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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1.9 의열단과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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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19년 11월 9일 의열단과 김원봉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의 한 중국인 집 안에는 상기된 얼굴의 조선인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13명. 윤세주, 이성우 등이 좌정한 가운데 날카로운 눈매에 잘생긴 얼굴의 한 청년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경상도 사투리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언어는 정연하면서 매서웠다. 스물 세 살의 개띠 청년. 그러나 어느 범보다도 무섭고 어떤 용보다도 날래게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 사람이었다. 그 이름은 김원봉. 그의 주도 하에 ‘의열단’이 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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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은 애초부터 그 정체성을 명확히 했다. 평화적인 만세 운동이 어떻게 짓밟히는가를 똑똑히 본 이상 평화로운 수단으로 뭘 어째 보겠다는 것은 신기루만도 못한 일이 되어 버렸으며, 실력 양성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어쩌고 따위는 그들에게 비겁자의 변명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 투쟁을 내세웠다. 일제 요인 암살과 일제 주요 기관 공격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의 용기를 일깨우고 그 힘을 끌어내겠다는, 80년대 학생운동 식으로 말하면 ‘선도투쟁’을 감행하고자 했다. 규모는 작아도 철저하게 훈련된 소수 역량을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타격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이를 위해 아예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채택했다 5개의 파괴대상으로는 우선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 등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원한이 하늘을 갈랐던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그리고 식민통치의 촉수인 각 경찰서와 주요 기관을 들었다. 그리고 죽여야 하고, 또 죽여도 되는 ‘7가살’의 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일본 고관 ,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 등을 명시했다. 이 의열단의 정신을 신채호가 그 사나운 명문으로 표현한 것이 유명한 “조선 혁명 선언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후 1920년대 초반 의열단의 이름은 조선을 뒤흔들었다. 1920년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공격하여 서장을 폭사시킨 것을 필두로 의열단원들은 일본 경찰의 공포의 대상이자 최고의 목표물이 됐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터뜨린 나석주, 종로경찰서를 들부수고 1대 20의 총싸움에서 그 대부분을 쏘아 넘어뜨린 명사수로서, 이후 주택가 지붕 위를 오르내리면서 무려 1000명의 경찰들과 맞서 싸우다가 마지막 한 발로 자살한 영화 주인공같은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의열단원이었고, 심지어 황옥 경부같은 조선인 경찰 고위 간부까지도 의열단에 포섭되어 폭탄을 반입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가히 의열단의 이름은 신화적 존재였다. 의열단에 소속된 젊은이들, 일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보내던 젊은이들은 가히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단정하게 옷을 입고 최고의 멋을 내면서 수영과 테니스를 즐기며 여생(?)을 만끽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멋쟁이 청년들은 여성들의 모성 본능과 공주 본능을 동시에 자극했고, 비장하기까지 한 로맨스는 끊이지 않고 청년들의 짧은 젊음을 빛냈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신화적인 인물은 역시 의열단의 ‘수괴’ 김원봉이었다. <아리랑>에서 김산은 김원봉을 이렇게 소개한다.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관한 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미년 이후 친일파와 일본 관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최대의 공겁의 대상이었고, 나와 같은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는 조국 해방의 상징적 존재였다.”

김산에 따르면 그를 찾느라 눈이 벌건 일본 경찰들 사이를 뚫고 다니면서도 두려운 빛 하나 없는 태연한 얼굴로 도서관에서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남자. 헤프게 웃지도 않고 태산처럼 무거우면서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선망과 존경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남자가 되겠다. 이쯤 되면 내 페북 여성 동무들 가운데에서도 자기 신랑 바라보면서 내가 왜 저런 사람이랑 사노 싶은 사람이 적지 않으렸다.

1919년에 의열단을 결성한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일제 경찰에 잡히지 않았다. 고향 밀양에 돌아왔을 때 그 앞에 레드 카펫이 깔릴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던 그는 좌익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이 아닌 한국 경찰에 체포된다. 이때 그를 체포한 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었다. 김원봉은 체포 당시 화장실에 있었는데 노덕술은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그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개 끌 듯 끌고 갔다. “어허 옷이나 좀 입고......”를 부르짖었을 김원봉, 수십 년 동안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 투쟁을 했던 중년의 전사(戰士)의 속내가 어떠했을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의열단 동지 유석헌에 따르면 김원봉은 이후 사흘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런 수모를 겪은 그가 월북을 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열혈 민족주의자였던 그에게 북한은 또 하나의 험지였다. 더구나 독립투쟁을 한 것은 맞지만 김원봉에 비하면 그다지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김일성이 절대 권력을 쌓아나가는 와중에 김원봉의 이름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못되었다. 그의 월북을 설득했던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되어 죽어간 후 그의 명도 그렇게 길지 못했다. 1958년 환갑을 맞은 해를 마지막으로 그의 자취는 사라졌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옥중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1919년 11월 9일 열변을 토하며 의열단 탄생을 주도하던 스물 셋의 청년, 평생을 민족 독립을 위해 소진한 한 독립운동가의 정확한 최후를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그리고 남과 북은 합작으로 그를 역사의 미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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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1.10 창씨개명과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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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39년 11월 10일 창씨개명과 이광수

몇 년 전 일본의 자민당 간부 아소 다로가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만주에 간 조선인들이 일본 여권을 내놓을 때 김씨니 이씨니 라고 표기된 경우 만주인들이 대번에 조선인임을 알아보므로 일본식 이름을 갖기를 원했고 이런 요청에 부응한 것이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으로 공포된 창씨개명이라는 것이다. 이 자체가 웃기는 소리이기도 하거니와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의 착취와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한 장치였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이가 전혀 없이” 총알받이로 내세우기 위한 강제 징병의 전단계이고 민족 말살의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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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원(?) 2600주년을 맞은 1940년 2월 11일(일본 기원절) 본격적으로 실시된 창씨개명은 ‘가문’에 관한 집착 하나는 전 세계에서도 특출난 관심을 보이는 조선 사람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어떤 이는 미나미 총독에게 편지로 그 부당함을 준엄하게 꾸짖은 뒤 목숨을 끊었고, 어떤 농부 전병하는 ‘전농병하’라고 창씨개명을 했는데 이를 일본어로 읽으면 ‘덴노 헤이까’가 되었으므로 면사무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어떤 센스있는 인물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라)고 창씨개명하여 이것이 반항인지 장난인지 일본 관헌을 헛갈리게 만들었다. “성을 간 놈은 개새끼”라는 뜻으로 견자(犬子)로 바꾼 이도 있었다.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초반에는 10퍼센트 미만이었던 창씨개명률은 70퍼센트로 훌쩍 뛰어올랐다. 아무개 김씨 무슨 권씨의 꼬장꼬장함은 금새 창씨개명 중에서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살려 보려는 쩨쩨함으로 사그라들었다. 이를테면 안동 권씨들은 ‘권안’이나 ‘안동’ ‘권동’ 등으로 창씨했고 하동 정씨의 일부는 ‘하동’으로 결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도요다라는 이름을 얻고 현 대통령이 아키히로가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국가 시책’에 부응하지 않는 국민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를 잘 아는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창씨에도 격조(?)가 있었다. 적당히 본관 따고 성씨를 변형시켜 뒤에는 쓰는 이름 갖다 붙인 것은 아랫것들(?)의 행태였다. 매국노의 대표 선수격이라 할 송병준은 “조선식 이름은 촌스럽다.”고 하여 노다 헤이지로라는 완연한 일본식 이름으로 탈바꿈했고, 문필가 주요한은 일본의 ‘八紘一宇’ (신무 천황이 정복 사업을 끝낸 후 온 천지가 한 집이 되었다고 선포했다는 데서 온 말)을 따서 마쓰무라 고이찌 (松村宏一)라고 멋드러진 일본 이름을 지었다.

그 중 제일은 역시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일본의 시조격인 신무 천황이 즉위했다는 향구산에서 그 성을 따와 ‘향산’이라 했고 일본인의 이름에 향용 사용되는 사내 랑(郞)을 써서 이름을 만들었다. 향산광랑(香山光郞). 2.8 독립선언문의 작성자이며 일본인들조차 “조선 문학의 대어소 (최고위라는 뜻)”이라 일컬었던 이광수의 이름은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인스러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언젠가 한 대학 교수가 이광수의 ‘향산’은 일본의 신무 천황의 향구산이 아니라 그의 고향 평안도의 명산 묘향산을 뜻하는 것이며, 그의 친일 또한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는 투의 주장을 한 바 있지만 그렇게 이해해 주기엔 그는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했고 그 티를 자심하게 드러냈다. 자신을 존경하여 찾아온 후학 앞에서 라디오에 나오는 일본 천황의 음성에 허리를 깊숙이 숙이던 그는 이미 ‘뼈 속까지 친일’이었다. 후일 그가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고 주장한 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의 군부대신도 되고, 내부대신도 되는” 꿈을 꾸고 있었고, 그것이 진정한 조선 민족의 발전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질서에 앞장서 편입되고, 일본보다 더 일본화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살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일본이 창씨개명을 ‘권장’ 내지 ‘강요’한 이후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가졌다. 창씨개명한 자체를 친일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하물며 자신의 의사를 가지지도 못한 나이에 일본에서 태어났다거나 일본 이름을 가졌다고 하여 현직 대통령을 ‘친일파’ 내지 ‘일본놈’으로 몰아붙이는 일부 ‘진보’들의 폭력은 매우 혐오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기억해야 할 것은 1939년 오늘 공포된 창씨개명이 아니라 이광수가 보여 주었듯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같이 보이기를 갈망했던” 태도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민족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그야말로 ‘아햏햏한’ 풍경이다. 향산광랑이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던 세월로부터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대상만 바꾼 채 지속되고 있는 꼬락서니는 과연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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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11 아홉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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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11일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사나이의 최후


2004년 11월 11일 프랑스의 어느 병원에서 한 남자가 죽었다. 죽은 곳은 분명했지만 그의 일생을 반추함에 있어 그가 출생한 곳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들이 있었다. “그는 1929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는 발표가 있자 프랑스에 주재하던 한 나라의 외교관이 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그는 카이로에서 태어났단 말이야! 내가 여러 번 그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죽은 이는 자신의 출생지가 카이로라고 확인한 적이 없고 예루살렘에 묻히기를 소망했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망자의 이름은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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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어린 시절의 일부는 예루살렘과 함께였다. 1차대전 중 유태인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영국 외상 아서 밸푸어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얘기를 한 것이 1917년이었으니 그 뒤 10여년 동안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유태인들은 부지기수였고 터줏대감이었던 아랍인들과 치열한 다툼을 벌일 때였다. 어린 시절의 아라파트는 유태인들이 자신의 친척집을 박살내는 꼴을 목격한다. 그것은 그의 운명과도 같은 이스라엘과의 기나긴 투쟁과 대립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이 건국한 뒤 팔레스타인을 떠난 아라파트는 지하조직 파타(Fatah)를 결성하고1964년 12월 31일 이스라엘의 송수관을 폭파하면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6일 전쟁’으로 유명한 제 2차 중동전에서 그는 자신의 조직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이스라엘 군을 국경도시 카라메에서 격파함으로써 아랍의 영웅이 된다. 이스라엘의 기습으로 초장에 국면을 그르쳤던 아랍인들은 환호했고 아라파트의 조직은 수백명에서 1만 단위로 불어난다. 그리고 그는 PLO의 초대 의장이 이스라엘에 의해 죽음을 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의장이 된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그는 이스라엘과 그 후견인 미국의 철천지 원수였다. 뮌헨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한 검은 9월단의 배후였고, 70여 회를 헤아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공격의 주도자였다. 영화 ‘뮌헨’에서 보듯 복수의 화신이 된 이스라엘인들은 아라파트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됐으나 그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위기를 모면하여 ‘아홉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너희들은 보는 대로 죽이리라”는 식으로만 공격을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개적인 공격을 통해 PLO를 아랍의 대 이스라엘 항전의 거멀못으로 만든 정치적 수완가였고, 궁극적으로는 평화를 꿈꾸고 추구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UN 정기 총회에서 권총을 차고 연단에 오른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한 손에는 권총, 한 손에는 올리브 가지 (평화)를 들고 있습니다. 내 손에서 올리브가지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오.”

1988년 그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테러를 포기했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반 세기가 되어 가는 이스라엘, 세계 최강대국의 후원을 받는 군사 강국을 테러로 격침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인정하지도 않는 이들에게는 그의 행동은 일종의 배신이었고 목숨이 아까운 기회주의자의 투항에 불과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구제가 불가능한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을 거둔 적이 없었고 그가 말하는 평화란 테러리스트의 연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의 말년은 기구하고 비참했다. 가택에 연금된 채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사살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위협에 봉착해야 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입술을 떨면서 “이제는 순교하는 수 밖에 없다.”라고 뇌까리던 왕년의 열혈 투사는 일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오히려 그는 죽은 후에 더 큰 거인으로 남았다. 그의 장례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숙적 이스라엘도 그의 장례식을 일일이 방송에 담았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별 호의가 없는 우리나라 외무 장관까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니 거의 모든 세계가 그를 추도했다.

그가 배신했다거나 기회주의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그는 견결한 투사였다 동시에 적대와 폭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응어리가 커질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에게 올리브 가지를 들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대통령 욕심에 대의를 버리고 이스라엘에게 붙었다는 비난을 들었으나 어쩌면 그허약하고 가난하며 존재감도 극히 미약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의 가장 큰 의미요 공헌이었는지도 모른다. 야세르 아라파트.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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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12 지리산 빨치산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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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3년 11월 12일 최후의 빨치산 소멸

전쟁이 끝난 뒤도 10년 뒤였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쫓겨가고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가 선글라스 낀 작달막한 장군이 나라를 틀어쥐었고 그가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 대통령이 된 뒤의 일이었다. 지리산 인근 마을에서 총성이 울렸고 한 명이 시체가 되어 널부러졌다. 다른 한 명은 살아남았지만 엉덩이에 총알을 맞았다. 피를 너무 흘린 나머지 건물 안으로 옮겨졌을 때 허연 형광등이 오렌지색으로 보일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결국 다리 하나를 잘라야 했고 그 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다. 피고의 이름은 정순덕. 남한에서 살아남았던 마지막 빨치산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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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 애국심을 본받자는 이들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그녀가 죽기 전에 받았던 그 경의를 대해 구태여 폄하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일생을 살펴 보면 선생님이고 나발이고, 애국심이고 무엇이고 그저 안스러운 마음 뿐이다. 그녀는 1933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건 ‘정감록’에 심취했던 할아버지가 고향을 버리고 심심산골 지리산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버지는 대충 훈장 노릇을 할 정도로 글줄이나 익혔지만, 딸에 대해선 완고했다. 글을 알면 시집가서 시집살이 고되다고 편지할까봐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10여년 전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야학을 취재했을 때 나는 똑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 때는 시집가서 편지한다고 글을 안가르쳤어요.”


나이 열 여섯 살에 입 하나 덜자고 정순덕은 인근 마을 성씨네로 시집을 간다. 1950년 1월이었다. 다행히도 남편은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알콩달콩 정을 쌓아가던 무렵 전쟁이 터지고 원래 빨치산세가 강하던 산청 지역은 일찌감치 인공 치하에 들어간다. 남편은 인공 치하에서 팔자에 없는 감투를 썼고 전세가 뒤집히자 그 감투는 목을 자르는 작두가 됐다. 농투산이 남편은 무슨 사상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군이 후퇴하면서 발휘했던 그 꼼꼼한 학살의 공포는 남편을 산으로 내몰았다. 부부의 생이별이었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가난도 가난이려니와 걸핏하면 찾아와 빨갱이 남편 내놓으라며 치고 밟는 경찰과 청년단의 횡포는 수십년 지난 뒤까지도 정순덕의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1951년 겨울, 정순덕은 남편의 옷가지와 식량을 싸들고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꿈처럼 남편을 만나지만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은 스무 날도 못되었다. 남편은 곧 죽음을 당했고 그녀는 빨치산의 일원으로 살아야 했다. “ 적은 것을 여럿이 갈라 먹을 수 있도록 요리를 해야하고, 또 부상병을 간병하는데도 여성의 손길이 필요”(정순덕의 증언)했고 그녀 또한 그 대의에 동의했기에 산에 머물렀지만, 사실 그녀는 내려올 수도 없었다. 일자무식에 남편은 죽어 없고, 빨치산의 마누라로 공인된 여자가 산을 내려간들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전투 훈련을 받았고 빨치산이 됐다. 물론 그녀에게 정치적 열망 같은 건 없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념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돌아갈 곳 없는 절망감과 남편의 원수들에 대한 증오, 해 주는 것 없이 괴롭히기만 했던 나라에 대한 환멸 그 모든 것이 뭉쳐진 결심이 아니었을까. 허무하게 죽어버린 남편과 달리 그녀는 끈덕지게 살아남았다. 그녀가 몸서리치게 기억하는 지리산 대성동 초토화 때에도 죽음을 면했고, 이현상, 박영발 등 빨치산 총수들이 죽어갈 때에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2차대전 때 참전했던 일본군 병사가 계속 숨어 지내다가 필리핀이나 동남아시아 밀림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지만 그건 치안이 확보되지 않은 상하(常夏)의 밀림에서의 타잔같은 삶일 뿐이었다. 하지만 정순덕은 춘하추동 분명하고 겨울에 산에서 잠을 자다간 동태 꼴이 되기 십상인 지리산에서 13년을 치러 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체포로 남한 빨치산의 역사는 영원히 막을 내렸다.

체포 뒤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그녀는 “조금이라도 감형하면 개놈이다!”라고 외쳤고, 국선변호인에게도 “집어치워! 어서 죽이기나 하라고!”라고 악을 쓰기도 했다. 그녀가 50년대에 체포되었더라면 사형을 면치 못했겠지만 이미 ‘망실 공비’로 분류되던 마지막 빨치산에게 재판부는 약간의 ‘정상’을 참작한다. 판결문은 이렇다.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행위는 형벌의 책임이 무겁기는 하나 농촌에서 무식한 아녀자로서 16세에 결혼, 신혼 6개월만인 625전쟁 때 남편을 따라 입산한 것이 동기가 되어 정치적인 확고한 신념 없이 13년 동안 산에서 짐승 같은 생활을 하면서 남편의 희생물이 된 정상을 참작한다.” 그래서 무기징역이었다.


그로부터 그녀는 23년을 복역한다. 풀려난 뒤에는 음성 꽃동네에도 몸을 의탁했고, 인형 눈도 붙이고, 봉투도 만들면서 생을 이어나가야 했다. 지리산에서의 13년을 제외하면 그 전이나 후나 그녀는 항상 바닥이었다. 그래도 전쟁만 아니었다면 소작 붙여먹는 농사꾼의 아내로서 순풍순풍 7남매쯤 낳아서 그 중에 잘된 자식의 효도를 받으며 호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폭풍은 그녀의 인생을 완벽하게 망가뜨렸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잠깐 취재하면서 고향도 남쪽이고 가족도 남쪽에 있는 이들이 왜 다 늙어서 북한으로 가려고 할까 고민한 적이 있는데 정순덕을 생각하면 그 답이 풀리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가치없거나 비참하지만은 않았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치하하고 존중하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정순덕은 북으로 가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된다. ‘비전향’ 장기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향서를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전향서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양심선언(?)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2004년 뇌출혈로 쓰러져 인천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묘비명은 이런 것이었다.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된 조국의 산천에 봄꽃으로 돌아오소서.” 박복한 나라에 태어나 평생 몸 한 번 편히 하지 못하고 살았던 기구한 여인 (물론 그녀도 민간인 학살의 죄는 피해가지 못할 것이다)의 묘 앞에 바쳐진 그 정도 헌사도 쉽게 용납되지는 않았다. HID 즉 대북첩보부대 출신 ‘청년 동지회’들이 그 묘비를 망치로 들부숴 놓았던 것이다. 그때 저승의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1963년 11월 12일 그날 총알이 내 심장에 박히뿌렸어야 되는 긴데. 그래가 동무들처럼 아무 데나 파묻힜으면 이 꼴은 안봤을 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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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1.13 전태일 불꽃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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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불꽃이 되다

오늘은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럴리도 없지만) 아마 산하의 오역을 앞으로 10년을 쓴다 해도, 11월 13일은 다른 일을 다룰 여유가 없을 것 같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법치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원리로 삼는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폐병으로 쓰러져가는 열 서넛 시다들의 권리를 제발 살펴 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육신을 스스로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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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죽은 며칠 뒤부터 김재준 목사나 기타 한국 기독교의 거인들 (조용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이 제기했고, 문익환 목사는 “전태일이야말로 예수였다.”고 선언했거니와 나는 전태일처럼 예수와 닮은 삶을 산 이를 본 적이 없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 고로 인해서 자연히 다른 감정에도 잘 동화되며 남자인 내가 불쌍한 광경으로 인해서 코언저리가 시큰할 때가 많으니까 말입니다.”(전태일 평전 중)고 말하는 스무살의 노동자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란 말이야. 이 말에 율법이고 예언자고 하는 군상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라고 설교하던 서른 셋의 목수가,

차비를 털어 나이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주고 청계천에서 수유리까지 휘파람 불고 걸어가던 뭉툭하고 작은 눈의 청년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한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중요해. 그게 곧 나한테 대하는 거니까.”라고 말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음에도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지지 않는 잔이라면 아버지 뜻대로 하시오.”라고 결연하게 말하던 마리아의 아들과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라고 주먹을 부르쥐었던 이소선의 아들. 이 둘 간에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김진호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 속에서 예수는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곧 사건은 부활 신앙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시간의 장벽을 뚫고 공간의 담장을 넘어서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예수 부활의 자리가 '교회'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부활 신앙의 내용이 교리가 아니라 역사적 체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남단의 사람들은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나버린 예수 그분을 '전태일 사건'을 통해서 읽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고 기념하라 이것은 내 피이니 마시고 나를 잊지 마라”고 한 유태인 청년처럼 2000여년 뒤의 한국 청년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절규하며 스스로 제단의 제물이 됐다. 로마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의 변방 속주 청년의 십자가를 기리는 붉은 색 네온은 사방에 그득하고, 일요일만 되면 그 이름을 부르고 “나와 같은 죄인 살리기 위해 죽으신” 그 은혜에 감읍하는 목청이 성층권까지 울리는 나라에 살면서, 그와 거의 동일한 삶을 살았던 동양인 예수의 마지막 소원에 왜 이리 면구스러워지는 걸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예수는 가까이에 있다. 아멘. 핍박받고 외면받는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강도에 찔려 쓰러진 자들을 자신의 몸을 던져 돕는 모든 이들은 예수고 전태일이다. 그들이 우리가 될 때, 세상은 천국에 한 발 다가서겠지.

문익환 목사의 시다.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
한국의 산악들아 강들아 들판들아 마을들아
한국의 소나무야 자작나무야 칙덩굴아 머루야 다래야
한국의 뻐꾸기야 까마귀야 비둘기야 까치야 참새야
한국의 다람쥐야 토끼야 노루야 호랑이야 곰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은 전태일이다

백두에서 한라에서 불어오다가
휴전선에서 만나 부둥켜안고 뒹구는
마파람아 높파람아
동해에서 서해에서 마주 불어오다가
태백산 줄기에서 만나 목놓아 우는
하늬바람아 샛바람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뭐 다르겠느냐
우리의 이름도 전태일이다
깊은 땅 속에서 슬픔처럼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들어야 알겠느냐
한국 땅에서 솟아나는 물방울치고
전태일 아닌 것이 있겠느냐

가을만 되면 말라
아궁이에도 못 들어갈 줄 알면서도



봄만 되면 희망처럼 눈물겨웁게 돋아나는
이 땅의 풀이파리들아
너희의 이름도 전태일이더냐
그야 물으나마나 전태일이다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너희의 이름이야 물론 전태일일 테지
여부가 있나
우리가 전태일이 아니면
누가 전태일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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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1.14 김득구의 마지막 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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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1월 14일 김득구의 마지막 링

1982년 11월 14일 낮 (미국 시간으로는 13일이지만) 각 가정의 안방의 TV는 하나의 타이틀매치 ‘위성중계’에 고정되고 있었다. 한국 권투는 이른바 틈새에 강했다. 즉 메인 체급, 페더급이니 밴텀이니 미들이니 보다는 ‘쥬니어’자가 붙은 체급에서 주로 챔피언을 배출했다. 그런데 이번 경기는 주니어가 아닌 ‘라이트급’ 타이틀매치였다. 도전자는 동양 챔피언 김득구, 그리고 챔피언 미국의 레이 맨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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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시니는 흑인들이 판치는 미국 권투계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백인 스타였다. 몇 년 전 니카라과 마나과 시장까지 하다가 의문의 자살을 했던 전설적인 복서 알렉시스 아르게요한테 아깝게 패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진 적이 없는 상승의 스타였다. 하지만 김득구는 동양챔피언이라는 것 말고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복서였다. 화려한 아마튜어 전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KO왕으로 인기몰이를 한 것도 아니었다. 전문가들 그 누구도 김득구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없었다. 레너드나 헌즈가 경기를 벌이는 ‘라스베가스 시저스 팰리스 특설링’에 서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할 뿐.

삼국지에서 조조의 장수 방덕은 관우와 싸우러 갈 때 관짝을 끌고 나간다. “유비의 부하인 마초의 사람이었으니 믿을 수 없다.”는 험담에 조조가 자신을 배제하려 하자 피끓는 충성 맹세로 조조를 감동시키고서 그 각오를 보이고자 한 행동이었다. 관우를 죽여 관에 넣어오거나, 자신이 그 속에 담겨 돌아오겠다는 시위였다. 그런데 김득구가 그랬다. 김득구는 미국행 비행기에 작은 나무관을 싣고 갔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었지만, 그 각오는 방덕과 같은 것이었다. 김득구는 호텔방에 “맨시니 너는 나한테 죽는다.”는 낙서까지 하며 독기를 발산한다.

김득구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거진, 강원도의 최북단의 어촌마을이었다. 그는 몇 년 동안 기록했던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 동해의 저 끝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 처음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노라면 누구도 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 온 누리를 비출 수 있는 태양이 되리라. 어린 내 가슴에 항상 자리잡고 있는 영웅심, 그것은 내 고향 동해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빛나지도 않았고 영웅적이지도 않았다. 재가한 어머니 때문에 원래 이득구였던 그는 김득구가 된 그는 이복형들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보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에도 육상 선수로 뛸만큼 운동 신경은 좋았지만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복형들은 재빠른 막내 동생을 이 동네 저 동네 데리고 다니면서 싸움을 붙이기도 했는데 그때 김득구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그 장래성(?)을 보이기도 했다. 단짝 친구였던 시각 장애인 친구를 위해 단신으로 몇 명의 친구들과 맞서기도 했던 정의파였다고도 한다.

그를 다룬 영화를 보면 돈 3천원을 들고 가출한 김득구에게 버스 안내양이 어디까지 갈 건지는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김득구의 답은 “끝까지......”였다. 서울로 온 김득구는 그야말로 모든 바닥의 일거리들을 경험한다. 구두닦이, 껌팔이,철공소 공원, ‘빨간책’ 행상까지. 권투는 그의 꿈이었지만 먹고 살기 바쁜 손에 글러브를 낄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고향 사람이 공장인 공장에 취직이 되면서부터 그는 권투에 입문할 수 있었다. 참혹할이만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이런 글귀를 적어 놓았다. “가난은 나의 스승이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검정고시에도 도전해 합격했다. 진정코 그는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맨시니와 김득구의 대결은 과히 관우와 방덕의 대결이었다. 어디서 온 촌뜨기가 나를 상대하겠다고 나대느냐던 관우가 방덕에게 큰코를 다치고 자칫하면 목이 떨어질 뻔 했던 것처럼, 동양에서 온 무명의 도전자는 거칠게 맨시니를 몰아부쳤고, ‘백인의 희망’ 맨시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명승부였다. 3회에 떨어질까 4회에 KO될까하던 김득구가 놀라운 파이팅을 보이자 일요일 점심의 각 가정의 안방과 다방과 전파사 앞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9라운드를 넘기면서 김득구의 체력이 달리는 것이 눈에 보였고, 13라운드에서는 그로기 상태로까지 몰렸다.

그리고 14라운드. 김득구는 판정으로 가서는 가망이 없다는 듯 탱크처럼 밀고 나왔다. 하지만 맨시니는 아직 힘이 많이 남아 있었다. 원 투 펀치가 김득구의 턱에 작렬했고 맷집 하나는 알아준다던 김득구는 그만 링 바닥에 등을 붙이고 말았다. 누가 봐도 경기는 끝난 듯 했다. 그때 김득구가 풀린 눈으로 로프를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일어나지 마라 그냥. 잘했다. 일어나지 마라.” 화장실도 안 가시고 경기를 지켜보시던 아버지의 한 마디. 아마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한국인들은 그렇게 부르짖었을 것이라 믿는다. 두 주먹만이 희망이던 가난뱅이 복서가 놀라운 파이팅에도 불구하고 역부족으로 나가떨어진 순간, 안간힘을 쓰며 일어나려던 순간 그는 많은 이들의 절망과 슬픔을 짊어진 아바타가 됐다. 적어도 그 순간 누구도 “일어나 새끼야. 그거 하나 못 때려 눕히냐?”라고 일갈하는 건방진(?) 한국인은 드물었을 것이다. 물론 그때도 존재했던 ‘1퍼센트’ 소속 귀족들은 제외하고.


그는 경기 후 의식을 잃었고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LA의 교포 한의사들의 침술까지 총동원됐지만 소용이 없었다. 급거 미국으로 날아간 어머니가 미국 법원에서 “내 아들 득구는 죽었습니다.”라고 사망 선고를 내리고 그 장기는 동양계 미국인들에게 기증되었다. 결국 김득구는 관에 실려 고국에 돌아와야 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는 파이트머니 이상의 돈을 벌어들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요즘 물가로 10억원 가까운 돈이 보상금으로 지급됐다. 하지만 그 돈을 둘러싸고 임신한 약혼녀와 이복, 동복 형제들간에 갈등이 빚어졌고 그 속시끄러운 다툼 와중에 “가난이 내 아들을 죽였다.”던 어머니 양선녀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맨주먹 하나로도 가난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리던 한 젊은이가 1982년 11월 14일 오늘 그 마지막 투혼을 불태웠다. 가끔 그를 생각할 때면 더듬더듬 로프를 찾아 움켜쥐고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애쓰던 그의 부어오른 얼굴이 부담스럽게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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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1.15 홍장군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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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07.11.15 홍장군의 봉기

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청산리 전투'를 배웠을 때의 일이다. 손주가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풀어놓는 것을 노래 듣듯 즐기시던 할머니께 '청산리 전투'와 김좌진 장군 이야기를 배웠다고 자랑하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말을 끊으셨다. "청산리는 홍 장군이야. 청산리 싸움은 홍 장군이 한 거라니깐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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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연히 학교의 권위를 내세워 김좌진이 맞다고 우겼는데 평소엔 뭐든 네 말이 옳다 웃으시던 할머니의 결기가 보통이 아니셨다. "네 할아버지가 따라다니던 장군이 홍장군인데 내가 그걸 모르갔니 홍 장군이라니까. 김좌진인가 그 양반도 한몫 했는지는 모르갔지만.". 이야기인즉슨 1899년생이던 할아버지가 팔팔한 만주의 조선 청년이면 대충 그랬듯 독립군에 가담해서 얼마간 따라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부대가 홍 장군의 부대로 청산리 대첩을 이룬 부대라는 것이다. 나는 김좌진밖에 모르는데

수수께끼는 머지않아 풀렸다. 홍장군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오래된 국정교과서의 지식으로는 그는 '봉오동 전투'의 짝이 되는 인물이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과 이범석의 훈공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 그 공훈의 절반 또는 2/3은 홍범도의 것이었다. 청산리 전투는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던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의 연합 작전이었고 일본군을 속아넘겨 자기들끼리 치고박게 만든 신묘한 전략은 홍범도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장군 가운데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싸운 이 중의 하나다. 어려서 고아가 된 후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평양 감영의 군인이 됐고 거기서 사격술과 군인으로서의 기본 자세를 배웠다. 그런데 하도 꼴같잖게 구는 상관을 피양 박치기로 들이받아 버리고는 군인 노릇을 집어치워 버렸다. 이후 머리를 깎고 불제자도 되기도 했으나 무인의 기운을 떨칠 수가 없었던지 낭림산맥과 개마고원 일대의 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즈음 대한제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던 일본은 껄끄러운 가시 하나를 발라내려 든다. 한국인들이 보유하던 총기가 그것이었고 모든 사냥꾼과 포수들에게 총기 수거령이 내려진 것이다.

화승총 하나로 먹고 살던 포수들에게 이는 청천벽력이었고 그렇잖아도 뻗쳐나가던 반일 감정에 불을 붙였다. 그들을 지휘하며 일어선 것이 홍범도였다. 1907년 11월 15일의 일이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콧대를 꺾었던 강원도 포수들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떨어질 리 없는 함경도 평안도 산골의 포수부대는 글자 그대로 '스나이퍼' 부대였던 것이다. 홍범도는 그 대장이었다. 전설같은 얘기에 따르면 "동지들 먼저 가오" 해서 부하들을 앞서 보낸 후 혼자 남아서 저격으로만 수십 명의 일본군을 처치하고 휘적휘적 돌아오기도 했다 한다. 적의 공포는 나의 기쁨, 한인들은 노래를 부르며 홍 장군을 찬미했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일본은 그 아내와 장남을 인질로 삼았으나 홍범도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아내와 아들은 고문 끝에 죽었고 둘째 아들은 전투 중에 죽었다 (경신대참변 와중에 죽었다고도 한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평안도 함경도라면 조선 왕조 내내 차별받던 지역이다. 양반도 아닌 터에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라고는 쥐뿔의 티눈보다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는 악착같이 처자를 잃어가며 없어진 나라 위해 싸웠을까. 민간인을 강간한 부대원을 스스로 총살한 후 자신의 옷으로 그를 감싸 묻은 후 사흘 동안 음식을 받지 않고 슬퍼한 인정 많은 사람이 말이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운동의 금자탑이자 재앙의 팡파르였다. 일본은 경신대참변 등을 일으켜 독립군의 뿌리를 뽑으려들었고 그로 인해 수만의 조선인이 죽온갔다. 독립군은 독립군들대로 안전 지대를 찾다가 참혹하게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기가 꺾였다. (자유시참변).

그 이후 홍 장군도 빛을 잃는다. 한때 레닌에게 권총을 선물받을만큼 투쟁 지도자로 인정받던 그는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하던 스탈린에게 "그놈이 그놈"이었던 조선인의 일원이 되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다. 부하를 잃고 조직을 상실하고 자신이 투쟁할 적마저 잃어버린 홍 장군은 더 이상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낸다. 파르티잔을 잔뜩 미화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을 순찰하고 그 영화를 훔쳐 보면서 홍장군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리고 그 말년 때문에 그는 잊혀진다. 사회주의자인 적도 없었던 그였지만 남한에서 그 행적은 묻혔고 내가 어릴 적 봤던 위인전에서 그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1907년 11월15일 함경도 산골짝에서 포수들을 선동하던 그를 상상해 본다.

"이 종간나 쪽바리들이 우리 조선 아니 대한제국에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갔시요? 이 꼴을 당하고 어찌 살갔소. 둑을 땐 둑더라도 찍하고 죽어야지비. 일어나기요. ". 평안도와 함경도 말투가 반반씩 섞였을 그 말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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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1.16 비인간의 성채 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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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40.11.16 비인간의 성채 게토

유태인들의 거주 구역을 일컫는 게토의 이름은 그 연원이 오래 되었다. 중세 때부터 유럽인들은 유태인들을 격리시켜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살게끔 강조했고 게토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된 것은1516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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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은 모두 게토에 있는 집단거주지에서 공동으로 살아야 한다. 문은 아침에 열리며 자정에 보초병이 닫아야 한다. 자정 이후에 유대인은 밖을 다닐 수 없다. 보초병에 대한 급료는 유대인들이 지불해야 한다.”

종교 외에는 다를 바 없고 , 신앙 이외에는 차이가 없는 이들을 특정 지역에 몰아넣고 외부와의 통행을 금지하고 고립된 삶 속으로 몰아넣는 야만적 격리처를 뜻하는 게토를 세계적으로 익숙한 단어로 만든 것은 나찌들이었다. 그들은 1940년 11월 16일 바르샤바에서 유태인들의 게토를 선언한다 이는 유태인 절멸 계획을 위한 시설이 완공되기 이전의 대기실 격이었고 10만명도 수용하지 못할 공간에 50만명을 밀어넣은 아수라장이기도 했다.

3m 높이의 콘크리트 벽으로 외부와 차단된 게토 안에서는 만성적인 식량난과 전염병이 발생했고 유태인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그를 탈출하려는 유태인들을 막기 위해 1941년에는 총살령이 발동됐고 유태인들의 필사적인 반란이 일어나기 전 이미 12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죽어갔다.

조갑제가 이스라엘의 전 수상 이츠하크 라빈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조갑제는 게토와 강제수용소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이스라엘 수상에게 그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 북한의 만행을 그의 입을 빌려 규탄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의 수용소 실태에 대해 설명하려 든다. 물론 유태인 대량 학살과 게토에 빗대면서. 그때 라빈은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중동 국가더러 민주주의하라고 하지 않소! 그건 그 나라의 문제요. 하지만 유태인 대학살은 한 족속을 절멸시키려는 가공할 시도였소. 무엇도 거기에 비길 수는 없소!". 조갑제는 북한의 수용소 현실도 그에 못지 않다고 항변했지만 라빈의 기세 앞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아픔을 겪은 민족, 그 참담함을 겪은 민족이 오늘날 게토의 주인공이 된 것은 역사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심술이라고 해야 할지. 지난 2002년 6월부터 이스라엘은 총연장 640km 길이의 분리장벽 건설을 밀어붙여 왔다. 동예루살렘을 감싸는 8미터 높이의 이 콘크리트 장벽을 이스라엘 총리는 "테러리스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보안 장벽"이라 불렀다. 나찌스와 똑같은 소리였고 그 장벽 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바르샤바의 게토 안의 유태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게토는 바르샤바에만 있지 않고 팔레스타인에만 부활한 것이 아니다.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게토도 있고 2016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한 브라질 정부는 빈민가를 감싸고 도는 장벽을 건설 중이다. 공사가 끝나면 빈민가는 3미터의 장벽이 포위한 게토가 될 것이다. 그런데 게토는 외국에만 있을까. 우리는 그런 야만에서 자유로울까. 애석하게도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촬영차 한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난감했던 일은 단정하게 동 숫자가 매겨진 아파트들 사이에서 내가 가야 할 동을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디. 어찌어찌 문제의 동을 찾긴 했는데 그때껏 내가 걸어온 길에서는 그 동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없었다. 촘촘하게 심어진 아카시아 나무들을 지나 꽤 긴 걸음을 돌아들고서야 겨우 제보자를 만날 수 있었던 나는 무슨 아파트를 이런 식으로 지었냐고 볼멘소리를 토해 냈다. 그때 제보자 아주머니는 씁쓸하고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기는 임대잖아요. 출입하는 데가 달라요."

대한민국에서 험악하기로 말하자면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을 프로그램의 연출자로서, 눈과 귀에 담기 싫은 풍경과 소리들을 숱하게 접해 봤지만 그날 마주했던 아카시아 담장은 좀체 떨어뜨리기 힘든 악성 종양같은 기억으로 남았다. 한 아파트의 명찰을 달고 있으면서도 출입구가 다르고 다른 동과의 교류마저도 어려운 외딴 동. 그곳은 게토가 아닐까 아닐 수 있을까.

어느 교육열 높은 단지에 이똥처럼 낀 임대주택 단지에 사는 한 학생에게 한 교장이 이렇게 윽박질렀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 “다른 데 가라고. 너 맡을 선생님이 없다고. 우리 학교 애들 기백만 원 과외 기본으로 받는 애들인데 너 때문에 분위기 망가지고 피해 보면 그건 누가 책임질 거냐고.”. 과연 이 아이의 신세는 노란 별 단 유태인보다 낫고 그의 임대주택은 게토에 비해 백만배 행복할 수 있을까. 게토는 1940년 11월16일 나찌가 만든 그곳에 대한 호칭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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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1.17 "김일성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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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1월 17일 "김일성이 죽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7시 30분 등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나오던 내 발걸음은 얼어붙은 듯 멈췄다. 집 앞에 떨어져 있던 호외에 적힌 기사 때문이었다. 그 호외에는 주먹만한 글씨로 이렇게 휘갈겨져 있었다. "김일성 총 맞아 피살" 그때까지 김일성의 실제 모습을 신문에 싣는 것은 금기였다. 그날도 김일성의 사진 아닌 캐리커처가 사망설 기사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었다. 죽었다. 김일성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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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은 무찔러야 하고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해야 하고, 맨주먹 붉은 피로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 되면 반공 포스터에 반공 표어에 반공 글짓기에 반공 연설대회까지 반공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몸으로서 김일성이 총을 맞아 죽었다는 뉴스는 그야말로 머리를 꿰뚫는 충격이었다. 학교 가는 버스 안도 웅성거리고 있었다. "총 맞아 죽었다 카네?" "아들내미가 죽인 거 아니가?" "뭐 김정일도 연금됐다 카던데?"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를 정보(?)의 교환부터 "야 전쟁 나면 우짜노 니 예비군 끝났나?" 하는 현실적인 우려까지 만원버스를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 분위기도 5미터는 허공으로 붕 떠 버렸다. 교문 앞에 항상 서 있던 교련 선생님 '개주디'도 보이지 않았고, 정숙해야 할 자습 시간에 아이들이 와글와글거려도 제지하는 선생님이 없었다. 해방 이후 40년 불구대천의 원수의 대명사가 스러졌다는 흥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듯 했다. 한 놈이 농담조로 외쳤다. "민족의 별이 떨어졌다!" 그러자 저 구석에서 날선 소리가 날아갔다. "시끄럽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한켠에선 제법 전문적(?)인 분석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인민무력부장 오진우하고 호위총국장인가 하는 오백룡이가 싸우다가 김일성이 총맞았을끼라. 그라모 최고인민회의 의장 양형섭은 우찌 됐으꼬? " 고딩들이 그렇게 북한의 고위층을 주워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탤런트 김병기를 스타덤에 올려 놓았던 반공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의 여파였다. 탤런트 김병기가 '뽀글이 파마'의 김정일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누군가 가져온 신문에 보면 김일성이 세상을 하직했던 것은 거의 분명했다. 휴전선 전역에서 인공기가 조기로 내걸렸으며, "열차 타고 가다가 피격 사망하셨다"고 대남방송에 나왔고, 장중한 장송곡이 연방 울리는 것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 죽었을 때하고 똑같으며, 일부 북한 인민군 장교들이 '중공'으로 피신했고 군부 내에 권력 투쟁이 심각하게 진행 중이라는 눈으로 본 듯한 기사가 신문을 메우고 있었다. 조선일보였는데 신문 한켠에는 "세계적인 특종"을 낚았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거기다 국방 장관까지 나서서 그 기사의 신빙성을 일부 확인하고 있었다. 야 이거 참말이구나.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있었다. 휴전선의 대남 방송에선 김일성이 열차 타고 가다가 피격 사망했다는데 평양 방송에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방문 예정이던 몽골 국가 원수가 일정을 중지한다는 소식도 없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눈이 커지고 귀가 쫑긋해졌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 영락없이 죽긴 죽은 거 같은데 그렇다고 죽었다고 확신하기는 좀 애매한 상황이었다. 관건은 몽골 국가원수의 방북이었다. 그때 김일성이 뭔가를 이유로 나오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빵 하고 허탈한 풍선이 터질 일이었다. 마침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던 17일이 지나고 18일이 왔다. 몽골 국가원수가 방북하는 날이었다. 아마 그때만큼 몽골의 국가원수에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일은 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이래 없었으리라.

그런데..... 김일성은 멀쩡하게 나타났다. 기차 타고 총격이고 인공기 조기고 인민군 내부 투쟁이고 뭣이고 모든 사망설은 일순간에 봄볕 받은 눈처럼 사라졌다. 도대체 그 말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누가 그런 거짓말을 지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도 없었고, 되레 조선일보는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적으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분노하면서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에다가 자신들의 오보의 책임을 돌렸다. 아마도 북한은 "남의 수령의 죽음까지 제멋대로 지어내면서 도대체 뭘 노리는지 알 수 없는 남조선 아새끼들의 행태"에 무척이나 의아해했을 테지만.

진상은 무엇일까. 몇 가지 설이 있다. <체험적 기자론>에서 동아일보 기자 출신 남시욱 교수는 "북한군의 선전방송에 나온 다른 사람에 대한 추도문을 들은 우리측 병사가 김일성이 죽어서 추도하는 줄 잘못 판단하여 상부에 보고하자 이것이 김일성 사망으로 확대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북한 방송을 감청하던 미국 병사가 "김일성 수령님 가신 길을 지도자 동지가 따르신다."는 투의 방송을 듣고 '갔다'는 것을 '죽었다'고 해석한 후 확인 요청 표시를 했는데 여기에 실수로 '확인필'로 표기함으로써 미국 정부를 놀라게 했고 이것이 일본과 한국에 역수입되어 김일성 사망설을 낳았다는 얘기도 있다.

분명한 것은 진상이야 무엇이든 1986년 11월 17일 우리는 대단한 쇼를 세계에 펼쳐 보였다는 점이다. 한 나라가 분명하지도 않은 헛소문에 놀아나고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듣고, 뵈지도 않는 것을 보았던 이 분단성 망상 장애는 너무나 웃겨서 슬펐다. 이 망상장애는 또 하나의 거대한 코미디 '금강산 댐'으로 면면히 이어지게 되고 김일성 사망설에 흥분했던 우리 고딩들은 때 아닌 "금강산 댐 규탄 시위"에 동원되게 된다. 그때 우리 반의 구호는 이것이었다. "민족말살 획책하는 수공음모 말도 안돼" 그런데 그래도 데모라고 대학생들을 본떠 마지막 넉 자를 세 번 부르짖었는데 그러자 그 구호는 묘하게 변했다. "민족말살 획책하는 수공음모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열심히 악을 쓰는 내 뒤에서 몇 놈들이 투덜거렸다. "말이 되냐? 씨바." 우리는 참으로 웃기는 세월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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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1.18 을씨년의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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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8일 을씨년의 기독교인 전덕기


...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 '(을사늑약이 맺어진 해인) 을사년스럽다'라는 얘기는 꽤 많이 알려져 있다. 또 어떤 학설이 나와서 그 이전에도 쓰인 기록이 있다고 해서 뒤집을지는 몰라도, 1905년 11월 18일은 실로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기에 족할 만큼 섬뜩한 한기가 돌던 초겨울이었다. 18일 아침이 밝아오기 전 새벽 2시. 일본의 압력과 대신들의 강청에 견디다 못한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문서에 옥새를 내어 준 것이다. 조약 문서에 기록된 날짜는 17일이지만 고종이 굴복한 날, 그리고 조약이 공포된 날은 11월 18일이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식물국가가 된다.


11월 18일 서울 시내는 뒤숭숭했다. 을사조약이 알려지면서 뭇 사람들은 흥분해서 거리로 뛰쳐나왔고 그들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대한문 앞에 꿇어 엎드려 절규했다. 그들은 도끼를 떠메고 있었다. 대개 “역적의 목을 치든지 내 목을 치든지”라는 극단적인 뜻을 상주하는 이른바 ‘도끼 상소’였다. 의병장 조헌이 그랬고 꼬장꼬장의 대명사인 면암 최익현도 써먹었던만큼 일단의 유림들인가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개 기독교인이었고 상동교회라는 교회의 청년회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한 것은 그 교회의 목사 (이 당시는 전도사였다고도 한다.) 전덕기였다.


전덕기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대문 시장 숯장수였던 숙부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즉 그의 어린 시절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친 것은 스크랜튼이라는 감리교 선교사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스크랜튼은 양반 동네에 외국인도 많은 정동에서 교회를 꾸리다가 “민중이 있는 곳” (where people are)으로 남대문 안 상동으로 교회를 옮겨 버릴 정도로 가난한 민중들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기독교인이었고 전덕기는 그로부터 감화를 받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 새로 이전한 상동은 상놈들의 동네였고, 전덕기는 ‘애민구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극빈자들에게 삶의 기반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한다. 여기까지는 전덕기 자신이 "뼈 속까지 닮고 싶다“고 했던 스크랜튼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전덕기는 뼈 속까지 한국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11월 10일 일본이 을사 조약 체결 이전 남산에 대포를 설치하고 덕수궁을 겨냥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무렵 교회에서 구국 기도회를 개최하여 열렬히 기도를 올린다. “나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여 주심을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적어도 “권세 쥔 자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 따위의 망발을 일삼는 그 후배들과는 차원이 다른 목사였다. 그토록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는 평안도 교인들을 조직하여 오적 암살을 모의하고 무장 투쟁을 고무하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가 보기에그는 당연히 목사 옷을 벗어야 하는 사이비 목사였다.


헤이그로 파송되는 이준도 상동교회에 찾아와 그 임무의 성공을 함께 빌었고, 상동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설립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일제에 저항했다. 훗날 삼일 운동 후 조선 총독부에서 나온 보고서는 상동교회를 “조선 독립 운동의 근원”으로까지 꼽았다. 전덕기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 휘하의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교류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들다보면 그 무게감이 짐작이 갈 것이다. 민영환, 이동녕, 이상설, 이승만,이시영,이회영,주시경, 그리고 김구. 거기에 안창호는 호형호제한 사이. 최남선은 “나의 독립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전덕기 목사”라고 했다.

전덕기는 경술국치 후 민족운동의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 후 191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고문 후유증과 결핵으로 인한 병마에 시달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도 마치 바울처럼 편지를 보내는 ‘병상 목회’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필요한 세 가지 물품으로 ‘마른 쑥과 나막신, 그리고 의지---종이로 만든 약식 관(棺)’를 들었다. 그것은 연고 없는 가난한 이가 돌아갔을 때 마른 쑥을 콧구멍에 꽂고 들어가 그를 염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대개 시체 썩은 물이 방안에 그득하므로 나막신이 필요했으며, 그 종이 관에 싸서 망자를 묻어 주었던 자신의 숱한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돌아갔을 때 서울 장안은 슬픔에 휩싸였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모를 초상꾼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관을 잡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가장 슬퍼한 것은 남대문 일대의 거지들 왈짜들, 불한당 소리 듣던 이들이 꺼이꺼이 눈물을 흘렸고 , 기생들도 소복을 입었으며 차별은 없어졌으되 여전히 사람 취급에서 벗어나 있던 백정들도 소울음을 울었다. “우리 선생님이 죽었다.” 상여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 리를 헤아렸다고 한다.


나이 마흔도 안된 젊은 목사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슬퍼한 것에는 마땅히 이유가 있으리라.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해 달라고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고 도끼를 들고 달려나가 “조약을 거두시든지 내 목을 치라”고 자신의 황제에게 호소하던 목사. 대한제국에서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썩은 시신들을 거두는데 이력이 났지만 동시에 산 송장과 같은 매국노의 목숨을 거둘 의거를 계획하던 목사..... 그의 생애를 돌이키면 그 이유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기독교가 그 많은 범죄와 행악, 교만과 횡포 가운데에서도 그래도 기독교로서 남아 있는 이유는 저런 목사가 있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1905년 11월 18일 그 ‘을씨년스럽던’ 날에 한 목사가 도끼를 들고 대한문 앞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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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11.19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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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1월 19일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

1863년 5월 1일부터 사흘간 무려 17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전선을 달리하고 맞섰다. 회색 군복의 남군과 푸른 군복의 북군은 격렬하게 충돌하여 게티스버그 벌판을 시신의 산과 피의 바다로 바꾸어 놓았다. 양쪽의 사상자는 5만, 전사자는 1만을 헤아리는 격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남군은 패배했고 남군 사령관 리는 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워싱턴 공략 작전의 실패를 인정해야 했다. 워싱턴을 점령하거나 압박함으로써 남부의 독립을 인정받으려던 전략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남북전쟁의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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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천 명 남짓이던 게티스버그 주민들에게도 이 전투는 엄청난 골칫거리를 가져왔다. 그것은 들판에 나동그라져있던 수만 구의 사람과 말의 시체였다. 모아 놓고 불을 지르려 해도 너무 많았고 파묻기에는 삽과 손이 동시에 모자랐다. 처음에는 사망자 가족에게 돈을 받고 매장해 주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일부가 이에 반대하여 '국립묘지'를 만들어 줄 것을 청원했고 이것이 수용되어 게티스버그에는 국립묘지가 조성되게 됐다.


그 묘지 헌정식이 1863년 11월 19일 오늘이었다. 원래는 10월 말이었는데 당시 유명한 연설가로서 이 헌정식을 빛낼 연사로 섭외된 에드워드 에버렛이 "연설문을 준비하기엔 너무 짧다."고 하여 11월 19일로 연기된 것이었는데 장례 준비 위원회는 이 일정이 확정된 후에야 백악관의 주인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국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행사의 의의를 명확히 할 몇 마디 헌정사를 짤막하게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즉 ‘참석’을 전제로 하고 몇 마디 덕담 정도면 감사하다는 뜻이었다.


당일 에버렛은 두 시간 동안이나 열변을 토하면서 사람들을 쥐었다 놓았다 했다. 역시 웅변가다웠다. 그 뒤를 이어 링컨이 단상에 올랐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껑충한 키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연설은 주최측의 부탁대로 짧았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려는 즈음 끝이 나 버렸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칠 경황도 없었고 그 내용에 감동할 여유도 부족한 연설이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그 연설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웅변가 에버렛도 있었다. “나의 두 시간이 당신의 2분만큼 핵심에 접근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입니다.”


링컨은 어린이들이 익히 외우는 것처럼 ‘정직한 에이브’만은 아니었고, “어떻게 흑인과 백인이 섞여 살겠는가? 아프리카로 가는 게 어떤가?”하고 흑인들에게 권유하고 “노예제도를 고수해서 연방이 유지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공언한만큼 ‘신실한 노예들의 해방자’도 아니었으며, 남북전쟁의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서부로 병력을 돌려 인디언들을 내몰았던 차가운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링컨의 이 연설은 두고두고 곱씹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링컨 개인의 사고를 넘어서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선포한 연설이기 때문이다.


“여든 하고도 일곱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자유 속에 잉태된 나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믿음에 바쳐진 새 나라를 이 대륙에 낳았습니다.......(중략)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세상은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용사들이 이곳에서 한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살아남은 이에게 남겨진 일은 오히려, 이곳에서 싸운 이들이 오래도록 고결하게 추진해온, 끝나지 않은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남은 일은 오히려 명예로이 죽은 이들의 뜻을 받들어, 그분들이 마지막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신의 가호 아래, 이 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그리고 인민들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죽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연설문을 옮기면서 잠깐 고민을 했다. ‘인민’이라는 단어가 쓸데없는 시빗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었던 유진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단어 ‘인민’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빼앗겼다고 탄식했다. 링컨이 표현한 'people'에 가장 어감아 들어맞고 뜻도 의젓한 단어 ‘인민’은 ‘국민’이라는 일제 냄새 풀풀 풍기는 단어로 대체당해야 했다. 함부로 그 말을 쓰다가는 제 명에 죽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세월이 우리 위로 수십 년이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지만 존엄한 우리 ‘인민’은 일상적으로 쓰던 말조차 압수당하고 잃어버려야 했다.


그 뿐이 아닐 것이다. 66년 전 “자유 속에 잉태된” 해방된 새 나라를 꿈꿨던 이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세력과 그에 대항한 이들의 게티스버그는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에 허다하게 등장했고 많은 이들이 그 폭정과 저항의 와중에서 죽어갔다. 거기엔 남과 북이 따로 없다. 제 나라 정부의 총칼에 죽어간 인민들이나 제 나라 정부의 미욱함 속에 굶어 죽어간 인민들이나 모두 인간에 대한 억압과 인간에 대한 존엄함이 겨루는 ‘우리들의 게티스버그’의 희생자들이 아니었을까.

“그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신의 가호 아래, 이 땅에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며,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가 지구상에서 죽지 않도록 하는 것.” 링컨이 무슨 생각을 했든 이 명제는 언제 어디서 듣든 가슴 한 켠을 뭉클하게 한다.


인민이란 존엄한 인간의 합일 것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 개개인의 집단이며, 그에 반하는 모든 형태의 억압들, 즉 이익이나 이념이나 목표를 위해 인간의 존엄을 폐기하려는 모든 움직임들에 대하여 저항하는 사람들의 연합일 테니까. 그를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뜻에 맞게 ‘새로운 자유’를 형성하는 것이 민주주의일 테니까. 그렇게 될 때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는 걸음마를 시작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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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1.20 독립문 앞의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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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1월 20일 독립문 앞의 이완용

독립문이 1897년 11월 20일 세워진다. 새 임금이 즉위하면 책봉 칙서를 가지고 오는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문을 헐어버린 터에 독립문이 선 것이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한 양식에다가 조선의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과 태극기를 새긴 ‘독립문’은 그로부터 지금까지의 이그러진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는 증인이 된다. 독립신문은 영어판 사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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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구미 열강으로부터의 독립도 의미하는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독립문 낙성식 때 가장 빛난 사람은 다름아닌 이완용이었다. 초대 독립협회장으로서 축하 연설을 했고 독립문 상단의 '독립문' 글씨는 명필로 이름난 그의 것이었다.

어려서부 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여색을 멀리하고 한학과 서예에 밝은 반듯한 선비로 자라난 그는 궁벽진 왕국에서 보기 드문 인재라 할만했다. 외교관으로 미국에 나가 국제 감각을 익혔고, 넉 달 정도의 학부대신 재임기간 성균관을 개편하고, 소학교령과 한성사범학교 규칙을 공포하여 우리 교육사에 확연한 자취를 남길 만큼 행정 능력도 있었다. “외국 사신 한 사람이 정부에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달라 하여 그때 내각에 있는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있었다. 이완용씨가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해 주지 못하겠다고 정정당당히 말한 고로, 그 외국 공사가 이완용씨를 좋아하지 않아 매우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다.”(독립신문 기사)고도 하니 그렇게 흐물흐물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미국 주재 외교관을 지냈고 미국에 각별한 호의를 드러냈으나 을미사변 후에는 친러파로 변신하여 아관파천의 주역이 됐다. 적어도 이때의 이완용은 일본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퇴한 뒤에는 친일파에 합류한다. 그것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판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맑은 덕과 중한 물망의 소유자“이자 “대한의 몇 안되는 명신”으로서 그는 대한제국의 ‘국익’을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조카가 남긴 그의 일대기 ‘일당기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 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그랬다. 그는 항상 ‘합리적’으로 생각하고자 애썼고 ‘실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적당함’을 추구했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합리적인 사고와 실리의 추구는 한 나라를 없애 버린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기대는 것은 합리적인 일이었고, 약한 나라가 끝내 힘을 얻지 못하면 강한 나라에게 굴복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을 막겠다고 쓸데없는 피를 흘리는 일은 지극히 불필요한 낭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독립문 건립 기념식에서 열변을 토한다. “조선이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고 말이다. 언뜻 당연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만약 제대로 못하면 남의 종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숨어 있었고, 그는 결코 그 종됨을 거부하여 목숨을 걸 생각이 없었다. 사세부득이할 경우 ‘합리적 판단’을 통해 강자의 편에 붙는 것은 그 평생의 습관이었고 그는 그대로 행동한다.


그는 세상에서 처신하기 힘든 처지 세 가지를 얘기한 바 있다. 파산한 회사의 청산인, 빈궁한 가정의 주부, 그리고 쇠약한 국가의 재상의 처지가 그것이다. 자신이 그만큼 괴로웠다는 투의 이야기지만 그 셋은 ‘사람이 하기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노릇의 주역이 되기도 한다. 회사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재산만 빼돌리려는 청산인과 애새끼를 굶어죽어가는데 샛서방 코빼기만 쳐다보는 주부와 쇠약한 국가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고 지레 포기하고 제 살길 찾는 재상은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이들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완용이 그였다. 똑똑하고 영특하며 강단도 적당한 애국심도 있었던 그였지만 “사세가 부득이할 경우” 그 지혜는 자신의 나라에 대해 냉정하고 비정했다. 오늘날 ‘뼈 속까지 친미’인 사람들의 ‘애국심’과 ‘능력’은 그렇지 아니하리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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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11.21 원조 조폭 장군의 아들 김두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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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1월 21일 원조 조폭 장군의 아들 떠나다.


얼마 전 임권택 감독이 배우 신현준을 두고 "<장군의 아들> 시절 하야시 역을 맡은 신현준이 일본어를 못해서 징징 울었다." 회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보니 매서운 눈빛에 검은 하오리를 걸쳤던 그 양아치 두목이 '하야시' 신현준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신현준은 그렇게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필요가 없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맞수였던 하야시, 종로를 장악한 김두한과 겨뤘던 명동패거리 두목 하야시는 사실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처럼 김두한과 앙숙 관계도 아니었다. 충돌도 있었지만 대개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김두한과 이권을 나누기도 했다. 세상사 대부분이 그렇듯 알려진 바...와 그 속...내는 다르게 마련이지만 김두한의 경우는 그 간극이 매우 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일단은 '장군의 아들'이라는 타이틀부터가 논란의 대상이다. 물론 김좌진의 어머니와 본처까지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하고, 안동 김씨 족보에도 올라 있는 마당에 그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길만한 증거는 없다. 그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김두한 본인이다.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으니 자신의 양할아버지는 김옥균이라고 주장한 것도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김두한만 알고 주장하는 것이므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시간적 배경도 뒤죽박죽이니 지금 이 양반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 참말을 하는 건지조차 헛갈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는 깡패였다. '협객' 이니 '야인'이니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결국은 깡패였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보면 독립군이 되기 위해 만주로 떠나려는 김두한에게 "종로의 상권을 지키는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설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상권을 '지켜주는' 댓가로 상납을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유구한, 조폭이라는 이름의 양아치들의 생존 방식이다. 드라마 <야인시대>가 인기를 끌 무렵, 김두한의 후배 '야인'들이 제작 현장에 초대된 적이 있는데 그 야인(?)들 가운데는 70년대 명동을 장악했던 '신상사파'의 두목 신창현도 있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김태촌 조양은 등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들이 등장하게 된다. 결국 김두한은 깡패였다.

그는 깡패답게 단순했고 잔인했다. 그가 좌익세가 우세하던 국군준비대를 습격하여 1300명을 죽였다고 떠든 것은 단연코 허풍이지만, 전평 파업 당시 파업 대오가 있던 용산역을 습격, "‘죽창으로 전평(좌익의 전국노동자평의회) 대원을 죽이고 묻은" 것은 사실이었고, 46년 10.1 대구 봉기 때는 청년단을 이끌고 대구로 가서 악명을 떨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절친한 친구였으며 좌익쪽의 주먹이었던 정진영까지 살해하고 만다. 살인극을 일삼다가 미국 군정에 체포된 그는 사형을 선고받지만 장택상 등의 비호로 살아남는다.

머리는 비상했다고 하지만 그 비상함을 가려버릴만큼 단순한 성품이었던 그는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로 알았고 우익들은 김두한이 칼을 휘두르고 죽창을 쑤시고 돌아오면 "김 동지! 당신이 나라를 구했소"(장택상) 하며 그 단순 무식 과격한 깡패의 기를 돋궈 놓았다. 이는 그 후 정치인들이 깡패들을 동원할 때 "나라 위해 큰 일을 해 보지 않겠나?"라고 회유하는 그 방식 그대로다. 볼짱다본 깡패들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 것도 당연한 과정인데, 김두한도 그랬다. 칭찬을 기대하며 이승만에게 불려간 그는 "사람 좀 그만 죽이게." 하는 핀잔을 듣고 배신감에 치를 떤다. 칼자루를 쥔 손이 칼더러 "피 그만 봐라."고 다그치는 격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전쟁 이후 그의 우직함은 150도 (180도까지는 아니니)로 바뀌어 빛을 발한다. 김두한은 "나는 무식하다. 하지만 인생은 영원한 미완성이 아닌가." 하는 너무나 솔직한 유세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지만 당선 3일 만에 감옥에 갇힌다. 이승만 정권을 선거운동 도중 정면으로 비판한 괘씸죄에 걸렸던 것이다. 정계에 발을 디딘 후 그의 행적 역시 '김두한스러운' 것이었다.

적어도 국회 단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데리고 있는 측근자들은 모두가 일제 관료출신들이니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의 보스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놈의 경찰 밀정 해먹던 놈,민족반역자 친일파를 두둔하여 독재의 성을 쌓고 아부 잘 하고 간계 잘 부리는 악질 간성모리배들만 살찌우고 있으니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두목은 이승만 대통령이다."고 속 시원하게 퍼부은 사람은 김두한 밖에 없었고, 정부 관료에게 똥물을 퍼부으며 성토했던 행동 역시 '깡패' 김두한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악하고 거칠었지만 결코 야비하지 않았다"는 전 통일부총리 권오기의 회고는 그의 삶을 잘 표현한 듯 싶다. 노동자들의 파업 대오를 습격하여 주변에 기름을 붓고 태워 죽인다고 협박하여 주동자를 가려 내고 그들을 죽창으로 꿰뚫어버린 잔인함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칼자루 쥔 손에 휘둘리는 칼이었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을 눈깜짝 않고 '생화장을 시켰던' 냉혈한이지만 독립 지사 연금을 통째로 보육원에 갖다 맡기기도 했고, 이념이 갈린 죽마고우를 때려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고학생을 만나면 입고 있던 양복을 훌러덩 벗어주며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던 큰형같은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질풍에 휘말려 버린, 그리 생각은 깊지 못했으나 비열하게 머리를 쓰는 법 또한 알지 못했던 한 사내가 1972년 11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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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1.22 케네디의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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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JFK의 마지막 날에

존 피츠제랄드 케네디. JFK의 운명은 1963년 11월 22일 끝을 맺는다. 달라스를 방문 중이던 케네디는 오스왈드의 총에 (또는 또 다른 암살자의 총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 암살을 둘러싼 온갖 미스테리와 음모론은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JFK"를 비롯하여 온갖 영화나 출판물들이 질릴 정도로 소개하여 왔던 바 말하지 않기로 한다. 분명한 점은 많은 미국인들이 이 젊은 대통령의 죽음을 극심히 슬퍼했고 누군가 자신들의 영웅을 앗아갔다는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가져 왔다는 점일 것이다.

젊고 탄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케네디는 형편없이 쇠약한 몸이었고 온갖 병을 지고 사는 가운데 카톨릭 신자로서 종부성사를 받은 것 (즉 생명이 위독했던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노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태양처럼 빛나는 과거 하나가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 출신으로는 가장 성공한 집안에 들 케네디 가문의 조지프 케네디의 9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야말로 귀족으로 자라났다. 돈이라면 100달러 지폐를 쌓아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올릴 집안이었고, 빽이라면 록키 산맥같은 배경이 둘러쳐진 케네디 가문의 형제들이었지만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장남 조지프부터 전쟁터로 달려간다.


그는 사망률이 아주 높은 공군의 비행기 승무원으로 근무했고 결국 탑승한 전투기가 폭발하면서 유해도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때문에 현역 복무를 해야 한다고 해도 워싱턴의 최고 사령부에 근무하거나 주 방위군 정도에서 떳떳하지만 안전하게 군 생활을 하게 만들 능력은 너끈히 되고도 남는 케네디 가의 장남이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둘째 존은 한 수 더 떴다.


그는 대학 시절의 방탕함으로 인해 성병도 앓았고 불치병에 가까운 에디슨 병도 갖고 있었으며 허리에도 이상이 있었다. 생명보험 영업사원도 그를 거부할 정도로 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미국이 이런 약골을 현역으로 배치하여 싸우게 할 만큼 인적 자원이 빈곤한 나라도 아니었으니 존은 현역으로 갈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빽을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용한다. 아버지의 힘은 잘해 봐야 ‘7급 재검’(한국식으로 말하면)이 분명한 그를 우수한 1급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는 해군 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를 위해 해군 정복 입고 폼 내는 사진이 필요했다면 하와이 진주만쯤에서 육상 근무를 하거나 항공모함 정도 타 주면서 생색을 내도 충분했을 테지만 케네디가 탄 배는 PT109라고 불리는 초계정이었다. 말이 초계정이지, 어뢰 몇 발과 기관총을 실은 이 배는 ‘목선’이었다. 미국 태평양 함대가 궤멸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만든 일종의 ‘위장함대’였다. 구태여 대포 같은 거 쏘지 않아도 강철로 된 군함이 그저 부딪치기만 하면 반쪽이 날 뿐인 나무 판자 배였다. 존 F 케네디가 탄 배도 일본 구축함에 의해 두 동강이 난다.


목선이니 두 동강이 나도 반쪽은 물에 떠 있었다. 거기에 매달려 있다 보니 해류가 일본이 점령한 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충돌 시 사망한 이들을 제외한 생존자들은 물에 뛰어들어 다른 섬을 향해 헤엄쳐 가기로 한다. 항해 중에도 아픈 허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존은 세상에 부상당한 부하의 구명 조끼 끈을 악물고 수영했다. 그렇게 그는 수 마일을 헤엄쳤고 부하들 전원을 살려 내는데 성공한다.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후 이 사건을 취재하던 한 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그 생존자들이 이 “사랑스런 중위”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고, 언제 그가 출마할 지에 대해 내기까지 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생존 부하들의 기대대로 존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1963년 오늘 미궁 속에 빠진 살인자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그의 마지막 날에 나는 그가 왜 죽었나보다는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를 생각하고 우리의 현실을 찝찝한 눈초리로 돌아보게 된다.

물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자는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한 유명한 마초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망발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으며 병역필 유무가 또 하나의 차별의 이유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만, 가장 위험한 임무를 가장 앞장서 수행했던 미합중국의 젊은 도련님과 ‘행방불명’으로 군대를 가지 ‘못한’ 이유로 “영장을 받은 어머니가 문맹이어서”라는 핑계를 대고 누우셨던 여당의 전직 대표나 그 외 수두룩 빽빽한 ‘면제자’ 분들이 대비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상어가 득시글거리는 남태평양에서 부하의 구명 조끼끈을 이에 물고 필사적으로 헤엄치며 힘을 내라고 부하들을 독려하던 그 순간은, JFK의 인생에서 가장 찬연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임무를 다했던 젊은 장교는 대통령이 됐고, 오늘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설문 한 조각으로 그의 죽음을 기린다. 비록 그 자신도 베트남전이라는 지옥문을 열어젖힌 당사자로서 이 연설문에 ‘부합’하지는 못하였으나.

“나는 미국의 위대함을 바라봅니다. 군사력이 도덕적 억제력에 부합하고, 부가 지혜에 부합하고 권력이 목적에 부합하는 미래입니다..... 예술적 성취 수준을 높이고, 국민 모두를 위해 문화적 기회를 확대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비단 힘 때문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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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11.23 필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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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7년 11월 23일 <우상과 이성> 필화 사건

1977년 11월 23일 쌀쌀한 초겨울 아침 한 이발소 앞에 건장한 사내들이 진을 쳤다. 그들은 이발소 안을 흘낏흘낏 들여다보며 한 중년 신사의 이발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발이 끝나자마자 사내들은 중년 신사를 둘러쌌다.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사내들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직원이었고, 중년의 신사는 한양대 해직 교수 리영희였다.
...

<전환시대의 논리>로 파장을 일으킨데다가 <8억인과의 대화>로 역린을 건드리는 바람에 미운털이 박힐 대로 박혀 있던 리영희 교수가 1977년 11월 초, <우상과 이성>이라는 평론집을 냈고 이것이 날개돋친 듯 팔려 나가자 드디어 당국이 그 성마른 성미를 견디지 못하고 칼을 뺀 것이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책의 서문처럼 그는 예상은 했지만 그를 뛰어넘는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첫 번째 필화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금방 풀려나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북한 대표가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우리말로 했다는 것이 작년 겨울 한때 화제가 되었지만, 긴 눈으로 높은 차원의 '효능'을 생각할 때,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떠나서 같은 민족으로서 이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으니 대역죄와 맞먹는 반공법 위반이었고, 모택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에드가 스노의 평을 옮겨다 놓은 것도 역시 그놈의 반공법 위반이었다.


한 달 가량 대공분실과 검사실을 오간 뒤 기소되던 날,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맞게 된다. 구속되는 길에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왔던 어머니가 여든 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영전에 분향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안팎에서 애끓는 호소를 했지만 잠시의 틈도 허용되지 않았다. 리영희는 사과 한 알과 관식, 그리고 김지하가 보내 준 사탕을 놓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지금 이곳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동안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소리와 몸짓을 늘 듣고 보는 듯 하였습니다...” 혼자 쓰고 읽은 아들의 제문은 흩뿌려진 눈물에 이곳저곳이 번져 있다.


몇 년 뒤 다시 감옥에 들어간 리영희는 뜻밖의 인물에게서 호출을 받는다. 베테랑 대공 수사관이라는 그는 중장정보부에서도 <우상과 이성>등의 책만 가지고는 반공법 공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을 자신이 청와대까지 직소해서 바꿔 놓았고 어머니 영전을 지키지 못하게 한 것이 자신이노라 자랑한다. 그의 둘째 손가락 마디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30년 동안 펜대를 잡고 빨갱이 잡는 조서를 밤낮으로 쓴 유물이 바로 이 뚝살이오.” 그의 이름은 박처원이었다. 바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때 조작을 주도한 이로서, 고문 경관에게 니들이 뒤집어쓰라면서 2억을 내줬던 인물이고 카지노 대부 전낙원에게서 돈을 뜯어내 이근안에게 쥐어주면서 도피를 지시한 바로 그 작자다.


빨갱이의 공포가 아무리 지대했다고 해도, 전쟁의 상흔이 하늘을 가르도록 지독했다고 해도, 전쟁 뒤 대한민국을 사로잡아 온 ‘반공’의 광기는 야만의 혐의를 벗기 어렵다. 야만의 거친 손길은 엉성하고 추하기 이를데없는 우상을 빚었고, 우상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이성의 허리를 꺾고 머리를 깨뜨렸다. 빨갱이들을 “수천 명 골로 보낸” 것을 자랑하던 박처원과 그가 총애했던 이근안은 그 우상의 사제이고 졸개였다. 그들과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식이 없으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라”고 선언하면서 우상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리영희의 존재는 글자 그대로 “우상" 앞의 " 이성”일 뿐이었다.


리영희가 깨뜨린 우상 가운데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우상이 있다. UN 결의 제 195호 Ⅲ의 2항에 따르면 "(유엔) 임시위원단이 감시 및 협의할 수 있었고, KOREA 인민의 과반수(Majority)가 거주하고 있는 KOREA의 ‘그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행정권과 사법권을 갖는 합법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 이 정부가 KOREA의 ‘그 지역’의 유권자의 자유 의사의 정당한 표현이며, (유엔) 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선거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정부가 KOREA의 ‘그 지역’에서의 그와 같은(such)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한다."고 되어 있는바, UN은 대한민국은 선거가 실시된 ‘남한 지역’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만을 선언했을 뿐이었다.


즉, 대한민국 정부가 ”UN이 승인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되뇜은 잘못된 주문이고 공허한 아우성이었던 것이다. 우상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교과부는 부득부득 이 우상을 교과서에 모시고자 하고, 학자라는 분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신묘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리영희에 반박한다, ”미국이 소련의 위상을 고려해 ‘총선이 가능한 지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표현했지만 북한은 총선을 거부했기 때문에 실질적 의미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맞다”는 것이다. UN이라는 국제 기구의 공문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저런 독심술을 동원할 수 있고, ‘실질적 의미’를 창출하는 저 유능함 앞에서 나는 리영희에게 자신의 이력을 자랑하던 박처원을 떠올린다. 우상과 이성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제 나라 국민의 이유 있는 항변에 "극소수 반미분자"의 딱지를 붙이고, 안보를 위한 것도 시간을 다투는 일도 아닌 '잘 먹고 잘살자는 협정'을 힘으로 빌어붙여 놓고도 "역사의 새 장이 열렸다."고 외치는 우상이 오늘 새롭게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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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24 어느 영부인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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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97년 11월 24일 어느 영부인의 일생

... 웬만한 이들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이름을 꿸 수 있다. 지금 대통령이 17대이긴 하지만 워낙 이승만과 박정희 둘이 몇 대씩 자리를 차고 앉았던만큼 실상 대한민국 대통령 수는 10명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신문깨나 보고 낫살이나 먹은 사람들이라면 그 부인들의 존함까지도 댈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 품위 넘치는 '영부인'의 전형이지만 가끔 청와대에서 '육박전'을 벌이셨다는 육영수 여사, "내 남편을 보면 링컨이 생각이 나요."라고 사람을 웃기셨던 이순자 여사, 조용한 것 같지만 베갯머리 송사에 능했다는 전설이 서린 김옥숙 여사, 아들 김현철이 구속될 때 말고는 대통령에게 정치적인 부탁을 한 적이 없다고 전해지는 손명순 여사, 좋은 아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남편의 평생의 동지에 더 가까웠던 이희호 여사,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누라를 버리란 말이냐?"는 남편의 연설에 눈물 흘렸던 권양숙 여사,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할 때 왼손을 오른쪽 가슴에 대는 파격을 선보이셨던 김윤옥 여사까지. 그런데 대충 다 든 것 같지만 두 명이 빠져 있다. 최규하 대통령의 부인 홍기 여사와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그분들이다.


남편들이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군인들의 등쌀에 밀려났기에 부인들의 존재감도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의 일생은 그렇게 스쳐 지나갔던 영부인의 하나로 기억하기에는 결코 녹녹지 않은 역사를 휘감고 있다.


우선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신학자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눈에 거슬려 투옥당하고 고문을 받은 적도 있는 당찬 여성이었고, 해방 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에 유학을 갈 꿈에 부푼 학구파였다. 즉 결혼 따위는 애시당초 그녀의 뜻 밖에 있었다. 그런데 애를 둘 씩이나 둔, 열 네 살 씩이나 연상의 홀아비가 그 앞길을 막는다. 초대 서울시장 윤보선이었다.

공덕귀는 애초에 마음이 없었던지라 윤씨 가문에서 보내오는 매파를 매번 물리쳤는데 그녀의 후원자 노릇을 하던 목사가 유학 자금을 들고 잠적하는 사태를 만난다. 목사는 공덕귀가 미국 유학을 떠나는 것보다 윤보선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금도 안국동 정독도서관을 가는 길목에 좌정하고 있는 윤보선 가의 아흔아홉간 기와집은 그녀에게 일종의 귀양처와 같았다. 활달하게 걷던 걸음걸이마저 조신조신하게 교정을 당했다고 하니 알쪼다. 그래도 남편 사랑 받으며 아들 둘 낳고 삶을 채워가던 그녀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별안간 '영부인'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남편이 정치인이었지만 유세현장 한 번 나가 본 일이 없었고, 관저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안국동 집에서 살면 안되냐고 물을 정도였다. 윤보선 대통령 시절 내내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기도밖에 없었다. 스스로 "조롱 안의 새"라고 표현한 시절.


하지만 '공덕귀 여사'의 이름이 빛을 발한 것은 남편이 대통령의 직을 잃은 뒤였다. 특히 남편이 정계에서 은퇴한 뒤에 공덕귀 여사는 그야말로 독수리처럼 날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얼어붙은 유신 이후 1974년 5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 자리를 맡으면서부터 공 여사는 영부인 출신의 민주투사로 자리잡는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윤 전 대통령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자 이를 계기로 여사는 ‘구속자 가족 협의회’ 회장이 되었다.


공덕귀 여사는 가장 위험한 시위 현장을 골라 돌아다녔다. 그것은 그래도 '대통령 영부인'을 함부로 다루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맨 앞에 서서 경찰의 방패를 가로막았고 휘두르는 몽둥이 앞에 머리를 디밀었다. 그녀가 생전에 가장 가슴 아파했던 사건은 인혁당 사건이었다. 대법원 판결 하루 만에 8명의 목을 매달아 버리고 시신조차 내주지 않은 콜로세움같은 야만의 현장에 분노한 그녀는 동토의 공화국 곳곳을 뛰어다니고 호소하고 울부짖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급기야 대통령 영부인이라고 피해 가지 않는 험악한 욕설과 발길질 앞에서도 공덕귀 여사는 한결같이 거리에 나왔다.


하루는 단 8명의 여자만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데 갑자기 후배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공덕귀 여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지나는) 버스 탄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 그럴까."

아마 여사도 자신의 일생을 종잡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망한 나라의 군인의 딸로 태어나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의 고통을 눈으로 보고 자랐고, 가난한 전도자의 아내가 되었다가 궁핍 속에 죽어간 언니를 앞서 보내야 했고, 오랫 동안 키워온 신학자의 꿈에 부풀던 중 갑자기 아흔아홉간 대갓집의 맏며느리가 되어 대통령 영부인까지 올랐던 사람, 그리고 늘그막에야 자신이 함께 하리라 맹세했던 낮은 자들,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서 거리에 선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뭐라 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마지막 혼돈은 남편으로부터 왔다. 광주 항쟁을 거친 후 집권한 전두환은 온갖 감언이설로 윤보선을 꼬드겼고, 노욕이 들었던지 치매가 왔던지 윤보선은 덥석 그 말에 넘어가 버렸던 것이다. 공덕귀는 두 아들과 합동으로 "제발 가만히 계시라."고 말렸지만 여든 노인 윤보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강원룡 목사가 자서전에서 자조적으로 언급한 바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 (윤보선 천관우 지학순 강원룡- 유신 시절 그렇게 용감하다가 5공 이후 기묘하게 변했던 이들)"의 선봉이 된 남편 때문에 그녀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는다. 민주화운동의 동료들이 제 집처럼 드나들던 안국동 집을 멀리 하고 발을 끊게 된 것이다. 아마 그녀는 그즈음에도 “대체 사람들이 나더러 뭐라고 할까.”라고 독백하지 않았을까.


1997년 11월 24일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여사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탄식하며 말년을 보냈다 한다. 그러나 사람이 꼭 무엇을 이루어야만 잘 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어울리는 퍼스트 레이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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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11.25 나는 자유로운 시민이다 - 헐리우드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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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1월 25일 "나는 자유로운 시민이다" 헐리우드 텐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신고하자" 7-80년대 삼천리 방방곡곡 어느 두메산골이나 깡깡어촌이나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표어다. 그런데 이 가공할 신고 정신(?)은 전쟁을 치른 분단국가, 군부 독재의 히스테리가 가득하던 나라 고유의 특산물만은 아니다. 세계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신성시되고 그것을 자기네 나라의 정체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미국에서도 저 표어와 비슷한 '신고 정신'이 깃발을 날릴 때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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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 내내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막대한 양의 미제 물품들이 소련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분홍빛 햄 '스팸'은 러시아 인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다. 미국이 대 소련 물자 지원을 선언한 순간 미국 주재 소련 대사는 환호하며 외쳤었다. "이제 우리는 전쟁에 이긴다!" 하지만 절대절명의 적 독일이 쓰러지고 일본도 두 손을 든 순간부터 양국은 서로에 대한 경계와 적대의 눈초리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내부의 국민들도 덩달아 새로운 적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 주된 과녁이 된 것은 젊은 예술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던 미국 공산당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3년도 되지 않은 1947년 10월 헐리우드에서 각각의 업무에 종사하던 43명에게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 Committee) 에 나와 증언할 것을 명하는 출두 요구서가 날아갔다. 43명은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거나 그렇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위원회 이름 자체가 가관이다. Anti - America도 아니고 Un-America다. 일본인들이 말 안듣는 조선인들에게 '비국민(非國民)이라고 우기던 걸 알았던 것일까, 이 '비미위원회'는 일제 파쇼 당국이나 할 '조사'를 시작했다. 43명이 "작품을 통해 순진무구한 대중을 의식화시키려 했을 가능성"에 대한 조사였다.

43명 중 19명이 증거 제출을 거부했고 11명이 소환됐는데 막판에 저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입장을 바꿔 조사위원회에서의 증언을 수락한다. 남은 것은 10명이 됐다. 알바 베시, 허버트 비버만, 레스터 콜, 에드워드 드미트릭, 링 라드너, 존 로슨, 알버트 말츠, 새뮤얼 오르니츠, 애드리안 스코트, 달턴 트럼보.

이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과거 우리의 고문기술자들이 "너 북한이 좋지?"라고 물었던 것처럼. "당신은 공산당원을 현재 알고 있거나 과거에 알고 지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여기서 모른다고 하면 그것이 거짓임을 입증할 태세였고, 알고 있거나 알고 지낸 적이 있다고 하면 그를 '신고'하라는 강요였다. 인간의 양심의 밑바닥을 헤집는 갈고리같은 질문이었다. 헐리우드 텐은 여기에 저항한다. 어떤 이는 조사위원회에서 대답 대신 미국 수정 헌법 1조를 유장하게 읊는다. "의회는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청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 수십 년 뒤 어느 나라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을 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처럼.

'헐리우드 텐'은 의회 모독죄로 기소됐다.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고 1947년 11월 25일 오늘, '미국 영화 협회'는 마침내 그 10명의 이름을 일일이 읽어 내리면서 이들이 "의회모독죄를 면하지 못하고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선언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헐리우드에서 밥줄이 끊길 것이며 회원 가운데 누구도 그들을 고용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한다. 헐리우드 블랙리스트의 탄생이었다.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배우협회장 로널드 레이건과 게리 쿠퍼, 로버트 테일러 등은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모여 ‘우리 영화인들은 공산주의자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기관이나 단체의 회원과는 앞으로 일체 공동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못박는다.

헐리우드 텐은 영화계에서 추방됐다. 혹자는 가명을 쓰기도 하고, 또는 유럽으로 가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10여년 간 헐리우드에서는 완벽하게 추방됐다. 그러나 그 숨막히는 분위기에서도 이것은 미국이 아니라고 분연히 일어나 항의한 사람들이 있었다. 요즘의 한국식 영어로 하면 "소셜테이너", 존 휴스턴 감독과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 로렌 바콜은 워싱턴을 행진하며 헐리우드 텐의 양심의 자유에 대한 탄압에 항의했다. 그들이 외친 것도 수정헌법 1조였다.

블랙리스트는 1960년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각본자가 헐리우드 텐 중의 하나인 달톤 트럼보임이 밝혀짐으로써 힘을 잃는다. 원래 금기는 무너지기 시작하면 모래성만도 못한 법이다. <스파르타쿠스>에서 트럼보는 개인의 양심을 무너뜨리는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한다.

로마 장군이 패배한 노예군을 앞에 두고 의기양양하여 "누가 스파르타쿠스냐? 그만 죽이고 다 살려 주겠다."고 호언한다. 누구 하나를 턱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유혹 앞에서 노예들은 저마다 일어나서 외친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그리고 그들은 노예로서 살지 않고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는다. 트럼보는 이 대목을 쓰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한 마디만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양심을 위해 버텼던, 자신을 포함한 10명의 동료들의 영상이 HD 화질로 눈 앞을 흘러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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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11.26 4전 5기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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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77년 11월 26일 4전 5기의 신화

세상에는 믿기 힘든 일이 종종 벌어진다. 만화가인 내 친구가 들으면 화를 낼 얘기지만 미안함을 무릅쓰고 표현을 하자면 ‘만화 같은’ 일들이 눈 앞에서 버젓이 펼쳐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1977년 11월 26일 파나마에서 벌어진 일이 그랬다.

그곳에서는 WBA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 결정전이 열리고 있었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온 홍수환은 갓을 쓰고 링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파나마 사람들은 비라도 오면 머리 죄다 젖어 버릴 것 같은 기묘한 모자를 쓴 동양인에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벼락같은 함성으로 체육관을 덮어 버렸다.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졌던 카라스키아가 등장한 것이다. 11전 11승 11 KO승,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진 적 없는 공포의 주먹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1라운드는 탐색전으로 끝났지만 2라운드부터 카라스키아의 주먹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왼손잡이였던 카라스키아의 왼주먹에 제대로 걸려든 홍수환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파나마 사람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홍수환은 벌떡 일어났으나 카라스키아는 매정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두 번째 다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났지만 또 링 위에 나뒹굴었다. 세 번째 다운. 보통의 경기 같으면 그것으로 게임 셋이었다. 세 번 다운이면 자동 KO승이 일반적인 룰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무시하고 “누가 죽을 때까지 싸워 보자.”고 싱글거렸던 건 카라스키아 쪽이었다. 카라스키아는 참 룰을 잘 바꿨다는 듯 신나게 홍수환을 두들겼고 홍수환은 한 라운드에 네 번 다운되는 수모를 겪는다.

‘만화’는 3라운드에 벌어진다. 아니 사실 만화가도 그런 상상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떤 만화가 문하생이 2라운드에 네 번씩이나 링 바닥을 헤맸던 복서가 3라운드에 딴 사람이 되어 상대를 몰아붙여 KO승을 거둔다는 스토리를 그려서 스승에게 보여줬다면 그는 스승의 펜대에 맞아 머리에 혹이 태백산맥처럼 솟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다. 기세 좋게 밀고 들어가던 카라스키아의 턱에 홍수환의 카운터가 멋지게 들어간 뒤 전세가 역전됐고 로프에 몸을 기대는 카라스키아의 턱에 도끼질하듯 하는 홍수환의 레프트 훅이 작렬한 순간 카라스키아가 드러눕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세계챔피언이 된 건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년 전 군인의 신분으로 역시 지구 반대쪽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날아가서 챔피언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방송국의 주선으로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그는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을 남긴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이제 엄마 고생 끝났어” 따위의 효도 멘트도 아니고 “이게 다 누구 덕분이야”의 공치사도 아닌 솔직하고도 귀엽기까지 한 군인 아저씨의 내지름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공감어린 폭소를 샀다. 거기에 아들보다는 더 정치적으로(?) 노련했던 어머니의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라는 화답으로 “챔피언 먹었어,”는 더욱 빛났다.

홍수환의 거침없음은 카라스키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홍수환보다 더 흥분했던 아나운서가 소감을 물을 때 홍수환의 대답은 또 하나의 걸작이었다. “짜식이 건방져서 꼭 이길라고 그랬습니다!” 아 그 속시원함이라니.


남아공에서 따왔던 타이틀은 머지않아 세기의 강타자 알폰소 사모라에게 넘어갔다. 당대의 KO왕 사모라는 홍수환을 정신없도록 두들겨 패고 벨트를 풀어갔다. 이때 홍수환은 한국 남자들에게서 가끔 발견되는 ‘오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때껏 벌었던 모든 돈을 털고, 집까지 팔아서 사모라와의 재대결을 추진한 것이다. 결과는 또 패배. 다운되지도 않았는데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켰기에 관중도 홍수환 자신도 단단히 화가 났다. 그때 사모라가 말다툼 끝에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아들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임마 넌 펀치력이 없어. 펀치력 기르려면 도끼질부터 해.”

뭐에 하나 ‘꽂히면’ 정신을 못차리는 한국인의 하나답게 홍수환은 그때부터 도끼질로 세월을 보낸다. 어떤 분께서 삽질에 꽂혀서 5년을 보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도끼질 체력 훈련은 카라스키아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게 얼마나 효과적이었던지 홍수환 본인에 따르면 다리 하나만 가지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프에 기대서 흐느적대던 카라스키아를 내리찍은 레프트 훅은 그대로 도끼질이었다.


그는 질 때도 기분파 한국인이었다. 4전 5기의 신화를 낳고 차지한 타이틀 2차 방어전에서 홍수환은 리카르도 카르도나라는 콜롬비아 선수에게 고전하다가 그냥 경기를 포기해 버렸다. 4번을 다운당하고도 벌떡 벌떡 일어나 파이트! 하며 주먹을 내밀던 투혼은 어디로 갔는지,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주먹은 헛돌았으며 스스로 헛심만 쓰다가 지쳐 버렸고 약이 올라서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경기하다가 말고 상대방에게서 돌아서 버린 채,주심의 카운트 텐을 듣던 그 허연 등짝은 (흑백TV였으니) 처절하게 왜소했고 화나도록 비겁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저 선수가 1년 전 카라스키아를 패대기치고 환호했던 그 선수란 말인가. 4전 5기의 영웅이 졸전의 패잔병으로 전락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4전 5기의 신화의 날 홍수환의 영광과 몰락을 더듬으면서 나는 묘한 생각을 했다. 그는 정말로 한국인다운 복서였다. 한국인다운 것 따로 있고 일본인다운 것 별도로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의 언행과 이력을 보면 어딘지 역사 속에서 한국인들이 보여 준 다양한 면모가 골고루 박혀 있다는 생각이었다. 무슨 적을 만나든 너 누구? 나 아무개 하면서 대들 줄도 알고, 오기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세상과 맞설 줄도 알았으며 군홧발이든 탱크든 그에 억눌리고 짓밟혀도 끝끝내 고개를 들고 일어섰던 역사를 지녔으되, 뭔가 잘 안 풀리거나 버거워지는 경우 그럴 수 없이 시원시원하게 싸움을 포기해 버리고 왜소하게 패배에 순응했던 과거와 현재를 간직한 것이 또 우리 아니었던가.

1977년 11월 26일 나는 그 경기를 온전하게 기억한다. 갓 쓰고 링 위에 올라갔던 한 한국인 복서. 엉덩방아를 수시로 찧어도 발딱 발딱 일어나던 오뚜기가 낳은 기적은 지금도 내가 받은 상장처럼 머리 속 한 켠에 보관되어 있다. 그 오뚜기만을 기억하고 싶다. 제풀에 지쳐 돌아서 버린 추한 모습은 박박 지워서 없애 버리고 말이다.

1965.11.27 40년 절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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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의 오역

1965년 11월 27일 40년 절교의 시작




... 60년대 최고의 인기 스포츠는 무엇이었을까. 답은 프로레슬링이었다. 지금은 한 물이 아니라 두 물 세 물이 간 이름이지만 6-70년대 프로레슬링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애들은 김일의 박치기를 보기 위해 TV 있는 집 아이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아양을 떨었고, 만화 가게에 “여건부 (이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 있으려나) 출전 ‘레쓰링’ 경기”가 나붙는 날이면 어른들까지 만화 가게를 가득 메웠다.

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난나온 한 청년은 우연히 일본의 프로 레슬링을 다룬 영화를 보게 된다. 안 그래도 체육관에서 레슬링으로 체력을 다지던 그는 영화 속에서 자기가 갈 길을 발견한다. 일본으로 가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지켜보며 노하우를 어림잡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국내 최초의 프로레슬러가 된다. 부산 지역에서 서울로 진출한 프로레슬링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황해도 피난민 청년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산파이자 대부가 된다. 그 이름이 장영철이었다. 덥수룩한 수염과 날렵한 드롭킥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레슬러

그런데 그렇게 승승장구 잘 나가던 장영철에게 강력한 신흥 세력이 등장한다. 신흥 세력이라기보다는 선진(?) 세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최고봉 역도산의 제자 김일이 입국한 것이다.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미숙하고 일본 프로레슬링의 화려한 기술과 경기 운영에 비하면 조악했던 국내 레슬링계에 김일의 출현은 야릇한 긴장의 대결 구도를 가져왔다. 개척자를 자임하는 토종 국내파와 ‘선진문물’을 등에 업은 해외파의 대결은 레슬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1965년 11월 27일 운명적인 사건이 터진다.


5개국 친선 레슬링 대회가 열렸고, 김일의 메인 게임에 앞서 장영철은 일본의 오쿠마와 3전 2선승제의 시합을 치르고 있었다. 경기 중 오쿠마가 장영철에게 ‘새우 꺾기’를 시도했다. 허리를 꺾는 위험한 공격에 장영철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매트를 두드렸다. 이는 항복 표시로 경기가 중단되어야 했는데 어쩐 일인지 오쿠마는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고 여기서 사단이 났다. 링 사이드에 포진해 있던 장영철의 제자들이 링 위로 튀어 올라가 오쿠마를 집단 폭행한 것이다. 그들은 (김일이 불러온) 오쿠마가 장영철의 허리를 꺾어 버릴 심산이라고 보았고, 이는 김일측의 장영철 제거 음모라고 믿었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장영철이 한 말을 상당한 파장을 가져왔다. “오쿠마가 각본대로 하지 않고 (김일의 지시를 받아) 이기려고 했다.”는 증언을 했는데 이것이 경찰과 언론을 거치면서 “프로레슬링은 쇼다.”라고 장영철이 선언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기실 프로레슬링은 예나 지금이나 ‘쇼’다. 위험한 쇼다. 100 킬로그램의 거구가 로프 위에 올라가 매트에 쓰러진 이를 향해 점프해서 실제로 내려찍는다면 경기마다 송장이 나올 것이다. 사전의 각본과 공격의 조율에 따라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프로레슬링이었다.


사실이야 어쨌든,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장영철이 선언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귀국한 지 몇 달도 안된 김일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장영철은 다음날 김일에게 도전장을 던졌으나 김일은 “일본 3류한테 지는 선수가 나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쳤다. 아울러 “이런 물의를 일으키면서까지 한국에서 레슬링을 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했다. 한국 프로레슬링을 개척한 황해도 장사 장영철과 전라도 고흥 장사 김일 두 거한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교환하며 가없이 멀어지게 된다. 그 뒤 장영철 측의 선수가 김일 라인에 침투하여 선수를 빼내려 했다는 일종의 프락치(?) 파동 등을 거치면서 증오는 시멘트로 굳어 버렸다. 그렇게 40년이 흘렀다.


2006년 김해의 어느 병원에 휠체어를 탄 노인이 방문한다. 한때 130킬로그램을 넘던 거구였지만 지금은 몰라보게 초췌해진 박치기 왕 김일이었다. 그의 방문 대상은 역시 100킬로그램의 당당한 레슬러였지만 현재는 미음으로 연명하고 있는 장영철이었다.


“죽기 전에는 한 번 봐야겠다.”는 것이 김일의 의지였고, 장영철은 “이렇게 오실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감격스러워했다. 둘은 그때에야 나이를 확인한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걸로 아는데 몇 살이십니까?”(장영철) “나 일흔 여덟이오.” (김일). 둘이 서로를 안 지 41년이었지만 그제야 ‘민증’을 까고 있으니 그 세월이 미루어 짐작이 간다. 김일 역시 “후배가 먼저 찾지 않는데 내가 찾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라고 고백했지만 김일은 얄팍한 자존심을 버리고 장영철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병실을 울린 것은 41년만의 사과 비슷한 장영철의 말이었다. “제가 철이.....없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힘차게 일어서자고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로부터 머지않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뜬다. 하지만 둘은 저승길에 버겁고 거추장스러울 큰 짐 하나씩을 버리고 갔다. 1965년 11월 27일 링 위의 난장판으로 시작된 41년의 포한이 그것이다. 의미 없는 자존심 폐기하고, 먼 길 헤치고 장영철의 손을 잡아 준 그날, 김일은 그 레슬링 인생에서 안토니오 이노끼에게 퍼부은 박치기 이후 가장 통쾌하고 감동적인 ‘박치기’를 성공시켰다. 41년의 절교와 오해의 세월을 매트 위에 누인 것이다.

한 해가 간다. 누구에게든 크건 작건 “1965년 11월 27일”은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 장영철이 되기도 하고 김일이 되기도 하는 오해의 틈바구니가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이 해가 가기 전, 장영철의 멋진 드롭킥과 김일의 가공할 박치기로 날려 버리는 얼친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다.

1910.11.28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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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1월 28일 최초의 사진 신부 최사라

안녕들 하시오. 나는 사라 최, 아니 최사라라고 합니다. 아마 많이들 낯설 거외다. 내 이름을 듣고 아 그 사람 하면서 무릎을 칠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될 테지요. 조금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남편을 사진으로 처음 만났소. 그때 남편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에 있었고, 나는 망해버린 조선 땅에 있었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하시겠지? 나는 사진을 보고 신랑을 정하고,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너갔던 천 여 명의 사진신부 가운데 1호 사진 신부였어요. 1978년께였나 하와이 초대 이민들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는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껏 살아남아 있던 사진 신부들은 이런 대답을 했었지요. “예수쟁이라고 놀림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하와이에는 빗자루로 돈을 쓸기 때문에 그걸로 친정을 돕기 위해서......”

1910년 11월 28일 (12월 2일이라는 사람도 있더군) 내가 하와이에 발을 디뎠을 때 ‘남편’이 마중나와 있었지. 내 나이 스물 셋. 그 당시 풍습으로는 혼기를 놓친 과년한 처자였지만 신랑 얼굴을 보니 고개를 들 수가 없더군. 부끄러워서였냐고? 아니 너무 기가 막혀서 그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신랑 이내수는 나이 서른 여덟. 조혼 풍습 남아 있던 조선으로 따지자면 아버지와 딸이라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는 부부 아니었겠소. 그래도 나는 사진 신부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신랑은 신랑 후보군 가운데에서는 평균치였어요. 어떤 처자는 대놓고 신랑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소.

거기에다가 보내 준 사진은 대개 10년 전 사진이었거나 남의 좋은 차나 저택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연출한 사진들이었으니 우리 사진 신부들 사이에 곡소리 드높은 것도 당연했지. 하지만 사기 당했다고 배 돌려 돌아가기에는 태평양은 너무나 넓었어요. 결혼을 강요당하다가 정신줄 놓아버린 사람도 있고, 악착같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 오죽하면 박용만 선생(이승만과 라이벌 관계였던 하와이 한인들의 지도자)이 이런 글까지 썼을까. “본국 여자들이 하와이 한인의 인구가 번성함을 기뻐하지 않는 바가 아니로되 야만시대에 야만의 종자가 더 생기는 것은 원치 않는 바라. 그러므로 '국민보'는 인도(人道)를 유지하고 천리(天理)를 보호하기 위해 비록 하와이 한인이 종자가 끊어질 지라도 오늘날 현상은 그대로 보고 앉을 수 없노라." 하지만 어쩌겠소. 이것도 팔자이고, 감사해야 할 범사였던 것을.

그런데 우리 남편들은 어떻게 하와이로 오게 된 걸까요. 당시 하와이는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어요. 백인 노동자는 너무 비쌌고 중국, 일본인들도 세월이 감에 따라 미국 본토로 건너가거나 파업을 일으키거나 등등 호락호락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하와이 농장주들은 유순한 ‘일꾼’들이 절실했지요. 이 사정을 안 것이 구한말 오래도록 미국 공사를 지냈던 알렌이었어요. 알렌은 휴가차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동력 부족을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고, 한국인들을 끌어댈 생각을 하게 돼요. 알렌은 고종 황제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더군요.

“지금 백성들은 개국(開國)은 물론 진취(進就)를 원하고 있고 거기다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로 보내서 척식사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하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마침 기근이다 전염병이다 골머리를 앓던 고종 황제도 귀가 솔깃해졌지요. 1902년 11월 최초의 공식적 이민단을 위한 ‘수민원’이 세워졌고 서울 부산 인천 진남포 원산 각지에서 이민을 모집하기 시작해요. 아마 내가 들은 것 이상으로 ‘지상낙원 하와이’에 대한 선전이 있었을 겁니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모집 끝에 100여명의 이민단이 하와이로 가는 배에 올라 1902년 1월 13일 (지금도 하와이 한인들의 기념일이야) 하와이에 상륙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우리 남편을 비롯한 한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설명하자면 몇일 밤을 새도 모자랄 거고, 초기 이민자 이홍기씨가 한 얘기로 대신하지요. “나는 4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새벽 5시에 일터로 나가서 5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하여 오후 4시 30분까지 일을 했다. 점심시간 30분이 고작 휴식시간이었다... 십장은 하와이말로 루나라 불렀는데 나의 십장은 독일인이었다. 루나(십장)는 우리를 마치 소나 말과 같이 그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 노동자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마치 죄수처럼 번호로 불렀다. 만일 그의 명령을 어기면 보통 뺨을 맞거나 사정없이 채찍으로 맞았다.” 
 
‘사진 결혼’은 그런 ‘사탕수수 노예’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자꾸만 사고를 치거나 도박에 빠지거나 해서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었어요. 고종 황제에게 “개국과 진취” 운운했던 미국 공사 알렌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는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이랬어요.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사람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다.” 이 인내심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하고 오랜 복종의 습성 가진 노예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결국 짝이 없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또 한 번 사진 신부 열풍이 불었던 거고, 나를 비롯해 천여 명의 여자가 하와이로 건너가게 돼요. 망해버린 나라 대신 일본의 여권을 받아들고 나는 1910년 11월 28일 하와이에 상륙합니다.

그 뒤의 고생담은 굳이 주워섬기지 않겠어요. 딱 두 가지만 얘기하리다. 우선 하나는 미국 공사 알렌에 대한 괘씸한 마음입니다. 기근에 시달리는 나라에 와서는 ‘개국, 진취’ 따위의 말로 임금을 현혹하고, 태평양에 펼쳐진 황금빛의 미래를 설파하는 한편으로 제 동포들에게는 “얘네들 부려먹기 쉬운 애들이야. 복종이 체질화된 애들이라고.”라고 낄낄대는 이가 무슨 외교관이란 말이오. 허긴 누가 그러더군. 그런 것이 외교고 통상이라고. 앞에서는 부드러운 말만 하지만 뒤로는 주판알 퉁기는 건 동서고금의 이치라고. 어째 지금은 좀 나아졌소? 두 번째는 우리 자랑입니다. 우리 한인들 일당은 초기 기준 남자 67센트, 여자 50센트였소. 근근히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돈을 쪼개어 수십 년 동안 3백만 달러(추산)의 후원금을 모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었어요. 적어도 알렌은 그거 하나는 잘못 봤었지. 우리는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 쉬운 민족”은 아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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