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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3.3 어느 노학자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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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8년 3월 3일 어느 노학자의 숙청

가끔 부산에 가면 해운대 달맞이 고개 넘어 기장읍을 찾는다. 그곳 기장 시장에는 게를 싸게 파는 식당들이 밀집해 있어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에 게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역으로도 유명한 이 기장은 한국 근대사와 국어연구사와 독립운동사와 현대 북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이름은 김두봉이다. (동래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기장이 맞다)

만약 좋은 세월을 만났다면 김두봉은 평생을 도서관과 집을 왕복하면서 살아가는 천상 학자였을는지도 모른다.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에 가지 않고 부친에게 한학을 배우던 그는 홀로 상경하여 고등보통학교까지 학업을 마친다. 젊은 날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한힌샘 주시경이었다. 그는 항상 책 한 보따리를 들고 다녀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조선어 사전 <말모이> 편찬에 열정을 쏟았고 그 열정은 젊은 날의 김두봉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시경은 아쉽게도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1914년 병사했다. 김두봉은 스승의 뜻을 이어 1916년 세로쓰기 조선말본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적극 가담했던 그는 국내에 머물지 못하고 망명한다.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면서도 그의 국어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1922년 ‘깁더 조선말본’을 내놓은 것이다. ‘깁더’란 깁고 더하여 만들어낸다는 뜻이니 이른바 우리가 흔히 쓰는 ‘수정 증보판’이 되겠다. 깁더 조선말본. 얼마나 정답고 머리에 쏙 들어오는 말인가. 훗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고 말았던 이윤재가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하기 위해 불원천리 김두봉을 찾은 일도 있었던 만큼 김두봉은 독립운동가라기보다는 국어학자로 더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노골적인 팽창 정책과 그에 맞선 항쟁의 와중에 그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해방 후 조선인민보라는 신문에 역사학자 이청원이 약술한 김두봉의 일대기는 그 간략한 와중에도 그 천신만고의 고행길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두봉씨는 원래 유명한 한글학자로 일찍이 3·1운동 당시에 해외로 망명하여 30년 가까이 해외의 유랑생활 속에서 백절불굴의 굳은 의지로 민족해방 전선에서 시종일관하게 꾸준히 끊임없이 힘있게 싸운 분이다. 한때는 김원봉씨들과 더불어 민족혁명당에서 같이 일하며 민족연합전선의 형성에 대분투하시고 그후 중일전쟁 기간 중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인민의 항일대중운동을 두려워 탄압하기 시작하자 해방구인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사랑하는 따님 해엽양을 데리고 도보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한때는 벙어리노릇을 하면서 국민당군 지역을 돌파하여 연안에 들어가 군정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동지 최창익·한빈·무정씨 등과 더불어 독립동맹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안에서 안한하게 교육사업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고 제일선에 나와서 일제의 왜병들과 싸웠던 것이다......” (주간경향 2009.5.19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김두봉은 군사 조직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의 최고 책임자로서 ‘태항산 호랑이’로서 그 용맹을 떨쳤다. 그 휘하의 조선의용대가 일본군 대군을 상대하여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었던 호가장 전투에서 그의 벗이자 의열단의 최초 조직자였던 윤세주가 죽었고, <최후의 분대장>의 작가 김학철은 다리를 잃었다. 김두봉은 김구도 이승만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선의 참화를 경험한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해방 다시 조선의용군 병력은 수만 명을 헤아렸다고 하는데 김두봉은 그 가운데 4개 대대를 이끌고 9월 3일 연안을 출발하여 해방된 조국을 향해 벅찬 발걸음을 옮긴다.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가 12월이었으니 무려 석 달 동안 걸어 걸어 돌아온 조국이었다. 하지만 조선의용대는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요구받는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김두봉은 분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중평이지만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 그것이 이남에서 단독정부 세력의 득세에 절망한 김구에게 김두봉은 간절한 호소의 대상이 된다. “ 북쪽에서 인형(仁兄- 김두봉)과 김일성 장군이 선두에 서고 남쪽에서 우리 양인이 선두에 서서 이것을 주창하면 절대 다수의 민중이 이것을 옹호할 것이니 어찌 불성공할 이가 있겠나이까..... 인형께서 수십 년 한 곳에서 공동 분투한 구의(舊義)와 4년 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둔 현안 해결의 연대 책임과 애국자가 애국자에게 호소하는 성의와 열정으로써 조국의 땅 위에서 남북 지도자 회담을 최속한 시간 내에 성취시키기를 간청합니다. 남쪽에서는 우리 양인이 애국자들과 함께 이것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그러나 김구는 평양을 다녀온 뒤 암살당했고 그 1년 뒤 북한은 ‘국토완정’을 내세운 전쟁을 시작한다. 김두봉은 이 전쟁에 반대했다고 하지만, 그는 이미 ‘태항산 호랑이’가 아니었다.

전쟁 후 1958년 3월 3일. 제1차 조선로동당 대표자대회에서 그는 이른바 ‘8월 종파 사건’ (1956년 8월 30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소련파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건) 관련자로서 숙청당한다. 그의 동료였던 무정, 한빈 등과 함께였다. ‘연안파’의 몰락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수십년만에 본격적으로 본업인 연구에 나서 조선어 맞춤법을 완성하기도 했던 그는 고령을 이유로 사형은 면했지만 오지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다. “내 조카는 죽었지만 약산 김원봉은 영원한 내 조카 사위”라고 자랑했던 후배이자 동지 김원봉처럼. 그리고 1957년 감옥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평생의 동지 최창익처럼.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나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나 일종의 블랙홀과 같았다. 참 많은 인걸들이 그 자장에 저항하다가 산산이 부서지거나 사라져 갔다. 1958년 3월 3일 종파분자를 처단하라 부르짖는 무수한 팔뚝질 앞에서 김두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1193년 3월 4일 '12세기의 위인' 천국으로 또는 연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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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193년 3월 4일 "12세기의 위인" 천국으로 또는 연옥으로

뉴 밀레니엄을 맞아 타임지에서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약간은 건방지기도 한 기획을 하나 했다. 그것은 각 세기의 인물을 선정하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잣대로 선정된 인물들인만큼 그를 크게 신뢰할 이유는 없지만 12세기의 인물로 선정된 사람은 오늘과 관련이 있다. 그는 1193년 3월 4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 위대한 이슬람 군주 살라...딘이다. 살라딘은 유럽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고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라고 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군 부대가 파견나가 있는 이라크 북부의 티크리트 출신의 쿠르드족이었다.

요즘 잘 팔리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도 나오지만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 이슬람 세계는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한창 진격해 가던 십자군에게 이집트의 재상이 사신으로 와서 동맹을 맺어 공동의 적(?)을 물리치자는 제안을 할 정도였다. 예루살렘이 십자군에 의해 함락된 이래 수십 년 동안 십자군의 왕국들이 곳곳에 들어섰지만 다마스커스, 알레포, 이집트 등으로 분열된 이슬람 세력들은 통일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랍 세계에도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 시발은 누르 앗딘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이집트에도 군대를 보내 아랍 세계의 통일을 도모한다. 누르 앗딘이 보낸 군대의 지휘관에게는 명민해 보이는 조카가 있었다. 지휘관 삼촌은 이집트의 재상이 됐지만 곧 세상을 떠난다. 그 지위와 신분을 물려받은 이가 바로 그 조카, 살라딘이었다. 그는 곧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다.

살라딘이 재미있는 것 하나. 그는 가능한 삼촌의 주군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충돌을 피한다. 누르 앗딘을 배신했다는 말을 듣기는 싫고, 그렇다고 이집트를 바칠 수도 없고.... 살라딘은 그저 피해만 다닌다. '그들 만남은 빙글빙글 돌고.....' 누르앗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하는 것을 도우라고 명령하지만 살라딘은 거부하고 이에 격노한 누르앗딘은 살라딘을 칠 계획을 세우는 와중에 그만 병사하고 만다. 이제는 살라딘의 시대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아우르는 강대한 지역을 장악한 살라딘은 다마스커스에 입성하여 누르 앗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미망인과 결혼한다. (뭐가 존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쪽 풍습은 그런 모양이다) 이후 '벼락출세자' (살라딘의 정적들이 경멸삼아 부르던 별명)에게 펼쳐진 것은 십자군과의 혈투였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무대가 되는 시대다. 영화 속에서 나병 환자였으나 현명했던 예루살렘 왕은 보두앵 4세. 살라딘은 그에게 덤벼들었다가 인생 최악의 참패를 당한다. 열 여섯 살 나병환자 국왕은 몽지사르의 계곡에 매복했다가 살라딘을 기습했고, 살라딘은 병력의 9할을 잃고 이집트까지 도망간다.

이 참패 후 살라딘은 십자군과의 충돌을 피하고 이슬람 세계를 통합해 나간다. 어떤 광기에 가득찬 인간이 아니었다면 살라딘의 예루살렘 진공은 한참을 미뤄졌을 것이다. 이슬람의 포로 생활을 경험하면서 반이슬람 감정에 한껏 사로잡혀 있던 레이놀드 드 사티용 말이다. 그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슬람 대상들을 습격하는 등 도발 행위를 일삼다가 급기야 메카와 메디나, 이슬람의 성지를 공격하여 그 신전의 신성한 돌을 뒤엎어 버리겠다면서 설쳐 댄다. (살라딘의 여동생까지 죽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격노한 살라딘이 대군을 이끌고 레이놀드의 성을 공격하는데 살라딘은 갑자기 병력을 물린다. 그것은 그 성 안에서 레이놀드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 오늘날에도 신성 모독한 작가에게 사형을 공언하는 무슬림들에게 그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호언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살라딘은 이슬람 공공의 적에게 관대함을 보여 준 것이다. 이 관대함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후 보두앵 4세가 죽고 후임 왕이 레이놀드와 함께 도발을 감행하자 살라딘은 이를 철저하게 분쇄하고 (하틴의 뿔 전투) 예루살렘을 죄어 들어간다. 그는 이때도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낭을 살려 준다.

드디어 예루살렘을 죄어 들어가는 와중에 기사 발리안이 관대한 항복을 청원하자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이를 받아들인다. 11세기 말 예루살렘이 기독교도들에게 떨어졌을 때 벌어진 대학살의 재연은 살라딘 덕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몸값을 일정 부분 받고 기독교도들을 풀어주는 한편 엄중한 호위까지 붙여 준다. 결과적으로 노예로 전락한 이들도 많았지만, 정한 몸값에 모자라는 액수를 받고 방면해 버린 이들이 더 많았다.

" 잔혹한 기독교도들은 우리 백성들을 모두 베어버렸는데 , 술탄께서는 왜 그들을 살려보내십니까? " 하고 말했을 때 살라딘은 답했다. " 우리가 마찬가지로 연약한 노인과 과부들을 포함해서 포로들을 모두 베어버린다면 야만적인 기독교도들과 다를것이 무엇인가? 저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저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될 뿐이다. "

살라딘은 이후 예루살렘에 십자군으로 온 사자왕 리처드와도 혈투를 벌이고, 서로를 존경하게 된 것으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그가 가장 위대한 인간임을 증명한 날은 바로 1193년 3월 4일이었다. 리처드 왕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를 영국으로 돌려 보낸 얼마 후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그가 임종하기 전 이슬람 신학자가 옆에서 코란의 구절을 암송해 주었다. "그분은 유일 신이시며 자비와 동정의 신이시라" 라는 코란의 구절에 이르자 살라딘은 "그말이 맞다" 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그분을 믿는다" 라는 말을 남긴 후 숨을 거둔다. 사망 이후 그의 신민들을 놀라게 한것은 그의 검소함이었다. 그가 남긴 재산은 티루스 디나르 한잎과 은화 47 다르함. 이 돈으로는 장례식도 치룰 수 없었지만 그는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식 비용을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말라 했다. 결국 십자군을 물리치고 이슬람 세계의 성지를 탈환한 영웅의 장례식을 위해서 그 아들들은 돈을 빌려야 했다.

장례식은 그야말로 검소하게 치러졌다. 성대한 것은 술탄의 죽음에 엎디어 슬퍼하는 백성들의 울음 뿐이었다. 음모도 많고 암살도 횡행했던 이슬람 왕국 정치사에서 그토록 백성들의 비통함과 함께 마지막 길을 갔던 술탄은 살라딘 말고는 없었다.

단테의 신곡 속에서 살라딘은 헥토르, 아이네아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기독교도는 아니었으되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위인들이 가는 연옥으로 간다. 시 속에서도 천국에 보내지 않은 것은 기독교인들의 아집이었겠으나 적어도 살라딘은 단테에게 소크라테스와 동급이었다.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는 지옥에서 배가 갈라진 채 자신의 창자와 배설물을 들여다보는 처지가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위대한 군주 살라딘이 1193년 3월 4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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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 5일, 73년 3월 5일 우리들의 머쓱한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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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 5일, 1973년 3월 5일 우리들의 머쓱한 과거

20년 전에 합법적으로 출판되고 수만 독자가 읽은 역사책을 읽었다고 해군 장교가 징역형을 선고받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얼척없이 암담해지긴 해도, 그나마 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은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쳤다고 여긴다. 얼마 전 후배들에게 “옛날에는 애국가가 들리면 길 가다가도 부동자세로 서서 애국가를 들어야 했단다.”라고 했다가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을 때, 극장에서 영화 시작하기 전에 짧으면 5분 길게는 10분 동안 강제로 ‘문화영화’를 봐야 했다는 얘길 하니 무슨 탈북자 보듯 나를 바라봤을 때, 나의 나이 들었음과 대한민국의 변화를 동시에 실감해야 했었다.

자 질문을 던져 보자. 장례식에 가면 으레 만나는 상주들의 옷은 대개 검은 양복과 흰 한복이다. 상주는 검은 양복에 상장을 팔에 차고, 그 부인들은 흰 한복을 입고 분주히 움직인다. 굴건 제복을 입는 경우는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좀 격식을 차리는 경우도 검은 양복에 굴건을 써서 기묘한 장례식 패션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럼 이 검은 양복, 흰 소복의 풍경은 어떻게 정착된 것일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1969년 3월 5일 정부는 그 이틀 전 3월 3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서명한 ‘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한다. '가정의례에 있어서 허례허식을 일소하고 그 의식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하고 건전한 사회기풍을 진작'함을 취지로 한 이 ‘가정의례준칙’은 관혼상제 전반에 걸친 ‘권장사항’을 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상례(喪禮)에 해당하는 대목을 읽어 보자. “호곡은 삼가하게 하며, 상제가 머리를 풀거나 맨발이 되는 일이 없게 하며..... 상제의 복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남·녀의 양복·한복을 구분하여 한복은 흰 색, 양복은 검은 색의 평상복으로 하되 굴건과 머리테 등은 간단한 상장으로 대체한다. ”

읽다보니 많은 풍경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만 해도 상갓집은 아이고 데이고 곡소리가 진동을 했다. 수십 명이 몰려들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아이고 아이고 무슨 주문 외는 것 같이 부르짖던 풍경, 상주는 굴건 제복에 죽장을 짚고 문상객들을 맞았고 골목에선 천막이 쳐지고 고스톱 소리 드높은데 밤샘 술잔 소리가 드높던 모습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영안실은 무척이나 간소하고 조용하다. “한복은 흰 색, 양복은 검은 색”의 상주들은 더 이상 곡하지 않는다.

가정의례준칙의 취지는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었다고 본다. 얼마나 많은 허례와 허식이 있었으며 예를 차리다가 낭비되는 돈과 에너지는 얼마였던가. 그럴 때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고 그를 따르라고 권유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의 하나. “좋은 말로 해서는 좀체 먹히지 않는다.”는 것. 무소불위의 대통령 시대였다. 가정의례 준칙이 ‘권장사항’에 그쳐 무기력해지자 정부는 칼을 빼든다. 1973년 6월 1일 정부가 여섯 가지 금지 사항을 명시하고 그를 어길시 처벌할 것을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돌리면 안 된다. 화환을 진열하면 안 된다. 답례품을 주면 안 된다.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입으면 안 된다. 만장(輓章)과 상여를 사용하면 안 된다. 술이나 음식물을 대접하면 안 된다. 상제의 종류는 발인제와 위령제로 제한하고, 전통적으로 행하여왔던 노제·우제,삼우제는 금지한다. 상복은 평상시에 입던 복장에다가 규격화된 상장을 사용하도록 한다. 제사는 부모 조부모까지만 지낸다. 상주·제주 등 당사자, 위반자가 14세 미만인 경우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 등을 2백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즉결재판에 회부돼 5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당장 결혼식들이 줄줄이 취소됐다. 매주 문전성시를 이루던 예식장은 갑자기 시베리아로 변해 버렸고, 하객들은 축의금이 금지된 줄 알고 축의금을 가져오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예물 교환은 금지가 아니라 가급적 하지 말라는 권장사항이었지만 혼주들은 눈치를 보면서 갑자기 무 베는 칼에서 청룡언월도가 되어 버린 ‘가정의례준칙’을 주시했다. 굴건 제복을 입어도 벌금이었고, 청첩장을 돌리고 좀 호화로운 예식을 치를라치면 국세청의 눈초리가 번득였다. 허례허식 추방 궐기대회가 곳곳에서 뻔질나게 열려 애꿎은 목청들을 상하게 했다.

국민들의 일상을 법과 처벌로서 바꾸어 보겠다는 시도는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 허례허식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오늘날 결혼식과 장례식장에는 한 번 쓰고 버려 버리는 화환으로 가득하고 부조금에 허리가 휜다고 아우성을 치면서도 부조금 인플레이션은 끝을 모른다. ‘흰 한복과 검은 양복’ 이외에 가정의례준칙이 승리를 거둔 대목은 많지 않아 보이는 요즘, 그래서 오히려 가정의례준칙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그 연후에 머쓱해지는 이유는 정부가 국민의 청첩장을 단속하고, 상복에 시비를 걸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내면 호된 벌금을 두드려맞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 정부가 힘으로 국민의 일상을 바꿔 보려는 어이없는 시도를 하던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 정부가 이런 행동을 한다면 ‘미쳤다’는 소리를 못 면할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행해졌다는 얘기다.

그 절정 중의 하나가 1973년 3월 5일 벌어진다. 전국의 중국집에 ‘쌀밥 사용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한창 쌀 부족 말이 나오고 혼분식이 장려되던 때여서 그랬는지, 박정희 대통령이 유난히 싫어했던 화교에 대한 견제책이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정부의 한 마디에 전국의 중국집에서 볶음밥과 잡채밥이 사라져야 했고 중국집 주인들은 물정 모르고 볶음밥을 주문하는 손님들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하느라 천불이 나야 했다. 만약 이런 일이 오늘날 벌어진다면 헌법재판소부터 각 지방법원까지 위헌 소송부터 행정소송까지 봇물에 홍수가 날 것이 뻔하고, 역시 ‘미쳤다’는 소리에 걸맞은 행각이었건만 1973년 3월 5일 중국집 쌀밥금지령은 천연덕스럽게 발해졌고 성실하게 지켜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기사 가능할 것도 같다. 전의를 불태운답시고 병영 벽에다가 “김정일 쳐죽이자”는 구호를 쓰는 축이나 그걸 규탄한다고 15만명이 모여들어 읏쌰읏쌰를 한 후 ‘이명박’ 표지판을 세우고 사격 연습을 하는 축이나 어차피 다 같은 동족 아닌가. 21세기에 그 정도의 단순함과 아둔함을 겨루고 있다면 30년 전에는 무슨 일이 불가능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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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6일 식인호랑이의 법정모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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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6일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헌병 사령관이야."

대한민국은 자칭 법치국가다. 비록 그 말이 진담보다는 농담처럼 들린 세월이 길지만 그 시절에도 힘 쥔 자는 법을 통해, 법의 이름으로 철권을 휘두르고 목을 조르고 즈려밟았다. 그러니 법정이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고 자신이 관련된 재판인 경우 판사가 하느님처럼 높아 보이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1957년 ...3월 6일 이 판사를 앞에 두고 재판 똑똑히 하라고,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왕년의 사령관이었노라고 판사를 윽박지르는 대장부(?)가 있었다. 그 이름이 김종원이다.

당시 그의 직함은 치안국장이었다. 즉 요즘으로 하면 경찰청장보다 더 높은 급의 고위 관리였다. 그런데 그는 부통령 장면 저격 사건과 관련하여 법정에 나와 있었다.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이 어찌될지 모르는 판에 권력 승계 1순위였던 민주당 출신의 장면이 이기붕 이하 자유당 인사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민주당 계파 싸움의 소산으로 둘러댔으나 곧 꼬리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배후의 인물들이 끌려나왔다. 김종원도 그 의심을 받은 인물 중의 하나였다.

"재판 공정히 하시오! 나를 근거도 없이 배후로 몰고 있어! 법정도 못믿겠어! 맘대로 해!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헌병사령관이었어. " 판사가 법정모욕임을 상기시키며 퇴정을 명령했지만 그마저 무시한채 김종원은 재판정을 도때기 시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법치국가 재판정의 위신을 이토록 말씀 아니게 만든 김종원은 누구일까.

그는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다. 일본군 태평양 전선 가운데 최전방 뉴기니 전선에서 호주군과 싸웠던 그는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참담한 전황 속에서도 용케 살아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국방경비대 장교로 변신했다. 신분은 바뀌었으되 그는 흡사 얼치기 사극에 등장하는 못되고 사악한 일본군 오장의 전형이었다. 부하들을 야차처럼 괴롭혀서 해임과 복직을 반복했던 그는 여순 사건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되었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박격포를 쏘아 대는 바람에 아군에게까지 피해를 입혀 미군 군사고문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갓댐! 저거 뭐하는 자식이야.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본격적인 진압과정에서 그는 뉴기니에서부터 가져왔다는 일본도를 휘두르며 '빨갱이'들의 목을 쳐 나갔다. 남경대학살 때 중국인들을 상대로 또는 연합군 포로들을 상대로 목 베기 시합을 했던 일본군의 정기는 왕년의 식민지 출신 전직 하사관에게 유감없이 전승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일본군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일본군 장교들은 졸병들에게 잔혹하고 민간인들에게 악마같이 굴었지만 그들과 맞닥뜨린 적군에게도 역시 불가사의하고 무모할 정도의 용감성을 보였는데 김종원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전쟁 당시 3사단 23연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23연대를 맡은 미 군사고문들은 가끔 귀신처럼 현장에서 사라지는 연대장을 찾아 헤메거나, 무턱대고 후퇴하려는 김종원을 제지하느라 죽을동 살동 발버둥쳐야 했다고 한다. 미군 장교들은 이 무능한 장교가 부하들을 닦달하고 심지어 서슴없이 죽여 버리는 데에도 경악했다. 또 한 번 미군이 김종원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23연대 미군 군사 고문 푸트만 대위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한국군이 부산 교도소에 수감된 좌익수 3천 5백명을 몽땅 학살하려 한다.”는 보고를 올렸을 때였다. 수일 내에 인민군이 부산에 이를 것이고 그전에 빨갱이들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미 군사고문단은 김종원과 ‘협상’을 벌였고 인민군이 부산에 이르면 기관총을 사용해도 좋다는 승인을 해 주고서야 김종원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그 뒤 미군의 기록은 없지만 학살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김종원은 경상도 경산 출신으로 백두산 근처에도 안가 본 주제에 ‘백두산 호랑이’라는 근사한 별명을 지녔고 미군들에게도 ‘타이거 킴’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 호랑이는 적에게는 고양이고 부하들이나 민간인들에게는 식인호랑이였다.

거창 학살 사건 때 국회의원 진상 조사단에게 공비를 위장하여 총질을 했던 그는 이 사건으로 군을 떠난 뒤로는 경찰로 변신했고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경남경찰국장 시절 참모회의 중에 인플레가 서민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대뜸 “어이 수사과장 당장 인플레란 놈을 잡아와!”라고 일갈했던 이 무식한 인간은 결국 치안국장, 요즘의 경찰청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보직을 차지하게 된다. 경찰 정복에 말 타고 도심을 누비기를 즐겼던 이 희한한 고양이과 짐승은 경찰서장을 공개리에 두들겨패는 등 망나니 짓을 계속한다.

그의 출세 비결은 ‘무조건 충성’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공비로 가장해 국회의원들에게 총질한 것을 필두로, 이승만이 미국 대사와 말다툼을 벌이자 누가 우리 대통령 각하에게 대드냐면서 권총을 들고 뛰어들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더 말할 것이 없다. 친구를 알면 그 사람을 안다고 이런 인간이 충신이라고 애지중지했던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참 알만한 양반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장면 부통령이 총에 맞을 당시에도 김종원은 치안국장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몰매를 맞은 범인을 데리고 경찰병원으로 데리고 간 다음 경찰간부에게 범인이 배후 관계에 대해 할 얘기를 연습시킨 다음 천연덕스럽게 민주당 계파 싸움이 원인인 것 같다고 기자들에게 말한 것도 김종원이었다. 그리고 1957년 3월 6일 “판사! 당신 재판 똑바로 하란 말이야.”를 부르짖는 초유의 법정모욕을 벌인 것도 백두산 식인 호랑이 김종원이었다. 4.19 이후에야 그는 장면 암살 기도 사건의 배후로 기소되지만 병보석으로 나와 편안하게 세상을 뜬다.

무모한 돌격 명령을 내린 후 재고를 요청하는 부하를 쏘아 죽이고, 인민군과 맞서 싸울 생각 이전에 죄수들 먼저 죽일 생각에 여념이 없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은 군대에서는 물론 경찰에서도 최고위직에 올랐고, 오늘도 경찰청장 방에 걸려 있는 역대 경찰의 왕별들의 초상화의 한 임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느 일본군 하사관의 인생 역정 참으로 화려하고도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앞뒤 안가리는 무모함, 외부의 적 앞에서는 고양이, 제가 지켜야 할 국민 앞에서는 식인호랑이가 되는 유연함, 밥 주는 주인에게 물불을 안가리는 충성심,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무식함과 촌스러움 등등 김종원이 지녔던 품성은 마치 유전처럼 대한민국 군과 경찰을 가로지르고 있다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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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3.9 우리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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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0. 3. 9 우리들의 죽음

1990년 3월 9일 한 집에서 불길이 솟았다. 불길은 지하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방관들이 기를 쓰고 불을 끄고 화재 현장을 돌아보았을 때 그들 모두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방문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현관도 밖으로 잠겨 있었다. 아이들은 그 작은 손톱으로 열리지 않는 문을 긁어대다가 화마에 휩싸였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 있었고, 어머니는 반나절 파출부로 남의 집 마루를 닦고 있었다.

부엌에만 나가도 연탄불이나 식칼 등 다칠 구석이 많고 밖에라도 나가면 길이라도 잃을까 두려웠던 부모는 다섯 살 세 살 아이들을 방 안에서 놀게 하고 문을 잠갔다. 조금만 있으면 엄마가 올게 약속을 남기고. 그러나 아이들은 살아서 엄마를 보지 못했다.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박은 채 숨져 있었다.

나는 꽤 감정이 무딘 사람이다. 대학 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밤을 새며 울었다는 동료들이나 감성적인 노래를 부르며 펑펑 눈물 흘리는 주위 동료들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생겨먹어서 이럴까 장탄식을 한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1990년 3월 9일 허무하고 애처롭게 죽어간 남매의 사연을 노래로 만든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에게만큼은 대책이 없었다. 그 시작 멜로디만 들어도 눈물이 찔끔거렸고 노래의 말미에는 노상 애꿎은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야 했다. 지금도 기나긴 절창의 전부를 적어내리다가는 주책없이 또 눈물보가 터질 것 같아 그 마지막 나레이션만 적어 보면 이렇다.

“엄마 아빠 슬퍼하지 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니야.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뚱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내게는 이 노래에 얽힌 유쾌하지 않은 추억이 있다. 저 슬픈 사건이 있은지 얼마 후의 어느날, 술 한 잔 걸치고 버스 차창에 머리 기대고 잠을 청하는데 뒤에 앉았던 중년의 부부가 남매의 일을 화제삼는 것이 들렸다. 건성건성 넘기고 있는데 둘의 대화가 갑자기 화전(火箭)이 되어 내 귓전을 뚫고는 머리 속에서 폭발했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리바이벌이 가능한 그 대화는 이런 것이었다.
“몇 푼이나 번다고...... 여편네가 문 잠그고 나가서 그 지랄을 하게 했는지. 남편이나 여편네나 똑같다.”
“맞아요 무조건하고 애들은 엄마가 있어야 돼.”

솔직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시내버스 타고 다니는 처지로 미루어 “싸장님”과 “싸모님”도 아니었다. 나름 그 슬픈 사건에 가슴 아파하는 빛이었고, 딴에는 안타까움을 표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성을 잃었다. 그리고 부부는 내게 봉변을 당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우연히 올라탄 동문 선배가 필사적으로 말리고 혼이 빠진 부부가 황급히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경찰서 신세를 졌을 것이다. 마치 내가 죽은 아이들의 아비라도 되는 양 악을 썼고 엄마라도 되는 양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퍼부어댔으니까.

바로 그 며칠 전 정태춘 공연에 가서 그 노래를 들으며 엉엉 울었던 기억이 가시지도 않은 나의 뒤통수에 대고 악담을 쏟아 냈던 중년의 부부는 참으로 불운하였다. 행여 다시 만난다면 무례를 사과하고 싶다. 기실 나를 정말로 화나게 했던 것은 “애들은 엄마가 길러야지.” 하는 당연하지만 지극히 폭력적인, 속 편하지만 그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명제 때문이었다.

요즘에사 맞벌이가 당연시되고 오히려 집안에 있으면 남편 눈치가 보인다지만 당시만 해도 “접시와 여자는 내돌리면 깨진다”는 비열한 신화의 뿌리가 깊었고, 아이들을 위한 보육 시설같은 것은 부족하다 소리 드높은 지금에 비해도 형편이 무인지경이었던 때였다. 그리고 탁아나 보육 시설의 확대를 논하면 “애들은 엄마가 길러야지.” 하는 논리가 정면으로 박치기를 하고 나서는 분위기였다. 보육은 부모 책임이지 사회가 뭘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암담함 속에서 파출부 나가는 엄마는 자물쇠를 잠가야 했고 아이들은 뜨거워지는 벽과 문을 긁어대다가 숨이 막혀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명제는 어쩌면 가장 옳은 명제인지도 모른다. 법대로 하면 되고, 가정은 지켜져야 하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옳고 지당한 책임을 사회가 전담 내지는 분담하지 않고 개인에게 떠밀 때, 옳아서 더욱 단단하고 마땅하여 배로 갑갑한 명제의 동앗줄들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목을 잡아 죈다.

<긴급출동 SOS 24>가 한창 방송되던 시절, 꽃샘 추위 지독하던 3월 초입의 어느 날, 어느 PD는 주변의 도움도, 기관의 개입도 혹여 자식에게 누가 될세라 결사적으로 거절하고 열악한 골방에 드러누워 연명하던 할머니를 만났다. 노인들은 아동과는 달리 본인의 의사에 반한 주거 이동이나 분리가 어렵다. 오히려 그것이 노인들에게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만나고 왔던 PD는 무슨 수를 쓰든 거기 계시게 하면 안될 것 같다며 며칠 동안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퀴퀴한 냄새 그득하여 기관 사람들도 코를 싸매야 들어가던, 햇볕도 들지 않고 온기도 전혀 없는 골방에서 색색거리며 힘겹게 호흡하면서도 자식 흉이라도 보면 성을 내면서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할머니. 식민지 시대의 고달픈 딸로 태어나 전쟁을 치루고 그보다 더 참혹할 수도 있었을 일상의 전투를 겪느라 만신창이가 되었던 할머니가 마침내 반가울 수도 있는 죽음을 맞았을 때 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아마 나지막히 이렇게 읊조리지는 않았을까. “우리들의 죽음”의 아이들처럼.

" 아들아 내 딸들아. 죄스러워하지 마라. 이건 너희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둘째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도저히 안되겠다고 포기하라 할 처지만 아니었더라면,
셋째가 죽어갈 때 팔 집이라도 있어 치료비를 댔더라면,
너희들 하고 싶은 거 하나라도 똑똑히 해 준 부모였다면
너희들을 원망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아니지 않았니.
진작에 끊겨야 했을 목숨 질기고 질겨 이제야 너희 어깨를 떠난다만
하늘나라에는 내 가서 먼저 간 셋째와 함께 터를 잡고 있으마.
거기서는 너희에게 한을 물려주지 않으마.”

1990년 3월 9일 연기에 질식하고 불길에 휩싸여 죽어간 남매의 명복을 빈다. 다시는 이렇게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가를 찌르고 코끝을 맵게 잡아당기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란다. 비록 부질없는 소망이라지만.

그 노래를 다시 듣는다.

http://www.youtube.com/watch?v=RCXYXYdL3-w

공자의 아랫 사람 판단법 , 산하의 윗사람 판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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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사람을 쓸 때에

1. 먼 곳에 심부름을 시켜 그 충성을 보고,
... 2. 가까이 두고써서 그 공경을 보며,
3. 번거로운 일을 시켜 그 재능을 보고,
4. 뜻밖의 질문을 던져 그 지혜를 보며,
5. 급한 약속을 하여 그 신용을 보고,
6. 재물을 맡겨 그 어짐을 보며,
7. 위급한 일을 알리어 그 절개를 보고,
8. 술에 취하게 하여 그 절도를 보며,
9. 남녀를 섞여 있게 하여 그 이성에 대한 자세를 보는 것이니,

이 아홉가지 결과를 종합해서 놓고 보면 사람을 알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산하도 말했다. 소인은 상사를 모실 때

1. 먼 곳에 심부름을 갔다가 함흥차사가 되어 그 인내력을 보고,
2. 가까이 모시다가 가끔 개겨 그 관용을 보며,
3. 번거로운 일을 미뤄 그 지혜를 보고,
4. 뜻밖의 일정을 만들어 그 임기응변을 보며,
5. 굳이 아침 7시 약속을 했다가 우리는 9시에 나와 그 부지런함을 보고,
6. 양주 댓병 시킨 뒤 술값을 내게 하여 그 어짐을 보며,
7."나 사표 쓸라요." 해서 나를 잡나 안잡나 그 절개를 보고,
8. 술에 취하게 하여 상일동이 집인 사람을 진관내동으로 대리운전시킨 뒤 그 절도를 보며,
9. 남녀를 섞여 있게 하여 그 이성에 대한 자세를 보는 것이니 (이건 진리라 바꿀 수가 없네)

이 아홉가지 결과를 종합해서 놓고 보면 상사를 알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991.3.10 박노해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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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1.3.10 박노해 체포, 우리의 하늘

 김문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986년의 어느 날 잠실 주공아파트에 은신 중이던 김문수는 갑자기 밀어닥친 기관원들에게 연행된다.  그리고 그는 상상을 절하는 고문을 받는다.   온몸을 부수는 듯한 고문을 가하며 기관원들이 김문수로부터 빼내고 싶어했던 정보가 있었다.  그 중의 한 이름이 박노해였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1984년 그가 서른도 많이 모자랐던 해에 내놓은 <노동의 새벽>은 군사 정권의 금서 딱지 속에서도 근 백만부가 팔려 나갔다.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붓는 찬 소주"는 철야노동 한 번 한 적 없는 학생들에게도 생생한 싯귀였고 "묵묵히 일하고 시키는대로 따르고 주는 대로 받고 항상 복종함이 안정 사회 이루는 노동자 도리"라고 갈파한 시인의 직관은 지금도 그 날이 시퍼렇다. 

 군사정권은 대체 누군지도 모를 이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준말인 박노해를 잡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박노해는 시인을 넘어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한 조직의 지도자이자 아이콘으로 성장했다. 사노맹 대표위원 박노해.  노동해방문학의 필진 박노해.  

 사노맹이라는 이름은 내게 보투(보급투쟁) 하나는 극성맞다고 표현할 정도로 열렬하게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조직원들끼리 위장결혼을 하여 그 부조금을 조직에 헌납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 닐러 무삼하리오. 그들의 보투 과정에서 박노해의 이름도 자주 인용되었다.  폐병에 걸려 죽어가는 민중시인 박노해를 돕자는 말을 들은 게 다섯 손가락은 넘는다.  

 1991년3월10일 드디어 안기부는 얼굴 없는 시인의 얼굴을 공개할 수 있었다.  무려 7년 동안 얼굴 없는 시인으로 살았던 박노해는 그물에 걸린 호랑이같은 눈빛으로 세상을 쳐다보며 포효했다.  가라 자본가 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박노해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까지 가지게 했던 시인은 그렇게 강렬하게 세상을 향해 드러내졌다.  

 체포된 후 그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조간신문을 망연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신비에 싸여있던 시인은 공안 기관의 우악스런 손길에 알몸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사뭇 호화롭기까지 했다는 그의 도피 생활부터 여자 문제까지 그를 법적인 죄인이자 악질 빨갱이일 뿐 아니라 도덕적 파산자로 몰아가려는 노력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는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다가 석방됐다. 그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 나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를 여전히 존경하는 사람도 있고 험악한 욕설 아니면 차가운 냉소를 그의 이름에 거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여러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엉덩이를 찔러 대고 주먹을 부르쥐게 했던,  수고하고 무거운 짐 든 사람들 폐 속 가래같던 싯귀들을 토해낸 것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값을 한 것 같다고 말이다.  

언젠가 지하철 촬영 중에 그야말로 초짜 행상 아주머니를 만난 적 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수세미 꺼내는데도 몇분씩 걸리고 차안에 계신 여러분소리도 모기소리만하던.   지하철을 타고 몇 바퀴 돌다가 플랫폼 한쪽 벤치에서 한 남자가 침을 튀기며 한 아주머니에게 강의(?)를 하는 걸 봤다. 아주머니는 아까의 그 행상이었다.  

 ""아는 사람 만날까 두렵고 공익한테 끌려갈까 겁나죠? 나도 그랬어요. 처음 장사 나와서 어리버리, 아줌마처럼 그러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물건을 사 주면서 그러시더라구요. 당신 지금 부끄러워서 말 못하는데, 이러고 내리면 더 부끄러울 거라고......"

그러기를 한참, 강의 시간이 다 끝났는지 남자가 자기 짐을 챙겼다.   그리고는  불쑥 아주머니에게 수세미 하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강의료라도 받겠다는 것이었을까.   말씀 감사하다며 고개 주억거리던 아주머니도 수세미를 냉큼 내밀었다.  그때 지갑 장사는 내가  기겁을 하고 놀랄만큼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줌마 구걸 나온 거 아냐! 왜 공짜로 뭘 줘요. 돈 받고 팔아야지." 그리고 그는 돈을 아주머니에게 쥐어 주고는 자기 짐 챙겨 전철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아주머니에게 외친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아줌마 나도 한 달 됐어요!"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간 행상 수업(?)을 참관한 뒤 내 머리 속에는 까마득히 잊혀졌던 예전의 싯귀 한 소절이 연기처럼 피어 올랐다.  박노해의 <하늘>이었다. 
........
높은 사람, 힘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만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아장 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겠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어깨를 짓누르고 목구멍을 죄어드는 먹장구름같은 삶의 무게 속에서 지갑 장사 아저씨는 수세미 아주머니에게 아주 작지만 푸르른 하늘이었을 것이다. 서로를 받쳐 올리며 마음이 푸르러지는 그런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세미 아주머니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하늘이 되어 주지 않았을까.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하늘.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인 세상.  힘없고 보잘것없더라도 사람이 사람에게 하늘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지하철의 해프닝을 보면서 나는 이 따뜻한 모습을 빗댈 수 있는 시를 지어 준 박노해에게 감사했다.  저렇게 사람이 사람에게 하늘이 될 수 있는 거구나.  사람이 사람에게 기댈 수가 있는 거구나.   

 1991년3월10일 그는 독기넘치는 눈빛과 카랑카랑한 모습의 사회주의 혁명가로 수갑을 찼다.  비록 그 후 그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했든 묶였던 손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한 페이지를 차지할 노동의 시들을 창조해 냈던 손이었다.  

1971.3.11 존경받는 기업가 유일한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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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1년 3월 11일 존경받는 기업가 유일한 지다.

전경련이나 기타 기업주들의 모임에서 즐겨 나오는 소리가 ‘반 기업정서’다. 성실히 일하여 이윤 내는 기업인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고, 기업하면 죄 돈에 눈이 벌건 흡전귀들로 보는 시각이 너무나 팽배하여 대한민국에서 기업해 먹기 참 힘들다는 한탄이 되겠다.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으며 때지 않은 굴뚝에 매연이 시커멀 리 있는가. 반기업 정서라는 ...것의 원흉은 대개 기업인들 자신임을 인정하고서야 반기업정서는 잦아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1971년 3월 11일 오늘 세상과 이별한 아주 특별한 경영주 유일한의 죽음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유일한의 생을 더듬어 올라가면 유일한도 유일한이지만 그 아버지 유가연의 행보에 일단 경악하게 된다. 평양 사람으로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 유기연은 청일전쟁을 만나 강계로 피난가는 와중에 장남 일한 (초명은 일형)을 얻는다. 수완 좋은 사업가로서 세계적 미싱사의 평양 지점을 운영하기도 했던 아버지 유기연은 빨리 개화된 문물을 습득해야 나라고 사람이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장남 유일형이 아홉 살이었을 때 미국으로 보내 버린다. 무슨 연고지나 연고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외교관의 순방 행렬에 딸려 만리타향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중학교 시절 학비를 위해 신문 배달을 하던 일형은 보급소장이 ‘형’자가 발음하기 어려웠던지 자기 맘대로 ‘일한’으로 표기한 것을 보게 된다. 소년은 그 이름에서 한(韓)자를 떠올렸고 한 자가 들어간 이름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아버지와 상의했다. 아버지의 답장이 왔다. “바꿔라. 네 동생들도 돌림자를 한으로 하겠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을 얻은 유일한은 미시건 대학 상과를 졸업하고 제너럴 일렉트릭 등에서 진귀한 동양인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디트로이트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손댄 것은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숙주 나물 통조림이었는데 아직 보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잘 변하고 쉬어버린다고 배신자 신숙주 나물이라고 불리웠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인 숙주나물의 신선한 유통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유일한은 연구 끝에 숙주나물 통조림을 고안해 냈고 친구와 함께 라초이라는 식품 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이제는 홍보가 문제였다. 그러자 유일한은 일종의 파격적인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숙주나물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시내 가게의 쇼윈도로 돌진한 것이다. 일대 소란이 빚어지고 기사가 크게 떴다. “숙주나물 가득 실은 라초이 회사 트럭 쇼윈도로 뛰어들다.”

거래선 확보를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20년만에 귀국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선인들의 참상이었다. 동포들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다. 미국 사업을 정리하고 고국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전단계로 그는 미국에서 조선 진출을 염두에 두고 유한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지금까지 유한양행의 상징이 되고 있는 버드나무 상표는 재미교포들의 지도자격이었던 서재필이 제안했던 것이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설립, 동포들을 상대로 한 기업을 세운다.

그의 경영 방침을 말해 주는 일화 하나. 한 직원이 시장 조사를 하고 와서 “사장님. 마약중독자들이 증가하고 있어서 모르핀, 헤로인 제제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걸 만들어 팔면.....”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유일한은 노발대발 그를 내쫓아 버린다. “내가 자네 머리 속에 넣어 준 게 고작 그런 것이나 생각하라는 거였나? 이런 고얀.”

마약성 진통 성분을 강화한 약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 때에도 유한양행은 그를 거부했다. 되레 이윤은 남지 않지만 꼭 필요한 분야에 투자를 했고 ‘버들표’에 대한 신뢰는 그만큼 굳어 갔다. 30년대 유한양행은 보관료가 비싸서 다른 회사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던 긴급약품들, 맹장염 혈청과 뇌척수막염 혈청 보관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각처의 병원들에게 제공할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으로 간 뒤 전쟁이 터져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또 하나의 엉뚱한(?)일에 개입한다. OSS가 조직한 조선 국내 진공 특공 작전 ‘냅코’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죽은 지 40여년만에 밝혀진다.

유일한은 기업가로보다 교육자로 불리기를 원했다. 6.25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세워 한국고등기술학교 (유한공고)의 첫 신입생을 받는다. 돈을 버는 대로 교육 사업에 쏟아붓는 그를 만류하는 이들에게 유일한은 이렇게 답했다. “교육이란 건 제 때 투자해야 되거든.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에서 소외되는) 희생을 강요해선 안돼.”

정치자금을 바치지 않아 이승만 (이승만과는 미국에서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과 박정희 정권 내내 뻔질나게 세무사찰을 받았지만 세무서 관리들까지 감탄할 정도로 깨끗하게 기업을 운영했으며, 회사에서 사택을 지어 주자 자신의 주식 배당금으로 그 대금을 지불했고, 유한양행에서 나온 약조차 자비로 사 먹었고, 일단 자식을 불러들여 기업 운영을 맡겨도 봤지만 그 철학이 자신과 맞지 않자 주저없이 전문 경영인에게 자신의 회사를 넘겨 버린 경영자. 그가 유일한이었다. 그는 딸에게 유한공고 내의 토지를 상속하되 그를 유한동산으로 꾸며 줄 것을 유언한 후 조건을 달았다. “울타리를 치지 마라. 유한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어린 학생들의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보고 느끼게 해 달라.”

이 유언장을 남기고 1971년 3월 11일 유일한은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기업인의 사회적 양심의 평균적 촉수가 이 사람의 반만큼만 발달했더라면, 아마 우리 나라 기업인들이 개탄해 마지않는 ‘반기업정서’는 반 아니 1/10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무책임한 선물 거래로 수백 수천억을 날리고, 자기 자식에게 헐값에 재산을 물려 주려고 별 짓을 다하고, 온 나라를 ‘관리’라는 이름의 부패의 늪에 빠뜨리고, 노동쟁의가 일어나면 가처분 소송을 걸어 그 목을 죄어 버리는 기업인들이 내가 유일한보다 못한 게 뭐 있느냐고 왜 나를 존경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대단한 이율배반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당신들 이러면 진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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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인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에 대한 말들이 무성하다. 그가 전교조 위원장으로서 조직 내에서 일어났던 성폭행 사건의 처리 와중에서 행한 일들 때문이다. 무심했던 나는 이번 소동으로 전교조 내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는 기회를 가졌다. 이런 기회를 주신 정진후 비례대표 후보와 이정희 대표에게 감사드린다. 진심이다.

조직의 수장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집까지 제공했던 여성 조합원을 그 조직의 조직국장이란 녀석이 성폭행하려던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수습하는 와중에서 정진화 (헛갈리지 말자 정진후는 아니다) 전교조 위원장 이하 간부들이 사건의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며 피해자의 사법적 행동을 만류하고 사건을 조직적인 ‘은폐를 조장’하려는 행위를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정진화 위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 고소에 대한 부분은 피해자가 평범한 여성이 아니라 총체적인 탄압을 받고 있는 전교조의 조합원이기 때문에 공안 당국에 의해 최대한 정치적으로 활용 당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자신이 힘들어질 수 있음을 걱정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고소 후 피해자가 처할 수 있는 상황과 그로 인한 어려움을 말해주는 것은 일반 상담기관에서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정진화 전 위원장은 김보은 김진관 사건 때 전교조 대표로도 참여한 적이 있으며 스스로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한다고 썼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그 자부심의 정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제대로 된 ‘감수성’을 가진 이라면 성폭력의 피해자는 “전교조의 조합원에 앞서 평범한 여성일 뿐입니다.”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성폭력의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총체적인 탄압을 받고 있는 전교조의 조합원”임을 상기시켜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성폭력을 당한 여성, 조직의 수장을 보위하기 위해 자신의 집 한 켠을 내 주었던 여성에게 ‘공안당국에게 정치적으로 활용’당할 위협을 고지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행동이었는지를 정진화는 윗글을 올릴 때까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하시는 그 감수성, 수우미양가로 치면 양이다. 이런 상담을 일반 상담기관에서 한다고? 상담 기관들이 명예훼손을 걸 일이다.



 더 가관인 것은 “전교조가 현 정권의 총체적인 탄압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정세의 절박함 속에서 위원장으로서 조직이 입을 타격과 전교조 조합원인 피해자의 피해사실이 왜곡될 것을 동시에 염려”하신 위원장님이 하사하신 염려의 내용이다. 정진화 위원장은 스스로 ‘두 번째 만남’에서는 고소하시라고 말했다지만 첫 번째 만남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건 피해자의 말을 들어보자. “정 전 위원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오랜 시간동안 고통 속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고소를 할까 한다'는 말에 위원장의 첫마디는'고소는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 첫 마디에서 벌써 정진화는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 위원장이 조직에 충실하다가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이에게 ‘고소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자체는 이미 ‘은폐 시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딸이 학교에서 성폭력을 당했는데 교장이 “꼭 고소하셔야겠습니까?”라고 하면 그 교장은 치아 임플란트를 통째로 하거나 최소한 다리가 부러질 것이다. 그런데 그 짓을 전교조 위원장이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증언은 설상가상이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과 당신을 내연의 관계인 것처럼 몰아가는 (언론)보도가 준비되고 있다고 시민단체 관계자에게 들었다. 이것 봐라. 고소하면 선생님이 힘들어진다.” 이쯤 되면 또 하나의 협박이고 명백한 2차 가해에 해당한다. 조중동이나 보수 언론이 그런 기획 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해도, 전교조 위원장이 할 일은 그걸 피해자에게 고해 바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좋다. 피해자의 증언일 뿐이며,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며 부인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정진화 전 위원장은 자신도 이런 말을 했다고 고백한다.



“‘검찰에 고소하고 싶으면 하셔라, 다만 민주노총에서 징계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투쟁이 한창 중이니 고소 시점만 좀 고려해 주시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



투쟁이 한창인 것하고 고소 시점과는 아무런 함수 관계가 없으며, 민주노총의 징계와 사법 처리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도대체 왜 성폭력의 피해자가 조직의 절차를 고민하고 투쟁의 한창을 고려해야 한단 말인가. 그 따위 투쟁 해서 뭐하고, 그런 조직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성폭력 사건을 두고 사회에서 횡행하는 “집안 망신” “조직 망신” 운운의 프레임 그대로를 본뜨고 앉았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투쟁의 고담준론을 펼치는 그런 조직이 어떻게 진보를 자처한단 말인가. 나는 그런 진보 필요 없고, 안할 거고, 반대한다.



자 여기까지 읽었으면 어떤 분은 짜증을 낼지도 모르겠다. “아 그래 정진화 나빠! 정진화가 나쁘다고! 하지만 비례대표는 정진후라고! 후!” 그렇다. 이정희 대표의 말에 따르면 "정 전 위원장은 2차 가해자로 지목받은 분이 아니었고 2차 가해자로 징계 받은 분들에 대한 재징계, 그 이후 조직 내의 문제를 다룰 때 조직위위원장“이었다. 그러니까 2차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옳다. 그런데 저렇게 뻔뻔하게 성폭력 피해자를 압박했던 (물론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압박의 느낌은 피해자의 것이다. 그게 피해자 중심주의다) 이들에게 내려진 ‘제명’ 처분이 ‘경고’로 뒤바뀌었을 때의 그 위원장이었다. 그리고 정진후 위원장과 정진화 위원장은 같은 정파 소속이었다.



정진후 위원장의 책임을 일단 뒤로 미루고 따져보자. 제명 처분을 경고로 격하시킨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도대체 어디 사는 누구이며, 성폭력 피해자에게 “선생님 조중동이 선생님을 이석행 첩으로 몰려고 한다는데요 어떡하죠?”라고 걱정(?)해 주는 조직의 수장, 투쟁이 한창이니 고소를 미루라고 권유하는 노동조합 위원장에게 ‘제명’이 아니라 ‘경고’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이 정녕 교사들인가. 나는 정진화고 정진후고간에 이 징계의 완화가 이 사태의 가장 큰 핵심이라고 믿는다. 이 징계 완화에 앞장선 이들이 그들의 학교에서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교장 선생님 정년도 얼마 안남았는데......” 또는 “대학 입시가 코앞인데......” “결국은 너만 손해볼텐데.”라면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빼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나는 적어도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교직을 내놓아야 한다고 믿으며, 그것이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전교조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참교육한다고 목청 높이던 집단이! 그 조직의 위원장이!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경고’ 정도로 끝낼 일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런 동네 시궁쥐도 통곡할 일이!

그때 정진화와 같은 정파에 속해 있던 교사들이 했던 막말을 다시 늘어놓지는 않겠다. 하나만 소개하면 그들은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피해자 마음대로주의냐.” 그때 피해자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페북을 하다가 한 통진당 지지자로 여겨지는 한 선배의 말에 그만 분통이 폭발하고 말았다. 바로 이런 식으로 매도되었으리라 이런 식으로 코웃음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실감케 하는 멘트였다.



“솔직히 전교조 내 교찾사라는 조직이 정진후 후보에 대해 마타도어를 퍼뜨리며 비난하는 것 아닙니까? 정진후 후보가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겠으나 전교조 위원장 임기 마칠 때까지 이런 정도로 문제제기가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특정한 목적을 갖고 문제제기를 계속하는 집단이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결국 피해자는 ‘교찾사’라는 조직의 마타도어의 수원지에 불과하게 된다. ‘특정한 목적을 갖고’ 비례대표 정진후에게 문제 제기하는 세력의 일원이 된다. 현재 피를 토하며 정진후 비례대표의 비례 대표 지명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교찾사인지 무엇인지 하는 단체가 아니라 성폭력의 피해자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배신하고 그녀에게 상처를 안겨 준 조직의 수장들에게 솜방망이를 안겨 준 세력, 그들이야말로 날선 마타도어로 피해자를 공격했었다.



나는 이 사건의 내막을 전혀 몰랐다. 하지만 정진후의 이름 석 자가 들먹여지면서 내막을 알아보게 됐고, 결국은 분노에 몸을 떨며 새벽을 맞을 수 밖에 없게 됐다. 전교조에게 묻는다. 통진당에게 묻는다. 꼭 정진후 위원장을 내세워야 했는가. 이렇게 한 피해자에게 박힌 독화살의 상처를 되새기게 하고, 전교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그 사람을 택해야 했는가. "조직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당시 대의원들에게 '내가 스스로 위원장으로서 잘 처리를 못 했으니까 경고조치를 받겠다'고 자청했던 분" (이정희 대표)이면 면책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정진후를 무등태우고 정진화를 구원한 그 ‘부족한’ 조직의 비도덕성과 무신경함과 뻔뻔스러움은 과연 정진후 위원장과 무관할 수 있는 것인가. 수십 년 교육 운동의 역사에 사람이 그렇게도 없다면, 이건 무능의 소치인가 무책임의 결과인가 무식함의 전형인가.



정말로 창피하다. 당신들 이러면 진보가 아니다. 전교조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통진당에게, 더 찍어 말하면 오불관언 정진후 위원장 카드를 놓지 않고 있는 이정희 대표에게 묻는다. 성폭력 피해자 여성에게 “투쟁이 한창이니 고소를 미뤄 달라”고 얘기하는 위원장 따위가 전교조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는가. 그리고 그 징계 완화 중심에 서 있었던 위원장은 정말 책임이 없는가. 꼭 그분만이 비례대표가 될 수 있다고 우길 것인가. 만약 고집스레 예스 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화살을 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정진후 위원장의 인품은 훌륭하다고 들었다. 능력도 있다고 들었다. 그 아까운 재목을 찍어 내고 있는 것은 당신들이다. 당신들 그러면 정말 진보가 아니다.

의심한 후에 분노하라 - 관악 종북좌파 대자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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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음식점에서 종업원과 임산부 손님 간에 시비가 벌어져 종업원이 임산부의 배를 차는 등 무지막지한 폭행을 가했고, 사장은 보고만 있었다는 호소가 인터넷을 달군 적이 있었다. 트위터는 살인미수로 그 종업원을 다스리라는 분노 어린 RT의 쓰나미로 뒤덮였고, 체인점 본점 측은 백배 사죄하며 해당 분점을 폐쇄하겠노라고 바짝 엎드렸다. 그런데 피해자라는 임산부가 올린 글을 읽다가 문득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다가 종업원이 “나 너보다 돈 많거든!”이라고 언성을 높이며 시비를 걸었다는 부분이었다.


 대개 이런 멘트는 대개 “사람을 뭘로 보고?”류의 후렴구다. 즉 뭔가 인격적인 모욕 또는 모멸적인 언행이 있은 뒤에 등장하는 대사인 것이다. 그래서 임산부를 폭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살인미수적 행위라는 것에는 아무 이의가 없으나, 내막은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별 뜻 없이 트윗을 끄적였는데 그 순간 나는 폭력 옹호자에 임산부의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에, 심지어 문제의 음식점 종업원으로 취직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격렬한 멘션이 신기전처럼 날아들었던 것이다. 임산부 폭행의 죄질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 파악 후에 돌을 주우러 다녀도 늦지 않다는 얘기라고 변명을 해도 도대체 무엇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냐며 통분하여 가슴을 치는 사람 앞에서는 사실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얘길 하겠는가.



아마도 CCTV가 없었다면 그 음식점은 꼼짝없이 문을 닫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CCTV에는 상당 부분의 정황이 잡혀 있었다. 종업원이 임산부를 뒤에서 밀어 넘어뜨린 것은 맞지만 (임산부임을 알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한다) 쌍방이 폭행을 교환했다. 사장도 ‘멀거니 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뜯어말리려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 화면 앞에서 임산부의 증언은 150도 정도 뒤집어졌다. (폭행의 시작은 종업원이 맞으니) 시비는 있었으나 임산부의 배를 걷어차는 야만적인 폭행은 없었다. 사람들이 가장 격하게 반응하고 열띠게 흥분했던 바로 그 부분이 팩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한 가치 판단이라는 ‘살’은 팩트 확인이라는 ‘뼈’를 구한 다음에야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순서가 뒤바뀌면 연체동물이 되어 흐느적거리거나 ‘빛나는 해골에다 갈비뼈가 열 두 개’가 살 위를 덮은 괴물의 형상이 창조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멋모르고 쏘아붙인 섣부른 화살들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어제 오후 인터넷과 트위터를 달궜던 ‘종북좌파’ 플래카드 소동을 돌이켜 본다. 처음 기사를 접했을 때 내가 일으킨 반응은 ‘민주당 내 꼴통들’에 대한 혀를 차는 것이었다. 어쨌든 단일후보를 뽑겠다고 경선을 치르는 상대방을 두고 ‘종북좌파’로 몰아붙이는 것은 스스로의 얼굴에도 먹칠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어디 보수색 짙은 지방의 지역구도 아니고 명색 서울의 지역구에서, 수구세력에게는 종북좌파의 수령 격으로 매도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든다 할 민주당 후보가 ‘종북좌파에게 관악을 맡길 수’ 있니 없니 하는 건 몰상식의 극치였고, ‘임산부 배를 발로 차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일이었다. 이 어이없는 행동에 대한 분노는 역시 또 하나의 쓰나미가 되어 해당 지역구의 민주당 김희철 후보 사무실을 덮쳤다. 자업자득이라 생각했다. ‘후보와 관계없는 직원의 실수’ 정도의 변명과 더불어 ‘이는 후보와 무관하며 후보 또한 햇볕정책의 충실한 지지자임’을 밝히는 소회 정도가 덧붙여지는 것으로 해프닝이 마무리되리라 여겼다.


그런데 김희철 후보측은 강력하게 부인한다. 자신들이 붙인 플래카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플래카드를 보긴 봤지만 ‘너무 높은 곳에 걸려 있어서’ 떼지 못했고, 자신들을 욕하는 내용도 아니어서 그냥 놔 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 변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명색 제1 야당 사무실에 밟고 올라갈 의자 하나 없다는 말인가. 솔직히 입밖에 낼 수는 없을망정 속내는 다르지 않았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누구를 죽일 놈이라고 여기고 누가 죽었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것과 실제로 칼을 드는 것과의 차이가 천양지차인 것처럼.



 라운드는 본격적으로 바뀐다. 그럼 그 플래카드는 누가 붙인 것인가. 진지하게 상황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우선 플래카드가 붙은 위치가 너무 황망했다. 모름지기 플래카드란 자신의 뜻과 존재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서, 또는 내부 구성원들의 단결과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붙인다. 김희철 후보 측이 이정희 후보의 ‘종북좌파적’ 행동을 부각시켜 색깔론을 제기하고자 했다면 신림사거리 한복판 또는 사무실 건물 외벽에 붙이는 것이 맞고, 내부적으로 읏쌰읏쌰를 하려고 했다면 사무실 안에 붙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플래카드는 ‘사무실 아래층 복도’에 붙어 있었다. 근처에 있다는 노래방 손님들을 겨냥한 플래카드였을까? ‘한 번 반응을 보려고’ 조심스레 사무실 복도에 붙인 것일까?


 더 재미있는 것은 플래카드의 로고다. 민주통합당 로고아래 글씨의 색깔은 원래 녹색이다. 그런데 플래카드상에 있는 글씨는 검은색으로 보인다. 이쪽에는 말짱 문외한인 처지라 뭐라 할 말은 없는데 페친들의 말로는 보통 당 로고같은 것은 그림 파일이기 때문에 글씨 색깔만 검은색으로 바꿀 수는 없다고 한다. 글씨 색깔만 검은색으로 바꾸자면 그것도 하나의 일이라는 것이다. 즉 김희철 후보측은 로고 파일까지 새롭게 만들어 야심차게 제작한 플래카드를 사무실 아래층 복도에 붙여 놓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받은 사람과 경험 많은 지역구 선거참모들의 지능지수가 이번에 제주 앞바다에 방사된다는 돌고래보다 못하다는 결론인 것이다.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팩트를 확인하려면 일단 합리적 의심이 필요하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회의해 보아야 안다. 김희철 후보가 이정희 후보와 통진당을 ‘종북좌파’라고 몰아부쳐서 얻을 이익이 무엇이며, 이 일이 불거졌을 때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며, 두 후보가 이렇게 네가 했네 안했네 드잡이질을 할 때 또 누가 웃고 있을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고 가늠을 잡은 후에 분노의 호스를 열어도 결코 늦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의 폭은 최대한도로 넓어야 한다.



정말로 김희철 후보와 그 참모들이 돌고래들일 수도 있다. 일단 물증(?)이 그 사무실 근처에서 나왔으니 용의 선상에서 어찌 배제하랴. 또 일찍이 수십년 골수 김대중과 민주당 지지자라도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의 눈에 이정희 대표 등등이 종북좌파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제딴엔 의기에 넘쳐서 그런 플래카드를 제작해서 붙이는 돌발행위를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소동의 액면상의 피해자이면서 가장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이정희 후보 측이다. 개인적으로 이정희 후보의 인품은 믿지만, 그녀를 둘러싼 구 민주노동당 내 ‘경기 동부연합’이 ‘씨근거리는 백마’ (연전에 당내 정보를 북한에 전달했던 최기영 등이 당내 인사를 두고 묘사한 표현이다.)처럼 치고 달리며 저지른 행동들을 기억해 볼 때, 그 가운데에서도 빼어난 맹동분자들을 의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이런 플래카드를 내붙임으로써 쌍방의 갈등을 조장하여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제 3의 범인이 어둠 속에서 미소 짓고 있을 수도 있다. 1공화국 시절 부통령 장면을 쏜 범인은 조병옥 만세를 불렀었고, 80년대 통일민주당을 공격했던 용팔이류는 ‘신민당 사수’를 부르짖지 않았던가.



분노도 진인사 대천명 이다. 천인공노할 일이 터진다 하더라도 먼저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과연 이 분노의 내용은 무엇이고, 그 근거는 정확한가를 따진 연후에야 하늘의 분노를 청할 수 있을 것이다. 눈 앞에 벌어진 현상에만 천착한 즉자적인 분노가 부른 참화는 역사서 비로 쓸어낼 듯이 많았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댓가는 분노를 토한 사람들에게로 되돌아왔었다. 분노할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며 의롭고 마땅한 일이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며 불의하고 비겁한 짓이다. 그러나 분노 이전에 합리적 의심과 냉철한 판단을 곁들이지 않는다면 그 분노는 결국 엉뚱한 과녁을 향하는 불화살이 될 수도 있을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식당의 예에서, CCTV와 경찰 수사로 진상이 밝혀지기 이전, 임산부 배를 발로 찼다고 규정된 식당 종업원은 그 며칠간 모르긴 해도 지옥을 보았을 것이다. 시비가 붙은 손님을 뒤에서 밀어 넘어뜨린 허물은 분명히 있으나 그 외 하지 않은 일 때문에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을 고용한 사장까지 쪽박을 차게 생겼고 천하없는 악녀라는 손가락질까지 받았지 않았는가.



이 중대한 사안, 그리고 본인이 피해를 본 사안에 있어서 김희철 후보가 경찰에 수사 의뢰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 점에서 지금의 내 의심의 나침반은 김희철 후보 진영으로 좀 더 기울어 있다. 김희철 후보가 정말로 결백하다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더라도 이 사건의 내막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종북좌파’라는 표현은 ‘숭미사대주의정당’ 처럼 정치적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 즉 그 말을 썼다고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본인은 통합진보당과의 야당 연대를 선언한 민주당 후보로서의 자격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하고, 무엇보다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만약에 범인이 다르다면? 그것은 아마도 더 큰 일이 될 것이다.



아직 진실은 분명하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이지 불분명한 진실을 불쏘시개로 한 분노는 아니다.


1955.3.17 동아일보 정간 - 그놈의 괴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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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5년 3월 17일 그놈의 ‘괴뢰’ 때문에..... 동아일보 정간


 전쟁 이후 오래도록 남과 북은 서로를 괴뢰라고 불렀다. 남과 북의 공식 명칭인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상대를 일컫는 사람은 남북 모두에서 그 생명이 위태로왔을 것이다. 쌍방의 군대는 무조건 괴뢰군이었고 쌍방을 뉴스에서 일컬을 때는 어김없이 “북한(남조선) 괴뢰 도당”이라구 우겼다. 즉 양쪽 다 상대를 국민과 영토와 주권을 지닌 독립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외세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는 꼭두각시집단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1991년 소련이 망했을 때 술자리에서 오간 농담 중의 하나는 색다르게 희망적(?)아었다. “이제 북괴란 말은 사라지겠구나. 괴뢰를 조종할 대빵이 망해 버렸으니.” 그러나 꼭두각시(괴뢰)를 가지고 노는 주인(?)이 사라졌어도 북괴라는 호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괴뢰군도 해병대 제대했을까, “한 번 괴뢰는 영원한 괴뢰”였다. 특히 군은 20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북괴를 고집했다. ‘북한’이라고 부르면 군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우겼다. 하기야 스물 댓 먹은 어린 처자가 ‘해적’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심후한 사기 저하를 겪고(?) 떨쳐 일어나 고발까지 해 대는 군대의 처지라면 ‘괴뢰군’을 ‘인민군’으로 바꿔 부를 경우 그 사기가 장히 떨어졌을 것 같긴 하다.
 

즉 반세기가 넘도록 ‘괴뢰’란 쳐다보기도 싫고 한 하늘 아래서 있기도 싫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가리키는 단어였고, 스스로의 자존을 드높이는 단어였다. 그런데 1955년 3월 15일 동아일보 한 귀퉁이에 실린 기사는 가히 천지를 격동시켰다. 이날 동아일보 1면에는 한미 석유협정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고, 휴전선 일대에서의 북한의 휴전 협정 위반 사례를 미국이 중대시하고 있다는 기사도 1면에 함께 실렸다. 전쟁 끝난 지 2년, 북한이라는 표현조차 뭔가 어색할 때였고 당연히 조판공은 ‘괴뢰’자를 찾았다. 당시는 활판에 하나 하나 활자를 골라 꽂아서 신문을 제작할 무렵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비극이 일어났다. ‘ 괴뢰’자가 한미석유협정 관련 기사의 이마에 선명하게 찍혀 버린 것이다. 즉 ‘(한미 석유협정) 고위층재가 대기중’이라는 기사 제목이 ‘괴뢰 고위층 재가 대기중’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수가 그대로 인쇄되어 나온 것이다.



따지고보면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실수였다. 그러나 실수라도 식구들 밥상에서 물 쏟는 것과 회사 사장님이 처음 열어주신 회식날 커피를 그 머리에 붓는 실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대구매일신보는 ‘대통령’을 한자로 찍다가 그만 큰 대(大) 대신 개 견(犬)을 갖다박는 바람에 사장이 콩밥을 먹은 일도 있었다. 대통령을 개로 만든 것도 용서가 안 되는 실수였지만 북한이 입만 열면 남조선 괴뢰도당에 핏대를 올리던 시절, 대한민국 고위층을 ‘괴뢰’ 고위층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가히 천지를 뒤흔드는 대실수였다.


인쇄되어 나온 신문을 훑어보던 이가 까무라칠 듯이 윤전기 스톱!을 부르짖었지만 이미 앞서 나온 신문들이 가판으로 60여 부, 그리고 하필이면 군 부대로 300여 부가 이미 배달된 뒤였다. 벌집을 쑤셔도 올 누드로 장수말벌 벌통을 헤집은 격이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만큼은 그 대응이 치타보다 빠른 것이 대한민국 당국의 유구한 전통. 정부는 정리부장 권오철과 공무국원 2명을 즉각 구속하고 주필 고재욱 등은 불구속 송치했다. 고의성 없는 실수라도 불경죄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리고 1955년 3월 17일 오후 4시 반 만장한 기자들 앞에 나타난 공보실장은 준엄한 어조로 동아일보에 이 불경죄의 책임을 묻는다.



“..... 사직 당국에서 엄밀한 조사에 있어 그 진상이 밝혀질 것이지만, 국론과 사상통일을 기하여 통일구족(統一求族)의 성업을 완수해야 할 엄숙한 때에, 국가원수를 괴뢰라고 표시하여 배포하였음은 고의의 유무와 수의 다수를 막론하고 방치할 수 없는 반민족적인 중대과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부득이 발간정지 처분의 조처를 취하게 된 것이다.” 덜렁대는 조판공의 자그마한 실수 하나가 ‘반민족적인 중대과오’로 격상되는 흥미로운 순간이지만 그로부터 두 달 동안 신문을 내지 못했던 동아일보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내리쳐지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43년이 흐른 어느 날,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국회의원 장을병이 여전히 북괴 호칭을 포기하지 않는 국방부에게 이렇게 핀잔을 준 것이다. “옛날에 북한 정권이 수립되던 당시에 소련의 괴뢰라는 뜻이었는데, 지금 그 본체인 소련은 없어져버렸어요.” 끈 떨어진 인형은 땅에 떨어져야 마땅한데, 저놈의 인형은 무슨 처키도 아니고 쌩쌩하게 살아 숨쉬는 판에 괴뢰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국방부는 버텼다. ‘괴뢰’라는 명칭이 사라진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순안 공항에 착륙하여 김정일의 영접을 받은 뒤의 일이었다. 2000년 6월30일 국방부의 문서에서, 그리고 2001년 8월11일 합동참모본부의 대내외용 문서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러나 1955년 동아일보 조판공이 ‘괴뢰’자를 잘못 넣었다가 경을 쳤던 시대가 불과 10년 전인 2000년보다 더 살갑고 가까워 보이는 것은 어인 연유일까. 한쪽에서는 상대방의 죽은 국가원수와 신임 국가원수를 잡아족치자고 표어를 붙이고, 또 한쪽에서는 수십만 명이 모여 그 규탄대회를 열며 사격 표적지에 상대방 대통령 얼굴을 그려 넣는, 우리 조카가 다니는 유치원생들도 웃어댈 유치찬란의 장군아 멍군아를 실행하고 있는 요즘이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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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진후 지지자의 생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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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oupp.org/freebbs/4188637


 며칠 전만 해도 정진후가 누군지 정진화가 누군지 몰랐는데,  좀 알아보다 보면서 정진후 위원장이 비례대표에서 용퇴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자꾸 도달하게 됩니다.  페북 학교 민주동우회 게시판에서 논쟁(?) 중 정진후 위원장을 위해 일하신다는 교사분이  '피해자를 위한 글'을 퍼오셨는데 그걸 보고 정말 기함을 합니다.  

 아래 글은 그 반박입니다.  윗 링크를 먼저 읽으시고 글을 읽어 주세요.  


 

저는 사학과 88학번입니다. 아래에서 썰렁한 분위기를 만든 1인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인 정진후 후보가 용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래 통합진보당 게시판에 올랐다는 '피해자를 위한 글'이 전혀 피해자를 위한 글 같지 않아서 몇 자 적어 둡니다. 저는 교육계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 딸이 이런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전교조 선생님들의 대처 방식이 이 사건과 같다면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음입니다.



 윗 글쓴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벌해야할 핵심은 1차 가해자입니다. 법적으로 정확히 그리고 제대로 처벌받도록 하는 것이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틀렸습니다. 1차 가해자의 처벌은 핵심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길 가던 여교사를 어느 발바리가 잡아챈 것이 아니라 조직의 수장을 보호하고자 어려운 일을 떠맡은 전교조 조합원이 성폭행 미수를 겪은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조직의 명예와 보위를 위해 고소를 않거나 고소 시기를 늦춰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입밖에 낸 사람은 전교조 위원장입니다.



물론 “나라도 전교조 위원장이면 조직을 생각할 것 같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보라는 건 그런 생각을 막아서고,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파악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따위의 논리가 횡행하는 분위기를 막자고 진보의 가치가 출발하는 것이고, 그를 위해 진보 진영은 매우 지난한 싸움을 행해 왔던 것입니다. 전교조의 수장의 입에서 “고소를 하시려면 하시는데...... 조중동이 선생님을 이석행 위원장 첩으로 만들려는 기사를 준비 중이래요. 고소하시면 선생님이 피해를 입으셔요.” 따위의 말이 나온 순간, 그는 2차가해를 자행한 것이며 조직을 앞세워 피해자의 권리를 막으려 한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바로 이런 방식의 입막음이 학교에서는 널리 횡행하고 있습니다. 동우 여러분의 딸이 당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고소를 하시려면 하시는데..... 경찰에 불려다니고 조서 쓰고 얘가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런 판국에 ‘1차가해자가 처벌되는 게 핵심 아니냐?’는 말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며, 그 부드러운 말투에 숨은 저의를 의심할만큼의 교묘한 표현입니다. 이미 사태는 2차가해자들에 대한 조직의 대응 문제로 치환된지 오래였는데 말입니다. 비유해 보자면 여러분의 딸이 성폭력을 당했는데 가해자는 고발하여 처벌됐지만 고발 이전, “고소해 봐야 너만 다쳐.” 라고 충고(?)하던 담임과 반장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들의 문제를 얘기하는 여러분에게 “거 나쁜 짓 한 놈만 처벌하면 됐지 말 많네.”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들을 1차 가해자에 준하는 벌을 내리는 것은 사실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완벽한 왜곡입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이 사악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피해자가 2차 가해자를 구속하라고 얘기했습니까? 교사라는 호구지책 뺏으라고 했습니까? 조직의 수장으로서 끔찍한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조직의 보위’를 운운하며 고소하지 말자고 (나중에는 하실테면 하셔라 하지만 피해가 많을 거라는 충고로 바뀌긴 했지만) 사건의 은폐를 기도하던 이의 조직 내에서의 책임을 묻고자 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전교조 자체에서도 제명으로 내려졌던 그 처분을 유지하거나, 3년간의 자숙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빈발하는 학교내 폭력과 성폭력 사건과 맨 전면에서 부딪치는 교사들의 조직, 전교조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임무이며, 조직 보위에 앞서서 조직의 존재 가치에 준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데 전교조의 ‘참실련’은 ‘제명’ 결의를 조직적으로 뒤엎습니다. “징계포상위원회는 반드시 장악”한다는 조직적 개입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와중에서 피해자에게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제멋대로주의냐?” 따위의 차마 전교조라는 진보를 자처하는 조직의 교사로서는 입에 담기도 뭐한 망발들이 퍼부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의 처리를 잘해야 했던 사람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오면서 이 사건은 다시 제기되었고 피해자는 다시 그 사건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일종의 돌발상황이었죠. 앞으로 이 돌발상황은 몇 번이나 더 생길수 있습니다....... 그런 돌발상황이 나타나면 피해자는 다시 그 사건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지모임은 여전히 피해자를 도우며 그 상황에 함께 대응해야 할겁니다.”



 정말이지 분노합니다. 이 글 쓴 사람 아주 숫제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처리를 ‘잘하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장학사로 가는 것도 아니고 자칭 진보 정당의 ‘비례 대표 후보’로 나서는 마당에 그를 ‘돌발상황’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데 그것이 ‘몇 번이나 더’ 생길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괴로움을 받고 있는 피해자에게 “너 몇 번이나 이런 일 당해야 하는지 모르지?”라고 아주 따스한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처리를 잘했고 못했고는 이미 이 글쓴이의 안중에 없는 겁니다. 피해자의 아픔 따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위로(?) 많이 봅니다. “이쯤에서 끝내. 해 봐야 너만 다쳐.” 전교조 선생님들이 전교조를 만들 때 많이 듣던 충고 아니던가요? 도대체 이런 말을 왜 ‘진보’들에게서 들어야 하는 건가요?



“인간이 잊어버릴 수 있다는 능력은, 아픔을 잊을 수 있는 치유의 힘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건을 잊어버리라고? 누구 좋게?’ 이렇게 항변하실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피해자가 이 사건을 잊어버리시길 권합니다. 아니 피해자가 자꾸 상기하려 해도 진정 피해자를 돕고 싶으시다면 지지모임 분들이 잊도록 도와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상이 1차 가해자라면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시길 권할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자신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그야말로 마음을 치우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냥 어느 순간 한번 끌어안고 펑펑 울어버리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는 아예 눈 앞이 아득해집니다. 자신에게 엄청난 상처를 준 위원장과 그 위원장 처벌과 자숙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정파, ‘피해자면 다냐?’는 식으로 나왔던 이들의 정파, 그리고 그들의 대표로서 ‘처리를 잘 못한’ 것으로 본인이 인정했으며 피해자가 “왜 날 속였느냐?”라고 사무치게 물어야 했던 사람이 진보정당씩이나 되는 정당의 국회의원으로 나선다는데 ‘잊어라.’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도 그들을 끌고간 놈들과 짓밟은 군인들만 처벌하면 그 마음이 풀리실 텐데, 뭐 다 죽고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잊어버리시면 되지요. ‘매춘부’니 뭐니 헛소리했던 일본인 관료들에 대한 미움도 마음을 치유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이쯤되면 이 글을 퍼 오신 분께도 질문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정진후 위원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를 도우시는 분들 정말 이런 생각으로 피해자를 대하고 있습니까? 교사로서 성폭력 피해자 관련 교육은 받으신 적 있습니까? 거기서 “1차 가해자는 강력히 처벌해야 하지만 그 이후에는 피해자가 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배우셨습니까? 그저 교사도 아니시고, 정진후 위원장을 도와 일하신다고 하니 더욱 문제가 심각합니다. 정말로 이런 겁니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며칠 전만 해도 까맣게 몰랐던 일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면서, 저는 생각이 굳어집니다. 정진후 위원장 국회의원해서는 안될 사람입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를 공격할 것이고, 그를 지지하는 이런 어불성설의 논리를 공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제 참여의 의무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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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3.19 백장군의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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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1년 3월 19일 백 장군의 구속

작년 여름, 한 인물이 화제에 올랐다. 백선엽 장군이었다. KBS에서 제작했던 백선엽 관련 다큐멘터리 <전쟁과 인간>은 솔직히 졸작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만주 벌판의 항일 무장 세력을 토벌하는 간도 특설대로 일본군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전쟁과 인간>은 그 부분을 생략했다. 백선엽이 6.25 전쟁사에서 획기적인 군공을 세운 것이 맞지만, <전쟁과 인간>은 그 빛...만 보다 보니 그림자를 놓쳤고, 그래서 실패한 것이다.

한 사람을 평가하려면 빛과 그림자 모두를 보아야 한다. 빛을 외면하는 것도 그림자에 눈 감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오늘은 백선엽과 매우 관련이 깊은 한 사람의 빛과 그림자를 돌아보고자 한다. 이름은 백인엽. 백선엽의 동생이다. (백선엽 형제는 2남 1녀였는데, 그 중 여동생 백희엽은 현금동원력 랭킹 수위를 다투었던 ‘백할머니’로 더 유명하다) 백인엽은 전쟁 당시 17연대장으로서 지금의 황해도 땅인 옹진반도에 있었다. 백인엽은 급작스런 인민군의 공격에 맞서 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는 세기의 오보의 주인공이 된다. 17연대에 와 있던 종군기자에게 “서울로 돌아가시오. 17연대는 해주로 돌입한다고!” 라고 일갈한 것이 ‘국군 해주 점령’으로 커지고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북침설’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공을 세웠고, 절치부심의 17연대를 이끌고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고 서울을 탈환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수훈을 세운다. ‘형제는 용감했다’라는 헐리웃 영화 제목에 꽤 어울리는 역정이다. 여기까지는.


그런데 백인엽은 적에게 용맹스러웠다지만 그만큼 아군에게도 잔인했다. 그는 ‘즉결처분’으로 유명했다. 적에게 등을 보였다거나 중대한 과오로 아군에게 피해를 입혔다거나 하는 명목도 있었겠지만 정말이지 어이없는 죽음들도 있었다. 한겨울에 지프차 운전병이 시동을 꺼뜨렸다는 이유로 즉결처분됐다. 전화 가설 장비를 잔뜩 지고 가던 통신병이 대열에서 떨어져 허덕이며 걷는 와중에 자신의 행보를 가로막자 통신중대장에게 총살을 명령했고, 중대장이 통신병의 손에다 한 방 쏴 버리고 물러서자 자신이 직접 쏘아 죽였다. 그리고 사단장 훈시 중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병사들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붙였다는 전설(?)도 존재한다. 그에게 인격적인 모욕과 즉결처분의 위협을 당하면서 ‘네가 권총을 뽑으면 나도 뽑아서 너 죽고 나 죽는다.’라고 이를 갈았던 장교들도 많았다고 전한다. 그가 군단장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도 휘하의 사단장으로 데리고 있었는데, 백인엽은 박정희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내리치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고, 그런 날마다 박정희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다. 아마 술 먹고 서울의 이승만을 두고 이렇게 한탄했을 것이다. “각하. 이런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나라가 지켜지겠습니까.”

허영도 많았던지 대령 신분으로 자기 지프차에 별판을 달았다가 시내 한복판에서 형 백선엽에게 걸려 조인트를 까이는 등 호되게 혼난 사건 등 여러 낯부끄러운 에피소드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끝내 별 넷은 달지 못하고 중장으로 제대한다. 5.16 이후에는 군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속되기도 했다. 무려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감형으로 풀려난다. 박정희 소장이 선글라스 너머로 자신의 상관이 어떻게 해먹는지 똑똑히 지켜 보았을 테니 그만한게 다행이리라.

그런데 그의 군 생활은 기껏해야 15년도 안되었다. 그리고 예편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 여덟이었다. 그 뒤의 기나긴 세월을 그는 ‘교육자’로서 보냈다. 형 백선엽의 선자와 자신의 이름의 인자를 따서 만든 선인학원을 세우고 그 이사장으로 자리한 그는 산하 학교에도 형의 호인 '운산'을 비롯 자신의 호인 '운봉', 어머니의 이름 '효열', 아들의 이름 '진흥' 등을 학교의 이름으로 지었다. 모르긴 해도 ‘김일성대학’과 ‘김형직사범학교’ 등이 즐비한 북쪽 공화국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닐까.


 백인엽은 박정희와 감정이 좋을 것 같지 않았지만 형 백선엽은 박정희의 생명의 은인이었던 바, 박정희 정권 하에서 선인학원은 국내 사학 발전사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급성장했다. 법 따위는 백인엽에게 ‘즉결처분’ 대상 이상이 아니었다. 학교 확장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는데 주민들이 집 팔기를 거부할 경우 그가 쓴 수법은 가히 군 작전을 연상케 한다. 동네 가운데의 집을 사들인 후 폭약을 터뜨리는 등 난리를 쳐서 주변을 못 견디게 하는 수법을 썼다. 학교 확장을 위해 도화동 언덕 위의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은 중대한 외교문제까지 야기시켰다.


교사와 학생은 그의 졸병과도 같았다. 흐트러진 모습 보였다고 졸병들 총살하던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교사는 가차없이 해고시켰고 교사들로 하여금 예비군복을 입고 보초를 서도록 했다. 학교를 세우는 인부로서는 학생들이 제격이었다. ‘돌 하나 나르기 운동’을 펼치면서 학생들은 검은 교복을 입은 노가다로 “공부하면서 건설하는” 보람(?)에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인건비, 건설비는 무지하게 아껴서 임금을 떼먹히게 생긴 목수 한 명이 들이미는 톱 앞에서 혼비백산 도망가야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조직적인 부정입학과 편입학, 심지어 졸업장 판매는 일상이었다. 한 번도 교문안에 발을 디밀지 않고도 졸업장은 영수증처럼 현금 내지 수표와 교환됐다. 1천평이었던 학교 부지는 60만평, 학생 수는 3만 명이었다. 가히 인천의 학교 왕국이었다. 교문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저게 다 돈이라고 흐뭇해했다는 백인엽이 1981년 3월 18일 구속된다.

‘서울의 봄’ 시절, 운봉공고 운산기계공고, 항도실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 농성을 벌인 것을 시발로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에서도 백인엽 타도의 깃발이 올랐고 (대학생들에게 백인엽은 남학생은 정장, 여학생은 투피스를 의무화했었다) 박정희가 죽은 이후 끈떨어진 갓이 된 무소불위의 빽이 사라진 선인학원은 문교부의 감사를 받는다. 그 결과 ‘인천의 무법자’ 백인엽이 마침내 두 번째로 감옥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학교를 나라에 헌납한다고 했는데 인천 시민들은 이를 “인천직할시 승격 이후 최대의 경사”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출소 이후로도 ‘건설본부 자문위원’으로서 선인학원의 주인행세를 하려던 그를 몰아내기 위해 학생들은 피땀을 흘리며 싸워야 했다. 시국적 이유가 아니라 학내 분규로 휴교령이 내려진 것은 인천대학교가 해방 이후 처음이었다. 그 지난한 과정 끝에 백인엽이 박정희보다도 오래 군림했던 선인학원은 인천시로 그 운영권이 넘어간다. 백인엽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1994년이었다. 그가 구속된 1981년 3월 19일로부터도 13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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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정희 의원의 세 가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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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의원에게 놓인 세가지 길

1. 이정희의원의 해명은 (1) 거짓응답의 책임소재-비서관 (2) 부적할한 방법(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할 조사회사 조사과정 정보의 취득경로)에 의한 정보취득 아님 (3) 실제 여론조사 영향력 미미 (4) 김희철 의원 원할 시 재경선으로 요약된다.

- 이중에서 (3)은 인정할 수 있다. 다른 글에서 말한 것처럼 22만 유권자 중 이백여명에게 정보가 배포되었다 하더라도 이들이 실제 여론조사 전화를 받을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결과 차이가 박빙이었다면 설명논리의 설득력과 무관하게 객관적 검증이 필요한 영역이다.

2. 문제의 핵심은 부정한 방법과 부정선거운동 시도에 대한 해명.

가. 부정개입의 핵심은 두 가지 (1) 거짓응답 지침 (2) 부정한 방법에 의...한 정보 취득.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사과와 대책없는 재경선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피한 것이다.

나. 거짓응답의 책임은 보좌관 탓으로 돌렸으나 정보취득 경로는 정당화-조사 전화를 받은 자발적 운동원들의 제보였다는 것

- 그 짧은 시간에 시시각각 세대쿼터 할당이 채워진다는 정보가 입수되고 전파되는 과정을 보면 조사회사 내에 정보를 제공받은 혹은 취득할 경로가 있었다는 의심은 합리적 의심이다.

- 만약 조사회사가 넘긴거라면 그 조사회사는 조사회사 자격정지 혹은 그 이상의 처벌도 감수해야 할 상황임. 특히 조사기관조차 알지 못했다는 김희철 후보진영의 전날 발표를 감안하면 그 자체가 조사윤리의 근본적인 위반임. 이정희 의원실과 별도로 조사기관에 대한 조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본다.

- 정보취득 경로에 대한 의원실 해명은 "50대 응답자가 조사 참여조사에 참여한 지지자들이 "50대라고 하자 전화가 끊긴 것을 보고" 쿼터가 채워졌다는 것을 자발적으로 제보하고 이를 비서관이 배포했다는 논리. 그러나 이는 자가당착이다. 의원실에서는 앞서 정당지지자 수백명에게 배포되더라도 이들이 조사표본으로 뽑힐 확률이 낮아 선거결과에 미친 영향이 미미하다고 주장해놓고, 역으로 정보취득과정에서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조사표본에 뽑혀 쿼터 할당에 대한 정확한 세대별 정보를 그렇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취합할 수 있다는 논리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전화 끊김에 대한 사전교육과 행동지침 없이 가능한가(전화 끊기면 쿼터 마감이라는 걸 어찌 알까). 만약 그렇다면 두 명의 과욕 이상의 조직적 시도로 봐야 한다.

- 이부분에 대한 검증은 손쉬워 보인다. 의지만 있으면 제보자 전번, 통화시간(의원실 수신자)과 실제 조사회사의 컨택된 조사기록만 대조해보면 될 듯하다. 자동응답 시스템(ARS)으로 쿼터를 채운 세대의 컨택자일 경우 자동으로 조사를 중단시킬 프로그래밍과 시스템 수준이라면 위의 기록 등은 시스템에 저장될 수준으로 보인다.

3. 세 가지 길

- 후보사퇴 등을 통해 정치적으로 책임을 지는 방법. 안타깝게도 이정희 의원은 일단 이 길은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 그렇다면 정확한 진상규명과 조사를 통한 정확한 책임소재 명료화해서 스스로 책임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유 불문 사과"할 일이 아니라 "부정의 과정과 인과관계"가 납득되고 반성해야 재경선을 하더라도 공정성에 대해 신뢰할 것 아닌가? 정보취득 경로와 확산 과정을 밝히지 않으면 책임소재 불명확하고, 재발방지 대책이 어렵다. 재경선에서는 이런 일이 없다는 것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특히 정보취득경로와 관련한 조사기관, 관계자, 제보자에 대한 교차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말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가?

- 재경선은 오히려 받아줘도 난감하다. 절대 활로가 아니다. 당장의 책임을 피하는 것 같지만 ARS 조사 문제점이 드러나 일반전화조사 방법으로 진행해야 할 텐데 전화조사에서는 실제 많은 격차로 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과가 뒤집힐 경우 실제 영향력이 미미했다는 주장까지도 뒤짚혀지고, 그 때는 진상과 관련 없이 일말의 남은 신뢰와 기대조차 무너질 수 있다. 재기불능의 길이다.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

- 난 이정희 의원 진보정당의 보기드문 매력있는 젊은 정치지도자라고 생각해왔다. 어떤 길을 선택하던 당장 죽는 길로 보일 것이다. 자칫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의 싹도 같이 죽을 길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시야를 넓혀 장기적으로 보면 이상도 살고 본인도 사는 길이 있다고 본다. 일반 시민의 눈으로 보면 답이 있을 것이다.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우리들의 논개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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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세계, 그것도 총력을 기울인 건곤일척의 승부라면 치열하기 그지없다.  반칙은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프리킥을 허용하거나, 짐승 같은 백태클도 감행된다.  그 결과로 옐로 카드도 받을 수 있고 심하게 비신사적인 행위를 한 이는 그 경기장을 떠나야 한다. 그것이 룰이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주먹을 날리거나 이단 옆차기를 감행한 사람보다, 관중이 야유한다고 열받는다고 방망이 집어던진 선수보다 더 큰 죄로 다스리는 일이 있다. 승부조작이다.
 
비록 그 가담이 경미하고 그로 인해 얻은 이익이 적다 하더라도 승부조작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경기장이 아니라 해당 종목의 선수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것은 해당 종목의 존폐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조작에 가담한 선수만이 아니라 전혀 무관한 모든 선수들의 유니폼에 검정 먹물을 들일 수 있는 일이며, 그들에 대한 신뢰를 바닥에서부터 와해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룰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룰을 죽이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거라는 이름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다. 
 

보다 많은 민의를 수렴하여 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하는 선거 방식, 선출 방식은 시대에 따라 새롭게 등장했다. 비단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지방 자치제 선거에서만이 아니라 밀실에서 결정되던 정당의 후보 선출에도 국민 경선, 모바일 투표, 여론 조사 등 다양한 경로가 트이고 열렸다. 큰 의미로 볼 때 이것들 또한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선거다. 공평한 경기장 안에서 엄정한 규칙 속에 선의의 경쟁을 펼친 끝에 승리하는 자가 선거를 통해 결정되는 권력을 쥐는 것이다.


어떤 경쟁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여론조사라는 방식을 통해 승리와 패배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여론조사는 기본적으로 전체 유권자집단(모집단) 중에서 무작위적(모집단 구성원들이 표본에 뽑힐 확률이 동일해야한다는 것을 의미)으로 표본을 추출하고, 그 표본을 대상으로 실시된다. 그렇다면 경선에 나선 이들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생겨난다. 표본 추출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그 정보를 요구하지 않을 의무, 그리고 표본 선정 작업에 개입하거나 여론 조사의 중립성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의무. 이것은 사소한 룰이 아니라, 기본적인 전제다. 이 표본추출에 개입하는 것은 이미 사소한 반칙 행위가 아니라 원천적인 '승부조작'에 해당한다. 즉 선거운동 과정에서 누구한테 밥 먹이다 걸린 것이 아니라, 투표함에 사전 투표를 잔뜩 해 놓고 시작하는 ‘부정선거’인 셈이다. 관악을구 이정희 후보 보좌관 혼자서 '과잉 의욕으로' 그 일을 불행히도 자행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소회 하나만 덧붙이겠다. 까지 마라.)
 
이 의욕 하나는 헤라클레스같은 이 보좌관은 거의 실시간으로 여론조사의 향방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연신 문자를 날리며 여론조사의 향배를 ‘중계’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 조사를 끌어내기 위한 행동 지침까지도 전달했다. 심지어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응답을 하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지금 ARS 60대로 응답하면 전부 버려집니다. 다른 나이로 답변해야 함” “4,5,60대는 종료. 남은 연령대는 2,30대.” “
 
여론조사 방법을 채택한 것은 국민여론을 제대로 파악해서 이를 후보선정 기준으로 삼자는 뜻이다. 그러자면 전체여론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골고루 추출되어야 하는데 이 보좌관이 속한 조직은 그 운동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응답자표본의 대표성 대신 특정여론을 과대 대표하게 하려는 인위적 시도로서, 여론조사 방법의 기본 취지를 훼손하는 시도이다. 특히 응답자 세대의 거짓응답까지 시도했다는 점. 여론조사 방법의 기본가정(무작위적 확률표본추출, 진실 응답)을 부정하려고 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실제 얼마나 여론이 왜곡되었는가의 문제를 떠나 자신들이 합의한 제도의 취지를 정면 부정하고, 더구나 거짓응답을 통해 의도적으로 조사결과를 왜곡하려했다는 점에서 여론 조사 자체의 정당성을 뿌리에서부터 무너뜨린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승부조작에 개입한 것이다.
 
한때 한국의 마라도나라고 불린 최성국은 승부조작에 가담함으로써, 그리고 그에 가담한 선수들의 축구 생활을 FIFA가 규제함으로써 선수 생명이 마감됐다. 그가 얼마를 받았는지, 어떤 경위가 있었는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승부조작에 가담했고 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여론 조사의 승부조작을 강행했다는 증거를 자신의 문자 메시지로 남긴, 이 의욕 만땅의 보좌관은 그 이름도 찬란한 '진보' 정당 대표의 보좌관이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보좌관들은 참으로 능력도 대단하고 간도 크거니와, 이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실 진보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문제다. 진보 이전에 민주주의다. 그리고 민주주의 이전에 양심의 문제다.
 
우선 양심의 문제다. 여론 조사를 결정 방법으로 선택한 측에서 여론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어이 우리편! 앞으로는 이렇게 전화받어!"라고 지시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내놓고 하는 도둑질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과연 사흘 굶은 도둑인지 아니면 원래 시커먼 도둑인지는 모르겠지만. 밝혀야 할 일은 많다.  관악을구 여론조사를 맡은 기관이 어디인지 밝히고, 그 기관의 고백을 들을 일이다. 도대체 왜, 어떤 경로로 유출했으며, 그 책임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연락 끊겼다는 보좌관부터 찾아내 사연을 들을 일이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문제다. 신새벽에 남몰래 그 이름을 쓰면서,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를 부르짖으면서 우리가 쟁취하고자 외쳤던 민주주의는 권력의 억압과 돈의 위력과 지역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부단히 투쟁하며 성장해 왔다. 이제는 최소한 막걸리와 고무신 선거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정부 조직이 투표소를 정전시키고 투표함 바꿔치기하는 건 전설에서나 나오리라 여기는 판에, 그래도 여기까지는 왔다고 자부하는 한 나라의 국회의원 후보를 결정하기 위하여 서로 합의한 여론조사가 '민의의 왜곡'으로 점철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보수고 진보고 나발이고 사발이고,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그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석고대죄에 아홉번 머리를 찧을 일이다.  이건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외쳤던 민주주의에 대한 퍽치기가 아닌가.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 이래 무수하게 진행됐던 여론조사들 모두에 대한 의심을 확대재생산하는 가운데 그 결과인 우리 정치의 핏줄마저 의심스럽게 만드는 음란함이 아닌가.  적어도 나이를 속여 대답하라는 끔찍한 문자는 민주주의의 적이었다.  민주주의가 없애야 할 기생충이었고 민주주의 목에 드리운 칼이었다.   
 
자 이제 진보의 문제다.  결론을 말하자. 그 짓을 진보가 했다.  "의욕과잉의 보좌관에 책임을 미루는" 최구식스러움을 젖혀 놓고 말하자.  그 짓을 자칭 진보가 했다.  진보정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나이 속이고 대답하라고 떠들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진보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왜 진보하는가? 왜 이정희를 좋아하는가? 대관절 이정희를 국회로 보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인간의 존엄성을 보다 폭넓고 깊게 구현하려는 의도이며, 이정희로 대변되는 진보를 지지하고 그를 활용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확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른바 진보가 지극히 그 적과 같은 방법으로 ,즉 부정선거를 자행했던 이들의 방식을 수용하여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긴다면 이 진보는 대체 어디에 의지하여 그 이름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 이미 양심과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느 결엔가 흘려 버린 진보가 진보일 수 있는가. 이래 놓고 승리하면 진보의 승리라 부를 만세에 염치가 남아나겠는가.  

 어제 오후부터 쑤셔진 벌집 주변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이정희 대표 본인이었다.  그녀 주위를 둘러싼 집단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꼴통들인지는 잘 아는 바이지만, 그녀만큼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킬 줄로 알았다.  종북좌파 플래카드 따위 흑색선전에 비할 바가 아닌, 여론조사 자체를 무력화하는 '승부조작'이 자신의 휘하에서 자행된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진보의 대표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에 처절하게 슬퍼하며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대답은 '원하면 재경선'이었다.   거기에 일부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이정희 응원이 그 기막힘을 더했다.   보좌관이 했지 이정희가 했냐는 어디서 많이 본 논리부터 이정희를 믿습니다는 신앙고백에다가 이정희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느냐는 힐난까지.  오늘은 또 김희철도 했고 새누리당도 한 짓인데 왜 이정희만 가지고 그러냐는 전두환식 항변도 등장한다. "허 왜 나만 갖고 그래." 

 이른바 진보가 태동한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그리고 지금도 벗어나기 힘겨워하는 일은 "그놈이 그놈이지." 하는 힐난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놈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차별화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이정희의 보좌관 하나로 완벽한 수포로 돌아간다.  명예훼손도 아니고 금품살포나 허위 이력 정도가 아닌 선거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수완까지 우리의 진보가 발휘한 것이다.  지금껏 새로운 대안이라고 악을 쓰는 진보를 지켜봐 온 사람들이 "쟤도 그랬고요 얘도 그렇고요"하며 고자질하고 앉은 똥묻은 진보에 공감을 하겠는가.  하다못해 동정을 하겠는가.  

 이 와중에 이정희 대표는 출마를 강행하여 승리로 보답하겠단다.  누구에게? 누구의 승리로 보답하겠다는 것인가? 그 승리를 누구와 함께 기뻐하며 당신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땀흘리고 피뿌려 가꾼 길을 당신의 냄새나는 당선으로 가꿀 수 있다는 것인가.  당신은 도대체 왜 진보인가.  어떻게 진보인가. 무엇하러 진보하는가.   

 지금 한 번 죽으면 크게 살 수 있는 것을, 정파의 이익에 사로잡힌 자들에 둘러싸여 또는 그들을 업고서 끝끝내 자신을 키워준 진보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경기동부의 원내진출'에 올인한다면 결국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녀만이 아니라 결국은 진보도 독을 마실 것이다.   오호라 관악성은 함락되었고 감수성 풍부하고 울부짖기 좋아하던 기생 논개는 제 주인 진보의 허리를 가락지로 끼고 관악산 연주대에서 다이빙을 하려는구나.  몸바쳐서~~ 몸바쳐서~~~ 진보의 한~~~~~

우리들의 논개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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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세계, 그것도 총력을 기울인 건곤일척의 승부라면 치열하기 그지없다.  반칙은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프리킥을 허용하거나, 짐승 같은 백태클도 감행된다.  그 결과로 옐로 카드도 받을 수 있고 심하게 비신사적인 행위를 한 이는 그 경기장을 떠나야 한다. 그것이 룰이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주먹을 날리거나 이단 옆차기를 감행한 사람보다, 관중이 야유한다고 열받는다고 방망이 집어던진 선수보다 더 큰 죄로 다스리는 일이 있다. 승부조작이다.
 
비록 그 가담이 경미하고 그로 인해 얻은 이익이 적다 하더라도 승부조작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경기장이 아니라 해당 종목의 선수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것은 해당 종목의 존폐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조작에 가담한 선수만이 아니라 전혀 무관한 모든 선수들의 유니폼에 검정 먹물을 들일 수 있는 일이며, 그들에 대한 신뢰를 바닥에서부터 와해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룰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룰을 죽이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거라는 이름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다. 
 

보다 많은 민의를 수렴하여 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하는 선거 방식, 선출 방식은 시대에 따라 새롭게 등장했다. 비단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지방 자치제 선거에서만이 아니라 밀실에서 결정되던 정당의 후보 선출에도 국민 경선, 모바일 투표, 여론 조사 등 다양한 경로가 트이고 열렸다. 큰 의미로 볼 때 이것들 또한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선거다. 공평한 경기장 안에서 엄정한 규칙 속에 선의의 경쟁을 펼친 끝에 승리하는 자가 선거를 통해 결정되는 권력을 쥐는 것이다.


어떤 경쟁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여론조사라는 방식을 통해 승리와 패배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여론조사는 기본적으로 전체 유권자집단(모집단) 중에서 무작위적(모집단 구성원들이 표본에 뽑힐 확률이 동일해야한다는 것을 의미)으로 표본을 추출하고, 그 표본을 대상으로 실시된다. 그렇다면 경선에 나선 이들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생겨난다. 표본 추출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그 정보를 요구하지 않을 의무, 그리고 표본 선정 작업에 개입하거나 여론 조사의 중립성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의무. 이것은 사소한 룰이 아니라, 기본적인 전제다. 이 표본추출에 개입하는 것은 이미 사소한 반칙 행위가 아니라 원천적인 '승부조작'에 해당한다. 즉 선거운동 과정에서 누구한테 밥 먹이다 걸린 것이 아니라, 투표함에 사전 투표를 잔뜩 해 놓고 시작하는 ‘부정선거’인 셈이다. 관악을구 이정희 후보 보좌관 혼자서 '과잉 의욕으로' 그 일을 불행히도 자행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소회 하나만 덧붙이겠다. 까지 마라.)
 
이 의욕 하나는 헤라클레스같은 이 보좌관은 거의 실시간으로 여론조사의 향방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연신 문자를 날리며 여론조사의 향배를 ‘중계’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 조사를 끌어내기 위한 행동 지침까지도 전달했다. 심지어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응답을 하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지금 ARS 60대로 응답하면 전부 버려집니다. 다른 나이로 답변해야 함” “4,5,60대는 종료. 남은 연령대는 2,30대.” “
 
여론조사 방법을 채택한 것은 국민여론을 제대로 파악해서 이를 후보선정 기준으로 삼자는 뜻이다. 그러자면 전체여론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골고루 추출되어야 하는데 이 보좌관이 속한 조직은 그 운동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응답자표본의 대표성 대신 특정여론을 과대 대표하게 하려는 인위적 시도로서, 여론조사 방법의 기본 취지를 훼손하는 시도이다. 특히 응답자 세대의 거짓응답까지 시도했다는 점. 여론조사 방법의 기본가정(무작위적 확률표본추출, 진실 응답)을 부정하려고 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실제 얼마나 여론이 왜곡되었는가의 문제를 떠나 자신들이 합의한 제도의 취지를 정면 부정하고, 더구나 거짓응답을 통해 의도적으로 조사결과를 왜곡하려했다는 점에서 여론 조사 자체의 정당성을 뿌리에서부터 무너뜨린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승부조작에 개입한 것이다.
 
한때 한국의 마라도나라고 불린 최성국은 승부조작에 가담함으로써, 그리고 그에 가담한 선수들의 축구 생활을 FIFA가 규제함으로써 선수 생명이 마감됐다. 그가 얼마를 받았는지, 어떤 경위가 있었는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승부조작에 가담했고 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다. 하물며 여론 조사의 승부조작을 강행했다는 증거를 자신의 문자 메시지로 남긴, 이 의욕 만땅의 보좌관은 그 이름도 찬란한 '진보' 정당 대표의 보좌관이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보좌관들은 참으로 능력도 대단하고 간도 크거니와, 이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사실 진보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문제다. 진보 이전에 민주주의다. 그리고 민주주의 이전에 양심의 문제다.
 
우선 양심의 문제다. 여론 조사를 결정 방법으로 선택한 측에서 여론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어이 우리편! 앞으로는 이렇게 전화받어!"라고 지시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내놓고 하는 도둑질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과연 사흘 굶은 도둑인지 아니면 원래 시커먼 도둑인지는 모르겠지만. 밝혀야 할 일은 많다.  관악을구 여론조사를 맡은 기관이 어디인지 밝히고, 그 기관의 고백을 들을 일이다. 도대체 왜, 어떤 경로로 유출했으며, 그 책임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연락 끊겼다는 보좌관부터 찾아내 사연을 들을 일이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문제다. 신새벽에 남몰래 그 이름을 쓰면서,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를 부르짖으면서 우리가 쟁취하고자 외쳤던 민주주의는 권력의 억압과 돈의 위력과 지역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하여 부단히 투쟁하며 성장해 왔다. 이제는 최소한 막걸리와 고무신 선거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정부 조직이 투표소를 정전시키고 투표함 바꿔치기하는 건 전설에서나 나오리라 여기는 판에, 그래도 여기까지는 왔다고 자부하는 한 나라의 국회의원 후보를 결정하기 위하여 서로 합의한 여론조사가 '민의의 왜곡'으로 점철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보수고 진보고 나발이고 사발이고,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그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석고대죄에 아홉번 머리를 찧을 일이다.  이건 우리가 타는 목마름으로 외쳤던 민주주의에 대한 퍽치기가 아닌가.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 이래 무수하게 진행됐던 여론조사들 모두에 대한 의심을 확대재생산하는 가운데 그 결과인 우리 정치의 핏줄마저 의심스럽게 만드는 음란함이 아닌가.  적어도 나이를 속여 대답하라는 끔찍한 문자는 민주주의의 적이었다.  민주주의가 없애야 할 기생충이었고 민주주의 목에 드리운 칼이었다.   
 
자 이제 진보의 문제다.  결론을 말하자. 그 짓을 진보가 했다.  "의욕과잉의 보좌관에 책임을 미루는" 최구식스러움을 젖혀 놓고 말하자.  그 짓을 자칭 진보가 했다.  진보정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나이 속이고 대답하라고 떠들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진보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왜 진보하는가? 왜 이정희를 좋아하는가? 대관절 이정희를 국회로 보내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인간의 존엄성을 보다 폭넓고 깊게 구현하려는 의도이며, 이정희로 대변되는 진보를 지지하고 그를 활용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확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른바 진보가 지극히 그 적과 같은 방법으로 ,즉 부정선거를 자행했던 이들의 방식을 수용하여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긴다면 이 진보는 대체 어디에 의지하여 그 이름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 이미 양심과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느 결엔가 흘려 버린 진보가 진보일 수 있는가. 이래 놓고 승리하면 진보의 승리라 부를 만세에 염치가 남아나겠는가.  

 어제 오후부터 쑤셔진 벌집 주변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것은 이정희 대표 본인이었다.  그녀 주위를 둘러싼 집단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꼴통들인지는 잘 아는 바이지만, 그녀만큼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킬 줄로 알았다.  종북좌파 플래카드 따위 흑색선전에 비할 바가 아닌, 여론조사 자체를 무력화하는 '승부조작'이 자신의 휘하에서 자행된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진보의 대표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에 처절하게 슬퍼하며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대답은 '원하면 재경선'이었다.   거기에 일부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이정희 응원이 그 기막힘을 더했다.   보좌관이 했지 이정희가 했냐는 어디서 많이 본 논리부터 이정희를 믿습니다는 신앙고백에다가 이정희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느냐는 힐난까지.  오늘은 또 김희철도 했고 새누리당도 한 짓인데 왜 이정희만 가지고 그러냐는 전두환식 항변도 등장한다. "허 왜 나만 갖고 그래." 

 이른바 진보가 태동한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그리고 지금도 벗어나기 힘겨워하는 일은 "그놈이 그놈이지." 하는 힐난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놈들과 우리는 다르다고 차별화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이정희의 보좌관 하나로 완벽한 수포로 돌아간다.  명예훼손도 아니고 금품살포나 허위 이력 정도가 아닌 선거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수완까지 우리의 진보가 발휘한 것이다.  지금껏 새로운 대안이라고 악을 쓰는 진보를 지켜봐 온 사람들이 "쟤도 그랬고요 얘도 그렇고요"하며 고자질하고 앉은 똥묻은 진보에 공감을 하겠는가.  하다못해 동정을 하겠는가.  

 이 와중에 이정희 대표는 출마를 강행하여 승리로 보답하겠단다.  누구에게? 누구의 승리로 보답하겠다는 것인가? 그 승리를 누구와 함께 기뻐하며 당신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땀흘리고 피뿌려 가꾼 길을 당신의 냄새나는 당선으로 가꿀 수 있다는 것인가.  당신은 도대체 왜 진보인가.  어떻게 진보인가. 무엇하러 진보하는가.   

 지금 한 번 죽으면 크게 살 수 있는 것을, 정파의 이익에 사로잡힌 자들에 둘러싸여 또는 그들을 업고서 끝끝내 자신을 키워준 진보의 가치와는 관계없이 '경기동부의 원내진출'에 올인한다면 결국 그녀는 죽을 것이다. 그녀만이 아니라 결국은 진보도 독을 마실 것이다.   오호라 관악성은 함락되었고 감수성 풍부하고 울부짖기 좋아하던 기생 논개는 제 주인 진보의 허리를 가락지로 끼고 관악산 연주대에서 다이빙을 하려는구나.  몸바쳐서~~ 몸바쳐서~~~ 진보의 한~~~~~

1995.3.20. 광기의 독가스 일본을 덮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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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 산하의 오역

1995년 3월 20일 광기의 독가스 일본을 덮치다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경이었다.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러시아워의 지하철 안. 한 주의 시작을 준비하느라 머리 속이 분주한 직장인들의 눈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그는 뾰족한 우산 끝으로 비닐 봉지에 구멍을 내려고 애쓰고 있었고 구멍이 나자마자 잽싸게 내려 버렸던 것. 잠시 후 사람들은 처음 맡아보는 냄새에 코를 찔렸다. 그리고 화살을 심장에 맞은 듯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사린 가스였다. 1차대전 때에는 독가스가 즐겨 사용됐지만 2차대전 때에는 거의 쓰인 적이 없다. 양쪽 다 그 파괴력을 익히 알기에 자제하기도 했거니와 우선 수백만 슬라브족과 유태인과 저항자들을 독가스로 죽여버렸던 히틀러까지도 사린 가스 등 전투시 독가스의 사용을 금했다. 히틀러 자신이 1차대전에서 실명위기에 처하는 등 독가스의 맛을 톡톡히 본 적이 있어 그 위력을 심히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사린가스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중의 하나 도꾜의 지하철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도쿄 도 내의 제도고속도교통영단(현재의 도쿄 메트로) 마루노우치 선, 히비야 선에서 각 2편 지요다 선에서 1편 등 총 5편의 지하철 차내에서 사린가스 공격이 발생했고 12명 죽고 외국인을 포함한 5,5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일본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화학병기가 사용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일본의 경시청은 신흥 종교단체 옴진리교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경찰의 엄중한 추궁 끝에 교단 간부 하야시 이쿠오의 자백에 의해 전모가 밝혀졌다. 놀랍게도 사린 가스를 살포하게 된 이유는 조직내 신도 살해 사건으로 자신들을 죄어들어오는 수사망을 교란하고자 한 데에 있었다.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절대자유’ 상태에 이르기 위해 개인 재산을 교단에 기부하고 단체생활을 강요했고 또한 옴진리교의 신자들이 1995년 아마겟돈을 극복하고 천년왕국을 영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시각 장애가 있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를 따르고 그의 지시를 받아 살인을 저지르고 사린가스를 지하철에 터뜨린 이들의 대부분은 동경대나 와세다,게이오 등 일본 유수의 명문 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었다.

와세다대학원 졸업생으로서 사린 가스를 터뜨린 이 중의 하나인 히로세이 겐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지하철의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하지만 우리의 교리는 인간의 감정이 사물을 잘못 인식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그 감정을 극복해야 했다." 의사였던 하야시 이쿠도는 경찰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의사로서 무수한 생명을 구한 나였다. 현장에서도 몇 번 나 스스로에게 스톱을 외쳤지만 교주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

요즘 인터넷 신조어 가운데 '멘붕'이라는 것이 있다. 이른바 '멘탈의 붕괴'다. 그 뜻이야 여러 가지로 통용되겠지만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조차 자신의 교조와 신앙의 지시대로 옳은 일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켜야 했던 엘리트 옴진리교도들의 상태에도 이 단어를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멎어가는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고자 발버둥치던 의사가 자기 앞에서 재잘대는 아가씨, 한 가족의 가장임이 분명한 넥타이맨들이 숨막혀 죽어갈 것을 알면서도 사린 봉지에 우산끝을 찔러넣은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 믿었고, 이전의 그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던 행동을 감행했다. 그들은 악한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상식을 저버린 믿음은 스스로를 살인마로 변모시켜 갔다.

믿음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대상이 신이든 사람이든. 단 자신의 믿음을 종종 상식의 저울에 대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 노력을 게을리할 때 종종 믿음은 사람을 벼랑으로 떠민다.

1908.3.23 샌프란시스코의 두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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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두 남자

1908년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거의 없어져 가고 있었다. 외교권이 없어진 지는 벌써 오래고 그나마 명맥만 유지하던 군대조차 해산돼 없어졌다. 분개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긴 했지만 워낙 우세한 무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외교부터 치안까지 한 나라의 정부가 행사해야 할 권리는 차근차근 일본에 빼앗겼고 일본은 '고문'이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을 각
부처에 배치하여 대한제국 정부를 조종하려 들었다. 그 가운데 외부고문이 미국인 스티븐스라는 자였다. 그가 미국내의 여론을 일본에 우호적으로 조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이 1908년 3월 20일. 그는 샌프란시스코 내의 여러 신문기자와 회견을 가지고 “일본의 지배는 한국에서 유익하다(Japan’s Control, A Benefit to Corea).”라는 제목의 왜곡된 친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침략적 ‘보호’를 강변한다.

일본이 한국을 보호(保護)한 후로 한국에 유익(有益)한 일이 많으므로 근래 한·일(한국·일본) 양국인 간에 교제가 점점 치밀하며 일본이 한국 백성을 다스리는 법이 미국이 필리핀 백성을 다스림과 같고 벼슬아치들은 일본을 반대해도 지방의 농민들과 사사 백성은 전일 정부의 폭정같은 학대를 받지 아니하므로 일본 사람을 환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이민이 하와이에 발을 디딘지 10년도 안된 때였으나 어느 새 미국에는 많은 수의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태평양의 관문이라 할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 단체들까지 세워져서 활동
중이었다. 스티븐스의 이 발언은 당연히 한국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저 양코배기 자식 말하는 꼬라지 좀 보라지.

저렇게 날뛰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 울분을 토하던 한국인들은 우선 4명이 대표로 가서 스티븐스에게 항의하고 그 발언을 취소하기를 요구해 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만난 스티븐스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했다.

"한국에는 이완용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같은 통감(統監)이 있으니 한국에 이만한 복이 어딨냐. 내 유심히 봤더니 황제도 개판이고 벼슬아치들은 백성들 뜯을 생각만 하고 백성은 띨띨하고 찌질한데 뭔놈의 독립 자격이 있어.! 고마운 줄 알어 일본한테! 안그러면 니들은 러시아가 먹었어!"

적당히 얼러서 돌려보낼 수도 있었건만 스티븐스는 단어 하나 하나마다 한국 사람 열받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다혈질의 한국인들은 그 유구한 '한성질'을 폭발시킨다. 의자를 들어 내리찍어 버린 것이다. 성질 같았으면 패 죽였을 텐데, 주변의 만류어 그냥 돌아와야 했던 한국인들은 모임을 열며 그들의 분노를 토로했다. 가장 열띤 것은 스물 다섯된 팔팔한 젊은이 전명운이었다. "내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말겠어요!" 당시 회의장은 만석이었고 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한인들이 벽까지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 벽에 기대 서서 연설을 듣던 한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총만 있으면 내가 쏘디." 서른은 훨씬 넘어보이는 평안도 사내 장인환이었다.

3월23일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스티븐스는 길을 나섰다 오클랜드 부두 페리 정거장에 이른 순간 스티븐스는 가까운 곳에서 철컥 철컥하는 기분 나쁜 소리를 듣는다. 흘낏 보니 젊은 동양인 친구가 권총을 들고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불발이었다. 이런 써너비치! 스티븐스도 몸을 날렸다. 맹렬한 경투가 벌어졌다. 양쪽다 필사적이었다. 그 와중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린다. 탕 탕 탕 전명운이 움찔했고 그 다음엔 스티븐스가 비명을 질렀다. 권총을 쏜 것은 장인환이었다. 한 발은 전명운이 잘못 맞았지만 나머지는 임자를 찾아갔다. 스티븐스는 절명한다. 이것이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의거다.

둘은 함께 체포되긴 했지만 서로 공모한 적이 없었다. 따로따로 계획하고 따로따로 준비했다가 우연히 한곳에서 만난 것이었다. 스티븐스의 유족과 일본측은 정교한 음모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둘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이며 조국의 원수에게 매수되어 조국을 폄하하는 미국인을 응징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전명환과 장인환에게 필요한 것은 변호사였지만 그에 앞서서 한국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통역이 절실했다. 적임자가 있었다.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윌슨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네 없네 하는 똑똑한 한국인이었다. 교민들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해괴한 이유로 요청을 거부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는 없다." 이 신실한 기독교인의 이름은 이승만이었다.

별 시덥잖은 윤똑똑이는 제쳐 두고 교인들은 두 의사릍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각처에서 의연금이 모아지고 중국 유학생들까지도 성의를 보태는 가운데 한일 양국의 대리전 같은 재판이 펼쳐진다.

검찰측과 일제가 고용한 나이트 변호사는 특히 장인환을 일급살인 혐의를 주장했다. ‘미개한 한국에서 안전하게 그 직분을 다하고 귀국했는데 이렇게 비명에 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고 측 변호사는 장인환의 스티븐스 총격은 결코 일반적인 ‘살인’이 아니고 ‘애국적 광란으로 인한 무지각적(無知覺的) 범죄’이므로 애국지사 장인환은 당연히 무죄 방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장인환은 자기의 나라를 사랑하는 혈성이 극도에 지나서 정신이 변할 때 한 행위이므로 형사적인 책임이 면제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으로 교포들을 출두시켰다.

이 재판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은 한국측이었다.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곧 석방됐고 장인환은 2급살인으로 규정되어 사형을 면하고 25년현을 받은 것이다.

장인환은 그로부터 10여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이승만과 같은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감옥에서 세타그기술을 배웠고 영어를 읽고 쓰기를 마스터한다. 출소한 이후 그는 교민단체의 지도급 인사로 일하다가 귀국한다. 남아 있던 가족들의 환영을 받고 늦장가도 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짐승보다도 못하게 거리를 헤매는 고아들이었다. 장바닥에 떨어진 곡식 낱알로 허기를 메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장인환은 고아원을 세워 아이들을 돌볼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기사 의거 이전부터 고국의 고아원 사업에 관계하고 있었고 옥중에서도 도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와하고 있었던 바 그의 선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대동고아원 외국 총무'로서 미국 각지를 돌며 의연금을 모은다. 꽤 성과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일제 당국이 보기에 에누리없는 불령선인, 그 후의 대한민국 정부가 쓴 단어로 하면 요주의인물이었다. 당연히 일제는 사사건건 장인환의 다리를 걸었고 판판이 그 활동을 가로막았다. 장인환은 결국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늦장가를 든 아내에게 곧 부르마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 돌아갔지만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까다로운 미국 이민법이 부부를 갈라놓은 것이다. 다시 차린 세탁소 사업은 여의치 않았고 조선에 남겨둔 딸이 그만 어려서 죽고 말았다는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 왔다. 일찌기 재판정에서 "내가 어찌 그놈을 죽이지 않겠는가. 수백만의 한국민이 그의 모함에 빠져 죽었다. 그가 다시 살아서 한국에 돌아간다면 다시 그만한 한국 인민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나는 우리나라를 위해 그를 저격하였다......사람은 죽음의 길을 알아야 한다. 내가 그를 죽이고 또 나도 죽으면 우리나라의 광영이며 우리나라 인민의 행복인 것이다."고 사자후를 토하던 장인환도 이 슬픔에서 헤어나는 못했다. 생활고 끝에 속병까지 얻은 그는 1930년 치료받던 병원 3층에서 몸을 던진다.


전명운 역시 행복한 여생을 보내지는 못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는 후 교포 사회의 도움으로 지구를 반바퀴 돌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했다가 안중근과 만나는 기이한 인연을 엮기도 했던 그는 두 딸을 고아원에 맡겨야 하는 생활고에 시달렸고 마침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쥐뿔 하나 준 것이 없고 버티다 못해 등지고 떠나야 했던 변변찮은 조국일망정 그 이름을 더럽히고 그 나라 국민을 욕보이는 이방인에게 분노했던 두 명의 청년들이 나라로부터 훈장 쪼가리나마 하나 받았던 것은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는 없다"던 고고한 한국인이 초대 대통령으로 12년을 해 먹고 쫓겨난 다음이었다. 1908년 오늘 막노동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두 청년이 예기치 않은 협동으로 한 원수의 앞잡이를 죽였다

1980.3.24 오스카 로메로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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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0년 3월 24일 오스카 로메로 순교

엘살바도르는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동시에 중남미에 위치한 한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수도 이름인 산살바도르는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1980년 3월 24일 산살바도르의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말기 암 환자들이 미사의 주요 참여자들이었고 집전하는 이는 대주교였다. 미사 도중 총소리가 울렸고 놀라움과 공포가 짜내는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주교는 그 사제복을 피로 물들이며 쓰러지고 말았다.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의 최후였다.

죽기 하루 전 날, 그는 군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우리와 같은 민중입니다. 그대들은 그대들 형제인 농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대들은 양심을 되찾아, 죄악으로 가득찬 명령보다는 양심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날마다 더한 고통을 받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은 민중들의 아픔으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 군부에게는 ”명령합니다 나를 쏘아 주시오!“ 쯤으로 들렸을 도발적인 선언이었다.

14 가문의 사람들이 전체 경작지의 60%를 소유한 나라, 대지주들이 서로 서로 끌어주고뒤에서 밀며 나라의 행정 입법 사법과 군대와 경찰까지 장악한 나라. 소작인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던 나라. 보다못한 가톨릭 신부들이 헤롯보다 사악한 지배층의 압제에 저항하던 나라가 엘살바도르였다. 하지만 사제 생활을 시작한 이래 로메로 대주교는 그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로메로는 본래 보수적인 인사였다. 1942년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돌아온 이후 착실하게 경력을 쌓았고 1977년 산살바도르 대주교가 되기까지 삐딱한 행동 한 번 한 적 없는 하느님만 아는 사제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에서 밝힌 개혁적 사목방침에도 눈살을 찌푸리는 전통주의자였으며, 1968년에 열린 메데인 주교회의의 '민중의 교회로 가자'는 슬로건에도 반대하고, 해방신학을 '증오에 가득찬 그리스도론'이라고 공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전격 발탁되었을 때, 엘살바도르의 대지주와 군부, 상류층은 자신들에게 반항할 리 없는 대주교의 출현에 환호했고, 농민들은 암담한 눈길로 로메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로메로가 대주교가 된 2주 후 절친한 친구였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영화 <로메로> 중에서도 그란데 신부는 등장한다. 로메로는 친구인 그란데 신부에게 말한다. “챠베 주교님은 신부님이 과격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란데. “신부님은요?” 로메로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대답한다. “저야 신부님의 용기와 이상을 늘 믿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파괴적이고, 선동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란데 신부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런 말을 들을 분은 주님 한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속에 계시지 않아요. 왕국을 건설하며 우리와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 눈 앞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한다, 그의 장례식 미사를 집전한 로메로 대주교는 그날 이후 변한다. 빛을 본 사울처럼, 예수를 만난 삭개오처럼. 보수파들의 환영을 받으며 해방신학을 증오로 뭉쳐진 것이라 폄하하던 대주교는 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피살된 이들의 이름을 미사 시간에 부르짖고, ‘실종자 어머니 모임'를 만들고, ‘엘살바도르 시민 인권위원회'를 설립해 민중을 억압하는 폭력사건들을 기록하며 신자들과 사제들에게 “여러분은 성령께서 기름 부어 뽑아 세우신 예언자로서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선한 일들을 자랑하고 성심을 다해 악을 고발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골수 운동권 사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 잡는 것을 파리 잡는 정도의 수고로움과 동일시하던 엘살바도르 군사 정권은 이 난데없는 변화에 경악했다. 아마 이들도 “대주교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교회 일에나 충실하셔야지 응?” 하는 권유와 “차라리 사제복을 벗고 정치하시지?”하는 비아냥과 “이러다간 정말 재미없을걸” 같은 협박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의 당국처럼 말이다. 하지만 로메로는 굴함이 없었고,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의 불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 맹랑한 대주교가 미국에 더 이상 엘살바도르에 무기를 제공하지 말라는 요청까지 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군부는 로메로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로메로는 순교한다. 1980년 3월 24일이었다.

그 역사의 오랜 기간, 힘 쥔 자, 가진 자, 탐욕스런 권세자들을 위한 종교였으되, 그 태동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과, 가난한 자, 핍박 받는 자, 화평케 하는 자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시작했던 기독교는 그 창시자가 태어난 1980년 뒤 또 하나의 순교자를 추가한다. 로메로의 친구였던 그란데의 말, “예수님은 구름 속에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왕국은 건설하고 계시다.”는 말에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 그대로 녹아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기도문 그대로 하느님의 뜻은 결코 죽어서 천국에 이르기 위해 애쓰라는 것만이 아니요, 그 뜻을 땅에서 펼치고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라는 것일 게다. 우리 가톨릭의 사제들이 노동자를 돕고, 농민들과 어깨 걸고, 철거민들의 터전을 제공했던 자랑스런 역사처럼.

로메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런 강론으로써 그는 마치 예수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깎아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는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며 죽었다고 신자들에게 전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확신을 갖기만을 바랍니다.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81.3.25 수수께끼의 인물 독립운동가 이갑성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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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1년 3월 25일 수수께끼의 인물 이갑성의 죽음

광복회라는 단체가 있다. 항일운동가와 그 유족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희생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민족정기를 세우고 등등등 그 창립 의도와 목표가 매우 기특해 보이는 단체로서 8.15나 3.1절 기념식에서는 그 회장님이 빠짐없이 연단의 상석으로 모셔져 왔다. 그 초대 회장님은 이갑성. 그 이름도 혁혁한 기미년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다. 사실상 민족대표라 불리우기에는 좀 민망한 30대 초반의 나이로서 세브란스 병원의 사무원이었으나 젊었으니만큼 학생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기미년의 만세를 조직했으니 그 공을 인정할 만하다. 또 그로부터 10여년 뒤 신간회 일로 한 번 더 옥고를 치렀고 이후로도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독립운동가라고 불리울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아울러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한 사람으로서 3.1운동의 살아있는 증거였으니 광복회 초대 회장 자리를 그 말고 누가 감당하랴.

하지만 광복회 초대 회장 이갑성에게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이와모도 쇼이치. 33인 중 세 명이 창씨개명에 동참했는데 그 셋 중의 하나였다. 배급 타 먹기 위해 억지로 창씨개명한 이도 부지기수이니 창씨개명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30년대 이후의 행적이다. 이 시기 그는 이갑성이 아니라 이와모도로, 그리고 조선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일제의 밀정으로 살았다는 수많은 증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이력에 따르면 그는 1930년 경성공업주식회사의 지배인이 되었고 이후 1931년 상해로 ‘망명’하는데 그가 1937년 ‘일제에 잡혀’ 귀국하기까지의 기간이 문제의 핵심이 된다. 상해에서 그는 임시정부 출입도 하지 못하고 주변만 뱅뱅 돌았다. ‘밀정’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해 조선인 거류민 회장을 맡고 있던 이갑영같은 사람과 어울렸는데 그는 일본 영사관의 충실한 조력자였다. 이 기간 이갑성이 사용했다는 ‘일만산업공사 전무취체역 이와모도 쇼이치’의 명함이 후일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직함은 일본인들도 감히 근접이 어려운 자리였다는 전설이다.

이갑성이 밀정이었다는 증언은 꽤 많다. 당장 우익의 거두 장택상도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회담이 무르익을 즈음, 장택상은 한 인사가 한일회담의 ‘고문’으로 발탁되는 것에 극력 반대한다. “그 사람 때문에 피해 다니고 옥고를 치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을 하필이면 한일회담 고문으로, 일본 동경 한복판에 보낸다고? 그것만은 안된다.” 그는 신문을 움직였고 마침내 이 인사의 고문 추대는 무산됐다. 이 사람이 이갑성이었다. 장택상은 광복회원들과의 면담에서는 더욱 직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고 한다. “이갑성이는 다른 건 몰라도 세 가지는 안돼. 정부통령하고 국회의장. 그 사람을 주구로 부리던 사람이 (일본에) 있는데 말이 되는가. 그래서 인촌 김성수를 부통령으로 밀게 된 것이다.” 장택상 뿐 아니라 청산리 전투의 지휘관이자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까지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인촌 김성수도 유언에서 이갑성의 행적을 밝히며 자신도 그 피해자였음을 밝혔다고도 한다.

증언은 허다하게 많지만 그렇다고 이갑성이 밀정이었다는 문헌적, 실질적 증거가 딱 부러지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갑성 역시 유사한 질문들을 받곤 했지만 명확한 해명 없이 넘어갔다. 1980년 5.16 쿠데타 참여자이기도 했던 박창암이 그가 경영하던 잡지 <자유>에서 이갑성 밀정설을 제기했고 이에 이갑성이 소송을 걸어 대응했으나 1981년 3월 25일 사망함으로써 진실은 역사의 어둠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장택상이 말한 바 “정부통령과 국회의장만은 못할” 이갑성은 실제로 그 외에는 국회의원부터 국무총리까지 거의 모든 자리를 향유해 보았다. 한때 이승만의 선봉으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주역이었고, 부통령 후보로까지 떠오르는 등 이승만의 후계자로까지 주목받았으나 이기붕에 밀려 좌초한 뒤에는 이승만에게 독재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4.19와 5.16 후 그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다리 밑의 거지가 대통령이 되면 됐지 박정희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광복군 장교 장준하에게 아픈 데를 콕콕 찔리던 만군 장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공화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갑성은 훌륭한 방패막이였다. 1965년 광복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는 초대 광복회장이 된다. 그의 광복회가 한 일 중의 하나는 독립운동가 공적 심사를 통해 ‘나중에는 일본에 협력했지만 처음에는 항일투사였던’ 이들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한 것이었다.

2002년 광복회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과 함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기로 했다가 그 가운데 16명의 명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을 거부했다. 그 면면을 보면 일찍이 이갑성이 초대 회장을 역임한 단체로서의 광복회의 속내를 엿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김활란, 모윤숙, 현제명, 김은호, 방응모, 김성수, 장덕수 등등. 대개는 이갑성과 같이 항일행적이 있으나 그 뒤가 아리삼삼한 이들이었거나 해방 이후에도 굳건히 이 나라의 주류로 뿌리 내려 그에 대한 시비가 불경스러운 사람들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1981년 3월 25일 성대한 국민장으로 장례가 거행된 뒤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혔다. 광복회의 회장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하나인 이갑성과 밀정설이 제기되고 그 진지한 증언까지도 잇따랐던 인물 이와모도 쇼이치. 우리는 아직도 초대 광복회장 이갑성의 진실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모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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