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1914.1.11 호남선 개통

$
0
0
산하의 오역

1914년 1월 11일 호남선의 개통

시작은 프랑스의 휘브릴 사였다. 휘브릴 사는 무슨 욕심이었는지 휘청거리는 나라 조선에 들어와 1896년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그리고는 서울에서 목포까지 내달릴 '경목선' 부설권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이 철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논산평야와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알토란 같은 노선이었고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그런데 경부선을 따낸 일본도 이 노...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경부선을 호남을 거쳐서 깔자는 건의까지 했다니 그 꿍심을 알만하다.


경목선, 즉 오늘날의 호남선만큼은 우리 힘으로 깔아보려는 움직임은 꽤 강력했다. 정부차원에서 '경목선' 부설을 시도하기도 했고 예산 부족으로 민간에게 넘어간 뒤에도 부설권은 한국인들로 이뤄진 '호남철도 주식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 공사에 들어갔지만 만, '국방상 중대한 기능을 하는 철로 건설을 개인에게 불하함은 곤란'하다는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만다. 이제 철도의 완성은 일본의 몫이었다. 일본은 호남선을 시급히 완성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국 최고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쌀이었다.


1914년 1월 11일 3년 8개월 동안 구간 별로 시차를 두고 개통해온 대전과 목포간 철도 노선 가운데 전북 정읍과 광주 송정리를 잇는 9번째 철도구간이 완공됨으로써 ‘호남선’이라는 이름의 완성된 철도가 역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호남선의 경우는 그 출발부터 분위기가 서글펐다. 일단 일본과 만주,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경부선과 경의선에 비해 노골적인 차별이 이뤄진 것이다. 일단 운행 횟수가 적었고, 여객의 수송보다는 쌀 같은 화물 수송이 중심이었기에 시설이 남루했고 기차도 낡은 것이 투입됐다. 결정적으로 경부선, 경의선은 일본인도 이용했지만 호남선은 '조센징투성이'의 기차였다.


“근일 철도에서 하는 일을 보면 아무리 지선이라도 경원선과 호남선에 대하여는 학대가 비상하여 똑같은 기차삯을 내는데 어찌하면 철도길이 다르냐고 이와 같이 차별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자연히 승객의 마음에 일어난다.”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다.

호남선의 서글픈 운명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일제의 쌀 수탈이 가속화되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농민들이 이불짐 싸들고 만주라도 가려고 몸을 싣는 기차였고, 해방된 뒤에도 땅 파고는 굶어죽을 재간 밖에 없던 농민들, 또는 그 아들들이 열차 문간에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서울로 서울로 가던 열차였다.

그런데 1947년 1월 11일 해방된 조선의 언론이 발칵 뒤집힌다. 나흘 전, 그러니까 1월 7일 호남선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그제서야 기사화된 것이다. "7일 밤 목포 발 서울 행 38호 여객 열차가 밤 아홉 시경 대전 못 미쳐 황등과 두계역 사이를 질주 중 미군인의 전용 객차 속에서 조선 여자와 어린애의 비명이 들리므로 수상히 여긴 조선인 여객들은 전무와 이동 경찰에 알리는 동시 그 객차로 달려들었으나 미군이 권총으로 위협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술렁거리는 사이에 그 열차는 대전역에 도착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다른 미군의 협력을 얻어 조선인 경찰과 손님들이 객차 안으로 뛰어들고 보니 24명의 미군이 있는데 그곳 변소에 젊은 조선 여자가 발가벗은 몸뚱이로 되어 있고 또 다른 어린애를 동반한 조선 부인이 이 역시 옷을 칼로 갈래 찢겨 목이 메어 울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분격과 의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는 보도였다.

당시 미군들은 열차 안에 전용칸이 배정되어 있었다. 어느 조선인 여자가 기차에 올라탔을 때 한 미군이 전용차로 안내(유인?)를 했고 멋모르고 들어간 조선인 여자를 스무 명이 넘는 미군들이 윤간을 해 버린 것이다. 권총을 든 미군 앞에서 조선인 열차 경찰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보도 통제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1월 11일 장안을 뒤집어 버린 일대 사건으로 터져나온 이 사건으로 군정청장 하지 중장이 나서서 "사형같은 엄벌에 처하겠노라" 했지만 며칠 뒤 이 사건은 언론 지상에서 사라졌다. 

 아이 앞에서 칼로 옷이 갈갈이 찢긴 채 강간당했던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나주역 쯤에서 올라타고 남편 찾아 서울 가던 길이었을까, 간만에 친정에 왔다가 쌀말이나 얻어 몸에 두르고 콧노래 부르며 올라탄 주부였을까.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녀는 호남선 레일 위에 굽이굽이 서린 슬픔의 하나로 남는다.

"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 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고 김민기가 노래한 서울길도 필시 호남선을 타고 가는 길이었을 것이고,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슬픈 이별을 남기고 떠나가는 대전발 0시 50분은 목포행이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외치며 이승만에 진저리치던 사람들의 희망을 지녔던 신익희가 호남선 위에서 쓰러졌고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는 열혈팬들은 신날 때는 "남행열차"를, 우울할 때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면서 기차 한 칸씩을 빼곡이 메우며 잠실벌과 광주를 왕복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 철도만큼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실어냈던 철도가 있을까.

해방 당시 인구의 1/3 내지 절반 가까이 타지로 실어낸 철도이지만, 이 철도가 복선화, 그러니까 일제가 3년만에 후다닥 해치운 호남선 레일 옆에 레일 하나 더 까는데 36년의 세월이 걸렸다. 호남선 복선화가 완성된 것은 2003년 12월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구성진 노래 한 자락이 목구멍에 걸린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나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인가 비 나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tag :

1923.1.12 경성을 뒤흔든 열흘

$
0
0
산하의 오역

1923년 1월 12일 경성을 뒤흔든 10일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날카로운 눈매에 콧수염을 단정하게 기른 한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일시에 숙연해졌다. 비장한 한 마디를 남긴 사람의 이름은 김상옥. 그가 말한 '거사'는 상상을 절하는 것이었다. 국내로 잠입하여 사...이토 총독을 죽이겠다는 것. 그를 위해 마련된 권총 4정과 실탄 800발과 폭탄이 담긴 나무 상자를 매만지던 그의 머리 속에는 잡다한 추억들이 스쳐갔다.



구한말 군인이던 아버지, 말발굽 제조공으로 가난과 싸워야 했던 어린 시절, 우연히 나갔던 교회에서 받았던 감화, 교회 부설 야학에서 호롱불과 씨름하며 읽었던 책들, 약장수로 돌면서 눈에 담았던 조선 팔도의 풍경들, 1913년 동료들과 함께 조직했던 '대한광복회'의 기억, 그리고 착하기만 했던 아내와 남매. 철물점 주인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의 인생을 뒤바꾼 것은 역시 기미년의 3,1 운동이었다. 일본 경찰이 한 여학생에게 칼을 내리치려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날려 경찰을 때려누일 만큼 대담했던 그는 비장한 봉기와 참담한 진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버린다.
상해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글머리의 각오를 남기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종로경찰서는 의열단 이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원수의 소굴이었다. 숱하게 많은 이들이 그곳 취조실에서 몸이 부서졌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일본 정예 경찰력이 집결해 있던 일종의 심장부였다. 그런데 1923년 1월 12일 밤 8시 종로경찰서에서 일이 벌어진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 원래 김상옥 일행은 종로경찰서 앞을 사이토 총독이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김상옥의 동료가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일이 틀어지자 김상옥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폭탄 성능도 시험할 겸 원한에 사무친 종로서 경무계 창문에 대고 폭탄을 던져 버린 것이었다. 일찍이 칼 앞에 맨몸으로 뛰어들었던 김상옥, 귀국하면서 세관 보초를 때려누이고 유유히 압록강 남쪽을 밟았던 간 큰 사내 김상옥은 한 치의 당황함도 없이 경성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후암동의 매부의 집에 숨었다. 서울역 근처에 은신했다가 서울역에 행차하는 사이토 총독을 때려잡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집에 기거하던 여자의 오빠가 하필이면 종로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끄나풀의 밀고로 종로경찰서 형사대가 출동했다. 그 선봉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 다무라였다. 14명의 경찰이 집을 에워싼 상황에서 김상옥은 놀라운 사격 실력을 발휘하면서 현장을 빠져나간다. 유도 사범 다무라는 유도 실력을 발휘할 새도 없이 총 맞은 귀신이 됐고 나머지 경찰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바야흐로 경성은 발칵 뒤집혔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터지더니 용의자를 잡으러 간 종로경찰서의 유도 사범이 죽고 경부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고도 범인은 바람같이 사라지다니......경성 내 전 경찰력이 눈을 까뒤집은 가운데 김상옥은 또 한 번 대담함을 과시했다. 남산을 타고 도망가서는 오늘날 금호동에 있던 한 절에 잠입, 가사와 장삼을 빌려 입고 서울 시내로 재진입한 것이다.


사람이 운이 좋은 것도 한 두 번이지, 그렇게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으면 제 집 드나들 듯 하던 중국쯤으로 도망갔어도 좋았으리라. 하지만 김상옥의 발걸음은 무조건 서울 도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 가까운 곳, 여하간에 그를 잡을 수 있는 곳. 그가 스며든 것은 오늘날의 종로구 효제동이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사냥개들은 결국 김상옥의 냄새를 맡았다. 1월 22일 김상옥을 확인한 일본 경찰은 경기도 경찰부장 지휘하에 무려 천 여명의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일대를 에워싼다. 김상옥 한 명을 잡기 위해 말이다. 그로부터 장장 3시간 35분 동안 김상옥은 쌍권총을 들고 인근의 지붕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1천대 1의 총격전을 벌인다. 지레 겁먹지도 않았고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았다. 몸에 열 한 발의 총알을 맞으면서도 그는 끝까지 침착했다. 진두에서 지휘하던 서대문 경찰서 경부 구리다가 그 희생양이 됐고,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이 사상했다. 이윽고 마지막 순간 한 발 남은 총탄으로 그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923년 1월 12일부터 1월 22일까지 경성을 뒤흔든 열흘의 주인공 김상옥은 그렇게 장렬하게 죽어갔다. 온몸이 전부 간으로 이루어진 것 같던 대담한 남자, 유난히 찌질한 남자가 많았던 우리 역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쾌남아 김상옥이 온 조선을 놀라게 했던 날들의 시작이 1923년 1월 12일이었다.

1년 뒤 한식날을 전후하여 어느 동아일보 기자가 김상옥의 무덤을 찾았다. 그 무덤에는 망자의 주소가 중국 상해로 적혀 있었다. 평소에 그는 죽어서도 혼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것이니 행여 죽으면 주소를 중국 상해라 써 줄 것을 원했던 것이다.


기자 앞에서 어머니는 이렇게 통곡했다고 한다. “너무 잘나서 그랬는지 못나서 그랬는지 그 일(독립운동)로만 상성을 하다가 그만 그 지경이 되었습니다. 죽던 해에도 몇 해 만에 집이라고 와서 제 집에를 들어앉지도 못하고 거리로만 다니다가 죽었습니다. 밥 한그릇 국 한그릇을 못해 먹이고 그렇게 죽은 생각을 하면….” 그러면서 주저앉아 울었다고 한다. "그냥 거기에 있으면 생이별이나 할 것을 왜 와서 영 이별이 되었느냐."

일본 경찰 천 명 앞에서도 거침이 없던 김상옥도 그 통곡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으리라. 말도 못하는 가난에 어린 시절 내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저승을 찾은 아들에게도 미안함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홀연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김상옥의 어머니의 통곡 앞에서, 그리고 김상옥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을까. 대학로에 있는 김상옥 동상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tag :

1964.1.13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친 대법원장

$
0
0
1964년 1월 13일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 가인 김병로의 기일에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물으면 백이면 백 이승만이라 답할 것이다.  하지만 초대 대법원장의 이름을 물었을 때 정확히 답할 이는 반도 안 될 거라 본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우리 모두 "선거로 왕을 뽑는"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던가. 상식 삼아 알아 두자. 우리 나라 초대 대법원장은 가인 김병로라는 분이다.


존칭 생략하고, 김병로는 나라가 연일 기울어가던 1887년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가 빨랐던 목포에 가서 신학문에 전념하기도 했던 그는 을사조약을 만나 크게 분노하여 최익현의 의병에 동참, 일본 기관 공격에 앞장선 열혈 청년이기도 했다.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늦깎이 유학 (당시로서는)을 떠났고 스물 여덟에 메이지 대학 등에서 법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지만 대한제국은 이미 지구상에 없는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일제 치하 '시국 사건 담당' 변호사로서 맹활약을 펼쳤던, 요즘으로 치면 '열혈 인권 변호사'쯤 될 유명한 3인방이 있었는데 그 셋은 바로 이인, 허헌, 그리고 김병로였다. 그들 '항일 트리오'들은 의열단 김상옥 의사 사건에 처음으로 공동 대응한 이후 일제 시대 치안유지법 관련이나 기타 '불령선인'들이 연루된 굵직한 사건들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렸다. 6.10 만세, 신간회, 안창호 등의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사건에 이르기까지 좌와 우가 없는 '닥치고 변호'였다고나 할까.


특히 김병로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소작쟁의나 백정들의 문제, 원산총파업 등 인간으로서, 노동자, 농민으로서의 기본권을 박탈당한 이들의 문제였다. 전라도 서남해 바닷가의 섬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부터 개마고원 자락의 함경남도 고원의 농민들의 투쟁에 이르기까지 김병로는 팔도가 좁다 하고 돌아다녔고 1929년 1월 일어난 원산 총파업 때에도 현장으로 출동하여 노동자들을 도왔다. 그래서일까 그의 호는 거리의 사람, 가인(街人)이었다. 충청도 옥구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재판에서 김병로는 다음과 같이 열변을 토한다.


"조선 민중에 관한 형사재판을 보면 태반이 정치범이고 사상범이니, 이는 근본적으로 덕으로 다스리지 않고, 먼저 경찰이 폭압하고 다음에 형사재판에 부쳐 해결하고자 하니, 뒤집어 생각하면 민중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경찰이다! 수백 명의 농민들이 장재성(소작쟁의 지도자)를 주재소에서 데려 왔는데 그 중에 몇 십 명에게만 죄를 묻는다니 무슨 제비라도 뽑아서 죄를 주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기나긴 일제 시대가 가고 해방이 왔다. 하지만 김병로의 무게는 해방 전과 후가 달라지지 않는다.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헌법의 가치를 수시로 짓밟았던 행정부 수반 이승만에 견결하게 맞섰으며 사법적 정의를 통해 행정부의 오만과 횡포를 견제했던 것이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이승만이 국회의원들을 버스째 납치한 뒤 개헌을 통과시켰던)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은 그 허다한 일례의 하나일 뿐이었다. 연이은 법원의 무죄 판결에 약이 바싹 오른 이승만이 볼멘소리를 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라"고 맞받은 에피소드는 가인의 위상을 말해주는 한 단면일 뿐이었다.



좌우가 격돌하던 해방 정국에서 그는 우익 편에 섰고,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이 됐다. 전쟁이 터졌을 때 부인 등 가족을 채 챙기지도 못하고 피난을 가야 했는데 인공 치하에서 그 부인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이 열 셋에 장가들어 반세기를 함께 한 아내가 빨갱이들의 손에 죽은 것이다. 즉 한때 좌익 사상범들의 변호사였을망정 김병로는 좌익에 대한 유감이 누구에 비해서든 적을 사람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발악적 만행을 방임하여 시일을 지연한다면, 시기의 장단은 있을망정 우리 인류는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라고 한 것도 김병로였다. 그런데 그러하던 그가 초지일관 폐지하라고 외친 법이 있었다. 국가보안법이었다. 



"특수한 법률로 국가보안법 혹은 비상조치법을 국회에서 임시로 제정하신 줄 안다. 지금 와서는 그러한 것을 다 없애고 이 형법만 가지고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 또는 장래를 전망하면서 능히 우리 형벌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고려를 해 보았다. 지금 국가보안법이 제일 중요한 대상인데, 이 형법과 대조해 검토해 볼 때 형벌에 있어서 다소 경중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나,이 형법만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즉 형법으로도 충분한데 왜 특수한 법률을 차고 앉아 있겠느냐는 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아내를 잃은 대법원장이,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3년 4월에 한 발언이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대법원장의 법 정신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구현하기는커녕, 친북 사이트의 트윗을  '리트윗'하여 그를 '반포'한 혐의로 (무슨 훈민정음 반포도 아니고!) 네티즌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원래 그 네티즌의 목적은 고무찬양은커녕 친북 사이트 비꼬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정성스레 제시한 압수수색영장 내용을 읽어내려가다가 나는 폭소했다. "박정근이 사용하는 트위터라는 SNS서비스는 4명만 팔로해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력한 선동매체도구이다. 7월 현재 박정근의 팔로워는 2000여명에 육박한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해 줘야 하며, 어떻게 대한민국 공권력의 수준이라고 믿어 줘야 한단 말인가.  아멘. 인샬라. 아미타불.


1964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나신 김병로 대법원장님께서 당신의 기일에 펼쳐지는 이 코미디를 보고 뭐라고 하실지 궁금하다. 왜 전쟁 당시의 반공주의자는 그리도 세련되었는데 21세기의 공안검사와 영장 내린 판사는 이리도 먹통에 꼴통들로 점철되었는가. 필시 고인은 보이지도 않는 후배 법조인들에게 이렇게 일갈하셨을 것이다. "자네들 같은 법조인들 때문에 죄인이 생겨나는 거네. 자네는 왜정 때 태어났어야 했어."



tag :

옛날의 애절양 요즘의 애살우

$
0
0

  

소를 굶겨죽인 농가에 동물 학대로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말을 듣고 문득 '애절양'이 떠올랐다. 갓난아이에게 군포가 부과되자 분을 이기지 못해 자기 생식기를 잘랐다는 농부의 이야기를 듣고 정약용이 쓴 시.....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길게 우는 소리.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舅喪已縞兒未澡(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갓난아인 배냇물 도안말랐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愬虎守閽(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호랑이같고,
里正咆哮牛去早(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건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선馬분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    부자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粒米寸帛無所損(립미촌백무소손) 이네들 한톨 쌀 한치 베 내다바치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客窓重誦鳲鳩篇(객창중송시구편)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읇노라.


요즘 축산농가에서는 '애살우'라는 시가 나올 법 도 하다.


전라도 순창 물맑은 골 송아지 우는 소리. 
힘센 소에 밀려 배 곯고 울부짖다
주머니같은 눈물 맺히네
가물에 배곯아 정든 소 때려잡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주인 멀쩡한 소 굶어죽었단 소리 들어본 적 없네

소값이 개값된 건 벌써 지났고
사료값은 하늘 위에 올라섰는데
값싸고 질좋은 소는 물 건너서 들어온다네.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호랑이같고,
동물학대한다 으르렁대며 고발한다 눈 부라린다.
.
쉰일곱 농민이 입에 칼 물고 여물통 비우니 소 배곯는 울음 외양간 메우고
스스로 부르짖길, "소 키운 죄로구나!".  
자식 대학 보내느라 우시장에 소를 넘겨도
막걸리 세 됫박에  열 두번도 더 돌아보는데
새끼같은 소 굶겨죽이는 가슴 속 남아날 것 무엇이리

반찬수 줄일지언정  소꼴은 풍성했으니
그것이 하영 소 키우는 자의 기쁨. 
그 기쁨이 커질수록 어깨가 바스라지고
못하겠다 고개 저으니 손가락질 싸움터 화살과 같고. 
환갑 안된 노인 주름이 10년 가물 논바닥보다 깊도다

"평균 수입 3억 7천만원짜리들이 손해를 보상하라 한다." 
8억 버는 부잣집 그 늠름한 위세에다  
빚 뿐인 살림 얹으면 그 평균 나오려마.    
살아생전 죄질일랑 열심으로 소 거둔 것이 다인데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읇노라.




1987.1.14 박종철의 죽음, 그리고 사람들

$
0
0
산하의 오역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그리고 사람들

순하디 순하고 착하디 착한, 그래서 용감하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차고 넘쳤던 한 대학생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름은 박종철. 그는 짐승이라는 표현이 과히 모자라지 않는 경찰들에게 물고문을 당한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무슨 사건의 범인도 아니었고 하다못해 용의자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참고인'이었다. 그런 젊은이를 고문을 해서 생똥을 지리게 하는 고통 끝에 세상을 등지게 한 경찰들에게 '짐승'이라는 표현을 부치는 것은 그다지 무리한 일이 아니리라.


그 해 오늘 나는 누군가 꽁꽁 숨기려 했던 그의 죽음의 머리카락이 세상에 삐져나왔던 기사를 보았다. 우리 집의 구독 신문이 중앙일보였던 것이다. 그 제목까지도 선연하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 쇼크사라는 단어에 따옴표가 쳐져 있던 게 특이했었다. 왜 따옴표를 쳤을까. 보도지침이 종횡으로 난무하던 시절 그 강조 따옴표는 마치 쇼크사란다 글쎄~~~ 하는 비아냥처럼 들렸던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침 밥상에서 신문 기사를 읽던 아버지도 비슷하셨나보다. "살다 살다 쇼크사라는 소리는 또 처음 들어 보네." 박종철의 이름은 그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그 며칠 후 한 줌 재가 되어 "언 강 바다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간" 박종철이. 87년 1월 14일.

그의 삶과 죽음은 한겨레 신문에서 그 아버지의 육성으로 복구되고 있고, 여러 사람들에 의해 기념되고 있으므로 따로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되어 내 주위에서 보고, 내 귀에 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해 보자. 그 첫 마디이자 첫 사람. "탁 치니 억"의 강민창.


그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박종철 이전부터 어깨에 무지막지하게 큰 무궁화 네 개를 달고 허구헌날 방송에 출연해서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을 무표정한 얼굴과 기계음같은 목소리로 되풀이 읊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때에는 '치한(恥漢 )본부장"이라는 오명을 쓰고서도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다고 읊던 사람이고, 10월 28일 건대항쟁 때에는 하루에 무려 1300명이 넘는 대학생을 일시에 구속시키는 일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아침 만원버스에서 라디오 뉴스에서 그 강민창의 "탁 치니 억"을 들으며 등교를 한 날, 첫 시간이 국어였다. 국어 선생님은 성큼성큼 들어오시자마자 갑자기 출석부를 교탁에 있는 힘껏 내리쳐서 엄청난 소리를 냈다. 평소에 난폭한(?) 선생님이 아니시기에 와 저카지? 기겁을 하고 쥐죽은 듯 조용했는데 선생님이 피식 웃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탁 쳤는데 와 억 하고 안죽노."

강민창은 추후 구속됐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믿은 것이냐고. 그래도 믿었다고 한다면 장유유서 경로사상 따위 무시하고 뺨을 때려 주고 싶다. 이 뺨은 당신의 어깨에 달렸던 왕별 무궁화가 때리는 것이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당신의 제복이 부끄러워 내게 부탁한 것이라고 말이다.


박종철의 죽음이 발원지가 되었던 87년 6월이라는 장강의 물결은 나에게는 매우 괴로운 기간이다. 툭하면 교통이 마비되고 대중교통이 끊기는 통에 꽤 먼 거리를 하영 걸어서 귀가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 평생 가장 빨리 달렸던 기억 중의 하나는 최루탄 가스가 너무 숨이 막혀서 경찰에게 "이건 좀 심한 거 아잉교"라고 불평한 직후다. 쉬고 있던 너덧 명의 전경이 "저 새끼 잡아."라고 일어섰고 나는 미친 듯이 도망갔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친구들 왈 "무협지에 나오는 경공"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서면 근처의 한 골목, 이른바 '백골단'이 그 앞에 버티고 서서 학생 하나를 짓밟으면서 뭔가를 외치고 있었다.

"놔 이 개새끼야 빨리 안 놔...."

유달리 사랑의 매(?)를 잘 들었던 선생님들 탓에 어지간한 폭력씬은 대수롭지 않은 처지였던 내가 기가 질릴만큼 그 구타는 끔찍했다. 사색이 되어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내 눈에 학생이 끌어안고 있던 물건이 포착되었다. 눈동자에 촛점이 나가고 입에서 피거품이 나올 지경으로 두들겨 맞으면서도 꽉 쥐고 놓지 않고 있던 것은 박종철 영정의 초상화 액자였다. 백골단은 빼앗으려고는 들지 않고 "내놓으라"고 소리치며 학생을 폭행했다. 아마도 항복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장장 15분 넘는 폭행 끝에 백골단은 액자를 손에 넣고 박살을 냈다.


박종철은 누군가를 잡아들이기 위한 참고인일 뿐이라고 했었다. 경찰들이 박종철로부터 뽑아내려 했고, 박종철이 목숨으로 그를 지키려 했던 그 누군가가 있었다. 박종운. 그는 한나라당의 지구당 위원장과 '경기도 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한나라당의 간판 아래 들었다고 하여 박종철을 배신했다고 지레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박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람이라면 좀 다른 삶을 살아도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내가 그의 인생을 한 낱도 모르는데 시시비비를 가릴 의사는 없다. 하지만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적잖이 섭섭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돈으로 투표함으로써, 누가 소비자인 우리에게 더 봉사를 잘하는가, 또 더 만족스럽고 품질 좋은 서비스를 받으려면 누가 생산하는 것이 좋은가를 결정하는 자율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민주주의 체제다. 맛없는 음식점에 가지 않으면 결국엔 그 음식점이 문을 닫게 되듯이, 휴대폰을 우리가 사주기 때문에 이건희가 부자가 되듯이, 시장경제는 정성이 부족한 자는 외면하고 충성심이 투철한 자에게 보상을 내릴 뿐이다. 또 부를 창출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들에게 자선을 베풀 수 있는 체제다. 이보다 더 ‘인간 존중적인’ 제도는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가장 잘 돌아가던 때는 다름아닌 전두환 때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른바 삼저호황이었고 정권 눈 밖에만 나지 않으면 기업들이 땅 짚고 헤엄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젊은 날의 박종운이 그리고 박종철이 분노했던 것은 그 경제 호황을 위해 백짓장같은 얼굴로 세계 최장시간 노동을 감당하고 노조 결성 하나 하자고 일어섰다가 깨지고 짓밟히는 '천민 자본주의'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 '자본주의'는 잘못된 자본주의였으며, 그래서 내가 싸운 것 아니냐고 반박한다면, 그는 과연 지금의 우리 사회가 "정성이 부족한 자는 외면하고 충성심이 투철한 자에게 보상을 내리는" 사회가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물 속에서 서서히 심장이 멎어 가면서도 입을 다물던 후배 박종철 앞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다고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최소한 굳이 그 이름을 굳이 운위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선배의 '도바리'를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긁어 쥐어 주던 마음 착한 박종철의 이름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는 들먹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장 경제를 지키고 북한을 민주화시키는 것이 종철이의 뜻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일이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은 변한다. 박종철이라는 이름으로 하여 내가 접하고 만났던 사람들도 다르지 않다.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쳐지는 폭력 앞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놓치지 않겠다고 빼앗기지 않을 것은 빼앗기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 대학생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그에게 그 사진은 왕년 노래 가사 모냥 "가슴 동여맨 영혼"이었으리라.


박종철이 죽은 직후 열린 서울대 추모 집회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학생들이 침묵시위를 벌였을 때, 영정을 들었던 학생 오현규는 용감하게도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그에게도 그 영정은 내가 거리에서 마주했던 가련한 대학생의 그것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지금 그는 부산에서 한나라당 구의원을 하고 있다. 물론 그 자체로 그를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박종운처럼은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아가 그나 박종운이나 더 나이를 먹었을 때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의 강민창처럼 터무니없이 망가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박종철을 위해서.


누가 변하든, 변하지 않든 두 가지는 기억하고 살아가야겠다. 미친 경찰의 발길질이든 살랑거리는 유혹의 손길이든 굴하지 않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수배당하는 선배에게 누나가 정성들여 짜 준 목도리를 걸쳐 주고, 자신의 빈약한 지갑을 털 줄 알았던 한 청년의 나눔의 마음. 생전에 고인은 동료들에게 "종운이 형 얼굴에 먹칠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제 종철이 형 얼굴에 먹칠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건 그를 기억하는 사람 모두가 될 거다




tag :

1987.1.15 따뜻한 남쪽나라

$
0
0
산하의 오역

1987년 1월 15일 따뜻한 남쪽 나라

1987년 1월 14일 남한에서는 박종철이 죽었다. 그런데 박종철이 잔혹한 고문을 받으며 죽음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을 그 즈음 북한에서는 또 다른 ‘철이’가 목숨을 건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만철. 마흔 일곱살의 의사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물론 김만철 본인은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라고 했고 북한은 불륜남의 도피라고 한... 것 같은데) 그는 친가쪽은 포함되지 않은 처갓집 식구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낡은 배에 올랐다. 식량과 물 등 장기간의 항해까지도 철저히 대비했던 그는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경 청진항을 떠났다.

일단 북한 영해를 벗어나려는 마음이었던지 동쪽으로 내달리던 김만철 일가의 낡은 배에 시련이 닥쳤다. 엔진이 고장나고 만 것이다. 한겨울의 거센 파도에 며칠을 시달린 끝에 김만철의 엑소더스 호(?)는 일본 쓰루가 항에 닿아 닻을 내릴 수 있었다. 항을 순찰하던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은 난데없이 출현한 괴선박에 놀라 다가섰지만 배 안에 있던 이들은 해상 보안청 요원들을 만나자마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다. “우리는 조선에서 왔습니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만철의 배는 동북아시아 3국을 순회하는 강력한 태풍의 핵이 되었다. 6.25 이후 북한 주민이 정교한 계획 하에 탈북을 감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북한도 머리털이 설 일이었고, 남한으로서는 이들을 어떻게든 데려온다면 체제 경쟁에서의 승전고를 울림은 물론, ‘생지옥 북한’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될 것이었기에, 거기다 결정적으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덮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온몸의 솜털이 일어섰다. 사이에 낀 일본도 난처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후지산마루호라는 배의 선장과 기관장이 북한에 ‘간첩’으로 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하사 민홍구라는 자가 후지산마루에 몰래 숨어들어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북한이 그 선장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한 것이다. 북한은 여지없이 이 카드를 내밀며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 동무들. 알아서 하라우.”

김만철 일가의 소망은 사실 남한도 아니었고 일본도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쯤 되는 “따뜻한 남쪽 나라”의 무인도에 살고 싶었다고 김만철씨가 술회한 바 있으니까. 그리고 김만철의 가족들은 남한을 ‘거지떼가 득실거리는 생지옥’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국 외교관이 배에 올라타서 남한으로 오면 받게 될 혜택을 늘어놨지만 가족들은 고개를 저었다. 일본으로서도 난감했다. 차라리 남한으로 가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청한다면 ‘인도적 견지’에서 해결해 버리면 그만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가족들 희망대로 제3국으로 보내 버린다면 도끼눈을 뜨고 있는 한국이 걸리고.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머리를.

먼저 꼼수를 낸 건 일본이었다. 추방을 명분으로 남한의 영해 근처에 김만철의 배를 끌고 가서 슬그머니 놓아 주면 남한측이 알아서 인수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일본 외무성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들고 귀국한 한국 외교관은 뜻밖의 장소로 초대된다. 인공위성도 떨어뜨릴 세도가 장세동 이하 삼군 참모총장이 총출동한 안가였다. 북한이 행여 방해할 지 모르고 그럴 경우 어떻게 대처한다는 수뇌부 작전 회의였던 것이다. 북한이 장난을 치면 날려 버리고서라도 김만철을 데리고 오겠다는 결의였다.


하지만 북한을 의식한 일본이 이 계획을 백지화하면서 남한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렸다. 펄펄 뛰는 한국에다가 일본이 제시한 안이 대만을 이용하자는 안이었다. “우리는 대만에 보낼게. 한국은 대만하고 친하니까 알아서 데려가.” 이번에는 국내 대만 관련 인맥이 총출동했다. 처음에는 거부 반응을 보이던 대만도 그에 응했고 ‘원조 탈북자’ 김만철 가족은 그렇게 서울에 왔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흘렀다. 2007년의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상에서 김만철은 그 부인과 함께 경기도 광주 야산의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한때 정착금과 강연으로 모은 10억의 재산은 몇 번의 사기로 날아갔고 일당 1만원의 사탕 봉지 묶기로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탈북자들이 당하는 사기 범죄 피해율은 남한 사람들에 비해 40배 이상 높다. 다섯 명 중 하나는 사기를 당한다. 김만철도 별 수 없는 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함께 왔던 아이들은 그래도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는 것. 특히 생생한 일기를 써서 유명했던 아들 광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천체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재미있는 것은 사위 하나는 남한 사람을 맞았고 또 하나의 사위는 탈북한 인민군 출신이다. 그의 팔자란 그렇게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나보다.


그런데 그가 남한에 옴으로써 또 다른 비극 하나가 발생한다. 그가 탈북하던 날 1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동진27호가 북한 경비정에 끌려갔다. 원래는 적십자사들끼리 얘기를 해서 풀려나는 것이 정석이었고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김만철 사건이 터지면서 그들의 운명을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북한은 김만철과의 맞교환을 요구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줄 리 없었다. 이에 북한은 송환을 거부했고 동진27호를 간첩선으로 몰았다. 지금도 12명의 선원 중 6명은 아직 그 생사조차 모른다.

김만철은 동북아시아 3국의 초미의 관심의 대상이 됐고, 차후로도 꽤 극진한 관심을 받았었지만 동진호 사건의 경우, 북한 정부는 그렇다치고, 남한의 정부도 그리고 그 말 잘하고 잘난체하는 남한의 운동권과 자칭 진보들도 이렇다 할 개입을 하지 않는 무관심 속에 4반세기의 세월을 지냈다. 1987년 1월 15일은 갈라진 반도의 한쪽에서 살아가던 몇몇 사람들의 운명이 오묘하게 , 또는 구슬프게 꼬이기 시작한 날이다.



tag :

1944.1.16 목놓아 부르다 떠난 시인

$
0
0
1944년 1월 16일 목놓아 부르다 간 시인


영화 속에서 대개 시인이라는 이들은 창백한 낯빛에 뿔테 안경을 쓰고 섬세한 성품에 쉽게 상처 받으며, 비쩍 곯아서 맨날 줘 터지지만 깡다구는 있어서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그러다가 더 두들겨 맞는, 그런 캐릭터일 때가 많다. 물론 시인도 사람 따라 개차반부터 성인군자까지 천차만별이겠지마는, 보통의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를 벗어나는 시인 하나가 있었다. 시...인이면서 명사수였고 글쟁이이면서도 폭탄 다루고 침투 훈련까지 받은 사람, 이육사가 그다. 본명 이원록.


그는 진성 이씨다. 우리나라 유학의 태두이자 일본에서까지 명성을 떨친 퇴계 이황의 후손이다. 그의 형제는 다섯이었는데 육사 말고 그 가운데 문학적으로 뛰어나 이름을 남긴 이가 넷째 원조다. 소설 <태백산맥>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문학가로 등장하고, 이육사의 유고집을 냈던 이원조는 명랑하고 재기발랄했던 반면 이원록(육사)는 좀 엄숙하고 우직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원록은 곧잘 이원조의 ‘밥’이었는데 하루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이육사가 책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이원조가 냉큼 할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책은 성현의 말씀을 담은 것인데 책을 던지는 것은 성현을 집어던지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해 또 한 번 형을 골탕먹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원조의 재기도 재기지만 이원록(육사)의 ‘한성깔’을 드러낸 일화.


일본과 중국 유학후 1927년에 귀국한 이원록은 조선은행 대구 지점을 날려 버리려던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의 첫 옥고를 치른다. 하지만 그가 이 의거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눈이 뒤집힌 일본 경찰이 그야말로 저인망으로 훑어서 감방에 처넣은 결과일 뿐, 재판에서도 나온 판결은 "혐의 없음"이었다. 그 뒤 신문기자로 활동하다가 조선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는데 이때만 해도 그는 '이활'이라는 필명을 썼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의 후폭풍으로 일어난 대구 격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또 옥살이를 한다 이 투옥 이후에야 그는 스스로를 이육사라 일컫기 시작한다.


264 수인번호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말은 정설로 돼 있지만 그 속내는 여러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역사를 도륙낸다는 뜻의 육사를 썼고 다음에는 "고기먹고 설사한다"라는 뜻의 육사를 썼다. 전자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현실에 대한 분노라면 후자는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냉소가 아니었을지. 그러다가 한 친지가 "역사를 도륙낸다는 건 혁명의 뜻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니 평평한 육지로 만든다는 이름을 써라"고 권유하면서 우리가 아는 그 육사로 스스로를 일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역사를 평탄케 하는' 노력에 몸을 던진다.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나리쟎는 그 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자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이육사 <꽃> 중

그는 툰드라 속에서 제비떼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의열단원 윤세주를 만나 중국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다녔고 이때 사격술, 변장술 등 무장 투쟁에 필요한 훈련까지 몸에 익혔다. 시와 글이 무기였던 그의 손은 방아쇠와 폭탄 던지기에도 익숙해졌다. 또 자신을 교양시켰던 의열단장 김원봉마저 "레닌의 뜻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는 열혈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른바 '빵쟁이'였다. 나이 마흔에 열 번 넘게 감옥을 들락거렸고 중국과 조선을 분주히 오가며 살았다. 그의 시 <절정>은 지독히도 추운 날 압록강을 건너며 또는 만주벌판을 헤매며 그가 내지른 비명같은 탄성이 뭉쳐서 나온 시인지도 모른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그는 그의 시 가운데 <청포도>를 좋아했다. "내가 어떻게 저런 시를 썼는지 모르겠다." 는 자화자찬 비슷한 소리를 할 만큼 말이다. "내 고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인데,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이 익어간다고. 그러면 곧 일본도 끝장난다고.". 후세의 평론가가 갖다붙인 것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입으로 한 자작시의 해석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해방을 보지 못했다. 죽은 뒤에 발표된 그의 시 <광야>에서처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목놓아 불렀으나 그는 초인을 만나지 못했고 <청포도>에서처럼 하이얀 모시적삼 식탁에 올려 놓지 못했다. 1943년 조선에서 체포되어 거꾸로 중국으로 압송1944년 1월16일 짧지만 매웠던 생명을 다한다. 고문과 악형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그가 쓴 수필의 이 구절을 되뇌지는 않았을까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 한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까"



tag :

1945.1.17 라울 발렌베리의 실종

$
0
0

산하의 오역

 (예전 글 다시 갖다 둠 )

1945.1.17 라울 발렌베리의 실종 

 1945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1월은 싸늘했다. 부다페스트 곳곳의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유태인들이었다. 패색이 짙은 나찌와 그 괴뢰 헝가리 정권이 유태인 색출에 눈이 시뻘갰고 며칠 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는 유태인 보육원을 습격, 아이들을 끌어내서 발가벗겨 거리를 뛰게 하다가 총살하는 등 이미 이성을 상실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찌와 헝가리 괴뢰 정권은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해방하기 전, 도시 안의 모든 유태인들을 죽여 없애겠다는 심사를 굳히고 있었다. 이 악마의 시나리오를 막아서고 나선 사람이 이었다. 라울 발렌베리라는 이름의 스웨덴 외교관이었다. .

“집단처형을 강행한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전범으로 소련군에게 고발할 거요. 그리고 반드시 처형장에서 당신이 죽어가는 꼴을 지켜볼 거요.”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에게 포위된 채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의 독기를 발산하고 있던 나찌 친위대 기갑사단장 슈미트후버 앞에서 발렌베리는 책상을 치며 대든다. 새해를 맞아 나이 서른 셋이 된 이 스웨덴 청년의 당돌한 협박에 슈미트후버는 결국 학살을 위해 벼른 칼을 내려놓고 만다.

발렌베리는 외교관이긴 했지만 외교관으로 입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스웨덴 굴지의 대기업을 소유한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유학 중인 건축학도였다. 졸업 후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중 헝가리에서 벌어지는 유태인 말살 정책의 참상을 목격했고 중립국 스웨덴인으로서 경각에 달린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대 외교 작전의 책임자를 제안받게 된다.

먼 훗날 ‘아이히만 체포 작전’ (전후 남미로 도망갔다가 이스라엘 정보 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당한 바로 그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지는 이름 아돌프 아이히만은 헝가리 내 유태인들을 모두 멸종시킬 것을 공언하고 있었다. 그는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헝가리와 아우슈비츠를 연결하는 직통 철도까지 깔았다. 헝가리 내 ‘유태인 청소’가 시작된 7주만에 40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낸 아이히만에게 남은 먹잇감은 부다페스트에서 숨죽이며 살던 유태인들 20여만이었다. 발렌베리가 헝가리에 온 건 이 때였다.

외교관의 자격으로 그는 스웨덴 여권을 무작정 찍어 냈다. 스웨덴 여권을 받은 사람은 헝가리 국민이 아닌 스웨덴 국민으로 인정되었고, 유태인이더라도 의무적으로 달아야 하는 노란 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식 여권이 모자라자 아예 인쇄공을 시켜 위조 여권을 만들어 냈고 그 여권을 받은 사람들은 중립국 스웨덴의 전권대사 라울 바렌베리의 보호를 받았다.

발렌베리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만 구한 게 아니라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구해 냈다. 유태인들이 강제 이송당하는 길을 가로막고 그들이 스웨덴 국민이라며 강변하거나 아예 유태인 감금 장소에 나타나 “스웨덴 여권 소지자 일어섯~~” 을 외친 후 웅성웅성 일어난 수백 명을 몽땅 데리고 나오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최후의 학살을 막은 것으로부터 그 이전의 대담한 행동까지, 발렌베리의 활약으로 구해진 목숨이 10만명은 족히 넘는다고 한다.

그 모든 일을 끝낸 후 발렌베리는 자신이 구한 유태인들에게 생필품 등을 지급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소련군 원수를 만나러 간다. 1945년 1월 17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는 증발한다. 악명 높은 NKVD (KGB의 전신) 요원들이 그를 체포했고 감옥에서 그를 만난 사람은 있지만 그 뒤의 행적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나찌도 척을 지기 싫어할만큼 강력한 중립국 스웨덴의 시민에다가 굴지의 대기업을 소유한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었던 라울은 전쟁에서 언넘이 지지고 볶든 말든,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아늑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짓밟히는 모습에 분노했고, 한 인간 집단을 ‘해충’으로 보는 야수성에 반하여 목숨을 걸고 맞섰다. 물론 이것은 그 개인의 고결한 인격과 용기를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지만 나는 라울이 그렇게 떨쳐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 그가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고 싶다.

스웨덴은 1913년에 계급이나 수입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급부를 제공하는 연금 제도를 제정했다. 사회 보장 정책은 시민적 권리로써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일 뿐이며, 정부의 원조나 시혜가 아니라는 개념을 이미 한 세기 전에 이정립했던 것이다. 100년 뒤의 한국 정부가 보자면 포퓰리즘이라고 아우성을 치다가 복장 터져 죽을 일이었다. 그러자면 조세 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었겠고 “이윤 추구가 생명”인 기업으로서는 그 부담을 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1930년대 사회민주당 정권 기간 많은 기업들이 스웨덴을 떠나 스위스 등으로 본사를 옮긴다. 하지만 발렌베리 가문은 끝까지 스웨덴에 남았고, 되레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을 실천함으로써 국민기업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가 되려면 해군 장교로 복무를 해야 하고, 자력으로 해외 유학을 마쳐야 하는 꽤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후계자 급은 아니었지만 그도 미국 유학생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라난 청년이 “수만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당신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고 인간 백정의 땅으로 서슴없이 뛰어든 것이 그렇게 놀랄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물론 발렌베리 가문의 행적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진 않겠다. 그래도 경향성이란 건 있다고 믿는다)

5대가 넘도록 세습을 이어가고 있는 이 발렌베리 가문을 한때 무척 부러워했던 가문이 한국에도 있었다. 언젠가 3대째 되시는 후계자가 2대째 되시는 자신의 아버지의 ‘헝그리 정신’을 소리 높여 예찬하셔서 폭소를 자아냈던 그 가문이며, 2대째 주인은 정신병으로, 3대째 후계자는 허리 디스크로 각각 군대를 피하신 바로 그 기업이고, 대량의 장학생으로 대변되는 ‘관리’ 능력으로 사회의 중추부를 “또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면서 수천억을 뿌려대어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을 독특한 방식으로 실천했던 바로 그 회사 말이다.

그런데 그 기업을 이끄는 경주 이씨 가문의 방계의 서자의 끝자락의 누구에겐들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드는 용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노조 만들자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책상을 복도에 빼 버리고 온갖 따돌림을 자행하여 멀쩡한 사람을 정신질환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자신의 일터에서 사람이 몸을 던져 죽어도 “이 돈 받고 입 다물어라. 단 이 돈 받았단 말 하지 말고.”라고 구슬리면 일 끝난다고 생각하는 가문의 일원이 어디 가서 누굴 구한단 말인가. 그런 가문에서 인류애에 사무치는 돌연변이가 나올 가능성은 내가 3주 연속 로또 1등을 맞을 확률보다도 적지 않겠는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한 뒤에 덤블링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라는 담장을 넘어서, “복지는 시혜가 아닌 권리”임을 일찌감치 천명했던 스웨덴 시민의 경계를 넘어서, 무엇보다 생명의 존엄성을 이해하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 10만이라는 고귀한 생명을 구했던 라울 발렌베리는 66년 전 오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최후가 행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인간의 광기라는 악마가 또 다른 몸을 빌어 그에게 복수의 마수를 들이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서명과 용기와 신념으로 구해낸 10만 명의 생명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발렌베리는 10만 개의 우주를 구하고서 역사의 블랙홀로 빠져든 인류의 별이었다. 1945년 1월 17일. 그가 사라졌다.



tag :

1994.1.18 늦봄 눈 감다

$
0
0

산하의 오역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1994년 1월 18일 늦봄 눈 감다

 

스스로를 늦봄이라 했다. 그런데 이 봄은 봄(春)이 아니라 봄(視)였다. 즉 늦게 눈을 뜨고 늦게 보았다는 뜻으로 일종의 자책의 의미가 담긴 일컬음이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가 1994년 1월 18일 늦게 떴는지는 모르나 그 후 그가 죽을 때까지 맑게 빛났던 눈을 감았다. 심장마비였고 급작스런 죽음이었던지라 많은 이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에서 손 꼽히는 구약학자였던 그는 강단의 신학자였고, 성서 번역가였다. 문익환을 두고 빨갱이 목사라고 거품을 무는 목사들이더라도 그들이 신주단지로 모시는 구약성서는 문익환의 손을 거친 것이다. 히브리 민족의 연원을 하나의 혈연공동체가 아닌 하층 집단의 연맹을 일컫는 '하비루'(천민, 노예, 강도 등의 뜻)로 보았던 그는 구약성서를 관통하는 민중과 지배의 역사, 압제와 저항, 폭군과 예언자의 역사를 통해 '민중'의 중요성을 갈파하고 실천을 통해 그를 선언한다. 구약성서의 호세야,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서를 읽으면 그 치떨리는 분노가 수천 년을 뛰어넘어 가슴을 찌를 때가 있다. 미가의 한 구절을 읽어 보자.

 

"내 겨레에게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들아. 살을 뜯고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바수며 고기를 저며 남비에다 끓이고 살점은 가마솥에 삶아 먹는 것들아! 이 죽일 놈들아 ! 권력을 잡았다고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미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치우는 이 악당들아 탐나는 밭을 만나면 그 밭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밭 임자까지 종으로 부려먹는 것들아!" 아마 지금도 누군가 집회장에서 이 성경 말씀을 열띠게 봉독한다면 정보과 형사들이 아무개가 반정부 선동을 일삼는다고 밑줄을 긋기에 충분하리라.

 

절친한 친구 장준하의 의혹 넘치는 죽음을 계기로 그는 드디어 얌전한 목사, 책상머리의 구약성서 번역자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를 향해 분노를 내지르고 새로운 세상의 빛을 뿌리는 예언자로 나선다. 내 겨레에게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이들을 향하여 포효했고,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끝내 무너진 가운데"(하박국) 못된 놈들에게 등쳐 먹히는 착한 사람들을 위해서 절규하는 맹렬한 시인으로 내닫는다.

 

늦바람만 무서운 게 아니라 늦봄도 무서웠다. 1976년 "늦게 세상을 본"(현실에 참여한) 이후 그가 죽은 1994년까지의 18년 동안 그는 11년이 넘도록 감옥에 있었다. 야곱의 돌베개 따위는 그의 고행에 비하면 일도 아니었고, 엘리야가 잡아먹은 메뚜기도 11년이 문익환이 입에 넣어야 했던 관식보다는 그 맛이 달았을 것이다.

 

그는 냉철한 전략가가 아닌 열정적인 시인이었다. 강만길 교수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표현했던 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심성을 지녔던 그는 사람들의 상상의 저편을 넘어서는 과감한 행동을 종종 선보였다. 1989년 봄의 북한 방문은 그 대표이자 절정이었다.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것은.....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며,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잠꼬대 아닌 잠꼬대) 라며 노래했던 문익환 목사가 별안간 진짜로 평양에 나타난 것이다. "아뿔싸 저 양반 잠꼬대가 아니었구나."

 

남한 사람들이 기절할 듯이 놀란 그 방북에서 그는 이번에는 북한 사람들을 놀래킨다. 만면에 자애로운(?) 웃음을 띠며 손을 내미는 김일성을 대뜸, 그리고 덥석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아마 호위총국 군관들은 기겁을 해서는 저 노인네를 들어 메쳐 말아 순간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김일성과 두 번씩이나 만나 남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상당 부분 김일성을 설득한" (이승환,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집행위원장 -길기도 길다 젠장) 문익환 목사는 이왕 온 김에 어디든 모실 테니 북한 구경 좀 하고 가시라는 북한의 권유를 뿌리친다. 그 이유는? "나 여권 만료일이 4월 13일이거든요."

 

나는 이 에피소드를 문익환의 '준법정신'의 발현으로 보지 않는다. 법 같지 않은 법 따위는 밥 먹듯이 어기는 걸 즐거움으로 알던 분이 별안간 여권 만료일을 챙긴 것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훗날 검사에게 얘기했던 대로 "남북이 서로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되지 않겠소?" 했던 것처럼, 그는 북한에게도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신들도 남한을 '지도'한다거나 하는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지킬 건 지키시오." 라고 말이다. "나도 대한민국 여권 가진 사람으로 국가보안법은 어길지언정 지킬 건 지킨단 말이오."라고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씨가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보면 문익환 목사는 그가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물꼬를 튼 통일운동의 일부 세력에게서 매우 각박한 대접을 받았음을 읽을 수 있다.

 

"'범민련'에 대해서는 당국의 탄압이 극심해 적어도 남쪽에서는 이 조직의 간판을 내거는 한 제대로 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문목사는 새롭게 '통일맞이 7천만의 모임'이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어 '범민련'과는 형식상 관계가 없는 형태로 운동을 전개한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범민련'을 적대시하려는 생각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불행하게도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존재가 나타나면 까닭 없이 상대방에게 스파이의 누명을 씌워 몰아세우는 무지몽매한 무뢰한들이 일본에는 있습니다. 문목사가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범민련'을 탈퇴한 이유를 들어, 이 무뢰한들은 문목사를 '김영삼 정권과 어울려서 흡수통일을 획책하고 있는 스파이'라는 중상모략 캠페인을 벌인 것입니다."

 

이 '무뢰한'들은 일본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까지도 남한의 진보를 참칭하고 앉아 있는 이들 가운데에도 숱했고, 그들은 문익환에게 '프락치'와 '스파이'의 화살을 서슴없이 날렸다. 50년 전 박헌영을 죽였던 그 방식으로, 70년 전 스탈린이 동지들 뒤통수에 총알을 박았던 그 경로로.

 

정경모씨가 동석했던 이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전언에 따르면, 돌아가던 날 오후, 식당에서 문익환 목사는 한 스님에게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문익환은 거칠게 캐물었다. "내가 스파이냐? 내가 스파이냐?" 이 질문을 받아내야 했던 것은 범민련 소속의 진관 스님이었다. "말해 봐! 내가 스파이냐?" 속을 긁어내는 듯한 비통한 질문을 하던 중 문익환 목사는 입에 든 것을 삼키지 못하고 숨이 막혀 쓰러지고 말았다. 그것이 문익환의 마지막 날이었다. 1994년 1월 18일이었다.

 

그 전날 문익환 목사는 범민련 의장에게 자신이 '통일맞이'를 꾸린 것은 범민련을 적대시하고자 함이 아니며,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관철하리라는 뜻이라는 정성스런 편지를 썼다. 그것이 문익환의 마지막 글이 됐다. 소시쩍 친구 윤동주에게 평생 부끄러워했고 미안해했다는 문익환은 그의 마지막 밤을 옛 친구의 글로 밝혔다. 그의 행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그 행동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맑디 맑은 사람, 문익환 목사가 갑자기 우리와 이별했다.

 

1992.1.19 김보은 김진관 구속

$
0
0
산하의 오역

1992년 1월 19일 김보은 김진관 구속


조용하고 아담한 도시 충청북도 충주. 1992년 신년 벽두, 이곳에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공개됐다. 무용학도였던 김보은과 그 애인 김진관이 살인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존속’ 살인이었다. 그리고 피해자는 김보은의 아버지, 또 한 번 정확히 말하면 김보은이 일곱 살 때 김보은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만난 의붓 아버지였다.


두 젊은이는 보은의 의붓아버지를 죽인 뒤 강도 살인으로 위장했다. 그런데 수사에 나선 경찰이 보기에 좀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피해자의 방에 이불이 하나였고, 그 방에서 딸과 아버지가 함께 잠을 자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뭔가 있다 싶었던 경찰은 딸에게 넌지시 아버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고 넘겨 짚어 보았다. 그러자 딸은 울부짖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범행 사실을 털어놓았고 결국 김보은 김진관 둘은 1992년 1월 19일 구속된다.

김보은 김진관은 존속살인을 계획하고 공모한 존속살인범으로 기소된다. 그러나 그 내막은 녹녹하지 않았다. 김보은은 어렸을 때부터 계부에 의해 성폭행을 당해 왔던 것이다. 충주지검 검찰청 직원이던 계부는 그 알량한 권력을 빌미로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면 죽는다고 세뇌하면서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던 그 시간 내내 김보은을 유린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김보은은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남자친구를 사귀어 봐도 오래 가지 못했다. 장동건이 오고 이병헌이 나선들 그가 남자로 보였겠는가. 그 아픔을 이해해 줄 사람이 흔했겠는가. 하지만 그녀에게도 꿈같은 사랑이 찾아왔다,. 그게 김진관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감당할 수 없던 김보은은 김진관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며 헤어지자고 한다. 그때 김진관의 심경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냐마는, 따지고 보면 어렵지도 않다. 정상적인 남자가 이 사실을 들었다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테니까. 아무 느낌 없다면 그건 내시이거나 사이코패스일 테니까. 하지만 피가 거꾸로 솟은 뒤 제자리로 복귀한 뒤의 입장은 또 달라진다. 과연 그녀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김진관도 김보은을 떠나려고도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김진관은 김보은과 함께 아버지 같지 않은 아버지를 찾는다. 제발 보은이를 놓아 달라고. 하지만 이 우라질 검찰청 직원은 수갑을 휘두르며 두 사람을 위협했고, 김보은에게 “이년이 바람이 났다....가족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둥의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법에 호소하려고 해 봐도 검찰청 직원이라는 권력은 한없이 높아 보였고, 도망이라도 쳤을 때 찾아올 더 큰 보복의 우려는 먹구름처럼 뇌리를 뒤덮었다.


여기서 김진관은 물러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운 나쁘게 기구한 사연의 여친 만난 걸로 치부하고 "우리는 여기까진가보다. 널 위해 기도할게.“ 정도로 자기 갈 길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진관은 그걸 거부했다. 후일 재판정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어머니 다음으로 사랑하는 보은이가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알고도 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느낄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나는 보은이의 의붓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보은이를 살린 겁니다.”

김보은은 이렇게 얘기한다. “구속된 후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지금까지 살아온 20년보다 훨씬 편안했습니다. 더 이상 밤새도록 짐승에게 시달리지 않았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울먹였다. “저 때문에 진관이가...... 제가 벌을 받을 테니 진관이를 선처해 주세요.”

이 사건 앞에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충주로 달려왔다. 대부분 젊은 여대생들이었다. “왜 진작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 따위의 사치스런 질문의 무의미함을 아는 사람들, “그래도 살인은 잘못이다.”는 고담준론에 “이건 정당방위다!”라고 항변하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충주지법 앞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학생들로 득시글거렸다. 여학생들은 꽃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불운한 살인자가 된 둘에게 전해 주려던 꽃이었다.

재판 후 김보은 김진관을 태운 버스는 출발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차를 둘러싸 버린 것이다. 학생들은 버스에 기대어 울면서 이름을 불렀다. 보은아 진관아. 닭장차 틈 사이로 꽃을 디밀어 봤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위협적인 시동 소리는 학생들의 귀를 때렸다.

그래도 미동도 않고 버틴 학생들과 당국간에 협상이 이루어져 창살 너머로나마 둘의 얼굴을 보게 해 준 뒤 농성을 풀기로 했다. 그때 한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사실 이 노래는 일종의 노동 가요로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노래이거나 이 분위기에 대단히 어울리는 노래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데 군데 박힌 가사 조각 조각이 부르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어두웠던 땅 지나 새벽이 얼어붙은 땅 녹아 새싹이 케케묵은 낡은 틀 싹둑 잘라버리고 딸들아 일어나라 깨어라....... 고귀한 모성보호 다 빼앗겨 버리고...... ” 그리고 그 다음 대목에서 노래는 발악적인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참아왔던 그 시절 몇몇 해......” 버스가 떠나는 와중에도 여학생들은 버스를 따라가며 노래를 부르고 둘의 이름을 불렀다.

김보은은 2심에서 유례없는 집행 유예로 풀려났고, 김진관도 감형 끝에 이미 오래 전 자유의 몸이 됐다.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지만, 과거의 상처를 딛고 행복한 인생을 꾸려 가기를 바랄 뿐이다. 둘에게는 돌아보기조차 힘겨울 일이지만, 둘로 말미암아 알려진 사건의 내막, 그리고 그 두 이름을 부르며 버스에 매달리던 사람들의 노력은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는데에 큰 동력이 된다.

며칠 전 친딸을 18년 동안 성폭행해온 고교 교사에 대한 선고가 이뤄졌다. 이 아버지라는 인간은 “딸이 외박한 후 그를 무마하기 위해 자신을 유혹했다.”고 주장했으며, 그 딸은 아버지의 처벌을 불원한다는 탄원을 재판부에 냈다. “피해자와 원만히 합의했고 처벌을 원치 않으므로.....” 하는 판에 박힌 판결문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재판부는 단호하게 중형 (그래봐야 8년이지만) 을 선고한다., 이유는 “아버지에게 순순히 응할 수 밖에 없는 ‘학대순응증후군’으로 인한 ‘심리적 항거 불능상태’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망할 놈의 아버지는 성폭력 특별법 위반으로 처벌받게 된다. 1992년 1월 19일 구속되었던 두 젊은이의 사연이 일종의 산파 노릇을 했던 그 법이다.

1997.1.20 신창원 탈옥

$
0
0

1997120일 신창원 교도소를 뚫다

 

프리즌 브레이크미드열풍을 일으킨 적이 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쇼생크 탈출>의 드라마틱한 탈옥 이야기가 관객들을 사로잡은 바 있다. 그런데 <쇼생크....>를 본 친구 (녀석은 데모하다가 별을 달았었는데)가 이런 말을 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그런 감옥이 어딨냐. 프라이버시 보장돼, 책도 맘대로 봐, 음악도 가끔 틀어주고 맥주도 먹는 감옥이 어딨어. 한국 감옥 같아 봐라 어림 짝도 없다.  탈옥은 얼어죽을."

 

사실이 그렇다. 언젠가 교도소 내부 취재를 위해 교도소 감방에 카메라 들고 들어갔을 때, 내가 봤던 다섯평 남짓한 방에는 다섯 명의 사내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몸만 뒤척여도 상대방이 잠을 깰 것 같은 그 방 안에서 무슨 탈옥을 꿈꾼단 말인가. 호송 과정에서 탈출을 하거나 작업차 나간 외출에서 몸을 뺀 경우는 간혹 있었을지 모르나 서너 길 담장에 철창 둘러친 교도소에서 탈옥에 성공한 예는 일제 시대부터 지금까지를 통틀어도 진귀하기만 하다.

 

그런데 1997120일 한 사내가 그걸 해 냈다. 이름은 신창원.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중범죄자였다. 공범과 함께 강도짓을 했고 그 와중에 사람이 죽었다. 신창원 본인이 행한 일은 아니었지만 기타 전과나 등등 상황이 고려되어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이 선언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 형에 몹시도 분노했다고 한다. 즉 자신의 범죄에 비해 너무나 무거운 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허구헌날 싸움질에 사고를 연발하다가 이감을 거듭하던 그는 부산교도소에 온 이후 거짓말처럼 사람이 변했다.

 

 얌전하기 이를데없는 모범수가 됐고, 운동도 열심히 하여 몸을 가꾸는 건실한 수용자 (이게 법무부가 교도소 안의 이들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라고 들었다)로 생활했다.  원래 80킬로그램이 넘던 그가 60킬로의 날렵한 체구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비만에 고민하던 중년의 교도관들 일부는 다이어트 비법을 문의하고도 싶었으리라.  그런데 그의 다이어트 비법은 감방 화장실에 있었다.  교도소 내 교회 공사를 위해 교도소 외벽 일부가 철거되고 철제 울타리로 대체된 뒤였고, 화장실 환풍구의 쇠창살이 허술하게 보였던 것이 그의 초인적인 다이어트의 동기가 된 것이다. 그는 몰래 손에 넣은 쇠톱으로 쇠창살을 조금씩 잘랐고 몰라보게 날씬해진 몸으로 그 사이를 통과했다.  1997년 1월 20일 새벽이었다.  정확히 몇 시였는지는 그만이 알 것이다. 

  그날 아침, 교도관들은 '쇼생크 탈출'과 비슷한 절차를 거친다.  신창원은 자신의 이부자리에 베개를 넣고 풍성하게 해 놓음으로서 누군가 자고 있는 듯한 풍경을 연출해 놓았고 "야 신창원 일어나!" 하면서 이불을 들춘 수용자들은 어안이 벙벙해진다.   점호에도 신창원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이번에는 교도관들의 얼굴이 황토흙빛이 됐다.  탈옥.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교도소에서의 탈옥.

 이후 그의 행적은 탈출 후 행적을 꼼꼼히 적은 일기로 널리 알려졌으니 굳이 언급할 것이 없다. 국가기록원 서술에 따르면 그는 탈옥 후 2년 6개월 동안 도피행각을 벌이면서  절도 104건, 강도 5건, 강도강간 1건 등 총 142건에 달하는 범죄를 저질렀고, 범행지역 또한 서울 42건, 부산 3건, 대전 5건, 대구 9건, 충남 32건, 경기 23건, 충북 10건, 전북 8건, 경남 2건 등 전국구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1건'의 강도강간 죄명이 조금 특이하다.  대개 범죄자들은 '동종'의 전과를 지니고 경찰들도 사건이 나면 '유사 수법'의 용의자를 찾게 마련인데, 절도를 100건이 넘게 한 그였지만 강간은 단 1건이었다.  그런데 그를 변호했던 엄상익 변호사의 글을 보면 그 1건에는 좀 특이한 사연이 서려 있었다.  결론적으로 신창원은 강간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피해자라고 내세운 사람은 아니라고 범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강간 혐의가 유죄로 판결된다면 감수하겠다고 변호사에게 말한다.  왜? 강간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리고 피해자가 신창원을 감동시킨 '천사'였기 때문에. 

 신창원은 범행을 저지른 후 탈주자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피해자에게 털어놓는다.  미안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해서 신고할 테면 신고하라고 드러누워 버렸는데 그녀는 바깥에 두고 온 신창원의 신발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밥상을 차려서 신창원에게 먹인다.  그녀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소원을 이루지 못한 처지였다.  이 얘기를 들은 신창원은 자신이 훔쳐 마련한 돈 4천만원과 달러 뭉치를 내놓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한 짓을 다른 이에게 하지 말 것을 약속하라고 말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나같은 가난한 사람이나 아저씨같은 죄지은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어요.  그 분은 분명 아저씨를 사랑하실 거예요." 

 "숨소리조차 거짓말"이라는 범죄자로 일생을 산 신창원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려고 지어낸 거짓말치고는 신창원 속 증언 속 그녀의 말이 너무나 또랑또랑하다.  그리고 정말 그런 사람이..... 그런 피해를 당하고도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상대에게  신은 당신조차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해진다.   신창원의 인생에서 그런 사람이 몇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그가 스스로의 인생을 보다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사람이 더 있었더라면 신창원의 인생도 바뀔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 아닌 착각 때문이다. 

 경찰인 내 친구는 말했다.  "사람은 안 바뀐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여자들이 누군지 아나?  지 애인은 변할 끼라고, 지가 옆에 있어 주면 괜찮을 끼라고 착각하고 사는 여자들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제일 불쌍하다."  사실 나도 동의한다.  고발 프로그램을 맡아 하면서 세상에 말도 꺼내기 싫은, 저런 인간은 어느 귀신이든 송곳니를 콱 정수리에 박아버리는 게 인류와 지구를 위해 좋을 것 같은 망종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변화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에.  하지만 그 순간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발전할 수 있는 인간, 바뀔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나아가 변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마저 버릴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에.

 신창원은 체포된 이후 특급의 감시를 받는 죄수로 10년이 넘도록 독방 생활을 하고 있고 얼마 전 자살 기도까지 했다. 그는 그 시도 이전에 문성호 자치경찰연구소장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성적인 문제, 성격적인 문제, 그리고 사회성이 부족한 문제 때문에 수용자들이 재범을 반복하고 있어요.  범죄중독이란 이러한 문제가 복합되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현상을 일컫는 것이지 범죄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난 현상을 범죄 중독이라고 하지 않죠? 그런데 수용자가 교도소에 구금되어 격리된 생활을 할 경우 수용자의 문제가 치유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될 수 있는 위험요소가 많아 재범 이상의 수용자가 사회복귀를 제대로 하기 힘들지요......." 

 그는 자신의 죄값을 치르고 있다.  그가 했든 하지 않았든 그가 있었던 현장에서 사람이 죽었고, 수백 명에게 아픔을 주었고, 씻을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창살을 자르고 탈출했던 1월 20일 오늘, 나는 그의 말이 뻔뻔스럽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tag :

1997.1.21 혀짤린 하나님 곁으로 간 전도사

$
0
0
 산하의 오역

1997년 1월 21일 낙골 전도사의 소천

지금은 높다란 아파트촌이 됐지만 80년대 말만 해도 돈암동 산동네는 판자집들이 늘어선 달동네에 철거촌이었다. 걸핏하면 용역 깡패들과 철거민들의 드잡이질이 벌어지던 어느 날 철거 깡패의 칼에 철거민 한 분이 희생되는 비극이 터졌다.

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낑낑대며 돈암동 꼭대기에 올랐던 날, 나는 철거 번호가 큼직하게 쓰여진 집, 하지만 거의 반파되어 안이 들여다보이던 방 안에서 한 여대생 자원봉사자가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 둘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여학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해들은 말로는 그 아이들은 돌아가신 분의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 밖의 다른 정황은 희미하지만 울고 있던 여학생이 부른 노래의 기억은 선연하다.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혀짤린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혀짤린 하나님>이라는 노래다. 이 노래는 한 사람의 삶과 맞닿아 있다. 김흥겸.

연세대학교 신학과 81학번이었던 그는 신학생이었음에도 꽤 ‘딴따라’끼가 있었다. 전국 대학생 복음성가 경연대회에서 대상도 타는 재주꾼이었고, 교육전도사 시절 레크리에이션은 그의 전담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이 쾌활한 신학생의 삶에도 깊은 그늘을 드리웠고, 그는 순종적인 신학생보다는 도발적인 예수의 제자로서 시대와 맞서게 된다. 1983년 그는 이런 기도를 함으로써 신학생들의 예배당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주여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뜻을 더 이상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힘들어서 못해먹겠습니다. 우리보고 회개하라구요? 우리가 죄인이라구요? 정말 울며불며 회개해야 할 것은 당신이요, 죄인 중의 죄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보고 하라 말고 당신이 한 번 이 땅에서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그래요 우린 아무것도 못해요. 그런 당신은 뭘 했습니까? 독재자의 종말이 백주 대낮에 수천 명을 학살하는 광주에서 당신은 뭘 했냐구요. 저 악의 무리들을 뚫고 당신을 믿지 않는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올 때 당신이 선택했다는 우리도 아무것도 못했지만, 당신은 또 무엇을 했는가요?........(하략)”

그가 ‘당신이 죽인’ 예수의 이름을 빌어 아멘을 선언했을 때 아멘을 따라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마 불경스럽게도 기도가 끝나기 전에 눈을 크게 뜨고서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자가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확인하려던 치들도 있었을 것이고, 뭐라 말하려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아 입만 벌리고 있던 축도 있었으리라. “회개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라고!” 라고 외치는 이 가공할 신학생은 같은 해 있었던 마당극 “누가 예수를?”에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 역할을 맡는다.

온 캠퍼스를 예수 수난의 무대로 삼은 그 마당극에서 예수는 사복형사에게 체포되고 검은 승용차에 실려가 교문 앞 로마 법정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로마 군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전경들이 잔뜩 몰려들어 여차하면 뛰어들 기세를 보였고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도 엉뚱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전두환 물러가라.”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 어느새 골고다의 예수가 아닌 망월동의 예수가 되어버린 김흥겸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가운데 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하나님을 혀 짤리고 화상 입고 쓰레기 더미의 일원으로 치부해 버린 불경한, 그러나 내가 아는 노래 중 가장 신실한 노래 <혀 짤린 하나님>이었다. 김흥겸 작사 작곡의.


그는 학창 시절 때부터 관악구 신림 7동의 낙골교회 전도사로 일했다. 원래 공동묘지였던 곳을 밀어버린 시유지에 청계천 주변에서 철거된 이들을 집단으로 수용했던 동네로서 채 수습하지 못한 뼛가루들이 굴러다닌다고 해서 ‘낙골’이었다. 그곳에서 몇 년을 봉사한 뒤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또 다른 곳을 향해 찾아나선다. 달동네 철거민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교회를 떠나 그들의 짱돌이 되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고, 그들의 ‘전우’가 된다.


영등포 역 앞에서 테이프 노점상을 하면서는 노점상 아줌마와 젓가락 장단을 함께 하며 어울렸고, 신대방동 철거 현장에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석 달간 콩밥을 먹었다. 극단의 배우로, 배추장사로, 음반 기획자로 그야말로 삶의 바닥을 몸으로 쓸어내던 그에게 위암 선고가 닥친 것은 1995년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그는 이렇게 뇌까렸다고 한다. “에이 씨팔 내 인생이 이렇게 좃같이 끝날 줄 알았어,” 예수도 십자가에서는 “왜 나를 버리는 거요?”라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따졌을진대, 김흥겸이야 오죽했으랴.


암은 점점 더 깊어갔고,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그와 인연이 깊었던 오충일 목사는 모세가 바다를 가른 이래 없었을 일 하나를 제안한다. “흥겸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벗들이 함께 모여 미리 장례식을 치르자.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건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1996년 11월 가쁜 숨이긴 하지만 멀쩡히 숨을 쉬고, 창백하긴 하지만 아직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이 열렸다. ‘고인’은 휠체어에 앉아 문상객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마치 부활한 사람처럼. 다시 살아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로부터 두 달 뒤 1997년 1월 21일 그가 회개하라고 당돌하게 요구했던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는 방송쟁이들에게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아내는 다큐멘터리 작가로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이하로는 빠지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는 한지원 작가다. 김흥겸은 죽기 직전 아내에게 이런 글을 남긴다. “난 나의 마지막 과정을 너의 글 속에 묻고 싶고, 또 네가 쓸 글에 깊은 거름이 되어 다 못한 것들이 네 글 안에서 다시 부활하여 살고 싶다.” 야속할 정도로 부담스런 유언.

하지만 아내는 유언을 지켰다. 그녀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할 신림 8동 난곡의 풍경을 담았던 KBS 스페셜의 작가였고, <인간극장>에 등장하는 평범한, 그러나 감동적인 사람들의 파노라마의 목격자이자 전달자였다. 김흥겸의 삶은 그렇게 거름이 되고, 그가 보여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오늘 우리가 무심코 보는 방송 속에서 가지를 뻗고 잎을 펴며 꽃을 피유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2년 1월 21일은 개독교가 판을 치는 나라에서 살다 간 어느 신실한 기독교인의 15주기다



tag :

2000.1.22 새벽의 75인 - 프로야구선수협의회 결성

$
0
0

산하의 오역


2000년 1월 22일 새벽의 75인 -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결성


프로야구는 이미 한국 문화의 일부가 됐다. 웬만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있고, 한국시리즈쯤 되면 출전 팀의 연고 지역민들에게는 지대한 이벤트가 된다. 2009년이었던가 오래간만에 기아 타이거즈가 우승했을 때 나는 광주에 있었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김대중 대통령 당선 때의 분위기였달까. 하기사 나만 해도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 시리즈에 올라온다면 휴가를 내서라도 사직구장에 달려갈 태세였으니까.



 2000년 1월 22일은 이 프로야구가 “존폐의 위기”에 몰린 날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존폐의 위기”라고 누군가가 몰아간 날이었다. 그 누군가는 프로야구 구단주들이었다. 그들은 이날 새벽 한 시 75인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프로야구 선수협의회’를 결성하자 구단들은 그들을 모두 방출하고 ‘직장폐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문제를 두고 100분토론에 나온 KBO 사무차장 이상일은 “선수협이 노조처럼 행동하고 있다”면서 그 ‘불순함’과 ‘배후세력’ 운운하다가 사회자 정운영에게 핀잔을 받기도 했거니와, 프로야구 선수협 사태는 가히 한국 사회에서 흔히 발생했던 ‘노사대결’의 축소판이자 축약판이었다.


 원래 선수협을 결성하기로 한 날은 전날인 21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형태의 방해 공작과 내부의 분열과 반목, 의리와 배신의 파노라마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오긴 왔는데 “저 팀이 들어가면 우리도 들어간다.”는 어처구니없는 눈치작전을 벌이는가 하면, 기껏 선수들 끌고 참석한 삼성의 고참 선수가 별 것도 아닌 문제로 언성을 높인 끝에 “삼성은 노조 없어. 다 따라나와.” 하면서 후배들을 때릴 듯이 몰고 나가자 삼성 눈치를 보고 있던 LG 선수들도 빠져나갔다. (이때 삼성 선수들을 휘몰고 나갔던 이가 지금 감독 자리를 꿰찼으니 역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한다)



각 팀의 대표로 온 선수들도 외롭고 고달팠다. 이를테면 해태 유니폼을 입고 있던 양준혁은 일부 해태 선수들로부터 “네가 해태냐?” 하는 노골적인 견제를 받고 있었고, 서명은 400명 가까이 받았으나 21일 저녁 7시 결성 장소인 63빌딩에 나타난 선수들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눈치를 보다가 빠지는 이도 있었고, 팀 선배가 선동해서 물러갔다가 다시 찾은 이들도 있었다.



“지금까지 받은 서명을 다 무효로 하고, 다시 선수협 결성 서명을 받겠습니다. 일단 선수협 출범이 중요하고 그 뒤에 회원을 늘려나가면 됩니다.” 서명 용지가 돌기 시작하자,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현대 선수들이 이탈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75명. 새벽 1시 30분 그들이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결성을 선언한다. 사실 회장을 누가 할 지도 사전에 결정되지 않았던 엉망진창에 엉성하고 조악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이날이 역사에 남아야 하는 이유는 송진우, 양준혁, 강병규, 박정태, 최태원, 마해영, 김재현, 박명환 등 이른바 총대를 멘 사람들은 ‘선수협’ 없이도 배가 터지게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친목단체’ 선수협을 만든다고 해도 ‘노조’를 만드는 것이고 ‘노조’는 불순한 것이며 한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다는 삼단논법을 구사하는 구단주들 앞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보다는 구단의 말 한 마디에 찍 소리를 못하고 보따리를 싸야 하고, 협상은 커녕 주는 대로 받으면서 “싫으면 관둬” 한 마디에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후배들과 2군 선수들을 위해 선수협이 필요하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양준혁은 8개 구단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외쳤다. “간다. 나 혼자라도 간다.” 회장 송진우는 “왜 고액연봉자인 당신들이 구태여 이렇게 하느냐”고 건조하게 캐묻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었다. “"고액 연봉자들이 왜 이러느냐구요? 그 질문 백번도 더 듣겠네. 아니 당연히 우리가 총대를 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이해 안돼요? 연봉 천 만원 받고도 감사합니다 하는 애들이 이런 거 할 수 있겠어요? 우리한테도 지금 이렇게 대하는데 걔들이 나서 봐요. 어떻게 되나."
 
그리고 1월 22일 새벽 떠나가는 선수들, 철수할 준비를 하는 기자들에게 강병규는 이렇게 외쳤었다. ”우리가.... 우리가... 순수한 의도로 이곳에 모였다는 것만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그는 그 ‘의도’가 이 일을 하면서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야구위 총재가 프로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프로야구선수로서 긍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지만, 비로소 우리가 왜 이 일을 꼭 해내야만 하는지도 뚜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대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미약하지만 자신이 가진 힘을 자신보다 못한 이를 위해 사용한 경우는 상상 외로 드물다. 제 자식들 대를 이어 정규직으로 삼는다는 단협에는 눈이 시뻘걸망정, 비정규직 많아 밥 먹기 불편하니 식사 시간 따로 정하자는 이들은 많았지만, 자기들 월급은 당연히 인상되어야 하지만 외주제작비는 마땅히 깎여야 한다는 발상을 하는 듯한 오늘날의 방송사 정규직 노동자같은 이들은 허다했지만, 정작 자신의 기득권을 희생해 가면서 우리 후배들은 이런 꼴 보지 않게 하자고 일어선 사람들은 참 드물었다. 2000년 1월 22일은 그런 이들이 간만에 우리 역사에 출몰했던 날이었다.


 비록 강병규의 오늘이 슬프다 해도, 그랬던 양준혁이 2009년이었나 선수협의회장 손민한의 노조 전환 시도에 반대하는 어이없는 행동을 보였다 해도, 그리고 그렇게 힘겹게 만들었던 선수협 회장자리가 “선수협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며 선수협을 음해했던 이호성에게로 넘어가는 황당한 일이 이어졌다 해도, 오늘의 의미는 그렇게 작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는다.



P.S. 산하의 오역 목요일까지 쉽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기 오시는 분들... 근데 누가 오시긴 하나 ㅋ



tag :

1971년 1월 25일 우간다의 살인마 등극

$
0
0

산하의 오역

1971년 1월 25일 우간다의 살인마 등극


영국령 동아프리카였다가 1962년 독립한 신생국 우간다의 나날은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다. 원래는 왕국으로 독립했다가 그 왕이 대통령이 되는 공화국으로 변신했지만, 총리였던 오보테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직 왕 겸 대통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우간다의 대통령은 정부수반과 군 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겸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 심지어 단원제인 82석의 의...회도 그 중 27석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판 ‘유정회’라고 하겠다. ) 이 위엄 가득한 대통령은 영연방 회의에 참석차 싱가포르로 떠난다. 불안한 정정의 신생국 대통령으로서는 담대한 외유였지만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193센티미터의 거구의 육군 참모총장은 오보테의 ‘믿을맨’이었다.


이 육군 참모총장의 군 경력은 영국군에서 시작된다. 제대로 된 교육은 받은 적 없지만 군인으로서는 꽤 능력을 발휘한 그는 영국군의 일원으로 아시아의 버마 전선에까지 와서 일본군과 싸웠고, 그 뒤 케냐에서는 역시 영국군으로서 독립을 위해 일어선 케냐인들을 공격하는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영국군이 심혈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공을 들여 만들어낸 일종의 ‘살인 병기’였다고나 할까. 영내 헤비급 챔피언을 지내기도 했다는 그는 대통령이 외유를 한 틈을 타서 간단히 정권을 장악해 버렸다. 1971년 1월 25일이었다. 육군 참모총장은 대통령으로 그 직함을 갈아낀다. 우간다 신임 대통령 이디 아민의 등장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때만 해도 부패한 오보테 정권에 분노하고 있던 우간다 시민들은 새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이 전직 권투 헤비급 챔피언이자 영국군 아프리카 중대 장교였던 이디 아민은 상상도 못할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일단 전임 대통령 오보테의 사람들, 3천 명의 장교들과 1만 명의 시민들이 저승길로 간 것이 시초였다. 그 뒤 그에 반대하거나 삐딱한 사람들은 아낌없이 체포되어 서슴없이 살해된다. 최소한으로 줄여 잡으면 10만에서 일설에는 8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토막난 채 늪지대로 던져졌다.

원래 심심찮게 빨래하는 여인들이나 미역 감는 어린이들을 습격했었던 우간다의 악어들은 이디 아민 정권 내내 포식을 하는 바람에 마치 야성을 잃은 듯 온순해져 동물학자들을 경악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

아민의 기행은 다방면으로 행해졌다. “각하, 원수, 모든 지상동물들과 바닷 속 물고기들의 신,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라는 어마어마한 호칭으로 그를 일컫게 했으며, 모든 공문서에 그렇게 쓰게 했다. 스코틀랜드 용병대의 일원으로 활약한 전력 때문인지 그는 스코틀랜드를 광적으로 좋아했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며 스스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일컫기도 했다. 탄자니아와 분쟁 과정에서는 무하마드 알리를 심판으로 대통령끼리 권투 시합을 벌여 보자고 호언하는가 하면, 우간다 공군의 폭격 실력을 보여 주겠다며 범아프리카 기구 내빈들을 모아 놓고 호수 위에 설정한 ‘케이프타운’ (남아공의 도시, 즉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시위였다)을 폭격하게 했다가 목표물이 빗나가자 전 공군 참모총장을 목표물로 설정, 폭격에 기어코 ‘성공’시키는 엽기도 선보였다.

기타 등등의 잡다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그 역시 제국주의의 사생아라는 것. 그가 집권했을 때 가장 먼저 승인하고 지지의 제스처를 했던 것은 영국과 이스라엘이었다. 전임 오보테 정권이 추진한 자원 국유화로 영국은 약이 올라 있었고, 우간다를 거점으로 삼아 수단에서 정치적 분쟁을 일으켜 아랍 연합의 변죽을 울리려던 이스라엘은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주판알을 퉁기고 있었다. 물론 이 둘은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된 셈이지만.


둘째, 그는 그 악행을 저지르고도 천수를 다하고 호화생활까지 하면서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오래도 살았다. 1923년생 (28년생이라고도 한다)에 2003년 졸했으니 우리 나이로 여든 하나. 많게는 80만명이 죽었다는 우간다 인민은 끝내 그를 단죄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카다피 대령에게로 도망갔다가 일설에 따르면 그 딸을 건드린 다음에는 사우디로 내뺐고 그곳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 주고 받은 빌라에서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다 갔다. “아버지의 시신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제다에 묻혔다.”고 발표한 그의 아들은 지금 우간다에서 정치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자발없는 현실에도 어이가 실종될 지경이지만, 우간다 정부의 논평은 한층 더 무력했다. “그의 죽음은 죄값을 치른 것”이며 “그의 죽음과 장례는 우리들에게 있어 나쁜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 는 것이었다.



이디 아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던 오늘,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평생 그 거구의 배를 두드리며 수십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싸지르고 살았던 한 살인마를 되새기면서, 끝내 그를 단죄하지도 못하고, 그의 죽음을 ‘축하’하고만 앉았던 우간다 사람들의 무기력에 혀를 차는 와중에 들려온 한 소식에 나는 그만 머쓱해지고 만다. 전두환의 연희동 사저를 취재 중이던 이상호 기자가 ‘전직 대통령 사저 경호를 방해한 현행범’으로 연행되었다는 뉴스가 그것이다.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독재자들의 말로가 어찌 이리도 비슷하게 평탄한지. 어쩌면 전두환은 “어허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아민은 80만명인데 나는 200명 밖에 안된다고.”라고 뇌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tag :

1987.1.26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
0
0
1987년 1월 26일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죽었다. 그것은 하나의 임계점이자 전환점이었다. 그 전 해가을 무려 1300여 명의 대학생이 한꺼번에 구속됐다.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 때문이었다. 대학 상공에 헬리콥터가 날고 중세 공성전같이 전경이 사다리를 오르고 학생들이 그에 저항하는 그림이 방송을 통해 전파되고, 이유 불문 그 모두가 공산혁명분자로 매도된 뒤 사회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이데올로기 공세는 상당히 먹혀 들어갔다. 보도지침 하의 언론은 이른바 ‘센 그림’만 골라서 내보내며 과격 학생들의 실태를 반복해서 비췄고 시민들은 그에 감응했다. 그 가을과 겨울 사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시민들이 내민 발에 걸려 넘어졌고 목이 찢어져라 외쳐도 외면하는 사람들의 등에 절망해야 했다.


하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그 동토를 녹이기 시작했다. 아니 말라붙은 듯 보였던 땅에 갑작스런 봇물을 틔우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설마 설마 하던, 성고문이다 뭐다 해도 다 빨갱이들의 모략이라 믿었던 사람들의 억지스런 이해력에도 커다란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생사람을 저렇게 잡는 정부가 우리 정부란 말인가. 전환점이었으며, 임계점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존경하는 언론인 중의 하나인 김중배가 1월 17일에 쓴 칼럼은 그 임계점을 대변한다. 고3이었던 내 기억에도 그 글줄은 쩌렁쩌렁한 청룡언월도와 같았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보통 사람들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발언이 대한민국을 뒤흔든다. 아니 물론 그날은 사람들은 몰랐다. 보도지침 치열한 언론에서 그 발언을 제대로 보도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오히려 그 후에 유명해진 이 이야기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아니 눈 질끈 감고 제 새끼들 챙기기에 부산한 장삼이사로서도 참아내기 어려운 창끝을 들이밀었다. 그 전환점의 주인공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87년 ·1월 26일은 월요일이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린다. 이 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한 영원히 남을 강론을 남긴다.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흐느끼던 그의 교우들 앞에서, 그리고 성당 밖 선술집에서 욕지거리 내뱉으며 술잔만 비우던 무력한 사내들을 향하여, 고문 받고 죽어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님을 안도하면서도 슬퍼하던 어른들의 머리 위로.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1월 14일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솟구쳐오르는 의분 속에 온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할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 보고 있는 어제, 오늘입니다.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중략)

오늘 이 성전에서 근본적으로 박종철 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 정권에 대해 우선 하고 싶은 한마디 말은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번 박종철 군의 참혹한 죽음은 우연한 도발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번 고문 사건은 지난해 6월에 있었던 천인공노할 부천 경찰서 권 양의 성 고문 사건과 역시 재작년 9월에 있었던 전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고문 사건, 이 밖의 연속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고문 사례들 중의 하나이며, 다른 한편으로 헤아리기 힘들도록 많은 수의 양심인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략)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인류사가 진행된 이래 계속된 전쟁과 투쟁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대개 살인자였을 것이고, 죽은 자가 자손을 남기지 못하는 이상, 세상에 태어난 우리 거의 대부분은 살인자의 후예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네가 죽인 그 사람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벨의 이름은 연속하여 뒤바뀐다. 박종철이었고 그 이전에는 전태일이었고, 그 사이의 수많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벨이 있었다.

얼마 전 대구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죽어간 학교 폭력의 희생자 앞에서 우리는 분노했다. 그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 카인들은 응당 욕을 먹어야 한다. 지당하다. 하지만 ·1987년 1월 26일 김수환 추기경이 물었던 질문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죽은 친구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은 몰랐다.”고 흐느끼던 카인과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평생 살아온 터전에 느닷없이 송전탑이 세워지는 것에 반대하다가 두들겨 맞고 몸을 불살라버린 촌로의 아픔을 (며칠 전 일이다), 몇 년 동안 찬바람 맞으면서 농성해도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면서 이제는 피골이 상접하고 죽을 일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사람들의 흐느낌을, 그 많은 아벨들 앞에서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되뇌는 카인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우리는 "하느님이 두렵지 않은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운가.


오늘의 역사를 검색하면서 1987년 1월 26일 침착하지만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칼이 돋는 김수환 추기경의 육성을 들었다. 그 칼끝은 4반세기가 흘러도 날카로운지 모르겠다.

 


tag :

1945.1.27 아우슈비츠 해방

$
0
0

산하의 오역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2차대전 막바지,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은 기진맥진한 독일군을 거칠게 몰아부쳤다. 히틀러의 나찌 군대가 북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기나긴 소련 국경을 유린한 이래 죽어간 소련 인민과 군인의 수는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이제 독일이 그 댓가를 치를 차례였다. 따발총을 든 소련군은 눈에 핏발이 서서 독일로 독일로 몰려들었다. 그 도상에 폴란드가 있었고 코니에프 장군이 이끄는 우크라니아 전선 제 1군은 폴란드의 작은 도시 아우슈비츠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공할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1945년 1월 27일이었다.


 “사람의 머리카락입니다. 700킬로그램 분량입니다.” 보고하는 소련군 병사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뼛가루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사람의 뼈입니다. 그리고..... 의치와 안경테도 산더밉니다.” 20세기 인류가 후세에 전할 최대의 악몽 중의 하나인 아우슈비츠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전장에서 볼 것 못 볼 것을 다 목도하고 별의 별 일을 치뤘던 병사들도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는 친위대 대장인 하인리히 히믈러의 지시에 의해 건설됐다. 최초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점진적으로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다가 1942년 유태 인종을 유럽에서 완전히 말살하려는 이른바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이 수립되면서부터는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가스실에서 죽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트럭의 배기 가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다 죽기는 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연구 끝에 사용하게 된 것이 찌클론 B라는 독가스였다. 수용소장 헤스는 그 효과를 이렇게 자랑했다. “배기 가스를 사용한 곳에서는 시체들이 땀과 오줌과 똥투성이가 됐지만 찌클론B를 사용하면 그런 일이 없다.”



 이 찌클론 B를 아우슈비츠에 공급하는 임무를 맡은 이 가운데 쿠르트 게르슈타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독일 내에서 정신질환자와 장애자를 죽여 없애려던 히틀러의 계획에 의해 여동생을 잃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독가스 운용 계획을 자세히 조사하여 세계에 공표하기 위해” 친위대에 자원입대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는 이 악마의 시나리오를 베를린의 사제나 스웨덴 대사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는 그의 정보를 거짓으로 치부했고 스웨덴 사람들도 조소 어린 침묵을 지켰다. 설마 그런 일이.... 설마 그런 일이..... 게르시타인은 전후 자신의 기록을 남긴 후 자살해 버린다.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자신이 공급한 가스를 마시고 죽어간 수백만의 생명들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고 한 아도르노의 한탄은 적절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바닥이 어느 정도로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장이었고,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야수성으로 대체될 수 있는가를 입증하는 바로미터였다. 하지만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키고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용기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이 일궈낸 이야기가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사람들의 굳은 얼굴을 풀어내는 것도 역사의 한 장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났다.


 1944년 레지스탕스로 의심받아 4년 동안 아우슈비츠에 (폴란드 정치범들도 많이 있었다) 갇혀 있던 폴란드 청년 예지 비에레즈키는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1년 전 만나 사랑에 빠진 유태인 처녀 실라 시불스카가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라의 가족은 그들이 만나던 그날, ‘샤워실’에서 처리됐었다. 친위대 군복을 구한 비에레즈키는 시불스카를 압송하는 체 하면서 아우슈비츠의 삭막한 출입문을 빠져나왔다. 며칠을 걸어서 고향에 돌아온 비에레즈키는 실라를 안전한 곳에 숨긴 후 바르샤바로 가서 레지스탕스가 됐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결혼하자.”는 약속을 남기고.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비에레즈키가 돌아왔을 때 실라는 없었다. 이미 한 달 전에 비에레즈키의 고향은 해방됐고, 돌아오지 않는 비에레즈키를 기다리던 실라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진 채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가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이별한 지 38년이 지나서 실라는 다시 바르샤바를 찾는다. 그녀는 호텔의 여직원에게 폴란드에서의 추억을 털어놓으며 옛 사랑의 사연을 이야기했는데 그때 기적같은 한 마디가 흐른다.

“이상하다. 당신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는 남자를 내가 아는데.”



 “당신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고 다녔던 남자는 역시 비에레즈키였다. 얼마 후 비에레즈키의 고향의 공항에서는 백발이 다 된 노인과 세련된 50대의 미국 여자 실라가 눈물에 젖은 해후를 한다. “실라야? 정말 당신이 실라란 말이야?”를 부르짖는 비에레즈키의 손에는 그들이 헤어져 살았던 햇수만큼의 서른 아홉 송이의 장미가 들려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길 수 없어서 목숨을 걸었던 한 청년과 그에게 목숨을 맡겼던 여인은 서른 아홉 송이의 장미를 주고 받음으로써 평생의 그리움을 대신해야 했다. 아우슈비츠의 열 아홉 유태인 소녀와 스물 셋 폴란드 청년은 그렇게 다시 만났고, 그 한 번을 끝으로 다시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고 몇 해를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던 날, 그 비인간의 극치가 흉물스럽게 세상에 공개되던 날, 실라 시불스카와 유라세크 비에레즈키의 장미꽃을 떠올린다. 어떤 진흙탕에서도 연꽃이 피고, 최악의 시궁창에서도 생명의 끈이 끊기지 않듯, 아우슈비츠에서도 사랑은 피어났고, 그 사랑은 위대한 용기를 낳았으며, 이뤄지지 못했기에 더욱 감동적인 장미꽃의 향기로 찌크론 B의 유독성을 잠재운다. 이것 역시 역사의 한 자락일 것이다.



tag :

저기 떠나가는 최

$
0
0
저기 떠나가는 최, 기자들 틈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낙엽같은
종편 시청률 안고서
내가 잘못했다는
허튼 사과도 없이
양아들 도망간
... 따사로운
싱가포르 땅 찾는가
가는 최여
가는 최여
그 곳이 어드메뇨
정연주 치고 MBC 꿇린
영화는 간데없고
멘토와 함께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최

책임 통감한다는 흔한 예의도 없이
폐허돼 가져 갈 것 없는
방송판 땅을 떠나
가는 최야
가는 최야
꿈에 볼까 두렵다
남김 없이 작살내고
홀로 떠나 가는 최
봉투 냄새 수갑 냄새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봉투 냄새 수갑 냄새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1958.1.28 한반도 핵무기의 시작

$
0
0

산하의 오역


1958년 1월 28일 남한 핵무기 배치 확인


 그 품질에 대해서는 심대한 의문이 있고, 방사능이 거의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도 좀 기이하지만 어쨌건 북한은 핵실험을 했고, 그 운반체인 미사일 실험도 감행했다. 제 나라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핵무기에 집착하는 꼬락서니는 심히 유감스럽긴 하다. 심지어 북한을 방문하여 공동선언도 했던 이쪽의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는 국상이 났는데 그 기간 중에 핵실험을 감행했을 때에는 참 구제불능인 종자들이라고 한탄도 했었다. 북한 정권의 핵에 대한 추잡하기까지 한 집착과 그를 “자위적인 핵” 따위로 미화하는 덜떨어진 자칭 진보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다. 핵무기는 우리 편 남의 편 골라 죽이는 ‘주체의식’ 따위는 없는 무기이기니까.

...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그들의 집착이 측은해 보이기도 한다. 당장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당사자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이유로 전쟁이 벌어지고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몇 년을 숨어지낸 끝에 목이 매달렸던 이라크의 예를 보면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으며, 그를 모면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정상적인 아이큐를 보유한 사람이라면 “이라크에 핵무기가 진짜로 있었더라면 저런 꼴은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계산을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들에게는 이라크보다 더 오래 되고 깊숙한 트라우마가 있다. 이 트라우마는 1958년 1월 28일로부터 비롯된다.

 1957년 6월 2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제75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측은 정전협정 조항 중 하나를 폐기한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한반도로의 무기 반입을 금지하는 13조 D항이었다. 이후 미국은 주한민군의 현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현대화는 곧 핵무장화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1월 28일 주한 유엔군 사령부 (즉 주한미군 사령부)는 한국 영토 내 핵무기 도입 사실을 정식 발표한다. 한 술 더 떠 미국은 2월 3일 원자포와 지대지미사일 어네스트 존을 공개한다.


 “원자폭탄을 만주에 몇 개 떨어뜨리고 동해에서 황해까지 방사선 코발트를 뿌리고 싶었다.”는 맥아더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전쟁 중 미국은 ‘신중하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 끝난지 만 5년도 안된 차에 남한 내에 핵무기가 공식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그냥 까불지 마라는 겁주기 차원이 아니었다. 1959년에는 공군 핵무기도 한국에 배치되었다. 이후 핵이 장착된 마타도어(Matador) 크루즈 미사일 1개 비행중대가 이남에 상시 배치된다. 마타도어는 1,100km까지 날 수 있는 미사일로서 이북 뿐 아니라 중국과 소련까지를 겨냥한 것이었고 점차 사정거리 긴 미사일로 대체됐다.


 1991년 공식적으로 핵무기를 철수할 때까지 미국은 이남내 미군기지에 약 1720여개의 전술핵무기를 갖다 놨었다. 이것은 한반도 1백 평방키로미터당 한 개 이상의 핵무기가 배치된 셈이며, 동해에서 서해까지 200m에 하나씩 핵무기가 배치된 격이었다. 인구밀도는 한국이 방글라데시와 대만에 뒤졌는지 모르지만, 핵 밀도만큼은 전 세계에서 최고였다. 위력면에서도 1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히로시마 급 핵폭탄의 1700배에 달했고, 히로시마의 희생자 수치를 놓고 계산한다면 1억 명을 훨씬 넘는 생명을 앗아갈 위력을 갖고 있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상,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며 비분강개하는 분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얼마나 불안하실까. 나도 솔직히 불안한데. 고양이한테 몰린 쥐는 너도 날 먹으면 죽는다고 쥐약을 삼킨다는데, 체제의 위협 앞에서 그들이 핵무기를 ‘자위용’으로만 묻어둘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나는 북한이 얼마나 불안했을까 하는 오지랖도 갖게 된다. 조잡한 핵무기 몇 개 머리맡에 있다고 이리 불안한데, 핵탄두 수십 발을 보유하고 있던 군산 공군 기지에서 별안간 폭격기가 떴을 때 그를 포착한 북한 병사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도봉산 탄약 본부에서 미심쩍은 폭탄이 반출되었다는 정보가 있다면 또 얼마나 신경을 썼을까. 1980년대 중반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랜스 미사일이 배치됐을 때 저 물건이 대체 어디로 갈 것인지 얼마나 가슴을 조였을까.


 나는 북한의 핵 집착이 짜증나고 우려스러운 만큼 그들이 느꼈을 불안감에 대해 짐작의 폭도 넓어진다. 그들은 그 공포를 1958년 1월 28일 이후 지속적으로 가져 왔었다.


 



tag :

1907.1.29 국채보상운동 시작

$
0
0

산하의 오역


1907년 1월 29일 국채보상운동 시작



 대구의 출판사 ‘광문사’ 특별회의장. 200여명의 청중들이 숨을 죽이며 충청도 사투리 배어나오는 사장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사장 이름은 김광제. 충청도 보령 출신으로 동래 경무관을 지내던 중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상소를 올렸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섬에 끌려가 유배 생활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는 영남 물류의 중심지였던 대구에서 보부상 출신으로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서상돈과 손 잡고 ‘광문사’를 조직했는데, 1907년 1월 29일 김광제는 특별한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나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부터 흡연 도구들을 만장하신 여러분 보는 앞에서 부숴 버릴 것입니다.”


 난데없는 금연 선언이었지만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200여명의 청중 가운데에는 서울에서 일껏 내려온 장지연도 있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바로 그 사람. 사장의 열변은 계속 불을 뿜었다. “황천(皇天)이 감응하여 전국 인민으로 하여금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대사를 무사히 이루시고, 민국을 보존케 하옵소서!” 사장과 부사장의 재떨이와 곰방대를 부숴 버리는 것으로 시작하겠다는 ‘대사’란 바로 1300만원에 이른 국채를 인민의 손으로 갚는 일이었다. “가장 나라를 망치고 가장 시급한 일은 1300만원의 국채올시다!”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국사 교과서에 ‘고문 정치’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는 일본인 메가타는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와서는 무려 1150만원의 차관을 도입했다. 그 이전부터 있었던 차관까지 합쳐서 무려 1300만원의 거금이었는데 이는 대한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었다. 이것을 갚자는 것이었다.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서상돈과 김광제 연명의 발기 취지서가 실렸다.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광문사는 일단 사장의 각오대로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모금 운동에 나섰다. 요즘에야 흡연자가 야만인 취급을 받지만 구한말 한국인들의 끽연은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광범위한 습관이었다. 오죽하면 서양 선교사들이 성경에도 없는 ‘금연’을 기독교 교리로 가르쳤을까. 즉 금연이란 꽤 커다란 자금원의 산출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담배를 끊었다. 남정네들만이 아니었다. 대구 남일동의 일곱 부인들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어찌 남녀가 다르랴’라고 외치며 지니고 있던 은비녀, 은가락지 등 비상시가 아니면 내놓지 않는 패물을 의연했고 여학생들은 머리를 잘라 팔아 돈을 냈고, 경기도 양근에서는 숯장수들이 나무 팬 돈을 모아 냈고 갑오경장 이후 사람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람 취급 못 면하던 백정도 돈을 냈다. 심지어 대구에서는 장애자였던 거지가 20전을 내놓아 사람들을 울리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짐승 취급 받으며 일하던 교포들고, 블라디보토크에서 바닥 쓸고 다니던 한인들도 돈을 모아 보냈다.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먼저 일어나고, 되든 안되든 해 보겠다고 들이박았던 독특한 역사적 DNA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고위층의 참여는 90년 뒤의 금모으기 운동 때처럼 부실했다. 일단 돈으로 수백 억의 내탕금을 보유하고 계셨던 고종 황제께서는 ‘금연’으로 동참하셨다. 동참하셨던 것은 황송한 일이나 금연만으로 그 동참을 끝내신 것은 좀 야속한 일이었다. 물론 그조차 하지 않았던 다른 관료들에 비하면 낫다고 치하해 드려야겠지만.


 일본은 애초부터 이 운동을 “국채보상운동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용은 국권회복을 의미하는 일종의 배일 행위” (통감부 경무총장)로 규정하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친일파 송병준은 국채보상연합회의소에 나와서 “한국이 무슨 수로 거금을 모으냐. 헛수고 말고 일찍 해산하라.”고 바람을 빼기도 했고, 미국의 교사라는 둥 엉뚱한 비난을 하면서 운동을 방해해 봤지만 소용이 없자 운동의 기관지 노릇을 하던 <대한매일신보>를 공격한다. 그리고 1908년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베델이 상하이의 영국 영사관에 불려간 동안, 총무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한다. 모인 의연금이 13만원인데 신문을 통해 6만원이라고 발표했으니 7만원이 빈다는 혐의였다. (독립기념관 자료) 이후 돌아온 베델의 증언과 주변의 증언으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고, 애초에 증거 자체가 없었던 탓에 일본인 판사는 양기탁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아니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횡령을 해?”라는 분노부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하는 의심까지 골고루 불러 일으킨데다가 국채보상운동 지원금 총합소장으로 형식상 대표를 맡고 있던 윤웅렬 (아 이 사람 얘기는 좀 길게 하고 싶은데 생략한다)은 베델에게 3만원 내놓으라고 소송까지 걸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죄 판결은 났지만 상처를 입은 것은 일본이 아니라 양기탁이었고, 대한매일신보였고, 국채보상운동 전체였다. 불신의 바람은 처음의 열기만큼이나 나라를 휩쓸었고,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유야무야되고 만다. 일본 통감부는 양기탁의 무죄 판결을 들으며 이렇게 키들거렸을 것이다. “아니야? 아니면 말고.” 아 어디서 많이 본 풍경......



 전직 하급관리 김광제와 보부상 출신의 서상돈이 주도하고 골초들의 용단과 여인네들의 은가락지와 걸인이 구걸해 받은 돈, 인간 이하 취급을 감수하는 백정이 내민 고기 판 돈, 하와이에서 채찍질 받아가며 일해 모은 달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은 루블이 합쳐진 돈은 어영부영 쓰일 곳을 모르다가 한일합방 후 일본 제국의 아가리에 삼켜지고 말았다. 허탈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허탈하다고 해서 1907년 오늘 대구에서 열변을 토하던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초의 시민운동’ (강만길 교수 왈)의 의미까지 잊어버린다면 일제의 약아빠진 횡령 혐의에 엉뚱한 칼춤을 춘 윤웅렬 이하 심지엷은 사람들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1907년 1월 29일은 나라의 빚을 백성이 갚아 보자고 떨쳐 일어섰던 날이었다.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00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 외인 부채 해마다 이식 불어나니 많은 그 액수 어이 감당하리. 적의 공격 없어도 나라 자연 소멸되면, 아아, 우리 백성들 어디 가서 사나. 이 나라 강토 없게 되면 가옥, 전토는 뉘 것인고” (당시 사람들이 부른 국채보상가 중에서)



tag :

1991.1.30 나는 짐승을 죽였다

$
0
0
산하의 오역

1991년 1월 30일 나는 짐승을 죽였다

바람이 끊이지 않고 몰아치던 지리산 자락, 전라북도 남원의 어느 집에서 한 남자가 죽었다. 남자 나이 쉰 다섯. 자연사라고 하기엔 젊은 나이였고, 역시 그는 식칼에 찔려 피살됐다. 살인자는 나이 서른의 가정주부였다. 치정관계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났고 돈 문제가 얽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원한 관계였다. 무척 해묵은 원한이었다. 무려 21년 전 우물가...에 물 길러 갔던 아홉 살의 소녀는 잠깐 이리 와 보라는 아저씨의 말에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갔고, 그만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그 고통과 놀라움을 어찌 말하겠냐마는, 그 말문을 막아버린 것은 공포였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막막한 공포, 말해 본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캄캄함의 공포, 누구에게든 말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 부르는 현실적인 공포. 아홉 살 소녀의 아픔은 공포 속에 묻혔고, 그로부터 21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찌 어찌 키는 자라고 가슴은 나와 성인이 됐고 결혼도 했지만 그녀는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고, 누군가와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화들짝 화들짝 고슴도치가 되어 버리는 스스로에 절망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스물 한 해 전의 악몽을 떠올려 냈다. 자신의 안에 흐르는 악몽의 강의 새암이 그날이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녀는 그 악몽으로부터 스스로를 떨쳐 낼 방도를 찾았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 자의 공소시효도 15년이면 끝나는 나라에서 자신이 당한 범죄의 가해자를 응징할 방도는 없었다. 마음씨 좋은 파출소 순경이었으면 “아주머니. 정말 미치게 억울하지만 방법이 없어요. 그냥 잊고 사세요.”라고 나직하게 타일렀을 것이고, 좀 까칠한 순경이었으면 “진작 신고 안하고 뭐했어요 아줌마. 대통령이 와도 안 돼. 돌아가세요. 바빠 죽겠는데.”라고 돌아앉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친 가해자를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1991년 1월 30일 여자는 21년 전의 그 남자를 찾아가 칼을 휘두르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그리고 공판 중 그녀가 한 말은 역사에 남는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이른바 김부남 살인 사건이었다.


1월은 한국 여성 잔혹사에서 남다른 달일 것이다. 1992년 1월에는 의붓아버지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성폭행을 당해 왔던 여대생이 그 남자친구와 함께 “이년이 바람이 났다”고 날뛰던 의붓아버지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었다. 1989년 1월 20일에는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마주친 남자가 강제로 키스를 시도하자 그 혀를 물었던 여성에게 무죄가 선고된다. 그런데 그건 2심이었다 1심 판결은 여자의 상해 행위를 인정, 6개월의 징역과 ·1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던 것이다. 도대체 1심 판사는 그 상황에서 혀가 아닌 코를 물어야 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김부남 사건은 이 두 사건의 가운데에 위치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이단옆차기와 함께 선보이는 송강호의 대사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를 들먹일 것도 없이 강간대국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그 타이틀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의 빙산의 일각을 드러낸 이 사건에서, 김부남은 징역 2년 6개월과 집행유예 3년이라는 최종 판결을 받는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의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던 나는 라디오에서 이 뉴스를 들었다. 그때 비분강개하던 택시 기사 아저씨의 멘트는 그 취중에서도 꽤 선연하게 남아 있다. “그런 개새끼는 죽어도 싸지. 미친 놈. 아홉 살짜리한테 어떻게 그짓을 해. 들어가기나 하면 말도 안 해..” 나도 그 말에 동의하면서 함께 욕지거리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하다. “들어가면”, 즉 그 정도의 나이의 여자였다면 그 범죄의 중함이 좀 덜해지는 것이었을까.

택시 기사의 말 뜻이야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고, 내가 동조한 것도 그와 비슷했겠으나 오늘 덜컥 마음에 걸리는 것은 행여 그 속에 숨어 있을지 모를 관대함(?)이다. 김부남 사건 1년 전,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한당이 옴짝달싹 못하게 해 놓고 들이미는 혀를 깨물었던 여자에게 유죄가 선고(1심이
었을망정)되었던 나라에서 가능했음직한.


룸싸롱이나 단란주점에서는 매일같이 ‘초이스’가 이루어지며, 옆에 앉은 여자의 몸을 만지고 주무르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고, 노래방에 가도 두당 몇 만원이면 블루스를 추고 ‘놀아 줄’ 도우미를 찾는 것이 당연한 나라에 살면서 우리는 조금은 긴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김부남이 가련했던 것은 물론 그녀가 어려서 그런 일을 당하고 그 후 수십 년을 악몽 속에서 살았다는 점에도 있지만, 그녀가 나이 스물 아니 마흔 아니 쉰에 그런 일을 당했어도 그 악몽의 무게는 비슷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피해자는 어떤 색마의 비정상적인 기질의 발동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을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를 즐기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의 아픔을 무시하거나 자신이 즐거우면 남도 즐거우리라는 착각하는 우리들에 의해서도 배태되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군가의 예를 들고 싶지만 불필요한 논란이 싫어 참는다.)

영화감독 하명중은 2009년 한국일보에 쓴 글에서 김부남과의 인연을 소개한다. 그는 김부남의 삶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고, 그녀에게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하지만 그녀는 대화를 나눌 상태가 못되었고, 주치의도 그를 만류하여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성폭력을 당한 뒤 버려진 야생 소녀를 다룬 영화 <넬>의 촬영팀에 합류했는데 소녀를 돕는 의사 역을 맡았던 리암 니슨이 그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당신 나라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 날이 올 거요.”

귀국 후 하명중은 간신히 주치의의 허락을 받고 김부남을 만났다고 했다. 내내 무표정하던 그녀는 아들 얘기에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고 한다. “어저께 축구했는데 아들이 멋진 골을 넣었어요. 정말 멋진 골이었어요.” 그러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고 했다. 그 웃음이 진실로 보고 싶다. 얼마나, 얼마나 밝았을까. 그리고 얼마나 얼마나 오래만에 그 두터운 암울함을 비집고 나온 웃음이었을까.

1991년 한 여자가 짐승을 죽였다. 하지만 그 짐승은 짐승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가 빚어낼 수 있는, 빚어내고 있는 사람의 형상 가운데 하나였다.



tag :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