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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31 위장간첩 이수근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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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31  위장간첩 이수근 체포
 
개그맨 이수근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TV를 보시다가 무심코 한 마디 하셨다. “이수근 이수근 하니까 난 그 이수근이 생각이 나서.............” ‘그 이수근’이란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탈출한 북한 중앙 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이었다. 그에게는 ‘위장간첩’이라는 별칭이 아호처럼 따라붙는다. 위장간첩 이수근. ...


그의 탈출은 영화와 같았다. 정전 회담을 취재차 판문점에 왔던 그는 한국측 인사에게 귀순 의사를 밝혔고 이에 미군 장교가 갖다 댄 차에 날쌔게 올라탄 후 북한측의 차단봉을 뚫고, 아차 하는 순간 분계선을 넘는다. 인민군은 총을 쏘며 그를 저지하려 했지만 20초 정도에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그의 탈출극을 막을 수 없었다. 북한의 고위 언론인으로서 남한에 ‘귀순’한 것은 특별한 예였기에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정착했다. 그런데 서울에 온지 2년만에 이수근은 가발을 쓰고 수염을 붙이고 가짜 여권으로 서울을 또 한 번 탈출한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김포공항을 빠져나간 것을 까맣게 모르다가 그가 한국을 떠난 것을 알고 발칵 뒤집어진다. 이때부터 한국 영국 미국 정보기관이 총동원되는 일대 첩보전이 펼쳐진다. 이수근의 행적이 알려진 것은 홍콩에서였다. 눈에 불을 켜고 공항을 지키던 한국 영사관 직원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외교관 체면 따위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육탄전을 벌인다. 당연히 홍콩 경찰이 출동했고 쌍방이 다 체포된다. 외교관들은 풀려났지만 이수근을 잡아서 끌고 갈 수는 없었다. 여기서 CIA가 개입한다. 영국 정보기관의 협조를 얻어 캄보디아행을 원하는 이수근을 베트남 경유 비행기에 태운 것이다.


월남에 사단 병력을 파견하고 있던 한국에게 월남은 앞마당과 같았다. 한국의 베트남 주재 공사가 월남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어이 각하. 비행기 00편 좀 공항에 잡아 둬 주시오.”라고 부탁할 정도. 둘은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절친이었다.

베트남 패망 이후 마지막 헬리콥터를 타지 못해 공산 베트남에 남아야 했고 그 뒤 북한까지 가세한 전향 공작을 ‘뿌리쳤다’고 유명한 이대용 공사는 비행기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아 있던 이수근을 체포한다. 이수근은 발길질을 하며 저항했지만 군인 출신의 이대용 공사의 실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1969년 1월 31일.  그렇게 체포된 이수근은 한국으로 압송됐고 몇 달 뒤 매우 신속하게 사형을 당한다.

이근안 경감이 말한 바대로 사람 하나 간첩 만드는 ‘예술’이 횡행하던 시절, 그는 완벽한 자백을 곁들인 간첩이 됐고 그 이름 석 자는 간교하고 비열한 ‘위장간첩’의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그 근거는 그럴 수 없을 만큼 엉성했다.

신문과 방송을 장식한 ‘위장간첩’의 근거 가운데 하나는 귀순할 시 이수근을 쫓던 북한군의 총구가 이수근이 탄 차량이 아닌 공중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하 그랬구나. 중앙정보부의 세심한 관찰력에 사람들이 찬탄을 금치 못했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차 안에는 미군 장교도 함께 타고 있었고, 그를 조준사격했다가는 바로 총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판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총구는 경고 사격 느낌으로 하늘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또 중앙정보부는 귀순 후 뻔질나게 전국을 돌며 행해진 이수근의 강연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그가 김일성에 대한 욕설과 비판을 피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의 배려를 한 꺼풀 벗기고 보면 간단한 반론이 존재한다. 위장간첩이라면 일부러러라도 김일성에 대한 더 욕설을 퍼부었을 것 아니냐는 것이다. 총알 피해 가며 귀순한 위장간첩이 고작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를 체포했던 이대용 공사나 조사 책임자 등등은 그가 간첩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들에 따르면 북한의 유일 체제에서는 지겨워서 못 살고, 남한조차도 그 자유분방함을 담아내지 못했던 리버럴리스트였다. 귀순 원인이 복잡한 여자문제라를 소문이 돌았을 때 그를 물어 보는 질문에 대해서 이 위장간첩이 꺼낸 대답은 실로 가관이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뇨?” 글쎄 그는 공화국에서 살기는 좀 힘든 로맨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서울을 탈출했던 그가 가고 싶어했던 것은 ‘제3국’일 가능성이 컸다. 북한으로 가려면 홍콩에서 내려서 육로로 중공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었는데 그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북한이 싫어 도망나왔고 남한으로부터도 불신받았던 이 양쪽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이방인은 또한 자신도 양쪽 모두를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수령님 만세에 여념이 없던 북한과 기껏 자수해 왔더니 툭하면 총 들이대고 협박하던 남한을 깡그리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대용 공사가 김형욱 정보부장으로부터 들었다는 얘기는 당시의 자유대한이 어떤 나라였는지, 그리고 왜 이수근이 남한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단면으로 드러내 준다. “이수근이가 (이미) 2중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李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이수근을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밖에 안 되니 절대로 보안에 붙여야 합니다.”

남도 북도 싫어했던 한 '코리언‘이 오늘 그 인생의 종장을 찍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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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2.1 사이공의 도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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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8년 2월 1일 사이공의 도살자

... 베트남은 우리와 인연도 많고 비슷한 것도 많은 나라다. 요즘은 아니지만 한자도 썼고 상명하복의 유교 문화에 익숙했고 중국식 관료제도를 도입했다. 외침도 많았고 그래서 민족적 자존감도 높지만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고 분단도 됐다. 그리고 작은 공통점 하나 구정, 즉 음력 설을 성대하게 치른다는 것.

1968년 설날은 1월30일이었다.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고 마을마다 귀향객이 흘러넘쳤다. 베트남 말로 '테트'라고 하는 구정만큼은 좀 한갓지게 넘어가고픈 것이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의 바램이었다.  실지로 남베트남은 '휴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바로 이 구정을 기해 베트콩은 대공세를 펼칠 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귀향버스를 가장한 버스가 베트콩들을 그득그득 채우고 각 지방으로 흘러들었고 시신 대신 무기를 가득 채운 장례 행렬이 넘쳐났다. 그리고 베트콩 구정 대공세가 시작됐다. 

남북으로 긴 베트남의 국토 곳곳의 도시들이 베트콩들의 공격을 받았고 수도 사이공에서는 미국 대사관이 습격받는다. 그러나 초반의 기세와는 달리 구정대공세는 전술적으로는 대참패였다. 베트콩의 조직은 사실상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북베트남군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승리였다. 전쟁의 이면을 속속들이 전하고 있던 언론에 구정 대공세가 생중계되면서 그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을 경악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미국 대사관에서 벌어지는 총격전도 그랬지만 1968년 2월 1일 사이공 시내에서 일어난 한 사건과 그로 인해 남은 사진 한 장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사이공의 경찰 책임자 응우엔 응우옥 로안이 공포에 질린 한 남자의 머리에 총을 대고 사살하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에서 구엔 곡로앙은 정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사살당하는 이의 정면은 그대로 드러난다. 일그러진 입, 애써 총구를 피하는 눈, 두려움으로 구겨진 얼굴은 사진을 접한 그의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이 사진을 찍은 건 미국 기자 앤디 아담스. "난 포로가 서 있는 곳에서 불과 2미터도 안되는 곳에 서 있었어. 그런데 그가 천천히 총 쪽으로 손을 가져가더군. 위협일 거 같았어. 그런데 그가 총을 꺼내들고 팔을 들어올렸지. 나도 카메라를 들었고. 그리고 총을 쏴 버리더군. 그 순간 나도 셔터를 누르고 있었지. " 딸 둘과 뱃속의 아들의 아버지였던 한 남자는 머리가 박살나서 죽었다.  그는 남베트남 경찰과 공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 아내는 남편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몰랐지만 그가 구정대공세 때 사이공 도처를 찌르고 다녔던 베트콩의 일원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국제법상 전쟁법상으로는 즉결 처형이 가능한 존재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미국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도대체 우리 전우가 이런 개자식이란 말인가. 백주 대로변에서 비무장 포로의 머리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겨 버리는 야만인이란 말인가. 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 싸우며 누구를 위해 군비를 바치는가. 1969년 2월 1일 촬영된 이 한 장의 사진의 힘은 컸다. 당장 응우엔 응옥 로앙은 미국의 압력에 의해 그 직을 상실한다. 2월 1일의 희생자 외에도 베트콩 포로를 죽여 버리기로 악명 높았던,  (동시에 3개국어를 하는 교양인이었고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엄정한 법의 집행자였으며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다리를 잃었던) ‘베트콩의 도살자’ (사진으로 얻은 그의 별명)는 그렇게 물러났다. 월남은 패망했지만 그는 옛 전우의 도움으로 고국을 무사히 떠날 수 있었다.  그는 패망 직전 남베트남을 떠난 최후의 베트남인 가운데 하나였고, 미국에서 피자집과 스파게티 집을 운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숨 쉬고 농담도 하고 때 되면 쌀국수 들이키던 한 남자의 생명이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 하나의 힘에 사위어가는 순간을 기록한 이 사진의 의미는 깊고도 컸다.  물론 앤디 아담스가 인정한 대로 이 사진은 "반쪽의 진실"로서 응우엔이 무도한 살인마로만 비쳐지게 만든 데 대해 기자는 당사자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민간인 복장의 한 남자가 동포에 의해 머리가 날아가기 직전의 이 사진은 월남전, 나아가 전쟁이라는 단어의 끔찍함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개인적으로 응우엔의 즉결 처형이 '합법적'이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 '합법'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 합법성이 보장할 수 있는 야만의 폭은 너무 넓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월남전은 이렇듯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에 뛰어드는 종군기자들의 영웅담과 생생한 사진의 기록이 남겨지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된다.  베트남 전쟁 이후 전쟁, 특히 미국 주도의 전쟁은 참혹한 삶의 종말의 현장이 아닌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와 전자오락 게임의 신무기 발사 화면같은 모습으로만  보여질 뿐이었다.   저널리스트들로 하여금 전쟁터에서의 취재를 제한하고 정부가 제시하는 영상을 받아 설명하는 이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군과 알력을 빚으며 최전방의 생활을 자청했던 기자들은 사라지고 아늑한 프레스센터에서 앉아 있다가 챔피언이 나타나면 우우우 달려들어 플래쉬 터뜨리며 브리핑을 잘 받아 적는 받아쓰기 기자들만 양산됐다.
 수십만의 이라크인과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미군이 조종하는 카메라를 통해서만 바라보는 시대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가 된 것이다. 아주 가끔 인터넷 같은 비공식 매체로 흘러나오긴 하지만.

 그 연원 중의 하나는 이 사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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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2.2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작곡가 채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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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3년 2월 2일 작곡가 채동선

지금은 행정구역상에서 없어진 이름이지만 오늘날의 순천, 보성 지역에는 낙안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지금도 낙안읍성은 남아 있지만 낙안 자체는 이리저리 찢겨져 인근 군과 시에 붙여졌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놀라운 변신을 하는 여인 ‘외서댁’의 택호인 순천시 외서면, 그리고 오늘날의 벌교읍 등등은 원래 낙안군이었다. 이 낙안군의 옛 땅이자 <태백산맥>의 고향 벌교에서 한국 ...현대 음악사에서 잊지 못할 작곡가 한 명이 태어났다. 채동선.

그 아버지는 벌교에서 또르르한 부자였다. 당연히 채동선과 그 형제들은 식민지 시대 조선 백성치고는 대단한 호사를 누리며 자랐다. 채동선은 일본 유학을 거쳐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했고 그 여동생 채선엽은 그 이름도 아득한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했으니 구름 위에서 노닌 정도가 아니라 성층권에서 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채동선의 바이올린은 조선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비싼 악기로 소문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좀 특이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도 3.1운동 때 경기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만세 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찍혀 버린 배경이 있었다. 독일 유학을 다녀온 후 그는 깔끔한 서양 유학파의 음악 활동을 한편으로 점차 서양 음악의 토착화, 즉 민족적 정서를 담아내는 음악 쪽으로 기울어 갔다. 이 즈음의 대표격인 노래가 당연히 정지용의 시를 가사로 만든 가곡 <고향>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우리가 잘 아는 정지용의 <향수>와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부르짖던 고향은 막상 돌아와보니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울고,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은 피폐해졌고 자신을 반겨 줄 사람들은 만주로 감옥소로 타향으로 떠나 있었다고나 할까. 덜컹거리는 호남선을 타고, 압록강 가는 경의선을 실려 동아시아 각지에 흩뿌려졌던 수많은 타향살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잃어버린 설움을 달랬다. “에이 그래. 가봐야 예전 고향도 아닌걸 뭐.”


일본 제국주의가 그 주체할 수 없는 팽창주의를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음악계에도 암흑이 깃들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로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울렸던 홍난파도, 한국 현대 음악의 거봉이라 할 현제명도 모두 대일본 제국과 천황 폐하의 만세를 부르짖는 어용 음악을 짓고 부르고 연주했다. 홍난파는 모리카와 준이 됐고 현제명은 구로야마 사이민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자처했다. 홍난파는 이른 죽음으로 그 오욕을 끝냈지만 현제명의 어용 음악 활동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자신의 바이올린 스승이었던 홍난파부터 일제에 두 손을 들고 거의 모든 동료들이 무적 황군의 행진곡을 작곡하고 있을 즈음, 채동선만은 모든 활동을 접고 농사꾼으로 변신한다. “조선 사람은 농촌을 알아야 한다”면서 그는 성북동 집에서 수유리까지 매일같이 걸어다니며 양과 닭을 치고 꽃을 길렀다.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주소도 “000 의 00”이라고 조선 글을 꼭 덧붙여 걸어 놓았다. 그리고 밤에는 우리 민요와 국악을 채보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판소리 춘향가의 채보를 완성했고, 전라도 민요 <육자배기>를 악보로 옮기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쉬운 예로 우리가 아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이즈음 그의 손을 거쳐 노래로 남게 된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외로왔다. 태생적으로 우익일 수 밖에 없는 출신성분이었던지라 김순남 등 좌익 음악가들과도 각을 세웠지만 천황 폐하 만세를 노래했던 음악가들과도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미군정의 문화 정책을 격렬히 비판하고 그에 빌붙은 ‘사대주의자들’을 탄핵하던 채동선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그의 작품들을 집 뜰에 묻었다. 깊이 파고 모래와 숯을 넣어 습기를 방지하고, 독에 악보들을 넣고, 다시 철판으로 싼 다음에 묻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싸둔 작품들을 그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창졸간에 떠난 피난길, 친구에게 양담배를 얻어 장사도 했지만 특유의 고지식함 때문에 하나도 팔지 못했다고도 하고 막노동을 했다고도 하는데 결국 영양실조와 늑막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1953년 2월 2일이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10년 후 그의 아내는 땅에 묻어 두었던 고인의 작품들을 찾아낸다. 하지만 고인의 노래는 세계 어디에서도 겪기 힘든 민망함을 겪는다. 정지용이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기 때문에 그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의 발표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모든 시는 88년에야 ‘해금’된다) 그래서 아내는 고인과 가까이 지내던 이은상에게 부탁했고 <그리워>라는 이름으로 전혀 새로운 가사의 노래가 나왔고, 워낙이 유명했던 노래인지라 시인 박화목이 노랫말을 붙여 부르고 있었기로 한 곡조에 가사가 셋인 노래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한 노래에 가사 셋. 이걸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 더, 이번에는 약간 부아가 치미는 일이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한다. 그런데 홍난파와 현제명은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금이고 은이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홍난파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현제명까지 채동선보다 더 높은 등급의 훈장을 차지한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불만스럽다. 음악적 성취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적어도 ‘금관’을 차지하기에는 그의 일제 말기의 행적이 ‘은관’의 채동선에 비해 너무나 처지기 때문이다.

1953년 2월 2일 우리 현대 음악의 거목 하나가 너무 빨리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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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2.3 초세이 탄광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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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2년 2월 3일 초세이의 비극



바야흐로 대일본제국의 욱일기가 태평양을 뒤덮어가고 있었다.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어 놓은 일본은 전광석화처럼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진공했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 전역에서 일본군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942년 2월 3일이라면 일본군이 고립된 요새 싱가포르를 포위하고 언제 들이칠지만 가늠하고 있을 때였다. 필리핀에서도,버마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일본군이 서구 국가들의 식민지 주둔군을 격파해 가고 있었다.

...


 전쟁이 격화될수록 한없이 들어가는 물품이 석탄과 석유였다. 석유야 일본 본토에서 거의 나지 않는 물건이었지만 석탄은 달랐다. 각지의 탄광에서는 한 움큼의 탄이라도 더 캐기 위해 곡괭이질이 분주했고, 갱도는 더 깊이 더 깊이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관부연락선의 기항지였던 시모노세키에서 조금 떨어진 우베 시의 니시카와 해변에서는 바다 한 가운데 솟아 있는 기이한 구조물이 있었다. 그것은 해저까지 파고들어간 초세이 탄광의 송풍구였다. 초세이 탄광은 연간 15만톤의 석탄을 캐내던 일본 최대의 해저탄광이었다.


 이 탄광의 광부들 중 상당수는 조선인들이었다. 일제가 국민징용령을 발한 것이 1939년 7월. 그 이후 약 2백만 명의 조선인들이 ‘모집’되어 일본 각지로 보내졌다. 초세이 탄광의 조선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1939년부터 42년까지 연인원 1258명의 조선인들이 이곳에서 일했다. 바다 밑 그리고 또 땅 밑의 탄광은 그들에게 작은 지옥이었다.

탄광 내에서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업에는 골라 투입되었고, 탈주를 막기 위해 쳐진 3.6미터의 담장에 둘러싸인 기숙사에서 갇혀 지내던 그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당시 조선인은 주먹밥과 다꾸앙, 소금물로 식사를 떼우고 하루 12시간 노동이 기본이었다. 20시간 이상 일한 날도 있다" 당시 노동 감독관의 말이다. 그들은 하루 2원의 일당을 받았지만 그나마 ‘저축’을 강요당했으므로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그야말로 쥐꼬리였다. 그래도 일본인들은 “한 상자 더 캐고 죽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조선인들을 탄광 속으로 내몰았다.



1942년 2월 3일은 맑은 날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조짐 따위는 하나도 없이 화창하게 열린 하늘이 우베 시 앞바다와 그 푸른빛을 겨루던 날이었다. 그런데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해저에서 솟아올랐다. 해안에서 1km남짓한 바다 밑에서 암반이 무너지면서 해저갱도에 충격이 가해져 물이 스며 들어 갱도가 붕괴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얼마 전부터 탄광에 물이 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작업을 강행했고 심지어 비번이던 조선인들까지도 투입해서 탄을 긁어내고 있었다. 더 많은 석탄을 위해 갱도 위쪽 즉, 해저 쪽을 파고들었고 천정이 약해지면서 바닷물과 흙더미가 동시에 갱도를 덮쳤다.


 일본 당국은 180여명의 탄광 노동자가 그 안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흙더미에 깔려 죽었고 그 중 133명이 조선인이라고 밝혔다. 사고가 나자 탄광측은 갱도로 통하는 탄광 입구를 봉쇄했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인근 마을로 침수될 위협이 있다는 것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입구를 찾았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들 역시 캄캄한 암흑 속 고혼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또 탄광측은 시신을 찾는 작업도 포기하고는 탄광을 폐쇄해 버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초세이 탄광에서 죽어간 이들은 바다 밑 그리고 또 땅 밑에 묻혀 있다. 시신 수습도 이뤄지지 않은 마당에 적절한 보상 따위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133명의 조선인들의 삶과 죽음은 역사 속 갱도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 현장을 지켜봤던 조선인 가운데 하나가 김경봉씨였다. 현재까지 생존해 계시다면 여든 아홉이 되시는데 그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처음 확인한 초세이 탄광의 생존자였다. 우리는 우리 정부가 선 지 60년만에, 초세이 탄광의 조선인을 ‘처음으로’ 찾아냈다. (우라질) 포항 출신이던 그는 별안간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 의해 초세이 탄광으로 끌려갔다. 1942년 2월 3일 오전 9시 반경 열 다섯 시간의 작업 시간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그의 뒤에서 “물비상이 났다”는 소리가 들렸고, 바다 위로 솟아 있던 환기구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고래가 물을 뿜는 것처럼 물기둥이 치솟았다고 했다.



그는 사고 3일 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탄광을 탈출했다. 탈출한 강제징용자들에게는 쌀 한 가마니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잡히면 대개 맞아죽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함께 소금국 먹으며 아리랑 부르던 동료들이 생매장되는 꼴을 보고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는 없었으리라. 그는 효고 현의 조선인 집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일본군에 끌려갔지만 다행히 생존해서 해방을 맞았다. 징용 당시 집단폭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거의 오른팔을 쓰지 못하는 노인은 소리를 잃어버린지도 50년이 넘었다. 6.25때 참전하여 청력을 상실한 것이다. 평생을 문맹으로 지내던 그는 몇 년 전 한글을 익힌 뒤 노트에 자신의 경험을 써내리고 있다고 한다.


1942년 2월 3일을 그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 그는 닫혀 버린 탄광 입구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몇 명이나마 기억하고 있진 않을까. 더 이상 기구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한 한 사람의 삶이 그 노트에서나마 온전히 기록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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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2.4 으뜸 씨알과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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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9년 2월 4일 함석헌 선생 별세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靈),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을 하는 당나귀다."

...


 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서는 산천초목이 떨 듯한 사자후 하나가 튀어나왔다. 글을 쓴 이는 함석헌. 글을 읽으면서 어떤이는 마음 속이 푸르도록 시원했지만 어떤 이들은 그 얼굴이 새파래졌다.


 "전쟁이 지나가면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쌈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 진 것 아닌가? 어떤 승전축하를 할가? 슬피 울어도 부족한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로자는 전쟁에 이기면 상례로 처한다 했건만. 허기는 제이국민병 사건을 만들어내고 졸병의 못 밥 깍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께 바래기가 과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인가?"


 21세기에 이 비슷한 얘기를 누가 한대도 안보의식 없다고 팔뚝질을 당할 말이었다. 그런데 전쟁 끝난지 6년이 채 안된 시점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는 식으로 일갈했으니 무사하다면 그쪽이 더 이상했다. 그는 당연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철창 신세를 진다.


 그는 한국 현대사가 낳은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였다. 그 사상의 핵심은 역사와 생명의 주체로서의 사상, 즉 '씨알사상'이다. '씨알' 은 곧 민(民)의 역동적인 생명력이 구체화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역사라고 주장한 것이다. 일제 때부터 불령선인으로 찍혀 감옥을 드나들었고 "도둑같이 온" (그의 표현) 해방 이후 공산 치하에서는 신의주반공학생시위의 배후로 몰려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고 남으로 내려온 뒤에는 자유당부터 민정당까지 권력 쥔 자들의 눈의 가시였던 그의 생애 속에서 씨알의 발견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 는 말은 오히려 예언같다. 그는 민족지상주의와 국가지상주의의 철저한 반대자였고 당대에 대한 경고는 오늘에까지도 유효하다.
 

그의 사상과 생애를 몇 줄로 담아내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고 그런 무모한 행위는 깨끗이 포기하기로 한다. 그는 걸출한 사상가요 언론인이요 역사 교사이기도 했으나 또한 결점 가진 인간이기도 했고 그래서 날선 공격을 자초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여자 문제가 그것이다. 그를 평생 따른 김용준 교수도 "군사독재가 꾸며낸 이야기라고만은 말하지 않겠다" 했으니 아예 없는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 문제로 함석헌은 엄청난 괴로움을 당했다. 어느날 실성한 사람처럼 김용준 교수의 집을 찾아서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믿어주는 친구 때문에 내가 살아나가지” (김용준 저 "내가 본 함석헌" 중)
 
자신의 일생이 송두리째 매도되고 신비화된 선각자에서 희대의 색한으로 굴러떨어지는 상황, 그러나 함석헌은 일어섰다. “지옥 밑바닥에서 보는 하늘은 유난히 높았다”(김용준, 같은 책)고 하면서 말이다.


 지옥에 빠져 하늘의 높이를 잴 수 있던 사람. 남과 북 모두에 가족을 두었던 분단의 가슴으로 우리는 왜 이렇게 아픈가 아프지 않으려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평생 자신의 뒷전에 섰던 아내가 파킨슨 병에 걸려 드러눕자 진작 아내를 "믿음의 친구"로 함께 하지 못했음을 후회하며 손수 간호에 나섰던 청개구리같은 남편이었고 자식들 대학 교육 하나 제대로 시키지 못한 변변찮은 아버지, 하지만 강제징집당하는 학생들의 뒤에 대고 하염없이 손 흔들며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빼앗아간 정부에 흔들림없이 맞섰던, 씨알 가운데 으뜸 씨알 함석헌 선생이 1989년 2월 4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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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2.5 추락한 봉황새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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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5일 추락한 봉황새 작전

1982년 2월 5일 제주도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2월 6일 보잉 747 등 대형 항공기가 취항할 수 있는 제주 공항 신활주로 건설 준공식에 전두환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 전두환 대통령과 ‘한편’ 이순자 여사가 매일 9시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던 무렵, 대통령의 행차는 상감마마 행차와 맞먹는 대행사였다. 군관민이 총동원된 제주 공항은 눈코뜰새없이 돌아갔다. 그런데 이날 오후 제주도경에 설치된 대통령 경호지휘본부를 발칵 뒤집는 소식 하나가 들어왔다.

...


“대통령 순시 때 외곽 경호를 맡은 공수부대 병력이 탄 C123 수송기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통신도 두절입니다.” 제주 공항은 악천후 속이었다. 아니 출발지인 성남 공항도 그랬다. 눈이 계속 내렸고 성남 서울 공항 통제국은 모든 항공기 이륙을 통제하고 있었고 제 5전술 공수비행단에서 C123으로는 이륙 불가 보고를 두 번씩이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행기는 떴다. 그 와중에 오간 대화는 알 길이 없지만 공수부대 표어가 인용되었을 것은 같다. 이런 식으로 “새꺄 사나이 태어나서 한 번 죽지 두 번 죽니? 잔말 말고 떠.” 작전명 '봉황새'였다.


 한라산에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이 내리고 진눈깨비가 더해지던 날 오후 C123은 사라졌다. 제주 해역에 출동 중이던 군함들과 비행기들이 바다를 뒤졌지만 잔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한라산이었다. 동료 공수부대원들이 출동했다. 비행기 하나 차이로 생사가 엇갈린 이들도 많았다. 산악전에 능숙한 공수부대원들이었지만 겨울 한라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리가 어두웠고 겨울 산은 엄혹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운 수색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얼어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다음 날, 군은 한 대학 등반대로부터 소중한 제보를 받는다. “등반 훈련 중인데 모 지점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어요.”


 마침내 2월 6일 오후 4시경 한라산 해발 1060미터 지점에서 사고기 기체가 발견됐다. 인적 없는 산등성이에 추락, 3등분된 비행기는 바퀴를 하늘로 뻗은 채 뒤집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공수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은 몰사했다. 전두환은 이 소식을 듣고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제주를 떠날 무렵에야 분향소에 들렀고 한 마디를 남긴다. “이번 사건은 조종사 착각으로 일어난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사고 배경과 원인을 밝혀 재발 방지에 주력하라는 판에 박힌 코멘트도 아니었고 대통령이 사고 원인 밝히고 책임 소재 정하고 인명은 재천이라는 운명론까지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졸지에 자식과 가장을 잃은 유가족들은 그 인명들을 아직 하늘에 맡길 수 없었다. 일단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었고, 왜 건장하던 그들이 산산이 부서져 죽어야 했는지를 자세하게 알고 싶은 것도 사람의 도리였다. 언론의 관심은 2월 8일자 석간 동아일보의 단신으로 끝이었고 그 다음은 오로지 ‘군사상 기밀’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하겠다던 군의 약속은 허언이 됐다.


 2007년 7월 오마이뉴스에 보도된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 후 석 달이 지나 위령비 건립 때 제주도를 찾았던 유족들이 수습한 유골들만 해도 세 포대 분량이었다고 한다. 쉬파리와 까마귀들이 모여들어 있던 곳을 들추면 어김없이 썩어가는 시신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뼈를 발견한 한 유족이 그를 갖고 가겠다고 끌어안자 인솔하던 군인은 허공에다 총을 쏜다. “명령이다 손 떼라.” 하지만 이쪽도 이미 흥분이 도를 넘어 있었다. “내가 군인이냐? 맘대로 해라.” 유족과 당국은 그 뼈를 놓고 신경전을 벌인다. 공항에서는 “도지사의 허락 없이는 시신을 운구할 수 없다.”고 퇴짜를 맞았고 배를 탈 수도 없었다. 결국 그 뼈는 제주도에서 화장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뿌려질 수 있었다. 결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군화를 신었지만 뼈가 송곳같이 날카롭게 잘려 나갔던” 유해의 최후였다.

 1982년 2월 7일 정확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하는 군의 모르쇠에 진력이 난 일부 유가족들이 부대 상황실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다. 유리창을 깬 것은 세 살과 돌 된 아이의 엄마였다. 남편의 죽음을 밝힌 무엇이든 찾아야 했던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상황일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가지고 나온 상황일지, 사고 다음 날 아침 8시 45분, 그러니까 사고 기체가 발견되기도 전 박희도 공수특전사령관이 해당 부대 대대장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은 이랬다. “훈련명칭 변경 - 금번 훈련은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니 전 장병에게 주지시키기 바람.” 즉 대통령 경호 작전인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특별 동계 훈련’으로 호칭하겠다는 것이었다. 53명의 대한민국 정예 병사들은 대통령 경호를 위해 악천후를 무릅쓰고 출동한 게 아니라 ‘특별 동계 훈련’을 위해 공군의 반대와 공항의 통제를 무릅쓰고 떠난 것이 된다. 이래 놓고 인명이 재천이라고 하면 그 하늘이 노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래도 인명은 재천인 것 같다. 사고가 난 지도 4반세기가 흘렀고 유족들은 하나 둘 한많은 삶을 마쳐 가는데 25년 동안 그 유가족들에게 한 번 응대조차 않은 전두환은 떵떵거리면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에서도 이들은 “대침투작전 훈련 중”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 전두환이 맞았다. 역시 인명은 재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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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2.6 테니스의 검은 별 아서 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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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6일 테니스의 검은 별 아서


 지금에야 미국 스포츠판에서 흑인들을 갑자기 뺀다면 그날로 문을 닫을 지경이지만 흑인들이 쉽사리 그 판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꼭 산하의 오역에 소개하고픈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은 대놓고 "니그로와 경기를 하다니 제기랄" 소리를 들으며 경기에 나서야 했고 최초의 아이스하키 NHL 리거였던 윌리 오리는 면화 세례를 받으면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뜻은 "면화밭에서 일이나 해라 이 검둥아"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꿋꿋이 이겨냈고 위대한 선수의 반열에 올랐다. 1993년 2월 6일 그런 위대한 스포츠맨 가운데 하나였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아서 애시. 그의 종목은 귀족과 신사의 전유물 같았던 종목, 테니스였다.



그는 1943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한창이던 2차대전 당시의 흑인들은 미 정규군의 전투 병과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껏해야 취사병이나 공병대로 복무해야 했을 정도로 인종차별은 펄펄 살아 움직이는 현실이었다. 더욱이 그의 고향 버지니아는 인종차별이 자심하기로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고장이었다. 심지어 흑인들은 테니스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법까지 있었다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런데 애시는 운이 좋았다. 아버지가 바로 테니스 코트가 있는 공원 관리인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애시는 테니스 라켓을 잡았고 그 소질을 만개해 보일 수 있었다. 테니스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테니스 장학생으로서 1963년 UCLA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는 개가를 올렸고, 흑인 최초로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 미국 국가대표로 선발된다. 나이 스무 살의 검은 테니스 신동은 차근차근 세계 정상을 향해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1968년은 미국의 인종분규와 흑인들의 항쟁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흑인들의 희망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되고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금과 동메달을 딴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와 존 칼로스는 시상대에서 국가가 연주될 때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높이 쳐듦으로써 미국내 인종차별에 무언의 그러나 격렬한 저항을 하던 그 해였다. 바로 그 해에 특히도 흑인들의 범접아 어려웠던 귀족적인 스포츠, 테니스에서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서 애시가 US 오픈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흑인이 인종적으로 테니스를 못하는 열성 인자를 지닌 것이 아니라, 단지 접근이 어려웠을 뿐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애시는 그 우승 한 번으로 입증했다.

미국 흑인들은 애시를 자랑스러워했지만 미국을 휩쓸던 흑인들의 인권 투쟁에 동참하기보다는 묵묵히 테니스 라켓만 휘둘러댔던 애시를 조금은 못마땅해 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비난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애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종 차별에 도전한다. 지구상 최악의 인종 차별 국가로 이름이 높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되는 남아공 오픈 대회에 애시는 참가 신청을 하지만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다. 흑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 끝에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의 코트에 설 수 있었다.
 
“흑인으로서 자존심도 없느냐?”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그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기장에 흑인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강경하게 요구했다. 그의 요구대로 흑인들이 운집한 테니스 코트에서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흑인들은 그의 날렵한 스매싱과 네트 플레이를 보면서 열광한다. 그리고 그에게 "Sipho"라 부르며 열광한다. 그것은 줄루 말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이었다. 이때의 기억 때문일까. 넬슨 만델라는 출옥 후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애시를 꼽았다고 한다.


 애시 최고의 순간은 1975년 테니스의 본고장이라 할 윔블던 코트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순간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시작된 윔블던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한 흑인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후 그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테니스를 그만두지만 그의 진가는 라켓을 내려 놓은 뒤에 더 빛났다. 그는 헌신적인 인권 운동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자리매김했던 것이다. 테니스 선수 생활 동안 꾹꾹 눌렀던 포한을 풀어놓기라도 하듯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1985년 바로 그 해에 남아공 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체포된 것은 그 단면을 극명히 드러낸다.


 그러던 그에게 치명적인 비극이 닥친 것은 1990년이었다. 1983년 심장 이상으로 받은 수술 때 수혈받은 혈액 때문에 AIDS에 감염된 것이다. 그는 감염 사실을 스스로 밝힌 뒤 더 열성적으로 사회 활동에 임했다. AIDS 퇴치를 위한 AIDS 연구소의 이사가 됐으며 연구재단을 설립하여 AIDS를 사회에 올바로 알리는 노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처지의 흑인 스포츠 선수들, 그리고 불우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강연에 열정적으로 나섰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윔블던에서 이겼을 때도, US 오픈에서 우승했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UCLA를 졸업하는 날 할머니에게 졸업가운을 입혀 드렸을 때입니다.” 심지어 그는 운동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충고까지 하고 다녔다. “대체 여러분 중 몇 명이 NBA 선수가 되고 메이저 리그에서 뛸 것 같습니까? 차라리 공부하여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우 어이없지만 현실적인 충고.

죽기 1년 전 그는 미국 정부의 대 아이티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체포됐다. 시들어가는 육체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헌신했던 그는 부르짖었다. “세상이 나를 테니스 선수로만 기억한다면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그가 했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 ‘실패’를 면할 수 있을까.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전혀 예기치 않은, 수혈을 통해 자신의 몸에 스며든 불치의 병마에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누구나 한탄할 법한 때에 그는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불행이 닥쳐온 이 순간 내가 ‘신이시여,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는 것은, 불행보다 여섯 배는 더 많았던 행복의 순간에 ‘왜 저인가요’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출한 테니스 선수, 그보다 더 걸출한 인간이었던 아서 애시가 1993년 2월 6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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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2.7 벌레먹은 거목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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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7일 벌레 먹은 거목의 마지막 날

 

나라는 망했지만 황제는 살아 있던 시절, 아니 황제로 불리지도 못하고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울화 속에 덕수궁에 머물던 고종은 흥미로운 소식을 듣는다. "조석진과 안중식이 열고 있는 서화 미술회에 소년 천재 화공이 있다 합니다." 고종은 이에 자신의 사진을 보내 모사하게 한다. 아무리 망국의 황제라 해도 용안은 용안이라 아직 약관(弱冠)에 이르지 못한 나이의 소년 화가는 식은 땀을 흘리며 모사했다. 소년의 그림은 고종을 감탄시켰고 고종은 그를 창덕궁에 보내 아들 순종의 어진을 그리게 한다.

 

그렇게 그린 순종의 어진은 어떤 사진보다 순종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한다. 이마는 드넓고 깔끔하게 손질된 치솟은 콧수염은 언뜻 위엄 있어 보이나 턱선이 약하고 눈빛이 그리 도드라져보이지 않는다. 이후 고종 황제의 어진까지 그리게 되는 이 소년 (고종의 어진은 소실됐다)은 또한 당대의 세도가들을 묘사하기도 했는데, 여흥 민씨 최대의 탐관오리로 이름 높았으며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와 한일합방 당시 울부짖으면서 저항하는 황후이자 조카로부터 옥새를 빼앗아 갔던 전설의 매국노 윤덕영의 초상화도 거기에 포함된다. 이른바 글자 그대로의 '어용 화가'였던 셈이다. 후일의 그가 산수(山水)와 화조(花鳥) 등 각 부문에 이름을 날렸으되 최고봉의 경지를 구가했던 것은 '인물화'였던 바 그 될성부를 떡잎이 유달리 컸던 셈이다.

 

이후 기미년에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고종 황제가 독살당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젊은 나이에 피가 끓었던지 3.1 운동에 가담해서 옥살이를 치르기도 했던 청년 천재 화가는 이후 다시 그림에 전념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그 그림의 깊이와 폭과 기법과 내공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졌고 두터워지고 다양해졌다. 그는 조선 총독부가 개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 즉 선전(鮮展)의 단골 손님이었으며 16회 선전 때에는 조선인 화가로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되는데, 바로 그 해, 1937년 마흔 다섯 살의 절정에 이른 화가는 그의 이름을 '드높인' 그림 하나를 그린다, 그것이 "금차봉납도"다.

 

화가의 어릴 적 후원자였던 친일파 윤덕영의 처가 회장으로 한때 김활란이었던 아마기 카스란 등이 간사로 참여했던 애국금차회가 금비녀를 빼어 일제의 '성전'(聖戰)을 위한 기념 헌금으로 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일찍이 어용화가로서 그 능력을 천하에 떨쳤던 그의 솜씨는 이 그림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상기된 표정의 부인들과 감동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 미나미 총독 (또는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의 표정은 자못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것을 필두로 그는 그의 능력을 일본군과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성도 조선에선 흔하디흔한 김씨에서 '쓰루야마'(鶴山)로 바꿔 버렸다. 그는 조선 화단의 거목이자 최대의 친일 화가가 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그는 다시 부모가 준 이름을 찾는다. 김은호다. 이당 김은호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로 따돌림을 받았지만 아픔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일생에서 민족을 고민했을 기미년 어간의 그 시간보다도 짧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를 따돌리는 이들이 세를 잃고, 되레 그의 왕년의 동료들이 득세했던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이당 김은호가 조선 최고의 화가로 자리하면서 길러냈던 제자들의 힘이었다. 그는 미술 전문 기자로 유명했던 이규일의 평에 따르면 "인정미 넘치는" 스승이었다. 일제 시대, 자신의 제자의 그림이 일본인 심사위원에 의해 저만치 밀려나자 간절히 청하여 그를 다시 뽑게 했고 아끼던 고려청자까지 주저없이 선물했다는 감동적인(?!) 일화가 그를 뒷받침한다. 그렇게 뽑힌 이가 운보 김기창이라고 한다. 제자들이 목숨을 걸만도 하지 않는가.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열리자마자 그는 추천작가 자격으로 참여했고, 그 뒤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국전의 화풍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전체 화단에도 영향력을 키워갔다.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뿐이 아니라 그는 논개부터 유관순, 심지어 이순신까지 그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인물들의 영정을 '창조'했고, 오늘날의 5만원권에 그려진 신사임당은 이당 김은호의 제자를 자처하는 화가가 (이걸 가족들과 다른 제자들이 인정하지 않아 말썽이 났지만) "스승의 그림을 보완하여" 그린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최고의 화가"였다. 그 생의 지배자가 누구였든지.

 

그의 재주는 분명 탁월했다. 음악의 현제명이 그랬고, 문학의 서정주가 그랬듯 ,또 윤치호나 최남선이 그랬듯 범인이 범점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고, '친일파'라는 세 글자로 매장시켜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부류에 속하는 이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미치도록 아쉬운 것은 그들이 그 재능이 동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전혀 없이 역사가 흘러갔다는 점이다. 이당 김은호의 제자 운보 김기창의 말은 곱씹을수록 부아가 돋는다. " 우리 민족은 남이 잘되는 꼴을 못보는가. 존경하는 스승 김은호와의 정 때문에 친일활동을 했을 뿐. 그리고 그 시대엔 다 그랬다. 친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실력이 없었던 사람이다."

요즘 별안간 "친일파 청산" 얘기가 많다. 나는 여기에 반대한다. 해방된지 60년, 친일파의 손자들이 환갑을 넘은지 한참인 지금 무엇을 어떻게 청산한단 말인가. 가산몰수? 사회주의 혁명이 빠를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청산은 두고두고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친일안한 놈은 다 실력 없던 것들"이라는 말에는 반박을 해야 하고, 그들이 내뱉고 저지른 언행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평가가 있어 주어야 한다. 그들이 남긴 빛을 지울 수는 없되, 그들의 그림자 또한 철저하게 들춰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빛과 그림자 모두를 우리 유산으로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1979년 2월 7일. 평생을 영광스런 조명 밖으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이당 김은호가 죽었다. 그는 거목이었다. 하지만 벌레먹은 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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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님이었다가 경무대포격님이었다가 이번엔 사찰요람이신 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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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방문을 거절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님의 방문을 거절하고,

또 다시 비슷한 행동이 반복될 시 이글루스에 알려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1919.2.8 3.1 보다 멋진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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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9년 2월 8일 3.1보다 멋진 2.8

권투를 보다 보면 메인 이벤트보다 오픈 게임이 더 박진감 넘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역사에서도 그렇다. 굵직한 족적을 남긴 대사건도 분명히 존재하고, 그 딸림처럼 묘사되는 자잘한 사건들이 그 주변에 늘어서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그 작은 사건이 가진 함의가 오히려 야무지게 빛날 때가 있는 것이다. 3.1운동이라는 민족적 항쟁의 서곡처럼 울려 퍼졌던 1919년 2월 8일의 2.8 독립선언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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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차 대전이 끝난 후 유포된 민족자결주의는 엄연히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뜻은 식민지로 전락한 지 10여 년에 울화통을 쌓아가던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미워도 미워도 결국 신학문을 배울 곳은 일본 뿐이었기에 현해탄을 건너와 있던 유학생들은 특히 더했다. 원래 조선은 우리 나라였지 일본이 아니었지 않은가. 언제까지 우리가 일본놈들 하인 노릇을 해야 할 것인가. 1912년 조직된 유학생 학우회는 그야말로 반일 사상의 온상이었으며 조선인 유학생이라면 무조건 가입해야 했고 미가입시 바로 "일본놈 개"라는 호칭이 날아가는 무시무시한(?) 유니온샵이기도 했다.

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의 편집장이었던 최팔용은 일찍이 와세다 대학 동창회에서 이렇게 연설한 바 있었다. "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듣고 있던 조선 유학생들의 가슴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그 연설은 더 이상 앉아서 뭉갤 수 없다는 청년들의 결기를 북돋운 신호탄이면서 무기력의 허공을 가르는 효시와도 같았다.

조선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즉 고종황제가 죽기도 전에!) 동경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을 비롯한 10명을 선출한다.그런데 실행위원 중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북경으로부터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온 이광수와 김철수가 추가되어 11명의 실행위원이 먼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다. 독립선언서의 기초자는 조선이 낳은 3대 천재라는 춘원 이광수 그 사람이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수도 동경답지 않게 눈이 펑펑 내렸다. 조선 유학생들은 이날 2시에 열린다는 학우회 총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구구전승으로 알고 있었고 삼삼오오 행사장인 조선 YMCA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낌새를 챈 일본의 경찰들도 행사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2시. 학우회장 백관수가 개회를 선언했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최팔용이었다. "긴급동의가 있습니다!"를 부르짖으며 단상으로 올라간 최팔용은 모여 있던 조선 청년들의 피를 펄펄 끓게 만드는 선언문을 읽어내린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이미 일본 경찰들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조선 청년들의 결기를 누를 수 없었다. 선언문은 유려했으나 당당했다. 3.1운동 선언문이 명문장이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그 명문을 떠받칠 힘을 찾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랐다.

3,1 선언문에서처럼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하는 어설픈 영탄 대신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 모든 자유행동을 취하면서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뿌릴 것이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화근이 아닐 것인가?"라는 명확한 경고가 있었고,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3.1 독립선언 공약 3장 중)는 어정쩡함 대신 "만일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할 것이다."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하물며 최팔용이 목이 찢어져라 독립선언서를 외치던 장소는 3.1 선언에서처럼 무슨 고급 식당의 음습한 방이 아니라, 일본 동경 한복판 순사들 그득한 강당이었다. 조선 학생들은 귀로는 선언문을 들으며 몸으로는 악 쓰며 달려드는 형사들과 격투를 벌였다. 최팔용이 " (독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고 벽력같이 소리친 순간 10년 동안 참고 참았던 소리가 가슴을 찢고 그날 내린 눈처럼 동경을 뒤덮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학생들은 모두 끌려갔다. 일본에 대한 혈전을 선언한 이 불령선인들에게 일본 검찰은 내란죄를 적용하려 들었다. 90여년 뒤의 남한 검찰도 장난으로 북한 사이트 글을 리트윗한 청년을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들였으니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 불온분자들에게 내란죄는 어쩌면 응당한 죄목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역사는 한 명의 양심과 마주하게 된다. 변호사 후세 다쓰지. 그 후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은인이자 선각자인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와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된단 말인가 당치도 않다." 이 당연하지만 난감했던 논변 앞에 일본 법은 꼬리를 내린다. 그들은 내란죄를 적용하지 못했다. 형은 길지 않았지만 혹독했다. 주동자 중 하나였던 송계백이 젊디 젊은 나이로 옥사했을만큼. 그는 학생모자 안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로 반입하여 2,8독립선언이 예정되어 있음을 국내에 전파했던 사람이었다.

1919년 2월 8일. 눈 내리는 동경에서 조선 독립 만세의 외침은 그렇게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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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9 빈민운동의 대부 영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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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반의 시사 네컷 만화 왈순아지매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술에 만취해서 집에 들어가는 자동차가 검문에 걸린다. 그러자 차에 탄 사람들이 경찰을 "번호판을 보고 얘기하라."고 윽박지른다. 번호판을 본 경찰은 "수고하십니다." 경례를 붙이고 차를 보낸다. 번호판은 8688이었다.

즉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은 그렇게 80년대 내내 대한민국 국민들의 귀에 박힌 굳은 살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그 대회들을 치를 수도 서울의 단장을 위해 살인적인 철거를 단행해 나간다. 상계동 사당동 목동 왕십리..... 요즘에는 용역이 설치지만 그때는 정복 경찰이 철거촌을 습격했었다. 식구들이 모인 밥상에 최루탄이 터지고 잠 자는데 천정이 뜯겨 없어지는 일이 흔했다. 그때 벼랑 끝에 몰린 빈민들이 가장 미더워하고 존경했으며, 실제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이 있었다. 독특한 이름, 그만큼 유별난 강골이었던 빈민의 대부 제정구다.

그의 사람됨을 말해 주는 여러 일화 가운데 하나가 '전두환 개자식 사건'이다. 1986년 그는 하왕십리 철거민들 앞에서 반정부 연설을 했다가 성동경찰서에 연행된다. 그런데 땀을 뻘뻘 흘리는 쪽은 제정구가 아니라 경찰이었다.
"저.... 저기 진술서에 이 말은 좀 뺍시다. '전두환은 개자식이다'라고 했는데..... 거 좀..."
"아니 개자식더러 개자식이라는데 뭐가 문제요. 국민을 개 패듯이 하는 대통령이 개자식이지 그럼 사람 자식이야? 난 못 빼요."
"저 제 선생님 그러지 마시고...."
"난 못 뺀다니까 당신이 고치든가 말든가."
이날 성동경찰서 정보과장은 스타일을 구기는 보고서를 쓴다. 아마 집에 가서 벽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연행되어 오는 차 안에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고… 진술서의 글자 몇 구절을 바꾸자고 설득해도 안 들으며… 세계적으로 큰 상을 수상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여러 모로 처벌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심만 잃게 될 것이므로 훈방 조치했으면 한다." (한겨레신문 2005년 8월 24일자, '가짐 없는 큰 자유 제정구' 중) 성동서 정보과장이 언급한 큰 상이란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막사이사이 상이다. 제정구는 그의 평생 빈민운동 동반자였던 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는데 그 직후에 "전두환 개자식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무려 4수 끝에 대학생이 됐던 그는 서울대 문리대의 1급 데모꾼이 됐다. '문리대가 선 이후 최고'라는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유명했다. "“인민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허구”라면서 교수를 몰아붙이던 카리스마는 오늘날의 국회의원 김부겸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을 휘어잡았다. 유신이 선포된 뒤 수배를 받은 그가 은신 반 야학 활동 반 목적으로 찾아든 곳이 청계천이었다. 그는 끝없이 늘어선 청계천변의 빈민굴에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여기서 사람이 살지?" 충격에 휩싸인 젊음을 또 한 번 강타한 것은 옆집에 혼자 살던 엿장수였다. 엿장수는 결핵 3기 판정을 받았고 의사가 쉬라고 권유하자 이렇게 대답해야 했다. "더 빨리 죽을 수도 있겠습니다. 쉬면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3일안에 굶어죽지 않겠습니까." 이 사연을 들은 제정구는 엿장수의 엿판을 대신 둘러멘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감옥에 다녀온 후, 빈민운동에 대한 그의 신념은 더욱 굳어진다. 그로부터 그의 여생은 빈민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거칠게 치고받고, 의심받고 호통치고 묶어 세우고 배신당하고 실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삶의 연속이었다. 청계천 시절 만난 아내가 아주 잠깐 신발을 구겨 신고 나가자 바로 그 등짝에 신발을 던지며 "아직도 부르조아 근성을 못버렸어!"라고 호통을 쳤던 그는 아내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더욱 엄격했던 보기드문 운동가였다. 그의 빈민운동 동지 정일우 신부의 말이다. "성격상 정치할 사람이 못 돼요. 타협할 줄을 몰라요. 정치는 타협하는 거 아니예요? 그리고 거짓을 도저히 참지 못해요.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났어요. 복음자리 마을 지을 때 그렇게 큰 돈을 만졌는데 십 원도 일 원도 옆으로 돌아간 것이 없어요.....도대체 무슨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이렇게 깨끗한가."


그런데 그는 정치를 시작했다. "나무가 아무리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싶어도 이 세상 어딘가의 흙 위에 설 자리가 없다면 나무는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사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자기 영역, 즉 사람으로서의 제자리를 만들고 누리기 이전에 땅위에 먼저 서야 하고 설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거다."(「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언」중) 는 그의 신념을 투쟁만으로서는 이룰 수 없다 생각했을까. 하지만 "타협을 모르던"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영국까지 날아갔던 김대중이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끝내는 당을 깨고 '새정치 국민회의'를 만든 것이다. 분당 전 김대중을 비판하다가 회의 도중 멱살이 잡히기까지 했던 그는 도저히 이 '정치적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민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 차라리 장렬히 전사하겠다."


그에게 김대중이란 산은 정치인으로서 넘기 힘든 산이었을 뿐더러 오르기 싫은 산이 되었다. 꼬마 민주당의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노무현 등은 김대중의 막하에 들었고, 그는 이부영 등과 함께 한나라당을 택한다.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동료 이부영이 그의 죽음을 두고 "DJ암에 걸려 죽었다."고 독설을 퍼부은 일도 있었으니 그는 끝내 김대중에 대한 감정을 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갑작스런 암으로 겨우 쉰 다섯의 나이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빈민들의 대척점에 서 있던 정당의 국회의원으로 죽었다.

죽기 직전, 그는 일로매진의 투쟁으로 장식된 일생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처연함을 드러내는 내용의 강연을 한다. "저는 편안하게 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암 또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는 ‘상극’의 역사였습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가올 21세기는 내가 살기 위해 네가 먼저 살아야 하는 ‘상생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날카로운 직관의 선각자로서의 예언이었을까 세월과 병마에 지친 한 운동가의 간절한 기대였을까. 21세기가 열렸지만 아직 그 어느 쪽도 충족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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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2.10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 있십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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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1년 2월 10일 탄량골의 외침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 있십니꺼."


1951년 2월의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도 설날이 찾아들었다. 전란 중이었지만 그래도 설은 설이라 차례도 지내고 식구들끼리 모여 막걸리라도 추렴해서 들이키며 명절 분위기를 냈을 것이다. 아이들은 때때옷 아니면 깨끗한 옷이라도 차려입고 동네마다 세배 다니며 '새해 복 마이 받으이소'를 합창했을 것이며, 어른들은 "전쟁이 언제나 끝나려나" 하면서 북쪽 하늘을 쳐다보았으리라. 정초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았을 정월 초사흘, 양력으로 하면 2월 9일 마을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죽음의 사자들이 발맞춰 신원면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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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죽음의 사자는 외국 군대도 아니고 나라의 적 빨치산도 아닌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육군 11사단 13연대 3대대. 지휘관은 사단장 최덕신, 연대장 오익경, 대대장 최동석. 정월 초하루에 이미 신원에 들어왔던 11사단 13연대 병력은 적정을 찾지 못하고 일부 병력을 남긴 채 산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남부군이 신원면에 공격을 가하여 면사무소와 경찰 지서를 불태워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바짝 열받은 연대장 오익경 대령은 3대대장 최동석 중령에게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린다.

명령은 세 가지였다. “공비 근거지가 될 가옥 소각” “식량 확보 및 불가능시 소각” 그리고 또 하나의 건조한 한 마디. “작전 지역 내 인원 전원 사살.” 즉 '견벽청야(堅壁淸野)' 명령이었다. 일찍이 일본군들이 의병 토벌할 때 사용했고 간도 특설대도 즐겨 써먹었던 작전 , 쉽게 말하면 '작전 지역 내 싹쓸이'였다.



 사단장 최덕신은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최동오가 납북된 후 출세길이 막혔다고 생각했고, 군공을 세우리라는 강박감을 가졌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한 그가 휘하 연대장들을 다그치고 연대장에게 조인트를 까인 대대장들은 중대장들을 혼쭐내고 중대장들은 휘하 병력들을 닦달하는 가운데 복수심 불타는 3대대는 독이 잔뜩 오른 채 신원면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2월 9일 덕산리에서 남녀노소를 망라한 80여 명의 민간인을 총살함으로써 3일간의 거창양민학살의 끔찍한 서막이 올랐다.


 1951년 2월 10일. 3대대는 이미 피맛을 본 야수와 같았다. 그들은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들을 소집하여 신원국민학교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노약자들이 다수였던 행렬이 지지부진하자 뒤처지는 마을 주민들을 끌어모아 탄량골이라는 골짜기로 끌려간다. 100여 명의 양민들, 그 가운데에서도 군인들의 "빨리 빨리 움직여"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약자들과 부녀자들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은 골짜기로 몰아넣은 그들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을 겨눈다. "군경 가족 있으면 나와." 동앗줄이라도 잡은 듯이 몇 명이 뛰쳐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빈틈없는 총구로 메워졌다. "사격준비!"


 골짜기에서 울부짖던 100여명 가운데 단 하나가 살아남았다. 임분임이라는 1908년생 아주머니였다. 그녀에 따르면 군인들이 빙 둘러서서 총을 겨눴을 때 어떤 남자가 손을 들고 외쳤다고 한다. “대장님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말 한 마디 하고 죽읍시다.” 죽음을 예감한 이의 절망적인 외침이었으리라. 순간 총살 신호를 내리려던 장교의 손도 멈칫했고 애끓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십니꺼”


 그러나 그 피를 토하는 질문은 사격 신호와도 같았다. 너희 따위 백성은 필요 없다는 듯, 너희 따위는 없어지는 게 나라에 이롭다는 듯 엠원 소총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군경가족이 아니면 다 통비분자라는 어처구니없는 분류에 의해 “전원 총살”의 대상이 된 주민들은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땅에 나뒹굴었고 군인들은 조명탄까지 터뜨려가면서 확인사살을 했다그리고는 나뭇단을 잔뜩 가져다 놓고 몇 시간 전만 해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 주고받으며 웃음 지었을 육신들을 깡그리 불살라 버렸다. 다음날인 2월 11일에는 517명의 생명이 그렇게 사라졌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대한민국 국군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만천하에 공개되지만 이승만은 “부끄러운 치마폭은 외부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사건을 덮고자 했다. 학살의 책임자들 가운데 최덕신은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명령을 내린 연대장 이하 모두를 형집행정지로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진상 조사를 위해 거창을 찾은 국회 조사단에게 총질을 했던 김종원은 되레 경찰 간부로 특채를 하고 사건의 최고 책임자라 할 국방장관 신성모는 주일 공사라는 최고의 땡보직으로 옮겨 버린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았다. 대한민국이었다. 높은 사람들 눈에 백성이란 안 되긴 했지만 작전상 죽어 줘야 할 지푸라기들에 불과했고 수백 명 정도는 적성분자로 몰아 죽여 없애서 본보기로 삼아도 아무 아플 것이 없는 나무토막들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백성 민(民)이란 국호의 일부로만 존재할 뿐 누구의 염두에도 없던 나라의 실상이었다. 1950년 2월 10일 탄량골 어딘가에서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외치다가 총알에 몸을 뚫려버린 사람의 이름은 누구일까. 그 외침이 귀에 쟁쟁한 날, 함석헌 선생의 글이 맘을 울려 옮겨 놓는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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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2.11 아관파천과 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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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96년 2월 11일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두 대의 가마가 은밀하게 경복궁을 빠져나왔다. 궁궐을 호위 (또는 감시)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가마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국왕의 총애를 받는 것으로 익히 알려진 뚱뚱한 엄 상궁이 그 시종과 더불어 가마 두 대를 타고 연속부절로 드나들었던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거기에 신경 쓰기엔 궁궐 밖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다. 한 달 전 선포된 단발령은 조선 팔도를 들썩이고 있었다, 단발령을 주도한 일본과 친일 내각에 분노가 쏠렸고, 또 몇 달 전 그들이 밉든 곱든 이 나라 왕비를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되새겨지면서,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고, 지방 진위대 병력으로 진압이 안 되자 수도 경비를 맡은 친위대까지 지방에 내려보내는 판이었다.


 그런데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빠져나온 가마에는 기절초풍할 사람 두 명이 들어 있었다. 그 둘은 고종과 왕세자였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민비를 비명에 잃은 을미사변 이래 또 다른 암살의 공포는 아버지와 아들을 끈질기게 괴롭혔고, 날로 거침없어져만 가는 일본의 압력도 배겨내기 어려웠다. 이때 왕비 민씨 사후 수세에 몰려 있던 친러파 이범진 이완용 등과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고종의 여성 취향은 좀 독특했던 것 같다.) 엄 상궁이 결탁하여 임금의 경복궁 탈출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엄 상궁은 대원군과 일본이 임금과 세자를 폐하려 한다고 임금 부자를 세뇌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을미사변의 불쾌한 기억을 씻기 위해 새 중전을 뽑고자 하는 친일내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어쨌건 경복궁을 탈출한 왕과 왕세자는 이미 공사관 경비 명목으로 국내에 들어온 120명의 러시아 수병이 지키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한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이를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육지책”으로서 평가하는 의견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구멍 뚫린 장독에 또 다른 구멍 뚫는다고 간장 새는 것이 멈춰지던가. 이이제이는 힘 있는 자가 쓰는 것이지, 고래 싸움 와중에 끼어든 새우가 쓸 방법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떠나서 창피한 일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목숨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서 다른 나라 공사관에 몸을 피하는 판에 그 나라가 어찌 독립국으로 인정받으며, 어찌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그런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무서운 명령을 내린다. 어제까지 자신의 내각이었던 김홍집 내각의 대소신료들을 을미사변의 범죄인들로 규정하며, 무조건 죽이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내각의 군부대신 조희연이 군대를 동원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허사였다. 되레 그는 자신을 체포하려고 돌격해 오는 순검들을 피해 달아났고 일본군 수비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군부대신이 이 지경이니 다른 대신들의 처지는 말할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 수괴라 할 총리대신 김홍집은 “전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셨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였을 것이다.



그가 내각의 수반을 맡은 것은 이번이 4번째였다. 을미사변의 내막을 은폐, 조작하려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박영효 (후일 최고의 친일파가 되는)에 의해 “일본 공사에 굴종하는 줏대없는 소인배”라고 욕을 먹을 정도였던 그는 일본의 뜻대로 이뤄진 개혁을 실시했고, 일본 공사관원들을 정치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그 거친 제국주의 시대의 ‘은자의 왕국’의 관료로서 그만한 경륜을 가진 이도 드물었다. 일찍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소개한 인물이었고, 외국과의 외교 관계와 사건사고의 수습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이였다. 그의 친일 정책에 이를 갈아 마땅한 매천 황현조차 그가 죄를 짓긴 했지만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가 못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제 그는 ‘왜대신’(倭大臣)으로 죽어야 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의연했다. “먼저 전하를 뵙고 말씀을 드린 후 어심을 돌리지 못하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 밖에 없다,”면서 길을 나서는 총리대신을 일본 측이 가로막고 피신을 권하자, 그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보기 힘든 감동적인 호령을 한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도다.” 그리고 그는 그를 죽이라는 어명에 살기를 띤 백성들 앞으로 나아간다.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종 임금이 그 뒤로도 즐겨 어용 용역으로 써먹는 보부상들이었다. “어명이다. 김홍집을 죽여라.”



군중들은 총리대신을 난자하는 것도 모자라 시신의 다리에 새끼줄을 비끄러매고 종로 바닥을 쓸고 다니다가 대역부도 죄인을 써 붙인 뒤 다시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짓이기고 돌로 찍어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아내를 비명에 잃은 남편의 복수로서는 그럴 듯 했을지 모르나, 그 남편이 국왕이었던 것은 그에게나 김홍집에게나 그리고 김홍집을 죽인 백성들에게나 이로운 일이 못되었다. 왕은 무슨 일을 들이밀어도 척척 해 내는 ‘비오는 날의 나막신’을 다시 신어보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렇게 죽음 앞에서 책임감을 발휘하는 조선의 총리대신을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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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창기를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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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창기를 석방하라 

  이번에 국정원에서 체포된 자주민보 대표 이창기는 대학 동기다.   그는 농악대였고 나는 그 옆 동아리에 있었다.  농악대 덕분에 나는 아무리 시끄러워도 달게 잠들 수 있는 내공을 길렀거니와 창기 녀석과도 잦은 안면이 있었다.  사실 친구라고 부르기엔 교감이 그리 진하진 못하였지만 그래도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먹고 싸고 마시고 토했으니 또 어찌 친구가 아니라 하랴.  

솔직히 말하자.  나는 이 친구의 열렬한 팬이었다.  팬이다뿐인가 그가 운영하는 자주민보 사이트를 틈날때마다 들어가 그 기사들을 탐독했으며 그를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소개하기까지 했다.   즐겨찾기까지 등록한바 있었으니 '소지'했고 '탐독'했으며 사이트 페이지뷰를 높이는 열혈 '배포'자이기도 했다.  미국에 나타난 UFO가 북한의 비밀병기이며 북한이  대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는 초자연무기를 개발했다는 그 기발하면서도 진지한 (진짜로!) 자주민보 기사들은 우울한 나에게 웃음을 주었었고 목마른 나날에 청량한 포카리스웨트 한 잔이었다.   

 그런데 창기가 잡혀갔다!  나는 창기의 죄를 알지 못한다.  그가 구 민노당의 이정훈 최기영마냥 제 당의 당원정보를 긁어다 바치는 따위의 간첩 행위를 했다면 그는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정원이 들이민 죄명은 "통신 회합"과 그놈의 "고무 찬양"이다.    일단 무슨 통신과 회합을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하다. 북경의 북한 식당에서   "동무 요즘 남한 형편은 어찌 돌아가오"라고 묻고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 고생이 큽니다."라고 답하면 회합인가.  "동무 다음에 북경 오면 연락하시오 술은 동무가 사고."라고 전화하고 "지난번에 내가 냈잖아요!"라고 답한다면 통신인가.

   간첩질을 한 게 아니라면, 즉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북으로 넘긴 게 아니라면, 통신과 회합이 문제될 게 뭔가. 정히 문제 삼겠다면 코드네임까지 있는 미국 정보원이었던 모기업 회장님부터 족칠 일이다. 

 두번째로 고무 찬양이라고 했다.  또 한 번 솔직히 말하자.  창기는 친북적인 경향성을 지녔다.  그건 자주민보 사이트를 12분만 읽어보면 안다.  10분은 읽다가 2분은 웃다가 하면 된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왜 그가 잡혀가야 할 이유가 되는지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선전하고 싶고, 누가 뭐래도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공론화하는 것이 민주공화국에서 왜 죄가 된다는 말인가.   그 선호의 아둔함을 비판할 수는 있되, 그 선전하는 바를 비웃어 줄 수는 있되, 그들이 펴는 공론에 반박하거나 무시하거나 허리띠를 풀고 웃어 줄 수는 있되 왜 그를 잡아가야 한단 말인가.  

 내 친구 창기는 오랜 동안 나의 비웃음과 경멸과 때로는 정신병자 취급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됨으로써 그는 공화국 시민으로서 마땅히 구출해 내야 할 시민의 한 사람으로 , 함께 어깨 걸고 전경과 욕싸움했던 전우의 1인으로, "나는 네 생각에 반대하지만 네가 그 생각을 얘기할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소중한 인간의 권리로 엄숙하게 솟아오른다.   


나는 김정은을 대가리 피도 안마른 녀석이 애비 잘만나 회장님 소리 듣는 남한의 재벌3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보지만 창기는 그를 외국어에 능통하고 포술의 전문가이며 3대 유훈을 이어갈 장군님으로 볼 자유가 있는 것이다.   

 둘이 만나면 좋이는 말싸움으로, 좀 험악하게는 "이 또라이 새꺄"와 "민족의 반역자"가 오가는 일촉즉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헌법에 명기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를 신고하지 못할 것이고 그가 체포된다면 그 영장 앞에서 일그러진 대한민국 헌법의 초상에 애도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를 석방하라고 외치는 것이 나의 의무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창기를 경멸하고 비웃고 깔보던 이유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을 지닌 (아니 쟁취해 온)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우월감이었는데 그것이 무너진다면 대관절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행위는 처벌받는다는 이 얼치기 관심법같은 국가보안법, 어디까지가 고무고 어디까지가 찬양인지 개념은커녕 윤곽도 없는 엿장수같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까지 된다면 나는 지금껏 그에게 퍼부었던 조소마저 무안해지 않겠는가.  

 창기의 자주민보가 북한을 고무찬양한 이적표현물이라면 그를 깔깔대고 들여다보며 이마를 짚던 나도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다.   친구들에게 얘 아직 왜 이러냐며 아이폰 들이밀던 나도 죄의식을 가져 마땅하다.  하물며 나는 수십 번의 리트윗과 퍼나르기까지 감행했다.  나도 잡혀가야 하지 않은가.  억지 부리지 말라고? 당신은 비웃은 거 아니냐고?  박정근이라는 이름의 시민은 친북트윗을 조롱삼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시라. 


  즉 나도 지금까지의 행위로 잡혀갈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국가보안법은 그 나라의 법이다. 이런 게 법인가? 사람 거죽을 쓰고 이걸 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게 법이라면 가카가 소크라테스다.  촌스러워 못살겠다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나에게 창기를 씹을 자유를 허하라. 아니면 나도 잡아가라 뷁!!!!!

1997.2.12 황장엽과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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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2일 견훤과 황장엽

까마득한 옛날의 어느 날을 가정해 본다. 옛 백제의 영역에 속하지만 후백제의 견훤과 각을 세우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베팅을 했던 나주 지역을 지키던 말단 병사가 있다고 치자. 그는 나주를 몇 번이고 공격해 왔던 후백제군과 싸우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도 넘겼을 것이고, 전쟁 하나는 기막히게 잘하는 후백제 왕 견훤이 또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운 여름 날 이마에 흐른 땀 손으로 훔쳐내며 성 밖을 노려보고 있던 그에게 동료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아 글씨 견훤이 귀순을 해 왔단디?” 이 말을 들은 병사의 반응은 100퍼센트 이랬을 것이다. “뭐가 워쩌? 겨..겨...견훤이 뭘 어쨌다고?” 확신한다. 왜냐면 1997년 2월의 어느 날, 황장엽의 망명 소식을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내 반응이 그랬던 탓이다. “뭐가 어떻게요? 화,....화....황장엽이 뭘 어쨌다고요?”

김일성 대학 총장 14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11년, 노동당 비서 18년, 김일성의 주체 사상의 이론적 근거의 제공자이자 김일성의 철학 개인교사였던 황장엽, 북한에서 핵심적이라는 수식어도 모자라는 고갱이 중의 고갱이 인사 황장엽이 1997년 2월 12일 북경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몸을 맡긴다.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다투던 고려의 세력권 나주에 몸을 의탁했던 견훤과 같이. 망명 소식이 알려졌던 날 기자들과 함께 탔던 엘리베이터는 요란했다. 그 중의 한 코멘트는 이랬다. “이건 김종필이 월북한 거야.” 그때는 흠 그 정도겠군 고개를 끄덕였는데 며칠 뒤 워싱턴 포스트는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일축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마르크스가 소련을 탈출하는 것 또는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을 탈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김정일이 그를 두고 ‘가롯 유다’라고 지칭하며 배신자여 갈테면 가라 외친 적도 있지만 기실 황장엽의 망명이란 그 단어의 도덕적 의미를 배제하고 말할 수 있다면, ‘배신’이었다. 진정코 거대하고 획기적인 ‘배신’이었다. 이미 그때 나이 일흔 넷. 그냥 아랫목만 차지하고 자리 보전하면서 손주들 커 나가는 모습에 만족할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 나이 에 그는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도 있는 선택에 몸을 내맡긴다. 수만 명의 목숨을 바쳐 가며 혈전을 치르고 서로 거의 죽이고 죽을 뻔한 위기를 교환했던 호적수 왕건을 찾을 때의 견훤의 심경이 그랬을까.

“우리 민족을 불행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협의하고 싶은 심정에서 북을 떠나 남의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하고 결심했다.” 는 것은 그가 주 중국 한국 대사관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의 망명 이유였다. 또 “인민이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고 말하면서 북한의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고, ‘가짜’ 주체사상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진짜’ 주체사상을 가르쳐 주겠노라는 포부도 피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망명을 둘러싼 잡다한 코멘트들 가운데 무엇보다 공감이 가는 것은 모스크바 유학 시절 만났던 아내 박승옥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 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신한 나를 가혹하게 저주해 주기 바라오.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그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서 그에 불만을 품고 탈북을 결행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는 정권을 보좌하는 입장에 있었지 실권을 휘두르는 위치가 아니었다. 사상 투쟁이 벌어져 핀치에 몰렸다는 설도 있지만 과거 김일성이 벌이던 종파 투쟁의 희생양들처럼 몰아내기에는 그의 급수가 너무 높았다. 자신이 이룬 모든 업적과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자신의 역사가 담긴 조국까지 버린 데에는 그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와 절망적인 환멸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도 사망하기 전 “내가 통치하는 공화국이 어찌 이렇게 됐단 말이냐?”라고 절규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역시 “내 사랑하는 공화국이 어찌 인민들을 이리 속수무책으로 굶겨 죽인단 말이냐?”라고 땅을 치며 하늘을 우러렀을지도 모른다. 음험한 장남이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막내아들을 죽여 버리고 자신마저 절에 가둬 버렸을 때 견훤이 느꼈던 그 심경처럼.

일본에서 결행하려던 망명은 중국에서야 이뤄졌다. 1997년 2월 12일 황장엽이 북경 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진입한 이후 필리핀을 경유하여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의 시간은 내내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한국 외교관들까지도 골프채를 들고 황장엽을 호위했고 대사는 몇 발짝 대사관을 나서는 데에도 대사관 무관들의 엄중한 경호를 받았다. 북한은 그를 그냥 보낼 수 없었고, 남한은 사상 최대의 대어 귀순자를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견훤이 안전하게 송악에 들어왔듯 황장엽도 서울에 안착했다. 그리고 둘은 똑같이 자신의 필생이 담긴 나라를 부정한다. 견훤은 왕건에게 어서 불효한 신검의 백제를 쳐 달라고 호소했고 황장엽은 “김정일은 수백만 동포를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든 민족반역자인데 어떻게 그와 민족공조를 하겠다는 것인가? 햇볕정책은 적을 벗으로 보고 안심하게 하며 아픔을 잊어버리고 잠들게 하는 마취약이다.” 라며 햇볕정책을 펴는 김대중 정권을 혹독하게 비난한다.

견훤은 그 뜻을 이룬다. 그는 왕건의 선봉이 되어 후삼국 마지막 대전투인 일리천 전투에 참전했고 노구의 그가 나부끼는 깃발 앞에 후백제의 용장들이 다투어 머리를 숙였다. 후백제는 마침내 무너지고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다. 하지만 자신의 생애와 맞바꿔 쌓아올린 나라가 사라지는 모습은 그에게 극도의 스트레스였으리라. 그는 곧 등창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 황장엽은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필이면 그가 망명한 뒤 등장한 10년의 남한 정부는 그와는 다른 대북 정책의 기조를 갖고 있었고, 그의 입지는 더 이상 넓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2010년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일에, 그리고 김씨 가문의 3대째 ‘장군님’이 열병식에 그 모습을 드러낸 날 죽었다. 그리고 그는 서로의 목을 놓고 겨루던 적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국립묘지에, 공식적으로 ‘전향’하지는 않은 그가 달가와했을 것 같지는 않은 태극기가 덮인 채 묻힌다.

분단과 상쟁의 시기에 태어나 한 나라를 창업하고 경영하거나 그 기틀을 닦는 위업을 지녔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잃고 자신이 정성을 들였던 대상에 배신당한 결과 평생의 자신을 부정하고 적수에게 몸을 내맡긴 견훤과 황장엽이 묘하게 엇갈리는 날이다. 1997년 2월 12일 북한측 인사를 감쪽같이 속이고서 황장엽의 승용차가 북경 주재 한국 총영사관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기박한 사연이 태어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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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손문권 PD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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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트루맛쇼>라는 다큐 영화가 나와서 방송에 소개되는 맛집 소개 프로그램의 속살을 들춘 바 있는데,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11년 전 <리얼 코리아> 때 생각이 떠나질 않았었다.  맛집 취재가 주요한 아이템이었으니까.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리얼 코리아>의 맛집 컨셉은 요즘과는 좀 달랐다. 주인의 인생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었으니까. 그러다보니 번듯한 식당보다는 허름하고 바퀴벌레도 종종 발견되는 순대국집, 설렁탕집, 삼겹살집 등이 많이 걸렸고, 정 반대의 의미로 사기꾼으로 몰리기도 했다. "우리 집같이 별볼일 없는 곳이 방송에 나온다니 아무래도 저 PD라는 사람 사기꾼 같다고 생각했지."라는 얘길 직접 듣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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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든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끝내면 간혹 고맙다고 봉투를 내미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다들 젊은 PD들이어서 그랬는지 거기에 대해 좀 결벽증들이 있었다. 촌지 거부 방식도 다양했다. 나는 촬영 끝날 때쯤 카메라 챙긴 뒤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하고선 바깥으로 나가서 방송 일정 알려주고 잽싸게 뒤돌아 뛰는 방식을 택했고, 한 PD는 촬영 후에 먹은 자신의 식사값 (혼자서 촬영했으니 1인분)까지 들이밀 사장님의 기를 질리게 해서 아예 촌지의 출현을 가로막기도 했다. 단, 방송 후 사장님들이 고맙다고 팀원들 데리고 오라는 요청을 되풀이하실 때는 가끔 팀원들이 출동하는 경우는 있었다.

 


 한 PD가 "오늘은 제가 촬영한 곳으로 갑시다. 사장님이 매일 전화가 와서 못견디겠습니다."고 했다. 왜 매일 전화오게 하냐 진작에 가지! 팀원들은 퇴근 후 그곳으로 향하여 포식을 했다. 삼겹살이었던 것 같은데,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은 오늘은 자기가 사는 거니 맘껏 먹으라고 선언하셨다. 실컷 먹은 뒤에 일어서는데 사장님이 나를 살짝 보자신다. 담당 PD도 아닌 나를 왜? 풀어놓은 허리띠도 채우지 않은 채 뒤뚱뒤뚱 갔더니 이 예순 넘은 사장님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기 이 자리에서 제일 연장이신 거 같은데......"

 

그때 팀장님은 참석을 못하셨지만 내 위로 선임이 있었는데 나를 찍은 것은 이 사장님의 사람 보는 눈이 잘못됐을 가능성 99퍼센트, 그리고 내가 좀 늙어 보였을 가능성 1퍼센트다. 그래도 뭐 아니라고 말하기도 뭐하고, 네 네 했더니 사장님 말투가 간절해진다. "저기 여기 찍은 후배 PD 있지요?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내가 촬영 끝나고 너무 고마워서 봉투를 준비를 했었어요....." 음 그랬구나 녀석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 프로그램에 온 지 얼마 안됐는데..... 사장님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고마워서 드리려 했던 거고, 또 당연히 드려야 하는 걸로 알고 계속 받으라고 하고 PD님은 난처해 하면서 사양하고 한참 실랑이를 했습니다. 저는 그러다가 받을 줄 알았어요. 어쩔 줄 몰라하던 이 양반이 갑자기 카메라 가방을 뒤지더니 테이프를 딱 꺼내는 겁니다. 그리고는 제 앞에 놓더군요. 그러면서 '이거 오늘 찍은 테이프인데 이걸로 다시 사시겠다는 겁니까? 아니라면 이제 그만 가게 해 주세요.' 하는데 그 눈빛이 얼마나 절절하던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야 이건 뇌물도 아니지만, 내가 더 이상 권하면 안되겠구나 싶더라구요. 아 정말로 훌륭한 직원입니다." 식당 사장님의 눈빛 또한 절절했다.

 

 아하 그런 수가 있었구나..... 테잎을 꺼내서 딱 놓고 "그 봉투로 이거 다시 사시겠다는 겁니까?" 야 표현도 멋있다. 멋있는 건 배워야지, 이후 나도 가끔 그 퍼포먼스를 본따 했다. 그 PD의 이름은 손문권이었다. SBS 교양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섭렵한 뒤 우리 팀에 합류했던 PD였고 프로그램도 잘 만드는데다가 훤칠한 키에 잘생긴 미남이었던 '완소남'이었다. 드라마 팀으로 건너간 후 괴짜로 소문난 임성한 작가와 이해하기 힘든 결혼을 한 뒤, 어느 모임에선가 "돈에 팔려간 거 아닌가?"하고 깝치는 속 모르는 연예부 기자에게 "말 함부로 하지 마시라."며 공연한 면박을 줘서 분위기에 얼음물을 부었던 것은 <리얼코리아> 때 그의 기억 때문일 터이다. 결혼 선물로 뭘 받았네, 차를 뭘 타고 다니네 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남녀 사이 알 수 없다."고 했지 "걔 그럴 줄 몰랐다."고 얘기하지 않았었다. 참 착했고, 상식적으로 일했고, 성실했던 PD였다.

 


그는 결혼 후 모든 것이 끊겼다. 원래 드라마 팀으로 옮겨간 후 좀 소원해지긴 했지만 핸드폰 등등도 모두 바뀌었고, 연락도 잘 닿지 않았다. 또 구태여 본인이 그렇게 하는데 기를 쓰고 연락할 건 아니라 생각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런 행동은 내가 아는 그와는 달랐다는 것이다. "걔 그럴 줄 몰랐다."는 얘기는 이 지점에서 나왔다. 그렇게 다 끊어버릴 사람이 아닌데....... 이후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만들고 나름 히트도 치고 하면서 잘 살고 있구나 싶었는데 오늘, 또 한 번 사람을 놀래키는 소식으로 사람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죽은 것은 1월 21일. 목을 맸다는데 아내는 다섯 시간 뒤에야 부모를 불렀고, 그 외 가족들에게는 자세한 내막을 알리지도 않은 채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다른 유족의 말로는 그렇다.) 강단 있고 성실하던 한 PD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그 내막에 별다른 일이야 없을 것이라 믿지만, 너무나 상식적이었던, 반듯하기 그지없었던 한 PD가 너무나 황망하게 죽어가고, 그가 함께 했던 사람들의 문상도 받지 못한 채 마지막 길을 떠나야 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힘겹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1994.2.13 전사 시인의 영원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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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4년 2월 13일 전사 시인의 영원한 자유

대학 1학년, 특히 1학기는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지식의 홍수에 휩쓸리는 시기였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이름들, 사건들, 또는 배웠지만 영 내막이 달랐던 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나는 한 시인의 이름을 두고 크게 놀랐다. 아니 이 시인이 이런 시를 썼단 말인가. 교과서에서는 그렇게 서정적이었고 부드러운 느낌의 시인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살벌하고 거부감마저 이는 시를 쓰다니. 궁금증은 풀어야 잠이 오는 건 이제나 저제나 마찬가지였기에 선배를 붙잡고 물었다. "김남조가 이런 사람이었나요. " 그러자 선배는 불쌍하다는 듯 내 얼굴을 흘낏 훑더니 이렇게 폼잡으며 뇌까렸다. "니가 아는 건 김남조고 니가 묻는 건 김남주다."

모음 하나 때문에 망신을 당한 건 어쩔 수 없었으되 그것은 내가 김남주라는 시인을 알게 된 첫 순간이었다. 열심히 배우던 노래들의 작사자 또한 김남조가 아니라 김남주였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했던 건 김남조가 아니라 김남주였다.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고 다리 아프면 서로 기대며 이 길을 함께 가자던 것도 '김남주'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시를 기꺼워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는 에두른 함축보다는 죽창같이 곧고 날카로웠던 탓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였다기보다는 대개 각성한 사람들에게 결기를 북돋우는 구호 같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느낌이니 시비 금지) 그런데 술자리에서 이 말을 했을 때 한 선배가 그런 말을 했다. 너 같으면 네 입을 틀어막히고 산다고 했을 때 가끔씩 그 혀가 풀리면 어떨 거 같냐고. 욕지거리부터 나오지 않겠냐고.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곧 알게 됐다.

당시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집필의 자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쓴 것이 14세기의 감옥이었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창조한 곳도 옥중이었고, 하다못해 신채호가 조선 상고사를 쓴 것도 일제의 감방 안이었는데 20세기 말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수인 김남주는 자신의 시를 달달 외워 면회 온 외부인사나 가족, 출감하는 학생들에게 구술해서 전해주기도 했고, 우유곽을 속 은박지에 못으로 한 자씩 새겨 넣은 시들을 변기 안에 감춰두었다가 몰래 내보내야 했다. 나중에는 그 열정과 신념에 감동받은 교도관이 그 일을 몰래 해 주기도 했다. 그 시들을 묶은 것이 내가 읽은 <나의 칼 나의 피>였고 <조국은 하나다>였다. 함축도 늘어놓은 뒤에 하는 일이고, 절제는 풍성함을 이룬 뒤에야 얻는 미덕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그의 시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 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우유곽 은박지에라도 못으로 끄적이던 시인의 모습을 어찌 지우며,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 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면서 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직립의 인간인 나는“이라는 절규 앞에서 0.7평 독방에서 곡기를 끊으며 저항하던 그 결연함을 어떻게 떨칠 수 있단 말인가.

정부에 대해 비판만 하고 독재적 헌법에 뻥긋만 해도 ‘사형’이 가능하던 긴급조치의 미친 시대에 부잣집 담을 넘어 그 재산을 털어서라도 맞서고자 했던 전사(戰士)의 시는 피 끓는 젊음들의 노래가 되었고 다리 약한 이들의 디딤돌이 되었고 맘 상한 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되었다.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는 부르짖음 앞에서 많은 주먹이 쳐들려졌고 ‘김남주’의 이름은 적어도 80년대의 대학 사회에서는 ‘김남조’에 댈 것이 못되는 높다란 봉우리였다.

그는 1988년이 저물 무렵에야 석방됐다. 9년 3개월만이었다. 그는 영웅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의 젊은이들과 시인들이 그를 소망했고 그는 마다않고 전국을 누비며 자신의 생각과 시를 들려 주었다. 그의 시 낭송은 대한민국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감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출옥 열흘뒤에 맞이한 1989년은 세계적인 변환기였다. 6개월 뒤에는 베이징에서 인민해방군의 손에 인민들이 짓밟히더니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 동구권이 무너지고 그 해 말은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벌집이 된 시체가 장식했고 다음 해에는 동독이 무너졌고, 그 다음 해에는 소련마저 없어졌다. 그리고 그에 발맞춰서 김남주를 원하는 사람들의 성화와 독촉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기에 이미 수인(囚人)이라는 아우라가 사라진 자연인 김남주에 대한 존경의 념도 쉽사리 사그라들었다. 그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박광숙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읽는 사람의 낯을 시뻘겋게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때 우리가 목동 이십 평 임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운동하는 사람들은 김남주가 어떻게 이렇게 잘 살 수 있냐고 그랬어요. 이거 자기 것도 아니고 우리 마누라가 산 거라고 그래도 마찬가지였죠. 통일에 대해 한 마디 하면 주사파는 주사파대로 비판하고, 피디는 피디대로 비판을 하고. 어떤 학생들은 아예 앞에 대놓고 말하더라구요, 실망했다고.” 한 사람을 추켜세우기도 잘하지만, 대개는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기를 더 잘했던, 본받기보다는 재단하기를 좋아하고, 깨닫기보다는 깨달음을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더 많았던 우리의 역사는 김남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김남주는 췌장암에 걸렸다. 그는 “불알을 돌로 깨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부인 박광숙이 제발 비명이라도 지르고 소리라도 내라고 사정을 할 정도로. 암이 마치 그가 목숨 걸고 싸웠던 독재라도 되는 양, 병에 지기 싫어했고 아픔에 항복하기를 거부했던 그가 결국 1994년 2월 13일 오늘 가시밭길로 점철된 그의 인생 경로에 종지부를 찍는다. “오늘 /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라고 한 그의 시 (전사 2)는 마치 예언과도 같았다.

출옥 후 얻은 그의 아들의 이름은 토일(土日)이었다. 성이 김(金)이니 김토일, 즉 ‘금토일’이었다. 노동자들이 월화수목 노동을 한 뒤 금토일은 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되었다.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농담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요즘, 마흔을 넘어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감동으로 지은 이름이 새삼 정겹고 절실하다. 지칠줄 모르고 타올랐던 잉걸불같은 시인 김남주가 1994년 2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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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2.14 "꽃의 여왕"의 피의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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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월 14일 산적 ‘꽃의 여왕’의 발렌타인

2월 14일은 발렌타인 데이다. 서기 269년 결혼이 젊은이들의 용기를 좀먹는다고 여긴 로마 황제 클로디우스는 군인에 대한 결혼 금지령을 내린다. 그러나 인테렘나의 주교 발렌타인은 이를 어기고 사랑하는 남녀의 결혼식을 올려 주었고, 이에 진노한 황제에게 죽음을 당한다. 이후 발렌타인은 연인들을 위한 수호 성인으로 떠받들어지고 오늘에 이른다는 것이 ...발렌타인 데이의 유래라고 한다. 물론 초콜렛 회사들의 상술일지언정, 연인들의 달콤한 속삭임이 교환되고, 회사 여직원에게라도 초콜렛을 받아먹으며 왁자지껄 떠드는 기분 좋은 날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1981년 2월 14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베마이 마을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카스트가 높고 재산도 많은 이들이 모여 살던 이른바 ‘부촌’이었던 베마이 마을에는 뜻밖의 공포가 밀려와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그 마을의 남자들이 자초한 공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22명이라고도 하고 26명이라고도 하는 마을 남자들은 한 여자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입장은 완전히 반대였다. 산적의 일당으로서 마을로 끌려왔던 여자는 토끼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고, 건장한 마을 남자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이 카스트 높은 남자들은 카스트 제도 자체에 들까말까 천민이었던 여자를 윤간했다. 그것도 며칠을 두고. 잔인하고, 끔찍하게, 기억하는 것조차 힘겹도록.

그런데 그 여자가 산적 두목이 되어 그 마을을 습격한 것이다. 카빈총을 빼든 여자의 눈에는 살기가 번득였다. 인도 북부 광야를 휩쓸던 산적 두목으로서 지주들을 습격하여 그 재산을 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 노릇을 하던 “꽃의 여왕” 풀란 데비는 자신을 유린한 남자들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산적들의 총이 불을 뿜었고 지체높은 카스트의 남자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22명이라고도 하고 24명 또는 26명이라고도 하는 지주들이 죽었다.

풀란 데비의 일대기는 참 파란만장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좀 특이했던 것이 인도 여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노동을 꺼리고 싫어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침대 하나와 자건거 하나, 염소 한 마리를 받고 마흔 한 살의 남자에게 그녀를 팔아버렸고, 풀란은 초경도 치르기 전에 ‘남편’의 ‘아내’가 된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학대를 못이겨 도망도 쳐 봤지만 “남편은 신이야, 잘 섬겨야 다음에 좋은 카스트로 태어나.”라고 조언하는 인도에서 갈 곳은 많지 않았다. 끝내 남편과 이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녀는 각지를 헤매다가 산적에게 납치됐고 거기서 그는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자신에게 따스하게 대해 주는 남자를 만났다.

비크람이라는 산적 두목의 애인으로 살면서 그녀가 했던 행동 중의 하나는 전 남편을 찾아가 작심을 하고 때려 준 일이었다. 열한 살 소녀를 물건 몇 개와 염소 한 마리로 사 와서는 짐승같이 하지만 인도에서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다뤘던 남편 역시 게거품을 물고 그녀 앞에서 기어야 했다. 또 그녀는 그녀처럼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팔려가는 소녀들을 구출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산적들 사이에서 알력이 일어나 비크람이 죽고 상층 카스트 출신의 산적이 그 뒤를 이었는데 바로 그가 풀란 데비를 베마이 마을로 끌고 가서 수십 명의 남자들에게 던져 버렸다. 그 뒤 절치부심한 풀란의 복수가 1981년 발렌타인 데이에 벌어진 것이다. 한 인간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짓밟고 팽개쳤던 인간들은 복수의 여신이 주는 강철로 된 초콜렛을 받았다.

그녀는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거대한 산적 집단을 이루며 지주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또 천민들의 희망으로 활동했다. 악에 받친 공권력이 그녀의 조직을 죄어 들어가면서 풀란 데비는 더 큰 희생을 낳기 전 정부와 협상하여 자수할 것을 결심한다. 그녀가 내세운 조건은 여성에 대한 강간 금지, 아동 학대 금지, 동지들의 안전, 그리고 계급제 폐지였다. 그녀의 자수는 거창한 이벤트가 되어 수천 명의 지지자가 운집하여 환호하며 의적의 종말을 기념했다. 그녀가 2월 14일의 학살 등을 이유로 11년 동안의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녀의 투쟁 지역에서는 천민과 여성의 차별을 합리화는 법안 55개가 철폐됐고 마침내 천민 정부가 들어섰다. 출소 후 그녀는 성차별과 천민 탄압에 항거하는 사회운동가로 변신한다.

“소위 강간은 인도의 시골 마을 곳곳에서 지금도 자주 일어난다. 카스트 높은 이들이 한 여자를 강간하려 할 때 그 가족들이 반대한다고 해 보자. 카스트 높은 이들은 그 가족들을 앉혀 놓고 그 앞에서 강간할 것이다. 당신들은 결코 그 굴욕감을 이해할 수 없다.” 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는 자신의 일대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 <밴디트 퀸>에도 불만을 터뜨렸다. “영화 속 나는 매일같이 훌쩍거리는 여성으로, 스스로 지각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여성으로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단순히 강간의 피해자로만 그려져 있지 않은가.” 이후 풀라 데비는 국회의원까지 되어 인도의 지긋지긋한 카스트 제도와 여성 차별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지만 끝내 그녀는 인도 남자와의 악연을 끊지 못한다. 2001년 7월 25일 그녀는 뉴델리에서 복면을 한 남자들에게 총격을 받고 사망했던 것이다. 암살자들은 그녀의 얼굴을 주로 노렸다. 자동소총 총알 가운데 3발이 그녀의 뺨을 관통하여 갈갈이 찢어 놓았으니 그 참상이 오죽했으랴.

남편이 죽으면 그 몸이 화장되는 불길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 오랫 동안 당연했던 나라, “남편은 신이니 잘 섬갸야 다음 세상에 좋은 카스트로 태어난다.”는 설교가 익숙한 나라에서 그 억울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이들에게 어떻게든 응징을 감행했던 ‘여장부’ 풀란 데비는 그녀의 말처럼 슬프게 세상을 떠났다. “내 인생은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아마 그 끝도 그럴 것 같다.” 1981년 2월 14일 짐승같이 자신을 물어뜯던 야수같은 남자들을 응징하면서 그녀는 무슨 말을 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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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2.15 애매한 이름, 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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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15일 조병옥, 그 애매한 이름

1960년 2월의 어느 날, 추어탕집으로 유명한 용금옥 사장 할머니는 문을 일찌감치 닫아 걸었다. 이 집은 정계와 언론계, 문화계 등 각계 인사들이 득시글거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판문점 휴전 회담 중에도 월북했던 북한 대표단 중 하나가 이쪽 기자들에게 틈만 나면 “용금옥은 잘 있소?”라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 식당의 사장이 한 명의 부음을 듣고 문을 닫아 건 것이다. “무슨 야로가 있어. 어떻게 그렇게 강건하던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밤새 그녀는 술 마시며 눈물을 흘렸다. 고인이 된 사람은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가기 전날 용금옥에 들러서 추어탕 두 그릇을 말끔히 비웠었다. 그래서 사장이 “어디가 아파서 미국까지 가시오?”라고 타박을 준 터였다.

그 강건하던 사람은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용금옥 주인 뿐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한탄했다. “이승만 박사 기가 엄청나게 세긴 세구나.”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급서했다. 유력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호남선에서 배를 움켜쥔 채 쓰러져 허무하게 죽어 버리더니, 이번엔 호랑이같이 이 골 저 골을 뛸 것 같던 조병옥이 맥없이 명을 다했으니 이승만의 기가 세다는 말이 나올 밖에.

그는 대통령 후보를 두고 민주당내 파벌 싸움이 극심하던 시기, 경쟁 포기 선언을 함으로써 그 분위기를 일신시켰고 극적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경쟁 후보 장면과는 단 3표차였다. “빈대 잡자고 초가 삼 칸 태울 수 없다.”는 사려 깊은 신조는 지금도 그의 생가 앞에 그를 기념하는 문구로 남아 있거니와, 그는 그의 성명대로 “1인 정치를 지양하고, 쓰러진 민주주의를 소생할 수 있는 정치 추수기가 다가왔을 때” 그를 감당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한몸에 받던 사람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그의 몸에 이상이 있고 미국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는 5월에 예정되어 있던 선거를 3월로 앞당겨 버렸다. 그게 3.15였다.

과거로 돌아가자. 그는 천안 사람이다. 천안이라면 떠오르는 건물은 독립기념관이고, 천안 하면 연상되는 인물이라면 유관순일 것이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동네 오빠 동생으로 자랐다. 조병옥의 나이가 여덟 살 정도는 위였으니 친구로 지내지는 못했겠지만. 그는 미국 유학을 떠나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를 주동한 사람 중에는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원도 끼어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광주학생운동 때 신간회 간부로서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여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3년을 콩밥을 먹는다. 그리고 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산다.

개인적으로 조병옥을 ‘친일파’로 분류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의 친일 연설은 익히 알려져 있으나, 국내에 남아 있던 유명 인사로서 그 정도 행각을 ‘친일’로 규정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다. 적어도 조병옥은 다른 우익 인사들에 비해서는 깨끗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한국 현대사에서 그의 입지를 조명할 수 있는 단어는 ‘친일파’라기보다는 ‘친미파’일 것이다.

조병옥은 유학 이후 “유물론적 변증법 같은 일개 이데올로기로 지상낙원을 일굴 수 있다는 것은 허위이며, 사회진보적 원리의 핵심은 ‘개조’이지 ‘혁명’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해방 이후 좌익과의 대립에서 그는 그 확신을 극단적으로 발휘한다. 후일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일반 민주주의자로서 “빈대 잡겠다고 초가 삼간 태울 수 없다.”는 신중론자는 적어도 해방공간에서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일방 통행 표지판을 강요하고 따르지 않는 ‘빈대’들을 불사르는데 거침이 없는 강경론자였다.

미 군정청 경무부장으로서 좌익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 그가 한 일은 친일 경찰의 대거 활용이었다. 해방 이후 나다니지도 못하고 집에 숨어 있던 일본 경찰 출신들, 북한에서 맞아 죽을 위기에서 겨우 탈출해서 남한으로 기어내려온 악질 고등계 형사들이 조병옥 아래에서 견장을 회복했다. 그들의 횡포와 발호는 잇단 민중 봉기의 원인이 되거니와 그 사실을 따지는 여운형과 김규식에게 조병옥은 이런 식으로 대든다. “여운형 선생. 당신도 고이소 총독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할 거 다 했잖아. 김규식 선생. 당신 아들이 일본 해군 스파이였던 거 나 알고 있다고!”


그는 “진짜 친일파”와 “먹고 살기 위해 친일했던 부류”로 구분했지만 그가 일생의 적이라 할 좌익과의 싸움을 위해 사실상 그 기준을 사장시켰다. 그리고 오른쪽의 극단에서 그 왼쪽에 있는 모든 이를 적으로 돌렸다. 제주 4.3 항쟁 당시 미 군정장관 앞에서 빨치산과의 협상을 진행하는 등 평화적 해결을 도모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의 자식’이라고 매도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전쟁 때 내무부 장관을 맡은 그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대구에 남아 있었다. 대구 시민들은 도청에 가서 조병옥의 차를 확인하고 아직 “조 장관이 대구에 있네. 피난갈 필요가 없다.”고 돌아갔다. (이게 언젠가 그 아들 조순형이 대구에 출마하면서 끌어왔던 부친과 대구와의 인연이다) 최소한 자신의 신념에 책임을 지는 모습은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인민군에 맞서서 백척간두의 방어전을 치르는 한편으로 그의 지휘하의 경찰과 청년단들은 원래 “동방의 모스크바”로 유명했던 대구의 좌익들을 트럭 수백 대에 싣고 경산 코발트 광산의 폐광으로 데리고 가서 모조리 학살한다. “올 때는 트럭 가득, 나갈 때는 빈 트럭”. 그리고 그 유골들은 21세기까지 동굴 속에 묻혀 있었다.

울트라 라이트에 해당했던 조병옥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즉 조병옥이 신봉하던 형식적 민주주의마저도 짓밟은 ‘초 울트라 나이스 캡숑’ 오른쪽 이승만 앞에서는 고개를 흔들 수 밖에 없었다. 국무회의 때 유일하게 이승만 앞에서 다리 꼬고 담배 피우던 강단을 발휘하면서, 그는 야당의 선봉장으로 나선다. 조병옥과 이승만이 맞선 1960년을 돌아보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출발점이 얼마나 울퉁불퉁했는지가 보인다. 해방 공간에서 결국 살아남은 것은 그들처럼 극단적으로 오른쪽에 서 있었던 사람들과 그 적수로서 섣부른 봉기로 제 피를 보거나 ‘국토 완정’을 부르짖은 왼쪽의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 5년은 그 가운데의 영역이 하얗게 지워져 가는 과정이었고, 전쟁은 모든 것을 깡그리 사라지게 했다. 그 싹쓸이의 무대 위에서 조병옥은 이승만의 호적수가 되었고 이승만을 물리쳐 달라는 비원(?)을 안고 죽어갔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1960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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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2.16 백백교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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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2월 16일 백백교 드러나다



 어둠이 완전히 땅으로 내려앉은 시각, 경성 동대문서 형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진채 한 흥분한 사내의 두서없는 말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키는 훤칠하게 크고 맞는 모자가 없어 뵐 정도로 머리도 큰, 그야말로 기골이 장대한 사내는 도무지 못믿을 말만 토해 내고 있었다. 재산 갈취에 엽색행각을 일삼는 사교 교주와 그 집단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기는 지금 교주와 격투를 벌이고 교도들을 피해 경찰서로 온 것이라 했다. 그에 따르면 사교 집단의 이름은 백백교. 교주는 전용해라는 자였다.

...


 "우리 집안을 다 말아먹었습니다. 한약방해서 웬만핰 천석꾼 부럽잖은 집안이었는데 조부님과 아버님이 그에 빠지셔서 재산 뿐 아니라 여동생까지 바쳤소! 내 남은 재산마저 정리하여 들어바치겠다 하니 교주가 만나자고 합디다. "


 멋모르고 나타난 교주는 한맺힌 그의 주먹질에 나가 떨어졌고 교주를 지키던 이들까지도 몽둥이에 머리가 깨져 나갔다. 아직도 거친 숨을 고르지 못하는 사내의 이름은 유곤룡. 백백교 교주 전용해는 이 사람과 처남매부지간(?)이 된 것이 끝장의 시작이었다.

"백백교? 강원도 금화에서 사건 났던 게 뭐였지? 백도교였나? 그 왜 교주의 애첩들을 생매장한 게 10년만에 밝혀졌던.....그 교주의 아들이 전용해였는데. " 백백교라는 이름에 경찰은 긴장했다. 그 사건 이후 백도교는 된서리를 맞았고 사라진 줄로 알았는데 서울 한복판에서 그 은밀한 조직과 엽기적인 행각의 꼬리가 드러난 것이다. " 전원 현장으로 가! 다 잡아들여!"
 

급거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이경득 등 백백교 간부들을 체포했지만 전용해 교주는 자취를 감췄다. 아쉬운 대로 심문에 들어간 일본 경찰은 상상조차 어려운 사이비 종교 잔혹사에 전율했다. 사람 손톱 뽑고 전기로 지지는 것쯤은 일도 아니던 베테랑 형사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였다.

 교주 전용해는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도 더 가볍게 여기는 악마였다. 예배 도중 누군가를 지목하면 그 사람은 쓰러져 죽었다. 물론 이미 그 전에 죽인 뒤 시신망 앉혀 놓은 경우였다.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배신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재산을 다 바치지 않거나 동요의 움직임을 보이는 신도들은 모조리 죽였다. 한 신도가 수상한 거조를 보여 조사해 보니 백백교 고발장이 나온 일이 있었다. 전용해는 그의 12촌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의 살인기계들인 '벽력사'들은 그 업무를 수행했다. 여신도들은 그의 성적 노리개였고 거기서 태어난 자신의 핏줄들도 다 죽였다. 후일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벽력사'들의 범죄는 이렇다.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127명을 죽인 문봉조. 그들은 때려죽인 시체를 거적에 말아 자전거 뒤에 싣고 한강으로 가서 던져 버릴만큼 이미 살인에 둔감해져 있었다.

 일제도 망하고 세상도 끝장난다는 (일제가 망한다는 교리 때문에 신도들은 '보안법'의 적용을 받는다) 말세론으로 얼키설키 짜맞춘 교리, '백백백의의의적적'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하고 팔도 53곳에 정해놓은 백도교의 본소에 가서 살다가 물 심판의 날이 오면 금강산에 있는 피수궁으로 옮겨가고 그 곳에 기다리고 있으면 대원님이 하강하셔서 새 세상이 열린다는 새파란 거짓말에 수천 명이 속았고 그 중에 수백 명이 죽어 없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기사 개명하고 발전했다는 21세기에도 제 자식들에게 마귀가 들렸다는 이유로 구타 끝에 굶겨 죽인 자가 바로 며칠 전에 등장했으니 그 당시에야 오죽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한 두 명도 아닌 수백 명이 신도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던 작은 사회에서 명분도, 이유도 빈약한 살육이 이뤄졌음에도 그것이 몇 년 동안이나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이 사건은 로이터 통신이 선정한 그 해의 10대 뉴스를 장식했다고 한다.


 재판정에서까지 백백백의의의적적적을 읊는 치들도 있었고 그때까지도 그들의 교주에 대해 존대를 잃지 않는 이들도 많았으나 그들 또한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교주에 절대적으로 순종했는지 의아해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회의 없는 믿음이었다. 전용해는 말세론과 실질적인 죽음의 공포를 통해 그들의 회의를 없앴고 회의를 잃은 이들은. 믿음의 길로 일로매진했다. 그 믿음 앞에서 상식과 합리는 물론 인간성마저도 녹아없어졌던 것이다.


 그 도식은 단순히 백백교만의 것은 아니었고 그 대상이 '대원'이라 불린 전용해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때로 그 대상은 이후 숱하게 등장했던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기도 했고 '혁명의 대의'이기도 했고 '반공 방첩'이기도 했으며 '미제 축출'이기도 했고 '자유민주주의'이기도 했다면 과장일까. 비약일까.


 전용해는 후일 경기도 양평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인정했지만 짐승이 뜯어먹은 상황이라 분명히 확인되지는 못했다. 일제 경찰은 그 목을 잘라 보관했다. 이런 범죄적 인간의 머리는 두고두고 연구 대상이리라 믿어서였을까 이 머리는 그후 70년이 넘도록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관돼 있었고 작년에야 화장됐다. 그로써 백백교의 추억은 사라졌다. 그런데 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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