 암흑의 날 그리고 박근혜

$
0
0
오늘 산하의 오역은 작년 꺼 수정으로 대체 

 

1975년 4월 9일 사법사상 암흑의 날

 

 인혁당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시선 집중을 받은 것은 두 차례에 걸쳐서였다. 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 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했다는 어마어마한 ‘인혁당’ 사건의 개요를 발표한 것이 그 첫 번째였다. 중앙정보부장까지 나서서 발표한 ‘대규모’는 총 57명이었다. 1개 소대급의 지하 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하려 한다는 대한민국 공안당국 특유의 허장성세의 전통은 이토록 유구하거니와, 이 사건 당시까지만 해도 기개가 살아 있었던 대한민국 검사들이 중앙정보부의 요구대로는 기소할 수 없다고 사표를 쓰고 나올 정도로 무리한 사건이었다.

 

 두 번째로 인혁당의 이름이 사람들의 귓전을 강타한 것은 을씨년스럽다 못해 살천스러운 동토의 유신 공화국이 콸콸 독기를 내뿜던 74년 4월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을 수사하던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재건위원회가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관련자 240명을 쓸어담았다. 그 가운데 최종 기소된 것은 38명이었고, 그 가운데 8명에게 대법원은 사형을 선고한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대법원장의 선고 목소리는 모기 소리보다 작았다 했다. 1975년 4월 8일이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어디에 폭탄을 터뜨린 것도 아닌데 사형이라니! 피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 모두가 공황에 빠졌다. 재판부는 판결에서 “피고인들의 이 법정에서의 전부 또는 일부 부합되는 각 진술 부분”을 근거로 모든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했지만 당최 검찰의 공소사실을 시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심과 2심, 3심에 이르도록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들은 면회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변호사도 기관원 입회 하에 만나야 했다. 형용할 수도 없고 상상도 어려운 분위기에서 사형이 확정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다음 날 기절도 모자랄 충격이 인혁당 피고인들과 가족들을 덮친다.

 

사형 판결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새벽 전격적으로 8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단행된 것이다. 사형 선고 다음 날, 그때껏 한 번도 성사되지 못한 면회라도 하려고 구치소를 찾은 가족들은 온몸이 부서질 듯한 비보에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고문의 흔적으로 뒤덮인 시신을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야만의 극치를 달리던 유신 정권은 시신조차 유족들에게 내 주지 않고 화장터로 직행시킨다.

 

 이 말도 안되는 비극을 가로막고 나선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을 기억하자.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문정현 신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1961년 영종도 성당 주임 신부를 맡음으로써 한국과 인연을 맺은 평범한 신부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야만적이라는 형용사도 부족한 유신 체제를 겪으며 한국 민주화 투쟁의 일선에 서게 된다.

"대사관 직원과 술을 먹는데 조만간 대규모 간첩 사건이 터질 것인데 얼마나 거짓말을 잘 꿰어맞추는지 보라고 하더군요. 이런 일을 지켜보아야 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는지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얼마 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발표를 하는데 나도 깜박 속을만큼 거짓말을 능란하게 하더군요. 그도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

 시노트 신부는 악다구니 칠 기력도 사라져 버린 가족들을 제치고 거칠게 항의하다가 마치 개처럼 경찰에 들려 나오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사형 선고를 들으며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는 그는 실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에 정말로 미쳐 버린 듯이 분노했다.

 

 사형 집행 뒤 화장터로 달리는 차 앞에서 실랑이하는 또 한 명의 신부가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악을 쓰고 절규하며 시신이라도 가족 품에 돌려달라 외치던 신부는 그 와중에 자동차 사고를 당해 무릎을 다쳐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그 이름은 문정현 신부.

그는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흔히 마취에서 깨어날 때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이나 생각을 털어놓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날 문정현 신부는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수술실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을 혼비백산 뛰쳐 나오게 만든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다.

 

 "박정희 이 개새끼야 무고한 사람 죽인 이 천하의 나쁜 놈의 새끼야. "

 

 멀쩡히 살아가던 사람들을 잡아가서 살이 타도록 고문해서 사건을 만들고 판결이 나오자마자 목을 매달아버린 독재자에 대한 분노는 그렇게 컸다. 그래도 박정희는 사형 선고가 나오던 날 긴급조치 7호를 한 학교에 대고 선언하고 그 교문을 닫아 거는 광기를 부렸고 겨울 공화국의 살기는 대한민국을 시퍼렇게 쑥물 들였다. 적어도 유신 시절의 박정희는 '고난의 행군' 시절 수십만 인민을 굶겨죽였던 북한의 김정일만큼이나 나쁜 놈이었다.

 

 유신 정권에 의해 추방됐던 시노트 신부는 2002년 이후 다시 귀국하여 한국에 정착했다. 그에게 75년 4월 9일은 “생애 최악의 날”이었다. 그는 여러 번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4월 9일 이야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혔고 끔찍한 일이라는 탄식을 연발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겨레 신문 김영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털어놓는 얘기를 들으며 슬몃 나 또한 눈시울이 데워졌었다. “(박정희는) 국민을 귀 먹고 눈 없는 동물로 업신여겼다.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어요. 그런 생활 원하면 (그리워)하라..... 박근혜 (대표) 물론 얼굴은 엄마처럼 좋은데 속이 아버지 같으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살인자다. 솔직히 말 안하면 안 됩니다.”

 

 

“100개의 형광등이 켜진 것 같은 아우라” (어느 종편 방송의 묘사) 를 지녔다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 대표의  지지율은 근 10년간 고공 행진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그녀가 공화국의 대통령을 꿈꾼다면 시노트 신부의 충고대로 준열하고 엄중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규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아버지의 죄를 생물학적 딸이 치러야 하는 연좌율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부친의 기억을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는 공화국의 정치인으로서 치러야 할 의무다. 특히 이날만큼은..... 8명이 법의 이름으로 도살된 날,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 법학자 회의가 “사법 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던 이 칠흑으로 덮인 1975년 4월 9일 이 날만큼은.




비정규직 후배에게 16번을 권하며

$
0
0

비정규직 후배에게 16번을 권하며



 모레면 아니 날짜로 내일이면 선거다. 지나가는 말로 선거 꼭 하라고 얘기는 했지만 어디를 찍으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냥 새누리를 찍든 어디를 찍든 선거들은 꼭 하라는 공자님 말씀을 읊었을 뿐이다. 그게 국민의 의무고 권리라고. 그리고 정치 같은 거에 관심 없다고 자랑스레 얘기하는 이들은 정치 또한 눈여겨보지도 않는 조약돌로 발길에 채이는 존재가 될 뿐이라고.


 선거를 왜 해야 하느냐의 고리타분한 설교는 이것으로 쫑하자. 김병만이 민망한 옷 입고 투표하자 외치고 온갖 유명인사들이 투표율 얼마면 어떤 퍼포먼스를 하시겠다는 약속들을 내거는 마당에 내 얘기 보탤 것이 있겠냐. 뭐 나도 하나 걸까. 투표율 70퍼센트가 넘으면 하루를 굶고 80퍼센트가 넘으면 1주일을 굶지.


 그럼 투표해야 할 이유는 차치하고 누구를 찍을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안철수 원장도 ‘인물’을 보고 찍으라고 하던데 나는 사실 ‘인물’ 보고 찍으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몇 년을 같이 뒹군 사람들 속도 때로는 잘 모르는데 일면식도 없고 아는 거라고는 선거 공보장에 적힌 몇 글자 이력 밖에 없는 이들의 인물됨을 어떻게 파악하겠냐. 척 하면 사람 꿰뚫는 고수가 아니라면 말이지.



그럼 뭘 기준으로 할까? 누가 더 민주주의에 힘쓸 것인가? 뭐 거창하긴 한데 그건 다른 사람더러 하라고 하고. 누가 더 우리 지역구를 바꿔 놓을까? 그건 지방선거에서 찍도록 하고. 누가 더 인물이 좋은가? 몰라 고현정이나 나오면 찍어 줄까. 난 그냥 딱 하나의 기준만 권하고 싶다. 너한테 이익이 되는가 안되는가다.



요즘 트윗을 보면 강남 사람들이여 일어나라는 둥 깨어나라는 둥 호소가 많던데 나는 사실 강남 사람들이 존경스러워. 자신들이 한국 사회에서 점유하는 계급적 위치를 철저하게 자각하고 그 이익에 복무하는 투표를 하고 있잖아. 사실 그게 선거거든. 생각해 봐. 대한민국이야 건국할 때부터 1인 1표, 남녀불문 재산불문 평등 선거가 도입됐지만 서양에선 달랐어. 자고로 선거란 한국의 강남 3구 정도에 집 두어 채 가진 사람 정도에게만 해당사항이 있는 것이었다고. 그 선거권을 얻자고 턱없이 많은 이들이 피를 뿌리고 눈물을 흘렸지. 그런데 왜 그랬을까? 민주주의의 숭고함 때문에? 아냐. 턱도 없는 소리. 그건 자기 이익들을 관철시키기 위한 사람들의 염원의 합이 민주주의였고, 또 민주주의가 보다 많은 이들의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야.



누군가에 표를 던지는 건 결국 저 사람이 나한테 이익이 될 것인가, 내 편인가를 따지는 거라고. 문제는 그 이익 여부를 잘 따지는 거지. 셋방 사는 처지에 “뉴타운 개발!”같은 허황한 공약에 나한테도 떡고물 떨어지겠지 하면서 표 던지면 바로 바보인 거고. 제 자식이 특목고에 갈 경쟁력이 있고 없고를 타진하기 전에 “외국어고 유치!”에 헤벌레 침 흘리는 건 가련한 미련퉁이인 거고. 이런 거 저런 거 안 따지고 ‘될 사람을 밀자’는 건 가히 구제가 어려운 거고. 그런 의미에서 강남 사람들은 존경스러운 거야. 저 사람이 내 지갑에 눈독을 들이느냐, 아니면 채워주느냐가 기준이잖아. 얼마나 심플해? 너도 그렇게 해야 된다는 거야. 물론 나도 그렇게 해야지. 비정규직 노동자인 너는 너의 이익을 위해, 정규직이었다가 지금은 좀 애매하게 된 나는 나의 이익을 위해.


 장터에서 줄다리기 시합이 벌어진다고 해 보자. 아무리 판이 흥겹고 시끄러워도 따져야 될 것은 어느 줄이 우리 마을 사람인가일 거야. 즉 얼른 보기에 이길 것 같은 줄에 붙어 영차 영차 힘 쓰면 이겼다 환호야 하겠지만 막걸리 한 잔 못 얻어먹고 남 좋은 일 시키게 되지 않겠니. 나한테 이익이 되는 줄을 찾아야 해. 그 줄이 미약하고 어차피 못이길 거 같더라도 동네 사람들 모으고 불러서 그 줄을 포기하지 않아야 결국은 너 스스로에게 유익하다는 뜻이야.


 그럼 어느 줄을 잡는 게 좋을까?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이른바 88만원 세대로서 우리 사회의 끈적끈적하고 냄새나는 늪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너는. 나는 네게 감히 얘기하지만 정당투표만큼은 길쭉한 투표용지의 하단에 위치하고 있을 16번을 염두에 두는 게 좋을 거다. 언급했지만 새누리당은 강남 사람들이 그들의 계급적 이익에 따라 찍는 정당이고 통합민주당은 너희들이 경험했던 비정규직을 실질적으로 확산시켰던 전력이 있는 정당이야. 통합진보당이라는 정당도 솔깃하긴 한데, 사실 너한테 이익이 되는 정당이라고 확언해 주긴 어렵다.


 한지붕 세 가족이 그럴 수 없이 다 다르고, 좀 심하게 말하면 물과 기름과 미숫가루가 섞여 있는 정당이거든. ‘민주주의 회복’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너같은 사람들을 묶어 세우거나 너희들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기엔 좀 복잡한 정당이야. 유시민 대표로 대변되는 그쪽 세력은 차치하자. 사실 민주당하고 정견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쪽과 안맞아서 딴 살림을 꾸렸을 뿐이라고 봐. 그리고 이정희 대표가 똑똑해 보인다고 했지만 그녀를 내세우는 세력의 중추는 노동자들의 명절이라 할 노동절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북한 노동자들과의 축구 시합에 더 열성을 쏟은 사람들이었거든. 그걸 탓하는 게 아니라 행동의 준거가 다르다는 거다.



 물론 내 말이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소한 너같은 비정규직들, 밥 먹을 곳이 없어서 변기 위에 앉아 깍두기 씹는 소리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밥 먹는 미화노동자 아주머니들, 다른 것도 아니고 노동자인 걸 인정해 달라는 요구 하나를 따내기 위해 시청 앞에서 몇 년을 버티고 있는 학습지 교사들의 목소리가 그나마 담길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한다면, 나는 16번을 권할 수 밖에 없다. 아까 말한 줄다리기 줄로서 말이지. 비정규직 청소부 아주머니를 비례대표 1번으로 정한 유일한 정당.


 그런데 이 줄은 미약하고 가녀려. 다른 정당들은 국회의원 몇 석일까를 계산하고 있지만 이 정당은 3퍼센트 투표율을 얻지 못하면 사라질 운명의 정당이야. 그래서 의미없다고, 소용도 없다고, 줄을 잡아야 할 사람들이 잡지 않는다면 그 줄은 장바닥에 굴러 뭇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겠지. 정작 그 줄을 잡았어야 할 사람들은 심지어 새누리당까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저 새빨간 거짓말부터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좀 애매한 목표에 이르는 말 말 말의 홍수 속에서 어느 줄을 잡고 힘을 써야 하나 헛갈리다가 지쳐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에이 그놈이 그놈이라고 한탄하며 돌아앉을지도 모르고 정치란 건 다 그런 거라고 침을 뱉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강남 사람들은 웃으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을 귀신같이 구분해서 어김없이 찍고 있을 것이고 말이야. 강남 사람들도 그놈이 그놈이란 걸 모르지 않아. 정치란 그런 거라고 다 침 뱉는단다. 하지만 그들은 지혜롭게 사고하고 뚝심있게 투표해. 지난번 무상급식 투표 때 타워팰리스 투표율 봤지?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상급식에 민감했을까? 그건 무상급식 세원이 자기들에게 부과될 것이라는 본능적인 방어의식 때문이거든.


 너 뿐 아니라 네 친구들, 그리고 가진 건 몸뚱아리와 열정 뿐이지만 평생 벌어 봐야 서울 시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할 것 같은 이들, 묵묵히 일하고 시키는 대로 따르고 주는대로 받고 항상 복종하며 휴가 하루 내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고 언제 문자로 “그만 나와라.”는 통고를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모든 사람들도 그런 지혜를 발휘해 봐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익이 될까. 그 간단하고도 명료한 기준을 가지고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첫발이 디딜 발판으로 나는 16번 진보신당이 이번 선거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 그러기 위해서는 2퍼센트가 필요하고, 비정규직 환경미화 노동자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청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정활동을 위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3퍼센트가 필요하다. 아직 정당투표를 결정하지 않았다면 네 표를 그 작은 성취에 가담하라고 권유한다면 무례가 될까. 하지만 그 무례를 범하고 싶구나.


한국 및 세계 위인들의 선거독려 메시지

$
0
0
한국과 세계 위인들의 투표 독려 메시지입니다. 내일 꼭 투표합시다



세종대왕

나라머슴이 국민 뜻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이런 전차로 어린백성이 밟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함이 많으니라. 내 이를 어엿비 너겨 새로 사월 열 하룻날을 맹가나니 사람마다 손가락 하나로 찍어 즈려밟게 편안케 하고져 할따라미니라

이순신

신에게는 아직도 열 두 명의 표가 있사옵니다.

나폴레옹

나의 사전에 기권은 없다

스피노자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세 명에게 투표하라고 꼬실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기권은 짧고 고생은 길다

최익현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내 손가락은 자를 수 없느니라

링컨

민주정치는 투표에 의한 투표를 위한 투표의 정치다

에디슨

민주주의는 99%의 투표와 1%의 승복으로 이루어진다.

셰익스피어

투표냐 기권이냐 고민하면 천치로다.

공자

아침에 투표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시저

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

무하마드 알리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찍어라

칸트

의식 없는 투표는 맹목이고 투표 없는 의식은 쓰레기다.

데카르트

나는 투표한다 고로 존재한다.

레닌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히 시뻘건 것은 저 붉은 붓두껍이다.

1960.4.11 김주열과 이은상

$
0
0

산하의 오역 

19060.4.11 김주열과 이은상

 작년에도 이날은 김주열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도 역시 김주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김주열이 주먹 부르쥔 모습으로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떠오른 것이 1960년 4월 11일이었다.  이름모를 낚시꾼은 역사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최초로 카메라에 담은 것은 부산일보 마산 주재 기자 허 종이었다.  "쉬고 있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 다가 오더니 '중앙부두 앞에 시체가 떠올랐는데 틀림없이 김주열이다'라고 하더군요. 그 길로 바로 달려 나갔죠. 부두 암벽에서 불과 3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자세가 마치 복싱(Boxing)하는 폼이었어요. 물결에 일렁이며 수면 위로 들락날락하는데, 가만히 보니 왼쪽 눈에 쇠뭉치가 박혀있더군요."  

 그 몇 년 뒤 정부에 의해 강탈당해 '장물'로서 이제껏 '정수장학회'의 소유가 될 운명이었던 신문 부산일보는 이 사진을 사회면 톱으로 실었다.  그래도 분기를 참을 수 없었던지 논설위원 김태홍은 사진 옆에 "마산은!"이라는 제목의 시를 휘갈겨 썼다.  그 일부다.

.............
 마산은
 고요한 합포만 나의 고향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속에 피면
 눈동자에 탄환이 박힌 소년의 시체가
 대낮에 표류하는 부두
 정치는 응시하라 세계는
 이곳 이 소년의 표정을 읽어라
 이방인이 아닌 소년의 못다한 염원들을
 생각해 보라고  
    

 AP 통신을 통해 이 사진이 전 세계로 타전되는 소리는 곧 이승만 정권의 조종 소리와 같았다.  시신을 본 마산 시민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3.15 선거 당시 외쳤던 구호들, "내 표를 돌려다오."  "부정선거 다시하라"는 김주열을 살려내라는 절규와 아울러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격렬한 혐오를 드러내는 직설적인 외침으로 바뀌었다.  당시 경남지사는 조사차 내려온 국회의원들에게 이렇게 강변하고 있었다.  "투석을 하고 관공서 때려부수고 죽여라 부숴라 등을 외치는 등으로 보아" 공산당의 사주 같다는 식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한 달 전 3월 15일 마산 사태때 총 맞고 실려온 이들의 주머니에 삐라를 숨기려들고, 의사들에게 불온삐라가 나왔다고 말하라고 윽박지르던 그 수법은 변함이 없었다.   전라도 남원에서 마산까지 유학왔다가 데모 와중에 비참하게 죽어간 학생 눈알에 박힌 최루탄 위에서 그들은 "좌익"과 "불순분자"를 논하고 있었다.  

 4월 14일 김주열의 시신은 몰래 빼돌려져 전북 남원의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유족 동의도, 동반도 없이 화장장으로 직행해서 불태워 버리고 식구들에게는 뼛가루만 안겨줬던 박정희 정권 때보다는 나았지만 청천벽력은 매일반이었다.  시신 인도 확인서 작성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김주열의 어머니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는 못받겠으니 이기붕에게나 갔다 주시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은 이제 불행하게 꺾여 버린 젊은 꽃에서 3천만 국민의 가슴팍에 꽂히는 불화살로 3천리 방방곡곡을 가로질렀다.  하나 기억할 것.  김주열의 시신으로 촉발된 2차 마산 시위 때까지도 서울은 조용했다.  마산에서 난리가 났지만 3.15로부터 그때까지 서울의 대학생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최초의 대학생 시위는 전북대생들이었고, 서울에서는 중고삐리들이 먼저 데모했지만 서울의 대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켜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주열은 그 침묵을 지탱하던 기둥뿌리를 뽑아버렸다.  이럴 수는 없다! 

 그런데 같은 마산 사람이라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노산 이은상이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부정선거 준비가 자행되던 3월 초, 자유당 유세에 등장하여 '성웅 이순신같은 분이라야 나라를 구할 것인데 그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라고 열변을 토하여  듣는 이를 어리벙벙하게 만들었던 이 재주많은 시인은 4월 15일 조선일보에 이런 글을 발표한다.   마산 시위를 규탄하는 글이었다.  제 자식같은 학도가 눈에 최루탄 박은 채 고기들 끼니가 되어 있다가 물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도, 저 위의 김태홍이 쓴 마산은!을 보고도 그는 이렇게 서두를 뗀다.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다! 불합리와 불법이 빚어낸 불상사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김주열은 지성을 잃고 불합리의 선봉에서 불법의 투구를 쓰고 싸우다가 정당한 공권력에 죽어간 이였다.  그가 지은 노래처럼 "그 푸른 물 눈에 보이는" 마산 바다를 시신 썩는 냄새로 오염시킨 데모꾼일 뿐이었다.   "내가 마산 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분개한 생각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마는 무모한 흥분으로 일이 바로 잡히는 법이 아니다. 좀 더 자중하기를 바란다. 정당한 방법에 의하지 않으면 도리어 과오를 범하기가 쉽다"

 그 나흘 뒤 4.19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은상은 4.19에 죽어간 영령들에게는 또 이런 글을 쓴다.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워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참 명문이다.  기가 막힌 명문이다.  그리고 단 며칠 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는가에 있어서도 그 기는 여전히 막힌다.  그 1년 뒤 5.16이 나고 선글라스 쓴 작달막한 장군이 전역하여 공화당을 창당하자 그는 그 명문으로 또 공화당 창당 선언문을 쓴다.  "잘 살아보세"를 부르짖는 박정희 시대 그가 쓴 시는 너무나 절창이라 또 한 번 가슴을 울린다.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그는 박정희가 죽은 후 "하늘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으로 시작하는 추모가를 썼고 전두환이 들어선 뒤에는 국정자문위원으로 탈바꿈한 뒤 편안하게 세상을 떴다.  

 오늘날 마산에는 김주열을 기념하는 행사나 기념물보다는 이은상을 기리는 그것들이 열 배는 더 많다.   동네 지명으로 노산동이 있고 가고파 국화 축제가 있으며 노산 공원과 기념비도 건재하다.  하지만 김주열에 대한 기억은 안스러울 정도로 희미했다.  심지어  시가 발행하는 마산시보에서 "저녁 먹다가 데모 구경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식으로 김주열을 서술하여 한바탕 소동이 인 적이 있을 정도였다.  노산동이 있고 노산공원이 있는 마산에서 2002년과 2003년 시민단체가 '김주열로'를 만들자고 청원했을 때 마산 시는 '특정 인물 부각'을 이유로 각하시킨 바 있었다.  2010년 4월 11일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 그 푸른 물에 떠오른 그 50주년 되는 날, 김주열을 위한 범국민장이 뒤늦게 마련되어 그 혼을 달래고 한 달 전 김두관 지사가 '민주 성지'로 조성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달까. 

 돌아가서 이은상은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참 옳은 말을 많이 했다.  "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우리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이유는 일어날 때 일어나고 싸울 때 싸울 줄 알았던 젊은이들과 시민들의 의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은상이 그 문재로 권력을 섬길 때조차도 그 '전통'은 숙여지지 않았고 몸이 부서지도록 싸웠다.  유신을 몰아냈고, 전두환을 가뒀고, 촛불의 바다를 이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 왔다.  그리고 52년만의 오늘도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지 않은가.




tag :

1919.4.13 엄리처 대학살

$
0
0

산하의 오역


1919년 4월 13일 암리차르 학살


거대한 대륙 인도에는 그만큼 볼 것이 많지만 시크교도들의 성지인 암리차르의 황금사원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시크교의 네 번째 구루 (뭐라고 번역을 해야 할지)인 람다스가 만든 연못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이 되어고 다섯 번째 구루 아루잔 데브가 그 연못 가운데 사원을 지은 것이 황금 사원의 시작이다. 아프가니스탄 등의 침공으로부터 여러 번 파괴되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어졌고 1802년에는 지붕에 750킬로그램의 금이 씌워졌다. 황금사원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50곳 ” 가운데 여섯 번째에 올랐는데 여기에 들어가려면 신발부터 벗어야 한다. 하지만 시크교도들이 하도 반들반들 닦아 놔서 맨발도 불편하지는 않다고 한다.



암리차르는 펀잡 지방에 속하는데 이 지역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그 영토가 분할되었다. 그래서 암리차르에서 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이다. 여기서는 닭벼슬 모양의 군모를 쓴 인도군과 그처럼 요란하지는 않아도 인도에는 지지 않으려는 각오가 투철한 파키스탄군의 국기 하강식 세레모니가 화려하게(?) 펼쳐져 뭇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이 군인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허벅지가 얼굴에 닿도록 다리를 들어올리면서 행진한다. 그 높이가 국격을 상징하는 듯. 이렇게 말하니 인도에 한 한 달 가 있은 것 같지만 구글을 1분 검색했을 뿐, 나는 꿈에도 이곳에 간 적이 없다.



 하지만 암리차르에 가게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황금사원에서 걸어서도 얼마 거걸리지 않는다는 잘리언왈라 바그다. 1919년 4월 13일 적게는 300명, 많게는 2천여명의 인도인들이 죽어나갔던 암리차르 학살의 현장이다. 1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영국은 자치의 확대 등 당근을 제시하며 인도를 회유했고 인도인들은 2백만 명이 넘는 병력과 막대한 전비를 내어 영국의 전쟁을 도왔다. 하지만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안면을 바꿨다.



 되레 영국은 뻔히 예상되는 인도의 반영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로울래트법을 제정한다. 이다. 인도의 치안상황과 그 대책을 조사하기 위하여 임명된 위원회(위원장 로울래트)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이 법의 정식 명칭은 ‘무정부 혁명 분자 단속법’이었다. 이 법은 구속영장 없는 체포와 재판을 거치지 않는 투옥을 인정하는 등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탄압책을 골자로 하고 있다. 피와 땀을 흘려놓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인도인의 저항은 거세게 일어났고 영국은 이 로울래트 법을 한시법으로 하겠다는 둥 유화책을 구사하기도 하지만 전쟁 수발에 진력이 나고 피폐해진 인도 민중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으로 끓어올랐다. 당연히 영국의 긴장도 높아졌다.



 펀잡의 암리차르의 잘리언왈라 바그. 1919년 4월 13일은 일종의 종교적 축일이었다. 시 외곽으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광장을 메웠다. 남녀노소 수천 명이 광장에 들끓고 있었지만 그들은 계엄령이 내려져 있는 것도 몰랐다. 28000제곱미터의 광장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통로가 여섯 개 있었지만 다섯 개는 너무 좁아 쓸모가 없었고, 하나는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다이어 준장은 그의 군대에 사격 명령을 내렸다.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이어는 집회금지령을 어기고 광장에 모인 범죄자들에게 ‘교훈’을 줄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후일 “1560발을 발사해서 1516명이 죽었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증언했던 그의 명령은 잔혹했다. 한 병사가 공중을 향해 총을 쏘자 그는 벼락같이 소리친다. “여기 뭐하러 왔나?” 총알을 피해 인도인들은 우물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우물에서 발견된 시체만 150구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다이어 준장은 유죄를 선고받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정글북’의 저자인 루디아드 키플링은 그를 ‘인도의 구원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연금을 기금을 모았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격노하여 노벨상을 받았을 때 기사 작위를 반납했고, 간디는 이 사건 이후 본격적인 대영 항쟁에 나서게 된다. 사건 다음 날 다이어가 우르두 어로 인도인들에게 행한 연설에는 단순 무식 과격의 극치를 달리는 제국주의 군인의 오만함이 고스란히 복사되어 있다. “분명히 대답하라. 전쟁이냐 평화냐...... 내 말에 복종하고 가게 문들을 열어라. 더 이상 이런 일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는다...... 내 명령에 복종하게 될 거다.”



 다이어는 이 사건으로 별반 처벌받지 않았고,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 1927년에 죽었는데 4년 뒤 일본 식민지였던 조선의 합천에서 환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사람을 죽여 버린 그 잔인함과 그러고도 책임 추궁받지 않고 되레 호의호식하면서 잘 먹고 잘 산 것이며 그 비길데 없는 뻔뻔함까지, 어제도 선거하러 모습을 드러낸 생활수급자 전 영감과 그 성정이 어찌 그리 비슷한지. 하지만 인도인은 한국인과는 달리 암리차르의 복수를 일부 성공시킨다. 당시 펀잡 부총독이었으며 인도인 탄압에 앞장섰던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1940년 인도인 우담 싱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tag :

1984.4.14 고래사냥 부산개봉

$
0
0
산하의 오역

1984년 4월 14일 <고래사냥> 부산 개봉

도사인지 거지인지 분간이 안가는 거지왕초와 요즘 말로 많이 찌질한 대학생, 거기에 말을 잃어버린 창녀가 펼치는 로드 무비 <고래사냥>은 많은 이들의 추억이라는 바다 속의 섬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이 서울에 비해 늦었던 시절, <고래사냥>은 3월 31일 개봉한 서울에 비해 2주일 늦게 부산에서 개봉됐다. 학교에서 보여주는 단체 관람을 제외하면 극장이 학생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 시절 (학생주임이 언급한 금지구역은 극장,롤러스케이트장, 전자오락실, 탁구장 등등 학생이 갈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이었다) 나는 어머니한테 독서실 간다고 거짓말을 치고 개봉하던 날 이 영화를 봤었다. 서울에서 한창 관객몰이를 하며 온갖 뉴스를 장식했던 터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이 환했고, 어찌 됐던 보자!는 합의가 아이들끼리 이뤄졌던 터였다. 중학생 관람이 어려웠던 영화였던 것 같은데 어찌 어찌 보게 됐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당시 부산 사람들 영화 보는 기준은 좀 특이했다. 서울 사람들이 거들떠도 안본 중국 무협 영화나 어설픈 코미디가 부산에서는 대박을 터뜨리는 일도 많았고, 서울에서 뜻밖의 흥행을 보인 예술 영화 같은 건 부산에 왔다가 사람 하나 없이 파리들만 왱왱거리면서 감상하는 비극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하지만 <고래사냥>은 달랐던 것 같다. 당시 부산에서의 한국영화 최고 관객 기록은 그 20년 전 1965년 만들어진 <저 하늘에도 슬픔이>였는데 그 수가 9만 8천 명이었다. 그런데 4월 14일 개봉 후 한 달 반만에 13만 명을 돌파, 무려 20년만에 ‘관객 수 10만’을 넘어서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나와 몇 명의 친구들도 그 13만 명 중의 하나였다.

허구헌날 여자한테 차이는 소심한 대학생 병태를 맡은 것은 가수 김수철이었다. <못다핀 꽃 한 송이>를 부르며 기타 뚱땅거리던 키 작은 가수는 배창호 감독이 말한대로 “그 모습 그대로 병태”였다. 거지 의상을 구하기 위해 남대문 시장을 몇 바퀴를 돌다가 어느 행려병자의 옷을 얻고 환호성을 질렀다는 안성기는 그야말로 도인의 풍모였다. 그리고 가슴 위쪽의 파인 부분을 살짝 드러내어 사춘기 중학생들 침을 꼴깍꼴깍 삼키게 했던 이미숙의 요염함(?)도 오래 잔상에 남았다.

영화를 보던 중 한 녀석이 불쑥 옆구리를 찔렀다. “야 근데 대체 고래는 언제 나오노?” 사실 보러 갔던 아이들 대부분은 명작 동화에서 봤던 허먼 멜빌의 ‘백경’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지왕초와 찌질이 대학생과 실어증 걸린 창녀가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7번 국도를 내달릴 때 언뜻언뜻 보이는 그 파란 바다를 보면서 이제야말로 저들이 포경선에 타고 작살을 쏘아대지 않을까 어렴풋한 기대를 했지만 웬걸 고래 닮은 이대근 (포주)가 등장해서 그들과 사투를 벌이긴 했고 찌질하던 대학생 병태가 불굴의 용기를 과시하는 것이 감동적이긴 했지만, 이미숙이 말문이 터지고 눈 멀어가던 어머니에게 안경을 씌워드리는 것으로 ‘고래사냥’이 끝나는 게 아닌가. "고래는 먼바다 속이 아니라 내 맘속에 있어요.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 하는 김수철의 독백만 남기고.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오면서, 한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고래는 안나오고 고래같은 사람들은 나오더라 씨.” ‘고래사냥’이라는 묘한 느낌의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고 최인호가 작사하고 송창식이 작곡한 노래 <고래사냥>이 대학생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유신시대부터였다. 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대학생 ‘병태’는 등장했고 역시 무기력한 대학생 병태와 그 친구가 찾아나선 것도 “예쁜 고래 한 마리”였으니까. ‘체육대회’로 모든 학교가 휴강을 하고 교수는 “응원 연습(?)을 하러갈 사람은 가도 좋다. 출석 체크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병태는 창밖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응원 연습’에 참가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장면에서 보듯 영화 속에서조차 데모를 데모라고 말할 수 없고, 대학생들에게까지 바리깡을 들이밀며 장발 단속을 하던 시대, 대학생들이 떠나고자 한 동해 바다와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는 무지갯빛보다 많은 색깔의 의미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쁜 고래’ 뿐 아니라 집채같은 몸집으로 송사리같은 대학생 개인 개인, 그 사회를 살던 젊음들을 압살시키던 ‘고래’같은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 내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고래같이 생긴’ 이대근이 자신으로부터 도망간 창녀를 잡기 위해 일행 앞에 나타났을 때 찌질이 병태, 거지 왕초를 만나 고래 사냥을 떠나기 전 낸다는 용기가 자신을 모욕했던 여자 뺨을 때리는 것이 다였던 그가 피칠갑이 되어 포주 일행에게 저항하고 달라붙고 그 무릎을 잡고 매달릴 때의 병태는 경찰이 장발단속을 할 때 “왜 불러?”의 배경 음악 속에 줄행랑을 치던, ‘체육대회’를 고민하며 바라보기만 하던 병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 있었던 것도 같고 말이다.

그러나 영화 제목과 같은 노래 <고래 사냥>이 한 소절도 등장하지 않을만큼, 시대는 아직 엄혹했다. 고래사냥은 ‘염세주의, 퇴폐주의’의 명목으로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고, 거지 왕초 안성기가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들 때에도, 동해 바다를 따라 난 국도를 내달릴 때에도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의 호쾌한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김수철이 새로이 만든 ‘젊은 그대’는 이 영화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들 (심지어 까까머리 중학생까지)에게도 가슴을 트이게 하는 숨구멍으로 남았다. “거치른 들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너머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젊은 그대 잠깨어 오라. 아 아 태양같은 젊은 그대 젊은 그대”


 

1885.4.15 거문도 사건

$
0
0

산하의 오역


1885년 4월 15일 거문도 사건



 1885년 3월 멀리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의 팬제 (지금은 키르키스탄 땅이라고 하는데) 라는 오아시스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러시아군과 영국군이 훈련을 시킨 아프가니스탄군의 대결. 러시아군은 일찍이 영국군에게도 참패를 안긴 바 있는 억센 아프간 전사들을 “최후의 1인까지” 전멸시키는 승리를 거둔다. 러시아 군 사망자 40명, 아프간 전사자 600명. 이에 바짝 긴장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수십 년 동안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워 왔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러시아가 진출한다는 것은 영국의 보배로운 식민지 인도의 동요를 뜻했다. 영국 수상 글래드스턴의 말투부터 달라졌다. “우리는 제국의 일부인 인도와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의 주권을 놓고 우리의 권위와 신념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 4월 9일 그는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한다.



 이 서슬의 불똥이 튄 것은 난데없는 극동이었다. 4월 14일 영국 해군성은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해 있던 영국 함대 사령관 도웰 제독에게 함대를 출동시켜 ‘포트 해밀턴 (Port Hamilton)'을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명령을 지체없이 시행되어 4월 15일 영국 전함 아가멤논 호, 페가수스 호, 파이어브랜드 호는 ’포트 해밀턴‘에 닻을 내리고 영국 깃발을 꽂는다. 이 포트 해밀턴은 다름아닌 조선의 거문도였다. 여수와 제주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고, 현대 행정구역상으로는 여수시에 들어가고 과거에는 전라도 고흥 땅에 속했지만, 거리로는 제주와 더 가까운 곳. 거문도를 영국 해군이 포트 해밀턴으로 부르면서 눈여겨본 것은 이미 1840년대부터였다.



 거문항은 이른바 우묵배미 항구로서. 바다의 천연요새다. 동도, 서도, 고도의 3개 섬이 파도를 막아서서 항구는 항상 호수처럼 잔잔하다. 섬 넓이도 충분하고 물도 넉넉하게 나서 해군 기항지로서의 이점 뿐 아니라 이곳을 점거한다면 블라디보스톡에 기지를 둔 러시아의 해군의 목을 죄는 전략적 가치도 있었다.



 섬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영국 해군 이전에도 러시아 해군도, 미국 해군도 이곳에 기항하여 주민들과 접촉한 적이 있다. 이때 미국 해군 장교에 따르면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자연 때문에 차마 떠나기가 싫은” 섬이었다. 이렇듯 거문도 (당시로는 삼도나 삼호도 등으로 불리웠다. 거문도는 영국이 떠난 뒤에 붙여진 이름) 사람들에게 양코배기들은 그렇게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관리도 없고 수비군도 없었던 거문도에 영국군은 아무 저항 없이 상륙했다. 그들은 이렇게 보고했다. “러시아 함대는 보이지 않음.” 즉 이들은 러시아가 1년에 1/4은 얼어있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에 만족하지 않고 남하하리라 여겼고, 거문도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바, 이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이 점령으로 세계가 진동했고 러시아는 격노했으며 영국은 아예 막사를 짓고 장기 점령 준비에 들어갔으되 이 사실을 한 달이 넘게 까맣게 모른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조정이었다. 영국은 청나라와 일본 정부에 4월 20일 점령 통고를 하지만 조선 정부에게 이 사실이 전달된 것은 한 달 동안이나 뒤였고, 그나마 조선 조정은 거문도가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강화도 근처의 주문도를 말하는 거 같습니다.”라는 게 구한말의 그나마 유능한 대신으로 평가받는 김윤식의 판단이었으니 더 할 말이 없겠다.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권을 가졌음을 만방에 과시하는 가운데 조선 조정에 훈수를 두면서 거문도 문제를 조정했다. 조선 조정도 ‘외교적 해결’에 힘을 기울였다. “귀국에서 아국의 해밀턴(거문도)을 빌어 잠시 동안 주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섬은 우리 국토 중 가장 긴요한 땅으로서 (어머머! 며칠 전까지 몰라놓고!) 비단 귀국뿐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의 요청이 있다 할지라도 이를 허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귀국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고 서로의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의미에서 더 이상 이런 제의를 말아 주기를 바랍니다.” (5월 20일 김윤식이 영국측에 보낸 공문) 정황을 완전히 파악한 이후 보낸 두 번째 공문은 자못 비장하다. “귀국과 같이 국제우의에 돈독하고 만국공법에 밝은 신사국가가 어찌 이러한 의외의 부당행위를 하였는지 실망과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전의 이해가 아무리 중하다 할지라도 세계 만방이 공유해야 할 공법을 앞설 수 없습니다....... 귀국에서 어떠한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이러한 합리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폐방 역시 그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또 이 사실을 세계 각국에 성명하여 그 공론을 들을 것입니다.”



 이 공문을 받은 영국 외무성과 해군성은 배를 쥐고 웃었을 것 같다. “야 조선에서 좌시하지 않겠다는데? 여수에서 전라좌수영 목선이라도 출동시키려나 본데? 아니면 주문도에 가서 우리 함대 찾는 거 아냐?” 그들은 섬 주민들에게 일당 넉넉히 줘 가면서 기지 시설은 물론 테니스 코트까지 지어놓고 신사답게 테니스를 치면서 아예 눌러앉을 태세를 취했다. 조선이 다방면으로 외교전을 펼쳤지만 별반 무소용이었다. 끝내 영국이 떠난 것도 조선의 외교 탓이라기보다는 정세의 변화 탓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와 평화 협정이 이루어졌고 거문도가 중간 기항지로는 몰라도 조차지로 군항을 건설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다가 “그럼 우리도 조선의 다른 섬을 점령하겠다.”는 열강의 압박까지 이어지자 그제야 영국은 거문도에서 물러난 것이다.



 127년 전 4월 15일 유니언 잭을 들고 거문도에 상륙했던 영국군을 떠올려 본다. 러시아 함대도 열흘 넘게 섬을 장악한 바 있고, 미군 또한 그랬고 영국의 한 선장은 “동북아의 군함과 무역선 중간기착지로서 최고의 조건을 가진 이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영국은 그를 현실화시켰지만 조선 조정은 그 섬의 전략적 가치는 기본적인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외교적 해결’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그나마 청나라에 기댄 것이었고, 영국은 조선의 대응에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만국 공법과 국제 우의’ 따위는 거문도에서 많이 잡히는 갈치 지느러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제주도에서 강정 해군 기지 반대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나는 이해한다. 절차상의 문제, 그리고 설득력의 문제에서 정부가 많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그 어느 세력이 집권을 하고 나라를 이끌든 국방에 대한 고민과 전략적 사고는 필요하다고 보며, 그 대안이라는 것이 ‘평화’와 ‘외교’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강정이 전략적으로 옳으냐 그르냐의 논쟁하자는 게 아니다. 강정이 아니라면 어디가 되어야 할 것이며, 과연 우리에게 국방력이란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강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칼을 쳐서 낫을 만들고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건 좋은데, 그렇게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를 19세기의 영국이든 21세기의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국제 관계의 변천과 자국의 이익에 따라 건드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고, 그 해결책이 ‘평화’와 ‘만국 공법’과 ‘외교력’이 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건 1885년의 거문도가 증명한다.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