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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2.17 작은 거인 김태식 세계를 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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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1980.2.17 작은 거인 김태식 세계를 누이다.

오늘은 밤에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옛날 글을 그대로 옮겨 옴.


봄이 왔으되 봄같지 않았던 80년 서울의 봄을 전후하여, 꼬마 권투팬이었던 나는 낙담의 한숨과 환호의 비명을 번갈아 내지르고 있었다. 80년 신년 벽두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3차 방어전의 금자탑을 세웠던 김성준이 일본의 듣보잡에게 타이틀을 허무하게 내 주었지만 그 한 달 뒤에는 독일병정 김태식이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런데 그 바로 1주일 후 당연히 롱런할 줄 알았던 왼손 스트레이트의 달인 김상현이 경기 종료 4분을 못참고 캔버스에 드러누웠고 광주에서 피바람이 몰아치던 5월 18일에는 무려 5차 방어까지 문제없이 끝냈던 최고의 테크니션 박찬희가 오꾸마 쇼지의 보디 공격에 썩은 고목처럼 주저앉아 버렸다.


그 숱한 경기와 쟁쟁한 이름들 가운데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는 바로 김태식이었다. 독일병정이라는 별명 그대로 풍차같이 휘두르는 좌우훅을 무기로 돌진에 돌진을 멈추지 않는 인파이터였던 그가 1980년 2월 17일 루이스 이바라라는 이름의 챔피언과 벌인 경기는, 인파이터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연타란 이렇게 치는 것이라는 것을 수십만의 촛불처럼 화려하고 휘황하게 선보인 경기였고 만석보 터지듯 속시원하게 사람들의 속을 뚫어 버린 게임이었다.

1회전 공이 울린 순간 나는 이바라의 스피드에 경악했다. 분명히 왼손잡이로 알고 있었는데 이바라는 레프트 잽을 날리면서 왼쪽으로 돌면서 김태식을 헛갈리게 했다. 키도 한 뼘은 더 큰데다 리치도 적잖이 긴 이바라와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김태식은 흡사 검은 메뚜기와 하얀 풍뎅이 같았다. 계속 풍뎅이를 놀리면서 날카로운 잽을 던지며 링을 빙빙 돌던 메뚜기가 멈칫했던 것은 1라운드가 중반을 갓 넘은 뒤의 일이었다. 강원도 묵호 바닥을 평정했었다는 김태식의 주먹이 이바라의 턱을 흔들었고 뒷걸음치던 이바라는 로프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폭풍이 시작됐다. 윙윙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롱훅과 어퍼컷이 이바라의 턱과 복부에 꽂힐 때마다 이바라는 움씰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케이오율이 90퍼센트가 넘던 돌주먹의 눈부신 궤적이 인정사정 돌보지 않고 이바라의 온몸 구석구석에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뜻밖의 행운이 뒤따랐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환호가 공 소리를 묻어 버려서 1라운드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이바라는 김태식의 샌드백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바라가 항의할 정신머리조차 빼앗겨서 그렇지, 그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권투팬이라면 알 것이다 30초가 얼마나 긴 시간인지.




폭풍은 2라운드에도 이어졌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 게 아니라 집중호우에 뼈속까지 젖어버린 이바라는 흐느적거리다가 무릎을 꿇었고 결국 길게 드러누워 버렸다. 장충체육관 지붕이 날아갈 듯한 환호가 장내를 메웠다. 이런 장쾌한 승리는 드물었다. 홍수환의 4전 5기는 너무 극적이어서 얼떨떨했고, 김상현과 박찬희는 잘한다 싶긴 해도 이렇게 폭풍같이 상대를 몰아부쳐서 곤죽을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관중들은 김태식이 인터뷰를 끝내고 퇴장한 뒤에도 흥분에 빠져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강원도 출신 재벌들은 앞을 다투어 김태식에게 아파트와 승용차를 선물하고 그걸 소리 높여 광고했다. "독일병정" 김태식의 돌진과 분투는 실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김태식의 1차 방어전 상대는 같은 체급의 또 다른 챔피언 박찬희가 고전했던 필리핀의 아르넬 아로살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를 이바라처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라이벌에 대한 우월감과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 보려는 맘이 있었으리라. 구름처럼 모여든 관중과 TV 앞에서 오픈 게임부터 줄줄이 보고 앉았던 동네 사람들도 그런 기대감으로 충만하였으리라. 그러나 아르넬 아로살은 허리가 유연하기로 소문난 필리핀 복서 가운데에서도 그 허리의 부드러움이 문어처럼 출중한 선수였다.


김태식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와 와 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이바라 때처럼 그 환호가 이어지지는 못했다. 바람이 올 때마다 스러졌다가 일어서는 갈대처럼 아로살은 장수말벌 날개짓같은 소음을 내는 김태식의 주먹을 허리 위로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로살이 내뻗은 주먹 한 방에..... 김태식은 몇 달 전의 이바라 형상으로 로프에 내몰리고 말았다. 어찌 어찌 판정으로 이기긴 했지만, 독일 병정 김태식, 상대를 통쾌하게 두들겨 부순 KO왕 김태식의 턱뼈는 불쌍하게 깨져 있었다. 의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결사의 투혼"이었지만 그리 영광스러운 상처는 아니었다.

그래도 김태식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아로살 때는 실수한 것이고 이제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이봐라~~~~" 하면서 이바라 꼴로 들부수어 주리라는 믿음은 누구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진실로 웃기지도 않는 방해자가 등장했다. 그 방해자는 다름아닌 스포츠라면 사죽을 못쓰는 육사 골키퍼 출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다.

광주의 피를 꿀꺽꿀꺽 먹고 자란 이 흡혈귀들은 차라리 햇볕 아래서 십자가와 키스를 하면 했지, 미국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싫어하는 변종이었던 바, 아파르트헤이트로 이름 높던 남아공과의 교류를 막던 UN 결의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했는데, WBA 랭킹 1위 명 도전자 피터 마테블라가 하필이면 남아공 사람이었던 것이다.


국보위는 이유 불문 김태식과 마테블라와의 대결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타이틀 박탈 위기에 놓인 김태식은 챔피언으로서의 어드밴티지 다 버리고 미국의 LA로 날아가서 마테블라와 결전을 치러야 했다. 글러브도 김태식의 파괴력이 잘 반영될 수 있고 항상 껴 왔던 6온스짜리가 아니라 LA 현지 규정에 따라 8온스짜리를 껴야 했다. 과정도 험난했고 상황도 조석변개했지만 김태식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의 권투에 환호하는 한국 사람들은 LA에도 넘쳐났다. 적어도 그날 경기장의 소재지는 LA가 아니라 서울특별시 나성구였다.


7라운드에서 김태식은 그로기에 몰렸다. 피터 마테블라의 주먹이 김태식을 난타했고 6온스 글러브를 끼었더라면 김태식이 먼저 캔버스에 나뒹굴 뻔 할 정도의 위기였다. 하지만 마테블라의 체력이 떨어지면서 독일 병정 김태식의 그 무서운 롱 훅이 점차 먹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환호도 덩달아 커졌다. 아이를 무등태운 채 아이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읏쌰 읏쌰를 외치던 교민의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타국에 이민와서 온갖 설움과 무시를 당하고 살던 한국인들은 이바라를 혼절시키던 김태식의 폭풍이 자신들의 가슴 속 설움의 건더기와 찌꺼기들을 홍수처럼 쓸고 가 버리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14라운드....... 김태식은 이바라와의 대전을 거의 재연하는 데 성공했다. 소나기 펀치..... 도끼같은 롱 훅과 갈고리같은 어퍼컷이 쉴새없이 터져나왔고 마테블라는 로프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최후의 공격은 화려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못되었던 것이다.

판정은 엉뚱했다. 내가 보기에는 김태식이 분명히 이긴 경기였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첫 부심이 매긴 점수가 발표되었을 때 경기장은 달나라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김태식이 이겼다는 판정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점수가 발표되자 경기장은 거친 야유로 뒤덮였다. 그때 무척 짜증스럽고 얄밉게 들리는 종 소리가 들렸다. 땡 땡 땡 땡 땡..... 마치 "조용히 해 이것들아" 라고 일갈하는 듯한 종 소리였다. 세 번째 심판도 마테블라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번엔 분노의 함성이 일었지만 분명히 미국인이 치는 듯한 종 소리가 또 그 함성을 조롱했다. 땡 땡 땡 땡 땡.... 입 닥쳐 이거뜨라.... 경기는 끝났어.

김태식...... 온 나라를 들뜨게 하고 고단하고 분주한 미국 교민들까지도 열 일 제쳐놓고 몰려들게 만들만큼 매력 넘치는 파이팅을 했던 김태식의 타이틀은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갔다. 그 뒤 김태식은 절치부심 새 챔피언이 된 안토니오 아벨라에게 재도전을 했지만 자신이 무너뜨렸던 이바라보다도 더 참혹한 모습으로 무너졌다. 이바라는 그래도 저항을 하다가 무너졌지만 김태식은 아벨라의 강력한 주먹을 맞고는 방향 감각을 잃어 버리고 허둥거리다가 버둥거리며 엎어졌다. 그날 김태식은 그가 자랑하는 롱 훅을 단 한 방도 아벨라의 몸뚱이에 꽂지 못했다. 화려했던 승리만큼 참혹한 패배였다.



김태식이 이바라와 벌인 경기는 지금도 그때를 추억하는 이들에게는 기가 막힌 술안주가 된다. 야 그때 정말.... 허허로이 주먹을 휘두르며 그때를 재연하는가 하면 불쌍하기 그지없던 루이스 이바라의 이름까지도 부록으로 기억 속에 담겨 내려오고 있다. 슈거레이 레너드가 헌즈를 잡을 때 퍼부었던 연타보다 화끈하고, 장정구의 변칙적이고 쌈박질같은 막무가내 주먹보다는 훨씬 예술적이었던 그의 롱훅 세례는 사람들의 뇌리에 그만큼 각인됐고, 두고두고 그리움의 대상이 됐다.




그런데 사실상 김태식의 최대의 약점도 바로 그 롱훅이었다. 롱훅을 휘두르다보니 당연히 턱이 열렸고 그 턱이 아로살에 의해 깨졌고 아벨라에게는 끔찍할 정도의 횡액을 당했으며 결국 그는 뇌수술을 받아가며 권투 인생을 접어야 했다. 이바라처럼 왼손잡이 주제에 변칙으로 골려주겠다고 나대다가 된 주먹 한 방을 허용하는 객기를 만나거나 라운드가 끝나는 공 소리를 주심도 선수도 듣지 못해 근 30초를 더 두들겨 팰 수 있는 행운을 잡았을 때, 그의 롱훅은 역사에 남는 빛을 발했고, 장쾌한 기억으로 길이길이 박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까다롭거나 되레 그를 능가하는 주먹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한국 권투사에서 가장 참혹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던 것이 김태식 권투였다.

슬픈 것은 그가 롱훅 위주의 복싱을 했던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어려서 사고를 당해 부러진 오른 손 엄지 손가락을 부실하게 치료하는 바람에 손가락이 굳어져 버렸고, 구부러지지 않는 엄지에 지장을 덜 주는 타법을 연마하다 보니 결국은 롱훅을 휘두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지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익힌 기술이었고 막강한 파괴력을 동반하였기에 김태식을 구름 위로 올려 놓았던 롱훅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화려함 뒤에는 깊이를 알 수 없을만큼 검은 동굴의 그림자가 항상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이 김태식의 빛이자 그림자였고, 영광이자 아픔이었으며, 추억이자 악몽이었다.

살아가면서 화려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화려함을 집어삼킬만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을 넘어서 집단에게도 마찬가지다. 툭하면 그때가 좋았다며 추억하고 그때가 재연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는 것은 좋으나, 상대가 이바라일 때 김태식이었던 것처럼, 시와 때가 다르고 상황과 배경이 다른 지점에서 그날의 영광만을 되뇌며 그 재연을 현실화시겨 보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스스로 불쾌해지고 불행해질 수 있는 망상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나마 김태식은 굳어버린 엄지 손가락이라는 슬픈 사연이라도 있었지만 펄펄 살아 숨쉬는 멀쩡한 손가락 가지고 "그때와 같은" 롱훅에 한 번이라도 걸려라고 붕붕대는 건 복고도 아니고 추억에 사는 사람도 아니다. 단지 어리석음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세상은 바뀌고 선수도 변한다. 사각의 링에 오르는 것은 항상 김태식과 이바라가 아니다. 그런데 누가 올라오든 이바라랑 할 때의 장쾌함만 떠오른다면? 그는 결국 패배만을 경험할 뿐일 것이다. "좋았던 시절"에 젖어 사는 사람은 결코 좋은 날을 만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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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2.18 암흑 속의 백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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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3년 2월 18일 독일의 백장미 피어나다

1943년 초, 전 유럽을 집어삼킬 듯 하던 나찌 독일의 기세는 꺾였다.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악전고투하던 독일 6군이 항복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것이다.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투였고, 이 이후 독일은 노도와 같은 소련의 반격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점만 해도 독일은 막대한 영토와 인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스탈린그라드의 패전이 독일의 패망의 전조라고 보기엔 아직 전쟁의 참혹한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나찌의 독일 지배 시대는 광기의 암흑이 철저하게 북해부터 알프스까지의 독일 땅을 뒤덮었던 시기였다. 독일 국가에 등장하는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 (독일 최고!)”라는 단어는 독일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다. 히틀러의 광기를 목전에서 본 독일 군부의 경우 여러 차례 쿠데타나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독일 국민들 일반의 반나찌 운동은 미미하고 빈약했다. 그러나 아무리 광기가 한 시대를 집어삼켰다 해도, 이성의 빛이란 가시처럼 그 식도를 긁는 법이다. 1943년 2월 18일 그 가시가 옹골차게 솟아났다. 하필이면 히틀러가 어설픈 폭동을 일으키며 역사에 그 이름을 알렸던 도시, 뮌헨에서였다.

단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다. 나찌 1939년부터 이른바 안락사 정책을 표방했다. 아리안 족의 우수한 혈통에 거치적거리는 존재인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 불치병 걸린 이 등에 대한 안락사를 적극 권장한 것이다. 불치병 걸린 아내가 눈물로 남편을 설득하여 자신에게 죽음의 주사를 놓게 한 후 행복하게(?) 죽어가는 영화도 버젓이 상영되었다. 뮌스터 주교 아우구스트 폰 갈렌은 이를 격렬하게 성토하고 히틀러에게 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여러분이나 나는 하느님께 복종하여 양심에 충실하려면 생명과 자유, 그리고 가정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것보다는 그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나찌 선전상 괴벨스는 갈렌을 죽여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기독교와의 마찰을 고려하여 생각을 고쳐먹고서 1941년 8월 이른바 ‘T4작전’ (안락사 작전)을 중단하지만, 그 노하우는 그대로 남아 유태인과 슬라브, 집시 등의 대학살에 수용된다.

갈렌 주교의 연설문을 복사해서 유인물로 만들어 돌리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스 숄이라는 의대생이 있었다. “누군가 드디어 큰 소리로 외칠 용기를 갖게 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가진 자유주의자 밑에서 자란 한스였지만 여느 청소년들처럼 나찌 유겐트 대원이 되었고, 1936년 노동절 때에는 당당히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기수로 선발될 정도로 촉망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점차 극심해져 가는 인종 말살과 파시스트의 광기 앞에서 한스는 나찌에 대한 그의 충성을 철회한다. 그는 자신에 동조하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와 알렉산더 슈모렐과 함께 ‘백장미’라는 반정부 유인물을 인쇄하여 배포하기 시작한다. 그 두 번째 유인물에서 백장미단은 이렇게 선언한다.

“폴란드를 점령한 이래 30만 명의 유대인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독일인들은 아둔한 잠 속에서 이러한 파시스트의 범죄를 조장한 셈이다… 사람마다 나는 이러한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나는 양심에 꺼릴 것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모두가 유죄, 유죄, 유죄이다! ” 독일인들의 머리를 때리는 죽비였고, 등짝을 휘갈기는 채찍이었다.

이 유인물을 우연히 한때 열렬한 나찌 소녀단원이었던 동생 소피가 보게 된다. 일찍이 “히틀러는 조국에 위대함과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갖고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하던 어린 나찌 소녀단원이었지만 그녀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그녀는 오빠에게 나는 듯이 달려가는데 그만 오빠의 방에서 문제의 유인물을 발견하고 만다. 오빠는 만류했지만 소피는 완강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백장미의 일원이 된다. 그들은 두 세 번 유인물을 뿌리고 뮌헨 시내 곳곳에 낙서를 남겼다. “어떠한 국가라도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는 정부를 가져야 함을 잊지 말라.”

백장미단의 활동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943년 1월 나찌 뮌헨지구당 지도자 파을 기슬러는 대학생들의 야유에 직면해야 했다. “30만 독일 청년이 스탈린그라드의 제물이 됐다. 총통 고맙다!” 학생들의 야유는 곧 시위로 이어졌다. 나찌들의 촉각이 곤두설 밖에. 1943년 2월 18일은 맑디 맑은 목요일이었다. 백장미 단원들은 강의실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밤새 긁어낸 유인물이 눈처럼 대학의 가로수길을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학교의 급사는 열혈 나찌 당원이었고, 그가 모든 출입문을 봉쇄하고 게슈타포를 부르면서 백장미는 꺾이고 만다.

스무 살을 갓 넘은 청년들에게 나찌는 추호의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가지 판사’로 이름 높은 판사를 배정했고 법정에서 하일 히틀러 경례를 올려부친 그는 학생들에게 “훌륭한 독일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준엄하게 물었다. 아 그때 잉게 숄이 남긴 한 마디는 너무나 당연해서 탁월하다. “누구든 시작해야 할 일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다만 우리처럼 행동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죠.”

나찌는 그들을 체포한 지 단 4일만에 사형을 집행한다. 교도관들은 사형 직전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여 담배 한 대를 나눌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단두대에 오른 것은 소피였다. 재즈를 좋아하던 평범한 여대생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태도가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그리고 한스가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자유 만세”였다. 칼날이 떨어졌고 백장미들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독일이 가장 부끄러웠던 시기를 조금이나마 가릴 수 있는 장미꽃이 되어 남아 있다. 그들이 외쳤던 한 마디는 21세기의 한국 국민에게도 여운이 크다. “당신은 독일의 모든 것이 당신과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당신이 독일이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우리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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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2.19 에케르트 3대의 인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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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1년 2월 19일 프란츠 에케르트 3대 인연의 시작

국사 교과서에서는 구한말 외국인들의 이권 탈취 현황을 적시한 대목이 나온다. 경의선은 프랑스 (후에 일본) , 운산 금광은 미국, 그리고 당현 금광은 독일 등등의 목록이 그것인데 독일이 차지한 당현 금광을 시찰하기 위해 1899년 뜻밖의 귀빈이 독일에서 조선을 방문한다. 독일 황제의 동생인 하인리히였다. 이때 독일은 덕국(德國)이라 불리웠던 바, ‘덕국 친왕’의 방한은 구한말 최대의 국빈 행사였다. 고종 황제는 성대한 잔치를 벌여 그를 환영하는데 하인리히는 고종 황제에게 색다른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그는 25명의 군악대를 대동했던 바, 프로이센 독일 특유의 절도 있는 자세와 휘황한 음악은 고종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훨씬 전에 러시아 황제 대관식을 다녀온 민영환이 군악대 창설을 건의한 기억도 떠올린 고종 황제는 군악대를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독일 음악 교사도 요청했다.

그로부터 2년 뒤 1901년 2월 19일 큰 키에 멋진 수염의 한 남자가 고종 황제 앞에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한다. 그 이름은 프란츠 에케르트. 그때 나이 마흔 아홉의 중년이었는데 그는 동아시아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나이 스물 일곱 살에 일본 해군 군악대의 고문으로 파견되어 무려 20년을 일본에서 지냈으며 오늘날의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까지 작곡한 사람이었다. 그 후 독일로 복귀한 에케르트는 베를린 군악대장으로 취임했는데 또 다시 극동의 한 왕국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는 지금의 허리우드 극장 자리에 음악 학교를 설립하고 군인 등을 차출하여 맹훈련을 시킨다. 음악 이론과 실기를 병행한 이 교육을 통해 서양 음악에 전혀 문외한이던 은자의 왕국 젊은이들은 서양식 악보의 콩나물과 트럼펫 소리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에케르트는 “한국인들이 음악에 천부적 재질이 있고 일본인보다도 훨씬 낫다.”고 즐거워했다고 하는데 에케르트의 노력과 한국인들의 재능이 시너지 효과를 냈는지 고종 황제 앞에 첫 인사를 드린 지 7개월 만에 화려한 결실을 내놓는다.

9월 7일은 고종의 생신이었다. 경운궁에는 대소신료들과 국내 주재 해외 공관원들이 총집결했다. 이날 에케르트의 군악대는 감동적이고 역사적인 첫 연주를 한다. “단지 4개월의 연습으로 한국인이 이렇게 서양 음악을 잘 연주할 줄이야..... 이 정도 실력의 악대라면 곧 극동 최고의 악대가 될 것이다.”(영문 잡지 Korea Review 중 )는 찬사가 나올만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그 날, 에케르트는 또 하나의 역작을 선보인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서양의 외교 사절들의 귀에도 낯선 음율이 흘러나왔고 그 뒤를 이어 한국인 중창단이 노래를 시작했다.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 갓치 살으시고 (해안에 쌓인 모래알만큼 오래 사시옵소서)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대한제국 애국가였다.

에케르트는 대한 제국 국가를 부탁받고 조선의 음악을 알기 위해 궁중 아악과 민간의 음악을 들으며 악상을 떠올렸고, 궁중행사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하여 그 음악과 소리를 들으며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심지어 비오는 날의 빗소리, 천둥 소리까지도 빼놓지 않을 만큼 조선을 깊이 연구한 끝에 애국가를 만들었다. 그래서 에케르트의 애국가는 조선의 음계를 바탕으로 했고, 청중들의 귀에도 쉽사리 순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지금 들어도 그렇다. 서양 음악가가 지은 것 같지 않은 우리 가락풍이 만져질 듯 느껴지니까. 고종 황제도 대만족이었다. 에케르트는 태극 3등급 훈장을 수여받는다.

그러나 3년 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는 식물국가가 된다. 에케르트의 애국가를 널리 보급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민영환이 자결로 생을 마친 것처럼, 대한제국 애국가의 수명은 길지 못했다. 한일합방 이전 1909년 이미 전라남도 관찰사 신응희가 이런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각 학교에 훈령을 내려 기부금과 애국가 부르는 것을 엄금하라.” 그리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이후에는 당연한 결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에케르트는 한일합방 후에도 독일에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대한제국 군악대가 이왕직 양악대로 격하되었어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이 되면서 그 입지가 좁아지고, 이왕직 양악대가 해체된 뒤에도, 위암에 걸려 위중한 때에도 그는 조선인들에게 음악 교육 시키기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은 뒤에도 한국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그는 구한말 세워진 프랑스어 학교의 교사 에밀 마르텔을 사위로 맞았다. 이 에밀 마르텔도 한국과의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1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 군으로 참전하여 장인의 나라 군대 (그 처남은 독일군이었다) 와 싸운 뒤 1920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경성제대에서 프랑스어 강의를 했고, 2차대전 말기 서양인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중국으로 피했다가 해방 뒤 또 한국에 와서 살다가 죽었다. 그의 집이 바로 이기붕의 집으로서 4.19 때 불타버린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리운 바로 그 집이었다고 한다.

마르텔의 딸, 즉 에케르트의 외손녀 가운데 한 명은 수녀가 됐다. 지금 대구에 있는 베니딕토 수녀원은 원래 함경남도 원산에 있었고, 에케르트의 외손녀 마르텔 수녀는 그 일원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공산화와 한국 전쟁 와중에 북한 정권의 포로 신세가 됐고 수용소로 끌려가 참담한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 기간 중 무려 28명의 외국인 신부와 수녀가 목숨을 잃었다. 총살당하기도 하고 병으로 죽기도 했다. 마르텔 수녀는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협상 끝에 동독을 거쳐 서독으로 돌아갔으나 그녀는 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봉사하다가 1988년 대구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몰랐겠지만, 원산과 덕원 일대의 수도원을 초토화시키고 신부와 수녀들을 괴롭혔던 함경남도 정치보위부 1과장 김석형은 1960년 이래 남한 하늘 아래 있었다. 남파간첩으로 내려와 체포된 후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0년 비전향 장기수로 송환된 김석형도 얼마 전 죽었다.

1902년 2월 19일 고종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프란츠 에케르트와 그 후손 3대는 이 땅에서 일어난 비극과 희극, 그리고 굴곡진 역사의 마디마디를 체험하고 에케트르의 애국가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에케르트는, 그리고 그의 사위는, 그리고 그 외손녀는 정말 한국과 무슨 인연이 있었길래, 그런 가족사를 지니게 됐을지 사뭇 궁금하다. 시간 나면 한 번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가 봐야겠다. 들어보시라 대한제국 애국가다.

http://www.youtube.com/watch?v=4DYfJwHq8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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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대표님 대답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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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한 기자가 진지하게 물었다. “위대한 정치인이 되기 위하여 어떤 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시가를 깊숙이 빨아들여 내뿜은 뒤 처칠은 무게 있게 대답했다. “10년 후를 내다보는 눈을 가지는 것이오.” 대영제국 최대의 정치인의 한 마디를 놓칠세라 기자는 재빠르게 펜을 놀렸다. 처칠은 그걸 기다려 준 후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자질은, 10년 후 자기 예상이 왜 틀렸는지를 해명할 줄 아는 능력이오”

 

 영국인 특유의 블랙 유머일 수도 있겠지만 기실 처칠은 진심을 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정치는 미래를 생산하고 설계하는 드문 직업 중 하나다. 물론 오늘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고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일과 보다 먼 내일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 보다 밝은 미래를 준비케 하는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게 어디 갑마다 제갈량이고 을마다 이율곡이랴. 그 예상이 적중하여 온갖 찬양 찬사 속에 표정관리하는 일보다는 터무니없이 빗나간 예상 때문에 스타일과 인상이 코 푼 휴지처럼 구겨지는 일이 더 흔할 것이다. 그때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용기 있게 고백하고, 무엇이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는지를 분석하여,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또 내놓아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인의 업적일 것이다. 하일 처칠.

오늘 불현듯 처칠의 어록을 뒤적이게 한 것은 우리나라의 어느 정치인 때문이다. 빙빙 돌리지 말고 곧게 펴자. 그는 통합진보당 유시민 대표다. 나는 그의 영민함을 존경한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문장가고, 폭넓은 독서와 공부를 바탕으로 한 식견 또한 그에 필적함을 인정한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 적잖은 반감이 있을망정 그의 행보에 발병 나기를 빌 정도는 아니며, 훌륭한 정치인으로 이름을 남기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가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통합진보당 (이하 통진당이라고 부른다. 진보당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하진 말라. 진보신당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국회의정지원단에서 진행된 강정마을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지금 진행되는 공사는 중단돼야 한다. 그 다음 새로운 해군 기지 건설이 필요한지 논의해 보고, 필요하다 하더라도 유치를 원하는 지역이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곳을 찾아서 해야지 도민의사에 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2007년 그가 대통합민주신당 예비 대통령 후보로서 제주도에 와서 한 발언을 늘어놓겠다. “현재 규모의 해군 기지는 오히려 (작아서)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함대급 장성 지휘관이 오는 해군 기지여야 한다.....전략적 차원에서도 해군 기지가 필요하다,. 대양해군력의 전초기지로서, 심장으로서 새롭게 부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얘기했고, 아울러 기자들 앞에서 중국 해군력과 일본 해군력에 대해 상세한 브리핑까지 했다.


 왜 오늘은 이 말하고 어제는 저 말 했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유시민 대표는 2002년에는 제주도는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섬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2007년 그를 뒤집은 바 있고 나는 그것도 탓하지 않는다. 문제는 근거다. 사람의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 하다못해 화장실 다녀오기 전과 뒤가 다른데 시민운동단체 회원이나 시사프로그램 사회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정권의 핵심으로서 이전에는 상상 못하던 정보에 접근하게 되고,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의 원대한 고민을 누려 본 이가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정치인에게 “남아일언중천금”은 악덕이다. 남아일언일센트라고 욕을 먹더라도 자신의 발언을 수정할 줄 아는 것이 오히려 가치로운 것이요, 그리고 처칠이 말한 바대로 그 수정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정치인의 자질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2007년 주장이 설득력 있었다고 본다. 비록 ‘틀렸을망정 내가 왜 틀렸는지를 얘기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자질을 보여 준 것이다.


 2012년 그는 또 발언을 뒤집었다. 정확하게 5년을 주기로 그는 같은 대상을 두고 또 말을 바꾸었다. 일관성의 문제는 아니다. 누차 말했듯 일관성이란 원래 라면처럼 후룩 먹기는 좋아도 영양가는 적은 법이다. 단지 전환과 번복의 합리성을 따져야 할 뿐이다. 적어도 그가 훌륭한 정치인이 되려면, 아니 정치인의 기본을 갖추려면 이제 2007년 그가 했던 발언들을 그 스스로 논파해야 한다. “중국 일본 해군력 센 거 사실입니다. 근데 우리가 해군력 증강해 봐야 상대가 됩니까? 그냥 우리는 평화적으로 가야 합니다.”라고 고백하고서 “그럼 그때는 왜 그랬느냐?”라는 질문에 “솔직히 무능했습니다. 그냥 해군이 하자고 해서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든지, “노무현 대통령 대양해군론 그거 참 웃기는 꿈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을 못 말린 게 참 한스럽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왕년의 정치적 주군을 비판하든지, 하다못해 “그때 강정은 안와봤는데 오늘 와 보니 구럼비 바위 진짜 아름답고 죽어도 기지 못 짓겠습디다”고 머리를 긁던지, 죽도 밥도 아니라면 문득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젯밤 꿈에 충무공이 나와서 제주도는 아니니라 했다고 하든지, 무슨 근거든 대야 할 거 아닌가 말이다.


 “새로운 해군기지가 필요한지 논의”하자니. 유시민 대표는 그럼 참여정부 국무회의 참가자로서 그토록 무위도식했단 말인가. 보건복지부 업무에 바빴다고 치자. 그럼 한 나라의 예비 대통령 후보로서 그런 검토도 없이 “전략적 가치”를 논하는 무리수를 두었단 말인가. “주민에 반한” 기지를 반대한다는 건 이해하겠다. 그렇다면 참여정부 때 있었던 주민 동의 절차는 죄다 사기와 협잡이었다는 사실부터 고백하고서야 말이든 쌈이든 입에 들고 날 일이다. 지난 정권, 그렇게 나무로 깎은 등신들의 정권이었는가? 봉하마을에 잠들어 계신 그 분, 그렇게 멍청하고 허무맹랑한 분이었는가? 참여 함여 하더니 주민 동의 사기 쳐서 받아내는 협잡꾼 정권이었단 말인가. 대관절 유시민 대표 자신 핵심 인사로 참여했던 참여정부 5년을 어떻게 이렇게 모욕하고 짓밟으며 제주도 바닷물에 거꾸로 처박을 수 있는가.


 이 부분에서 나는 유시민 대표의 해명을 기다린다. 그 논리와 근거가 정교하고 이유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의 변신에 박수를 보낼 용의가 있다.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는 필요하던 사업이 왜 지금은 만고 천덕꾸러기 사업으로 걷어치워야 하는 일이 되었는지에 대한 멋진 해답으로 나를 설득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는 유시민 대표를 정치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또 다른 용도를 말하자면, 여기에 대한 해명이라도 들어 놔야 유시민 대표나 그가 지지하는 누군가가 대통령이 됐을 때 또 “어 해군 기지 하긴 해야겠는데요?”라고 할 때 반박할 자료라도 건지지 않겠는가.


 도대체 2007년 유시민 대표의 발언은 무엇이 틀렸으며, 오늘 그의 말은 왜 타당한가. 이 대답은 꼭 들어야겠다., 유시민 대표가 아니라면 그를 존경하여 따르는 분들의 해명이라도 좋다. 다시 한 번 처칠을 들먹인다. 정치인의 자질은 10년 뒤를 내다보는 판단뿐 아니라 그 판단이 틀렸을 때 그를 해명하고 보완하여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이다. 유시민 대표가 그 자질에 걸맞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나로 하여금 열렬한 ‘애국자’를 만들 뿐이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네크라소프의 싯귀를 인용한 것이 유시민 대표 아니었던가. 적어도 나는 지금 무척 슬프고 노엽다. 나는 그런 애국자는 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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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2.20 코리아 판타지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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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8년 2월 20일 코리아 판타지 초연

2월 19일에 대한제국 애국가 얘기를 했으니, 오늘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얘기해 보는 게 좋겠다. 1938년 2월 20일 우리나라의 국가의 선율이 담긴 <코리아 판타지>가 처음으로 지구상에 울려 퍼졌다. 그 장소는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역사를 지닌, 이웃나라 영국에 허구헌날 쥐어 터지고 짓밟히고 그 폭정 하에 수십만이 굶어죽고 해외로 탈출해야 했던 기구...한 역사의 나라 에이레의 수도 더블린이었다.

대한제국에서 '애국가'라는 이름의 노래는 다양한 가사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프란츠 에케르트의 애국가는 공식적으로 전파되었지만 각 학교마다 지방마다 다른 가사로 불리워지는 노래가 따로 있었다.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가사의 원형은 윤치호 또는 민영환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는데, 윤치호 쪽이 더 유력한 것 같다. "성자신손 오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가 안창호의 권유에 의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되고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조국일세"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로 바뀌고 몇몇 구절들이 수정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정착해 갔다고 한다. 문제는 멜로디였다.

어떤 가사는 영국 국가이자 찬송가 멜로디였던 "God Save the King"을 빌려오기도 했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불리운 것은 역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의 멜로디를 딴 것이었다. 배재학교 영어 교사의 제의였다고 하는데 별 생각 있어 보이지 않는 그 제안은 그 이후 근 반 세기 동안 조선이자 '대한' 사람들의 한과 의지를 담아 냈다. 해방 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동해물과 백두산이'도 올드랭사인 멜로디였고, 국군이 북진했을 때 국군을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의 환영가도 역시 그 가락이었다.


193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던 음악가 안익태는 여기에 못내 불만이 있었던 것 같고 애국가 가사를 자신의 작품 <코리아 판타지>에 담았다. 그런데 일찍이 친일교사 추방운동으로 무기정학을 먹은 적도 있는 안익태, 애국가를 작곡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수백 번 읊었을 안익태에게는 이상한 면도 있었다. 굳이 미국인들에게는 '익태 안'이 아니라 '에키타이 안'이라고 지칭하고 다녀 그를 돌봐주던 한국인 선배들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는 것.


1935년 유럽으로 건너간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조선인 선수들을 만난다. 손기정도 신의주 사람이었지만 평안도 말씨 억세게 쓰는 이 깡마른 안경쟁이가 '조선의 응원가'라고 내미는 악보에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손기정이 스터디움에 달려들어올 때에도 안익태는 몇 안되는 재독 조선인들과 함께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불렀다고 한다. 적어도 그 순간의 안익태의 '우리 나라 만세'는 조선 만세였을 것이다. 그리고 더블린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하며 <코리아 판타지>를 처음 무대에 올리던 무렵, 그는 그렇게 얘기했다. "한국인들은 투쟁심이 아일랜드 사람들보다 부족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일랜드는 지금 자유국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지나치게 평화적(?)인 조선인이었다. 목메어 불렀던 노래 속 조국의 압제자의 행각을 찬양하는 음악회를 지휘했던 것이다. 2006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에 재학 중이었던 송병욱이 공개한 동영상 속에서 '에키타이 안'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독일 베를린 구 필하모니홀에서 열린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베를린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하며 자신이 작곡한 축전음악 '만주국'을 연주하고 있다. 이 음악은 안익태의 연보나 작품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곡이었다. 더 찝찝한 것은 이 실종(?)된 음악의 선율이 코리아 판타지 최종 완성본에 일부 삽입됐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일본 축전 음악을 독일에서 지휘하기도 하는 등 친일적 활동을 한 증거가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코리아 판타지의 합창 부분이 대한민국 국가가 된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가 친일 행위를 했건 안했건 일제 시대 교민들이 올드랭사인에 맞춰 애국가 부르는 것을 보며 저 노래에 내가 곡을 만들리라 다짐했던, 그리고 외국인 합창단에게 한국어 발음을 교육시켜 가며 코리아 판타지를 지휘했던 음악가에게 그것은 감동이었으리라. 그런데 그 감동을 안익태는 다소 엉뚱하게 푼다. "박사님의 허락없이 제가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교향시 <한국>을, 위대한 영웅이자 위대한 애국자로 존경하는 한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시며, 생긴 지 얼마되지 않고 할 일 많은 우리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이승만 박사께 헌정합니다. - 안익태, 1954년 8월 25일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사보된 악보 중) 그리고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 1호 문화포장을 수여하여 답한다.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는 윤치호는 젊었을 때의 개화의 열정이 좌절당한 후 영어로 일기를 쓰는 고상한 지식인으로서 비루한 조선을 한탄하며 살다가 결국 친일파로 전락했고, 그 작곡가 역시 처음의 뜻은 가상하였으되, 그 생애를 밝히면 밝힐수록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애국가를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60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노래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비를 걸자면야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하는 해방가의 작곡가 김성태부터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의 작사자 윤해영이 온전할 수 없고, 그들을 비판할 수야 있지만 노래를 지울 수야 없지 않은가.

내가 들었던 가장 감동적인 애국가는 1980년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물러간 뒤 도청 앞에 운집한 수만 명의 군중들이 불렀던 애국가였다. 방석모를 쓰고 카빈총을 든 청년이 그야말로 긍지와 기쁨으로 터져나갈 듯 한 마디 한 마디를 부르던 장면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때 청년은 그 생명을 '길이 보전'할 수 있었을까. 애국가의 선율이 처음으로 웅장한 합창으로 울려 퍼진 날, 그의 애국가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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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2.21 동일방직 똥물사건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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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1978년 2월 21 동일방직 똥물사건의 영웅

페북친구이자 존경하는 박준성 선생님이 쓰신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 (전국금속노동조합 간)라는 책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얇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뜻. 일독을 권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이 꾸려 가는 역사의 실타래 속에서, 우리는 몰랐던 사실은 아프게 만나고, 뻔히 알던 일이라 해도 마치 딴 사람처럼 치장하고 나온 동료를 ...대하듯 얼떨떨한 새로움에 젖게 된다. 그리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세기가 가도 '그날이 다시 오면' 엷어질지언정 지워지지 않는 느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아래 사진으로 역사에 남은 사건과 사람들처럼 말이다.

1978년 2월 21일. 그러니까 34년 전의 오늘 새벽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 일어난다. 박준성 선생님의 강의를 빌려 온다. "1972년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조합원은 1천383명이었다. 그 가운데 1천204명이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조합 간부는 회사 말 잘 듣는 기술직 남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녀부장이던 주길자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여성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사건이었다. 노동조합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어 갔다."

여자들에 비해 남자의 못남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역사라면 온 인류사를 통틀어 우리 나라가 첫째 아니면 둘째, 때려 죽여도 셋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제 못나서 오랑캐에게 빼앗긴 주제에 몸 더럽힌 여자와는 살 수 없다고 으르대던 맹추들의 아이러니가 그랬고, 요즘 툭하면 등장하는 XX녀에 대한 광적인 돌팔매질이 그렇다. 동일방직의 남성 노동자들 역시 단군의 자손인데다가 그 가운데 특출하게 찌질한 존재였던 것 같다. '뭣도 안달린' 여자들한테 밀린 것이 싸나이 명예에 똥칠이라도 했다고 봤던지, 그들은 회사와 아삼육의 콤비를 이루며 눈에 불을 켜고 노조 파괴 공작에 나섰다. 마침내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가 있던 날의 새벽이 밝았다.

투표를 하러 사무실에 모여 들던 여성 노동자들 앞에 버티고 선 것은 회사 측에 매수된 남자조합원 행동대원들이었다. 그들은 가죽 장갑을 끼고 뭔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비위도 좋지, 그건 똥물이었습니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찌질한 남자 새끼들은 여성 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똥물을 뿌릴 뿐만 아니라 옷을 들추어 그 속에 집어넣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쏟아붓기도 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도 아니고, 재산을 통째로 들어먹은 사기꾼도 아닌 직장 동료들에게 그렇게 한 것이다. 그때 가죽 장갑 끼고 똥 손에 쥐고 있었던 인간들의 오늘에 저주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 벌어지는 동안 현장에 있었던 경찰 둘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지요. 하기야 구경도 그런 구경이 있었겠는가. "가난하게 살았지만 똥을 먹고는 살 수 없다."는 울부짖음은 아랑곳없이 유신 정권은 동일방직 노동조합을 박살내겠다는 심사를 그렇게 여지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여공의 표정을 들어다본다. 여덟 팔자로 다물린 입은 금새라도 흐느낌으로 미어터질 것 같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지 않는 눈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범벅이 된 빛을 쏘아 낸다. 부르쥔 주먹이 덜덜 떨리고 있음은 누가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 저들의 푸른 작업복에 뭉터기로 박힌 저 똥물들은 1978년 대한민국 역사에 들이부어진 오물로서 오늘도 싯누렇게 빛난다. 입에 똥물을 머금고 양치질을 하는 듯한 욕지기로 양심을 건드린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동일방직 근처 사진관 주인 이기복씨였다. 이 사진관은 원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단골로서 '영원한 추억과 우정'을 남기기 위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상상도 못할 일이 동료 남성 노동자의 손에 자행되고, 그 꼬라지를 경찰은 빙글빙글 웃으며 보고만 있고, 노동자들의 조직이라는 노총 간부는 되레 똥물 튀기기를 독려하고 있는 판에, 입 안에 똥이 처넣어져 악도 쓰지 못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증거로 남기고자 했을 때, 생각나는 사람은 그 사진관의 주인 아저씨 뿐이었다. 울면서 자신을 찾는 여성 노동자들의 부름에 이기복씨는 달려 왔고,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이미 '지역 차원이 아닌 중앙 차원에서' 동일방직 노조 박살을 기획, 연출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와 그 외 끄나풀들이 똥물 냄새에 둔감할 리 없어서 이기복씨의 사진관은 살기등등한 기관원들의 방문을 받는다. 하지만 이기복씨는 끝까지 필름이 없으며 "노조원들이 가져갔다."고 잡아떼어 여성 노동자들의 피눈물로 현상한 사진을 지켜 낸다.

"10여명의 여공들이 똥물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노조사무실과 사무장실 천장과 벽에 온통 똥물이 묻어 있었습니다. 또 몇몇의 여공들은 바닥에 누워 울고 있었습니다." 이기복 사장님의 회고다. 얼마나 참담한 광경이었을까.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데모 한 번 나가지 않는 처지의 누구라도 발을 구르며 분노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칼끝이 향했을 때 그 분노를 숨김없이 드러내기란, 작은 행동이나마 발 내딛어 그 분노를 100분의 1이라도 표출해 보기란 힘들다는 걸 평범한 사람들이며 누구나 다 안다.

오늘 저 사진을 다시 보매 동일방직 노동자 뿐만 아니라 이기복씨가 궁금해졌다. 78년이라면 긴급조치가 시퍼렇가 못해 눈흰자위처럼 허연 빛으로 세상을 쓸어볼 때였다. 평범한 동네 사진관 아저씨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사진을 지켜낸 것일까.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날으는 기러기 떼 꼬치구이를 하래도 할 수 있었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서 사진 있는 거 다 아니까 내놓으라고 책상을 두들길 때 그는 무슨 용기로 "사진 없습니다. 다 가져갔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뗄 수 있었을까. 행여나 숨겨뒀던 필름이 발각이라도 됐다면 몇 년쯤은 우습게 감옥에서 썩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다.

이기복씨도 덜덜 떨었을 것이다. 그냥 의리고 뭐고 확 다 집어치우고 슬며시 사진 내 주며 "나야 뭐 돈 주고 찍으래서 찍은 거 뿐입니다."하고 겸연쩍게 말하며 머리를 긁고 싶었을지도 모르구요. 나아가 "쟤들은 진짜 빨갱이들이었다니." 하면서 스스로를 위무하고 망각의 저편으로 양심의 고리를 넘겨 버리고 싶은 유혹에 휩싸였을 가능성도 크다. 실지로 그런 사람들 많았다. 하지만 '여공'들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김치와 치즈를 연발하며 웃음을 끌어내던 평범한 사진관 주인은 그 공포와 유혹을 넘어섰고 그는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문 기록을 후세와 후손들에게 전해 주게 된다. 때론 백 권의 책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설득력이 큰 법. 그가 없었다면 동일방직 똥물 사건은 건조한 문자와 억울한 육성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반드시 기깔나는 업적을 남기고 불세출의 위업을 이룩해야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때나는 '큰 자리'에 오르는 '인물'들이어야만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기복씨같이 평범한 사람, 장삼이사에 필부필녀의 한 사람 뿐일지라도, 술 먹고 어울리는 친구들일지라도 우리 앞에 닥쳐든 역사에 무심하지 않으면, 그 공포에 저항하지는 못할망정 항복하지는 않으면, 유혹에 빠질망정 정신을 잃지는 않으면, 저 사진처럼 모래처럼 작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역사의 알갱이들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찌의 마수에서 유대인들을 구해 낸 오스카 쉰들러는 사실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매우 멀고, 비열한 돈 거래에는 도가 텄던 비정하기까지 한 사업가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위태로움을 무릅써 가며 유태인들을 구했다. 그의 손에 생명을 구했던 한 유태인이 그에게 그 까닭을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당연하지. 그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거든.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는 인간적으로 대해 줘야 하는 거라고."

그 대답은 언뜻 싱거워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건 쉰들러가 선택한 마지막 양심의 보루였던 거다. 나찌에 저항하고 히틀러 개새끼를 부르짖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나는 그 와중에 돈도 벌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는 사람들만큼은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가도록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성곽이었고 그는 그 성곽을 지켜낸 것이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일궈낸, 지성적이지도 않고 특출나게 용감하지도 않은 한 무뚝뚝한 독일 남자가 빚어낸 인간의 위대함이었던 셈이다. 1978년 2월 21일 이기복씨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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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22 오늘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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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22일 오늘을 잊지 마세요

2006년 2월 22일은 구슬프게 비가 내렸다. 그 빗물만큼이나 많은 눈물이 뿌려지던 곳이 있었다. 서울 용산의 한 초등학교였다. 방학 때였고 아직은 이른 시간 오전 7시였지만 선생님들은 물론 학생들과 그 부모들까지 2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운동장에 둘러서서 한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이었다.

... "그렇게 일찍 떠나려고 그랬는지 예쁜 짓만 골라서 했던" 열 한 살의 여자 아이는 나흘 전 비디오 가게에 가겠다고 길을 나선 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포천에서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 목에는 잔인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범인은 곧 잡혔다. 인근 신발가게 주인이었다. 미성년자 성추행으로 집행유예 중이었던 그는 여자 아이에게 못된 마음을 먹고 예쁜 신발을 보여 주며 공짜로 주겠다고 유인, 가게로 끌어들여 성추행을 하려다가 아이가 반항하자 그만 아이의 연약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일순 악마였던 사내는 그 욕망이 식은 뒤에는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돌변했다. 자기가 벌인 일 앞에서 겁이 난 이 미욱한 인간은 이번엔 제 새끼까지 범죄에 끌어들인다. 아들과 함께 시체를 불태운 후 유기한 것이다.

그들의 안도는 24시간을 지나지 못했다. 16시간 만에 시신이 발견됐고, 경찰은 동종 전과가 있는 신발 가게 주인에게 일찌감치 혐의점을 두고 수사를 시작했다. 결국 아들이 먼저 사실을 자백했고, 사실의 전모가 밝혀진다. 그리고 2월 22일 오늘은 아이의 장례식이자 마지막 등교날이었다. 영정 속의 아이는 학교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나흘 전만 해도 활기차게 뛰어다니던 운동장과 친구들과 이별했다. 그때 봤던 뉴스 중 같은 반 아이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착하고 친구들에게 잘해 주고......" 아이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넘치는 울음을 막느라 잔뜩 찡그려진 얼굴의 아이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한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언제부턴가 아내가 이상해졌어요. 아니 언제부턴가는 아닙니다. 그 일이 있은 뒤였지요. 애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하루는 집에 갔더니 애 엄마가 애를 미친 듯이 씻기고 있는 거예요. 나보고는 나가라고 악을 쓰면서..... 무슨 영문인지 몰랐는데..... 애가 성폭행을 당했던 거였어요. 범인이 누군지도 몰라요. 신고해 봐야 소문만 나고 애한테 더 해롭다고 경찰에 알리지도 않았죠. 그런데 이상해진 거예요 애도. 엄마도. 나한테도 주소를 알려 주지 않고 이사를 해 버리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가 봤더니 엄마가 애를 보여주질 않아요. 학교에도 안보내고...... 뿌리치고 들어가보니 다리가 퉁퉁 부은 채로 애가 서 있어요. 동생 말로는 며칠 동안 서 있는대요. 낙서를 보니 더러운 몸뚱아리 뭐 그렇게 써 있고."

남편의 주선으로 만난 아내의 눈에는 광기가 선했다. 애를 학교든 병원이든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애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당신도 찾아오지 마."라고 내뱉던 엄마의 얼굴을 로봇처럼 굳어 있었다. 남편이 아내와 드잡이하는 사이 집 안에 들어섰을 때 몇 년이 가도 잊지 못할 풍경 하나가 펼쳐졌다. 담요를 뒤집어 쓴 고등학생 쯤 된 아이가 덜덜 떨며 서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말대로 얼마 동안 서 있었던 건지 다리가 퉁퉁 부어버린 채.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고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웅얼거림 뿐.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아이의 상처는 병이 되어 폭발했고, 그를 돌보는 엄마마저 제 정신이 아니게 만들었다. 남편에게조차 자식의 피해 사실을 숨기려던 엄마의 도피는 급기야 가족 전부의 감옥을 이루고 말았다. 자식을 누구보다 아꼈을 엄마지만 엄마가 자식을 위해 했던 행동들은 본의 아니게 최악의 연속이었다. 무턱대고 아이의 몸을 씻긴 것부터 피해자의 편이 되어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도피하고 은폐하고자 했던 것까지, 아동 성범죄 피해자들이 지양해야 할 사례들을 그럴 수 없이 정확하게 행했던 것이다. 지금도 당시소녀를 유린했던 가해자는 자신이 한 가족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제 정체 모르는 가족들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그림자 위에서 한 소녀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더러운 몸'을 꾸짖고 있었고, 그 엄마는 자식을 자신의 방식으로 지키려다가 미쳐 갔다.

예쁜 신발을 주겠다는 아저씨의 말에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 끔찍한 손아귀로 걸어들어갔던 열 한 살 아이의 장례식이었던 2월 22일은 이후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로 지정됐다. 그러나 2년 뒤에는 안산에서 두 아이가 동네 아저씨에게 희생되었고, 나영이가 조두순에게 짐승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만행을 당했다. 사건이 터졌을 때는 누구나 전문가가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지만 세월이 흐르면 거짓말처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아동 성범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대책은 현실적으로 없다. 아무리 사악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도 그 권리의 무게는 가장 고귀하고 순수한 누군가와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을 범죄의 가능성 자체로부터 격리하는 것도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오늘. 2월 22일은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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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2.23 이오지마의 성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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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23일 이오지마의 성조기

태평양 전쟁의 상징같은 사진이며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 부근에 동상으로 만들어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역사적인 사진이 있다. 여섯 명의 미군 병사가 이오지마 섬의 최고봉 스리바치 산에 성조기를 세우는 이 감도 최고의 사진이 1945년 2월 23일 촬영됐다.

...
2월 19일 이오지마 상륙을 개시한 나흘 후 미군은 이오지마의 가장 높은 곳 스리바치 산을 장악했다. 상륙 첫날 해안가에서 막심하 피해를 입은 것을 고려하면 스리바치 산 정상은 어렵지 않게 미군의 손에 넘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스리바치 산을 지키던 수비대는 자결하거나 거미줄처럼 구축되어 있던 지하 기지로 철수했던 것. 10시 20분 미군 해병의 정찰대가 스리바치 정상에 이르렀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이오지마 앞바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미 해군 장관이 감격에 겨워 말한다. "저 성조기는 5백년간 해병대의 영광이 될 거요." 모든 함대의 장병들이 갑판에 몰려 환호성을 질렀고 침대에 누운 부상병들도 몸을 일으켜 성조기를 보고자 했다.


스리바치에 성조기를 세운 대대장은 이 성조기가 역사적 의미를 가진 깃발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건 일개 대대의 소유로 끝나지 않을 터, 대대장은 그 깃발을 대대 금고에 넣는 대신 보다 더 크고 폼나는 성조기를 다시 게양하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성조기는 해병대 장병들에 의해 다시 스리바치 정상까지 옮겨졌다. 그렇게 무대 세팅 끝나고 소품 (진주만의 가라앉은 군함에서 꺼내 왔다는)까지 준비해서 깃발을 세우는 모습이 종군 사진 기자 조 로젠탈의 사진으로 남은 것이다. 즉 이 성조기는 처음으로 스리바치에 세워진 그 성조기가 아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극적인 사진이 시쳇말로 대박이 나면서 여러 사람의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우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스리바치 산을 기어올라 처음으로 성조기를 꽂았던 병사들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엉뚱한 사람이 성조기를 게양한 병사로 끌어들여지는가 하면 진짜 성조기를 게양했던 병사는 제외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진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할론 블록이라는 해병으로서 사진 게양 후 2주만에 전사했지만 사진 속의 인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 어머니가 사진 속 아들의 뒷모습만으로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보았고 의회 조사 결과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사진 속 6명의 병사 중 살아남은 3명은 '영웅'이 되어 미국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로젠탈의 사진처럼 만들어진 영웅이었던 그들은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고, 전쟁의 열기가 가신 뒤 그들의 인생은 헹가레를 받다가 땅에 떨어진 선수처럼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 적당한 때 적당한 장소에 있었을 뿐" (조 브래들리)이었고, "우리 소대 중 5명이 살아남았고 중대원 중 27명만이 사상을 면했는데 왜 내가 영웅인가?"(아이라 헤이즈)라고 반문했던 그들은 일생 동안 그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야 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이었던 아이라 헤이즈의 삶은 기구했다. 그는 스리바치 산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었다. 단지 로젠탈이 사진을 찍는 현장 근처에 머물러 있다가 게양을 거들었을 따름이었다. 사진 속 맨 왼쪽 깃대에 닿지 않고 있는 손을 내뻗고 있는 사람이 그다. 인디언 출신으로서 미국의 영웅이 된 그는 인디언이었기에 더 큰 환호를 받았지만 인디언이었기에 그 뜨고 짐의 낙폭이 컸다. 헐리우드 스타들과 어울려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축배를 든 다음 "영웅이라 하더라도 우리 집에서는 유색 인종에게는 술 안 판다."는 거리의 술집 주인과 마주쳤을 때 그에게 닥친 혼란은 어느 정도였을까. 헤이즈가 로젠탈에게 던진 한 마디는 이랬다. "영웅 영웅 그럴 때마다 나는 진절머리가 나요. 죽어간 사람들이 생각나서.....나는 영웅이 아니오. 당신이 그 사진만 찍지 않았더라면......"

그 괴로움과 어지러움을 술로 해결하려 들었던 그는 곧 알콜중독자가 됐다. 고향에 주유소를 차렸지만 그 앞에는 이오지마의 영웅들의 동상이 섰고, 그는 기름 넣으러 온 사람들 뿐 아니라 몇 달러를 주고 영웅과 사진을 찍으려는 호사가들과 만나야 했고, 그들은 어김없이 술 한 잔을 권했다. 영화 배우 딘 마틴이 그를 고용하기도 했고, 선반공으로서 새출발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는 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음주로 인한 사고로 50회 이상 경찰에 체포됐던 그는 이오지마의 전우와 마주쳐 '거짓말쟁이'라는 욕설을 들으며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기도 했다. 폐인이 되어 가던 아이라 헤이즈는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던 1955년 겨울, 들판 배수로에서 얼어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엎드려 죽은 그의 시신 주변에는 토사물과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국 가수 자니 캐쉬가 아이라 헤이즈의 비극적 생애를 노래로 담았다. 그 노래는 직설적이지만 역사 속에서 미아가 되어 버린 헤이즈의 최후 10년을 가장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아이라는 지원입대를 했지/ 하지만 백인의 탐욕을 잊어버렸어.../ 아이라 헤이즈는 영웅으로 돌아왔고 전국적인 환영을 받았지/ 와인을 마시고 연설을 했고 명예훈장을 받았어/ 모든 사람들이 그와 악수했지/ 하지만 그는 단지 피마 인디언이었어/ 음식도 친구도 기회도 없었지/ 아무도 아이라가 무엇을 했는지 인디언들이 언제 춤을 추는지 신경 쓰지 않았어"

그 이름이 높건 낮건, 역사 속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고, 다이나믹 코리아에서는 특히나 많은 영웅들이 명멸한다. 진실로 기리고 본받아 마땅한 영웅들도 있겠으나 행여 헤이즈같이 그 무게에 짓눌리다가 영웅이라 떠받들던 손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지고 비참하게 사라져가는 사람들은 없는지 한 번 돌아보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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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2.24 민족 대표 백용성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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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2월 24일 민족의 대표 백용성 열반

3.1절의 민족대표는 33인이었다. 알다시피 그들은 지역이나 사회 각계를 대표한 것이 아니라 종교계의 대표들이었다. 서양 신부들이 전권을 쥐고 있던 카톨릭은 여기에서 빠졌고(그래서 기독교인들이 3.1 운동이 벌어진 뒤 성당에 뛰어들어 너희들은 조선 사람 아니냐며 따지는 일도 벌어졌다.) 유림의 대표도 없었다. 33인을 구성한 것은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그리고 불교 2명이었다. 불교 대표의 2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 넣은 사람은 만해 한용운, 그리고 백용성이었다.

백용성은 1864년생이고 열 여섯에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이미 열 네 살에 출가했다가 난리가 난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하산한 적이 있으니 불가와의 인연이 어지간히 깊었던 것 같다. 그는 각지의 명산대찰을 돌면서 수행하면서 세 번씩이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마흔 넷 되던 해에는 조선 천지가 좁았던지 중국과 만주를 순례하면서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그때 조선 불교를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던 중국 승려에게 했다는 말은 꽤 통쾌하다. “하늘의 해와 달이 중국의 해와 달만이 아닌 것처럼, 부처님의 법도 천하의 공동인 것인데 왜 그걸 그대 나라 것이라고만 하는가?”

한일병탄이 이뤄지던 즈음, 그는 하동의 칠불암에서 수행 중이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하동 장에 나갔다가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온다. “나라가 망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방 수좌들은 땅을 치고 울었고 어떤 이는 쇠스랑으로 방을 파헤치기까지 했다고 한다. 나라가 망했는데 수행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이후 백용성은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닌 중생과 함깨 깨닫기 위하여” 서울로 하산한다.

그런데 불교계 주류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령이 일본 승려의 노력으로 1895년 해제된 이래 불교계의 분위기는 다분히 친일적이었고, 사찰령 반포 등으로 일제가 불교계를 회유하면서 그 주류가 일본의 통치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백용성이 처음 출가했던 해인사의 주지 이회광은 아예 조선 사원을 일본의 조동종과 합치려는 시도까지 했던 것이다.

백용성이 서울에 나타난 것은 이 시기였다. 그는 대각사를 세우고 선학원을 열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다. 첩첩산중의 절간에서나 행하던 선(禪)이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한 것은 백용성의 공이 크다고 한다. 3년만에 3천명의 신도가 모여들었다니 기독교로 치면 대단한 부흥사였던 셈이다. 한용운도 백용성이 초빙한 강사 중의 하나였는데 3.1운동을 앞두고 한용운이 민족대표로서의 참여를 권유하자 도장을 갖다 맡기며 흔쾌히 응했다. 백용성은 1년 6개월 징역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는데 그는 거기서 하나의 충격을 경험한다. 기독교 목사들이 죄다 한글로 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죄다 한문으로만 되어 있던 불경을 한글로 옮길 것을 결심한다.

“내가 만일 먼저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의 나침반을 지으리라. 이렇게 결정하고 세월을 지내다가 출옥하여 모모인과 협의하였으나 한 사람도 찬동하는 사람이 없고 도리어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반대의 이유는 간단했지만 뿌리 깊은 것이었다. 옛날 카톨릭이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이유였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막은 이유였다. “우리만 알면 됐지 왜 번역을 해서 사람들이 그걸 알아야 되는데?” 하지만 백용성은 그 뜻을 꺾지 않았다. ‘삼장역회’를 조직하는 한편, 스스로 경을 번역하고 그 성과물을 보급해 나갔다,. “모든 중생이 정법을 깨달아 가치 성불하기를 원하고 이 경을 번역합니다.” 1921년에는 금강경이 한글로 나왔고 28년에는 화엄경이 우리 글로 중생들에게 선보였다. ‘세종대왕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어 대처승들이 판을 치는 분위기에 분노했지만 동시에 권력에 아부하고 백성들의 등을 쳐 왔던 절집들의 부패에도 결기를 세웠다. “불교는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라 아편 독과 다름없다 하니 나는 조석으로 생각함에 수치스런 마음을 이길 수 없다.” 일제 시대는 조선 불교의 위기라고 할 만한 시기였다.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억압받으면서 몸에 밴 노예 근성은 수행자로서의 자질을 떨어뜨렸고 바로 뒤를 이어 들어선 일제는 효율적으로 불교를 통제하면서 조선 불교의 타락을 부채질했다. 백용성은 참선과 계율을 강조하면서 그 주류의 흐름에 맞섰고, 심지어 부처의 가르침도 현실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절간에 들어앉아 사하촌 토색질이나 일삼던 무위도식의 승려들에게 죽비를 떨어뜨렸다.

“부처님께서는 승려가 농사나 장사하는 것을 금하셨으나 오늘날에는 도저히 빌어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 우리는 괭이를 들고 호미를 가지고 힘써 일하고 농사를 지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자.....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갈 수 있음으로써 종교에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우리를 방어하자.” 그에게 불교의 개혁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일이었고, 그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본인 스스로 금광도 운영하기도 했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자에게 머리 숙여 기생하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 있었던 조선 불교의 주류에서 그가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 제자 중에도 밀정들이 들끓었고, 어떤 제자는 스승이 출판하라고 맡긴 원고를 돈 든다며 불살라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1940년 초, 백용성은 “사자 뱃속에 벌레가 생겼으니 사자가 쓰러질 것 같다.,”면서 자신의 열반을 예고했고 2월 24일 제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입적했다. 자신을 사자에 비유했거니와, 그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 더 암담해져만 가던 불교계의 행보를 홀로 저지하고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하던 지극히 외로운 사자였다. 그 사자가 오늘에 다시 환생한다면 그는 또 뭐라고 부르짖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소원대로 대처승들을 몰아내고 비구승들이 한국 불교의 주류를 장악했지만 그 지도층의 행태란 백용성이 맞섰던 세력들과 그닥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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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2.25 기수를 남으로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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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25일 기수를 남으로 돌려라

“여기는 민방위본부입니다. 지금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공습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 58분이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떨려 나오고 있었다. 오늘이 15일 (민방위훈련일)인가 달력을 들추던 사람들은 다음 방송 멘트에 그만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 공습,폭격, 인천, 실제 등등의 단어들이 눈과 귀를 동시에 찔러 왔다. 아이들은 놀라서 울지도 못했고 교사들은 수업 도중에 교무실로 달음박질쳤다. 무작정 짐보따리를 싸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집은 부산이었는데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도망가려는 것이었을까) 전쟁 이후 30년을 '북괴의 위협'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공습경보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이었다.

군인들은 더했다. 소대장들은 비상!을 부르짖으며 휘하 병력들을 끌어모았고 탱크병들은 위장막을 걷었다. 핏발선 눈들 사이에는 두 단어가 번갈아 어른 거리고 있었다. "전쟁"과 "엄마". 이 시기 군에 있었던 사람들은 1968년 군복무를 했던 이들이 김신조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하듯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그 초긴장의 5분을 빚어낸 사람 조선 인민군 공군 대위 이웅평이었다.

다행히 공습경보는 5분만에 해제됐다. 이웅평이 몰고 온 미그 19기가 안전하게 수원비행장에 내린 것이다.

당시는 팀스프리트 훈련 중이었다. 이를 북침 훈련으로 규정한 북한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고 팀스프리트에 대응하는 군사행동을 전개했다. 평남 개천에서 훈련차 떠오른 미그기 편대 가운데 한 대가 별안간 기수를 남으로 돌린 것은 10시 30분이 좀 넘어서였다. 이웅평은 고도 100미터로 초저공비행을 하면서 동료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연평도에서 한국 공군기를 만난다.

" 가끔 비행기 수신기로 남한 방송을 듣고 자유로운 한국생활을 동경하면서, 북한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구나하는 생각에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그는 전두환 정권에게는 일종의 횡재였다. 미지의 전투기였던 중국제 미그 19기가 쌩쌩하게 품안에 날아든 것도 좋아 죽겠는데 "자유를 찾아 귀순한 괴뢰군 조종사"라니. 군사독재정권으로서는 평생 동안이라도 이웅평을 업고 다니고 싶었을 것이다. 4월 14일 여의도에서 벌어진 행사는 그 하이라이트였다.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무려 130만명의 서울 시민들이 모여 '이웅평 환영대회'를 연 것이다. 말이 130만이지 당시 서울 인구 일곱 명 중 한 명은 그곳에 있었다는 말이다. 거기서 이웅평은 주민등록증과 정착금을 전달받고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흔든다.

그는 한국 공군으로 소속을 바꾸고 군 생활을 계속한다. 또 단란한 가정도 꾸민다. 하지만 그는 조종 주특기는 받지 못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미루어 짐작은 간다. '한 번 배신한 사람'에게 어떻게 이쪽의 비행기 조종간을 맡길 만큼 당시의 세상은 너그럽지 못했다. (이후 남쪽으로 온 다른 인민군 조종사는 조종 주특기를 받는다)

그는 7남매의 장남이었다. 그가 밝힌 이유로 넘어왔든 다른 이유가 있었든 그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겪어야 했을 형극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왜 남한에서 월북자 가족들이 겪은 고통 때문에. 하물며 팬텀기 하나 몰고 넘어간 조종사의 가족? 상상하기도 싫다. 그는 그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데 그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는 북한에 대한 편견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발한다느니, 5호담당제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답답했죠. 5호담당제는 교사나 지식인이 낙후한 농촌문화를 도시화시키기 위해 5명을 책임지고 도와주는 것일 뿐이에요. 천번을 삽질하고 한번 하늘 쳐다본다는 얘기도 개별적인 지휘관이야 그런 행동을 시킬 수 있지만 전부가 그런 것처럼 얘기를 해선 안되죠.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고, 침묵하자니 간이 성할 리 있었겠어요?”

이웅평은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간경화증에 시달렸다. 그를 가르친 교수의 딸이자 온갖 편견을 무릅쓰고 그와 결혼한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병세는 악화됐고 그럴수록 그의 스트레스는 험악하게 나타났다. 떠나온 조국의 복수는 그의 평생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독극물을 탐지할 수 있는 은제품을 쓰게 하고, 가게는 한곳에 단골로 못 다니게 했어요. 이웃에서 주는 떡이나 배달해오는 우유도 먹어서는 안 되고요.....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어요. 약을 숨기거나 버리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의심했죠. 그 속상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어요.”(여성동아 2000년 7월호 아내의 인터뷰 중)

거의 생명을 포기해 가던 그는 장기기증자의 간을 이식하는 데에 동의하면서 재생의 희망을 찾지만 그것도 잠시 이식한 간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2002년 20년을 채우지 못한 남녘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가 왜 기수를 남으로 돌려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 역시 분단이라는 거대한 장벽 아래 짓눌려야 했던 불행한 영혼이었다. 그의 출현만으로 수천만이 얼어붙었던 분단의 시대의 풍운아였다. 가족들을 버리고 휴전선을 넘어야 했고 떠나온 조국에 대한 편견에 괴로와하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조국에서도 편안하지 못했던 분단된 나라의 젊은이였고 중년이었다.


그가 이남 땅에 출현한지 30년을 헤아리는 오늘, 아직도 "5호 담당제"가 이웃을 감시하기 위한 장치이며 부모가 자식을 고발하고 자식이 부모를 짓밟는 사회가 이북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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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2.26 잘못낀 첫단추 병자수호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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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76년 2월 26일 잘못된 첫단추 병자수호조약

1876년 2월 강화부 연무당 앞. 수염 허연 조선 관리 하나가 착잡한 낯빛으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양복을 입은 동양인들 몇 명이 득의양양하게 제 갈길로 갔다.

... 조선 관리의 이름은 신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무신이었으나 학문에도 밝고 개화론의 영수였던 박규수의 문하에 있기도 했던 신헌은 막 조선의 앞길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조약을 조정의 대표로서 체결한 참이었다.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고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하는 조약이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 대표 구로다 사이에서 1876년 2월 26일 체결됐다.

신헌은 접견대신으로 임명되어 강화도에 온 뒤의 일을 하나 하나 떠올렸다. 갑자기 대포를 쏘아대어 놀라 항의하니 "예포라는 것도 모르시오? 당신네를 환영하기 위한 거요."라고 찍찍 내갈기듯 말하던 일본인들. 한눈에 봐도 군기가 들어보이는 병정들.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거느리던 낡은 배들로는 도저히 어째 볼 자신이 안서는 서양식 군함. 수교냐 전쟁이냐는 식으로 윽박지르던 구로다. 그에 견주어 파리한 눈만 팬들거리는 남루한 군복의 조선군들과 이래도 예 저래도 예 그래서 예예정승이라 불린 영의정 이최응 이하 조정. 관심이라고는 자신들의 권력 확보 밖에 없는 민씨 척족들. 청나라 사신까지 개항을 권유한 이후 어차피 누가 체결해도 체결할 일이었지만 신헌은 가슴이 답답했다. 이후 그는 임금에게 고한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지(聖志)를 분발하셔서 신속하게 우환을 막을 수 있는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군국(軍國:統軍治國)에 큰 다행일 것입니다."

병자수호조약의 마지막 고비는 병자수호조약의 불평등한 조항을 둘러싼 시비가 아니었다. 조선국왕의 이름을 적느냐 적지 않느냐를 둘러싼 실랑이였다. 신헌은 임금의 이름이란 부르지도 못하는 것인데 어찌 문서에 적고 그 위에 도장까지 찍겠느냐고 항변했고 구로다는 '절교장'까지 건네면서 압박했다. 결국 은둔의 왕국은 일본에 굴복한다.

강화도 조약의 몇몇 부분을 다시 읽어 본다. 내용은 무척 부드럽고 친절하기까지 하다.

제 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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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한 것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트집을 잡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 않으면 일본 대표 자신 강화도에 올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한 조항.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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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패러다임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역 시스템을 도입한다는 소리. 이 와중에서 기존의 조선의 법과 제도가 무력화하는 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 "각기 편리대로 한다"는 말이 얼마나 편리한 말인지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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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점은 일본에 찍히고, 일본 상인들을 위한 조항임을 전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양국의 배'를 곁들여 니들도 보호받을 수 있다고 은근슬쩍 말 돌리는 센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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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주권침해이고 양국의 배와 사람들의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영토와 영해를 헤집겠다는 소리인데 또 딴에는 그럴 듯하다. 통상의 안전을 위하여.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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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자유무역이라는 것이란다라고 훈계하는 일본 구로다의 말이 들리는 듯. 이 조항 하에서 조선 정부의 '어떠한 간섭'도 조약 위반이 되는 상황이 되는 건 좀 그렇다고 치고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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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고는 이게 왜 문제냐고, 우리도 똑같은 권리가 생긴 거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경제와 수혜자들의 규모 등을 따지지 않는다면 평등한 조약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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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아주 평등해 보인다.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하겠다고 하지 않은가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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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긴데. 아 "래칫 조항"이라고. 한 번 돌아간 톱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는 그 조항과 비슷한 조항이 140년 전에도 등장하고 있다.


흔히 병자수호조약을 '잘못된 첫 단추'에 비교한다. 세상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단추 잘못 꿰어 비틀어진 옷매무시가 아니다. 말로는 "어 단추 잘못 꿰었군." 이라고 말하면서 꾸역꾸역 나머지 단추를 엉뚱한 구멍에 끼워넣고 있다면 그것만큼 배꼽을 잡을 일도 없을 것이다. 설마 우리가 그토록 우스워 보이지는 아니하리라. 아니하리라. 병자수호조약은 그때의 일일 뿐이리라. 우리는 신헌처럼 "성지(聖志)를 분발하셔서 신속하게 우환을 막을 수 있는 처분을 내려주시옵기를" 상주해야 할 일 따위는 전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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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2.27 여걸 남자현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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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3년 2월 27일 여걸 남자현 체포


1933년 2월 27일 오후, 당시에는 일제의 괴뢰 만주국의 도시였던 하르빈의 도외정양가 거리.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일본 경찰들이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그들은 한 중국인 거지 행색의 노파를 쫓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행인들 사이를 헤치고 달아나던 노파를 향해서 일본 경찰이 몸을 날렸다. 남루한 옷의 노파가 쓰러졌다. 깊이 눌러쓴 모자를 벗기자 유난히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을 발하는 조선 할머니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름은 남자현. 그녀는 중국 옷 속에 조선 옷을 입고 있었다. 그건 여자 옷이 아니었다. 묻어 있는 피도 남자현의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40년 전 의병으로 나섰다가 전사한 남편의 유품이었다.


1872년생이니까 당시 우리 나이로 예순 둘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요즘에야 환갑 잔치도 생략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 남자현 자신이 결혼한 나이대로만 자식들 결혼시켰으면 증손자를 볼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녀는 열아홉 살에 시집을 갔다. 알콩달콩 잘 살던 남편이 뜻밖에 세상을 떠난 건 1896년이었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우예 집에 앉아 있을 수 있겠노. 지하에서 다시 보자. ” 이 말을 남기고 의병으로 나간 남편이 덜커덕 전사한 것이다. 당시 남자현은 임신 중이었다.


나이 스물 넷에 청상과부가 되어 버린 남자현은 유복자를 낳아 기르면서 시부모를 홀로 모셨다. 고향이 경상북도 영양에다가 아버지는 정3품을 지낸 양반, 남편의 가문도 일대에서 문명(文名) 드높은 의성 김씨 집안이었으니 여필종부 삼종지도의 한자성어는 몸에 밴 정도가 아니라 뼈에 새겼을 터. 양잠도 하고 길쌈도 하며 혼자서 삶을 버텨낸 남자현은 마을에서 주는 효부상까지도 받은 모범적인(?) 지어미에 며느리에 어머니였다. 그렇게 나이 마흔 일곱 쯤 되었으면, 이제 외아들 장가 들이고 손주 재롱 볼 욕심을 낼 즈음이었을 것이다. 수명 짧았던 그때가 아닌 요즘에라도 나이 마흔 중반 넘으면 인생 다 산 것 같이 행세하는 이들이 지천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나이에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919년 3.1 운동이 계기였다. 조선 천지를 뒤흔든 만세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장성한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그녀는 독립군 단체 가운데 하나였던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독립군 수발에 나선다. 그녀의 활약이 두드러진 사건 중의 하나가 1926년의 길림 대검거 사건이다. 도산 안창호가 길림 지역 조선인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북경을 거쳐 길림으로 와서 동문 밖 대동공장에서 강연을 가지고자 했는데 5백명의 동포가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사실을 안 장작림은 공장을 포위하고 참가자 거의 전부를 체포해 버렸다. 안창호, 오동진,김동삼 등 독립운동의 동량같은 이들이 무더기로 체포됐고 장작림이 이들을 일본에 넘겨 버린다면 기둥뿌리가 흔들릴 판이었다. 이때 남자현은 대책위원회를 꾸려 동분서주했고 안창호 등이 풀려나는데 공을 세운다.


 또 독립운동단체들이 기호파다 서북파다 파벌을 짓고 다투다가 심지어 피를 보는 지경까지 이르자 남자현은 금식기도 후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써서 파벌 관계자들을 불렀고 눈물로 호소하는 남자현의 열정에 감동한 (또는 압도되어 버린) 남자들은 서둘러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이렇게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로 활약하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남자현은 또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온 남편의 원수를 직접 갚고자 했고 1926년 4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여덟 발을 가지고 국내로 잠입한다. 목표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중년의 아주머니를 의심할 경찰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사이토를 죽이려 한 사람이 있었다. 송학선. 동네 뒷산에서 소나무를 상대로 칼 찌르기 훈련을 거듭한 그는 돌아간 순종을 조문하러 오는 사이토를 노려 차에 뛰어들었지만 그의 칼에 피를 쏟은 것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들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경비가 부쩍 강화되어 남자현은 사이토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다시 독립군의 어머니로 살아가던 그녀는 1932년 만주국 조사를 위해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만주국 수도 신경(장춘)을 방문했을 때 손가락을 끊어 혈서를 써서 리튼 조사단에게 전하고자 했지만 배달 사고로 실패한다. 그때 반일 의도를 가지고 리튼 조사단에게 접근하려다가 일본 관헌에 걸려 죽음을 당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던만큼 그것은 손가락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드디어 다음 해, 남자현은 또 한 번의 거사를 준비한다. 바로 일본의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를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예순 할머니가 폭탄을 던질 힘이 없었으니 무토와 함께 자폭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데, 그 무기를 전달받으러 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 후 남자현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일본 경찰의 모진 심문을 받았고 “적이 주는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는 각오로 단식을 시작한다. 단식이 열흘을 넘어서고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자 일제는 병보석으로 남자현을 풀어 준다. 이미 남자현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남자현은 자신이 가진 돈 249원을 내놓으면서 49원을 가족들에게, 그리고 나머지 2백원에 대해서는 이렇게 유언한다. “만일 네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이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남자현은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두 개가 썩둑 잘려나간 그 손을 내밀면서 그녀는 생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이것이나 찾아야지” 리튼 조사단에게 한국의 독립을 원한다는 혈서와 함께 보내고자 했던 그녀의 손가락은 배달 사고 와중에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버려졌다. 남자현은 죽음의 목전에 다다라 그것을 찾고 싶다고 했다. 신혼의 꿈을 간직한 채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비록 곱지는 않더라도 온전한 손을 내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1933년 2월 27일 남편의 피묻은 옷을 몸에 걸치고 그 위로 중국인 복색을 하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폭탄을 받으러 가던 한 할머니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그 해를 넘기기 전에 한많은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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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2.28 2.28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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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7년 2월 28일 2.28의 비극

지금은 대만이라 부르는 나라의 왕년의 호칭은 에누리없는 '자유중국'이었다. 중국 대륙을 차지한 '중공'에 밀려 대만섬에 밀려나 있긴 하지만 이제나 저제나 대륙 수복을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자유중국'은 우리의 첫째 가는 우방이었다. 동네 중국집에 걸려 있던 청천백일기는 성조기만큼이나 친숙했고, 깃발 옆에 모셔져 있던 한 깡마른 대머리의 얼굴도 선명하다. 그가 ...장개석 (장제스라고 표기해야 하는데 그냥 장개석이 입에 붙는다.) 총통이었다. 지금 돌이키면 좀 궁금해지기도 한다. 정말 우리 동네 화교 아저씨는 장개석을 존경해서 그 사진을 모셔 놓고 있었던 것일까.

추측컨대 그 답은 반반이다. '중공군'과 싸워 수없는 피를 흘린 나라에서 자신이 '중공'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유중국'의 신봉자임을 밝혀야 했던 알리바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하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반공 독재 국가의 국적을 가지고 또 하나의 쌍둥이 반공 독재 국가에서 터잡고 살아가던 그들의 처지로 '장개석 총통'을 존경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같은 측은함이 둘이다. 그리고 그 측은함은 결국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자유중국'과 '자유대한'은 그럴 수 없는 쌍둥이였다. 아울러 '조선인민공화국' 역시 비껴가지 않는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건, 듣는 사람이건 대화 중 ‘蔣介石, 中正, 先總統’류의 단어가 나오면 순간적으로 차렷 자세를 취하여 蔣公에게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리고 작문을 할 일이 있다면 글의 마지막은 ‘이 모든 것은 선총통 장공의 영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라고 맺어 주는 게 좋고, ‘先總統 蔣公’이라는 문장을 사용할 때엔 반드시 선총통 다음에 한 칸을 띄고 장공이라고 적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경죄에 걸릴 수 있다.” (어느 대만인 친구의 이야기 - <세계의 역사기념시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 중)

낄낄거림이 즉시 튀어나오는 이야기지만 이것은 거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국가원수모독죄가 엄존했고, 운동 선수들이 타이틀을 따거나 수상을 하면 어김없이 "대통령 각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멘트해야 할 때가 있었고, "봄바람과 함께 떠나시더니 가뭄을 해갈하는 봄비로 돌아오십니다."라며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찬미하던 TV 뉴스가 있었으며 어느 도지사는 대통령에게 라이타 불 붙이다가 그만 불길이 지나치게 높았던 바람에 경호실장에게 죽을만큼 두들겨 맞은 일도 있었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선총통 장공의 영도에 의해 이뤄졌다."는 얘기는 휴전선 북쪽의 나라에서는 아직도 상식인 형편이니 이 어찌 형제애가 끓어오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 '자유중국'이 대만에 똬리를 틀기 직전, 그러니까 아직 대륙에서 공산군과 국부군이 자웅을 겨루던 무렵의 1947년 2월 28일, 대만에서는 이후의 '자유중국'을 규정짓는 한 비극이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대만은 반 세기 동안의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중국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만 '본성인' (즉 대륙 본토 출신 아닌 대만 토박이들)에게 그 해방은 주인의 교체에 불과했다. 모든 산업 시설과 행정 조직이 대륙 출신들에 의해 장악됐다. 풍년이 들어도 곡식은 모조리 대륙 출신들의 창고 아니면 본토로 흘러들어가 대만인들은 쫄쫄 굶어야 했다. 특히 대만 지사 진의의 활약(?)은 대단했다. 진의는 담배, 종이, 가스, 석유, 설탕 등에 전매제를 실시했고 그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그러던 중 1947년 2월 27일 사단이 터진다. 담배를 밀매하던 한 대만인 노파 린지앙메이가 전매청 직원들에게 적발된 것이다. 노파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지만 전매청 직원들은 용서가 없었다. 급기야 계속 울며 매달리는 노파를 권총으로 찍어 버렸다. 이 행동은 지켜보던 대만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저런 나쁜 놈들! 너희들은 부모도 없느냐?" 전매청 직원들은 성난 인파를 피해 도망가다가 권총을 쏜다.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음 날 운명의 2월 28일 대만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살인자를 처벌하라. 그들은 전매총국 타이뻬이 분국을 장악하고 시위를 벌인다. 정부의 대답은 헌병대의 기관총 난사였다. 수십 명이 거리에서 피 흘리며 쓰러졌고 대만인들의 분노는 대만 섬 전체를 뒤덮는다. 경찰서가 점령됐고 행정관서가 시민들 손에 들어갔다. 3월 2일 사건을 주도한 임헌당 등 대만 지식인들은 ‘2ㆍ28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금지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촉구했다. 타이뻬이 참의회도 계엄의 해제와 군경의 발포금지, 정부와 공동처리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행정 책임자 진의는 타협의 제스처를 취하는 동시에 장개석에게 군대 파견을 요청한다.

장개석의 21사단은 마치 1948년의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처럼, 1980년 광주의 공수부대와 20사단처럼 대만 기륭항에 상륙했다. 그리고는 중공군들에게는 판판이 깨져나가던 분풀이라도 하듯 대만 사람들을 사냥한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가운데 거리에 나타난 모든 시민들이 과녁이 됐고 집 안에까지 군인들이 난입하여 사람들을 끌어내어 총살했다. 골목에는 시체들이 담 높이로 쌓였다. 이때 죽은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지금도 모른다. 20만 명에 가깝다는 설도 있지만 2만 명은 족히 희생되었다는 것이 통설. 그로부터 2년 뒤 장개석은 대륙에서 쫓겨 나와 2.28 사건의 시체더미들이 흙 속에서 썩어가던 대만 땅 위에 자신의 정부를 세운다. '자유중국'의 시작이었다. 역시 자유라는 단어의 팔자는 기구하다. 별의 별 시러베들이 다 그 이름을 참칭하며 그 이름 뒤에서 수많은 무고한 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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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주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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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트윗판 오늘의 역사를 적어 오다가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판으로 확장하여 올린 게 꼭 1년 전이었습니다.  작년에 짤막하게 끄적인 대만 2,28 사건을 다시 정리해 봤습니다. 꼭 1년을 채웠네요. ^^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기준치를 달성한 듯하여 나름 흐뭇합니다. 이제는 매일 날적이는 지양하도록 하고, 띄엄띄엄 오늘의 역사를 올려 볼까 합니다.  댓글을 비추어 볼 때 보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지만, 혹여 지켜보시는 분들이 있으면 그리 양해해 주시길 ^^ 


어쨌든 오늘 저녁은 누군가 등심을 사기로 했으니 저 혼자 맘껏 먹으며 조용히 자축하도록 하겠습니다. ^^

1976.2.29 포니 신화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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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6년 2월 29일 포니 신화의 개막

퀴즈 하나 내 보자. 1951년 전쟁통에 정부는 피난민 수송을 위해 60여 대의 버스와 트럭을 이용한 운수 영업을 허가했다. 이 요금이 얼마였을까?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 꼬불꼬불 국도를 타고 험한 고개를 넘나들어 서울 부산을 잇던 그 고생길의 요금은 3만 4천환. 쌀 한 가마니에 8만환 할 무렵이었으니 요즘의 비행기값 정도로 비쌌던 셈이다. 미군이 버리고 간... 트럭을 개조하고 두드려 맞춰 만든 버스가 귀한 대접을 받으며 거리를 누볐고, 미군의 지프 엔진 갖다 붙이고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시발’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던 나라였다. 그만큼 차가 귀했던 것이다. 더구나 국산차라면.

이후의 자동차 공업 역사를 읊어 대는 것은 좀 지루한 일이고, 1967년 상공부가 발표한 ‘자동차 사업 허가 기준’을 통해 한국 자동차 공업의 당시 현주소를 짐작해 보자., “자동차 조립 및 제조에 대해서는 선진외국과 기술 제휴를 한 업체로서 제휴처가 제품의 성능을 보장한다는 조건을 구비한 업체에 한하여 허가한다.” 즉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열악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 지침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외국 기업을 잘 물어 온다면 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이 지침에 환호한 것이 자동차 산업에 꿈이 있던 현대건설 회장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은 워싱턴에 있던 동생 현대건설 상무 정세영에게 긴급전문을 때린다. “포드로 가서 당신네와 제휴하겠다는 뜻을 전달해라.”

GM과 포드는 일본 시장과 중국 시장의 교두보로서 한국 진출을 꾀하고 있었고 현대는 전통적으로 제휴보다는 해당 기업을 매수하거나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쪽을 택하던 GM보다는 포드를 선호했고 포드도 이에 응해서 마침내 제휴가 성립한다. 그리고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설립한다. 그런데 포드와의 제휴로 인한 성적표는 영 좋지 않았다. 야심차게 생산한 코티나의 경우 성능이 영 시원치 않아 택시 기사들이 차 반납 운동을 벌일 정도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69년 12월 정부가 ‘자동차 국산화 3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38%에 불과한 자동차 국산화율을 3년 동안에 무슨 수를 쓰든 100%로 올려놓으라는 의미였다. 안되면 되게 하는 것이 정의인 군대식 사고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당시 국내 최대의 자동차사인 신진자동차, 아세아자동차, 현대자동차는 필사적인 경쟁 체제에 돌입한다.

현대는 제휴사 포드와 심각한 마찰을 일으켰다. 포드 쪽에서 현대의 엔진 생산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파열음 끝에 현대와 포드의 기술 제휴 관계는 깨졌다. 다음 상대는 일본의 미쓰비시였다. 일본 자동차 업계 후발 주자였던 미쓰비시는 한국과의 기술 제휴를 마다하지 않았고 엔진 및 트랜스 미션에 대한 기술 제휴 협약을 체결한다. 또 국내 독자 모델 개발을 위해 이탈리아의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 기술진을 연수시킨다. 중요한 기술은 철저히 숨기고 도면 복사조차 허락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그려서 베끼는 형극을 겪으면서도 한국 고유의 자동차 모델의 꿈은 꺾이지 않았고, 그 결과 1974년 토리노 자동차 박람회에서 한 자동차가 출품된다. ‘포니’였다.



정주영은 “무슨 차가 꽁지가 빠진 닭 같냐?” 라고 탐탁지 않아 했던 날렵하다기보다는 투박해 보이는 이 차의 이름은 ‘아리랑’이나 기타 다른 한글 이름을 가질 뻔도 했지만 해외시장을 고려하여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가 됐다. 73년 1월 시험삼아 만든 첫 포니가 탄생을 했고 이후 성능 테스트 결과 100 Km 에 이르는 시간은 27초였고 연비도 브리사 등 경쟁 차종에 앞섰다. 드디어 1976년 2월 29일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포니가 처음으로 출고되어 세상에 나선다. (생산은 조금 먼저 이뤄지긴 했지만) 정세영 사장은 연단에 오르긴 했지만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한다. 그도 그랬겠지만 일본으로 이탈리아로 그 누구도 반기지 않는 불청객 노릇을 하며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혔던 노동자들도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포니가 자신의 아들처럼 반가왔으리라.

그렇게 감격의 조랑말이 탄생한 얼마 후 정주영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한다. 그건 미국 대사 스나이더였다. 조선호텔에서 마주한 미국 대사는 정주영에게 국내 고유 모델 생산의 중지를 종용하면서 미국 자동차의 조립 생산을 권유한다. 그럴 경우 지원을 아끼지 않겠지만 만약 거절할 경우 국내외에서 현대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협박까지 곁들인 권유였다. 이때 정주영은 이를 거절한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정훈에 따르면 (2001.9.23 프레시안 기사) 정주영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 예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가 건설에서 번 돈을 모두 쏟아 붓고 실패한다 하더라도 저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만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나는 보람을 삼을 것입니다.”

정주영 혼자서 포니를 만든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청춘을 바치고 피땀 흘려 자동차에 열정을 바친 노동자들의 공도 정주영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국산 고유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는 뚝심을 발휘하고, 미국 대사와의 독대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던 정주영 형제의 노력을 그저 돈벌이를 위한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 활동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아니 돈벌이를 위한 작업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매우 가치있는 일이었다.

1976년 2월 29일 대중 앞에 나온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 많은 이들의 첫 마이카였고, 애환과 꿈과 기쁨과 슬픔을 오랫 동안 함께 했던 자동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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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윤민석씨를 도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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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 구경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저만의 경험은 아니겠지만, 종로통 청계천변, 그리고 광화문 앞에서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거기서 만난 동아리 학번이 81부터 06까지였으니 스물 몇 해의 세월을 사이에 둔 사람들이 드글거리고 있었던 셈이죠.  문자도 연신 날아들었습니다. “너 여기 와 있지? 어딨냐? 조심해라” 는 고마운 친구의 문자부터 “야 어딨냐. 대충 하고 술 먹자.”는 예나 지금이나 일생에 도움 안되는 녀석의 유혹까지. 

 하나 불만인 게 있었습니다.  집회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어쩌면 그렇게 구닥다리들 밖에 없습니까 그래.  그나마 광우병 시위를 처음 시작했던 중딩 고딩들은 발랄하고 명랑하고 댄스곡도 서슴지 않아 좋았건만 마흔 넘은 사람들이 자기들 젊을 때 부르던 노래를 각잡고 부르는데 그거 참 열적습디다.  아니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부르는 건 좋은데 안녕 안녕 군부독재여 안녕을 왜 부르냐고.  군부독재 사라진 게 언젠데 말이야;. 왕년의 운동권 노래들이 난무하니까 신들이 나서는 오만가지 감정 잡아 부르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분위기는 영 뒤섞이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쿵쾅거리는 앰프 소리와 함께 한 노래가 들려 왔습니다.  아주 경쾌하지만 너무나 쉬운 멜로디, 그리고 그 가사는 굳이 외울 필요가 없었던 한 노래였지요.  ‘대한민국 헌법 1조’였습니다.  도무지 노래 가사로 승화될 것 같지는 않은 딱딱하고 엄숙한 법 조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노래를 듣고 바로 따라 부르면서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야 바로 이거다. 함께 길 가면서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는 노래도 좋고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도 감동이지만, 그 순간 이 노래만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심경과 각오를 대변해 주며, 또한 별다른 정서적 준비 없이도 발을 구르며 1분 내에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어디 있었겠어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한 음 올려서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그리고는 마치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발표하는 자세로 터뜨리는 거지요. ‘대한민국의 모든 권! 력! 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똘복이가 반나절만에 한글을 깨치듯, 수만 명의 사람들이 단 5분만에 노래를 마스터하고 돌림노래까지 부를 수 있게 만든 건 누구였을까.  ”이거 누가 만든 거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에 저는 불경한 감탄사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윤민석이야 윤민석.“ ”아 젠장.“ 


  왜 그런 감탄사가 나왔느냐.  음 그건 신에게 보내는 항의였습니다.  같이 눈 코 입 박아 놓고 기타칠 손가락과 소리 들을 귀까지 심어 놨으면 좀 재주도 평등하게 주실 것이지, 어떻게 윤민석 같은 사람에게만 축복을 샤워기로 뿌려 주실 수 있냐 하는 불만이었지요.  윤민석의 이름을 모르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80년대 말 이후 대학 생활을 한 사람 치고 그가 지은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겁니다.  <전대협 진군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애국의 길> <서울에서 평양까지> <하늘>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지금은 세상에 없는 제 친구는 그의 노래 중에 <사랑하는 동지에게>를 좋아했었습니다. 형편 어려운 법대 장학생이었던 녀석은 1학년 때 동아리 활동을 하느라 장학금을 놓쳤고 아버님이 직접 입영원을 내 버려 군대에 가야 했습니다. 지방 집에 갔다가 서울에 올라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녀석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었지요.  

 그리고 며칠 후 5공비리 규탄 국민 대회가 열렸고 거리에선 입학 후 가장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대학로에서 종로까지 행진하고 롯데 앞에서 대가리 터지게 싸우고 하여간 구속 전두환 퇴진 노태우 소리에 목이 쉬어버린 다음에야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단골 술집으로 가기 전에 잠깐 들른 동아리방, 뜻밖에 문이 삐죽이 열려 있고 불빛이 새어나왔습니다.  어?  누굴까 싶어 발걸음을 옮기는데 안에서 노래 가락이 점점 크게 들려 오더군요.  훌륭한 기타에 비음 섞인 노랫 소리 바로 윤민석의 초기작 “사랑하는 동지에게”였습니다.    

동지여 슬퍼마소서 우리는 승리하리니  지금 비록 힘들고 외로울지나 
동지여 슬퍼마소서 그길에 하나되리니 눈을 들어 그날을 바라보소서 
우리의 가는길에 새벽이 살아 숨쉬고 우리의 가슴엔 반도의 청맥이 꿈틀거리오 
가자 동지여 투쟁의 화살되어 해방 그 함성으로 되돌아오자 

 동기 녀석은 여러 사정상 시위 같은 것에 참여한 적이 드물었습니다. 난 투쟁 같은 거  안혀~~~라고 능글능글거리면서도 그는 이 노래를 참 좋아했습니다.  특히 ‘반도의 청맥이 꿈틀거리오’라는 부분을 부를 때는 ‘비암이 가슴속에 기어가는 것 같다’고도 했지요. 사람이 등 뒤에 서서 발바닥 까닥거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는 계속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직한 등을 들먹거리면서 그가 ‘반도의 청맥이 꿈틀거리오’라고 외칠 때 제 마음 속에서도 뱀 몇 마리가 기어가며 제 콧날과 눈두덩을 물었습니다.  어쩌면 내가 이 방에서 마지막으로 듣는 그의 노래일 수도 있겠구나....... 투쟁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해방이 뭔지도 몰랐고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 노래를 친구 녀석과 함께 부르며 목이 메었던 기억을 함부로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검색조차 안되는 노래이지만 그 노래를 불러 준 윤민석씨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친구와의 추억 한 조각을 맘 깊숙이 꽂아 주었으니까요. 더구나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고 술자리에서 건배 정도는 두어 번 나눠 본 것 같지만, 지금은 얼굴 윤곽도 기억나지 않는 그에게 저는 그렇게 약간의 빚을 졌습니다.  그것은 저 뿐이 아닐 겁니다.  <전대협 진군가>를 부르면서 길바닥에 누웠던 이들에게는 그 짧고 아팠던 청춘의 기억일 것이고,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를 부르면서 지금은 서로에게 고통 뿐일지라도 그것이 이 어둠 건너 우리를 부활케 하리라를 부르며 펑펑 눈물 흘리던 전교조 선생님들에게는 다시 없는 위안이었을 것이며, 어느 택시 기사의 넋두리를 그대로 가사로 하여 만든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분단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가장 신명나게, 하지만 가장 서글프게 묘사한 노래로 남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이 존재하는 한, 공화국의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노래이자 무기이자 함성으로 남을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의 노래에 약간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 그 약간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제 선배가 올린 글을 가져와 봅니다.  

 “민석이형 아내의 병세가..(아내와 가족을 걱정하여 자세한 말은 함구하라 부탁하셔서)
... 젊은 날부터 시작된 암투병인지라 변변한 보험도 없고 오랜 투병으로 별다른 여유도 없습니다. 게다가 병실이 없어 3일간 응급실 앞 야전침대에서 치료를 받다 겨우 나온 병실이 특실 뿐이라... 급한대로 입원을 했고 일반병실이 비는대로 옮길 계획이지만 그 또한 기약없는 일입니다. 
 젊은 시절 반복된 투옥으로 몸도 맘도 많이 상했고, 작곡가라면 당연히 받아야할 저작권료 한번 변변히 챙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음악을 역사에 내어준 사람입니다. 그의 음악에 눈물 흘리고, 그의 음악에 가슴 뛰던 청춘의 기억이 있는 분이라면... 관심과 도움을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큰 액수이면 좋겠지만 1,2만원이라도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 병을 어찌해줄 수는 없지만, 그의 노래가 많은 이들 가슴에 여전히 기억되고 있음을, 믿음을, 희망을 전해주세요.”  

국민은행 043-01-0692-706 윤정환

(윤민석 본명입니다. 계좌번호를 물을 수가 없어서 형이 운영하시는 송앤라이프 계좌를 올립니다. )

 힘을 합쳐야 할 곳도 많고, 이리저리 도와 주어야 할 곳들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주 약간만, 제가 졌던 빚을 갚고자 합니다.  윤민석을 아는 분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 1조를 노래로 부르며 신나 했던 분들의 성원을 기대해 봅니다, 
 

검군과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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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군과 박은정

삼국사기에 보면 이런 인물이 나온다. 대사라는 벼슬을 지낸 구문의 아들 검군. 대사(大舍)라는 벼슬은 신라 관등 가운데 12번째 벼슬로 4두품에게도 허락된 것이었으니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였다고 보긴 어렵겠다. 검군도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라 했으니 고만고만한 벼슬아치였을터. 서기 627년 가을 음력 8월 이른 서리가 내려 여러 농작물을 말려 죽이는 바람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메우는 지경에 이른다. 이때 사량궁의 관리들은 작당을 해서 나라 창고의 곡식을 나눠 착복한다. 그런데 검군만이 그를 받지 않았다. 이에 다른 사인들이 검군을 꼬드긴다.

"아니 다들 받았는데 왜 자네만 마다하는 건가? 적어서 그래? 그럼 좀 더 신경써 줄께.".

사람 사는 건 천 년 전이나 2천 년 전이나 다를 것이 없다. "새끼 혼자 잘난 척은" 하면서 침을 찍 뱉는 치들도 있었을 것이고 괜히 걱정해 주는 체 하면서 "모난 돌이 정 맞어. 다 자네를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하면서 "자 내가 신경 좀 썼네" 하면서 두둑한 곡식 주머니 내미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검군은 '웃는다'. 정색을 한 것이 아니고 웃는다. "내가 명색이 이찬 나으리의 자제 근랑의 문도로 이름을 걸어 두고 화랑의 뜰[風月之庭]에서 수행을 했는데 옳은 일이 아니라면 천금을 준대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겠소."

또 한 번 사람 사는 것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정직한 사람은 항상 있었고 그를 중뿔난 놈으로 몰아부치고 조직에 해를 입히는 존재로 폄하하여 그를 찍어내고야 마는 쥐새끼같은 소인배들은 항상 더 많이 있었다. 검군의 동료들이 그랬다. 그리고 좀 더 막나가는 이들이었다. " 이놈을 죽이지 않으면 말이 새나갈 거야. 그럼 우린 다 죽는 거라고." 작당을 한 그들은 이미 양심 같은 것은 손톱처럼 잘라 버린다. 그들은 드디어 검군을 독 먹여 죽이기로 하고 그 음모의 술자리로 부른다.

검군은 그를 초대한 자리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화랑으로 모시던 이찬의 아들 근랑을 찾아가 이별을 고한다. "오늘 이후에는 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근랑은 크게 놀랐다. 두 번 세 번 이유를 물은 뒤에야 검군은 '대략' 내막을 밝힌다. 소상히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누가 음모를 꾸며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고해 바치고 도움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님을 뜻할 것이다.

근랑이 말한다. "왜 담당 관청에 알리지 않는가?" 그러자 검군은 이렇게 답한다. "제 목숨이 두려워 남을 죄에 빠지게 하는 일은 차마 할 수 없습니다."

거듭 거듭 예나 지금은 다를 것이 없다. "그냥 내가 피해보고 말지 일 시끄럽게 만들기 싫습니다." 라는 얘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무지하게 많이 듣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쓸쓸히 사라지는 이의 뒤켠에서 얼마나 많은 쥐새끼들이 찍찍거리는지 알지 않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자신이 사실을 밝히고 발고한들 자신의 동료들보다 더 해쳐먹었을 '담당 관청'의 관원들의 행태가 어떨지는 검군 그리고 그를 이끄는 화랑인 근랑 자신이 더 잘 알지 않았겠는가. 오늘날의 우리들도 검군 같은 이들이 부딪치게 되는 그 높고도 살벌한 장벽의 두려움에 대해 암암리에 또는 공공연하게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검군은 이런 심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죄를 짓기는 죽기보다 싫고 죄에 가담하지 않자니 죽을 만큼 답답하고, 차라리 나 혼자 죽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근랑은 갑자기 위엄을 잃는다. 그리고 임전무퇴를 뼈에 새긴 화랑으로서는 상상 못할 비겁한 소리를 입 밖에 낸다. "그...그럼 어떻게 도망이라도 가지 그러나."

그때 검군은 하늘같이 모시던 화랑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굽은 건 저들이고 곧은 건 저인데 되레 도망가는 것이 어찌 대장부겠습니까." 이때 근랑의 표정이 어떠하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누군가의 희생을 말릴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무능한, 그러나 고귀한 신분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검군은 동료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곳으로 갔다.

동료들은 검군에게 사과의 뜻으로 술자리를 펼쳐 놓고 (酒謝) 사죄하였다. 그런데 그 음식에는 독이 섞여 있었다. 검군은 이를 알고도 음식을 꿋꿋이 먹었다 (劒君知而强食) 그리고 죽었다. 독 기운에 온몸이 굳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검군 앞에서 그 동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장담하는데 “녀석 잘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사악한 치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안타까와하면서 “조금만 생각을 고쳐 먹었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고, “검군 때문에 다 죽을 수는 없잖아. 처자식이 몇 명인데.” 하면서 애써 위안하는 새가슴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리라. 그러나 결론은 같다. 그 모두는 살인자들이었다. 살인의 공모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의로움을 생매장한 파렴치한들이었다.

네 번째로 말한다. 사람들이 벌이는 일은 서기 627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검군의 죽음을 본다. 어느 날, 대한민국 지방검찰청의 한 검사는 연수원 깃수 한참 위의 선배 판사로부터 느닷없는 전화를 받았고 그 판사는 국회의원의 남편이었으며 검사는 그 국회의원과 관련한 사건을 맡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문제의 국회의원 나경원을 제외한 모든 이가 안다. 판사가 검사에게 전화하여 ‘기소’를 청탁하는 것은 내놓고 도둑질을 하겠다는 시러베아들의 선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화한 건 맞는데 ‘청탁’을 하지 않았다고 우긴다면 음주는 했는데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어느 딴따라의 치졸한 변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남편이 기소 청탁을 했다는 보도에 국회의원은 발끈했고 국회의원의 보좌관은 해당 언론사를 고발했다. 검사가 입을 다물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후임 검사의 말대로 “오래 되어 기억에 없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건방지게 국회의원을 물고 늘어진 장삼이사쯤은 벌금 몇 푼으로 다스리면 될 일인데 결기 세울 것도 없었다. 사량궁의 나라 곡식들을 알아서 분배하던 검군의 동료들처럼 ‘우리들만 입 다물면’ 아무 일도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박은정 검사는 그 편리한 합의를 거부하고 말았다. 상습 절도범이 된 지적장애인에게 중형을 구형하는 대신 치료를 주선하고 그 비용까지 경감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 주던 오지랖 넓은 검사는 자신이 해당 판사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것이 공개됐다.

상식이 있는 나라라면 불러들여 감찰을 해야 하는 것은 그 판사다. 무릎맞춤을 시켜서라도 네가 전화했던 것이 사실이냐를 묻고 또 ‘오래 돼서 기억에 없다’거나 ‘청탁한 적이 없다.’고 붕어를 삶아드셨다면, IT 강국답게 엔터 한 번이면 드르륵 뽑히는 통화 내역을 손에 쥐고 이 통화는 그럼 데이트 신청이었느냐고 물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직무 감찰을 받았다고 소문이 난 것은 난데없게도 검사였다. 그녀의 죄라면 자신이 겪은 범죄적 사실을 공개한 죄 밖에 없는데. 양심을 지킨 죄 밖에 없고, 정말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한 죄 밖에 없는데...... 그리고 오늘 박은정 검사는 사의를 표했다.

도대체 왜 그녀가 사직해야 하는가. 지구상 어느 구석진 곳의 토후국도 아니고, 천 년 전의 골품제 왕국도 아닌, 법치주의를 숭상한다는 공화국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검사가 ‘정들었던 검찰’을 떠나야 하는 이런 개 같은 경우는 없다. 검군이 섬겼던 근랑이 검군에게 “왜 담당 관청에 고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던 것처럼 “조용히 내부에서 해결하면 되지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게 한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근랑이 검군에게 “도망이라고 가라.”고 한 것처럼 자기가 정히 더러우면 사표 쓰고 나가 변호사 사무실 차려 전관 예우 장히 받아먹으면 될 일을 꼬장꼬장 검군처럼 잘난 체한 죄를 입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법치국가를 자임하는 나라의 사법부와 검찰 내부에 온통 신라 시대 검군의 동료들같은 쥐새끼들이 들끓고 있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 (사표를 반려하겠다고 대검이 밝혔다지만, 문제는 사실을 얘기한 한 검사가 그 때문에 ‘사의’를 표하게 되는 그 칠흑같은 분위기다.)

판사가 어이 박 검사 그건 좀 잘 부탁한다고 부탁하고, 검사가 판사에게 전화하여 형님 이번 재판 좀 잘 봐 주시오 뻗대고, 그렇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일정한 자리에 오른 뒤 옷 벗고는 여어 후배님들 선배 사정 좀 봐 주게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게 당연한 사법부라면, 그에 반하는 검사 나부랭이쯤은 일 터진지 하룻만에 사표를 결심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스스럼없는 법의 탈을 쓴 양아치들이라면, 백성들이 자식 팔아 끼니를 메우는 동안 나라 곡식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그를 거절하는 검군에게 독주를 먹였던 시궁쥐같은 검군의 동료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섯 번째로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다. 검군은 그렇게 죽었는데 삼국사기 열전은 “ 검군은 죽어야 할 바가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을 기러기 털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라 할 만하다.”는 어느 군자(君子)의 평으로 끝난다. 자기 낭도의 어이없는 죽음에 분노한 근랑이 그 생쥐같은 관리들을 징치했다거나 검군에게 독을 먹인 동료들이 후일 자신들의 죄를 늬우치고 그 묘소에서 통곡했다거나, 성난 백성들이 관리들 목을 매달고 의로운 검군을 추모했다거나 하는 이야기의 흔적조차 비치지 않는다.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성실한 검사였는지를 얘기하고 그녀가 사직서를 낸 것에 "그러면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어.“자신의 식견을 과시하는 것 말고는 박 검사를 몰아낸 쥐새끼들에 대해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다가 세월이 가면 잊어갈 것이다. 역시 우리는 단일민족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토록 훌륭하게 그 습속을 고스란히 유전 받아 후세에게 물려줄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유전도 아니고 복제에 가깝지 않은가. 검군이 있고 검군의 동료들이 있고 근랑이 엄존하고 제 새끼 팔아서 끼니 때우면서도 관리들이 무슨 짓을 하든 넋놓고 있던 백성들이 유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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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대표님께 질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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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대표에게 묻습니다.



요점은 간단합니다. 간단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한 조직의 장을 보위하려고 숙소를 제공했던 조직원의 집에 어느 나쁜 놈이 침입해서 성폭행을 시도합니다. 그 나쁜 놈도 피해자의 동지였고, 동지 가운데 장 짜리였습니다. 나쁜 놈은 처벌하면 되고 다시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는 걸 앞장서서 처결하면 되는데, 조직이 피해자를 배신했습니다. 그 와중의 1인이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가 되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정희 대표에게 질문한 걸로 압니다. 열심히 트윗에도 답하시더군요.



 “저는 성폭력 피해자의 생존을 도와 소송해온 사람입니다. 2차 가해에 대한 조직내 사후처리 중요성을 잘 알지만, 조직의 장이 열의 갖고 시도했으나 피해자가 원하는 수준까지 발의안 못 내고 의결 이끌지 못했다하여 공직자격까지 부인하는 것은 무리라 봅니다.”



 지금까지 해 오신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조직의 장이 열의를 갖고 시도했지만 피해자가 원하는 수준까지 발의안 못 내고 의결 이끌지 못했다면 공직자격까지 부인하는 건 무리라는 데에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하나 단서는 따라붙습니다. 그 ‘열의’를 입증해야 하고 피해자가 원하는 수준까지의 해결책을 못 내 온 데 대한 책임의 통감과 해명이 필요하겠죠. 그 부분이 행해졌는지는 제가 아직 모르니 넘어가도록 하고, 큰 틀에서 동의합니다. 언 놈이 더럽히고 간 방을 열심히 치웠는데 누가 들어와서 청소 상태가 이게 뭐냐고 한다면 안되겠죠.  자 넘어갑니다.



“ 정진후 후보는 2차 가해 못 막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일어난 2차 피해자가 징계받은 것에 대해 피해자가 너무 약하다며 이의 제기하자, 재징계안을 대의원대회에 올린 사람입니다. 사실이 정확해야 토론이 됩니다.”


앞의 것은 다 작파합시다. ‘사실’ 관계에 있어 엇갈리고 있는 부분 이정희 대표님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피해자가 원하는 징계가 무엇이었기에 좌절되었으며, 그럼 현재까지 빵을 살고 있는 범죄자와 그의 행각을 덮으려 했던 이들에 대한 징계가 미약하다가 항의한 사람의 요구가 왜 좌절되었는지 그 사실 또한 정확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사람은 장계안 올렸는데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다.”고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저는 성폭력의 불의에 맞서 싸운 사람입니다. 그 기준에서 볼 때, 정진후 후보가 이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낸 것은 못되나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고 노력하고 성찰하며 애써왔다 판단했습니다.”



 네 성폭력의 불의에 맞서 싸워 오신 거 충분히 알고 있고 최대한의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이정희 대표님이 대표로 오시기 전의 민주노동당 주류, 그러니까 지금 이정희 대표님을 모시고 있는 그분들은 심각한 폭행 사건이 난 뒤에 “왜 맞았는지를 조사하자”고 나대던 분들이었음을 상기해 주세요. 그들의 주장의 허점은 누구보다 이정희 대표가 잘 아시리라 믿어요. 피해자의 피해를 피해자의 책임으로 몰아가려는 태도였고 뭣보다 중요한 건 피해자의 피해보다 다른 요소를 부각시키려는 2차 가해의 문제였지요.



가장 중요한 피해자의 말에 앞서서 “왜 피해를 봤는지 조사하자”가 왜 2차 가해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따로 드릴 필요가 없겠죠. 모든 사건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은 피해자의 증언입니다. ‘피해자 중심주의’ 아시죠? 일단 다른 사람의 평가는 그 다음의 계제이고 말입니다. 정진후 전 위원장이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고 노력하고 성찰하며 애써왔다.”는 평이 이정희 대표님의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한 말이라면 사실 이 문제는 말끔하게 해소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피해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이정희 대표님이 그렇게 평가한 거라면 대표님은 지금 2차 가해를 하고 계신 겁니다. 피해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엉뚱한 사람이 “쟤는 가해자도 아니고 할만큼 했어!”라고 단언한다면 피해자의 복장이 온전하겠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지금 피해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폭력 사건 발생 이후 저를 가장 힘들게 상처주고 아프게 한 것은 전교조 정진후 위원장을 비롯한 전교조의 간부들입니다...... 그들이 왜 이토록 저를 죽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뭐 1년 반 전의 인터뷰군요.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거명된, 힘들게 상처주고 아프게 한 주체로 거명된 사람이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로 결정하는 데에는 최소한 저 인터뷰의 반전드라마가 펼쳐져야 옳지 않겠습니까? 피해자의 평가 없이 대표님이나 대표님과 뜻맞는 사람들끼리 “쟤는 할 만큼 했어. 그러니 하자없어,”라고 평가해 버린다면, 그 온갖 흠에도 불구하고 장관 등 임명을 강행하는 MB와의 차이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요.



문제는 아주 간단합니다. 피해자의 증언에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피해자가 이미 정진후 후보와 오해를 풀었고, 흔쾌히 그를 응원하기로 했다,”거나 “피해자가 얘기한 것은 전임 정진화 위원장의 오타였다.” 라거나, 무슨 해명이 있어야 ‘진보’정당의 비례대표에 수긍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 해명 없이 어떻게 통합진보당을 진보당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피해자가 증언하는 바 “성폭력 사건 발생 이후 저를 가장 힘들게 상처주고 아프게 한 것은” 정진후 비례대표가 아님을 증명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구구하게 뭐 2차 가해자가 아니네, 할만큼 했네 하는 사설 늘어놓으실 필요가 터럭만큼도 없으십니다. 트윗에서 몇 차례, 그리고 트친들에게 리트윗까지 해서 부탁드렸는데 말씀이 없으셔서 좀 긴 글로 올립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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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3.1 최인과 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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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날이 날이니만큼 작년에 올렸던 거 살 붙여서 올림

1919년 3월 1일 최인과 신철


이렇다 할 저항도 해 보지 못한 채 3천리 강토를 일본에게 통째로 내 준 이래 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의의 노예였다. 일제의 탄압은 교묘하고도 철저했고 경찰 대신 헌병을 투입하여 식민지 조선의 치안을 다잡았다. 그 가운데 등장한 ‘조선 태형령’은 일본의 무단 통치의 야만성을 증명한다. 원래 태형은 갑오경장 때 사라졌지만 일본은 ‘조선인에 한해’ 태형을 부활시킨 것이다. 즉결처분권까지 보유한 헌병들은 사람을 잡아들여 곤죽을 만들어 버리는 일을 예사로 했다. “조선놈들은 맞아야 한다.”는 말은 이때쯤 그 생명력을 얻었을 게다.




그러던 중 터져 나온 1919년 3월 1일의 3.1 운동은 일제 시대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게 벌어진 항일 투쟁이었다. 조선의 치안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일본 관헌들, 조선 팔도 어느 집 안방에서 바늘이 떨어져도 우리는 알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일본 헌병들은 이 날 두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아무런 낌새를 채지 못했다.

일이 잘못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잘 되려면 엎어져보니 삼밭이더라고, 3.1 운동이 이렇듯 성공적으로 폭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실로 엉뚱한 오해와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도 작용을 했다. 우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오해다. 윌슨이 제창한 14개조에는 “식민지에서 통치하는 정부의 주장과 통치를 당하는 국민들의 이익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말은 있지만 민족 자결(自決)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았고, 그나마 그의 주된 관심의 대상은 발칸 반도의 “민족”들이었다. 하지만 그 선언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우리도 뭔가 해 보자는 움직임의 자양분이 됐다.


거기에 고종 황제가 죽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독살은 아닌 듯 하지만 일본인들이 말을 들어먹지 않는 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은 그야말로 바람처럼 전체 조선을 뒤덮었다. 수십만 군중이 덕수궁 앞을 뒤덮었고 장사꾼들은 스스로 문을 닫아걸었다. 대한제국의 옛 신하들도 서울로 올라와 통곡했고 상복 입은 백성들은 각기 동서남북으로 황제 계신 곳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독살설을 적극적으로 유포하면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를 최대로 끌어올리려 애썼다.




하지만 거사가 들통 날 위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이름도 참람한 이완용 이하 전직 고관들에게 동참을 호소한 것은 그 중의 하나다. 이완용을 만난 것은 손병희였다. 도대체 이완용 같은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몰라도 손병희는 이완용에게 ‘민족대표’로서의 동참을 요구했고, 구한말 최고의 수재 중의 하나인 이완용은 구렁이 열 마리쯤은 휘감긴 언어로 제의를 거절한다. “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알긴 아는구나)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오.(응?)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뭐라고?) ”


3.1 운동이 터지자 바로 낯빛을 바꿔 조선인들의 자중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하며 일본 제국주의 편을 드는 그였지만 그는 끝내 거사 사실을 일본 당국에 알리지는 않았다. 혹시나 일이 성공했을 때의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그나마 한 조각 남았던 양심 때문이었을까.




또 한 번의 절대절명의 위기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던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신철에게 독립선언서가 포착되었을 때 왔다. 뭔가 낌새를 챈 듯 주변을 맴돌던 그가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에 별안간 들이닥쳐 인쇄된 기미 독립 선언서를 확보하고 돌아간 것이다. 하필이면 그 악질 신철이란 말인가. 최린은 눈 앞이 아득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를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날의 상황은 여러 버전으로 전해지지만 가장 극적인 것으로 골라서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최린은 마주앉은 신철에게 다짜고짜 “당신은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때 신철의 대답은 “조선 사람입니다.”였다. 최린은 5천원이라는 거금을 내밀며 (쌀 한 가마가 40원이었다) 제발 며칠간만 입을 다물어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자 신철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일의 누설 여부가 내 입에만 달린 일이라면 걱정 말고 일을 진행하시오” 그리고 고등계 형사 신철은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며 정중하지만 무거운 큰절을 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핑계를 대어 만주로 출장을 떠났고 일이 터진 후 체포되자 자살했다. 과연 신철의 침묵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역시 조선 사람이었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천하의 매국노 이완용과 고등계 형사 신철까지도 그 입에 자물쇠를 단 가운데 조선 민족은 역사적인 3월 1일을 맞게 된다. “우리의 의요 생명인” 날이요 “한강물이 다시 흐르고 백두산이 높았던 날”, 백정부터 기생까지 조선 독립을 부르짖으며 떨쳐 일어서고, 저 멀리 인도의 네루가 옥중에서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청춘 남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고 있는 것은 네게 큰 교훈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던 그 위대한 날이.




그런데 신철에게 손가락을 찌르며 조선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를 묻던 최린은 완전히 변절하여 일제 말기에는 내선일체의 선봉장으로서 너희들은 일본 사람이라고 조선 청년들을 윽박지르게 된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 나와서 그는 3.1 운동을 뼈아프게 회상하며 자신의 죄상을 고백한다,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재판을 받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소에 묶고 능지처참해 달라.” 허다한 친일파 가운데에서 최인만큼 처절하게 자신의 죄상을 인정한 이도 드물다.



그때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그의 눈에는 무엇이 스쳐 지나갔을까. 두루마기를 입은 고등계 형사 신철이 묵묵히 일어나 큰절을 하고 나가던 그 뒷모습이 밟히지 않았을까. 고등계 형사도 죽음으로 지키려 했던 민족적 양심을 명색 민족 대표랍시고 나대던 자신이 끝내 내버렸던 사실이 못내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기미년 3월 1일 바라보았던 찬란한 여명과 그 이후 죽어간 숱한 청춘들이 회한으로 가득한 최인의 노구를 덮어버리지 않았을까.

1983.3.2 교복자율화 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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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아 게으름.. 1983년 3월2일 교복자율화의 시작

1983년 3월 2일 나는 당시 중학교 2학년에 진입하고 있었다. 개학이었던 이날은 사뭇 특별한 날이었다. 지난 1년 내내 입었던 시커먼 교복과 교모, 매 맞을 때 살을 칭칭 감아돌던 얇은 하복 교복을 다시 입지 않게 된 날이었던 것이다. 즉 교복 자율화 첫날이었다. 겨울이 돼도 반드시 교복 안에 뭘 껴 입으면 입었지 바깥에는 입지 못하게 했던 억압의 세월은 가고, 형형색색의 잠바 가운데 아무거나 걸치고 가면 되는 희한한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만 것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동천(더럽기로 악명높았던 지역 하천)물도 춤을 춘다.” 는 것이 당시 친구의 일성.

물론 1년 전에는 두발 자율화가 시행됐다. 하지만 그건 자율화라기보다는 완화에 가까웠다. 박박머리를 겨우 면한 ‘3센티미터’와 ‘귀를 조금이라도 덮으면 안된다’ 등등 졸렬한 규정들이 많았고 수시로 자와 바리깡을 대동한 학생부 교사들의 순시가 잇따랐으니 그를 ‘자율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폐가 심했다. 하지만 교복자율화는 달랐다. 옷값으로 규제를 할 수도 없고, 그 외양을 딱히 구분할 방법이 없었으니 진정한 자율화라 할 만했다. 그저 집에서 입던 평상복을 걸치고 등교하면 됐던 것이다.

그 부산물 가운데 몇 개를 들어보자. 우선 거수 경례가 사라졌다. 딱 1년 입었던 교복 시대 학교는 완벽한 병영이었다. 등교할 때 칼라에 3자 붙인 3학년 선도부가 호랑이처럼 버티고 서 있었고 배지와 명찰 복장 상태를 검열했다. 그 3자에다가 ‘선도’ 완장은 가히 육군 병장의 포스에 가까웠던지라 3자를 보면 어김없이 거수경례가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물론 좀 불려 말하면 수첩만한 명찰을 달고 다니게 하는 등 학년을 구분짓고자 하는 노력은 있었으나 검정 제복 위의 3자와 스펙스 잠바 (프로스펙스 잠바 짝퉁)위의 명찰은 비할 바가 못 되었던 것이다.

또 1학년 때 실시하던 ‘환경미화검열’ 방식도 없어졌다. 교장 이하 학생주임 교육주임 과학주임 등등 교사들이 각 반을 돌 때 반장이 총원 몇 현원 몇 결석 몇 이하 환경미화검열 준비 끝!을 외치던 것이 종식된 이유는 그야말로 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복 입은 애들이 거수경례는 커녕 고개 꾸벅 숙이는데 이게 뭐냔 말이다. 먼 훗날 나는 훈련소에서 이 환경미화검열이 ‘내무사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다못해 조회 때 구령 “연대 차렷!”도 바뀌었다. 교복 입고 교모 쓰고 열을 지은 상태에서 연대 차렷이지, 형형색색 청바지 ‘써지오바렌테’부터 부산진시장 ‘루마제’ (구루마제 -> 리어카제) 바지까지 널린 마당에 연대는 무슨. 그냥 ‘전체 차렷’으로 슬그머니 변신해 갔다. 학교에서 군대 물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83년은 전두환의 대머리가 서슬푸르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그가 우리 중학교 옆에 있는 대양고무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오전수업 2시간을 빼먹고 교실 밖으로 화장실도 못갔다. 경호원들이 복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학생부 교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던 그의 시절에 왜 이런 ‘자율화’가 이루어졌을까. 우선 전두환 자신이 광주의 피비린내를 동반한 불법적인 정권 탈취범으로서,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탈각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을 내놓았다는 측면 (그래서 통행금지 철폐가 수십년 만에 이루어졌다)이 있다. 두 번째로 이 분의 교육적 뚝심을 들 수 있겠다. 최규하 정부 때 문교부 장관이며 이화여대 총장을 오래 지낸 김옥길씨다. 교복의 자율화 실시는 1983년 이규호 장관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처음 교복자율화를 개진했던 사람은 김옥길 장관이었던 것이다.

김옥길 장관은 비록 5개월여의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취임 직후 ‘교복자율화’를 결정했다. 교육계는 갑작스러운 발표에 그야말로 벌집 쑤신 듯 했다. 중학생이라면 응당 까까중이 되어야 했고, 교복을 차려 입어야 ‘학생답다’고 했던 수십년 세월이 한 번에 망가지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계는 표현하기 죄송하지만 꽉 막힌 분들이 주도권을 잡고 계셨다. 장관실까지 쳐들어온 어느 사립여고의 교장이 장관에게 던진 말에서 우리는 그 한 단면을 본다.
“교복을 자율화하라고 했으면 지침을 주셔야지 그냥 지시만 하면 어떡하느냐”

즉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되며 무슨 옷은 허용하되 무슨 옷은 금지시킨다는 지침을 주셔야 학생 지도가 될 게 아니냐는 한심하다 못해 그 한심함이 기특하기까지 한 항변이었다. 김옥길 장관은 복장이 터졌던지 기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설명을 한다. “교복 자율화는 교육의 자율화를 상징하는 겁니다. 교육자율화 깃발을 어디에 꽂으면 교육자들이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교복이라는 언덕에 꽂은 거라구요. 이래도 못알아들으시겠습니까.”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지금도 학생들도 규제받고 통제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권리를 천명한 정도인 ‘인권조례’를 두고 이 난리가 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사복을 입고 만두집에서 만두를 먹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혀를 찼다. “머리 길고 사복 입으니 저게 학생이냐?” 그 사람 눈에는 사복을 입은 학생이란 금새 탈선하고 망가지고 말 말세의 전조로 보였을 것이다.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얘기하면 “내 아들 동성애자 만들거냐?”고 눈 뒤집는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교복을 1년 입어보고 교복자율화를 맞아 본 사람으로서 고 김옥길 장관에게 사의를 표하며, 오늘날에도 유효한 고인의 훈계 한 마디를 오늘날의 ‘꽉 막힌’ 사람들에게 들려드린다.

“교육이란 각자가 지닌 소질을 캐내고 그 장점을 어떻게 키워 주느냐에 달린 겁니다. 명령으로는 안되고 획일은 더더욱 안 됩니다. 자율이란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제약받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도덕율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책임없는 자율이 아니라 적당히 조절하고 제어하는 행위입니다........ 자율에 앞선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율을 위한 훈련이란 난센스지요.” 아 제발 좀 옳은 말씀은 좀 기억하고 살자. 적어라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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