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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2.19 본회퍼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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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4년 12월 19일 본회퍼의 기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겨울. 독일군은 이미 동서 양편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고 있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은 파리를 해방시키고 독일 영토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은 폴란드 국경까지 육박해 왔다. 그 가운데 12월 19일 테겔의 군 형무소 안에 갇혀 있던 한 죄수는 열심히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디트리히 본회퍼. 그는 어머니의 70회 생신에 보내는 축하 메시지이자 1주일 남은 성탄을 기리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는 축시를 쓰고 있었다.

하나님의 선한 능력에 안전하고 고요히 감싸여
놀라운 보호와 위로를 받으며
이 마지막 날들을 여러분과 같이 지내며
함께 새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감옥에 갇힌지 이미 20개월에 가까웠다. 그가 체포된 것은 그 매형 도나니가 14명의 유태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켜 준 것이 드러나고 이어 사무실 수색 과정에서 반나치 조직 활동에 관한 문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반유태주의를 표방하며 정권을 잡았을 때부터 그에 반대했다.
“교회는 바퀴에 깔린 희생자들에게 반창고나 붙이는 일에 만족하지 말고, 바퀴 자체의 바퀴살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아직은 밝혀지기 전이었지만 그는 이미 히틀러 암살 음모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지난날의 무거운 짐이
아직도 우리들을 억압하고 있지만
오, 주여. 놀란 우리들의 영혼에
당신이 예비하신 구원을 주소서!

8남매를 낳은 본회퍼의 어머니의 70회 생일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일찌감치 1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한 아들 말고도 두 아들과 두 사위가 감옥에 있었고, 더구나 아들 디트리히 본회퍼는 약혼한지 3개월만에 끌려간 판국이었다. 의사의 아내로, 귀족 가문의 딸로 안온하게 자라고 지내왔던 그 어머니의 일생에서 1944년 겨울은 못견디게 추운 날이었다. 본회퍼는 그렇게 어머니를 위로했다.

당신은 우리에게 힘겹고 쓰디쓴 고난의 잔을 내미십니다
목까지 가득찬 고난의 잔을.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선하신 사랑의 손으로부터
떨림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그 잔을 받습니다.

본회퍼는 “아리아인만이 교회를 맡을 수 있다”는 법령이 포고되었을 때 그는 이것이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하면서 정부가 권유하는 교회 목사직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교회’를 설립하여 나치에 협력하는 독일 기독교에 대항했는데 1937년 게슈타포는 고백교회를 위한 지하 신학교를 폐쇄하고 목사들을 체포했다. 이 일제검거에서 벗어난 본회퍼는 각처에서 비밀 목회를 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신학교육을 계속했다. 전쟁이 코앞에 닥치고 독일 전체가 전시 체제로 변하자 평화주의자로서 군복무를 할 수도, 나치에 충성할 수도 없었던 본회퍼는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그는 미국 땅을 밟자마자 그를 초청한 라인홀트 니버에게 편지를 남기고 독일로 U턴한다. “미국에 오기로 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저는 독일 국민들과 함께 독일 역사상 지난한 시기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에게 이 세상을
그리고 태양의 빛을 즐거워하는 마음을 또 한번 주신다면
우리는 지나간 해를 돌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온전히 당신께 속할 것입니다.

오늘밤 이 촛불이 따뜻하고 밝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이 이 어두운 세상에 선물로 주신 촟불이
우리를 다시 한번 모이게 하소서.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빛이 어두움 속에서 빛나도 있다는 것을.

수천만 독일인이 하일 히틀러를 부르짖고 그 연설에 도취하여 눈물을 흘리고, 맹렬한 인종적 분노에 사로잡혀 유태인을 공격하고 집시들을 쓸어내고 슬라브인들을 학살하는 가해자가 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본회퍼는 촛불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 빛들은 초에서 초로 옮겨지듯 점점이 늘어나며 독일의 어둠을 밝혔다. 여기에는 그의 매형도 있었고 매제도 있었으며, ‘작전명 발퀴레’의 슈타우펜베르크도 있었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주인공들도 있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두 가지 존재방식에 의해서만 성립된다. 기도와 인간 , 그 사이에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깊은 고요가 이제 우리를 감싸게 될때
우리들 주위로부터 보이지 않게 퍼져나가는
세상의 그 커다란 울림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모든 자녀들의 높은 찬송의 소리를.

본회퍼는 나찌 치하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이렇게 정의했다.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슨 버스를 타고 있을까. 미치지는 않았다 해도 술이나 잠에 취한 것은 분명한 우리의 운전자를 위하여 무슨 행동을 해 줘야 할까. 본회퍼는 미친 운전기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50년 의사 생활 동안 그처럼 신의 뜻을 기꺼이 따르며 죽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교수형 당시 입회한 의사의 말이었다.
 
선한 능력에 포근하게 감싸져서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두려워않고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밤낮으로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새로 맞이할 해의 하루 하루를.

1944년 12월 19일 디트리히 본 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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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12.20 외나무다리의 남과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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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8년 12월 20일 남북 외나무다리에 서다

1974년의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남북은 그야말로 죽기살기의 대결을 펼쳤다. 남한측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는 메달 하나가 아까운 나머지 현역에서 은퇴한지 6년이 지난 현역 신민당 국회의원까지 역도 경기에 출전시켜서 은메달을 땄던 일화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뮌헨 올림픽에서 남한 먼저 금메달을 거머쥔 여세로 아시아 무대에서도 남한을 가볍게 젖히려 했다. 그런데 북한은 운이 없었다.

역도에서 3관왕을 차지했던 김중일이 도핑 테스트에 걸려 금메달 3개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이 덕분에 남한은 북한을 눌렀다. 남한 금메달 16개, 북한 15개. 김중일의 금메달만 인정되었더라면 북한은 가뿐히 남한을 밟았을 터였다. 남한의 입장에서 보면 천우신조.
 이런 전력을 두고 열린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남과 북은 또 한 번 살기어린 경쟁을 벌인다. 개막식 때 남한의 방송은 북한의 입장을 중계하지 않았다. 인공기가 공중파 방송 화면에 휘날리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작부터 치사한 신경전이었던 남과 북의 불꽃 튀는 접전은 무슨 경기든 해당 심판과 감독관 모두가 골머리를 싸매게 만들었다.  남자농구의 남북대결에서 전력상 북한의 열세가 분명해지자 북한팀은 심판 판정을 문제삼아 퇴장해 버렸다. 여자배구에서는 북한 선수들이 남한 선수들이 서브를 넣을 때마다 그 뒤에서 “양갈보들!”이라고 앙칼진 야유를 넣으며 약을 올렸고 심지어 남북한 부심이 한 게임에 배정되자 북한 부심이 남한 부심과는 같이 진행하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심판 배정이 바뀐 적도 있었다.


 메달 레이스도 엎치락뒤치락이었는데 한국이 메달 박스 복싱에서 무려  5개의 금메달을 캐내면서 일단 북한을 누른 것으로 확정되었다.  폐막일 현재 한국 금 17개 북 14개.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경기가 남아 있었다. 차범근 조광래 김재한 최종덕 김호곤 등 한국 축구의 첫 ‘골드 제너레이션’들이 버틴 한국 축구 대표팀이 승승장구 결승에 올랐는데 북한 대표팀 역시 아시아 각국을 물리치고 결승에 오른 것이다. 글자 그대로 외나무다리였다. 테헤란 아시안 게임 때만 해도 축구에서 북한을 겁냈던 한국팀은 북한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져주기 경기까지 감행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일전이 들이닥친 것이다. 1978년 12월 20일이었다.


 아시다시피 태국과는 별 시차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저녁 나절 벌어진 이 경기는 거의 3천 8백만 국민 대부분이 지켜보게 된다. ‘북괴’ 선수들과의 대혈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미 축구 경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메달레이스에서 졌을망정 축구 결승을 이기면 까짓 금메달 레이스에서 진 것 정도는 기분상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다.  경기 자체는 명승부였다. 동네 평상에에 누군가 갖다 놓은 흑백 TV (지금 우리 집의 컴퓨터 모니터보다도 작았던) 앞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운집해서 경기를 지켜보았던 기억이 난다.  차범근이 단독대쉬해서 거의 골과 다름없는 장면을 만들었을 때 그 수십 명은 자지러지며 일어섰고 북한 골키퍼가 간발의 차로 공을 그러쥐자 격한 아쉬움의 탄성을 일제히 토해냈다. 그 골키퍼 때문에 나는 괜한 욕을 먹어야 했다. 그 골키퍼 이름은 김종민(김정민?)이었다. “형민이 니 저 뒤로 가라. 니 이름 비슷한 북한 골키퍼 때문에 열받아 죽겠다.” 아니 나는 형민인데요 불만스레 한 마디 하자 바로 험한 말이 날아들었다. “어른이 하라면 하는 기지 말이 많다,”

 일진일퇴, 선수들도 필사적이었다. 박성화 선수는 다리에 쥐가 나자 못으로 다리를 찔러 가며 뛰었다. 파상풍 따위 염려할 계제가 아니었다.  남한의 김정남 코치, 왕년의 명수비수였던 그는 한국 골대에 공이 가까이 가기만 하면 수비의 ABC고 뭐고 "걷어내! 걷어내란 말이야!"를 부르짖었다. 북한 코칭 스탭도 “기동하라! 기동하라”를 목이 터져라 외쳐대며 사기를 돋웠다. 나는 지금도 이 경기에서 남한팀이 맞았던 최악의 위기 상황을 선명히 기억한다. 골문 혼전 과정에서 몸을 날리던 남북의 선수들, 그리고 가까스로 공을 걷어 냈던 최종덕의 표정까지. 그리고 위기 다음 비춰지던 한국 코칭 스탭들의 죽다가 살아난 표정까지.

전후반 90분, 연장 30분을 치르고도 골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는 승부차기가 없었다. 남북의 공동우승이었다. 함께 시상대에 올라가야 했는데 문제가 벌어졌다. 남한팀 주장 김호곤이 시상대에 올라서려는 것을 북한팀 선수가 막은 것이다, 김호곤은 두 번씩이나 시상대에서 밀려 떨어졌다. 성질 같으면 주먹부터 나갔을 상황. 김호곤이 만약 욕지거리와 함께 완력을 썼더라면 방콕 아시안 게임 폐막식 직전의 축구 시상식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재연되었으리라.    하지만 김호곤은 슬기로운 한 마디를 던진다. “세계가 우리를 보고 있다고요. 웃으면서 포즈 취해 줍시다.”     이 우여곡절과 구절양장의 고갯길을 넘고서야 남과 북은 시상대에 함께 설 수 있었다.

 이 시절 남과 북은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의 대결의 연속 선상에 있었다. 서로에 대한 인정은 커녕, 살기 띤 무시가 서로의 기본 자세였으며 상대방에게 깨진 뒤 상대방이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한낱 스포츠 경기에서도 남과 북은 그랬던 것이다.  정작 피튀기게 싸우는 두 뿔 달린 염소는 몰랐지만 그들의 ‘혈전’은 외국인들에게 신기한 볼거리였고 경멸스런 핀잔의 대상이었다. “쟤들은 말도 생김새도 똑같은 애들이 왜 저래.”  외국인까지 갈 것도 없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기에 그 모습은 또한 우습지 아니한가.
  
그 피어린 결전(?)을 벌이던 1978년께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쌓아 가고 있던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이 천수를 다했다. 그 죽음의 소식이 들리자마자 대한민국 전군에는 비상경계령이 내렸고, 앞날이 어찌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는 가운데 고인에 대한 증오로 그득한 언급들 또한 덩달아 막춤을 추었다.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미리 죽었다는 둥 (김정일은 6.25 전쟁 때 유치원급이었다) 그 죽음을 애도하거나 그 삶을 찬미하는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특별히 비상근무를 하겠다는 둥...... 

 이런 꼬락서니들을 보면서, 또 그들이 흘리는 말(言) 말 말을 들으면서 나는 1978년 12월 20일의 남북대결을 씁쓸하게 떠올렸다. 과연 김정일이 잘 ‘뒈졌다’ 환호를 지르면서 북한 정권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종북’의 딱지를 갖다붙이는 이들은 과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북한은 이기고 봐야 했고, 시상대에서 상대방을 밀어내기까지 했던 그 광기의 세월을 지금에사도 이어가고 싶은 것일까. 누군가 떨어뜨리고 떨어지고 이를 갈며 울부짖어야 하는 외나무 다리를 다시 걷고 싶은 것일까.초상집 앞에서 어허 그 자식 잘 죽었네 라고 너스레를 떠는 자가 그 초상집과 원수를 지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 나로서는 그들이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나 (1978년으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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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2.21 라듐과 퀴리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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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2월 21일 라듐과 퀴리 부인

어느 출판사에서 위인전을 내놓든 절대로 빠지지 않을 인물이 있다면 국내에선 세종대왕과 이순신일 것이고, 해외 인물로는 에디슨이나 퀴리 부인쯤 될 것이다. 퀴리 부인. 불굴의 의지로 연구를 거듭하여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여류 과학자. 나는 그녀의 본명을 과학 교과서가 아닌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녀의 딸은 어머니의 전기를 썼는데 필시 그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글이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점령 하의 폴란드, 폴란드 어를 몰래 공부하던 교실에 들이닥친 러시아 장학사, 러시아 어 테스트를 하려는 장학사에게 들이밀어지는 소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그녀는 멋지게 대답함으로써 깐깐한 러시아 장학사를 만족시키지만 장학사가 교실 밖으로 나간 뒤 설움에 겨워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지문은 끝났다.

그러나 그 똑똑한 소녀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는 그렇게 사랑하는 조국 폴란드에 머물지 못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폴란드나 인근의 독일에는 여자가 대학에 가는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그래도 일부 여학생을 수용하고 있던 프랑스로 갔다. 거기에서 그녀는 입주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며 의지를 불태운 끝에 소르본느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후 지난한 연구 과정에서 마리아는 든든한 동반자로서 후일 그녀가 틈만 나면 "그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부 금실을 자랑했던 피에르 퀴리를 만나게 되고 ‘퀴리 부인’의 이름을 얻는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둘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마리아가 피에르에게 보낸 연서의 일부. 역시 이과는 이과다. 진솔하고 우직해 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각지고 딱딱한 연애편지라니. 하나 더 얘기해 볼까. 어느 사진에서든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다. 그것은 실험 중 어차피 묻게 될 얼룩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에서 비롯된 패션이었다.


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구벌레가 결혼한 해는 1895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또 1년 뒤에는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성질, 인광(燐光)의 방출을 발견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퀴리 부부는 우라늄광(피치블렌드)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우라늄에서만 방출된다고 보기엔 너무 강하다는 점에 착안했고, 그 속에 있는 방사능성 원소를 규명하려고 애썼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1898년 12월 21일. 이 연구 속에 사랑하고, 사랑으로 연구했던 과학자 커플은 1톤이 넘는 피치블랜드로부터 10만분의 1 그램에 불과한 새로운 원소를 분리하는데에 성공한다. 이것이 라듐이었다. 방사능이란 것이 발견된 것은 우라늄에서였지만, 라듐은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퀴리 부인은 그 머리 아픈 연구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자연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만큼 인류는 충분히 성숙했는가.” (노벨상 수상 연설 중) 라듐을 주머니에 넣어 다닐 정도로 방사능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했고 결국 방사능이 원인이 된 빈혈로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그녀는 자신의 업적에서 풍기는 불길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바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던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부인은 라듐을 특허 내어 떼돈을 벌라는 권유에 이렇게 대답한다. “라듐의 소유자는 지구입니다. 누가 이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요. 원소는 모든 사람의 것인데 어떻게 나 혼자 특허를 낼 수 있겠어요.” 대서양을 건너 미국까지 누비면서 연구 자금을 긁어모으는 수고를 하면서도 그녀는 라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았다.


대개 현대 과학자들은 퀴리 부인이 강조한 인류의 ‘성숙’보다는 파스퇴르가 말한 바 “과학에는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쪽에 동조하여, 보다 더 위험한 물질을 ‘우리 편’의 무기로 만드는 데에 더 진력했다. 또한 자신의 업적을 자연과 인류 일반으로 돌리는 일은 점차 바보의 행동으로 전락했고, 과학의 성과는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인가에 좌우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1898년 12월 21일 환기도 안되는 지하 연구실에서 방사선에 몸이 유린되어 가면서 세상에 라듐이라는 원소를 끄집어냈던 한 여류 과학자의 검은 옷은 기억해 둘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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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22 콘두카토르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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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2.22 “컨두카토르”가 무너지던 날

루마니아는 좀 독특한 나라다. 이름 자체가 로마인의 땅이라는 뜻으로서 슬라브족이 대세를 이루는 동유럽에서 일종의 섬이라고 불리울 만큼 독특한 정체성을 가져온 나라이며, 동유럽을 장악했건 오스만 투르크에 끈질기게 저항했던 드라큘라 백작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 역사를 더듬자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고, 20세기 이 나라의 역사를 감히 정리한다면 매우 줄을 잘 못 섰거나, 잘 섰더라도 운이 없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우선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에 가담한 것까진 좋았는데 지척에 있는 오스트리아와 그 큰형님 독일군에 의해 참패를 당하고 연합국 측에서는 유일하게 추축국에 항복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결국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승전국이 되어 한숨 돌리나 했는데, 몇 년 뒤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의 부산물로 소련이 그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다. 소련의 날강도짓에 분노한 루마니아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 그 주요한 동맹국이 됐다. 루마니아군은 독일군과 함께 소련 깊숙이 침투한 군대였다.


전쟁에서 패한 뒤 루마니아는 소련에게 상당한 영토를 빼앗기고 공산화된다. 하지만 루마니아가 독일 나찌 앞에서 엉덩이춤을 추던 그 시절에 단호히 나찌에 반대하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면서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젊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니콜라이 차우셰스쿠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만난 루마니아 공산주의의 대부 게오르규 데지의 심복이 됐을 뿐 아니라, 반파쇼 투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싸웠던 루마니아의 혁명 영웅이었다.


그는 데지가 죽은 뒤 루마니아의 정권을 잡았다., 그게 1965년이었다. 정권을 장악하는 와중에서 있었던 정적 제거 과정은 굳이 들먹이지 않겠다. 그보다는 그 뒤 그의 일생이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일단 철의 장막이 드리워진 동유럽에서 그는 놀랄만큼의 ‘주체적’ 정책을 폈다. 이를테면 소련 지도 하의 집단 방위(?) 체제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루마니아의 참여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군대 즉 소련군, 동독군, 불가리아군, 헝가리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를 향해 탱크를 돌격시켰을 때 차우셰스쿠는 결연히 그에 반대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창했던 두브체크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소련의 패권주의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렇게 독특한 공산주의자가 서방의 찬사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그의 운명은 1971년을 기점으로 매우 불운한 쪽으로 기운다. 그 시점은 그와 비슷하게 ‘주체적’ 외교를 펴던 북한을 방문했던 즈음과 일치한다. 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는 당시 북한이 지니고 있던 여러 장점들보다는 한 가지에 꽂혔던 것 같다., 바로 ‘수령관’이었다. 남로당과 연안파, 소련파, 그리고 갑산파까지 숙청한 뒤 ‘민족의 태양’으로 군림해 온 김일성의 모습은 차우셰스쿠에게 ‘보아도 보아도 그 흠모감이 끓어넘치는’ 모방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숭어가 뛰면 망둥이가 뛰고 원님보다는 아전이 더 요란하다고, 그는 북한보다 더한 유일 체제를 확립하려 든다. 스스로 콘두카토르 (지휘자)라고 일컬은 그는 전지전능한 지도자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고, 그 ‘전지전능’을 자의적으로 발휘했다.


그의 생일은 당연히 국경일이었으며 나중에는 부인 엘레나의 생일도 국경일로 정했다. TV프로그램은 일종의 ‘땡차뉴스’ (우리 5공화국 때의 땡전뉴스보다 더한) 에 불과했고, 그를 칭할 때마다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걸 청출어람이라고 불러야 할지, 유유상종이라고 불러야 할지.

그의 행적을 일일이 들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만 얘기해 보자면, 인구가 줄어드는 기미가 보이자 전 국민들에게 피임과 낙태, 이혼을 금하는 황당한 정책을 강요한 점을 들 수 있겠다. 콘돔을 쓰는 경우는 ‘국가반역자’로 몰려 잡혀갔다. 북한에서 인민문화궁전 (또는 주석궁?)을 보고 감명 받은 그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전같은 건축물을 세워 스스로의 ‘가오’를 잡기도 했고 인구 2천만이 좀 넘는 나라에 3백만 개가 넘는 도청기를 뿌려 국민 모두가 국민에게 감시역인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 이때쯤, 아니 벌써부터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권력에 취한 드라큘라 백작일 뿐이었던 것이다.


1989년 마침내 타미소아라라는 도시에서 반 차우셰스쿠 봉기가 시작되고 이 시위가 번져나가면서 그는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보안대 (세큐리타트)가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는 더 큰 봉기를 불러왔다., 12월 21일 그는 생방송이 진행되는 가운데 운집한 루마니아 인민들 앞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와 반란의 진압을 호소한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차우셰스쿠 물러가라는 구호였다. 이 순간 얼음처럼 굳어져버린 차우셰스쿠의 표정 역시 전 세계로 전파된다. 연설을 하다가 말문을 잃은 그의 표정은 길 잃은 어린아이와도 같았고 몇 마디 더 내뱉은 말은 연설이 아니라 웅얼거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22일 시위대와 그에 합류한 정규군이 세큐리타트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대통령궁에서 헬리콥터가 뜬다. 차우셰스쿠, 자신이 루마니아라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고 우겼던 콘두카토르의 도주였다. 그로부터 3일 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100발의 총알을 맞고 벌집이 된 채 세상을 뜬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의 이상을 앞장서서 무너뜨린 사람이었고, 반파쇼 투쟁의 영웅이었지만 파시즘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개인숭배의 바벨탑을 쌓아올렸으며, 자신이 숭배했던 나라의 지도자만큼이나 그 국민들을 괴롭혔다. 그처럼 TV에 생생하게 중계된 독재자의 몰락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연설을 시작했다가 얼음이 되어버렸던 그의 표정, 그리고 인민봉기 와중에 떠오르던 헬기까지.

그가 희망한 목적지는 두 군데로 추정된다. 하나가 북한, 그리고 하나가 리비아,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가 만나고 싶어하던 두 나라의 ‘지도자’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저승에 모여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사진은 차우셰스쿠의 우상화 그림이다. 그 화풍 솔직히 낯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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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23일 논바닥의 보물, 세상에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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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3년 12월 23일 논바닥의 보물 세상에 공개되다

1993년 겨울,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 근처에서는 주차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능산리 고분들은 일제 시대 또는 그 이전에 도굴이 끝나 버리기는 했지만, 사비, 즉 부여로 도읍을 옮긴 뒤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들로서 사적 13호로 지정, 깔끔하게 정비를 끝낸 터였다.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고, 부여군청이 나서서 관광객들을 위해 주차장을 확장하기로 한 것이다.,
...
부여군청이 주차장을 조성하려고 눈박아 둔 곳은 고분군과 부여 나성 사이의 계단식 논들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서 할 일이 있었다. 매장 문화재 조사였다. 하지만 질퍽거리는 논바닥을 파헤쳐 봐야 똑똑한 것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한 사람은 없었다.

12월 중순일이면 무지하게 추운 때였다. 발굴 현장에 계속 흘러드는 논물을 고랑을 파서 끌어내면서 힘겹게 작업을 하던 도중, 12월 12일 오후 4시30분, 절집 공방의 물구덩이라고 추측되던 곳에 있는 잘게 부수어진 기와조각이 한 연구원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그곳을 파내려갔다. 1m 정도 파냈을 때 불에 탄 흔적이 있는 기와, 뭔가 뚜껑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 있었다. 이미 마음이 부풀대로 부푼 조사단은 전원 달려들어 4시간 만에 유물을 온전히 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열흘 남짓한 처리 작업 끝에 유물의 본모습이 드러났을 때 연구진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형태가 완벽에 가깝게 남은 금동대향로였다. 무령왕릉 발굴에 비교되는 고고학적 대발견이 실로 우연하게 이뤄진 것이다. 이는 12월 23일 언론에 공개된다. 1993년 12월 23일의 모든 신문의 톱기사는 대문짝만한 향로의 사진으로 장식됐고 방송 리포터들은 흥분한 어조로 이 기적적인 유물을 찬미했다.

고고학계는 향로가 온전하게 보존됐던 이유를 완벽한 진공상태를 만들어낸 ‘진흙’에서 찾았다. 발견 당시 백제금동대향로는 목곽 수로 안의 진흙 속에 있었는데 주변에는 섬유조각이 발견됐다. 향로를 쌌던 것으로 추정된다. 누군가가 어떤 위기나 급박한 상황을 맞아 자애지중지해 오던 향로를 싸서 물 속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그 주인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가 던져버린 향로는 진흙 속에 형성된 진공 상태에서 1400년을 견뎠다.

전체 높이 62.5㎝에 용 모양의 향로받침 위에 연꽃 모양의 향로 몸체가 우아하게 피어오른 듯 사뿐하게 얹혀 있다. 뚜껑 부분에는 산봉우리들이 솟아 있고 그 안에는 말타고 사냥하는 사람, 신선들, 호랑이·사자·원숭이·멧돼지·코끼리·낙타 등 여러 동물들을 생동감 있게 빚어놓았다. 손잡이 부분은 봉황이 날아갈 듯 깃털을 퍼득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표현했다. 봉황 바로 아래에는 다섯 악사가 각각 소·피리·비파·북·현금을 연주하고 있다. 모습 하나 하나가 생생하고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동서교류사의 탁월한 연구가 정수일 교수의 말을 빌려 본다. “지금까지 이웃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 향로의 높이는 보통 20cm 안팎인데 비해, 이 백제 향로는 그 3배나 되며, 구성요소, 갈무리하고 있는 사상이나 상징성은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특히 당대 동서문명의 제반 요소들을 잘 어우르고 있는 점에서는 실로 독보적이다.”

그래서 이름을 짓는 것도 힘이 들었다. 처음에는 향로에 짙게 드리운 도교적 영향을 감안하여 용봉봉래산향로로 불렀다가 불교 쪽에서는 연꽃 무늬나 새겨진 산봉우리가 수미산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수미산향로라고 부르자고 제안했고 외국 학자들도 끼어들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자 결국 “백제금동대향로”로 낙찰을 보게 된다.

어느덧 한국 고대 미술의 상징같이 되어 버린 이 금동대향로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성의 있는 매장 유적 조사였다. 논바닥에 있을 것이 무엇이 있겠냐면서 하시라도 주차장을 넓혀 오는 손님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것만을 바라보았다면 아마 4대강 유역에서 흔히 벌어지는 것처럼 집채 만한 중장비들이 즉각 투입되어 논바닥을 갈아엎었을 터이고, 금동대향로는 어느 포크레인의 삽날인지도 모를 것에 박살이 나거나 더 깊숙이 묻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1400년 전 백제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들여 새기고 조각하고 모양을 냈던 국보 287호 금동대향로를 찬찬히 들여다봐 보시기 바란다. 그 안의 인물들과 동물들이 소리를 내고 말을 거는 착각에 빠져들 정도로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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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2.24 크리스마스 이브의 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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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1980. 12. 24 타잔 교수대에 서다


사형 집행이 사실상 ‘무기 연기’된 요즘은 덜 할지도 모르지만, 12월은 사형수들에게 공포의 달이었다. 해를 넘기지 않기 위해, 또는 다음 정권에게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법무부 장관이 사형 집행에 서명이 무더기로 이뤄지는 일이 잦았던 탓이다. 대한민국에서 마지막 사형 집행은 97년 12월 30일에 있었다. 이 날 23명이 한꺼번에 목이 매달렸다. 1980년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형집행이 있었다. 사형수 가운데에는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자도 있었다. 그 이름은 박흥숙이었다.


 광주 무등산 바람재에서 토끼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너덜겅 약수터. 그 근처에 광주 월드컵 경기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있는데 그 발 아래 계곡에 해당하는 동구 운림동 산 145번지 증심사 계곡 덕산골(속칭 무당골)에 그는 살고 있었다. 그의 별명은 ‘타잔’이었다. 이소룡같은 무술 배우를 꿈꾸며 하루에도 몇 번씩 웃통 벗고 무등산을 종횡무진하다 보니 붙은 멸명이었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사법고시 합격의 포부도 가지고 독학에 정진하기도 했던 청년이었다. 이런 무등산 타잔에게 비운의 날이 닥친 것은 1977년 4월 20일이었다.


 무당골에 산재해 있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광주시 철거반원들이 나타난 날이었다. 평범한 아이들의 아버지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을 그들의 임무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집을 부수는 일이었다. 무당골의 철거는 상당히 진행되어 당시 현장에는 박흥숙의 집을 포함하여 4채만 남아 있었다. 봐줄만큼 봐줬다고 생각했던지, 전국체전을 앞둔 상부의 압박이 거센 탓이었던지 철거반원들은 필요 이상의 과잉 행동을 보인다. 몇 안되는 세간을 끄집어낸 뒤 ‘철거’가 아니라 ‘방화’를 해 버린 것이다. 즉 집에 불을 질렀다. 박흥숙이 “지붕위에 두른 천막만이라도 걷게 해 달라.”고 사정했으나 오불관언이었다.

 판자에 천쪼가리만 둘렀던 박흥숙의 집은 성능 좋은 불쏘시개였고, 반쯤 정신이 나간 가족들의 비명 속에 활활 타올랐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집 안에 모아둔 돈 30만원이라도 건지려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철거반원들에 의해 제지됐다. 박흥숙과 그 여동생 박정자와 남동생 둘, 그리고 어머니가 살던 판자집은 이내 ‘철거 완료’됐다. 이윽고 다른 집을 철거하고 돌아선 철거반장의 눈 앞에 시퍼런 인광을 발하는 박흥숙이 나타났다. 그 손에는 철공소에서 일하던 시절 만들었다는 사제총이 들려 있었다.

나이 서른 아홉부터 스물 일곱까지의 철거반원들은 그들의 임무 때문에 “철거를 위해 불을 지르는” 냉혈한이 되었다가 이제는 청년의 돌아가 버린 눈동자 앞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포로가 됐다. 그들은 노끈으로 몸이 묶여 박흥숙이 사법고시 공부방을 만들기 위해 파 놓았던 구덩이로 밀어 넣어졌다. “광주 시장에게 전화하겠다.”고 여동생이 산을 내려간 얼마 뒤 마침내 타잔은 분노의 광기를 터뜨리고 말았다. 포로가 됐던 5명 중 4명이 박흥숙이 휘두른 쇠망치에 목숨을 잃었다.

사건 이후 자수한 박흥숙은 사형 선고를 받는다. 공무 집행 중인 공무원을 고의적으로, 그것도 4명씩이나 죽여 버린 살인범들에게 관용을 베풀 여유는 유신정부에 없었고, 기실 그 뒤의 어떤 정부도 갖추기 어려운 덕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혹한 시절에도 박흥숙의 사형만은 면해 달라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훗날 미 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역시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조선대생 김현장이 그였다. 김현장은 "어렵게 마련한 집이 불태워지고 어머니마저 철거반원에 밀려 실신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죄에 대해 사회의 관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힘입어 박흥숙 구명운동이 일어났지만 법의 이름으로 걸린 빗장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광주의 피보라가 몰아친 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교수대 앞에 선다. 그의 최후 진술을 그대로 옮겨 본다.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오갈데 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렀습니다. 돈이나 천장에 꽂아 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도 깡그리 타 버렸습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

사법고시 합격과 무술배우 이소룡을 꿈꾸며 기운차게 무등산을 뛰어다녔던 효성 지극하고 똑똑했던 한 청년을 죄인으로 만든, 그리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무원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삶의 터전에 불을 놓게까지 만들었던 이유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4명의 머리가 쇠망치로 뭉개지고 한 명의 목숨이 교수대에 매달렸는데, 과연 그 책임은 그들만의 것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박흥숙 외에 그 사건에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으며 비슷한 일은 이후로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되었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었고, 살인자가 되었다. 그 대부분은 대개 너무 평범해서 문제였던 사람들이었다.

1980년 뒤의 예수의 생일 이브에 죽어간 박흥숙을 만나면서 예수는 무슨 말을 했을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을 탓하면서도 이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을까. 열심히 살아가던 한 청년과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던 공무원들의 생명의 박탈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자이면서도 혀를 차고, 가슴을 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를 부르짖던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 (누가복음 6장 23절,24절) 그리고 이렇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그러하리라 믿으며, 무등산 타잔과 불운했던 공무원들을 감싸 안고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사지로 내몬 자들을 저주하는 예수였으리라 믿으며 그의 생일을 축하하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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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2.25 낮은 곳으로 임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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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5년 12월 25일 지극히 낮은 곳을 향했던 의사

예수가 탄생한 지 1995년 (12월 25일이 원래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던가, 서력 기원 계산이 잘못되었다던가 하는 반론은 받지 않겠다. 그냥 그렇다고 친다.)되는 해, 예수는 아마도 꿈에도 몰랐을 동쪽의 머나먼 나라에서 평생 그의 가르침을 따르던 의사 하나가 거룩하다고 감히 표현해도 무방한 일평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이름은 장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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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려 자신은 부인했지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모델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일찌감치 의사였다. 1928년 그의 나이 열 일곱에 그는 경성의전에 입학하고 32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스승 밑에서 조교로 일하며 실력을 쌓는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경성의전 교수 또는 도립병원장으로 가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제안 받지만 그를 정중히 거절하고 평양의 후미진 병원으로 향한다. 그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를 본 한 할머니는 청진기만 대면 병이 낫는 줄 알고 가슴에 청진기를 한 번만 대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치료비가 없어 평생 의사 얼굴 한번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예수는 말씀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켰지만 그는 의술로서, 그리고 더 크게 인술(仁術)로서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의 외삼촌 강양욱이 조선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고 그에 반대하는 목사들이 탄압받던 시절, 김일성대학에 재직하던 그 역시 북한 보위부의 뒷조사를 받지만 보위부 일꾼들이 감동할 만큼 그의 행적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평양에 육박할 무렵, 김일성대학 병원 근처에 떨어진 포탄에 놀란 의사들이 사색이 되어 피할 것을 청했을 때 “의사가 되어서 환자들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불같은 호령을 내렸던 의사로서의 열정은 기독교를 마뜩지 않아 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먼 훗날 뒤통수에 난 혹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던 김일성 주석이 “장기려가 있었으면 내 몸을 맡길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는 전언이 전해지니 미루어 짐작이 간다.


긴박한 전쟁통에 그는 아내와 다섯 아이를 북에 남긴 채 둘째 아들 하나만 데리고 월남해야 했다. 이윽고 그의 외롭지만 의롭고, 고되지만 거룩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된다. 1951년 1월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워 전쟁과 가난에 신음하는 바닥의 사람들을 잡아 준 것은 그 시초였다.

“무엇보다 잘 먹는 게 중요합니다. 꼭 잘 먹어야 해요.” 의사의 신신당부를 들은 환자는 의사가 써 준 처방전을 들고 원무과로 갔다. 그런데 원무과 직원은 그 처방전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이 사람에게 닭 두 마리 값을 주고 보내시오.” 환자에게 돈 받을 생각보다는 돈 내줄 궁리를 하는 의사는 일단 경영자로서는 실격이다. 직원들의 불만도 있을 법했다. 당신은 처자식이 북에 있지만, 우리는 주렁주렁 남쪽에 달고 살고 았단 말이다! 그래서 적잖은 하소연도 하고 압박도 이뤄졌으리라. 그때 한 환자가 원장에게 자신의 빈한함을 호소했고 원장은 또 한 번 기가 막힌 처방전을 내린다. “직원들이 퇴근한 뒤 뒷문으로 오시오. 내가 문을 열어 두겠소.” 어떤 가난한 여인에게는 아예 탈출을 사주하기도 한다. 치료비가 없다고 호소하는 여인의 손을 잡고 짤막하게 기도를 한 뒤 장기려는 눈을 빛내며 말한다. “기회를 봐서 환자복 갈아입고 탈출하시오.”

장기려는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한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나는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기려는 그렇게 인자한 의사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짖은 예수를 대신하여 한국 기독교계에 침투한 마몬신을 일생 내내 혐오했다.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되고, 특히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대리석으로 으리으리하게 지어지고 그 종탑이 바벨탑같은 한국의 교회들에게서 그는 맘몬의 악취를 맡고 있었다. 그의 말을 계속 옮겨 본다.

“나는 무신론, 사회주의를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계급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외침은 실로 인류의 여론이다. 부자들이 고통을 당할 때가 오리라. 이 문제는 다만 부자 계급만의 일이 아니다. 부족하다고 해도 우리도 어느 정도 재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는 일은 없는가? 아, 크리스챤이 믿음의 형제의 궁핍을 보고도 단순한 동정심조차 일으키지 않고 조금의 기부금도 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이 얼마나 저주받은 사회인가.”


성전 앞에서 비둘기 파는 자들을 징치한 예수처럼, 그는 이 말로 우리들 마음 속에서 활개치는 탐욕의 멱살을 잡는다. 그리고 이미 배부른 제사장들의 전유물 , 로마 제국의 무기로 전락해 버린 한국 기독교를 들어 메친다.

그는 평생 버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가불투성이의 인생을 살았다. 60년 의사 생활에서 남은 것은 천만원이 든 통장 하나. 그는 그것을 자신을 마지막으로 간호했던 간병인에게 전한다. 당뇨병으로 고생하면서도 기력이 있을 때까지 무의촌을 돌면서 자신이 평생 믿고 따른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위해 평생 동안 수절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를 ‘특혜’라고 거부하는 바람에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예수가 이 땅에 온 날, 그는 이 땅을 떠났다. 여기에는 뭔가 뜻이 있을 것만 같다.

그의 말 하나만 더 인용해 보자. 그는 예수가 하고 싶어 좀이 쑤실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세워 두거나 달아 놓거나 달고 다닐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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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2.26 위대한 백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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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4년 12월 26일 위대한 백지의 시작

10월 24일 산하의 오역에 74년 그날 동아일보에서 열린 “자유언론수호대회”를 끄적인 바 있는데, 오늘은 그 후속편이 되겠다. 언론이 말 그대로 재갈이 물리고 결박당하고 주리가 틀리던 시절이었다. 현재 방송통신위원장이시며 여러 모로,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서 원성을 들으시는 그분도 기사 잘못 썼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얼굴을 못알아보도록” 두들겨 맞고 나...온 이력이 있으시고, 비근한 예는 열 손가락으로는 꼽을 수도도 없을 정도로 비일비재했다.


말(言)하고 논(論)하는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히고 사탕발림만 굴려야 했으니 그 갑갑함이 여북했을까. 대학생들이 대놓고 신문을 불태우며 당신들의 생존 가치를 증명하라고 조롱하는 상황에 이르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드디어 그 직을 걸고 투쟁에 나선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정권은 당황했다. 믿는 도끼까지는 아니었어도 부뚜막의 소금 정도로서 필요할 때 국에 집어넣으면 되는 존재로 치부했던 언론 종사자들이 이렇게 자유 타령을 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집단으로 반항하다니. 그렇다고 명색이 자유를 억압하는 빨갱이들에 대항한다는 민주공화국 정부 체면에 일제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신문 동아일보를 대놓고 즈려밟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보자보자하니 문제가 심각했다. 그때껏 알아서 차단되어 왔던 정보가 봇물 터지듯 지면을 장식하는 게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꼼수 하나는 세계 정상급인 대한민국 정부는 가공할만한 꼼수 하나를 창안해 낸다.


1974년 12월 26일 동아일보 독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신문지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던 광고란들이 텅텅 비어 운동장같이 휑해 보이는 신문이 배달된 것이다. 광고주들이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판을 회수해 간 결과였다. 수십 년 거래해온 기업들도, 광고국과 유난한 인연을 맺어온 이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대번에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튿날 3면 광고난에는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봉화같은 광고가 실린다. ‘민주시민’들의 광고게재를 부탁하는 ‘동아일보 신문광고PR 1’이었다.


이 봉화에 처음으로 호응한 것은 역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었지만 터진 물꼬 뒤로는 해일같은 봇물이 밀려들었다.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었다.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 거야!”라고 선언한 이대S생부터, “동아일보 배달원임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외치는 배달원 15인까지, “ “존경하는 삼천만 배달민족이여 권력과 악질 재벌들에 대항하여 우리 국민의 선두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아를 구하는 데 모두 일어납시다. 그리고 권력의 앞잡이나 하고 재벌의 돈이나 받아먹는 다른 신문이나 방송은 구독이나 청취를 하지 맙시다.” 라고 부르짖은 강경파부터 “배운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사죄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소심파까지, 대한민국 장삼이사들의 광고 행진이 이어진 것이다.

광고주들이, 아니 그들 머리 위에 선 정권이 밀어버린 백지 위에서 공화국의 시민들의 난장이 벌어졌다. 그들의 광고를 보면서 기자들은 울었고, 시민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실은 광고에 공감하며 울었다. 요즘 말로 “더 이상은 쫄지 않겠다.”는 선언들의 퍼레이드였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생생한 의인화였다.


물론 그 눈물겨운 광고의 홍수는 백일 천하에 그쳤다. 사측은 75년 3월 8일 경영난을 이유로 부서를 폐지하고 18명을 전격 해임했고 이에 항의하여 송건호 편집국장이 사표를 제출하고 기자와 아나운서들이 제작거부로 맞서자 130명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을 해고하는 칼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모난 돌은 정을 맞고 나선 사람은 다쳤다. 그 정에 머리가 깨진 ‘돌’들은 많았고, 자상 타박상 정신적 외상 골고루 입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저항의 짜릿함은 일종의 마약처럼 그들의 골수에 스며들고 유전처럼 전이된다. 백지 광고에 저항했던 기자들이 다시 한 번 어깨를 걸었고, 동아일보 성원 광고를 낸 사람들과 그 후대가 그들을 떠받치고 일어섰을 때 한겨레 신문이 창간된 것은 그 한 예일 뿐일 게다.


1974년 말미를 장식한 백지의 향연. 그리고 그 백지를 스스로 채워간 국민들의 드라마는 우리 현대사가 기억해야 할 아름다운 장면 베스트에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먹고 살기”가 지금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결코 녹녹하지는 않았던 시절, ‘먹고 살기 힘든’ 시민들과 그때만 해도 처우가 일반 직장보다 낫다고는 볼 수 없던 기자들의 동맹의 깃발이 미려하게 펄럭인 셈이었다. 동아일보에 밀려든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선배들의 글자 한 자 한 자를 다시 읽어 본다. 여러 생각이 엇갈린다. 참 그때는 먹고 살기 힘들었는데...... 보릿고개도 면한지 얼마 안되었었는데..... 대통령 욕하면 징역을 몇 년을 갈지 모르는 시대였는데..... 그들은 그렇게 했었는데..... 우리는?? 나는? 에이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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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2.27 닥치고 반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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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7일 닥치고 반탁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역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우리 현대사는 더더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대동단결’했던 순간은 실로 드물다. 물론 사안마다, 그리고 동네마다 하나가 되어 작은 승리를 일군 기억은 있을지 몰라도 3천만 또는 4천만 백성이 하나되었 일어선 기억은 흔하지는 않다. 그 중의 하나가 1945년 12월 27일의 한 신문 기사로부터 비롯된다.

...

이 날 동아일보 1면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해방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결정 보도로 채워졌다. 동아일보는 그 회담의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동아일보의 주장은 이랬다.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삼십팔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36년 식민지살이를 겪고 이제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꿈에 부풀어 있던 조선 인민들에게 동아일보의 보도는 청천의 벽력이었고 방심한 사이 날아든 카운터 펀치였다. 아니 몇 년을 누구 밑에서 어쩌고 저째?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씨근거리며 일어날 일이었다.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조선은 대동단결한다. 공산주의자부터 우익 지주들까지 좌와 우가 없었고 상과 하가 없었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일본놈들한테 놓여난지 몇 달인데 다시 외국 놈들한테 신탁통치를 받는다는 자체가 비위를 긁었고,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전국의 극장이 문을 닫았다. 극장 지배인들이 나와 신탁통치 소식을 전하자 관객들은 우리가 영화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 날은 극장이고 ‘딴스홀’이고 모조리 휴관이었다. 이들 뿐이 아니었다. 유흥가들도 문을 닫아걸었고 심지어 미군들에게서 월급 받던 군정청 직원들에다가 경찰들까지도 일손을 놓았다. “우리는 지금 이같이 모여 결의를 했다. 경찰관의 직을 떠나 자주국가로서 완전독립이 올 때까지는 민중과 더불어 치안대원으로서 결사의 사명을 다하겠다.” (동대문서장의 발언) 공산주의자들도 힘을 보탰다. “신탁통치 결정이 사실이라면 결사 반대한다.”


가히 거국적인 ‘단결’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소련에 대한 분노도 끓어올랐다. 빌어먹을 로스케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의 기사는 명백한 ‘오보’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신탁통치를 결의한 것은 맞으나 신탁 통치를 주장한 측의 주체가 뒤바뀌어 있었다. 신탁통치를 강하게 주장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고 소련은 이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보도 내용은 정 반대였던 것이다.

최대 5년을 기한으로, 미·영·소·중 4개국 정부가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이 제3조에 있긴 하지만 이는 조선인들이 오해한 대로 외국이 일본의 뒤를 이어 한반도를 통치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다른 조항에 따르면 한국 독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는 신탁통치의 시한과 시행 방안 등을 4개국 정부와 협의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즉 그렇게 비합리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막을 깊이 알아볼 여유도 없이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흥분했고 한길로 쏠렸다. "닥치고 반탁"이었다. 그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은 아예 ‘반민족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당시 반탁세력과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의 삐라를 비교해 본다. "삼천만 대한전민족의 총궐기의 秋(추). 신탁통치 절대반대! 결사코 자유를 전취하자!! 살아서 노예가 되느니보다 죽어서 조국을 방호하라!!" 명료하고 단순하고 확실했다. 이에 비해 "누가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여 주었으며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피투성이의 싸움을 하여온 연합국이 우리에게 압박과 노예화를 기도할 리가 있는가? 단연코 없다!"는 좌익의 호소는 궁색하고 허약했다.


닥치고 반탁!의 자기장은 너무나 강력했다. 외세에 몸 판 자들, 민족보다 소련의 지시에 더 순종적인 자들이라는 비난이 빗발쳤고 해방 이후 내내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좌익은 급속도로 그 우세를 잃어간다.

대개 명분은 항상 옳고 정당하며 천추에 푸르른 법이지만 항상 그 뒤에는 정치적 주판을 튕기는 무리들이 있는 법이다. 그들은 깊은 사려보다는 감정적 호소에 능하고 내용 있는 동맹이 아니라 '닥치고 단결'의 대오에 더 관심이 많다. 동아일보의 오보(?)는 해방된 해의 세모를 벌겋게 달구었다. 그 뜨거운 불판 위에서 조선 사람들은 누구를 위하여서인지 모를 춤을 추었다. '닥치고 반탁'의 정당해 보이는,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단순하고 폭력적이었던 '단결'은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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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2.28 녹두꽃은 떨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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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의 오역

1894년 12월 28일 녹두꽃이 떨어지면

1894년 갑오년의 겨울은 추웠다. 춥다못해 삭막했다. 특히 충청도 이남 호남 땅은 더욱 꽁꽁 얼어붙었다. 그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군 몇 만명의 시신이 굳은 땅 속에서 더디 썩어가고 있었다. 척양척왜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한양으로 진군하려던 그들은 대개 우금치 전투에서 몰살당했고 다른 전투에서도 패퇴했다. 패잔 농민군은 관군과 '의병' (동학군에 반대...한 양반들이 조직한)의 눈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그 중의 하나였다. 5척 단구로서 남의 눈에 띌 체형은 아니었지만 그 눈빛만은 눈에 띄게 형형했던 그는 그 눈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 생각에 가슴을 치면서 살을 잘라 오는 겨울 바람을 헤치며 전라도 순창 피노리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와 함께 봉기에 참여했던 믿을만한 부하가 은신 중이었다. 남하하는 길목에 경천이라 불리우는 냇물을 건널 때 전봉준은 일순 긴장한다. 언젠가 들은 예언에서 그는 "경천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천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고 관군의 잠복도 없었다.

그는 무사히 부하를 만난다. 몇 달 전만해도 함께 싸운 동향의 동지. 그는 주막집으로 전봉준을 안내하고 모처럼 구들장을 지고 더운밥을 먹은 녹두장군은 긴장을 풀고 다리를 뻗지만 그가 믿었던 부하는 마음 속이 시끄러웠다. 이미 틀어진 일, 막대한 현상금과 포상이 내걸린 전봉준을 관군에 넘긴다면 팔자를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생사를 같이하며 죽창을 함께 맸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외침에 자신도 공감했던 지도자를 버린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입술을 깨문다. 장군 미안하오. 나는 살아야겠소. 그것도 보란 듯이 한 번 그의 이름은 김'경천'이었다

그는 인근에 사는 전주 감영의 퇴역 장교인 한신현에게 전봉준의 출현을 밀고했고 한신현은 동네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급습한다. 낌새를 챈 전봉준은 주막 담장을 넘어 도망가려 했지만 장정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잡히고 만다. 녹두꽃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1894년 양력 12월 28일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전봉준을 어찌나 두들겨 패면서 끌고 갔던지 하룻길이면 갈 순창 군청까지 이틀 걸려 갔다고 한다.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터진 채 그는 서울로 압송된다.

......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안도현 시 - 서울로 가는 전봉준 중에서)

전봉준 체포에 공이 큰 한신현은 군수 감투를 썼고, 담장을 넘는 전봉준의 다리를 부러뜨렸던 동네 청년들에게도 두둑한 상금이 내렸다. 하지만 정작 전봉준을 처음 밀고했던 김경천은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다가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백성들이 내린 배신자에 대한 응징의 결과였을까.

2005년 순창군은 전봉준이 잡혔던 주막집 일대에 ‘전봉준 피체지 기념관’을 세웠다. 전봉준이 체포된 곳을 기념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순창 사람들은 백성들의 영웅이었던 전봉준을 잡아서 관에 넘긴 곳이라는 ‘배신’의 비난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굳이 안내판에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곳”이라고 써 놨다.


오늘날의 정읍은 전봉준과 김경천의 고향이었던 고부군과 정읍현이 합쳐진 곳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읍 사람들로서는 어이가 없었나보다. 항의가 잇따랐고 종국에는 안내판이 훼손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으며, 두 지자체 간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그 신경전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다. 분명한 것은 ‘배신자의 동네’라는 낙인을 두 곳 모두 두려워하고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니까. 모로 가도 출세만 하고 돈만 벌면 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몸을 바쳐 나라와 백성을 고민한 사람을 배신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를 절감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악질적인 변절에 어처구니없이 관대하고, 그 배신자는 굶어죽기는커녕 배 두드리면서 호의호식하는 일이 허다한 오늘날을 살면서 어찌 그 두 동네의 드잡이에 까탈을 잡을 수 있을까.



녹두장군이 1894년 12월 28일 외세에는 허약했으나 안으로는 잔인했던 관의 손에 떨어졌다. 배반의 파랑새가 녹두밭에 앉았고 녹두꽃은 떨어져 숱한 청포장수들이 울면서 흩어졌다. 탐관오리에 대해 저항하여 일어섰던, 수많은 백의의 농민들의 지도자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전봉준은 오늘 다리가 부러진 채 포로가 됐다. 그가 기세를 올릴 때 불리운 노래들은 오늘날에도 새롭다. “갑오(甲午)세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병신(丙申) 되면 못가리.” 가야할 때 가지 못하고 을미적거리면 병신밖에는 될 것이 없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가마에 앉아 압송되면서 주변을 노려보는 전봉준의 눈에서 나는 그 노래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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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1 건양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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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896년 1월 1일 건양 원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방대한 기록 자료인 조선왕조실록. 매일같이 사관들이 붓을 휘둘러 꼼꼼히 기입한 조선왕조실록에서 별안간 40여일이나 되는 날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임진왜란같은 전쟁통에 유실된 것도 아니고 천재지변이나 반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은 1895년 을미년 11월 17일에서 껑충 건너뛰어 1896년 1월 1일로 넘어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을미개혁을 통해 태양력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껏 써 오던 청나라의 광서(光緖)연호도 버리고 건양(建陽) 원년의 연호를 사용한 이 개혁을 통해 1895년 을미년 11월 17일은 1896년 건양 원년 1월 1일이 된 것이다. 정월 초하루를 손꼽아 기다리던 천만 조선 백성들은 별안간 나랏님에 의해 앞당겨진 정월 초하루에 얼떨떨한, 아니 어쩌면 거의 아무도 몰랐을 새해를 맞게 된다. 우리 역사 최초의 신정(新正)이었다.


 역법이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던 마지막 날, 즉 1895년 을미년 11월 16일은 한 신하의 노기띤 상소로 점철되어 있었다. 주인공은 학부대신 이도재. 그는 이틀 전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위하여“ 임금과 세자부터 그 상투를 자르고 내린 단발령에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내각이 새 연호와 단발을 강행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단군 이래 땋은 머리 풍속이 변해 상투가 된 것이고 백성들 모두가 이 상투를 중히 여기는 데 하루아침에 이를 깎는다는 것은 4천년동안 굳어져온 풍속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 이도재는 대신직을 던졌고 바로 면직된다. 광서 21년 을미년 11월 16일이었다.


 단발령을 내린 김홍집 내각은 1월 1일 왕을 모시고 주다례를 거행하고 각국 공사들을 접견하는 등 새로운 양력 원년의 모양새를 갖추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단호하게 시행한 것 중의 하나가 단발령의 확대였다. 기실 을미사변 이후 강화된 일본의 영향력 하에 성립한 친일 내각의 중심인물인 김홍집과 어윤중조차 임금의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을 펴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들 역시 사대부 출신으로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 터럭 하나도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는 유교적 세계관에 젖어 있던 조선 민중의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단발령의 배후는 일본이었다.
 

고종이 내린 단발령 조칙은 일본인 고문관이 검토한 것이었고, 일본 공사가 그 뒤에 버티고 있었다. 이 단발령은 근대화 작업의 일환이라기보다는 을미사변에 이은 조선인들의 자존심 꺾기라는 측면이 강했고 일본은 오히려 조선인들의 저항을 유발하여 일본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까지도 드러내고 있었다. 단발령으로 인해 재미를 본 것도 일본 상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이 단발령을 강요한 것은 그들의 모자판매상과 의류상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다.” (윤치호 일기)



 단발령 자체는 그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도재의 상소보다는 단발령의 주창자였고 고종의 상투를 자르는 자리에 있었던 유길준이 유림의 거두 최익현에게 호소했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나라가 병들어 시든 것을 구하려는데 어찌 한 줌 머리카락을 그리도 아끼십니까.” 그러나 주체의 정체가 애매한 개혁, 외세의 요구에 편승하고 그 힘에 밀려 강행된 개혁은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체두관’이라는 임시 관직까지 만들어 저잣거리에서 행인들의 상투를 잘라댄 김홍집 내각은 민중들의 증오의 대상이 됐고, 그들이 가졌던 선의를 펴 볼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말았다.


 1896년 1월 12일 (음력 1895년 11월 28일) 이필희가 의병을 일으키면서 을미의병이 벌집 쑤신 듯 일어났고 2월 11일 고종 또한 궁궐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김으로써 김홍집 내각을 버리고 그들을 대역죄인으로 선포하게 된다. 우리 역사 최초의 양력 1월 1일을 총리대신으로 맞았던 김홍집은 일본측으로 피신하라 권유하는 이에게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맞아죽는 것은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 같다.”고 부르짖고 입궐하다가 군중들에게 맞아죽었다. 보수 유림이라 할 매천 황현조차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고 평가했고 그가 집권을 계속했더라면 국권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 탄식했던 김홍집과 그의 개혁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만신창이가 된 채 사라졌다. 1896년 1월 1일은 그 불안한 시작이었다.



 2012년 1월 1일 역시 시작은 잿빛으로 불안하나 올해의 제야는 환호 아니면 최소한 기대 속에 맞게 되기를.

1905.1.2 뤼순 함락 - 삽질이 바꾼 20세기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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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2일 삽질이 바꾼 20세기 - 뤼순 함락


1904년 2월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상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사나운 기세로 러시아를 몰아부쳤고, 몇 번의 중요한 승리 끝에 러시아 극동 함대 기지가 있던 뤼순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요새 축성 전문가를 보유한 러시아군은 시간과 장비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뤼순 남산을 둘러싼 전투 후 전문을 받은 일본군 총사령부는 경악한다. “3천명이 한 전투에서 죽어? 3백명을 잘 못 전달한 것 아닌가?” 어떻게 한 전투에서 3천명이 죽어 자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고, 10년 전 조선의 동학농민군들이 당한 그대로였다. 일본도를 휘두르며 도쯔께끼!(돌격)를 외치는 지휘관들을 용감히 따르던 병사들은 기관총의 밥이 됐다. 가까스로 뤼순 외곽은 점령했지만 일본은 애가 탔다. 이 항구를 손에 넣어 러시아 극동함대를 무력화시키지 못한 채 저 유명한 러시아 발틱 함대까지 나타난다면, 그리고 세계 최고의 육군국 러시아의 2백만 대군이 본격적으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몰려온다면 글자 그대로 끝이었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자살적인 돌격을 되풀이한다. 일본군 특유의 ‘반자이 돌격’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살적으로 벌이는 돌격)은 2차 대전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8월 의 1차 공세 때에는 1만 5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났다. 1개 사단이 사라진 것이다. 2차 공세 때에는 5천 명이 죽어 없어졌다. 두 번의 전투에서 2만 명의 피해라니, 일본 대본영도 난리가 났지만 러시아군도 “일본군들이 왜 이리 자국군을 헛되이 죽게 하는지, 도대체 무슨 작전인지”를 궁금해 했다. 무슨 꿍심이 있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러시아군도 머리가 아플 밖에. 일본군의 시체가 워낙 태산처럼 쌓여가면서 그 악취가 진동하여 러시아군들은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어서 나프탈렌을 코에 대고서 이동하거나 근무해야 했다.


3차 대공세는 그야말로 희극적인 비극이었다. 국내에서 박박 긁어모은 병력까지 가세한 총공세는 11월 26일 벌어지는데, 러시아군 사령관 스테셀은 이상하게도 일본군이 26일만 되면 공격을 가해 온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포화망을 구축하고서 일본군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또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해 들어온다. 왜 하필이면 26일인가를 묻는 질문에 일본군 지휘관 이지치 고스케는 불후의 명답을 남긴다.


“첫째 화약 준비에 한 달 정도 걸린다. (그래서 26일마다 공격한다!) 둘째 뤼순 남산을 돌파한 날이 26일이었다. 운이 좋은 날이다. 26이라는 숫자는 짝수이기 때문에 둘로 쪼갤 수 있다. 그러니 이 날은 뤼순 요새를 쪼개는 날이다.” 그리고 명령대로 일본군은 “똑같은 경로로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러시아군은 너무도 고마워하며 그들을 '처리‘했다. 용감하기 그지없었던 일본군 보병들은 ’용기‘ 외에는 몰랐던 지휘관들에 의해 일순간에 송장이 되어 버렸다.


마침내 일본군도 지휘관을 바꾸었고, 삽질대장 이지치와 그 상관 노기 마레스키의 지휘권은 사실상 새 지휘관 고마다 겐타로에게로 넘어갔다. (물론 노기 마레스케가 형식상 지휘관이었다.) 고마다는 뤼순 요새와 항구를 내려다보는 203고지에 보병의 무모한 돌격 대신 포격을 집중하여 러시아 포대를 침묵시키고 특공대를 투입하여 203고지를 장악한다. 그리고 203고지를 장악한 뒤 훤히 내려다보이는 러시아 함대를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러시아 극동 함대는 괴멸적 타격을 입는다.


러시아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더군다나 러시아군은 기본 식량은 풍부했지만 오랜 봉쇄로 인한 채소류 부족 때문에 비타민 C 섭취 부족으로 괴혈병k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측 창고에는 만주 특산의 콩이 창고마다 가득했다. 하지만 러시아군 수만 명 가운데 콩에서 비타민C가 풍부한 콩나물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러시아측의 비극이었다.

마침내 1905년 1월 2일 수만 명의 시체를 뒤로 하고 러시아군은 항복했다. 끔찍한 삽질로 점철된 뤼순 공방전은 20세기의 역사를 결정한 사건이었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러시아 발틱 함대는 여순으로 오지 못하고 좁은 대한 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야 했고, 그 와중에 일본 해군에게 전멸당한다. 대한제국의 운명은 뤼순의 203고지에서 일본의 노리개로 결정됐고, ‘동방의 원숭이’에게 참패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전쟁이 가져온 경제적 피폐는 러시아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피의 일요일’ 사건을 낳은 것이다.

그렇게 사람 목숨을 흙처럼 내다버린 삽질의 주인공이었던 일본군 최고 지휘관 노기 마레스케는 ‘군신’으로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는다. 메이지 천황이 죽은 다음 그를 따라 부인과 함께 자결해 버린 뒤엔 더욱. 이 시절 이후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약삭빠른 지혜보다 무모한 용기에 더 점수를 주었고, 돌다리도 두드려 건너는 신중함보다는 앞뒤를 재지 않고 스스로 배를 째는 ‘장렬함’에 도취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역사를 뒤바꾼 삽질” 뤼순 공방전은 그 불길한 첫 봉우리였다.


일본의 불행한 과거에 혀를 끌끌 차다보니 문득 “우리는??”이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져 보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삽질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런 습성은 애오라지 일본인만의 것인가? ‘약삭빠른 지혜보다는 무모한 용기’에 더 감동한 적은 없는가? 실컷 삽질을 해 놓고도 “그래도 우리 용감했다”고 고무찬양한 적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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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3 링 위의 불꽃 최요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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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8년 1월 3일 링 위의 불꽃, 최요삼

2007년 대통령 선가가 있던 해의 크리스마스. 나는 컴퓨터 모니터 한 귀퉁이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읽었다. 최요삼의 WBO 세계 타이틀매치. 그때 받은 느낌은 딱 하나였다. “얘 아직 권투하나?” 내가 그 이름을 익혔던 것은 20세기가 마감되기 전이었다. 그가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 됐던 것은 1999년이었으니까. 그 해에 그는 태국 선수를... 누르고 챔피언이 됐다. 최요삼은 상대의 어퍼컷 한 방에 턱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었지만 끝끝내 버틴 끝에 판정으로 이겼다.


최요삼은 환호했다. 아픔 따위는 문제도 안되었다. 부서진 턱뼈를 치료하러 가는 길에 차 창문을 열고 “내가 챔피언이다!”를 내내 외치고 있었다니 그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타이틀을 바로 빼앗겨서가 아니었다. 그는 무려 3년 동안 세계 챔피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그의 경기는 단 4번이었다. 근 1년에 한 번씩 링에 오른 셈이었다. 이유는 경기의 스폰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능도 실력도 있었지만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는 장정구나 유명우를 능가하는 챔프가 되어 전설 속의 별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복싱의 인기가 한물을 넘어 두물이 간 시점, 거기다가 IMF의 좌절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었을 무렵의 세계 챔피언은 별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방어전 한 번 치르노라면 챔피언 스스로 나서서 돈을 끌어들여야 할 지경이었다. 급기야 툭하면 방어전을 미루는 챔피언을 보다못한 WBC는 랭킹 1위를 ‘잠정 챔피언’으로 결정하고 ‘현재 챔피언’과의 ‘타이틀 결정전’을 명령한다. 월드컵의 열기가 나라를 들끓게 했던 즈음, 그는 소리소문없이 타이틀을 잃는다. 나는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끝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끝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어떻게든 권투를 계속하려고 들었다. 허세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아버지도 서울에 집이 몇 채 있는 분이었고, 나도 챔피언 하면서 70평 아파트에서 몇 년 살았다. 아쉬워서 권투하는 건 아니다. ” 즉 권투 아니면 할 것이 없는 헝그리 복서도 아니었다. 그즈음 그를 취재했던 동료 PD의 말은 이렇다. “권투에 미친 사람이었지. 스폰서가 없으니까 여자권투 시합의 오픈 게임을 자청해서 뛰기도 했어. 그래도 전 세계 챔피언이었는데 말이야.”그렇게 바둥바둥거리면서 다시 세계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여지없이 패퇴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뒤 나는 완전히 그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12월 다시 그의 타이틀 매치 기사를 본 것이다. 어느 새 그는 WBO라는 듣도보도 못했던 권투 기구의 챔피언이었다. 그는 74년생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나이는 72년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는 당시 서른 여섯. 권투 선수로는 팔순에 가까운 나이다. 그리고 번듯한 기업의 직원으로서 월급도 기백만원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일기장에 “매맞는 것이 두렵다.”고 “상대가 두렵다.” “밀리면 죽는다.” 라고 공포감을 토로하면서도 링 위에 악으로 깡으로 오르고 있었다. “권투가 좋아서”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가능했을까. 역시 그를 취재했던 작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사명감이 대단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권투를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보겠다는 식이었달까. 내가 잘하는 건 권투밖에 없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 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멋지게 싸워야 한다. 그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뭐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구요. 이런 말도 했죠. 권투밖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을 도울 거다.”

2007년의 크리스마스날. 그는 젊은 도전자에게 맞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파이팅을 보였다. 이미 판정으로는 이긴 경기였다고 한다. (나는 그 마지막 경기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요삼은 마치 이런 게 권투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주먹을 휘둘렀고 그 와중에 강력한 카운터 한 방을 허용하고 다운된다. 벌떡 일어나서 경기는 속행됐고 그 다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겼다. 그러나 승리가 선언된 직후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혹자는 이미 그가 다운된 순간 그의 뇌는 멎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파이트!’를 부르짖은 그의 머리 속에는 대체 무엇이 담겨 있었을까. 나는 그 정체를 ‘사명감’으로 본다. 그는 권투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 가치를 좋아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의 가치를 지키고, 그 가치가 시의를 잃고 외면받는 것에 굴하지 않으며, 자신이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을 도와 준 사람들을 잊지 아니하고, 그 가치에 동참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외롭게 그 가치를 수호하며, 그를 위해 투혼을 발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그 가치를 버려도 충분히 살 수 있음에도, 좋아해서, 너무나 좋아해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감당하면서까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또 얼마나 될까.

최요삼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것이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나라와 민족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의 삶은 더 가치롭다. 크리스마스날 쓰러진 최요삼은 8일 후 뇌사 판정을 받았고, “아버지와 같은 날 제삿밥이라도 얻어먹게 하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2008년 1월 3일 0시 1분 산소호흡기를 뗐다. 그리고 그의 장기는 6명의 불치병 환자들에게 나누어졌다.

2008년 1월 3일 링 위의 불꽃 최요삼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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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1.4 병자호란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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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637년 1월 4일 병자호란 발발

어느 분이 ‘산하의 오역’에서 왜 근대 이전의 우리 역사는 거의 나오지 않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이유가 있다. 트위터에서 짤막하게 오늘의 역사를 올려 두던 즈음, 충무공 이순신을 두 번 죽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구글신의 힘을 빌려 충무공의 전사일을 찾아 소개를 했는데 누군가가 이런 토를 다는 게 아닌가. “충무공이 예숩니까 한 달 전에 죽었다고 얘기해 놓고 ...또 죽어요?” 아뿔싸. 앞서 소개한 날짜는 음력이었고, 무심코 적은 오늘은 양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충무공을 두 번 죽인 뒤 ‘오늘의 역사’는 무조건 양력을 기준으로 삼게 됐고 그러다보니 근대 이전의 사연들은 자
연스레 논외가 됐다.


그런데 오늘은 좀 옛날 얘기를 해 보자. 국사 시간에 공부 좀 한 사람이라면 임진왜란 일오구이(1592)나 병자호란 일육삼육(1636)의 숫자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병자년에 터진 것은 맞지만 서력 기원 1636년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아니다. 청 태종이 영 시원찮게 구는 조선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만주족 팔기군 가운데 7기를 동원하고 몽골군에다 관할 하의 한족까지 박박 긁어모은 12만 대군을 심양에 집결 완료한 것은 병자년 1636년 12월 1일(음력)이었고, 그 선봉 부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은 것은 병자년 12월 8일이었으며 의주 부윤 임경업이 적병의 도하와 진격을 목격하고 장계에 적은 날짜, 즉 공식적으로 병자호란 발발이 명시된 날짜는 12월 9일이었는데 이 날은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4일이 된다. 즉 병자호란은 1637년에 발발한 것이다.


임경업 장군의 용맹을 두려워한 청나라 군이 임경업이 좌정한 백마산성을 피해 남하했다는 것은 서인(西人) 들이 만들어낸 신화다. 기실 청나라군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부터 선봉 부대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 서울을 잇는 선을 최고 속도로 내달려 강화도로 가는 길을 막고, 주력부대가 중요한 성을 공격한 뒤 몽골 병력으로 점령 지역을 통제하도록 한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었다. 각처의 조선군들은 산성에 들어앉아 몰려들 적을 기다렸지만 청나라의 관심은 오로지 조선의 심장부였고 그를 위해 20세기에 독일군이 보여준 이상의 ‘전격전’ 실력을 과시한다.


병자호란을 무대로 한 영화 ‘활’에서 혼례식 도중에 들이닥친 청나라 군에 의해 개성이 유린되는 장면을 보고 아무렴 저렇게 무방비로 당했겠느냐고 불만을 표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건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었다. 임경업이 청나라 군의 압록강 도하를 보고한 날짜가 양력 1월 4일이었는데 청나라 기병대는 1월 9일에 개성을 통과한다. 도로 사정이 좋지도 않고 산도 많고 강도 많은 조선의 서북면을 단 닷새 만에 주파한 것이다. 압록강변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혀를 차던 사람들의 혀가 멎기도 전에 변발한 무사들이 불쑥 칼을 들이민 형국.


임금부터가 부랴부랴 강화도로 가려고 도성을 나서서 서쪽으로 가다가 황망한 소식을 듣는다. “적들이 양천 (불광동쪽이라는 말도 있다)에 들어왔습니다.” 도깨비도 이런 도깨비가 없었다. 청나라군은 압록강 이남의 나라 왕이 툭하면 들어가 숨는 강화도라는 섬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차단하는 한편, 차단이 여의치 않을 경우 강화도를 공격할 작전까지 수립해 두고 있었다. 바야흐로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였다. 이후의 사태는 익히 아는 바니 대충 넘어가자. 조선 임금은 남한산성이라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티다가 끝내 출성하여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최악의 굴욕을 경험해야 했다.


1637년 1월 4일 일어난 전쟁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그 전쟁은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고,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었으며, 그 전말을 예상하기도 했던 전쟁이었다는 데에 있다. 인조가 쫓아낸 광해군은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질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보병 위주였던 왜군과 달리 성을 공격하지 않고 기병으로 한양으로 들이닥친다면 어찌할 것이냐.” 애초에 국호를 ‘후금’으로 한 데에서 보듯 과거의 금나라처럼 중국 대륙으로 진출할 꿍심에 여념이 없던 청나라로서는 조선과 각을 세워 ‘두 개의 전선’을 굳이 형성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 이유를 만들어 준 것은 조선이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에 묘사되었듯 성벽에 올라서는 죽을둥살둥 싸우는 병사들을 굽어보며 이래라 저래라 입이나 놀렸던 썩은 선비들, ‘척화’를 논하고 대의명분을 부르짖고 후금의 왕이 황제가 된다는 소식에 중국 사람들보다 더 펄펄 뛰었던 관리들은 자신들을 덮칠 눈더미를 쌓아가고 있었다.

“오랑캐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의논한다고 핑계를 대며 글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에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의로 결단해 그들을 물리치고 받지 않았노라. 충성된 선비와 용기있는 이들은 종군을 자원하여......” (인조의 교서) 명나라 사람보다 더 명나라 사람 같았던 왕이 내세운 대의와 정의는 조선의 것이 아니었고 ‘강약과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는’ 미련함을 자랑으로 삼은 나라가 전쟁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637년 1월 4일 마침내 얼어붙은 압록강에는 그 아둔함의 뒤통수를 치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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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1.5 이상한 혁명가 피제손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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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1년 1월 5일 이상한 혁명가 피제손 타계

1884년 갑신년 바람의 냄새가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던 음력 10월의 어느날, 우정국 낙성연이 성대하게 열렸다. 근대적 우편업무를 담당할 이 관청의 출발을 축하하며 각국의 공사들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몰려들었다. 서양의 예복과 조선의 관복들이 어우러져 술잔을 나누며 취흥은 도도히 피어올랐다. 그때 별안간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영문을 알아보러 나갔던 척신 민영익이 칼을 맞은 채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자객이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조차 나이 서른 넷의 홍안이었으니 그 아래의 행동대원들이야 말할 것이 없겠지만 그 가운데 눈에 띄게 용감하게 뛰어다니고 칼질을 하는 이가 있었다. 나이 스물의 서재필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임금에게 알현을 청하는 대신을 호통쳐 내몰았고 환관 유재현이 임금 앞에서 죽어갈 때 칼을 들었다. 일본 도야마 유년군사학교에 유학했던바, "우리 도야마 출신들은 유난히 용감하여 두려움없이 일을 해 나갔다."고 스스로 술회하고 있으니 탁월한(?) 행동대원이었을 것이다. 그는 거사 후 병조참판 자리를 꿰차지만 청나라군이 개입하면서 그 관직은 이틀도 누려보지 못하고 해외로 망명한다.

그가 정착한 곳은 미국이었다. 영특하기로 이름났던 김옥균이 감탄을 금치 못할만큼 명석했던 그의 머리와 돌아갈 곳 없는 절박함이 강요한 노력은 그를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의사로 만들었고 아울러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

 이후 조선 정부의 초청을 받고 중추원 고문으로 금의환향 그는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으며 독립협회에 관여하는 등 개화 운동에 앞장섰다. 독립신문 영문판 논설을 쓸 정도로 영어에 정통했던 그는 영문의 영향을 받아 국문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이후 친러파 정부와 알력을 빚은 끝에 중추원 고문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평생을 미국인 의사로 살지만 재미 한국인들의 조직에 얼굴을 내밀었고 독립운동을 경제적으로도 지원하는 등 고국과의 인연을 단절하지 않았고 나이 여든에 해방을 맞아서는 귀국하여 5만여 인파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을 뽑던 당시 반세기를 미국에 살았던 그의 이름은 당당히 대통령 후보로 올라 있었고 실제로 그를 해방 정국을 추스를 인물로 손꼽는 이도 많았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여든 일곱에 눈을 감았지만 그의 뜻을 기리려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 유해가 봉환된 바 있다. 이만하면 격동기에 조국의 개화와 해방을 위해 힘쓴 젊은 시절의 혁명가, 개화 사상가로 일컬을 수 있을 게다.

 그런데 그가 미국에서 처음 들어왔을 때 놀라운 일이 있었다. 그가 갑신정변의 행동대원이었을 때가 나이 스물이었고 돌아올 때 30대 초반이었는데 한때 동료였던 윤치호가 기절초풍할만큼 조선말을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상 언어도 영어였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서재필이 아닌 '필립 제이슨'의 음차인 피제손이라 칭했으며 국왕 앞에서도 외교관들이 칭했던 '외신'이라 자처했다. 독립신문 기사를 보면 그의 '개화'와 '독립'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이를테면 그는 각처의 의병 토벌을 중계(?)하면서 도적놈 몇 명이 어디서 죽었다는 식의 표현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고된 이국 생활을 한 이라도 나이 스물에 고향을 떠난 이가 10년만에 모국어를 깡그리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추측컨대 그는 조선에 대한 책임감은 있었으되 조선을 경멸했고 조선을 변화시키고 싶어했지만 그 일원임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던 기묘한 왕년의 혁명가였다. 그가 조선 정부와 틀어져 미국으로 돌아갈 때 조선인 친지들에게 남긴 말은 참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귀국 정부가 나를 거부하기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당신들의 나라'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해가 가지않는 바는 아니다. 요즘도 미국 시민권자라면 아 그러세요 한 수 접는 판에 한창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하던 미국 시민으로서 조선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불과 10년 전 왕 앞에서 수구대신들을 베어 버리던 혁명가의 변신은 너무나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했다.

 해방 뒤 그 앞에 몰려든 군중들 앞에서 그는 단 한 마디의 한국어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재미한인들과 조직을 함께 하고 독립 운동을 위해 가산을 소진했다는 소리가 곧이들리지 않을만큼. 그는 그 앞에 모여든 조선 사람들에게도 냉정했다. "비누 하나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독립이오." 그만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서글픈건 어쩔 수 없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옛 조국이 전쟁에 휩싸여 있었던 1951년 1월 5일 죽었다. 그가 서재필이었던 것은 20년이었고 필립 제이슨 피제손이었던 것은 6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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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1.6 끝내 일어나지 못한 우리의 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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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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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6일 끝내 일어나지 못한 가객

 

1996년 1월 6일. 입사한 지 정확하게 1년이 되었던 시절의 나는 거의 욕 먹는 기계이자 삽질을 전문으로 하는 서툰 AD로 하루 하루를 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소식을 듣고 머리가 띵했던 그 순간이 점심 먹던 때였던지 아침 나절이었는지, 또는 봉고차 안이었는지 사무실에서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소식이란 가수 김광석의 자살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기억 하나는 있다. 소식을 들은 순간 내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말도 안돼."

 

 기억의 갱도를 더 더듬어 보자. 그날 퇴근 무렵 내 삐삐는 열 개가 넘는 전화번호가 찍혔다. 핸드폰이 일상적이지 않던 시절이었기로 일일이 회신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비명 같은 음주 청탁이었다. "아 씨바 김광석이 죽었다. 술 먹자." 야근이 일상이었고 하루 걸러 밤을 새던 무렵이라 그 절절한 술고픔의 호소들을 뿌리쳐야 했으나 그래도 그날 나는 술을 장히 얻어먹을 수 있었다. 회사 안에서도 김광석의 죽음에 넋이 반쯤은 나가 버렸던 군상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와 PD들 해서 한 대여섯 쯤 되었을 것이다. 편집실 밖 책상에는 소주와 오징어, 새우깡 등으로 구성된 조촐한 술판이 마련됐고 한 명이 굴러다니는 CD 플레이어에다가 책상에 보관 중이던 김광석의 노래들을 담았다. 그때 처음 흘러나왔던 노래는 '사랑했지만'이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이쯤에서 작가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술잔을 든 채, 또는 담배를 물고, 아니면 손바닥으로 턱을 고이고 잠자코 듣던 사람들의 목청이 홀연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 볼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 밖에......." 그리고 마지막은  먹먹하게 내리깔렸다. "그대를 사랑했지만"

 

스물 일곱에서 서른 다섯 살 가량의 청춘이라 부르기는 뭐한 나이들로 구성되었던 편집실의 군상들은 그렇게 김광석의 노래에 휩쓸리고 유린되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난무했던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추억들. 신기하게도 김광석의 노래에 얽힌 추억 하나씩, 아니 대여섯개씩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입대하는 애인이 불러주는 <이등병의 편지>를 듣다가 주저앉아서는 입대하는 모습도 못보고 울었었다는 작가.  "그녀가 처음 울던 날"처럼 애인과 헤어졌다는 선배, <거리에서>를 백 번쯤 중얼거리며 실연의 아픔을 줄창 걷는 것으로 풀었다는 PD.   가편집본 지워 먹고 선배한테 테잎 케이스로 맞던 날  기분 푼답시고 <일어나>를 흥얼거리다가 두 배로 혼났다는 AD...... 김광석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살뜰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의 일상과 추억  사이로 밤눈처럼 소리없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날 새삼 다시 깨달았다. 


 김광석은 <사랑했지만>을  그다지 부르기를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수동적인 느낌이 싫었다던가.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다는 그 가슴살 저미는 아픔이 굳어버린 느낌의 노랫말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광석은 그리 잘생기지 못한 얼굴과 작달막한 키 등 '하드웨어'에서 약점이 있었던지라 수없이 실연을 당했고, 노래 가사같은 아픔을 하영 겪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살다가 "나 이래봬도 김광석 찼던 여자야" 하는 아줌마 한 번 만나 보고픈 소망이 있다.   아줌마 때문에 이런 노래를 내가 듣고 살잖우 하면서 치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굴러들어온 호박을 내찼던 그 발을 한 번 밟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광석은 <사랑했지만>을 오히려 더 열심히 부르기로 한다.  이런 사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어느 모임에 갔습니다. 그 모임에 참가하신 칠순 할머니께서 24년생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시더군요...비 오는 어느 날 우산도 없이 장보고 오는 길에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내리는 비도 잊은 채 서서 들으셨답니다. <사랑했지만>이라고 하시더군요.  감정은 나이와는 상관없다고들 하면서도, 할머니나 부모님께서는 날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고 무의식 중에 단정짓고 잘 이야기하지도 않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지요. 저 또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저 개인적으로는 이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할머니의 잊었던 감정을 되살려준 노래이기에 조금 더 열심히 부르고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의 노래는 그렇게 친절했다.  냉수를 수십 사발 퍼부어도 식지 않는 가슴의 불덩이를 조근조근 달래며 가라앉히고, 선인장으로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을 것 같은 갑갑한 가려움을 매만지고, "아프지? 아픈 거 알아. 실컷 아파해. 그것만은 우리만의 권리 아니겠니? 나도 아프거든." 이라고 등을 두드려 주는, 듣는 사람의 정신적 무장을 해제하고 나아가 저 마음 깊은 곳에서 퍼올려지는 각혈을 하고 싶게 만들었던 그의  노래의 힘은 듣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슬픔과 아픔으로부터 노래의 생명을 빌리고 그것으로 다시 그들을 위무했던 친절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콘서트에서도 항상 대화하기를 즐겼다.  말을 걸고, 농담을 하고 청중들과 호흡하면서 노래와 노래 사이를 이어나갔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못하고 문외한에서 한 발짝 벗어난 처지로,지금까지 평생 내 돈 주고 가 본 가수의 콘서트는 정태춘과 김광석 딱 두 번이었다.  김광석 콘서트는 1994년 백수의 처지였을 때 , 친구가  불우이웃돕기 돕기 차원에서 주선한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함께 갔었다.  가까스로 표는 구했지만 미리미리 가 있지 않은 덕에 우리는 입구에 서서 두 시간여를 개겨야 했다.  그래도 워낙 김광석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지라 다리 아픈 줄 모르고 공연에 열중하는데 그 모습이 안스러워 보였던지 별안간 김광석이 우리를 보고 말을 걸었다.  "다리 안 아파요?"  나는 처음에 우리를 보고 말하는지도 몰랐다.  같이 왔던 여학생이 "괜찮아요!"하면서 소리를 지르기 전까지는.   김광석은 느닷없이 "만난지 얼마나 됐어요?"라고 물어왔고 그제서야 나도 기운차게 외쳤다. "열흘이요." 그러자 김광석이 그 특유의 함박웃음을 지으며 또 물어 왔었다.  "어떻게 잘 될 거 같아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왜 그랬는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는데 그냥 아까처럼 목청 돋워 "예!" 하면 될 것을 나는 희한한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글쎄요." 그렇게 맘에 안드는 것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찬 밥과 더운 밥과 삼층밥과 탄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는데.  왁자한 웃음이 터졌고 얼굴이 굳어진 그 아가씨는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시베리아 고기압을 형성하고설랑 된바람으로 떠나버렸다.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켜지는데 웬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대체 무얼 찾고 있었던지.  뭐라 말하려 해도 기억하려 하여도 허한 눈길만이 되돌아오더라 젠장.

 김광석은 <거리에서>를 부르면서 그런 농담을 했다 한다.  가수는 자기가 부르는 노래대로 된다고 하는데 <거리에서> 자꾸 부르면 거리에서 헤매는 인생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그 농담은 불길한 예언이 되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하나, 작곡가 백창우와 함께 정호승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 <부치지 않은 편지>.  

 "....시대의 새벽길을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젠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그의 노래의 시작은 어두운 시대의 험로였다.  그 청아한 목소리로 김광석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노래했고,  "빈 손 가득히 움켜쥔 햇살"의 절실함과 "기나긴 밤, 압제와 죽음과 투쟁의 밤"을 번갈아 불러야 했다.   이후로도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의 어두움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나기는 했지만 시대를 살아내리는 사람 개인 개인의 아픔과 슬픔은 언제나 "그의 노래"였다.  조그맣고 가진 것 없는 이에게 그의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었고 아무것도 뵈지 않는 암흑 속에서 커다란 빛이 되는 조그만 읊조림이었다.  그러던 그가,  사람들에게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 보라고 '선동'했던 그의 노래가 끝내 갑작스레 너무도 황망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1996년 1월 6일이었다.  

 그의 노래 중에 <외사랑>이 있다.  짝사랑은 상대방이 알아차린 것이라지만 외사랑은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혼자만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 가사 또한 해 본 사람만이 이해하고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눈이 뜨거워질 노랫말의 연속이지만 오늘 나는 김광석을 생각하면서 그 노래를 중얼거려 본다.  돌아오지 못할 우리의 가객을 위하여.  우리들의 스물과 서른을 풍성하게 했던, 윤택하게 했던, 넉넉하게 했던, 수없는 상한 영혼들을 위로했던 한 가수를 위하여.  

내 사랑 외로운 사랑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인가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지만 마음 하나로는 안되나 봐요
공장의 하얀 불빛은 오늘도 그렇게 쓸쓸했지요
밤하늘에는 작은 별 하나가 내 마음같이 울고 있네요
눈물고인 내 눈속에 별 하나가 깜박이네요
눈을 감으면 흘러내릴까봐 눈을 못감는 서글픈 사랑
이룰수 없는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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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7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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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9년 1월 7일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죽음


 그는 물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격화된 할아버지의 손자였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무례한 행동을 하는 자에게는 징역 5년 이상의 불경죄를 적용하는 법이 이미 19세기부터 정립되어 있었다. 1901년 20세기의 첫 해에 태어난 그는 1989년 1월 7일 참으로 기나긴 일생을 마감한다. 그의 이름은 히로히토. 일본의 제 124대 천황이었다, 정신질환도 있었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던 히로히토는 1926년 드디어 일본 천황 자리에 오른다.



1926년이면 일본의 대륙 진출 야욕의 시위를 당기던 무렵이다. 대륙 침략을 눈 앞에 둔 일본은 천황을 신격화를 강화함으로써 일본 내부의 단결을 강화하려 들었다.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신국(神國)’ 일본 국민들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초국가적인 존재를 필요로 했고 히로히토는 국민들은 천황의 행차 앞에서 무릎 꿇고 경의를 표해야 했고, 천황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불경죄의 혐의를 받았다. 천황 앞에서 무심코 서 있었던 오사카 시장이 천황에게 예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직위가 날아간 일도 있었다.



 인간과 다른 신이었던지라 국민들과의 인간적인 만남 또한 거의 없었다. 1936년 이후에는 천황을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들조차 무조건 체포되었다. 일본 제국 치하의 모든 백성들은 궁성요배라 해서 마치 메카를 향해 기도드리는 이슬람교도들처럼 천황의 궁성을 향해 90도로 절하는 의식을 치러야 했고, 군인들은 그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끊임없이 세뇌됐다. 일본 국민들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은 1945년 8월 15일 항복 선언 때가 처음이었다. 해양생물학 연구를 좋아했고 영국식 아침 식사를 즐겼으며 영국 국왕 조지 5세를 좋아하고 따랐던 수줍음 많은 동양인 청년은 그 인생의 거의 반을 ‘신’으로 보냈다.



 전쟁 후 전범 재판에서 으뜸가는 전범 도조 히데끼는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일은 없다.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적어도 히로히토는 89년 그가 죽었을 때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수상이 바친 헌사, “격동의 62년간 세계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기원하고 몸소 실천하셨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大戰)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차마 볼 수 없어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을 종결하는 영단을 내려주신” 존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현대사의 주요 고빗길에서 “중국군을 응징하고 주요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임하라.”고 선언하고, 국제법에 금지된 화학 무기 사용을 재가했으며, 고노에 전 수상은 “폐하께서 전쟁 쪽으로 기울어지시니 어쩔 수가 없었다.”고 통탄한 바도 있었다. 즉 일본이 자행한 침략 전쟁에서 그의 “뜻과 달리” 발발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전략적 계산과 자신은 허수아비였을 뿐이라며 모든 책임을 군부에 돌린 히로히토 본인의 유연함 덕에 그는 전범을 면하고 천황으로서, “인간 선언”을 한 이후로도 일본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존재로 종생했다.


 헌법상 최고 통치자로서 책임을 피할 수 없지만 절대적인 권력자도 아니었던 한 사람이 그 정도의 절대적인 충성과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은 세계사적으로 진귀한 일일 것 같다. 그의 위상을 말해 주는 가장 경이로운 사태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뒤에 벌어졌다.

 원자폭탄이 터진 후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어 버린 히로시마의 한 거리. 네 명의 경찰관들이 무언가를 지고 거리를 내달렸다. 그들은 연신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어진(御眞)이다 어진이다!” 즉 히로히토의 초상화였다.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로부터 빼내 온 것이었을 텐데, 그 앞에서 운신이 어려운 사람들은 몸을 뒹굴며 길을 내 주었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은 화상 입고 머리털이 유리가 박힌 채로 일어서서 90도로 절하며 경의를 표한 것이다. 언젠가 이 일화를 읽으면서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인간들이 이럴 수 있을까. 이 정도로 세뇌가 되고, 이럴 만큼 바보스러울 수 있을까. 그러나 바로 몇 년 뒤 마치 데자뷰라 할 지 평행이론이라 할 지 거의 똑같은 형태로 저 풍경이 재연되는 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 년 전 북한의 용천 열차 폭발 사고 때의 일이다.



 “용천군 일반용품 수매상점 수매원인 최영일, 전동식씨는 점심식사를 하러 가던 중 강한 폭음소리를 듣고 기업소로 달려가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품에 안고 나오다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사망했다. 또 용천소학교(인민학교) 교사인 한은숙씨(32)는 수업 도중 강력한 폭풍으로 학교건물이 붕괴되면서 교실에 불이 나자 3층 교실에 있던 김일성 부자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제자 7명을 구해내고 자신은 숨졌으며, 한정숙 교사(56)도 초상화를 품에 안은 채 사망했다.“ 조선중앙통신을 인용한 기사였다.



 1989년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가 죽었다. 아마 그는 최근 저승을 찾은 누군가와 더불어 누가 더 존경받았고 누가 더 숭배의 대상이었는지 겨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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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8 연희전문 농구 최고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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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6년 1월 8일 연희전문 농구 최고의 날

요즘은 좀 시들해졌지만 한창 농구를 즐겨 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기는 묘하게도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최절정기를 구가하던 때와 일치한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김훈 서장훈 등등 지금 읊어도 그들을 따르는 오빠부대들의 괴성이 귀에 쟁쟁한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대학팀은 물론 실업팀(당시는 프로농구가 없던 시절이므로)들까지 파죽지세로 꺾어 나가던 모습은 그 라이벌을 자처하던 고려대학교 농구팀의 응원단으로서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모처럼 농구장을 찾은 날 서장훈이 고대 링에 덩크슛을 꽂아 넣고 내려오면서 고대 응원단을 향해서 감자를 날리는 고얀 행동을 하는 바람에 펄펄 뛰었던 때를 돌이키면 지금도 나도 모르게 우거지상을 짓게 된다.


그 ‘얄미로운’ 연세대학교 농구팀이 그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1936년 1월 8일이 빠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날 연세대학교의 전신, 식민지 조선의 연희전문 농구팀은 전일본 농구 선수권 대회를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한다. 1930년 팀 창단 이후 처음일 뿐 아니라 조선 팀으로서도 최초의 성과였다. 그 중심에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한 사람의 이름이 빛난다. 이성구 (1911-2002)

충청남도 천안 출신인 그가 농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 휘문고보로 유학을 왔을 때였다. 1년 위 선배들이 농구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신기해 하다가 숙직실에 보관 중이던 농구공을 몰래 꺼내서 튕긴 것이 농구와 이성구의 만남이었다. 몰래 농구공을 퉁탕거리던 신입생은 2학년 때는 선수가 됐고 5학년 때에는 전 조선 대표격인 YMCA 농구단의 주전 선수로 훌쩍 커 있었다.

점프해서 백보드를 양손으로 몇 번을 치고 내려오는 가공할 점프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1930년 창단된 연희전문 농구팀 창단 멤버가 된다. 그가 포인트 가드로 활약한 연희전문팀은 창단 첫 해 4관왕에 오르는 등 기염을 토했고 라이벌이자 2년 먼저 창단됐던 보성전문 농구팀도 꺾는 등 무서운 첫끗발을 발휘했다. 그는 졸업 후 은퇴하여 진명여고 교사를 맡는다.

그런데 1936년 일본에서 전일본 농구 선수대회 겸 베를린 올림픽 선발대회가 열린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보전(全普專) 과 전연전(全延專)팀이 참석했는데 모르긴 해도 아마 보전과 연전의 재학생과 졸업생을 망라한 ‘올스타팀’이 참석한게 아닌가 한다. 나이 스물 다섯의 한창 나이기는 했지만 ‘여고 선생님’으로서 애들(?) 가르친 지 몇 년이 된 이성구는 일종의 관계자 신분으로 일본으로 갔다.

보성전문 팀은 1회전에서 탈락했지만 연희전문은 일본의 관동학원팀을 52대 32, 그야말로 대파해 버리면서 파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자 일본 주최측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도 조선인들이 판을 치는 판에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을 겸한 이 대회에서 조선 아이들이 설치는 것은 보아주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식민지 백성 주제에 말끝마다 일본인을 “왜놈들”이라며 키 작다고 무시하는 조선인들과의 농구 시합 아닌가.


일본은 이 대회 출전에 앞서 벌어졌던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시합 후 연희전문 주장 이만걸이 버르장머리 없는 (꼭 서장훈 같았을 거다 흥) 보성전문 신입생과 시비 끝에 박치기를 가해 종로서에 끌려갔던 일을 끄집어내서 징계를 내려 버린다. 독수리 5형제 가운데 하나가 아웃된 것이다. 다급해진 연전 농구부장이 이성구를 호출한다. “어이 자네가 뛰게.” “농구공 놓은 게 언젠데 지금 저한테....” “잔말 말고 뛰어. 그럼 이렇게 기권하고 경성으로 갈 건가?” 


한동안 운동 안하던 이성구는 코트에 들어서야 했다. 왕년의 실력이 녹슨 건 아니었지만 공백이란 무시할 수 없어서 이성구는 잽싸게 한 번 움직인 다음에는 이내 헉헉거리면서 드리블을 늦췄고 연희전문은 ‘지공’(지연공격)으로 들어간다. 주전 하나가 슬로 슬로 드리블인데 도리가 있나. 그런데 연희전문은 이 변칙적인 경기 운영으로 승승장구 파죽지세를 달렸다. 와세다대학이 그 앞에서 나가 떨어졌고 일본 최고의 명문이자 천하무적 농구팀으로 알려졌던 동경제대 농구팀마저 46대 38로 연희전문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경도제대와의 결승전은 아예 20점 차이라는 원사이드한 경기로 끝났다. 식민지 조선의 연희전문 농구팀이 창단 6년만에 전일본 농구선수권을 제패한 것이다. 1936년 1월 8일이었다.


그리고 진명여고 교사 이성구는 일본 농구팀 대표선수가 되어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밟는 행운을 누린다. 거기서도 이성구는 일본인들의 골치를 썩였다. 감독이 조선인을 깔보는 발언을 하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뛰지 않겠다.”고 돌아앉아버려서 감독이 싹싹 빌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성구의 시원시원한 카리스마는 후진들의 입에 즐겨 오르내렸는데 1940년 일본 기원 2600주년 동아시아 경기대회 때의 일이 유명하다. 필리핀과의 승부에서 일본인 감독은 일본 선수로만 스타팅 멤버를 짰는데 영 죽을 쑤었다. 결국 다급해진 감독이 조선인 선수들을 내보내자고 하자 이성구는 이렇게 일갈했다. “너희들이 해서 지고 있으니 너희들이 끝내!” 그 후 조선인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켜서 올코트 프레싱을 벌인 끝에 대역전극을 이뤄내 버렸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그는 평생을 농구인으로 산 그는 연세대학교 체육부장을 맡아 그야말로 은하수같은 농구계의 별들을 길러 냈다. 방렬, 신동파, 김인건 등 한국 농구 역사의 대명사들 이 그의 작품이었으며 지금도 연세대학교에서는 우수한 지도자에게 ‘이성구 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농구인이었다. 그가 91세로 타계한 날은 한국 남자 농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라 할 2002년 아시안 게임 남자농구 결승, 한국과 중국전이 있던 날이었다. 문경은,서장훈,이상민,방성윤, 조상현 등 그의 까마득한 연세대 후배들이 포진한 한국 농구팀은 드라마도 그렇게 썼다가는 말도 안된다고 퇴짜를 맞을 드라마같은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만의 중국전 승리. 하필이면 그날을 골라서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생전에 남겼던 걱정 하나를 매달아 두면서 그 명복을 빈다.

“운동만 잘해도 졸업장을 주고 인격이 갖춰지지 않아도 좋은 회사에 취직 (실업팀 시절이었다) 시켜서 많은 봉급을 준다던가 하는 풍토가 계속되는 건 체육하는 사람들한테 재앙이 될 거야.” 그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졸더라도 수업에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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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9 불에 탄 호루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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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3년 ·1월 9일 불에 탄 호루라기

원칙과 상식을 주창하는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때 이른 봄기운처럼 엄동의 겨울을 감싸고 있던 2003년 1월 9일 새벽, 경남 창원의 드넓은 두산중공업 공장 한 귀퉁이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람들이 출근도 하기 전이었던지라 불길은 태울 것을 마음껏 태웠다. 그 자리에서 발견된 것은 나이 쉰의 노동자 배달호의 검게 탄... 시신이었다.


1월 9일 새벽 5시 그는 채 잠이 덜 깬 아내와 두 딸에게 뽀뽀를 하고서 출근해서 인적 없는 공장을 걸었다. 한때 잠바 안에 호루라기 몇 개 씩을 들고 다니면서 조합원들 모이게 했던 ‘호루라기 사나이’답게 마지막으로 삐리리릭 호루라기를 불어봤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료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만 듣고 싶어서였을까.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하라고 다그치는 동료의 채근을 뒤로 하고 그는 전화를 끊는다. 이윽고 그는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하는 불을 당긴다.


무던히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흔히 “결혼식은 빠져도 되지만 상갓집은 가는 것”이 도리라고 말은 하지만 번다하다는 이유로, 또는 멀다는 핑계로 넘어가는 일이 많다. 그런데 배달호는 대공장답게 전국에서 모여든 동료들의 상갓집을 빠뜨리지 않고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와 함께 다녔던 동료가 질색을 했을 정도로...... 상갓집에서는 훌라를 쳐서 돈을 잃어 주거나 따더라도 술값으로 탕진(?)하는 사람이었고 틈만나면 나이 어린 동료들 집으로 초대해서 ‘소주보다는 좀 좋은’ 술상을 내며 고참 노동자 티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인심 좋은 고참 노동자가, 주변에 사람이 드글드글 들끓었던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시간과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외롭게 몸에 불을 당겨야 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손배 가압류’라는 매우 새롭고 획기적인 회사의 노조 탄압이었다. 구사대를 동원해서 피를 보거나 심야에 농성장을 습격해서 옆구리에 식칼을 찌를 것 없이, 법원에 “노사분규 때문에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는 소송을 내고 가압류 판정을 받아 노동자들의 임금은 물론 집과 가재도구까지 꽁꽁 묶어 놓음으로써, 평화적이고 신사적으로 사람의 피를 말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배달호가 분신한 1월 9일 다음 날 1월 10일은 월급날이었는데 그가 받을 수 있는 돈은 2만 5천원이었다. 그것이 ‘법’이었다. 그 법의 무서움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그 법의 칼을 목에 쓴 배달호 근처에도 가기 싫어했고 배달호는 “사람들이 나를 피해.....”라고 아내를 보고 허탈하게 웃어야 했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노동쟁의에 민사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드물다. 이유는 ILO(국제노동기구)의 말대로 “어차피 파업은 기업의 이익을 저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법이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기업의 이익 대신 얻게 되는 노동자의 권익이 더 큰 공익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자. 여기는 대한민국이니까 법치국가니까. 하지만 “사람이 미래”라고 틈만 나면 광고하는 두산의 사후 행각은 정말로 평온한 심기로 보아주기 어려웠다.


고인의 자동차에서 나온 유서가 너무나 침착하다는 이유로 ‘유서 대필설’을 흘린 것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91년 분신정국에서 사람 하나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그 올가미를 또 드리운 것이다. 세상에 목숨을 끊기로 작정한 사람 그 누가 자신의 유서를 굳이 남에게 대신 쓰게 한단 말인가. 그것이 먹혀들지 않자 사측은 남편의 죽음의 이유를 알고 그에 저항하려는 결심이 굳었던 부인을 배제한 채 고인의 어머니와 누이들을 공략한다. “사실상 노조가 죽인 것”이며, “부인이 바람이 나서 고인이 괴로워했다.”는 식으로 가족들을 꼬드겼고 돈까지 떠안기며 유혹한 것이다. 남편 잃은 아내는 시어머니에게서 “너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찢겨야 했고, 다니던 교회를 떠나야 했고, 이웃으로부터 경원당해야 했다. “사람이 미래다”고 주장하는 기업에게 ‘사람’이란 무엇이었을까. ‘미래’란 무엇이었을까.


고인은 사회주의자도 아니었고 혁명을 꿈꾸던 사람도 아니었다. 근무 시간 전 집합해서 정강이 차이며 앉아 일어서 하던 시절에 노동자가 되어 대한민국 노동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매개로 보다 나은 삶과 가치를 향해 노력하던 숙달된 고참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불법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그 흔한 폭력 한 번 행사하지 않은 배달호는 징역 1년에 집행 유예2년의 전과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30억이라는 천문학적 임금 가압류를 당해야 했다. 군부독재 정권도 아니고, 요즘 말 많은 MB정권 때도 아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바톤 터치 기간에 말이다.


배달호의 죽음으로 시작된 2003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 위원장 역시 ‘손배가압류’의 희생자가 되어 크레인에 매달려 있다가 목매달아 죽었고 또 다른 노동자 하나는 아래와 같은 유서를 남기고 몸에 불을 놓았다.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은 안됩니다.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 노동자들과 대화는 외면한 채 오로지 노동자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악질 기업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그때 노무현의 대답은 “분신으로 항거할 때는 지났다.”는 것이었다.


노무현을 생각할 때마다 그 사자후가 귀에 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시선이 천정으로 향하면서도 “노무현은 개새끼야 그 새끼는 개새끼야.”라고 술자리에서 말하는 친구의 말에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것은 배달호로 시작된 죽음의 행진에 대해 노무현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2003년 1월 9일 새벽,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미움 살 일 없이 살았던 한 선량한 노동자가 아무로 모르게 스스로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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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0 의인 이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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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7년 1월 10일 의인 이근석


1997년 1월 10일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대목이었다. 명동 거리는 주말의 해방감에 젖은 인파로 붐볐고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골목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빽빽한 사람들의 숲속에서 매서운 눈을 번득이며 뭔가를 찾는 세 명의 사내들이 있었다. 한데 몰려 다니다가 흩어졌다가 누군가에 접근했다가 바람같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손에서는 연신 빈 지갑들이 떨...어졌다. 지방에서 서울 대목을 노려 상경한 소매치기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또 다른 날카로운 시선이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서울경찰청 소매치기 전담반 형사들이었다. 소매치기 일당의 행적을 완벽하게 포착한 형사 하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니들 오늘 죽었어."

강력계 베테랑으로 완력 하나는 김두한이 살아오더라도 메칠 자신이 있던 서정표 형사는 또 다시 누군가의 핸드백을 찢으려는 소매치기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깜짝할사이에 두 명이 명동 바닥에 엎어졌다. 하지만 순간 서정표 형사는 아뿔싸 외마디를 내뱉아야 했다. 소매치기들은 항상 흉기를 소지하고 다녀서 단독으로 그들에게 대들었다가는 낭패를 본다던 말이 머리를 찔렀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 순간 서형사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뜻밖의 활극 구경에 눈이 동그래진 인파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고 동료 형사들은 그 인파를 뚫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저놈이 칼을? 그 짧은 찰나 서 형사의 눈앞에서 소름끼치는 빛이 번득였다. 소매치기 한 명이 칼을 휘두른 것이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구나! 피가 튀고 사람이 픽 쓰러지자 사람들은 늑대를 본 양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주로가 뚫린 소매치기들이 달음박질을 하려는 순간 인근의 악세사리 샵에서 한 젊은이가 튀어나왔다.

청년은 정의의 사자처럼 칼을 든 소매치기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하고 칼을 빼앗아 팽개쳤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렸지만 그 환호는 소스라치는 침묵에 묻혔다. 바닥에 엎드렸던 소매치기가 또 다른 칼을 꺼내 청년의 심장을 찔러 버린 것이다. 소매치기들은 남산 쪽으로 달아났다. 청년은 병원에 실려가면서 연신 이렇게 얘기했다. "집에 연락하지는 말아요 부모님 걱정하시니까,"

그러나 그것은 유언이 됐다. 삼형제 중 막내, 형들에 비해 공부는 못했지만 장사를 해 볼 결심으로, 그리고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각오로 리어카 행상을 나섰던 청년, 팔다남은 옷가지가 있으면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 옷을 안겨줬고 유난히 싹싹해서 단골도 많았던 청년은 그날 이후 다시 부모님을 보지 못했다.

독기를 품은 경찰들이 용의자들을 찾아 헤맨 끝에 소매치기들은 체포됐다. 그들은 대담해지기 위해 필로폰까지 투약하고서 '영업'을 하던 일당들이었다.

1월10일 저녁, 그가 쇼윈도 바깥을 지켜보다가 소스라친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비록 유도도 했고 덩치도 당당한 청년이었지만 자신만큼이나 단단한 체구의 형사가 칼에 맞고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누구나 움츠러들고 행여 자신 앞으로 놈이 뛰어들지 않을까 하느님 부처님을 찾았을 그 순간에 그는 칼 앞으로 뛰어들었다. 살기띤 소매치기의 눈 앞에서 순간 후회도 했을지 모른다. 그때라도 물러섰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갔다. 무모하게, 바보처럼, 생각 없이.

사건 소식을 들었던 날 기억이 난다. 동료 PD들은 안타까와하면서도 칼 앞에 몽둥이라도 하나 들었어야 한다는 둥, 너무 무모했다는 둥 사설을 달고 있었는데 한 선배가 그 구설들을 한마디로 틀어막았다.
"용기 없으면 용기 있는 사람 존경이라도 하자.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그랬을줄 아냐."


용기란 건 사실 남보다 한 발 더 나가는 것일 거다. 하지만 대개 한 발이란 암스트롱의 달 위의 한 걸음보다 더 어렵고 멀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 발을 내딛었다가 상처받은 사람들의 용기를 기리기보다는 한 발 나서지 않아 온전할 수 있었던 지혜를 대견스러워 하는 일에 더 익숙했다. 그리고 그 '지혜로움' 앞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발휘한 최대의 미덕인 용기는 무모함으로, 때로는 미련함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사건 당일 나와 내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착하게만 살다가 용기의 댓가로 목숨을 잃은 청년 이근석은 명동 바닥에 덩그러니 세워진 추모비 하나로 그가 짧디 짧게 살았던 세상에 남아 있다. 명동 거리에서 우연히 이 추모비와 마주친다면 피묻은 칼 앞으로 서슴없이 뛰어들어 "이 나쁜놈들!"을 부르짖은 한 청년의 명복을 빌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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