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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1.29 KAL 858과 김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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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7년 11월 29일 KAL858과 김현희

16년만에 부활한 대통령 선거의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던 즈음 또 하나의 태풍이 인도양 상공에 형성됐다. 그때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로서 중동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이 많았던 시절, 그들을 가득 싣고 돌아오던 KAL 858 편이 1987년 11월 29일 버마 안다만 해 상공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후의 사건 전개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겠다.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된 장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전날 마스크를 쓴 채 트랩을 내려왔던 '미모의' 여자. "언니 미안해"라고 얘기하며 술술 자신의 정체를 불었다는 북한 공작원. 그리고 초췌한 얼굴로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범죄 사실을 시인하던 테러범 김현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범죄로 인해 누가 가장 큰 이익을 얻는가?"라는 질문은 범죄 수사의 기본이자 인간적인 상식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누가 봐도 뻔했다. 16년만에 부활한 대통령 선거였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수류탄을 까겠다."고 육군 장군이 대놓고 말하던 시절, "안정이냐 혼란이냐?"를 부르짖던 진영에 김현희가 일으킨 테러는 천군만마의 응원군임에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울로 막 올라왔던 신입생 시절, 어떤 집안 모임 자리에서 나는 학교에서 주워 들은 어줍잖은 지식과 그때까지의 상식을 총동원하여 김현희 날조론을 폈다. 북한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한창 남한의 선거판이 벌어지는데 노태우를 돕는 삽질을 할 이유가 없으며, 결과적으로 가장 이익을 본 것은 노태우 정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때 오래 군문에 계셨던, 그것도 정보사령부 즉 북한에 간첩 보내는 부대의 대령으로 제대하셨던 집안 어르신이 싱긋 웃으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북한 아이들이 남한의 민주화 세력 돕는 줄 아니? 걔들은 이쪽에서 독재 정권이 유지되길 바라고 그쪽을 돕는다." 사뭇 이해가 안가는 말이었고 나는 김현희가 가짜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 믿음이 조금 이그러진 것은 96년 이후였다. 1996년의 총선 며칠 전에도 북한은 까닭을 알 수 없는 무력 시위를 벌인 바 있었다. 한국 총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을 뻔히 아는 북한이 하필 왜 그때 그런 일을 했는지, 판문점을 중계방송하다시피 한국 국방부는 난리굿판을 벌였지만 왜 그리 미국은 시큰둥했는지, 무력 시위가 있은 후에도 외국인 관광이 중단되지 않은 이유는 뭔지, 의문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1997년 대선 때에는 아예 이쪽의 공무원과 대권 주자의 측근들이 북한에게 돈을 주고 총을 쏴 달라고 요청하다가 발각된 '총풍' 사건이 벌어졌다.

한바탕 난리법석이 났고 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긴 했다. 그런데 의아했던 것은 북한이었다. 어찌 되었든 남측의 인사들이 그런 짓을 주문할 생각을 했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보수 진영의 인사가 북쪽과 접촉하여 '사바사바'를 해 왔다는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고, 김현희에 대한 재조사가 당연히 시작됐다. 수많은 의문이 제기됐고, 여러 차례의 재조사가 진행됐고 한홍구나 안병욱 등 진보적 인사들까지 가세한 위원회가 가동하여 KAL 858 사건을 파헤쳤다. 정권이 바뀌면서 국정원 내부에서도 엄청난 물갈이가 있었고, KAL 858 정도의 대형 사건이 조작된 것이었다면 충분히 뒤집을만한 증언이 나올 법도 하건만 그런 소식은 없었다.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KAL기 사건을 조사했습니다. 조사해보니 김현희가 KAL기를 터뜨린 것이 맞더라고요. 적어도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렇습니다. KAL기 폭파 사건 관련해서 엄청나게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래서 민간 쪽에서 KAL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하던 분을 모셔다가, 그 모든 의혹을 다 적어 놓고, 하나하나 풀면서 지워나갔습니다. 몇몇 문제를 빼놓고는 거의 대부분 김현희가 범인이라는 정황이 증명되었습니다. 김현희는 분명 남쪽 출신이 아니었고요...... 민간에서는 아직도 KAL기를 안기부가 터뜨린 것이다, 라고 많이들 믿고 있는데요. 저희가 조사한 사항의 거의 대부분이 김현희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는데, 그게 다 맞더라고요. 김현희도 약을 먹고 죽으려다가 살아났잖아요. 만약 김현희가 죽었다면 오히려 안기부가 꼼짝없이 뒤집어쓸 수밖에 상황이 됐을 겁니다."

물론 저 말이 진실임이 확증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로 볼 때 가장 객관적인 팩트에 근접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지금도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틈에서 KAL 858은 북한이 터뜨린 것이고 그 범인이 김현희라는 주장을 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것 또한 현실이다. 한홍구도 매수되었다고 우기는 사람도 보았고, "모든 의혹을 적어 놓고 지워 나간" 의혹들을 새삼스레 늘어놓으면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이도 있었다. 이미 김현희는 진보의 '타진요'가 되었다면 과장일까. 회의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고, 의심 없이는 진실에 다다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의심과 회의가 또 다른 믿음과 스스로 인정하는 '진실'의 외피에 불과하다면 이는 완고한 불통의 단초들에 불과하게 된다.

김현희든 누구든 1987년 오늘 858을 떨어뜨린 날, 다시 김현희를 생각한다. 그로 상징되는 남북 관계와 남쪽의 '진보'를 생각한다. 진보는 모든 것에 회의하는 것이 그 발걸음의 시작이다. 어떤 진실이 반드시 '진실이어야 할 때', '진실임을 믿을 때', 오히려 그 당위와 믿음은 진실로부터 멀어져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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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1.30 민영환의 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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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5년 11월 30일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 충정공의 분사

서울 길 가운데에는 옛 위인들의 이름을 딴 것들이 많다. 율곡로 퇴계로 충무로 세종로는 굳이 말 안해도 누구나 알 것이고, 동대문 근처의 왕산로는 의병장 허위의 아호에서 연유한 것이며, 사가정길은 조선 초기의 명신 서거정의 호에서 유래한다. 그럼 충정로는 누구의 시호일까? 그 주인공은 충정공 민영환이다.
...
1882년 임오군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무려 13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던 군인들에게 모처럼의 쌀이 지급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군인들이었지만 어쨌건 간만에 급료가 나온다는 소식에 사뭇 상기된 채 선혜청 앞마당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쌀을 받아든 군인들의 입에서 격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도둑놈의 새끼들이 이걸 사람 먹으라고 주는 거냐." 쌀에는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그 양도 정량의 반 밖에 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는 자들의 말로는 그렇게 곱지 못한 법이다.

흥분한 군인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고, 병조판서 민겸호가 그 주동자를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폭동을 일으켰다. 그 분노의 가장 큰 표적은 병조판서 겸 선혜청 당상 민겸호였다. 민비의 척족으로서 조선 왕조에서 가장 부패한 일가붙이로 평가되는 민씨 일족으로서, 이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었다.

조선 왕조 사상 최초로 관군이 궁궐을 범하는 일이 벌어진다. 임오군란이었다. 대원군의 은밀한 명령 하에 대궐에 뛰어든 군인들은 민씨라면 왕비 이하 다 죽여 버릴 기세였고, 민비는 무예별감 홍재희 (여러 문학작품이나 영화나 공연 속에서 민비를 사모했다고 상정되는 그 인물)에 의해 구사일생 목숨을 건지지만 병조판서 민겸호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지만 매정하게 거절당하고는, 원한에 사무친 병정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때 그의 아들 영환은 스물 한 살이었다.


17살 때 과거에 급제한 것은 영특하다고 치지만 민영환의 그 뒤의 출세 가도는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스무살에 승지를 지냈고 스물 한 살에는 성균관 대사성, 요즘 말로 하면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니 하늘에 닿는 재주가 있었다 해도 가문의 영광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출세였다. 그 역시 민씨 척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비명에 간 후 벼슬에서 물러서기도 했지만 민비가 보무도 당당히 복귀한 뒤 다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그다지 충직한 관료는 못되었다. 녹두 장군 전봉준은 심문 과정에서 조선의 3대 탐관오리로서 민영준과 고영근, 그리고 민영환을 들었고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기름진 자리는 모두 민 씨 아니면 민 씨의 사돈들이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도 친정집에 빠져서 성(姓)이 민 씨라면 촌수가 멀고 가깝고를 따지지 않고 한 가지로 여겼다. 민 씨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의기양양하여 사람을 물어뜯을 기세였다"라고 적었던 매천 황현의 경우 가장 극심한 부패 척족 4인방 중 하나로 영환을 꼽았다. 즉 잘 먹고 잘 살았던, 권세가의 떡고물에 포만감 그득했던 세도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 세계를 한 바퀴 돌면서 근대를 이해하게 되고, 그의 행적은 점차 탐관오리 세도가의 판에 박힌 궤도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열강세력들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의 신장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 것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독립협회의 적극적인 후원자 가운데 하나였고,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종씨들에게 미움을 사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 11월 30일 그는 을사조약으로 식물 국가가 된 나라를 통탄하며 망국의 관료로서의 마지막 책임을 다할 것을 결정한다. 가문의 힘을 얻어 벼락 출세를 하고 나라에서 으뜸가는 부패 관리의 오명도 썼던 그였으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부귀영화를 놓지 않으려던 그의 척족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다. 고종의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스스로에게 칼을 휘둘러 목숨을 끊는다.

그 정도로 또르르한 세도를 굴리고, 방귀깨나 뀌던 자들 중에서 그와 같이 책임을 통감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의 유서는 앞서가는 지사의 비장함 같은 느낌도 있지만, 동시에 누렸던 만큼 돌려주지 못하고, 받은만큼 역할을 하지 못한 이로서의 미안함이 그득하다. 그의 유서를 그의 기일 다시 읽는다.

"오호라,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생존경쟁이 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 민족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무릇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잘 알 것이다. 나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을 갚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에게 사(謝)하려 한다.
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여, 천만배나 분려(奮勵)를 더하여 지기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아울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 그러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우리 역사에서 가물에 콩나듯 등장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체현자. 민영환이 오늘 마흔 넷의 나이로 자진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일도 쉽지는 않다.


P.S 그의 기일은 내 생일이기도 하다. 속절없이 나이만 먹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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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2.1 국가보안법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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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의 탄생

취재차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처마마다 뚝뚝 떨어지는 경향 각지의 흉가들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귀신들은 대구 근처의 한 산기슭, 지금은 현대식 병원으로 탈바꿈한 옛 공장 터에 출몰한다는 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똑똑히 안다. 그들이 나타났다는 옛 공장 터 뒤편에는 오래 전 폐광된 코발트 광산의 갱도 안에서 나는 그 귀신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동굴 안에는 무슨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수백 구의 백골들이 작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백골들의 주인은 낙동강 전선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이 골짜기로 끌려 왔던, "좌익으로 판정된" 보도연맹 소속 민간인들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61년이다. 귀신들은 이미 힘이 빠졌고 흉가들은 머지않아 포크레인 삽날에 부서져 나갈 것이지만, 그 섬뜩했던 전쟁의 논리는 과연 사라졌을까. 유감스럽지만 대답은 아니오이다. 바로 한국전쟁보다도 먼저, 1948년 12월 1일 탄생했고, 끔찍했던 그날 허공 위를 떠돌며 학살을 독려했던 국가보안법이라는 귀신의 송곳니가 여전히 시퍼렇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 가운데에서도 그 악명이 드높은 제 7조는 “국가의 존립 ·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 · 선동한 자”를 처벌한다고 선언한다. 누군가가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치자.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재간이 없는 다음에야, “국가의 존립과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를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결국 이놈의 법은 집행하는 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대구의 코발트 광산 동굴 속에서 수천 명의 사람이 죽어야 했던 이유가 “저들은 위험할 수 있다.”는 예단이었던 것처럼.


전쟁 때나 그렇지 21세기 대명천지에 그런 일이 또 있겠느냐며 손사래를 치는 분들께는 2005년께에 불거졌던 교육청의 ‘전시(戰時) 학도호국단 운영 계획’이라는 문건 한 구절을 읽어 드리는 게 좋겠다. 이 문건은 “좌경학생에 대한 특별지도를 실시하고 교원 및 교직단체에 대하여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며...... 순화가 곤란한 학생은 관계기관과 협조하여 격리 조치해야 한다.......”고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전시에 행해지는 특단의 대책은 무엇이며, 학생이 좌경인지 아닌지는 또 어떻게 되며, 격리조치의 근거는 무엇일까. 필시 ‘그날’이 오면 교육청이 끌어올 수 있는 법적 근거는 국가보안법 외에 따로 없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의 귀신은 항상 이런 식으로 우리의 등 뒤에 도사리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수십 년에 걸친 야만과 저항의 시대, 국가보안법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했다.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를 인정해 주었다는(또는 남한 정부가 그렇다고 우기는) UN이 이제 그런 법은 버려도 된다고 충고해도, 심지어 미국 정부가 흉을 보아도, 수천 명의 청춘과 목숨을 걸고 악법 폐지를 절규했어도 국가보안법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이 쇠심줄 같은 국가보안법의 생명력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 요체는 김종필의 능글맞은 질문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싶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불편한 사람 있느냐?”

있으면 손 한 번 들고 나와 보라, 얼굴 한 번 보자고 들이미는 저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태연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역사였다. ‘불편’한 자는 곧 ‘불온’한 자의 동의어였고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딱지는 “네 생존이 의심스러울 수 있다”는 협박이었기 때문이다. 즉 공포는 국가보안법의 존립 근거이자 생존 방식이자 공수겸용 무기였다. 심지어 국가보안법의 희생자가 되어 사형대에 목이 매달릴 뻔했던 이가 대통령이 되었어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슬래셔 무비의 잔인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하키 마스크를 쓴 제이슨 국보법은 무시무시한 도끼를 들고 히죽히죽 웃으며 거리를 누볐다. “너 나 무섭니?”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자의 수는 전직 사형수의 정권 때에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지금도 공중파 방송사가 명절마다 틀어주는 영화 <실미도>에서는 극장에서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었던 ‘적기가’를 엉뚱한 음악으로 덮어 버린다. 이적단체를 고무 찬양한다는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역대 흥행 기록 몇 위를 자랑하는 영화를 원판 그대로 관람하지 못한다.

법정에서 김정일 장군 만세를 부르짖는 사람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를 처벌하고 그 생각을 가둔다고 그런 부류가 없어진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못해 절망적이다. 맞아 죽고 불에 타 죽고 사자에 뜯겨 죽는다고 기독교가 수그러들었던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이들이 부모가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그걸 질질 끌면서 자기가 섬기는 사기꾼들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지도 못했던가. 사람의 머리가 법이라는 자물쇠로 채워지는 사립문 같은 존재였던가.

“그들을 아예 북한으로 보내 버려야 한다.”고 흥분하거나 “전쟁 나면 우리 뒤통수를 칠 놈들”이라면서 죽여 버려야 한다고 이를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순 넷 먹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의 쇠귀신이 히죽거리는 모습을 본다. 인간의 본원적 가치의 간을 꺼내고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찢어 죽이는 흉악한 귀신. 12월 1일 오늘은 그 귀신의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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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2 로또 발매, 가장 크게 나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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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2002.12.2 로또 발매 시작 

어렸을 적 복권의 대명사는 주택복권이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하면 화살을 날려 돌아가는 원판에 꽂고 기운찬 남자 목소리가 '6번이오'를 알려 주던 그 프로그램의 최고 당첨 금액은 3천만원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에 올림픽 복권이 등장하면서 복권 상품 금액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억을 헤아리게 된다.  이후 복권계에 또 하나의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 2002년12월2일의 일이었다. 로또라는 이름의 복권이 등장한 것이다.  

로또의 행운으로 인생대역전을 이룬 이들은 이미 수천 단위에 이를 것이다.  어느 경찰서에 근무하던 경찰관이 터뜨린 400억의 대박부터 소소한(?) 10억짜리 행운까지, 그 행운을 거머쥔  이들은 매스컴이나 주위 사람들의 집요한 추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허다한 믿거나 말거나성의 루머에 사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큰 행운의 후폭풍은 만만하지도 않았다. 로또 취재 중 건너 건너 들었던 이야기들은 어이없는 것들이었다.   포스코 정규직으로 잘 다니던 동생이 아예 사표를 내 버리고 배수진을 친 채 돈 달라고 찾아왔다든가, 사돈에 팔촌까지 '공돈' 덕 좀 보자고 달려드는 데에 "그냥 내 형이 당첨되고 그 돈을 내가 얻어쓰는 게 낫겠다"면서 절규했다든가. 

 그 1등들을 취재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결국은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행여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어버린, 또는 이미 인생역전을 이뤄 구름 위로 올라가 버리신 1등 당첨자들의 그림자 옷깃에도 스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만나고 싶은 이는 따로 있었다.  


그는 울산의 40대 회사원이었다.  로또 2등에 당첨되어 3천1백만원 정도를 받았던 그는 "친구한테 복권 되면 천만원 주기로 약속했다"는 이유로 천만원을 줬고 나머지 2천1백만원은 희귀병을 앓고 있는 여자 아이에게 전달함으로써 자그마한 화제를 낳았던 것이다. 즉, 그는 로또 2등이라는 준 중박을 맞고도 단 한푼도 자기가 갖지 않은 거다 

그가 사는 곳은 울산에서 도저히 잘나간다고 볼 수는 없는 동네의 언덕빼기에 서 있는 한동 짜리 맨션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돈 3천만원이 아무리 값어치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요긴하게 쓰자면 그 허름한 맨션에서 보다 깔끔한 곳으로 옮길 정도는 넉넉히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는가. 왜 굴러들어온 호박을 넝쿨째 차 버렸는가.

궁금증으로 숨이 턱에 닿은 질문에 비해 아저씨의 질문은 생뚱맞을만큼 천연덕스러웠다. “친구가 농담으로 로또 되면 좀 달라고 했을 때 돈 천만원 준다고 했으니 준 거고, 울산방송에서 너무 불쌍한 아이 이야기가 나오길래 그냥 준 거”라는 것.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런 선행을 베푼 데는 뭔가 가슴 아련한 뒷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여겼던 제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씨 뭐 이래

“부인이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아니오. 그러자니까 그러자던데요.”
“아들은?”
“그냥 그러자니까 박수 치고 그랬어요.”

그렇다곷머리에 광배 하나 두른 것 같은 성인군자의 가족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지하철에서 출퇴근시 꾸벅꾸벅 졸며 만날법한 평범한 아저씨와 그 가족들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왜? 왜? 왜? 기를 쓰고 파고드는 PD의  인파이팅에 그분은 무척 건조한 카운터 펀치를 날려 왔다. 


“내 것 같지 않더군요. 복권을 사긴 샀는데 그렇게 거금이 떨어지니까 내 것 같지 않더라고. 그래서 버려 버렸죠. 버리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하데...... 경상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가끔 하죠.
‘강구야~~~’”


아마도 ‘광고야~~’에서 변형되었을 듯한 ‘강구야~~’라는 말은 그쪽 지역 꼬마들이 이사를 가거나 하여, 인심을 쓰고 싶거나 하여 딱지나 구슬 등등을 동네에 뿌리고 싶을 때 부르짖는 단어다. 결국 아저씨는 돈 3천만원을 ‘강구야~~’ 했다는 것이다. 

아저씨와 그 부인이 뭔가를 내밀었습니다. 그것은 아저씨가 익명으로 전달한 돈을 받은 희귀병 환아의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대체 이 은혜를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합니까.......’ 즉 이 부부는 성금 전달시 철저하게 익명을 요구했었고 환아의 어머니가 은인들이 누구인지나 알게 해 달라고 그 편지를 방송국에 보내 호소했을제에야 그 정체를 밝혔었다. 그것도 아주 잠깐.   

 하지만 그 편지를 내미는 부부의 얼굴만큼은 그때껏 얼굴을 지배하던 쑥스러움을 벗어 던진 자랑스러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부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언제 이런 사람이 한 번 돼 보겠어예. 누구한테 이래 고마운 사람 돼 봤어예?”


그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 그 아이와의 인연을 끊지 않고 있었다. 겨울에 가스 들여놔 주고, 명절에는 과일로 인사치레를 했다.  그 와중에 또 로또 3등이 당첨됐다.  이번에는 그 아이의 집에 에어콘 하나를 놓아 주었다. 남들은 한 번 되기도 어려운 복권을 두 번씩이나 맞은 것도 신기한 일인데, 그걸 또 남 좋은 일에 썼다는 이 대책없이 신기한 사람들은 그게 ‘신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판에 박힌’ 말을 했습니다. 조금만 버리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이 아저씨는 철저하게 취재를 거부해 왔었다. 어떤 프로그램은 문앞까지 가서도 못들어갔고 어떤 프로그램은 숫제 시사프로그램의 제보자 필 나는 "다리만 나오는 인터뷰"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선선히 인터뷰에 응하게 된 것일까.  

“혹시 방송에 나오면 그 아이한테 도움이 될까 봐서요. 아직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거든. ARS 같은 거 혹시 안되나?”

그렇게 아저씨는 또 한 차례 자신을 버리고 있었다.

2002년12월2일 마흔 다섯 개 중 여섯 개의 숫자를 고르는 로또가 발매 개시됐다.  그 공식 명칭은 '나눔 로또'였다.  내년으로 10년을 맞게 되는 로또의 역사에서 나는 작은 자긍심 하나를 갖는다.  나는 가장 크게 나누었던 사람을 만났다. 

1984.12.3 인도의 히로시마 보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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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4년 12월 3일 인도의 히로시마 보팔

1984년 12월 3일이 된지 얼마 안된 한밤중이었다. 곤한 잠을 자던 사람들은 갑자기 뭔가가 눈과 코를 찌르는 느낌을 받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고 배가 부풀어 올랐고 사지가 뒤틀린 채 픽픽 쓰러져 갔다. 안간힘을 다해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거리에 널부러진 사람들과 짐승들의 시신을 보고 경악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뜨고 죽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 밤 안으로 무려 3500명 (더 높게 잡는 사람도 있다)이 그렇게 죽었다.

이 떼죽음을 몰고 온 저승사자는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주의 보팔 시 외곽에 있던 미국 화학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의 농약 공장의 원료저장 탱크에서 새어나온 맹독성 물질인 메틸 이소시안염(MIC)이었다. “화학 물질의 히로시마” 보팔 참사가 터진 것이다. 그날 죽어간 3500명이 다가 아니었다.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3만 3천여명에 달한다고 보고됐고, 약 50만 명의 인구가 가스에 노출됐으며 그 가운데 상당수가 결핵이나 실명, 피부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누출 사고의 원인은 저장탱크 속의 압력이 높아지면서 밸브가 파열되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다국적 기업인 유니언 카바이드 사는 이 사고에 대한 보고서에서 운전원의 실수 때문에 일어난 사고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밸브 파열에 대비한 안전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고, 안전관리가 소홀하였던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사실은 외면했다. 공장은 한 마디로 엉망이었다.


참사로부터 2년 전 내부 가스 누출 사고로 사람이 죽었고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하여 안전한 작업을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는 해고로 맞섰고 비용 절감을 내세우며 노동자의 수를 반으로 줄여 버렸다. 안전교육은 6개월에서 달랑 15일로 바뀌었다. 소량의 가스가 상시적으로 새어나오는 통에 경보기가 수시로 삑삑거리자 아예 무음으로 바꿔 버렸다는 얘기에 이르면 독가스가 내 코로 스며드는 느낌이 든다.

사건은 어차피 터진 것이고 남은 문제는 피해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책임자의 규명과 처벌알 것이다. 그런데 2만 명이 죽고 5만 명이 영구 장애를 입고 사건 발발 20년이 넘도록 지하수에서는 유독물질들이 철철 넘쳐나는 이 끔찍한 사태의 법적 판결은 사건 발발 이후 26년만에 나왔다.

2010년 보팔 지방 법원은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회장이었던 워랜 앤더슨과 인도 지사 경영진에게 ‘과실치사’를 적용하여 징역 2년을 선고한 것이다. 사건을 질질 끌기로 세계적인 악명이 있는 인도 법원이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시간 끌기와 그보다 더 자심한 판결이었다. 피고인들은 그 처벌도 받지 못하겠다며 항소했고 인도 대법원에서 판결이 나려면 아마도 그들이 늙어 죽은 뒤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런 미증유의 화학 물질 참사를 낸 기업 유니언 카바이드는 어느 정도의 보상을 했는가. 일단 유니언 카바이드는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거부했고 공장 노동자를 죄다 해고한 뒤 수천 톤의 유독 물질을 방치한 채 떠나 버렸다. 지금도 이사갈 돈조차 없는 빈민들은 그 죽음의 공장 주변에서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86년 인도 정부는 유니언 카바이드와의 협상에서 보상금으로 4억 7천만 달러만을 받고 더 이상 어떤 책임도 묻지 않기로 합의하는 대단한 결단을 내린다. 이는 피해자들이 직접 소송을 제기하면 3백억 달러에 달할 수 있는 보상금(인디펜던트 지 보도)을 껌값으로 막아 버린 처사였다. 인도 정부는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고, 부상자들에게 2만5천루피(60만원), 사망자 가족들은 10만루피(240만원)씩을 지급했으며, 그나마 꽤 많은 돈이 “지급대상자 불명”으로 처리돼 중앙은행 금고에서 잠자고 있다.

이쯤 되면 정말 인도는 여러 의미로 굉장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자국에서 외국 기업이 그런 사고를 쳤는데 30년이 되어 가도록 그 경영자들을 한 명도 처벌하지 않고, 피해보상을 피해자와 합의도 없이 제 맘대로 처리했던 정부도 그렇지만, 인민들도 그런 것이 그 가족들이라도 데모를 하든 폭동을 일으키든 하여간 무슨 사단이 나도 나야 정상이 아닌가 말이다. 괜시리 혼자 흥분해서, 인도의 심오한 정신 세계를 논하는 친구 녀석을 불러내어 그 후진성에 대한 성토를 퍼부어 주리라 계산하다가 문득 또 다른 생각에 퍽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피해자와 합의 없이 정부가 임의로 피해보상금을 책정하여 개인들의 피해 보상 소송을 막아 버린 행위”는 인도 정부만 한 게 아니라 한일협정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했던 일이었다. 일본이 11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데에 합의했던 것이다. 한일협정은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에서 일방 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 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1945 년 8 월 15 일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초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없는 것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즉 상대 국가에 대한 개별 청구권을 원천적으로 막아 버린 것이다. 일본군 성노예로 인생을 짓밟혔던 할머니들과 징용당하고 징집당해 인생을 말아먹힌 이들의 피맺힌 호소는 당연히 무시된다. 보팔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고 이전 유니언 카바이드 사가 보여 주었던 ‘비용 절감’과 ‘안전불감증’은 ‘후진국’ 인도에서만 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KTX의 탈선 사고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사고들이 빈발하는 가운데 코레일 사장이 했던 말은 가슴 한켠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무슨 사고는..... 사람이 다쳤습니까? 이상 신호가 들어오니까 그걸 점검하고 다시 출발한 건데..... 그걸 가지고 무슨 큰일난 것 같이. 그냥 어디까지나 작은 고장인데.....” 이 코레일 사장은 “비용 절감”을 입에 달고 살고 있다. 역시 보팔에서도 보았던 일이다.

이런 형편에 인도를 탓할 깜냥이 남아날 리 없다. 인도인의 심오한 정신 세계를 추구하며 그들의 생존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울 뿐. 보팔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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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2.4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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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2월 4일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없는 통곡이어든

“이 산하에”라는 노래가 있다. 초기 노찾사에서 고 김광석이 그 유려하면서도 터질 때 터지는 목소리로 불렀으며, 남들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되레 저지하려 하지만 내 나름의 18번으로 고집했던 “이 산하에”, 그래서 하이텔 시절 ‘산하’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디를 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던 이 노래의 1절에도 동학 농민군의 이야기는 등장한다.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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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다. 1894년 음력 11월 8일, 양력으로는 12월 4일, 녹두장군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은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의 관문인 우금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우금치 전투의 개시였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 최대의 분수령을 이룬 이 우금치 전투는 사실은 전투가 아니었다. 일종의 학살이었다.


죽창 들고 흰옷 입은 수만 농민군을 맞아 싸운 것은 2천5백명의 관군과 200명의 일본군이었다. 대세는 첫판에서 이미 결정이 났다. “민중봉기의 시대를 깨끗이 마감했다”는 평을 듣는 신무기 개틀링 기관포가 농민군들을 그야말로 개미떼 쓸어버리듯 때려눕혀 버린 것이다. 보국안민,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깃발 아래 천지를 무너뜨릴 의기로 가득했던 농민군들이었지만 기관총의 밥그릇에 담긴 쌀알 하나만도 못하게 픽픽 쓰러져 갔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회고를 빌자면 “선봉대 1만 명 가운데 첫 전투가 끝나자 3천5백명이 남았고, 두 번째 전투가 끝나자 남은 것은 5백명”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동학농민군 역시 이 기관포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하나는 가지고 있기까지 했다. 관군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책은 정말로 슬프게도 주문 외우기였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이를 외우면 총알이 피해 간다는 믿음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끈덕지게 우금치 마루에 달라붙었고 능선에 포진한 관군과 일본군은 오는 대로 쏘아 넘겨 버렸다.


그러나 그 가공할 신무기의 위력을 눈 뜨고 보았으면서도 동학군 지도부는 더욱 더 용맹한 돌격을 호소했을 뿐, 죽어간 동지들의 원수를 갚자고 절규하며 “저 고개만 넘으면 한양이 우리 손에 든다”고 외쳤을 뿐, 그 무기를 어떻게 피하여 백분의 일 정도 되는 방어 병력을 격파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은 하지 않았다. 장비 우세한 관군을 수로 압도하여 승리를 일구었던 기억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관군의 우세한 무기 때문에 아기 장사 (나이가 어려서 이렇게 불렀다고 함) 이복용 등 수많은 동지들이 피를 뿜고 죽긴 했지만 기어이 이겨서 환호했던 날의 여운이 생때같은 농민들의 등을 우금치 마루 위로 떠밀어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때처럼 하면 우린 될 거야. 아마 될 거야.”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의기가 모자라서도 아니었다. 그 용기를 담아낼 국량과 그 의기를 현실적인 승리로 승화시킬 지혜가 아쉬웠을 뿐이다. 그리고 댓가는 혹독했다. 장렬하다는 형용사를 갖다 붙이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학살극이 펼쳐졌고, 용감했다는 찬사를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무모하게 돌격을 되풀이하던 농민들은 며칠 전 떨어진 우박처럼 천 갈래로 깨지고 만 갈래의 가루가 됐다. 동학군 최고의 용장이며 집강소 설치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남원 부사의 목을 쳐 버리고 효시까지 했던 열혈남아 김개남이 이끈 청주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2만 명이 넘는 대부대가 100명의 수비대에게 와해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우리가 배우고 기려야 할 것은 동학군의 천추에 빛날 의기만은 아니다. 그들의 쓰러짐에서도 처절하고 냉철하게 얻을 것은 얻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할 것이다. 끝까지 봉기를 주저하던 최시형의 북접이 마침내 남접의 호소에 응하여 무기를 들었을 때, 그래서 그 사위 손병희가 전봉준과 손을 맞잡고 하나됨을 선언하였을 때 동학군은 아마 천지를 다 얻은 듯 했을 것이다. “단결한 우리 앞에 나설 자가 누구냐?” 하늘을 우러러 앙천대소도 하였을 것이다.


관군 수천 명도 이겨 봤는데 일본군 수백 명 따위가 기관포 같은 걸 쏴 봤댔자 오르고 또 오르면 하늘 아래 있는 고지에서 우리 손에 목이 잘려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집강소 분위기도 맛보았겠다, 전라 감사와 맞먹는 권위로 개혁을 밀고 나가던 우리를 똑똑히 보았겠다, 백성들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섣부른 확신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녹두장군 자신이 “시천주 조화정”을 외우면 총알이 빗겨 나간다는 믿음을 가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자신의 병력들에게 그 말을 믿도록 고무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 결과는 총검조차 대보지 못한 채 수만 명이 뛰어만 가다가 바닥에 엎어져 죽어간 대참패였다.


우금치에서 죽어간 이들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다.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기에 역사는 “이 산하에” 노래의 2절과 3절이 말해 주듯 3.1 운동과 북만주 독립 투쟁으로 이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다. 우금치마저 없었다면 우리의 과거는 얼마나 더 부끄러워지겠는가. 하지만 그 장렬함에 취하고 녹두장군의 당당한 최후에 감동하며 녹두꽃 떨어지면 울고 가는 청포장수의 심경이 되어 부엉이처럼 구슬피 울어 보는 것도 하나의 역사 배우기라면 존경을 품는 한편으로 냉철하게 그 오류를 분석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본보기로 삼는 것도 또 다른 측면의 역사 익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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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2.5 '무장한비'(?) 출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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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59년 12월 5일 ‘무장한비’ 출현하다

1959년 12월 5일 요미우리와 아사히 등 일본 신문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북조선 송환 저지 계획의 배후 추궁, 폭약 소지했다가 억류된 공작원 2명 가택 수색!”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기도? 한국인들 2명을 체포”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황당하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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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에 따르면 체포된 ‘강꼬꾸’ (한국) 공작원의 가방 안에서는 뇌관을 장전하여 네 개를 묶은 다이너마이트 세 다발(총 12개), 즉 언제든 사용 가능한 폭약이 나왔고, 또 니가타 역에서는 공작원이 역에 맡겨놓은 위스키 상자에서, 1리터 용량의 가솔린 통 네 개가 발견됐다. 그 중 한 명은 기자인 척하면서 일본 적십자 센터에 들락거리다가 의심을 받고 출입금지 조처를 받은 전력도 있었다. 그들은 일본 적십자 센터를 폭파할 계획이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과의 연관성을 부인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파견한 공작원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북한도 아닌 일본에 ‘테러’를 가할 목적으로 특공대가 잠입시키는 사태가 빚어졌을까.

이는 재일교포 북송 사업을 막아 보려는 한국 정부의 ‘발악’이었다. 재일교포의 절대다수는 남한 지역 출신이다. 하지만 재일교포 사회는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 세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구석기시대로 돌아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재일교포 교육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북한의 노력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되레 일본 정부에 그 지원을 왜 막지 않느냐고 화를 냈다. 교포 사회 내 우익을 대표하는 민단에서 한국 정부에 지원을 간청했을 때에야 미미한 지원을 했을 뿐이었다. 그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었든간에 북한의 성의는 교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에 성공했다.


일본에게 재일교포 문제는 골치 아픈 외국인 문제,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 요소에 다름 아니었고, 북한은 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혼 하나 머리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쪽의 적십자사는 협의 끝에 재일교포의 북송을 결정한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 동포를 북한 공산 역도들의 손에 넘길 수 있다고 아우성을 쳤고, 재일교포 거류민단 소속 청년들은 니카타 항을 향하는 철로를 가로막고 시위에 나서기도 할만큼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도 북한도 사업을 중단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 사회당 의원 이노마타 고조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재일교포들을 일본이 보내 주겠다는데 왜 엉뚱하게 남한이 반대하는 거냐?”

사실 이런 류의 질문에는 딱히 할 대답이 없었다. 일본이 강제로 보내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교포들이 끌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불구대천의 원수의 땅으로 재일교포들이 실려가는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냉전적 사고의 발현일 뿐이었다, 말싸움을 하다가 결국 주먹을 디미는 것은 명분이 없는 쪽이다. 한국 정부는 북송 저지 테러를 기획한다.

그 내용을 보면 가히 ‘무장한비’(武裝韓匪) 다. 6.25에 참전한 재일교포 의용병 출신에 경찰 간부 후보생들을 규합한 66명을 ‘파괴반’ ‘설득반’ ‘요인 납치반’으로 나누고 일본 적십자 센터를 폭파하고 북송 관련 선박이나 열차를 파괴하거나 조총련 핵심 인물을 납치하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침투 루트는 밀항선에 타는 것이었다. 수십 명이 그런 식으로 건너갔고 대원들 말고도 현지 지원을 위해 여럿이 일본으로 갔다. 그 중에는 김구 암살범 안두희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12월 4일 두 공작원이 다이나마이트를 품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줄줄이 체포되는 것을 필두로 공작은 완벽하게 실패한다. 밀항선 자체가 발각나서 일본 땅을 밟지도 못하기도 했고, 배 한 척은 그만 침몰하여 12명의 생목숨이 현해탄에 수장되는 일도 있었다., 급기야 일본에 침투한 전원은 복귀 명령을 받고 집결했다가 고스란히 체포되고 말았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이들 가운데 경찰 임용이 약속됐던 경찰 간부 후보생들은 임용조차 되지 않았고 자신의 조국을 구하겠다며 6.25에 참전했다가 이번엔 테러리스트가 되어 자신이 자랐던 나라에 침투했던 재일교포 대원들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북진통일 아닌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야당 대표의 목이 간단하게 매달리던 시절로 상징되는 적대감과 ‘질 수 없다’는 초조함이 빚어낸 처참한 해프닝이었다. 재일교포들에 대한 어떤 대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북한으로 가는 것만은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편협함은 한 나라의 ‘국격’을 테러 집단 수준으로 격하시켰고 소중한 생명들을 수중고혼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편협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까. 한때 재일교포들에게 자랑찬 조국이었던 북한은 저 지경이 되었고, 열등감을 참지 못해 깽판이라도 치려 했던 남한은 나름의 위상을 가진 나라가 되어 있지만, 50년 전 남북 공히 가졌던 ‘편협함’에는 그에 상당하는 변화가 이루어졌을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에 침투한 공작원들에게 내려진 공작 중단 및 복귀 명령은 서울 중앙방송국 국제 라디오의 일본어 방송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철수 암호는 일본어로 “조용히 하세요”였다. 그 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북송 저지대의 미래를 예감하는 듯한 암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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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6 "영광입니다" 김병곤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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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6 우리시대의 큰바위 얼굴 가다

교도소에 들어간 적이 있다. 나는 전과가 없으니 죄를 짓거나 독재에 항거해서 그곳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취재차 육중한 철문을 통과했던 것이다. 취재의 주 내용 아닌 뒷담화 가운데 단연 으뜸의 화제는 사형수 이야기였다.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 사형을 집행한 사람, 사형수를 교화하는 사람 등등의 이야기는 식사 시간을 까먹고 넘길만큼 흥미로왔다. 그 가운데 들은 얘기. "아무리 흉악한 사람들도 사형이란 단어 앞에서는 어린애가 되더라." 구형을 통해 그 단어에 접할 때이든 선고를 들었을 때이든 또는 교수대가 닥쳤을 때이든 적어도 한 번씩은 평정을 잃고 어린애같은 행동을 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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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의 자서전에서 "무척 겁많은 사람"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독재와 맞섰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재판 과정에서 재판장의 입이 '사'자로 벌어지는가 무기징역의 '무'자로 입술이 튀어나오는가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지 않은가. 살려 주소서 빌면서. 뉘라서 이제 네 목숨은 시한부이며 그것도 어느 날 새벽 바둥거리며 매달릴지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의 재판정. 후일 국회의원과 청와대 핵심 등으로 출세하는 인사들을 비롯한 몇몇 젊은이들이 수의를 입고 일어섰다. 검찰의 구형이 내려질 참이었다.

“피고인 이철, 동 유인태, 동 여정남, 동 정문화, 동 황인성, 동 나병식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검사의 목소리조차 떨려 나오고 있었다. 검찰의 구형량이 그대로 판결로 이어지는 '정찰제'가 유행하던 시절, 사형 구형은 관뚜껑을 진 저승사자의 목소리였다. 사형. 데모 몇 번 하고 정권 타도 유인물 좀 만들었기로서니 사형. 재판정은 그 순간 남극점이었다. 생명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한 침묵과 살을 가르는 냉기가 눈처럼 대판정을 뒤덮었다. 재판장 역시 상기된 어조로 피고들의 진술을 허락했다. 피고인들은 당연히 침착을 잃고 있었다. 수배자를 놓친 파출소장 이마에 중앙정보부원이 권총을 디밀며 협박할만큼 '거물' 수배자였던 이철도 그랬다. "유신타도를 위해서 내 이 한 목숨을 바쳐 아까울 게 없노라. 그러니 터무니없는 누명은 씌우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충격과 공포의 색깔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30년 뒤의 청와대 왕수석 유인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한 청년의 목소리가 징처럼 재판정을 울렸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사형 구형이라는 준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얼굴이 새파래지기는커녕 봄같이 싱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다. 우렁우렁한 목청이 재판정을 흔들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1992, 180 ~181쪽)

공포를 녹여버리는 웃음. 그 넉넉한 웃음을 죽음 앞에 선보인 사람이 김병곤이다. 1952년생 용띠 청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스물 둘. 요즘으로 치면 '애'로 취급받는 나이였다. 그 젊음에 정권은 죽음읕 제시했고 그는 그를 영광이라 받아쳤다.

객기가 아니었다. 같이 재판을 받았던 여정남은 현재 여당의 유력한 다음 대선 후보의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숨을 멈췄다. 그런 분위기에서 객기부리는 자 있다면 나와 봐라.

다행히 그는 죽음은 면했다. 그러나 그에게 죽음은 수시로 방문했다. 박정희가 죽은 뒤도 마찬가지였다. 평온한 삶을 살 기회도 있었다. 좋은 직장도 가졌고 결혼도 했고 두 딸도 거느렸다. 딸 둔 아버지들은 안다. 그 재롱이 주는 행복에서 벗어나기 얼마나 힘든지를. 하지만 그는 거기서 돌아왔다.

그가 출중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만큼 출중한 살인마였다. 그 살인마를 놓아 둘만한 깜냥이 못된 것이 그의 불운이었고 우리의 행운이었다. 기억하자. 산업화고 지랄이고 독재자들에게 저항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못나가면 북한처럼 굶어죽었을지도 모르고 필리핀처럼 한때 아시아의 선진국이었다가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김병곤은 그 투쟁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최후의 옥살이는 1987년 부정투표함 의혹이 불거진 구로구청 농성 사건 때였다. 부정투표가 맞다고 해도 대세는 결정됐을 테지만 보아 넘기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사태에서 그는 현장에 남기로 결정한다. 출소한지 얼마 안되었던 그였다.

그 옥살이에서 김병곤은 병을 얻는다. 위암이었다. 계속 소화가 안되고 배에서 뭔가 잡혀지는데도 교도소 의사는 뤠스탈만 줬다. 병의 정체를 알았을때 그는 이미 늦어 있었다. 한때 죽음을 영광이라던 사내는 암세포와 피어린 싸움을 하다가 눈을 감는다. 1990년 12월 6일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이영희 교수가 비분강개했다. "전두환 같은 놈 남겨두고 김병곤 데려가는 하느님 같은 거 없어!" 그때 문익환 목사가 말을 받는다. "전두환 같은 게 있으니까 김병곤이 빛나는 거야," 정확한 멘트는 이게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런 뉘앙스였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역사는 대제국이었던 적도 없고 세계를 호령한 영웅을 보유한 적도 없다. 하지만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것은 있다. 자기의 이익과 인생과 안락을 희생하여 더 큰 자신(그게 민족이든 민중이든 어떤 이름이든) 을 위해 바친 사람들은 무지하게 많다. 그 가운데 김병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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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2.7 무즙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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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7일 무즙 파동

모든 시험에는 논란이 따른다. 최고의 출제진이 합숙까지 하고 논의에 검토를 몇 번씩이나 거친 시험 문제들이건만 오답도 나오고 복수의 답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는 어찌 보면 일리 있는 답들 때문에 채점자가 골머리를 썩기도 한다. 88년도 대학 입시 때 국어 주관식으로 “비슷한 종류들끼리 끼리 끼리 어울린다.”는 뜻의 한자 성어를 쓰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물론 정답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그런데 내 친구는 “三三五五”라고 적어 놓고서 대학 본부에 전화하여 1점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큰소리를 쳤다. 녀석이 점수를 받을리는 만무했지만 언뜻 보면 그럴싸해 보이기도 하는 답이었다.


논란이 되는 것은 그만큼 점수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커트라인이 청룡언월도처럼 천정에 매달려 있는데 어느 문제의 답이 애매하다는 것은 수백 수천 명이 당락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며 천당과 지옥을 가로지르는 외줄 위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 답 하나로 인생이 바뀌는데 어쩔 것인가. 이럴 때 눈에 불을 켜는 것은 수험생도 수험생이거니와 미국 대통령도 경탄해 마지 않는 교육열의 보유자인 수험생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그 광휘(?)와 열정(?)이 가장 격렬하게 불타올랐던 사건이 1964년 12월 7일 벌어졌다.


이날은 서울 전기(前期) 중학교 입시일이었다. 이때 중학교 입시는 ‘뺑뺑이’로 중학교에 진학했던 세대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경쟁 체제였다. 층층시하로 서열 지어진 학교들 가운데 일단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면 특별한 변동이 없는 한 그 동년배들과 어울려 같은 계열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것으로 사회적 서열이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춘기도 오지 않은 꼬마들이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표어 방에 붙여 놓고 머리 터지도록 공부를 해야 했고, 문제 하나 하나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이른바 KS 마크 (경기고 - 서울대)의 K자를 그리기 시작하는 경기중학교 1965년 커트라인은 160점 만점에 154.6점이었다. 문제 하나가 아니라 반 개도 얼마든지 수험생의 운명을 뒤바꿀 힘이 있었다. 그토록 엄중하고 막중한 문제 가운데 하나에 이런 것이 있었다. 자연 문제 30개 가운데 18번, 엿을 만드는 순서를 나열한 후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는데 다른 보기 가운데 복병 하나가 숨어 있었다. ‘무즙’이 그것이었다. 실제로 교과서에도 무즙에 디아스타제가 함유되어 있다는 대목도 버젓이 나와 있었다.


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교육청은 초대형 태풍의 눈에 든다. 하지만 교육청은 그 태풍을 잠재우기는 커녕 더욱 부풀리는 우를 범한다. 처음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면서 무즙이 답이 안된다고 단언했으나 교과서를 펼쳐 보이는 학부모들의 격노한 목소리 앞에서 “해당 문제의 무효화”로 엉거주춤 후퇴했는데 이번에는 ‘디아스타제’를 정답으로 적은 학생들과 부모들의 아우성에 기가 질려서는 “무조건 디아스타제만 정답‘으로 선회해 버렸다. 낙방하게 된 ’무즙‘파 부모들은 행동에 나섰다.


그 하이라이트는 무즙으로 만든 엿을 직접 들고 교육청으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그 전날 교육감이 항의하는 부모들에게 “무즙으로 엿이 만들어진다면 무즙을 답으로 쓴 아이들을 구제해 보겠다.”라고 말을 뱉아 버린 결과였다. 무즙을 넣고 만든 엿단지를 치켜든 부모들은 ”엿인가 아닌가 먹어 보라.“면서 기세를 올렸지만 결국 이 무즙 사태는 법정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결국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난 5월에야 ’무즙파‘ 학생들은 법원의 결정으로 원하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 학생들은 행운이었다. 3년 뒤 치러진 1968년도 입시에서는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쓴 그림은?’이라는 미술 문제에서 복수 정답 시비가 일어났고 학부모들이 교장과 교감을 연금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른바 창칼 파동이다. 500명이 넘는 학부모들이 소송을 제기, 대법원까지 갔으나 끝내 패소하고 말았던 것이다. .


옛날 얘기는 옛날 얘기일 때 재미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사라진 과거를 더듬을 때 옛날 이야기의 감칠맛은 더더욱 우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 담배먹던 얘기는 즐거워도 우리 집 뒷동산에 호랑이가 어흥거리고 있다면 이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즉, 옛날 얘기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탄식이 뒤로 돌아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는 느낌에 모골이 송연할 때, 지금 저런 일이 내 앞에 닥친다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 같은 묘한 예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결코 옛날 얘기에 태연할 수 없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무즙이건 창칼이건 교육 당국에 항의하는 부모들의 근거는 ‘교과서’였다. 하지만 요즘 ‘국제중’에 가기 위해서는 교과서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스펙이 필요하고, 그 스펙을 얻기 위해서는 “엄마의 정보력과 할아버지의 경제력과 아버지의 무관심(?)”이 필수적이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무즙 파동과 창칼 파동 얘기에 마냥 낄낄거릴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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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2.8 존 레논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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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80년 12월 8일은 월요일이었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촌, 늦은 밤 열 한 시경 귀가하는 한 쌍의 남녀가 차에서 내렸다. 여자는 동양인, 남자는 앵글로 색슨계 백인. 발걸음을 재촉하는 커플에게 누군가 다가섰다. 당시 나이 스물 다섯의 젊은이였다. 그는 커플 중 남자를 잘 아는 듯 정중하게 그 이름을 불렀다. "미스터 레논!" 레논이라고 불리운 남자가 젊은이 쪽을 돌아보자마자 젊은이의 손에 든 총이 불을 뿜었다. 다섯 발. 한때 기독교 광신도였고 신경 쇠약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한 경력이 있으며, 바로 몇 시간 전 총을 맞은 남자로부터 사인을 받으며 환호했던 젊은이는 '미스터 레논'에게 다섯 발이나 되는 총알 세례를 안겼고,... 20세기 대중문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을 이름, 존 레논의 생명은 그렇게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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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들이 대서양을 향해 나아가던 발판이었던 도시 리버풀이 낳은 비틀즈, 존 레논,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 4인방의 전설을 일일이 읊을 생각은 없다. 하여간 그들은 대스타였다. 비틀즈 팬들은 비틀즈가 밟고 간 잔디를 뜯어 손에 쥐고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이 행차하는 어디든 괴성을 발하는 소녀 군단이 운집하여 해당 지역 경찰의 식은땀을 쥐어짰다. 유럽을 정복한 그들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가공할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존 레논이 으쓱거릴 만도 했다. 이 덕분에 그는 교황청을 비롯한 기독교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했지만 비틀스의 인기 앞에서는 '그까이꺼'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비틀스는 오랜 세월 함께 하지는 못했다. 존 레논의 새로운 부인 오노 요코의 존재와 레논과 매카트니의 음악관의 차이 등 여러 이유로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그룹은 해체됐다. 하지만 존 레논은 그 안에 깃들어 있던 또 다른 진가를 발휘한다. 물론 원래부터 끼(?)는 있었다. "뜻하지 않은 성공에 마주한 영국 노동 계급 젊은이" (교황청이 2008년 존 레논을 '용서'하면서 쓴 표현)로서 그는 1966년 미국이 월남전에 전면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다.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계속 권좌에 머무는 것, 그리고 진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그의 발언은 점차 수위가 높아졌고 그 끝은 점점 날카롭게 버려졌다. "나같은 성장 환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엉뚱한 곳에 사람들 데려다 놓고 목숨을 잃게 만드는 군대 따위를 경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건 노동 계급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조금 생뚱맞게 떠오르는 것은 비틀스로부터 1500년쯤 전 자기 나라 황제의 야심 때문에 고구려 땅에 끌려갔다가 숱한 희생을 치렀던 중국인들의 노래다. "요동 땅으로 가서 헛되이 죽지 마라."는 '낭사요'가 그것이다. 그 노래는 하늘 같은 황제에 대한 반역의 상징이었다. 배 만드느라 물에서 나오지 못해 허리 아래 구더기가 슬어도, 농토를 돌보지 못해 처자식이 굶어 죽어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라는 황제를 향해 쳐들었던 거역의 선동이었다. 존 레논의 노래 또한 그랬다. 물론 백 배는 더 아름답고 천 배는 더 훌륭했지만.

 

"그들은 가정에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학교에서는 당신을 매질한다. 당신이 똑똑하면 증오하고 바보일 땐 무시한다. 그래서 당신은 돌아버려 그들의 규율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영웅이란 될 만한 것이다." (" 노동 계급의 영웅")는 통렬함, "수백만의 노동자가 아무런 대가없이 노동을 한다. 너희들은 그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가져야 하는 것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거리로 나갔을 때, 우리는 너희를 끌어내릴 것이다"("민중에게 권력을")는 분노, 그리고 내 귀에 캔디보다 더 달콤한 멜로디에 실린 "이매진"의 치명적인 속삭임까지.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욕심을 부릴 일도, 배고플 이유도 없는 한 형제처럼 모든 사람들이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 봐요."

 

잉글랜드인이면서도 북아일랜드의 유혈 사태에 분노하여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맡기고 영국인들은 바다 건너 돌아가라"고 절규하고 "우리는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고 말한다. 친구가 되기엔 세상 물정 너무 모른다고 한다. 여성은 노예 중의 노예"라며 까발리면서 존 레논은 그의 재능을 사회적 자산에 내맡기는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자본주의 시대의 스타로서 누릴 것을 죄다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최소한 자신이 누리는 부의 모순을 알고 있었고, 그를 공격하는데 자신의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그의 '성장 환경'이었던 노동 계급들은 그를 알아 주었다. 영화 <브래스드 오프>에서 악기 값을 마련하기 위해 얼치기 삐에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광부가 이렇게 외쳤던 것 기억하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분장한 얼굴을 흘러내리던 비통한 눈물과 아울러.

 

"존 레논도 데려가고, 에인즐리 탄광의 광부 셋이나 데려가더니, 내 아버지마저 데려가려 하면서, 왜 마가릿 대처는 살려두는 거야 ? 하나님이 있기나 한 거야?"

 

오늘 존 레논이 갔다.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 폴 매카트니의 말처럼 "존 레논은 예술, 음악 그리고 세계평화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대한 공헌으로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인물"이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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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12.9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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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8년 12월9일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위에 쓴 한 마디로 오늘 어떤 사람이 등장할는지는 대부분 눈치를 채실 것이다. 맞다 이승복이다. 1959년 태어나 1968년 오늘 딱 아홉살이 되었던 강원도 소년이다. 즉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고 동시에 기일이 된다.

울진 삼척 지구에 침투한 중대 규모의 인민군들은 '해방군'이 아닌 '공비'로서 행동했다. 태백산맥의 험산준령을 넘나들며 남한 군경과 맞서던 그들이 강원도 평창 산골의 이승복의 집으로 스며든 것이 또한 오늘이기도 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살아남은 승복의 형의 입으로 전해질 뿐이다. 어쨌든 인민의 군대로 훈련받은 그들은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질렀다. 여자와 아이들을 돌로 쳐서 죽인 것이다.

문제는 아홉살 승복이가 했다는 말이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 한 마디로 죽은 아이는 반공 정신의 고갱이요 알멩이요 결정체가 됐다. 산지사방에 이 아이의 동상이 세워졌고 이 아이를 기리는 반공 웅변 대회가 열렸으며 이 아이의 짧은 일생은 교과서에 실렸고 큼직한 기념관까지 지어져 학생들의 순례지가 됐다. 기실 내가 배운 신화는 더 있었다. 공비들이 연필을 보고 이런 건 미제 아니냐고 하자 국산품이라고 외쳤다거나 숨이 끊길 때까지 공산당이 싫다고 부르짖었다거나.

그래도 핵심은 "공산당이 싫어요"였다. 아이가 이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뭣보다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살아가던 한 가족이 느닷없이 찾아든 침입자에 의해 박살을 당했고 그 악마들의 손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한 것을 "공비 앞에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부르짖은 반공투사"로 만드는 오버를 감행한 것은 분명한 무리수였다. 이승복의 죽음은 반공 어린이의 비장한 최후라서가 아니라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하며 어떠한 위난에서도 먼저 구원받아야 할, 심지어 저 잔악한 몽골군들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던 어린 아이가 유린당한 것만으로 충분히 슬프다.


그런데 진보 쪽에서 똑같은 오류를 범한다. 사건의 의미는 저만치 놔둔 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그 말을 처음 인용한 조선일보의 기사가 작문인지 아닌지에 대해 시비를 건 것이다. 승복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부르짖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를 공격하는 것도 좋고, 그 허위 취재를 밝히는 것도 환영이다. 하지만 그 프레임은 너무도 억울하게 생일상으로 칼과 돌을 받았던 어린아이의 죽음을 비껴나고 있었다.


반공을 위해 이승복을 이용한 정부처럼 진보는 조선일보를 까기 위해 이승복의 죽음을 이용했다. 그 허위 공방 속에 이승복의 살아남은 형은 거짓말장이가 됐고 자칭 진보 사이에서 이승복은 하나의 유령으로 치부됐다. "공 상당히 싫어요" 또는 "콩사탕이 싫어요" 때문에 죽었을 거라는 낄낄거림이 그의 죽음을 희롱했고 그의 짧았던 삶 자체가 조선일보의 가공인양 치부됐다.

이승복이 뭐라고 부르짖었는지는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살려달라고 빌다가 죽었다고 해서 가련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나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쳤다고 해서 존경스럽지도 않다. 그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아이였다는 게 중요하다.

사람의 권리가 시대와 영역과 정권과 진영을 초월하여 존중받을때 민주주의는 첫발을 뗀다.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권리를 이용하고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권리를 외면하는 것은 결국 등가의 죄다.

승복이는 이미 43년전에 죽었다. 하지만 그 뒤 그의 동족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를 보내지 못했고 되레 그 백골이 된 송장을 업고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이승복의 반공 정신 이어받아 어쩌고 하는 울음이 난무하고 "북한은 그 나름의 특수성이 있으니 그 인권을 논함은 불가하다"는 짖음이 버젓함은 그 본보기가 되겠다.

승복아 잘 가라. 오늘 네 생일이자 기일에 지금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네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을 승복아. 이제 그만 푹 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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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2.10 읽어보자 세계 인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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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1948년 12월 10일 국제 연합 총회에서 인류 역사상 지대한 의미가 있는 결의 하나가 채택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참화를 겪은 인류의 반성과 각오가 만들어낸 하나의 방파제이자 보루였으며,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 된 '세계인권선언'이다. 그 전 조항을 소개한다. 이를 한 번 읽어 보는 것으로 오늘 산하의 오역을 대신한다. (술 먹으러 가야 한다) 근데 꼭 읽어 보시라. 주옥같은 조항들이다. 몇 몇 조항에 병기된 것은 한국판 수정 조항이다.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한국사람은 태어날 때만 평등하다. 태어난 뒤엔 각기 다른 부모의 재산과 출신 배경과 본인의 스펙을 가지게 되므로 그를 넉넉히 인정하는 관용을 지녀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한국 국민은 인종, 피부색, 성 ,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나 불법 체류자, 백인을 제외한 유색인, 성적 소수자, 미션 스쿨에서의 예배 거부자 등은 예외로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위의 권리가 다 있으나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불에 타 죽는 수가 있다)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한다.

(단 파견 및 계약직,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제도는 일절 허용된다)

 

제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모욕,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제 6조 누구든 법 앞에서 ‘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한국에서는 의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한명숙 전 총리 사건 참조)

 

제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 없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모든 법은 돈 앞에 평등하며 돈 없이는 법의 보호를 받기 어렵다)


제8조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는 몰라도 1%의 재산권을 침해하면 얄짤없다)

 

제9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 추방을 당하지 않는다.

 

제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별 받을 때, 독립적이고 공평한 법정에서 공평하고 공개적인 심문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11조 범죄의 소추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보장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공개재판을 통해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될 권리가 있다.

(공개재판을 통해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유죄로 추정될 의무가 있지 우리는)

 

제12조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주택, 통신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서도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

(민간인 사찰하는 기무사와 나꼼수 때려잡겠다는 방통위 등등은 예외로 한다)

 


제13조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를 떠날 권리가 있고, 다시 돌아올 권리도 있다.

(돈 있으면 그래 봐라)


 

제14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

 

제15조 누구나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누구든지 정당한 근거 없이 국적을 빼앗기지 않으며, 자기 국적을 바꾸거나 다른 국적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제16조 성년이 된 남녀는 인종, 국적, 종교의 제한을 받지 않고 결혼할 수 있으며,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결혼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남녀는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제17조 모든 사람은 혼자서 또는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

 

제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물론 국가보안법 내에서)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쥐 그림 그리면 죽는다.)

 

제20조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사람 없고 교통에 방해도 되지 않는 추수 끝낸 호남 평야 정도에서는 무제한 보장)


제21조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자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이번 가카를 보면 우리나라는 이 21조 때문에 망했다)

 

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노인 부양은 원칙적으로 가족이 해결하는 것이 국격에 맞다는 사람이 아직 우리나라 총리다)

 

제23조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실업상태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이게 우리의 구호가 아니라 세계 인권 선언 제 23조였다!)

 

제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정기적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이거 즐기다가 책상 뺏길 권리도 함께 누린다)

 

제25조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어느 정도가 적합한지는 전경련이 정한다)

 

제26조 모든 사람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초등교육과 기초교육은 무상이어야 하며,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우선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우린 부모의 '선택'이 너무 많아서 문제 같은데)

 

제27조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기며, 학문적 진보와 혜택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


제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제29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진다.

 

제30조 이 선언에서 말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남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

1992.12.11 한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복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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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2.12.11 한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복국집 

산하의 오역

1992년 12월 11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복국집

복 요리를 매우 즐기는 일본과 가까워서인지 부산에는 유명한 복국집들이 많다. 금수복국, 할매복국 등등 각처에 체인점을 내고 있는 기업형 가게들도 있고 각 동네마다 ‘잘하는 복국집’ 하나씩은 꼭 있어서 문전성시를 이룬다. 개인적으로도 잘 끓인 맑은 복국은 술 마신 뒤 해장거리로서 전주 콩나물국밥을 능가한다고 보거니와 오늘 아침같이 쓰린 속을 달래며 일어나는 날은 콩나물과 미나리 사이에 튼실한 복어 살이 오롯한, 복국의 개운한 맛의 기억이 참을 수 없도록 절실해지기도 한다.
...
1992년 12월 11일 아침, 초원복집이라는 부산에서 나름 이름난 복국집에 모여든 8명의 신사들도 그 맛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종업원들의 시중드는 손은 유난히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복국집 내실에 둘러앉은 그 8명은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의 또르르한 감투들을 쓴 사람들이었다. 좌장은 전 법무부장관인 김기춘이었고, 김영환 부산직할시장, 박일용 부산지방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시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방검찰청장,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소장이 그들의 직함이었다. 공무로 모으려고 해도 밑의 직원들이 스케줄 짜느라 골머리 꽤나 썩을만큼 바쁘실 분들이었다.

그 쟁쟁한 직함들이 단지 해장을 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며칠 뒤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있었다. 기관장들이 모여서 선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권리이겠지만, 그들의 대화는 좀 사정이 달랐다. 그 주도자는 유명한 공안검사 출신으로서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해서 “미스터 법질서”라는 별명까지 지녔던 김기춘이었다.

미스터 법질서는 이렇게 말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당신들이야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것이고,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 대의민주주의제를 몸통으로 하고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나라의 법무부 장관을 지낸 자가 지방의 행정 책임자와 경찰 총수와 검찰 수장에게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라고 떠들어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이번에 "(YS가 떨어지면) 다들 영도 다리에서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에 대한 가장 훌륭한 맞장구는 부산경찰청장 박일룡의 입에서 나왔다.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 관권 개입을 ‘양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독려’하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정갈한 복집의 은밀한 내실에서 그들은 흉금을 터놓고 추악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듯, 그들의 아침말은 당시 대통령에 출마하여 여당을 위협하던 정주영이 이끄는 통일국민당 당원들이 설치한 도청기가 듣고 있었다. 그 적나라한 대화는 녹취록으로 전이되어 세상에 폭탄처럼 투하됐다. 선거 자체의 의미를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또한 ‘초원복집’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복집으로 부상하게 된다. 복어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초원복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으니까.


한 나라의 전직 법무부 장관이 지방의 기관장들에게 선거 개입을 사주하고 기관장들은 그에 동조하는 내용의 녹취록의 파도는 너울처럼 대한민국을 덮쳤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YS는 이걸로 끝난 것 같지?”라고 내게 동의를 구해 왔던 것도 그 결과이리라. 그게 공화국 시민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산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이런 어불성설의 일이 벌어진 데 대한 반성보다는 “그래 우리는 그런 놈들이다 와? 떫나?”와 같은 터무니없는 오기가 더 컸고, “안방에서 뭔 말을 못하노. 도청하는 놈이 나쁜 놈이지.” 라는 해괴한 논리가 우세했으며 “노태우 시키가 디제이하고 짜고 와이에스 쥑일라 한 거 아이가.”하는 기상천외한 상상력까지도 발휘되고 있었음을.

초원복국집 내실에서 벌어진 고위 공무원들의 관권선거 모의는 엄청난 범죄적 사실이며 공화국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지만 주류언론은 주요 프레임을 ‘도청’으로 몰아갔고 그 내용상 비교가 안되는 관권선거의 음모자들은 어이없게도 도청의 ‘피해자인 양 책임 추궁을 모면한다. 이것은 주류언론 뿐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건이 불거진 부산 시민을 비롯한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렇게 가해자에 동조했다. “강간한 건 잘못됐지만 그 계집애는 왜 따라갔냐고!”를 부르짖는 성폭력 가해자의 부모와 동급의 논리에 자신의 표를 실었다. 초원복국집에 둘러앉았던 이들은 그 뒤로도 승승장구했고 그 대화들은 인생의 오점은 커녕 도약의 발판이 되었다.


가장 역사적인 아이러니는 2004년 탄핵 때 있었다. 대통령의 선거 개입을 이유로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했을 때 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탄핵소추위원이 됐던 것이 바로 초원복국집의 좌장 김기춘이었던 것이다. “임기가 헌법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선과 연계하겠다는 것은 국민을 겁나게 한 것으로 법 위반 정도가 중하다.”고 준엄하게 얘기하던 그의 얼굴에 아연실색했던 기억은 지금도 선연하다.

“다른 사람이 되면 다 영도다리에 떨어져 죽자.”고 큰소리치고 “당신들이 노골적으로 해야지. 지역감정 좀 일어나야 돼.”라고 막말하던 그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때 그 혀에는 초원복집의 아침 복국 맛이 뱀처럼 휘감겨 그 양심을 건드리지는 않았을까. 하긴 그렇게 심약한 분이라면 애초에 저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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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2.12 한국 조영래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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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0년 12월 12일 한국, 조영래를 잃다

겨울 삭풍이 땅을 얼리기 시작하던 1990년 12월 중순, 한 변호사의 장례식이 열렸다. 47년 돼지띠이니 나이 마흔 셋. 한 개인으로 봐도 요절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할 나이였지만 눈물 범벅이 되어 영결식에 참석한 이들은 그의 이른 죽음에 땅을 치며 통탄하고 하늘을 우러러 원망했다. 고인의 이름은 조영래였다.

그의 영결식 순서지에는 많은 이들의 이름이 보인다. 노무현, 문익환, 계훈제, 송건호, 이소선 등은 이미 그의 곁으로 갔지만, 후배 박원순은 지금 서울 시장이 되어 있고,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파킨슨씨 병을 얻어 신음 중이다. 김문수와 이재오는 길을 바꿔 정권의 핵심에서 조영래가 목숨 걸고 저항했던 세력과 짝짜꿍 놀이를 한 지 오래고, 당시 경실련을 만들어 줏가를 올리던 서경석은 좀 안쓰럽게 변모해 있다. 영결식 순서지를 장식한 이름 가운데 가장 특이한 이름은 조갑제다. 그는 순서지에 추모사까지 썼다. 조갑제의 추모사를 통해 조영래를 되새기는 이 오묘한 느낌이라니.


“조변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 공장의 진폐증 환자, 스물 다섯에 정년 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우리 사회를 울리는 의미를 뽑아 냈다.”

정확히 말하면 연탄 공장의 진폐증 환자가 아니라 연탄 공장 근처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여인의 문제였다. 공장에서 근무한 적도 없던 그녀는 백약을 써도 무효인 감기에 걸려 있었고 그 병명은 폐결핵, 또 다시 진폐증으로 판명났다. 이 사건을 특종보도한 이가 이번에 국회 디도스 공격을 독자적으로 전개한 대단한 비서를 거느려 화제가 된 최구식 국회의원( 당시 조선일보 기자)이었다. 그런데 의료보험증이 없던 환자가 다른 이의 의료보험증을 빌려 썼던 관계로 피해자 인정을 받지 못할 처지에 이르자 최 기자는 조영래를 찾았다. 진폐증으로는 판명되었지만 연탄공장과의 인과관계를 밝히기도 무망했고, 가난에 찌들었던 피해자는 소송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조영래는 이 사건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었다.


우선 그는 빈한한 피해자를 위해 소송구조 제도를 끄집어냈다. 소송구조란 경제적 약자에게 인지대 등 소송에 필요한 비용을 법원이 대신 내주는 제도였는데 거의 이용자가 드문 가사상태의 법조문을 깨워설랑 법원 코 앞에 들이민 것이다.

  피고 측은 석탄 산업의 공익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연탄공장이 주거지에 먼저 들어서고, 그 뒤에 주택가가 형성된 점 등을 들어 석탄가루 방산에 대해 주민들이 어느 정도 ‘수인할 의무(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조영래 변호사는 우리 헌법에 보장된 환경권을 무기로 받아쳤다. " 모든 국민은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집니다! (헌법 제 35조)" 이는 “여태껏 이름뿐인 장식물에 머물렀던 환경권을 정면으로 끌어내 헌법을 현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일상규범으로 만드는 데 기여” (안경환, 조영래 평전 중)한 것이었다.


스물 다섯 정년의 여자 운운 역시 사연은 기박하다. 교통 사고를 당한 직장 여성이 피해 보상을 요구했더니 1심 판결에서 당시 여성들의 평균 결혼 연령을 계산해서 25세까지의 수입만 보상하라는 날벼락같은 판결이 나왔다. 여자는 결혼하면 돈 못 버니 정년은 25세라는 대단한 판사의 판단. 절망한 피고인이 포기하려 들었지만 조영래 변호사는 무료 변론까지 자청해 가며 소송을 이어가서 “결혼했다고 직장을 그만두라는 법은 없으니 여성 정년도 55세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을 얻어낸 것이다.


“분신 자살한 젊은 노동자”의 사연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영래는 그 엄혹한 수배 생활 중에 수양을 하듯, 순례를 하듯 고행을 하듯 전태일의 일생을 추적하고 그를 잘근잘근 씹어먹은 뒤 그 이름도 유명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명저를 세상에 토해 냈다. 장기표가 말했듯 그 글은 조영래의 글이기도 했지만 전태일의 글이기도 했다. “돌아가야 한다 평화시장의 동심 곁으로”를 독백하던 전태일은 조영래의 명문장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줄기로 되살아났다. 글 한 줄 쓰지 않았던 예수의 말씀을 담아 세상을 바꾼 복음서처럼, 전태일 평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은 그 앞에 자신들의 이름은 남겼으되 (물론 누가 이외의 저작자들은 후세의 추측에 의존한 것이긴 하지만) 조영래는 평생 동안 그 책의 저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자신을 바닥까지 낮추고, 드러내지 않아서 빛나는 사람이었다. 

 생전의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건은 역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었다. 학창 시절 나는 이 사건 관련 변론 요지서 전문을 복사한 것을 몇 년 동안이나 일기에 끼워 놓았었다.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그 글은 법률적인 변론 요지서를 훨씬 넘어서서 한국 현대사상 위대한 명문으로 기록된다. 그 말 한 마디 , 모음과 자음 하나 하나 모두가 사람의 양심을 헤집는 갈퀴였고, 눈물샘의 마개를 빼 버리는 예민한 손길이었으며 야만에 대한 돌팔매였고 비인간의 벽을 들이받는 양심의 공성추였다.


그렇게 80년대 불의 바다를 맨발로 건넜던 조영래 변호사가 1990년 1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밤새 변론 요지서를 쓰다보면 산처럼 쌓였다는 담배 꽁초가,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라고 절규하던 분노의 스트레스가, 자신의 몸 돌보지 않고 세상의 바닥을 돌아다니던 고단함이 그를 폐암으로 몰고 갔고 결국은 죽였다. 대한민국은 조영래를 잃었다.


옛날 케사르는 알렉산더는 나이 스물에 세계를 정복했는데 나는 뭐냐고 한탄했다지만 나는 알렉산더 따위는 부럽지 않다. 나이 마흔 셋, 이제 새해면 조영래 변호사가 돌아간 나이와 갑장이 되는데 그를 생각하면 면구스럽고 쪽팔려서 안절부절 못할 뿐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엽서의 글 하나를 소개하면서 그의 명복을 빈다. 조영래 변호사가 아들에게 보낸 엽서의 글이다. 엽서 반댓면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우람하게 서 있었다.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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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13 불행한 청년의 행복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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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1년 12월 13일 불행한 청년의 행복한 미소


1931년 12월 13일 중국의 국제 도시 상해의 밤거리. 두 남자가 사진관으로 보이는 건물로 찾아들었다. 중국 복색의 한 청년이 카메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촬영용 소품이 영 예사롭지 않았다. 일단 태극기가 있었고 그 위에 굵은 먹글씨로 쓴 선서문이 단정하게 놓였고 또 그 위로는 폭탄 두 개가 그 쇳빛을 발하며 얹어져 있었다.


그 소품들 앞에 선 중년의 신사와 서른 정도의 청년 두 사람은 조선말을 쓰고 있었지만 청년 쪽은 좀 수상했다. 그의 조선말 발음이 어딘가 어색했던 것이다. 일본인 특유의 혀 짧은 소리가 간간히 배어나왔고 오히려 가끔 튀어나오는 일본어 단어의 발음 쪽이 더 매끄러운 편이었다. 묵직한 인상의 중년 신사가 말했다. “이군. 폭탄을 들게. 사진을 찍어야지.” 그러자 이군이라 불리운 청년은 쾌활하게 대답했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저는 어차피 거사를 결행하면 죽을 목숨입니다. 고향의 형에게 보낼 사진 먼저 찍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선 이봉창은 실로 천진스런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마지막 독사진을 찍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의 그늘 같은 건 한 조각도 없이, ‘거사를 결행’할 사람의 비장함같은 건 반 점도 없이. 폭탄을 손에 쥐고서도 그 표정은 마치 장난감을 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폭탄을 들고 포즈를 취한 뒤 이봉창은 한인 애국단 가입 선언서를 읽었다. 그를 읽어내릴 때만큼은 그도 웃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의 손에 쥔 것은 일본의 천황을 죽이고자 마련된 폭탄이었다.


 이봉창은 그의 짧은 생애 조선 이름보다는 일본 이름 기노시타 쇼조로서 더 오래 살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일본인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을 다 바쳤다. 하지만 그는 식민지 조선 백성으로서의 포한을 일찌감치 깨우쳐야 했다. 역무원으로 근무할 때 저능아에 가까운 일본인들, 그래서 사고를 도맡아 저지르는 이들도 일본인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인들을 누르고 척척 승진하는 것을 보며 그는 탄식한다. “뭘 해도 일본놈의 X에서 떨어져야 한다니까.” 그런데 이봉창이 그 차별을 극복하고자 택한 길은 더욱 완벽한 일본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을 때, 그는 우리말보다 일본어에 더 유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훗날 상해에 왔을 때 얻은 별명조차 "왜영감"이었다. 그것은 조센징의 꼬리를 밟히지 않으려는 악전고투의 흔적이었다. 결국 천황 폐하의 충량한 신민으로 대접받기 위해서 발버둥쳤던 그의 혀에는 자신의 모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찰지게 달라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성실히 노력했음에도 조센징이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아무 이유 없이 구금당하거나 일당이 터무니없이 깎여 나가는 등의 수모를 이봉창은 여러 번 겪었다. 그런 좌절을 겪은 뒤에는 무시로 결근을 해 버리거나 공금을 유곽에서 소진하는 등 요즘 말로 '개념없는' 삶에 빠지기도 했다. 그 절망의 뒤에는 일본인의 수군거림이 따라붙었다. "조센징이었구나 역시 본색은 속일 수 없군." "조센징은 역시 어쩔 수 없군." "감쪽같이 속을 뻔했네. 음흉한 놈." "조센징 놈들은 항상 뒷통수를 친다니까." (조금 빗나간 얘기하자면 이 표현들 어디서 많이 들어 보지 않았나? 또는 스스로 써먹은 적은 없는가?)


 어느날 그는 그런 생각을 한다. “조선 백성으로서 이왕을 뵙지도 못했고 경술병합 후에는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서 천황의 얼굴을 우러르지도 못했으니 이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의 정체성의 혼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는 각성(?)이었다. 그는 일본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코자 여비 들이고 다리품 팔아서 교또로 왔는데 그만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린다. 한글 편지를 발견한 일경은 폐일언하고 그를 ‘보호 유치’했고 유치장에서 며칠을 썩게 만든다. 이 며칠은 충량한 일본 신민으로 살고자 했던 이봉창의 머리 속을 휘저어 놓았다.


 마침내 3.1 운동을 겪으면서도 별 느낌이 없었던 황국 신민 기노시타 소죠는 더 이상 일본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독립운동 한다는 자들이 왜 일본 왕을 죽일 생각을 않느냐?"고 혀 짧은 소리로 기염을 토하는 묘한 존재로 김구 앞에 나타난다. 한동안 이봉창을 면밀히 지켜보던 김구는 이봉창에게 임무를 맡길 결심을 하게 되고, 거액의 거사 자금을 이봉창에게 건넨다. 이는 이봉창에게 감전과 같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선생님 저를 어떻게 믿고 이런 거금을 주십니까......선생님은 프랑스 조계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분이시니 제가 이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도망가면 어쩌시려고 그랬습니까.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라고 눈물겨워하는 가운데, 한 불행했던 식민지 청년의 속을 가늠하는 한 마디를 토해 놓는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일본인이고자 발버둥쳤으나 별 수 없는 조선인이었고, 충성을 다했으나 배신으로 돌려받은 그의 일생에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치를 믿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이것이 자신의 할 바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확인으로 전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1931년 12월 13일 그토록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며칠 뒤 이별의 시간에 한 젊은이를 사지로 내모는 것을 슬퍼하며 김구가 눈물을 흘릴 때 “큰일을 치를 건데 웃으면서 보내 주십시오.”라고 끝까지 껄껄거릴 수 있었던 까닭은 온갖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서 있을 곳을 발견한 사람의 여유요, 기쁨이 아니었을까.


 정확히 80년 전 오늘 한 청년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마지막 사진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그 태양 같은 미소 앞에서도 좀체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 건 그 웃음 뒤에 가려진 그의 고단했던 삶의 굴곡 때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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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14 흥남철수 시작, 내 평생의 찰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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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2.14 흥남 철수, 내 평생의 찰떡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을 호언하던 국군과 UN군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글자 그대로의 대혼란에 빠졌다. 압록강 물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던 6사단은 사단장이 한때 행방불명될 정도로 와해됐고 세계 최강 미 해병대도 일본어로 ‘초신’이라고 부르던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두 줄로 늘어서서 지나가는 이를 몽둥이로 때리는) 같은 맹공을 받으며 기진맥진했다.

12월 6일 평양은 인민군에 넘어갔고 한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 장진호에서 빠져나온 미 해병대 등은 흥남 부두에 집결, 12월 14일 (15일이라고도 한다) 철수 작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흥남 부두에는 그들 말고도 10만 명의 피난민이 들끓고 있었다. 처음에는 군 병력과 장비만 실을 생각을 했지만 국군 측의 강력한 건의와 미군 측의 결단으로 “장비를 버리고 사람을 싣는” 쪽을 택하여 피난민들을 대부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의 사연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래 글은 블로그에도 1년 전에 올렸고 딴지일보에도 실렸던 내용이지만, 이 공간에도 소개하고 싶어서 올린다. 나의 아버지는 그 피난민 중의 한 사람이다. 그 분의 증언이다. 무지하게 길지만 읽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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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고 한동안은 조용했지. 근데 한 두달이 지나니까 쌕쌕이가 슁슁거리면서 하늘을 나돌아다니더라. 또 한 두달쯤 있으니 인민군들이 북으로 북으로 쫓겨 올라가고 국군이 좀 있으면 온다는 소문이 돌았지. 우리가 함경남도 홍원이라는 데에 살 때였다. 네 할아버지는 홍원교회 목사셨고.

청진에서 반공 학생운동 하다가 홍원으로 숨어들어왔다는 소문이 있는 이영도라는 청년이 있었어. 키는 작달막하지만 눈이 짝 찢어진 것이 꽤나 강단있어 보이는 사람이었지. 이 청년이 주도를 해서 할아버지 교회 청년회원들이 인민군 무기를 탈취하고 봉기를 일으켰지. 장작개비를 들고 가서 "손 들어" 하니 따발총들을 덥석덥석 놓더란다. 패잔병들이란 그렇게 허약하더라고. 허기사 기독교 청년들도 5년 동안 빨갱이들한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상태였고 말이다.

참 일이 묘한 게 오히려 북한에 미군이 들어오고 남한에 소련군이 진주했으면 일이 잘 돌아갔을지도 몰라. 남한은 소작농들도 많았고 해서 좌익세가 강했다지만 북한은 기독교 세력이 참 드셌거든. 이번에 김정일이 황장엽이보고 "유다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는 거 보면서 웃었다. 저 자식 집안 내력 아직 못 버렸네 하고 말이야. 김일성 외삼촌이 목사 아니냐. 김일성 어머니 이름이 강반석이거든. 반석이라는 게 베드로를 뜻하는 말이니 어중간한 기독교 집안도 아닌 아주 독실한 집안이었을 게야. 그래도 이북 정권이 목사들 참 많이 잡아 죽였다. 할아버지 친구분들 가운데에도 내가 아는 분만 해도 대여섯 명은 끌려가서 소식이 끊겼으니까.

이영도 청년이 이끄는 기독교 청년단원들이 인민군 많이 죽였냐고? 많이 죽였지.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고? 미친 놈.

아까 패잔병들이 허약하다고는 했지만, 또 양민들 죽이거나 하는 건 원래 잘 나가는 군대가 하는 짓이 아니야. 패잔병들이 주로 저지르지. 남쪽에서도 보도연맹이니 뭐니 후퇴하면서 죄 죽이지 않았냐. 인민군도 마찬가지였지. 교회 청년들도 살얼음판이었단 말이다. 교회에 대고 지나가던 패잔병들이 따발총 갈겨서 내 옆 벽으로 총알이 드르륵 박히기도 했다. 임마 왼뺨 맞으면 오른뺨 돌려댈 수나 있지, 왼쪽 가슴에 총알 박히면 오른쪽 돌려댈 수도 없어. 니가 아니면 내가 죽는 게 전쟁인데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할까 두려워서 칼 안들 수 있냐. 네 할아버지는 떨떠름해하시긴 했다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처지도 아니었을 거야.

그렇게 홍원 읍내를 장악한 며칠 뒤에 한 청년이 사색이 되어서 뛰어들어왔어. 인민군 1개 중대가 트럭을 타고 진입하고 있다는 거야. 아이고야 다 죽었다 싶었지. 나중에 '새벽의 7인' 영화를 보면서 그때가 떠오르더라. 이젠 싸우다가 총 맞고 죽거나 끌려가서 어디 우물에 처박히거나 할 상황이라. 청년들이 눈물 흘리면서 할아버지한테 그랬지. 목사님 마지막 기도나 올려 주시기요. 예배당 마루에 동그랗게 모여서 기도를 하고 죽더라도 싸우고 죽자고 우루루 나가는 참인데 동구밖에 있던 또 한 청년이 숨이 턱에 닿아서 뛰어들었어,.

"국군이오 국군!"

야 찬송가 495장에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다만 참말로 그 말 한 마디에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더만. 트럭타고 들어오는 건 정말로 국군이었어. 국군이란 걸 알게 된 건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지. 어디다 숨겨 놨던지 양손에 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고, 애국가를 목청껏 내지르는 거야. 곡조? 아 물론 그 옛날 올드랭사인 멜로디였지. 그 노래를 느릿느릿 부르면 한없이 슬프지만 신나게 빠르게 한 번 불러 봐라. 군가처럼 경쾌하다. 그리고는 국군이 트럭 타고 들어오는데 천군천사 따로 없더군. 근데 나는 국군을 보고 두 번 놀랐어. 왜 두번이냐.

첫째는 뿔이 없더라고. 눈 코 입 제대로 달리고 털도 안난 보통 사람이더라고. 난 4년 내내 남반부 국방군들은 뿔 달리고 털 나서 애들 막 잡아먹는 괴물로 교육을 받았었거든. 근데 딱 보니 뿔이 없는 거라. 그래 너도 빨갱이들은 뿔 달린 도깨비로 배웠겠지. 서로 그렇게 애들을 세뇌시킨 거지. 앗 아니다 빨갱이들은 뿔은 안났지만 도깨비보다 나은 건 없는 것들이고. 뭐라고? 조용히 해 이 녀석아. 시끄러워.

두번째 놀란 건 국군은 왜 그렇게 자기들끼리 구타가 심한지 모르겠더라고. 인민군들은 그런 거는 없었어. 자기비판이다 뭐다 정신적으로 무지하게 괴롭히고 사람을 쪼아대긴 했지만 자기들끼리 두들겨 패거나 기합을 심하게 주거나 하는 건 없었거든. 아따 국군은 장교고 고참이고 밑에 애들 잡는데 소름이 끼치게 잡더라. 뭐라? 그건 일본군 전통이 남아 있는 거고 인민군은 그 전통에서는 벗어났던 거라? 미친놈. 헛소리하고 있네.


어쨌건 네 할아버지는 별안간 반공 유격대 사령관(?)이 되어 버렸어. 교회 청년들이 봉기를 주도했으니 좋건 싫건 그리 될 수 밖에 없었던 거지. 홍원내무서장 그러니까 홍원경찰서장이 쓰던 책상이 네 할아버지 몫으로 오는 걸 필두로 세상이 그렇게 뒤바뀔 수가 없더군. 학교 가니까 내가 왕이야. 나를 그리 못살게 굴던 선생들이 어쩌면 그렇게 내 눈치를 본다냐. 허허 세상이 한 번 뒤집힌다는 건 그렇게 사람을 귀하게 만들기도 하고 천하게 만들기도 하나 봐.

그런데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힐 때가 왔지. 중공군이 들어와서 UN군은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후퇴한다는 거야. 인민군이 쫓겨다던 것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미군들이 거지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던 모습도 기억난다. 대포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오던 날 난 학교에 있었지. 수업을 받고 있는데 둘째 형이 헉헉거리면서 교실에 뛰어든 거야. "야 빨리 나오라." 다짜고짜였어. 책보라도 싸서 나가겠다고 하니까 "책보고 뭣이고 다 때려치우고 빨리 나오라."하고 선생님 앞에서 내 팔목을 끌고 나가는 거야. 두 형제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간 데가 홍원역이었고 흥남행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있었지.

흥남부두는 지옥이었어.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히려고 하잖았겠니. 먼저 한 번 뒤집혔을 때 살판났던 사람들은 그대로 죽을 판이 된 거지.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울고 불고 악을 쓰고 용을 쓰고 헌병들은 배에 무조건 오르려는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심지어는 총도 쐈다. 배는 한정되어 있었고, 탈 사람은 정원의 열 배는 되었을 테니까. 아니 백배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는 본의아니게 반공 유격대의 '수괴'였잖냐. 그래서 직계 가족들은 태울 수 있도록 조치를 받았었나 봐. 그런데 지금도 황망한 것이 글쎄 할아버지가 우리를 태우지 않고설랑 "여기 있으면 반드시 죽을" 교회 동료들을 태우겠다는 거야. 장손인 큰형, 네 큰아버지만 같이 가는 걸로 하고 말이다. 여자하고 애들이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고, 다시 UN군이 북진하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심산이었지. 이건 육지에 서 있어도 바다에 빠지는 느낌이라...... 내가 살면서 그 이후에는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네 고모 둘하고 둘째 큰아버지하고 나하고 할머니하고 다섯 명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어. 돌아갈 곳은 없고, 한 발 더 내딛으면 깊이 모를 바다라. 억지로 배에 손 디밀었다가는 헌병들이 미친 개 때리듯 때려제끼니......

그렇게 넋을 잃고 다섯 명이 울고 있는데 우리 집에 머물던 장교 하나가 우릴 알아 봤어.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사정을 설명했더니 험악한 욕지거리를 내뱉는 거야. "아무리 목사 라지만 지 새끼들 내버리는 인간이 어디 있어......." 그 장교가 우리를 데리고 가서는 헌병 장교한테 목사 가족이고 여기 있다간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니 배를 태워 주시오 부탁을 했고 용케 자리가 났어. 배에 오르는데 성경학교때 배운 노아의 방주라. 부둣가에 새까맣게 몰려들어 울부짖는 사람들 얼굴 하나 하나가 지금도 기억난다. 울기도 지쳐서 꺽꺽거리던 여자들, 아이들, 두 손 들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던 아저씨들...... 아마 용감했던 교회 청년 이영도도 거기 끼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배에서 내려 버린 거야. 도저히 가족들 두고는 못 가겠다고 큰아버지만 혼자 배에 남기고 덜렁 하선해서는 온 부둣가를 헤매다가 우리가 없으니까 한창 시가전 벌어지고 있는 흥남 시내까지 들어갔다 울면서 다시 돌아오신 거야. 그때 낯이 익은 홍원 사람 하나가 "목사님 식구들은 딴 배에 탔슴다." 하더라는 거야. 할아버지는 우리가 탄 배에 탔고 큰아버지는 열 여섯 나이에 완전히 따로 떨어져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

너는 미국을 욕하길 좋아하지만 그때 흥남 부두에 있던 피난민들 거지반을 구했던 건 미군이었다. 국군 헌병들이 악다구니치면서 배에 오르려는 피난민들 머리를 두들겨서 물에 떨어뜨릴 때 말린 것도 미군이었고, 포탄이 부두 근처까지 떨어지는데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끝까지 남았던 배도 미군 수송선이었어. 내가 탄 배도 미군 배였는데 미군 장교가 쏼라쏼라 악을 쓰니까 배에 있던 사람 중에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좋아서 펄쩍 뛰더라. 뭐라고 했느냐니까 "배가 뒤집히더라도 일단 실어!" 뭐 그런 얘기였다는군.

노예선에 탄 흑인 노예들같이 빽빽이 들어차서 똥오줌도 선실에 누면서 배멀미에 토해 가면서 당도한 게 거제도였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하면 오늘 밤 샐 거고...... 딱 하나만 얘기해 줄게. 거기 포로수용소가 있었잖니. 내 생각에 당시 남이고 북이고 전체 한반도에서 의식주 분야에서 평균 이상을 누렸던 게 그 포로들인 것 같아. 미국이 포로 밥 굶길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잖아. 그리고 한 번씩 포로복도 지급을 해서 헌 옷들은 죄 갖다 불태워 버리곤 했어. 그때 내가 옷이 없어서, 정말로 입을 옷이 다 떨어져서 포로 수용소에서 헌 옷 실은 차가 나오는 걸 하루 종일 기다린 적이 있어.

차가 나오니까 애들도 따라 뛰기 시작했지. 그나마 좀 성한 걸 얻으려면 가능한 차와 가까이 있어야 햇으니까. 저거 못얻으면 고추 내놓고 다녀야 한다 생각하니까 미친듯이 달리기가 되더군. 넘어져도 아픈 줄도 모르고 발딱 일어나서 차를 따라갔지. 기브미 기브미 외치면서 말이야. 난 초콜렛 달라는 말은 해 본 적 없다. 근데 그때는 기브미 즈봉 (일본말로 바지) 기브미 샤쓰를 번갈아 외치면서 트럭 뒤의 먼지를 따라붙었어. 그래서 POW 크게 찍힌 옷 한 벌을 얻어 입을 수 있었지.......

문익환 목사 부친이 문재린 목사라는 양반인데 네 할아버지하고는 절친한 친구셨다. 익환 밑에 동환은 네 둘째 큰아버지하고 잘 아는 사이고..... 그 동환 밑에 또 무슨 환이 있었는데 피난지에서 같이 교회를 다녔지. 근데 그 집안에 문성근 같은 배우도 있지만 , 그래서 그런지 그 사람의 끼도 참 충만했던 기억이 난다. 다들 배가 곯고 헐벗었던 어느날 교회에서 소풍을 갔어. 그때 그 문씨 친구가 딱 깍지를 끼고 열렬하게 기도를 시작하는데..... "저에게 복을 주시려면 멋드러진 한복 하나 주시옵고, 저에게 벌을 주시려거든 양복 한 벌을 주시옵고....." 사람들이 뒤집어져서 웃는데 찬송가 506장을 능청스럽게 부르는 거라. 원래 찬송가 506장 가사가 이거거든 "내 평생에 소원 내 평생에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이걸 이렇게 바꿔 부르더라고. "내 평생에 찰떡 내 평생에 찰떡 찰떡에 기름을 발라서 한 조각 먹길 원하네....."


처음엔 웃다가 나중엔 사무치게 같이 불렀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얼마나 찰떡에 기름이 혓바닥 위에서 아른거리는지........ 굶어서 배가 고픈 건지 웃어서 배가 아픈 건지 모르겠더라. 나중에는 애들이 울먹이기까지 했지. 내 평생에 찰떡 내 평생에 찰떡 찰떡에 기름을 발라서 한 조각 먹기를 원하네........ 너희들은 몰라. 정말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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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2.15 삼국의 영웅의 허망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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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12월 15일 삼국의 영웅의 최후

어린 시절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 여러 설이 분분하고, 기발하기까지 한 상상력이 동원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이름은 역도산. 사실 그는 우리 또래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었고 당시의 빈약한 영상자료로서는 그의 얼굴조차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박치기 왕 김일의 스승으로서 원조 영웅쯤 되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던 역도산의 죽음에 대해 가장 설득력있는 전설은 이랬다.
...
“역도산이 일본 레슬링 선수들을 다 때리 눕히니까 일본 놈들이 억수로 밉거덩. 그래가 일본 깡패가 칼을 던짔거덩. 근데 역도산 배가 거의 철판 아이라. 칼이 배에 맞고 튀어나왔는데 숨을 내쉴 때는 배가 약해지거덩. 그거를 눈치챈 딴 깡패 놈이 배를 찔러서 죽었다.”

이 전설은 사실과 거짓이 2:8의 비율로 섞여 있었다. 일본 깡패에게 칼을 맞은 것만큼은 사실이었지만 칼을 튕겨내기는 커녕, 깊이 찔리지도 않은 상처가 덧나 그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63년 12월 15일이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역도산의 이름을 알게 했던 전설의 가장 큰 거짓말 중의 하나는 역도산이 일본 레슬링 선수들을 다 때려눕혀서 미움을 샀다는 거였다. 미움을 사기는커녕 역도산의 장례식에는 1만명이 넘는 일본 사람들이 모여서 슬피 울었다. 그는 일본의 영웅이었다.

링 위에서 역도산의 무기는 ‘가라데 촙’이었다. 일본 말 가라데에 도끼로 쪼갠다는 뜻의 영어 단어 chob이 합성된 가라데 촙으로 역도산은 덩치 큰 백인 선수들을 때려눕힘으로써 일본 최고의 영웅이 됐다. 태평양 전쟁에서 완전히 두 손을 들어 버린 뒤 인간이 아닌 신으로 존경받던 천황이 주머니에 손 넣은 키 큰 미국 장군을 방문하여 애처롭게 사진을 찍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그렇게 극렬하게 저항했던 것 치고는 너무나 양순하게 피점령국 국민이 됐던 일본인들은 링 위에서 역도산이 휘두르는 ‘가라데촙’에 백인들이 픽픽 나가 떨어지는 모습에 그야말로 열광했다. TV 수상기가 1만대 정도 보급된 상황에서 1400만이 역도산의 경기 중계를 지켜봤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14인치도 안되었을 흑백 TV 한 대 앞에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는 이야기다.

‘리키’가 ‘조센징’이라는 것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역도산 자신도 성의껏 부응했다. 사석에는 재일교포들과도 교류하고 불고기 먹고 술 한 잔 걸치고는 아리랑과 도라지 타령도 불러 제꼈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 한국인임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역도산을 흠모하여 밀항선을 타고 건너갔다가 유치장에 갇힌 김일을 꺼내 준 것은 역도산이었지만 그는 김일에게 이후 단 한 마디의 한국말도 건네지 않았다.

김일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의 지척에서 역도산이 한국어를 쓴 것은, 아니 썼다고 추정되는 순간은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와 단 둘이 만났을 때 뿐이었다. 고향이 함경도였던 두 사람만 있었을 때에는 역도산이 그렇게도 숨기려던 모국어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므스근 일이든 힘들지 아이하겠소. 힘을 내오” “일없습니다. 맵짠 세월 다 지났습니다.(힘든 세월은 다 지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함경도 사내들은 그들만의 회포를 풀지 않았을까.

그 고향이 함경도였고, 애초에 그 지역에서 씨름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역도산, 본명 김신락은 그 출신지 때문에 또 한 나라의 영웅이 됐다. 조선인민공화국이다. 고향에는 김신락의 형제들이 있었고 고향 여자 사이에서 낳은 첫딸이 커 가고 있었다. 1961년의 어느 날, 재일교포 북송선 만경봉호가 입항했을 때 그 배에는 역도산의 형과 친딸이 타고 있었다. 상륙 허가가 날 리 없던 그들을 위해 역도산이 혼자 그 배에 올라탔고, 딸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상봉을 한다. 그는 동경 올림픽에 출전할 북한 선수단의 경비 부담을 약속했고 김일성에게는 벤츠 선물을 하며, 일설에 따르면 김일성 원수 만세까지 적어 보내는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또 남쪽에 대해서도 섭섭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을 방문하여 카퍼레이드도 하고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판문점에 가서 옷을 벗어던지고 북쪽을 향해 ‘형님!’을 부르짖은 일화는 유명하다. 중앙정보부장이며 김종필이며 당시의 유력자들을 다 만나고 돌아간 그는 그로부터 15년 쯤 흐른 뒤까지도 지방 도시의 국민학생이었던 내 또래들에게도 쟁쟁한 영웅이었다.

미묘한 관계의 동북아시아 세 나라에서 모두 영웅 대접을 받은 사람은 아마도 역도산 하나일 것이다. 남한의 영웅은 북조선의 원쑤였을 것이고 일본의 영웅이 남북한 공히 환영받을 이유가 없었던 상황에서 역도산은 그 현대사를 통틀어 삼국이 동시에 내세우는 거의 유일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서, 두 낱으로 갈라진 조국 어디에도 그 정체성을 뿌리내리지 못한 국외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호화로운 결혼식을 통해 맞이한 신부와의 신혼 여행길에서 그가 했다는 말은 그 서글픔을 짐작케 한다. “우리나라는 갈라져 있어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기 때문에 한반도를 스위스처럼 영세 중립국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 삶의 터전인 일본, 그리고 갈 수는 있으나 고향과는 거리가 먼 고국 한국, 고향을 두고 피붙이가 있으나 마음대로 갈 수 없었던 북한. 그는 3국의 영웅이었지만 3국을 떠도는 나그네이기도 했다.

1963년 12월 15일 발을 밟았다고 시비가 붙은 일본 야쿠자에게 역도산은 자상을 입었고,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는 3국 모두에 말빨이 통하는, 평화의 사도로서 기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기구하고도 애매한 인생 자체가 김일성이 역도산의 딸에게 한 말대로, “조선사람이면서 일본선수라는 욕된 운명을 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식민지통치가 빚어낸 후과”였고 그 욕된 운명을 이기고 일본 최고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훨씬 더 많은 기억으로 우리에게 남게 되지 않았을까. 오늘의 칼만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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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16 어느 용감한 할머니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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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7년 12월 16일 어느 할머니의 죽음

1922년생 김학순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북만주에서 간도까지 드넓은 만주 땅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야 어머니와 함께 평양에 정착했지만 그녀의 고생문은 오히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열렸다. 1939년 열 일곱 살의 나이로 일본군에게 끌려가, 중국 각가현이라는 곳에서 이른바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 형편이 어떠하였는지는 구구히 말할 것이 없이, 그녀의 격정적인 회고를 가져오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여자란 것은 언제나 생리가 있는데 그때도 가리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생리고 뭣이고가 없어요. 무슨 짐짝 끌어가듯 자기네 맘대로 쓰고 싶으면 쓰고 고장이 나서 말하자면 병이 나던가 하면 버려 버려. 죽여 버리고...... 말이 열 일곱 살이지 만이 넘은 것도 아니고 열 여섯 살 조금 넘은 걸 끌고 가서 강제로 울면서 안당하려고 막 쫓아나오면 안 놔줘요 붙잡고 안 놔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그녀는 일본 관헌이나 군대에 의해 끌려가거나 돈 몇 푼에 팔려갔거나 입 하나 덜자고 내팽개쳐져서 일본군들의 성욕을 충족시키는 위안소에 처박혀야 했던 수많은 위안부 중의 하나였다. 일 이십 명도 아니고 수천 단위의 위안부들이 있었고 전쟁 이후 해방된 나라로 돌아왔었지만 그들의 존재를 밝히고 그 피해를 위로한 정권은 남과 북을 통틀어 없었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이도 없었다. 수천 명의 과거가 머리카락 보일까 꽁꽁 숨어 버린 이유 중의 하나는 김학순의 삶의 궤적에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다.


그녀는 몇 달 동안 일본군 위안소라는 이름의 지옥에 있다가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이윽고 그 조선 상인과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꾸리나 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에게서 끊임없이 그 지옥을 상기당한다. 남편은 술만 취하면 그녀를 윽박지르고 학대했다. “너는 위안소 출신이지. 더러운 년.”


그 옛날 병자호란 때 적군에게 끌려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절개를 더럽혔다며 상종을 하지 않던 비겁한 수컷들의 DNA는 시대와 세월을 넘어 유구했고 김학순과 비슷한 처지의 많은 여성들이 한평생 벙어리로 살거나 천덕꾸러기로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그 분위기에서 “나는 위안부였다.”고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을 전후하여 남편과 딸을 잃고 하나 있던 아들마저 어려서 물에 빠져 죽은 후 온갖 신산을 다 겪으며 혼자 세상을 살아낸 김학순도 지옥 같은 과거를 꼬깃꼬깃 접어 가슴에 묻어 두고 있었고, 나이 들어 죽으면 그녀와 함께 재로 변할 판이었다. 다른 모든 위안부들의 사연과 같이.


그런데 1990년 6월의 어느 날, 옹매듭이 지어져 있던 그녀 가슴의 봉인이 찢겨 나가는 일이 벌어진다. 고단한 몸으로 응시하던 TV 화면에서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눈앞이 하얗게 되는 분노에 휩싸인다.

“ 그렇잖아도 언젠가 이 말을 한 번 해 볼까....마음 속으로 밤낮 가지고 있는데 그런 말이 지나가는 것을 들으니까 정말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어요. 혼자서 이럴 수가 있느냐. 왜 우리는 지나간 일을 이렇게도 모르고 사냐 답답하다. 살아 있는 내가 증인이 있는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 하고 말을 하니까.... 일본놈의 새끼가, 군인 새끼가 이렇게 당했던 사람을 몰라요. 일본 정부에서는 없대요. 없대요.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와요!”

마침내 1991년 8월 14일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두고 그녀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을 찾아가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해,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녀가 TV에 등장하여 피맺힌 과거를 털어놓는 동안 전국 곳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너져 내렸다. 문필기 할머니도 그 중 한 분이었다.

“맨 처음 김학순.... 어느 날 저녁에 텔레비전을 봉깨네 막 우는 거야. 나도 앉아서 막 울었어. 거기서 우는 것을 본께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얼마나 같이 우는데 가만히 난중에 들으께네 노대통령이 6월 25일까지 신고를.... 신고를 하라 카더라고.”

김학순 할머니가 토해놓은 증언들은 화석이 되어 가던 뭇 피해자들의 과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위안부는, 일본군 성노예는 정처 없는 전설이 아니었다.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아니었다. 글귀 몇 자로 역사 교과서에 남을 파편적인 사실이 아니게 된 것이다.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 민간 단체에서 주는 ‘위로금’도 거절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요구한 것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이었다.

“우리 정부가 임대아파트도 주고 돈도 주는데 내가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위안부 경력을 밝힌 것을 단 한 번 후회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들이 일본 민간의 위로금을 받으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라고 한다.

1997년 12월 16일 김학순 할머니는 평생 모은 돈 1700만원을 “자신보다 더 불우한” 이웃들에게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도 “자발적 매춘”이니 “북한의 스파이들”이니 “보상금에 눈 먼 사기꾼들”이니 하면서 위안부들을 모독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허당을 입증하고, 그 뺨을 모질게 때린 한 할머니의 고귀한 죽음이었다.


어제로 김학순 할머니의 폭로 이후 일본 대사관 앞에서 조직되기 시작한 수요 시위가 1천회를 맞았다. 역사는 그렇게 사람들을 할퀴고 지나갔고 상처 입은 사람들은 그렇게 다시 역사를 만든다.


P.S. 그런데 우린 일본을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우리를 비난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야 한다. 걍 노파심에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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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17 김대중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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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7년 12월 17일 김대중 당선!

요즘 예전에 쓴 글을 갖다붙이는 횟수가 늘었다. 첫째 술자리가 많아서고, 둘째 이 날은 그 사건을 빼놓고 넘기는 것이 아쉽기 때문이다. 오늘도 둘 다의 이유다. 14년 전, 이 날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97년 12월 나는 막 입봉한 새끼 PD로 AD들을 닥달하며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AD는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두 명이었고 여자 PD 후배 하나 , 그리고 팀장 하나가 팀을 구성하고 있었다. 팀의 지역 안배(?)를 살펴 보자면 나는 부산에서 초중고를 나온 처지였고, 동료 여자 PD는 서울, 나머지 셋은 전라도 출신들이었다.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해가 출신 지역(?)이 무지하게 중요했던 해이기 때문이다.


97년 제 15대 대통령 선거가 그야말로 불꽃 튀기며 전개되던 무렵, 토박이 서울내기인 동료 여자 PD가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서 "선배! 선배! 코미디야 코미디!"라고 나를 자리에 앉혔다. 지금은 PD 때려치우고 사법고시 봐서 판사 하고 있는, 평소 차분한 성격의 여자 후배였기 때문에 나 스스로 자리에 앉아서 무슨 말인지 캐물었던 기억이 난다.

"부장님이 갑자기 날 부르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너 이번에 누구 찍을 거니? 묻는 거야.. 그래서 아직 몰라요 그랬더니...."

"푸하 김대중 찍으래? "

"그건 당연한 얘기고.... 그 양반이 진짜 웃기는 게....... 지난 87년 92년 때.. 미국 유학가 있었잖아? 그때 대선에 김대중씨 떨어졌을 때 삶의 의욕이 다 없어서 며칠을 굶었었다고. 이번에는 김대중 돼야 한다고, 꼭 찍으래. 떨어지면 팀 분위기 한동안 안좋을 거라고 협박 비슷하게까지 하네?"

"푸하하하하.... 삶의 의욕?"

웃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와 내가 아는 부장님은 '정치'와는 담을 쌓은 분이었는데 그런 양반이 DJ의 낙선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말이 짚신 쓰고 양복 입은 듯, 넥타이 매고 츄리닝 입은 듯 어울리지 않는 코멘트였던 것이다. 이 코미디(?)는 삽시간에 회사에 퍼졌고 호남 출신 부장님의 열성적 김대중 지지는 타 지역 출신의 사람들에게 '전라도 몰표.. 웃기는 전라도'를 상기시키는 결과만 낳고 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전라도 출신의 AD가 어디서 들었는지 그 얘기를 불쑥 끄집어냈다. 그 얘기를 하며 내가 키들키들 웃으니까 이 자식 별안간 심각하게 목소리를 까는 게 아닌가.

"선배님..... 전 부장님 이해해요."


그 기간 동안 사내에서, 또 어떤 자리에서든 전라도 사람과 정치적 얘기를 하는 것은 피차 피하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분위기 파악 못하는 부장님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호남 출신들이 말을 아끼고 있었다는 편이 옳다. 몇 번을 태워먹다가 이제야 근근히 김을 피워 올리며 될 것 같은 밥에 코 빠뜨리기 싫어서였을까.

"어? 응... 그래 나도 이해해." 이러면서 대충 넘기는데 후배는 단호하게 오금을 박았다.

"선배님은 이해 못해요. 절대로 못해요."


평소에 '송아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순하고 고분고분하며 아무리 힘든 일을 당해도 싫은 소리 한 번 안하던 후배였다. 선배한테 좀 개길 줄도 알아야 하느니라 하고 충고할만큼 온순한 녀석이 선배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무안을 주며 쐐기를 박다니. 놀라움 1/3 미안한 1/3 얄미움 1/3의 비율의 감정이 머리 믹서 속에서 갈아지고 있었다. 못하긴 뭘 못해 임마? 하고 내지르려다가 참았다. 그래...... 내가 부장님 얘기를 하며 다른 사람들과 키들거릴 때 너 가슴 아팠겠구나. 미안하다.......



방송에 공일이 없는 것처럼, 방송 제작하는 사람들도 휴일이 따로 없다. 1997년 12월 17일. IMF라는 전대미문의 국난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가고, 모든 정당의 후보자가 발음도 제대로 안되는 캉드쉬인지 뭐시깽이인지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던 그 불운한 해의 대통령 선거날도 촬영 일정은 어김없이 잡혀 있었다.

어떤 사람의 하루를 팔로우해야 하는 것인데 그 사람은 날을 거르지 않고 워커힐 앞길을 조깅으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뭐 런닝머신으로 대신하거나 그거 편집에서 뺄 생각하고 안찍으면 그만이지만, 입봉 몇 달째의 열기 충만 의욕 과잉의 PD가 그럴 수는 없었다. 아침 8시까지 워커힐로 가야 하니까 여기서 7시 출발 오케이? 이렇게 일정을 짜고 있는데 녀석이 강력한 백태클을 걸어 왔다.


"1 시간만 미루죠."
"야 조깅하는 것부터 찍어야 돼 임마."
"조금 늦게 뛰라면 되잖아요."

이쯤 되면 도발이다. 선배의 위상과 PD의 권위를 위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타이밍이다. 그러나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하는 법, 터져나오는 "니가 PD해라 쓰댕아"를 악착같이 억누르면서 마지막 인내의 질문을 던져 봤다. "왜?"

"저 집 멀잖아요. 투표하고 오려고요."

그때 그 친구 표정에는 진짜로 안그러면 촬영 펑크를 내겠다고 낸다는 기세가 인쇄체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을 행사하겠다는데 이걸 내가 저지한다면 나는 위헌 국사범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결국 출연자는 그날만 9시 30분에 조깅을 해야 했다.

그날의 아이템은 성공한 여성 기업인이었다. 한 100평 쯤 되는 으리으리한 아파트에서 촬영을 진행하다가 잠깐 짬이 났을 때 그 출연자가 나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해 왔다.

" 김 PD, 오늘 우리 편(??)이 되겠죠?"
"예?"


나는 며칠 전 그녀를 처음 만난 지 10초가 지난 뒤에 그 여자분이 경상도 그것도 대구출신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또 대한민국 사람들 흔히 하는 인사법대로 학교는 어디 나오고 등등의 질문을 받다 보니 그분도 내 출신지를 알게 되었고 말이다. 정치적 지향과 입장에 대해 토론한 적은 전연 기억에 없으니, 그 분의 '우리 편'이란 표현은 오로지 지역적 근거로부터만 산출된 결과였다. 아무렴 우리 편이 권영길이었겠는가. 김대중이었겠는가.

촬영 때문에 동네 1호로 기표소에 가서 김대중 이름 밑에 붓두껍 찍고 나온 처지지만 출연자한테 "난 우리 편 아닌데요." 그럴 수는 없어서 "예... 그렇겠죠?"라고 얼버무리는데 이 여자분 용기를 얻었는지 말이 많아졌다. 김대중은 불안하다는 둥... 그래도 안정이 제일이라는 둥...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라도 사람들 김대중 되면 독하게 해 먹을 거라는 둥...... 아니 이 아주머니야. 내가 당신편이라고 해도 그렇지, 여기 사람이 지금 몇 명이 있는데.......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촬영 스탭 중에는 전라도가 없었다. 못들은척 혼자서 묵묵히 벽에다 시선을 고착하고 있던 AD 녀석을 제외하고는.

촬영 끝나고 나오면서 괜히 미안한 마음에 (내가 왜 미안하지?) "야 기분 나빠하지 마." 하고 어깨를 두들겼더니 선선한, 그러나 조금 가슴이 아리는 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아마 저 사장님도 제가 전라도인 줄 알았으면 그 얘기 절대 안했을 걸요. 회사에서도 많이 경험했어요. 제가 들어오면 말 뚝 끊기는 어색한 분위기.... 괜찮아요. "
"......."


촬영 끝나고 들어와서 테잎 챙기는데 AD 년놈들이 어디 가서 처박혔는지 보이질 않는다. 어떤 멘트로 혼을 낼까 궁기를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AD 두 명이 TV 앞에 못박혀 서 있는게 눈에 들어왔어. 그래 부아가 치밀어 "야!!!" 소리를 질렀는데 두 명이 동시에 내 앞으로 달려왔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는 나지막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듯... 옛날옛적 국어 교과서의 표현을 빌리면 '소리없는 아우성'을 토해 냈다.


"선배님. 이겨요 김대중이 이겨요."

고향이 군산인가 그랬던 여자 AD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몇 시간 동안 TV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이회창 후보가 치고 올라오면 어 어.. 비명을 지르고, 김대중 후보가 앞서면 두 손을 모으면서 기도하며 발을 구르고.... 휴일 밤이었기에 사무실엔 우리 셋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래서 그들은 그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사람들이 득시글거렸더라면 비상구 계단에 나가서 라디오를 듣고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또 TV를 보더라도 지금처럼 감정을 홍수처럼 드러내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내가 찍은 사람이 리드를 지키는데 심통을 부릴 이유도 없었지만 나는 짐짓 부산 사투리 모드로 전환하여 큰 소리를 냈다.

"쉐이들아. 김대중 선생님이 그리 좋나?"

눈물 주룩주룩 흘리던 여자 AD가 울먹이며 답을 해 왔어.

"김대중이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마음이 가요. 선배는 모를 거예요. "
"모르긴 멀 몰라? 나도 찍었다이까네.."
"몰라요.... 선배.. 선배는 몰라요.. 선배는 편하게 김대중 찍으라고 이야기하고 다니셨죠? 저희는 김대중 찍어달라고 주위 사람한테 말 한 마디도 못했어요. 전라도 애들이란 말 들을까봐.... 선배랑 저희랑은 그게 차이예요 "

.......................


물론 나는 그 아이들을 지금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건 일종의 낙인 같은 거니까. 낙인을 찍혀 보지 않은 사람이 낙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위선 아니면 망상일 테니까. 하지만 김대중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갔고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를 나는 이해하게 됐다.

그건 굳건하고 철저하기까지 한 비상식에 대한 도전의 몸부림이었을 거라고...... 그들이 왜 이런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 왜 한묶음으로 치부되어 듣도보도 못한 고향 사람들의 허물까지 뒤집어 써야 하는지, 대한민국 군대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사람들의 혼이 중천을 떠돌고 있는데 그 떼죽음의 가해자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99% 투표'의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지, 뚜렷한 정치적 입장이 없더라도 그들에게는 복장 터지는 현실이었을 것이고, 슬픈 세상이었을 것이고, 억울하여 미칠 것 같은 나라였을 테니까.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와 장모님은 울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여쭤 봤을 때 장모님은 "글쎄 아무렇지도 않아야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 에이고 얼마나 저 양반이 고생혔던가." 라고 말을 흐렸다. 1997년 12월 17일. 기억 속에서 지우기 어려운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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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2.18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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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18일 “7인의 여포로” 사건


...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한국 전쟁 영화 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액션배우 장동휘, 배우 최민수의 아버지 최무룡, 젊은 날의 구봉서 등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당시의 특수 효과 수준으로서는 놀랄 만큼의 사실적인 전투신으로 화제가 됐다. 그 비결은 ‘실탄’이었다. 모의 총기를 구하는 것보다 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실탄을 쏘아 대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기도 했거니와 6.25 참전 용사 출신의 이만희 감독은 과감하게 실탄 사격을 주문하여 배우들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역시 실제 폭탄을 사용한 폭발 장면에서는 엑스트라의 다리 하나가 날아가서 논 7마지기로 보상하는 일도 있었다.

판에 박힌 반공영화가 판을 칠 때기는 했지만 천재 감독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달랐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역시 반공영화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영화 속에는 반공 뿐 아니라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분대장 장동휘의 대사를 빌려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이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이 죽음의 현장을 증언하고 인간에게 전쟁이 꼭 필요한지 물어보라!"


즉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류의 반공 영화와는 사뭇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이런 독특한 (?)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만희 감독은 대종상과 청룡영화제상을 휩쓰는 개가를 이루지만, 2년 뒤 그 ‘독특한’ 색깔이 담긴 영화 때문에 된서리를 맞는다.


문제의 영화는 <7인의 여포로>였다. 대략의 줄거리만 설명하자면 인민군의 포로가 된 7인의 여포로를 중공군이 성폭행하려들자 이를 제지하던 인민군 장교가 그들을 쏘아 죽이고, 이 때문에 북한에 머물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 자유의 품으로’ 귀순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감독의 혐의는 “괴뢰군을 너무 멋있게 그렸다.”는 것이었다.


1964년 12월 18일 서울지검공안부는 영화 '7인의 여포로'가 "감상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군을 무기력한 군대로 내건 반면, 북괴의 인민군을 찬양하고 미군에게 학대받는 양공주들의 비참상을 가장묘사, 미군철수 등 외세배격 풍조를 고취하였다"는 혐의로 입건한다. 유명한 “7인의 여포로” 사건이다. 전쟁 끝난 지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검찰의 논고는 킥킥거리다가 종국에는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공산계열인 북괴와 중공은 공산주의 이념이 동일하고 대한민국을 침해함으로써 상호간 무력충돌을 몽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이 여군들을 겁탈하려는 것을 괴뢰군 수색대장으로 하여금 제지케하여 (중공군을 인민군이 막는다는 자체가 하면 안되는 설정이란 말이얏!) 위안부로 하여금 "장교님의 행위는 훌륭했어요' 라는 등 칭찬하게 한 것 (세상에 괴뢰군 장교를 이렇게 멋있게 그리다닛!)은 결과적으로 반 국가단체의 국가활동을 고무, 동조, 찬양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때도 사법고시 보고 검사들이 되었을 터인데 과연 이 논고를 쓰면서 담당 검사는 비장했을까. 슬펐을까 아니면 스스로 우스웠을까.

영화는 거의 1/3이 들어내진 누더기가 되어 <돌아온 여군>이라는 엉뚱한 제목으로 개봉됐지만 그것은 이미 이만희 감독의 영화가 아니었고 줄거리도 메시지도 엉거주춤한 졸작이 되어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도 못했다. 극작가 한우정과 감독 이만희는 이 참담한 꼴을 당한 뒤 색다른 의기투합을 한다. “ 야 이거 골치 아프니까, 진짜 반공 영화가 어떤 건지 한 번 보여 주자.”

 그래서 만든 영화가 <군번없는 용사> (1966)였는데 누가 뭐래도 흑과 백이 선연하고 악마와 천사의 대립구도 명백한 이 영화에도 엉뚱한 시비가 걸렸다. 서슬푸른 중앙정보부가 또 이만희 감독을 호출한 것이다. “인민군 장교가 너무 멋있게 그려졌잖아!” 그도 그럴 것이 그 배역을 맡은 것은 당대의 미남 배우 신성일이었다. 이때 이만희 감독이 했다는 변명이 얼마전 신성일의 자전 수기에 등장했다. “신성일이 (인민군 군복을) 입고 있으니 그렇게 멋있지,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멋있었겠습니까?” 참 서글픈 변명이요, 처량한 시대였다.

옛날 얘기라고 웃어넘기기에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도 그렇게 우아하지는 못하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법정 소송 승리 기사가 실렸다. 6.25 당시 태극단 등 우익 단체들과 고양 경찰서는 좌익이라면 어린 아이들까지 끌고 가서 죄다 학살해 버리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그 참담한 현장이 90년대 중반에서야 공개됐지만, 우익 단체는 지금도 그것이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하며 추모 사업을 방해하고, 그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여 왔던 것이다. “어리다고 빨갱이가 아니란 법은 없었다.” (내가 우연히 마주쳤던 ‘태극단’ 노인의 말) 유족들의 대표는 친척의 도움으로 장독대에 숨어 우익의 죽창을 면했던 소년을 남편으로 맞이한, 피해자의 며느리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끔찍했던 역사적 비극과 상처를 다음 세대로 넘기지 말고 우리 대에서 끝내자는 심정으로 20년 동안 죽기살기로 매달렸습니다

1964년 12월 18일 발군의 영화감독 이만희의 어깨를 틀어쥐었던 반공법, “괴뢰군을 인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치도곤을 들이댔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님을 새삼 깨닫는 것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다. 30여년 전 그런 일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오늘도 이런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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