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산하의 썸데이서울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

1953.5.17 향린교회 설립

$
0
0
산하의 오역

1953년 5월 17일 향린교회 창립

나라는 깨어졌으나 민둥산과 한강물은 말없이 솟아 흘렀고, 망가진 도시에도 봄은 오니 초목은 푸르렀다. 어찌 살아갈까 막막함은 꽃조차 눈물을 짓게 하고 이별한 이들 생각하니 새들도 소스라치는데, 휴전선 포화는 사흘도 쉬지 않고 불을 뿜으니 전방 나간 아들놈 편지 만금과 같네. 허연 머리를 긁었더니 머리가 짧아져 애꿎은 빗만 버린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19...53년 봄 서울에 살았다면 그는 아마도 이렇게 노래했을 게다. 1953년 서울은 절망의 도시였다.

아직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은 1953년 5월 17일 지금은 중국집 동보성이 거창하게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얼키설키 나무로 잇고 종이로 대충 벽을 바른 집 안에서 떨리는 기도 소리가 들려 왔다. 집 안에는 6명의 남자와 6명의 여자가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한 교회의 창립 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다.


원래 그 일대에 향린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었고 '향기로운 이웃'이라는 뜻이 달가왔던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 교회의 이름을 향린교회라고 짓는다. 전쟁 이전부터 그들은 독특한 신앙의 공동체를 꾸려오던 그들이 마침내 '평신도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인 홍창의는 그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 한 순간이여, 감격의 눈물 내 앞을 가리우니 말없이 핀 저 꽃의 향기로움이여. 우리의 기도소리 저 나라로 옮기소서."

평신도 교회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뜻은 간단하다. 교역자를 따로 두지 않고 교인 모두가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교회인 것이다. 목사도 장로도 없이 평신도만 있고, 설교가 아니라 의료, 음악 등 자신이 가진 달란트로 선교에 나서는 교회, 그것이 평신도 교회 향린교회였다. 이후 향린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60년을 버티게 된다.


그 세월을 평신도교회로 보낸 것은 아니어서 목사님도 몇 분이 오셨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당연한 다툼도 있었고 분열도 있었지만 향린교회는 한국 현대 기독교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름으로 남는다.

사형 선고 앞에서도 "영광입니다!"를 부르짖었던 열혈청년 김병곤이 자신을 찾아온 노동자 박노해에게 "박형 교회 한 번 나가 볼랍니까?"라고 우렁우렁 권했던 교회였으며, 최초의 12인 중의 한 명이자 한신대 교수로서 정권에 의해 두 번씩이나 해직을 당하고, 감옥 들어가기를 참새 방앗간 드나들 듯 했던 안병무의 혼이 담긴 교회였으며, 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라는 기나긴 이름이 출생신고를 했던 교회였으며, 심야토론 때 북한에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담임 목사가 붙들려가자 안기부 앞에서 "뜻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삶이 그 생활 아니라."를 찬송하던 교인들의 교회였고, 언젠가 파고다 공원의 박정희 현판 글씨 '삼일문'을 떼낸 사람들이 그 현판을 들고 몸을 의탁한 소도(?)였던 교회였다.


명동 언덕에 명동 성당이 솟아 한낮 찌는 더위를 면할 그늘이 되어 주었다면 명동 초입의 향린교회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그 시대에 필요한 예언자와 용사들과 의로운 백성들의 목을 채워 주었다 할 것이다.

이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은, 특히 기존의 교회의 때가 묻은 (?)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 번 정도는 기절초풍하게 된다. 교회 들어갈 때 국가보안법 철폐하라는 플래카드에 어리벙해졌다가 예배 시작을 알릴 때 난데없는 징을 치는 목사님을 보며 눈이 크게 떠지고, 얼쑤 지화자 닐니리야 나오는 국악찬송가에는 입을 딱 벌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련회까지 참가한다면, 아마 술자리가 암암리에 (라고 쓰고 대놓고라고 읽는다) 벌어지는 모습에 까무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 주자 주님께서 최초로 행하신 기적이 술 주자 주님을 만드신 기적이었음을 기억한다면 그닥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경악해 마지 않는 일이며 어떤 이들은 절대로 그럴 리 없다며 사실이라면 자신의 장을 지지겠노라 침을 튀기는 일이지만, 나는 이 교회의 집사다. 그리고 연식(?)으로 따지면 웬만한 교인보다도 더 오래 이 교회를 유령처럼 다녀 왔었다. 하지만 여전히 관찰자 시점에 그치고 있다. 그렇게 고고한 성품은 아닌데 왜 그렇게 스며들지 못하는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성령의 은사가 부족하달밖에.


어쨌건 그 와중에 이 교회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고, 지금은 자신은 하느님 같은 거 안믿는다며 시건방진 소리 대기권을 찌르는 아들 녀석과 딸 아이 세례를 모두 이 교회에서 치렀다. 그 세월 동안 향린교회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환송해 주었고, 대추리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촛불 시위 때는 주황색 향린교회 깃발 휘날리며 날밤을 지샜고, 화재가 난 구룡 마을에 가서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터전을 제공해 주었다.

비록 나의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내가 그 교회의 유령인 것조차 때론 버겁게 황공한, 향린교회의 생일을 축하한다



tag :

1980.5.18 부서지지 않으리

$
0
0
산하의 오역

1980년 5월 18일 부서지지 않으리

김준태라는 시인이 있다. 시라는 것과 전혀 친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가늠하기 어려우나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는 시 한 편으로 역사에 남을 시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가 시작되고 참담하게 짓밟힌 그 1주일 뒤 전남매일신문에 실린 시 한 편이다.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 80년대의 대학생들이라면 핏발선 눈으로 읽거나 건성으로 지나치거나 한 번쯤은 이 시와 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총알에 맞아 터져버린 머리와 개머리판에 으깨진 얼굴들과 더불어 이 시는 목놓아 낭송되었고 한 자 한 자 바늘이 되어 청춘들의 눈가에 분노의 문신을 한 땀 한 땀 새겼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중략)

시는 그림이었다. 시를 읽으면서 눈 앞에는 마치 내가 그 광경을 지켜봤던 듯 영상이 떠올라 왔고, 처참한 시신이 되어 있던 사람들이 내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다가 쓰러져 갔다. 시 가운데에 소개되는 신혼의 주부의 사연에는 코 끝에 전기가 돌았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라는 마지막 구절에서는 주먹이 굳었다. 김준태의 시는 그렇게 광주라는 십자가 아래 쓰여진 ‘광주복음’으로 역사에 남는다.

그의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슬퍼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좌절하지 말라
그리고 꿀꺽꿀꺽 먹어라
그리고 파닥파닥 살아라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강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던
아득한 옛날부터

장미꽃에
물방울이 맺혀 구르듯
이 세상 천지 모든 것들은
그렇게 둥그러이 그렇게
완벽한 꿈으로 젖어 있나니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아가며
때로는 파아란 불꽃을 퉁긴다

오늘 슬퍼하지 말라
오늘 절망하지 말라
오늘 좌절하지 말라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주룩주룩 슬퍼하는 자는
벼락을 맞아 죽으리라
하늘과 땅을 보면서도
절망하는, 좌절하는 자는
악마와 돼지가 돼 버리리라

오오, 이 세상은
아이에게 젖을 빨리는
어머니와 산봉우리로 가득하고
밭고랑에 씨앗을 놓는
아버지와 봄비와 하느님으로 가득하다

오오, 하늘 아래
빈틈없이 꽃피어 있는
사람의 사람다움
사람의 눈물과 앞가슴
그리고 사람의 따스한 두 손

이 중의 일부,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서 다른 모양으로 보일 뿐/ 그것은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처럼/ 지느러미 하나라도 잃지 않고/ 이 세상 구석구석을 살아가며 때로는 파아란 불꽃을 퉁긴다”는 구절은 이대 노래패 한소리 멤버 하나가 붙인 노래로 만들어진다. 제목도 <부서지지 않으리>로 바뀌어서. 멀쩡히 술 먹고 노래하고 농담도 틱틱 던지던 사람들이 구멍 뚫리고 쭈그러든 시체로 나뒹굴고, 어디에 실려 누구에게 끌려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진 사람들이 허다하던 시절, 그 노래는 김준태의 시와 함께 사람들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갔다. 간만에 노래를 불러 본다.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그날의 광주.



tag :

1919.5.19 케말의 생일

$
0
0
산하의 오역

1919년 5월 19일 zp케말파샤생일을 만들다

지금은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치닫고 있는 멜 깁슨이지만 그도 파릇파릇할 때가 있었다. 그 무렵 찍은 영화가 <갈리폴리>라는 영화다. 호주 출신인 그로서는 뜻깊은 영화라고 할만한 것이, <갈리폴리>는 터키의 지명인 ‘갈리폴리’에서 영연방군 일원으로 출전한 호주와 뉴질랜드군이 떼죽음을 당하고 패했던 일을 영화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갈리폴리는 25만 연합군의... 목숨을 삼켰을 뿐 아니라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계획했던 영국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의 목을 날린 전투였기도 했고 바야흐로 한 명의 영웅의 탄생을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 영웅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터키의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수입한 기뢰를 갈리폴리 인근 해안에 깔아 영국 해군의 기세를 꺾었으며,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고 상륙한 연합군을 기관총으로 물리쳤다. “진격을 바라지 않는다. 그 자리를 고수하다가 죽어라.” 케말 파샤의 독전은 간단하지만 무서웠고, 그 자신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방어전에 나섰다. 이 전통은 6.25때 참전한 터키군에게도 이어졌는지 터키군들은 장교가 어느 지점에 모자를 놔 두면 결코 그 선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죽어갔다고 한다. 어쨌든 이 갈리폴리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 장군은 터키의 구원자로 떠오른다. 동북쪽으로 달려가서는 러시아 군을 대파했으니 가히 터키의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한때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가 된 지 오래였고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었다. 마침내 투르크는 1918년 항복함으로써 전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사태는 그에 머물지 않았다.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투르크를 압박했고 수백년간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 왔던 그리스도 복수의 칼을 들이밀었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고 케말은 1919년 5월 19일 북부의 항구 삼순에 도착하지만 그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국내 질서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외국의 침략에 무기력한 정부를 불신임한다..... 이제 우리는 제국의 허물을 벗고 터키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케말은 이날을 투르크 혁명의 첫발로 보고, 이 날을 아예 자신의 생일로 삼는다.

외국에 허약한 정부일수록 국내 반정부 인사에게는 엄정한 법이라, 죽어가던 투르크 정부도 케말의 군복을 벗기고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등 케말을 응징(?)하지만 무스타파 케말을 잡으러갈 병력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케말은 나아가 투르크를 점령한 모든 외국군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투르크 국민들에게 촉구하며 일어선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프랑스군과 아르메니아군 그리스군이 이미 투르크를 죄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케말의 전설은 바야흐로 시작이었다. 그는 투르크군을 지휘하며 일단 그리스군을 박살냈다. “우리는 전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역을 지킨다. 그 영역은 우리의 조국 전체이다.” 투르크 민중들도 그에 호응하여 게릴라전으로 연합군을 맞섰고 민병대만으로 도시를 사수하기도 했다. 결국 투르크는 ‘유럽의 환자’ 팻말이 붙은 침대에서 탈출한다.

국가원수가 된 케말은 또 하나의 업적을 남긴다. 그것은 투르크라는 나라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었다. 신정일치의 왕국에서 세속의 공화국으로, 다민족을 지배하던 제국을 터키 민족의 공화국으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터키어를 기록할 문자도 아랍 문자에서 로마자 알파벳으로 바꿔 버렸다. 심지어 이슬람의 뿌리 깊은 나무였던 투르크에서 종교적 복장을 억제하면서 서구 복장을 권장했고, 남녀합동교육을 실시했다. 이때 발표했던 법령 하나는 케말의 고민을 엿보게 한다. “모든 창녀는 반드시 히잡 (무슬림 여인들이 머리를 가리는 천)을 착용해야 한다.” 히잡을 금지하지는 않으면서, 히잡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교묘한 언사. 그래서 오늘까지도 터키에서는 대통령 후보의 가족이 히잡을 쓴 것이 상대방의 공격 대상이 될 정도로 세속화된 공화국이 형성된다.

그런데 말이 공화국이지 사실상 일당 독재 체제였고 케말은 독재자라는 이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쿠르드 족의 독립 투쟁을 진압할 때는 잔인하기 이를데 없었고, 투르크 제국 말과 공화국 초기에 걸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도 그의 그림자가 일부 드리워져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터키인들은 터키 의회가 그에게 바친 성 ‘아타투르크’ (투르크의 아버지) 그대로 그를 존경하고, 그에 대한 비판조차 금기시하고 있다. 그가 없었으면 오늘날의 터키도 없다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헛갈리기도 한다. 완벽히 몰락한 왕국, 산지사방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는 열강과 근린국들의 침공에 허덕이는 나라에서 케말이 해 낸 일의 미덕과 그가 이룬 변화의 크기가 자리한 한 쪽, 정적을 용인하지 않았고 모든 언론을 검열했으며 철권을 휘두르기도 했던 ‘개발독재자’로서의 또 다른 쪽 사이에서 그의 온전한 모습을 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박정희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다. 박정희의 악행에 치를 떨고, 그의 손에 목매달리고 고문당하고 인생 망가진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를 반성하지 않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 따님의 꿈은 좀처럼 같이 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 어찌 되었든 박정희의 18년 치세에 대한민국은 엄청난 변화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박근혜를 지지하고 박정희를 추억하는 현상은 무척 기괴하긴 하지만 그걸 어리석다고 치부만 해서는 더 큰 것을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tag :

1964.5.21 공수단 법원 습격사건

$
0
0
산하의 오역

1964년 5월 21일 공수단 법원 습격 사건

박정희 대통령의 산적한 과오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전통을 완전히 와해시켰다는 데에 있다. 제 1공화국 때만 해도, 김병로 대법원장 이하 사법부의 권위는 늠연하게 살아 있었고, 정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판결로 정부의 부아를 돋구는 일도 흔치 않게 있었다. 물론 독재가 강화되면서 조봉암 사형 판결같은 어처구니없는 판결도 나오지만 대체로 1공화국 ...당시의 사법부는 큰 틀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장군이 등장한 후 사법부의 위상은 급전직하한다. 박정희에게 사법부란 자신이 사단장일 때 법무 참모 정도의 개념에 불과했던 것 같다.

국가재건 비상조치법으로 꼬장꼬장한 판사들을 내쫓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법관 수백명을 불러들여 ‘군사혁명의 의의’ 따위를 교육한 것은 물론, 모든 공무원들에게 양복 대신 ‘국민복’을 강요하면서 법관들에게도 예외를 주지 않은 것까지도 그렇다고 치는데, 법원 복도에 테이프를 붙여 놓고 좌측통행을 명령한 것은 좀 해도 해도 너무했지 싶다. 후일 인혁당 관련자에게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린 민복기 역시 회고에서 “민주주의 국가이미 사법부의 독립을 내세우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만 제사에 대추 밤 놓듯이 구색을 맞춘 정도”라고 할 정도니 알쪼다. 숫제 박정희가 1962년 5월 대법원장에게 내려보낸 ‘지시각서’는 사단장이 법무참모 혼내는 문구다.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으로 혁명정신과 동떨어진 재판을 했다.... 일부 법관들이 중대한 국가적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불순분자는 방면하고 힘이 없어 권리 위에 땅을 치고 우는 약자들에 대하여는 무고한 벌을 가하고도 하등 양심의 가책이 없이.....”

 민정 이양 후 박정희의 정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졸속적인 한일회담이 추진되던 1964년 5월 20일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터졌다. 시인 김지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는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 놓는다......”로 시작하는 김지하의 조시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에 의하면 “숨이 막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고 할 지경으로 신랄하고 날카로웠다. 이 장례식(?) 시위에서 경찰은 180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을 체포,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그런데 영장 담당 양헌 판사는 일부 피의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는 상식적인 이유로 구속 영장을 기각한다. 지극히 상식적이며 법관의 의무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죄를 지었다는 증거 없이 인신을 구속할 수 있단 말인가.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으르대서 작성한 조서 앞에서는 더욱.

그런데 5월 21일 새벽 4시 30분 서울 서소문 법원 청사에는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온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착한 군용 구급차에서 뛰어내린 건 13명의 얼룩무늬 군인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카빈총을 휘두르며 법원에 난입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수위 앞에서 그들은 숙직 법관을 찾아 내라고 다그쳤다. 그들이 찾고 있는 건 전날 일부 영장을 기각했던 양헌 판사였다. 양헌 판사가 퇴근한 것을 안 이들은 즉각 차를 돌려 동소문동에 있던 양헌 판사 집으로 향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안되면 되게 하기보다는 안되는 짓 골라하는 대한민국 공수단이었다. 드디어 현직 판사의 집에 총과 수류탄을 찬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아마 양 판사는 처음에는 전쟁이 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월남민 출신에다가 현직 판사니 6.25의 예로 비추어 볼 때 완연한 인민재판 깜이었으니 불현듯 들이닥친 군인들을 인민군으로 착각하진 않았을까. 하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군인이었다. 그들은 판사를 윽박질렀다. “데모 학생 영장을 왜 기각했소. 영장 서명을 약속하시오.” 그들은 급기야 수류탄을 꺼내 판사 코 앞에 들이밀고 협박한다. “우린 돌아가도 죽으니 여기서 자폭하겠소.”

파장은 컸다. 대법원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대한의 조처를 행하겠다고 약속했고 법원장들과 판사들도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국회에서도 대통령 탄핵 소추안까지 꺼내들며 정부에게 대들었지만 박정희의 태도는 오불관언 그 자체였다. “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과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13일 뒤 6.3 사태를 낳는 한 계기가 됐고, 판사 집에 쳐들어간 군인들은 6월 6일 동아일보까지 쳐들어가 난리를 치고서야 솜방망이나마 처벌을 받는다. 그나마도 그 행동을 직접 지휘한 최문영 대령과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은 무죄였다.

양헌 판사는 그로부터 10년 뒤 1971년 세칭 서울대생 신민당사 난입 사건에서도 법원 안팎의 압력을 무릅쓰고 전원 무죄 판결을 내린다. 양헌 판사에 따르면 지검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고유예만 돼도 참겠다. 하지만 무죄 나오면 가만히 안두겠다.” 결국 정권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유신 직전, 양헌 판사는 법복을 벗는다. 양심있는 판사의 이유 있는 퇴장. 그것은 우리 나라 사법 암흑시대의 또 다른 장이었다.


tag :

1987.5.23 쏟아지는 빗발 뚫고

$
0
0
산하의 오역

1987년 5월 23일 쏟아지는 빗발 뚫고

87년 6월 항쟁을 다룬 만화 가운데 <100℃>가 있다. 만화가 최규석의 역작으로 한 가난한 집안의 남매를 축으로 87년 6월 항쟁이 터져나오기까지의 이야기들을 재미있고 충실히 담아낸 작품이다. 만화를 보다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느 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이 당선됐는데 이 사람은 투쟁의 머리띠를 동여매기보다는 집회에서 장기자랑 대회를 연다거나 하는 등 ‘...날나리’같이 굴어서 원성을 산다. 때가 어느 땐데 이러고 앉았느냐는 학생들의 힐난에 날나리 총학생회장은 홀연 결연한 표정이 되어 말한다.

“기존의 투쟁방식이 가진 한계는 이미 충분히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나요. 우리가 돌 던질 때 일반 학우들이 함께 하던가요. 아니죠. 그들은 우리를 피해서 가 버립니다. 그들이 역사도 현실도 모르는 바보라서 그런 겁니까. 우리의 방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그의 배경에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표어가 빛난다. ‘혁명으로 제헌의회’ 보다는 백 배는 더 가슴에 와 닿았으며 이른바 대중노선을 주창하던 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가장 절실히 드러났던 그 구호. 투쟁의 모범을 보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하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그들의 문제 의식은 총학생회장을 통해 외화된다. 그리고 그 총학생회장이 어느 날 집회에서 열변을 토한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거리에 나갑시다. 모두 팔짱을 끼고 누워 버립시다.” 그리고 학생들은 쏟아지는 비와 군홧발의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종로 거리에 드러눕는다. 이 빗속의 연와 시위는 1987년 5월 23일 거리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만화 속으로 옮긴 것이다. (이 시위는 거의 고대 단독시위였는데 만화 속의 총학생회장 이미지는 이인영 총학생회장과 좀많이 다르다.)

이 시위는 광주항쟁 기념 주간에 기획된 시위였다. 보통 시위 나갈 때에는 몇 시에 어디 몇 시에 어디 집결지가 알려지게 마련인데, 87년 5월 23일의 시위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른바 ‘택’은 간단했다. “돌아오지 않는다.” 만화 속에서처럼 길바닥에 드러누워 전원 연행된다는 옥쇄 시위였다. 즉 발이 빠르건 싸움을 잘하건 일단 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찰에게 끌려가 개 맞듯이 맞고 고학년일 경우는 구속도 각오해야 하는 조금은 무모한 시위가 감행된 것이다. 광주에서 사람들을 죽인 너희들이 우리 친구 종철이도 죽였다. 이제 우리도 한 번 죽여 보라고 이마를 들이미는 시위였다.

1987년 5월 23일 탑골공원 앞. 뻔히 아는 얼굴들이 모른체 하면서 긴장한 발걸음을 옮기고 경찰의 감시의 눈동자도 칼날처럼 번득이던 오후 2시 (3시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더라) 마침내 태극기가 종로 거리에 펼쳐졌다. “나와! 나와!” 학생들은 일시에 거리로 몰려들었다. 보통은 대오를 형성하고 행진을 하거나 경찰에 맞서야 할 테지만 학생들은 일제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흐리고 간간히 비가 오던 날씨는 장대비로 바뀌어 팔짱 깍지 끼고 드러누운 학생들 위로 들이부었다. 1학년들을 시위에 참여시키지 않은 과나 서클이 많아서 1학년들은 인도에 서서 선배들이 누운 채 하늘을 향해 내뻗는 팔뚝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경찰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잠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본연의 자세를 되찾고 연와대열로 뛰어들었다. 방패질이 시작됐고 군홧발이 어지러이 내려찍혔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노래는 비명으로 틀어막혔다. 악착같이 버티던 학생들의 팔짱은 우악스런 발길질에 풀려 나갔고 머리채 잡히고 곤봉을 맞으며 끌려갔다. 보다못한 시민들이 나섰다.

만화 <100℃>에서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학생들을 지켜보던 한 시민이 빗 속에 우산을 접는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차도로 내려가서 백골단의 머리를 우산으로 후려친다. “왜 학생들을 때리는 거냐. 학생들이 뭘 잘못했어.” 그러자 사람들이 합세한다. “애들 풀어줘. 죄없는 애들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또 죽이려고? 우리 보는 데서 죽여 봐!” 끌려가는 선배들을 보고 울부짖던 1학년들이 경찰들에게 달려들다가 나란히 닭장차에 처박히기도 했고,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는 와중에 1학년더러 너희들은 참가하지 말라고 했지 않냐며 호통 치는 선배도 있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연행됐다.

바로 7개월 전 무려 1천2백명이 넘는 학생들을 동시에 구속시킨 전력이 있는 정부인지라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긴 했는데 그들을 제대로 조사할 경황이 없어진 경찰이 거의 모두를 훈방으로 내보낸 것이다.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랄까. 새벽녘까지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쏟아지는 빗발 뚫고 오던 무거운 어깨 말없이 동녘 응시하던 동지의 젖은 눈빛 이제사 터오니 당신의 깃발로 두견으로 외쳐 대던 사선의 혈기로 약속한다 그대를 딛고 전진하는 새벽. 어느 새 닥친 조국의 아침 그대를 기억하리라.”

87년 5월 23일의 종로 시위는 6월 항쟁의 전초전과 같았다. 화염병과 돌멩이 말고도 경찰을 압도할 수 있는 무기가 있고, 그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음을 실감했던 시위였고 이렇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을 공유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구호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그 시위 이후 고대생들은 6.10 항쟁 출정식에서 지금도 가끔씩 꺼내드는 감동적인 풍경에 직면하게 된다. 뾰족구두 신고 팔랑 치마 입고 심지어 양산까지 쳐든 여학생들이 각자의 과 깃발을 찾아 울퉁불퉁한 잔디 스탠드를 뒤뚱거리며 누비고 학교 내 거의 모든 학생들이 모여서 호헌철폐 독재타도, 종철이를 살려내라고 부르짖는 장관의 일원이 된 것이다.

오늘날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외치던 이들 중 일부가 국민의 열 걸음보다 자기 당파의 한 걸음에 목숨을 거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는 해도, 그들이 진보의 걸림돌 정도가 아니라 덫이 되고 있다고 해도, 87년 5월 23일 쏟아지는 비 속에서 드러누워버린 학생들의 외침과 울음은 우리 역사라는 척박한 땅에 내리부어진 튼실하고 기름진 거름과도 같았다.



tag :

백토 후기

$
0
0

 간만에 배를 쥔다. 우울함이 사라지고 유쾌함이 전신을 마사지한다. 아 이런 기분 얼마만이더뇨. 무한도전이 파업 때문에 불방이되 백분토론은 이어지고 있었으매 이러한 기쁨을 만나는구나. 나 역시 MBC 파업을 지지하며 ‘댄서의 친구’ 사장님은 제발덕분 물러가 주시기를 바라나 백분 토론 제작진이 파업에 가담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책상 머리에 발 올리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초절정 하이개그가 난무하고 개콘을 능가하는 허무 개그가 빵빵터지는 명품 토론에 경배하고 감복했다. 아 역시 대한민국은 재미있는 나라다.



오늘의 히어로는 단연 이의엽이라는 영걸이시다. 정책위의장이라면 한 당에서 가장 알짜배기 인재가 앉는 자리다. 전(前)자가 붙었는지 현직인지 잘 모르겠지만 전직이건 현직이건 그 당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인재 중의 하나임을 공인받으신 분이라 하겠다. 아 역시 그런 분들은 유머 감각도 탁월하셨다. 경선 과정에서 당권파의 횡포에 분노한 통진당 후보가 당사 앞에서 농성한 적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농성한 적 없다. 그냥 플래카드 걸어 놓고 음악 틀어놓은 거 뿐이다.”

 라고 하실 때 나는 의자째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실화다. 그분 상식으로는 한 열 몇 시간 “불법 티머니 충전하라.”를 좀비처럼 부르짖고 안되면 뛰어들어 머리채 정도는 잡아채는 실력쯤은 있어야 농성이라 이름할 수 있으신가보다. 가련하여라 국회 앞에서 풍찬노숙하며 자신의 존재를 외로이 밝히고 있는 분들이여. 시청 앞 재능 노동자들이여. 몸에 알림판 두르고 1인시위를 하는 가냘픈 이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농성자가 아니노라며 대한민국 제 3당의 정책위의장께서 선언하셨도다.


 이의엽 의장님의 유머감각은 말을 더할 때마다 눈처럼 쌓이고 동짓날밤처럼 깊어만 갔다. 이쪽에서 온갖 잡다한 부정과 부실 사례를 입 아프게 읊어대었을 때 그이가 휘두른 한칼에 그 말들은 허리가 잘려나가고 말았다.


“그 사례들 선관위에서 다 무효처리한 겁니다. 맞죠? 문제 없죠?”



아 그 순간의 아연함이여. 아 아 그 발상의 위대함이여 아 아 아 그 천재적인 두꺼움이여. 문제는 그 사례의 무효화가 아니라 그 사례의 발생이었음을 저렇게 깔끔하게 비질로 쓸어버리는 내공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대한민국 공당의 경선이 “안 걸리면 그만, 걸리면 무효”라는 원칙 하에서 치러졌음을 나는 오늘에서 깨달았도다. 무릎을 치며 이마를 두들긴다. 아 나는 바보였구나. 그래, 그래서 이정희도 관악을에서 “걸렸어? 미안! 다시 하자!”라고 발랄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었구나. 아 저래서 “70퍼센트도 아닌데 뭘 총체적 부실?”이라는 이석기의 대범함은 그의 개인적 성품이 아니었구나. 웃다가 웃다가 숙연해진다. 위대할손 그대 이름은 이의엽 의장. 나가자 당과 의장님 따라 당과 의장님 따라 천만리.

 

그 한쪽에 앉으신 우리의 이상규 당선인은 사뭇 깔끔하셨다. 진중권의 거친 공세에도 늠연하게 대응하셨고 신사처럼 점잖게 공작처럼 우아하게 자리를 지키신 것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원래 엄숙한 사람이 웃길 때 더 터지는 법이다. 생중계를 통해 많은 이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본 통진당 중앙위원회. 대놓고 중앙위원회를 무산시킬 목적으로 늑대 울음같은 샤우팅을 몇 시간 멈추지 않는 괴력을 발휘하던 그 사람들 앞에서, 실로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던 심상정 대표를 두고 “이의 있습니까 물었을 때 이의있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무시해서..... ”라는 말을 할 때 나는 또 한 번 허파를 칼에 찔린 듯이 웃어야 했다.
 

야 역시 신앙이란 위대한 것이다. 보고 나서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나으리라. 수십만이 지켜본 그 풍경, 진보판 용팔이들이 단상으로 밀고 올라올 때 보수매체고 진보매체고 불문하고 여기자들은 눈물을 흘린 그 폭력의 현장을 악몽으로 간직한 이들 앞에서 당선인께서는 의연히 그렇게 말씀하신다. 필시 농담이리라. 이상규 당선인께서는 이렇게 농담을 진담같이 하는 것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또 한 번의 대폭소, 멘탈의 즐거운 붕괴는 시민 논객의 질문 때에 왔다. 어차피 토론 프로그램도 연출이 필요한 것이고 시민 논객의 질문은 예비된 것이었을 것이다. 삼대세습, 북한 핵 문제 인권 문제 등에 대해 시민 논객이 물었을 때 이상규 당선인이 보여 주신 횡설수설과 동문서답의 절묘한 조화는 가히 대한민국 모든 개그맨의 무릎을 꿇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냉전 시대의 유물같은 질문을 받는 자체가 슬프다”면서 졸지에 질문자를 냉전 시대의 유물로 모는 건 일단 반칙이었다. 질문자가 반박했듯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회의원 당선인에게 북한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 자체가 냉전의 유물이 된다면 그것은 이쪽에 잉태된 매카시즘의 돌연변이일 뿐이기에 그렇다.



이분의 반칙에 치켜올라가던 내 눈꼬리는 그만 당선인께서 발휘하신 천재적인 유머 감각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오오 “북한에 갔더니 온통 회색빛이더라.....”는 시적인 발언에 내 가슴은 뛰었고 “술은 좋은데 거꾸로 뒤집으니 쏟아지더라.”는 고승의 화두같은 북한 방문 소감은 감겼던 내 눈을 틔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남기시는 말씀, “이렇게 북한을 현실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아아 그 깊은 가르침에 또 한 번 숙연해지려는 찰나, 뒤통수를 강타하는 죽비 “질문에 대한 답변은 유보하겠습니다.” 아 방송 카메라가 그 시민 논객을 비추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안다. 아마 거품을 물고 쓰러지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며 데굴데굴 구르다가 조연출의 제지를 받았으리라. 작가들에게 끌려나갔으리라. 모니터 통해 현장을 지켜보는 내가 멍해지는데 현장에 있던 시민 논객의 충격은 오죽했으랴.
 

이상규 당선인은 마지막으로 철저한 쇄신과 반성을 말씀하셨다. 약속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또 얼마나 웃기는지를 안다. 오늘 토론에서 조준호 대표의 조사 결과를 인정 안 한다고 했다가 완전히 인정 안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가 왔다 갔다 했던 건 그냥 애교로 웃어 주면 되지만, 같은 당권파의 “마른 풀 다시 살아나 일어나 국회가 되네”의 주인공 김선동 대인께서는 그 조사 보고서를 폐지하라고 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슬쩍 갖다 대면 ‘철저한 쇄신’이라는 발언이 얼마나 웃기는 나가사키 짬뽕인지를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철저한 쇄신과 반성을 우리 식대로 하겠다.”
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성하는데 비례대표는 못놓겠고 쇄신하는데 우리는 할 거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아니 웃긴가. 이 아니 포복절도하겠는가.



 마지막으로, 근근히 이성의 끈을 잡고 버티던 나의 멘탈을 붕괴시킨 마지막 돌 하나는 이상규 당선인의 ‘대선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원대한 포부의 표출이었다. 내가 우리 아들 녀석으로부터 1천일 묵언 수행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해도 그렇게 웃기지는 않았을 것이고, 사고뭉치 AD가 60분 다큐 10부작을 8월까지 완성해 오겠노라고 기염을 토해도 이상규 당선인의 호연지기 앞에서만큼 앙천대소하지는 못하였으리라. 한 당에 두 비대위라는 기상천외한 구도를 만들고 진중권 말마따나 “전국민을 상대로” 자기네 당파 당원들의 명예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사람의 입에서 대선 승리라....... 웃었다. 눈물이 나게 웃었다. 마누라가 남편 실성했나 싶어 놀라 뛰어올만큼 웃었다. 고맙다. 웃을 일 없는 요즘 이렇게 웃게 해 주다니. 이 은혜 잊지 않으리라. 아주 뼈에 새기고 머리 풀어 신을 삼을 정도로 잊지 않으리라. 고맙습니다 이의엽 의장, 감사합니다 이상규 당선인



tag :

1980.5.24 나는 왜 죽었나요

$
0
0
산하의 오역

1980년 5월 24일 어느 소년의 죽음

나는 1970년생, 개띠였어요.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살면서 학교에 충실히 다니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생이었지요. 형도 있고 누나도 있고 여동생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상 타오는 건 나 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는 엄한 분이셨지만 타온 상장을 내놓으면 기분이 좋아지셔서 쭈쭈바값도 적잖이 쥐어 주시곤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일도 못나가시고 집에서 누워 계셨는데 저랑 여동생이랑 놀다가 쌈박질을 좀 했어요. 꼬맹이가 울고 난리를 치니까 아버지가 버럭 하셨지요. “아버지가 다쳐서 누워 있는디 니들은 안에서 싸움질이여? 나가 놀아. 시끄러”

우리 눈치야 빤하죠. 아버지 표정만 봐도 주먹이 날아올지 쓰다듬는 손이 내릴지 대번에 알죠. 아버지 얼굴을 보니 목침이라도 날아올 것 같더라구요. 소작농 처지에 한창 일할 것 많은 봄에 자리보전하고 계시니 그 속이 얼마나 갑갑하셨겠어요. 나는 냉큼 나가 놀고 오겠다고 했죠. 잽싸게 고무신부터 챙겼어요. 9일 전이 내 생일이라 어머니가 사 주신 신발이었거든요.

그러고보니 그날은 일요일도 아니었는데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광주 시내에서 큰 일이 벌어져서 학교를 쉰다고 하셨지요. 선생님이 엄한 데 가지 말고 집에 꼭 붙어 있으라고 했지만 우리가 그런 걸 신경 쓰면 애들이 아니죠. 동네 개구쟁이들 다 모여서 청주 한씨 선산으로 갔어요. 거기서 숨바꼭질도 하고 짖궂은 놈들은 무덤에서 미끄럼도 타고 놀았지요. 그런데 우리 집 앞으로 난 도로에 트럭들이 먼지 무지하게 뿜어내면서 지나다녔어요. 거기엔 군인 아저씨들이 많이 타고 있었죠.

우리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꽤 많은 애들이 군인 아저씨라고 그랬어요. 너와 나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으싸 으싸 하는 정도 군가는 우리도 부르면서 놀았죠. 그런데 그 멋진 군인 아저씨들이 그야말로 트럭으로 지나가는 걸 보고 어떤 애들은 깡충깡충 뛰며 손 흔들기도 했어요. 이상한 건 아저씨들이 꼭 우리 아버지처럼 화난 얼굴을 하고 우릴 거들떠도 안보는 거였지만.

그런데 갑자기 빵 빵 총소리가 온 마을을 울렸어요. 총소리만 난 게 아니라 기관총 같은 두두두두 소리도 나고 꽝 꽝 소리도 귀청을 울리더라구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건 군인 아저씨들끼리 싸움이 난 거였어요. 트럭에 실려 오던 군인 아저씨들을 적으로 오해한 또 다른 군인 아저씨들이 방아쇠를 당겼고 그러다가 여러 명이 죽어 버렸지요. 트럭에 탔던 군인들은 공수부대라고 했고 오해해서 아군에 총질한 군인들은 보병학교라는 곳의 군인이라더군요.

그래도 우리는 집에 들어갈 생각하지 않고 놀았어요. 트럭에 탄 군인들이 다시 우리쪽으로 다가서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소리 지르면서 뛰어 놀았어요. 그때 군인 아저씨들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한 번이라도 봤더라면 눈치 빠른 나는 살았을지도 몰라요. 시퍼런 눈을 하고 이를 득득 갈면서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던 그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봤으면 나는 친구들에게 “튀자!”를 외치고 내가 먼저 달음박질쳤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드르륵 뭔가 기분 나쁜 소리가 귓전을 때렸어요. 학교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의 반도 안되는 거리에서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죠. 드르륵 소리는 거기서 총알이 나오는 소리였어요. 우리를 쏜다! 아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뛰기 지가했죠. 그런데 내가 운이 없었어요. 고무신이 벗겨진 거죠. 맨발이라도 뛰었으면 살았을 텐데 그만 고무신을 줍겠다고 멈춰 서고 말았어요. 그리고 내 몸에는 “들어가는 구멍은 볼펜구멍만한데 나올 때 구멍은 접시만해진다.”는 그 무서운 M16 총탄이 열 발 가까이 틀어박히고 말았죠. 열 한 살, 내 이름 전재수는 그렇게 너덜너덜한 시체가 되고 말았어요.

왜 쏘았냐고 묻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 와서 이유를 따져봐야 뭘 하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묻고 싶은 질문 하나는 있어요. 그때 날 죽인 아저씨들은 내가 뭘로 보였을까요. 열 한 살이었던 제 가슴에 십자 조준을 맞추면서 그 아저씨들은 날 뭘로 봤을까요. 내가 커 보였을까요. 어른으로 보였을까요. 그래서 그 폭도라는 사람들로 보였을까요. 아니면 아군끼리 치고받은 화풀이로 몇 마리 죽여도 되는 오리였을까요. 내가 들고 있던 고무신을 보면서 엄마는 정신을 잃었어요. 아버지는 내가 나가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울었죠. 아버지는 술이라도 먹었지만 엄마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만 4년만에 홧병으로 내 곁으로 왔어요. 그때 날 죽인 군인 아저씨들은 우리 엄마도 함께 죽인 셈이 됐죠.

1980년 5월 24일 만 열 살 하고 9일을 더 산 광주 효덕초등학교 4학년생 전재수는 그렇게 죽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죽이고 수백 명을 죽이고 그 가족들을 산 송장으로 만들었던 대머리 아저씨는 아직도 건강하네요. 나라에서 돈 대서 경호해 주고 있네요. 나라에 바칠 돈은 수백억인데 돈 없다고 배째라면서 자기 재산은 29만원 밖에 없다네요. 아까는 하기 싫은 질문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 질문이 입 밖에 나와요. 나는 왜 죽었나요. 그리고 더 궁금한 것 하나. 그 대머리 아저씨는 왜 아직도 죽지 않았나요. 왜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가요. 내가 죽은 건 고무신을 아까와했기 때문이고, 대머리 아저씨가 살아 있는 건 욕을 많이 드셔서 장수하시는 건가요. 정말로 그런 건가요.



 


tag :

1981.5.25 뽀뽀뽀 첫방송

$
0
0
산하의 오역

1981년 5월 25일 뽀뽀뽀 첫 방송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이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이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이 노래가는 무려 31년 전 5월 25일 첫 방송 전파를 탄 유아 프로그램 <뽀뽀뽀>의 주제가다. 그 6개월 전에 시작한 <전국 노래 자랑>만 아니었으면 최장수 프로그램의 타이...틀까지 가볍게 거머쥐었을 유구한 역사의 프로그램 <뽀뽀뽀>의 초창기 인기는 남녀노소를 초월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넋놓고 봤으며 사춘기 중고딩들도 이 프로그램을 보고 학교 가다가 늦어서 경을 쳤다. 주제가는 여러 버전으로 패러디되고 노가바되어 술자리에서, 또 MT 장소에서 불리워져 뭇 사람들의 배꼽을 떼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로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노래다. <뽀뽀뽀>의 한자성어 버전 <접접접- 接接接>

“부친님 출근시에 접접접 모친님 포옹시에 접접접 상봉시 쾌재라고 접접접 회자정리 거자필반 접접접 접접접 접접접 접접접 붕우 접접접 접접접 접접접 붕우!”

<뽀뽀뽀>는 그 세월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발자취를 담고 있다. 2011년 현재 7400여회를 기록한 뽀뽀뽀의 연출자를 불러모으면 100명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요즘 톱 탤런트급에 발돋움하고 있는 신세경도 아기 꿀벌 노릇을 하며 뽀뽀뽀에서 뛰어놀았고 아이돌그룹 빅뱅의 G-드래곤은 다섯 살 때 뽀뽀뽀에 출연하여 치열한 내부 투쟁(?)을 거쳐 자신이 뽀미 언니 옆자리를 차지했음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은 바 있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배우 류덕환도 뽀뽀뽀 친구들 출신이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뽀미 언니’다. 초창기 프로그램과 함께 슈퍼스타로 떠오른 이는 바로 초대 뽀미 언니 왕영은이다. TBC 강변 가요제에 출전했다가 MBC 이재휘 PD의 눈에 들어 캐스팅된 그녀는 무려 900여회 동안 뽀미 언니로서 <뽀뽀뽀>의 터를 닦았다. 23대 뽀미언니이자 개그맨 유재석의 아내 나경은이 ‘원어민 교사’까지 요구하는 요즘 부모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녀가 쏟아낸 한 마디는 시사하는 바 크다.

“나는 요즘 ‘뽀뽀뽀’가 안타까워. 유치원이 의무교육이 된 시대잖아. TV 어린이 프로에서 뭘 더 가르칠 수 있겠어. 오히려 25분 행복하게 푹 빠져 있는 것이 아이들을 더 위하는 게 아닐까. 어른들 프로 보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즐거워하는. 돌아보면 우린 그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어. 뽀식이·뽀병이·뽀동이 같은 캐릭터가 티격태격 하고 나는 그 속에서 즐겁게 놀았을 뿐이지.

뽀식이는 코미디언 이용식이었고, 뽀병이는 역시 이제는 백발이 된 코미디언 김병조의 뽀뽀뽀 중 이름이었다. (뽀동이는 조동희) 가르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지식을 전달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조기교육 따위는 꿈도 꾸지 않았던 뽀뽀뽀에서 그들은 치고 받고 울음을 터뜨리고 웃고 까불면서 아이들과 어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다보니 <뽀뽀뽀>는 걸출한 스타들을 초대할 수 있었던 네임밸류를 지닌 몇 안되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30년간 뽀뽀뽀 음악 감독을 지낸 이민숙의 회고는 뽀뽀뽀에 등장하여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를 한 별들의 빛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김혜자의 경우 “내가 어떻게 혼자 나가?” 하더니 “손녀랑 나갈게” 해서 손녀와 손잡고 녹화를 진행했다. 그녀는 거기서 한글 디귿자를 소재로 한 노래를 불렀는데 단 한 번의 NG도 없이 ‘가 버렸다.’ 눈이 동그래진 PD가 비결을 묻자 김혜자는 답한다 “나 이 노래 100번 연습했어.”  조용필도, 심지어 나훈아도 뽀뽀뽀의 초대 손님이었다. 그들을 비롯한 많은 스타들이 역대 뽀미언니들, 왕영은과 지금은 천국으로 간 길은정, 이의정, 장서희 등등과 함께 어울리며 동심들과 어울렸다. 이쯤 되면 하나의 프로그램도 만만치 않은 역사가 된다.



tag :

1952.5월 26-28 거제도, 그리고 이학구

$
0
0
산하의 오역

1952년 5월 하순 거제도와 이학구

지난 연휴에 경주와 거제를 다녀왔다. 아름다운 섬 거제에는 볼 것도 많지만 그 가운데 전혀 아름답지 않은 역사의 흔적 하나가 압도적인 규모로 재연되어 있다. 그것은 포로수용소 공원이다. 거제도를 세계 만방에 알린 것은 바로 6.25당시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로서였다. 급증하는 포로 수용을 위해 수용소를 확보해야 했던 미군은 처음에는 제주도를 검토했지만 최고 17만명...에 이른 포로를 제주도에 풀어놓을 경우 원래 인구에 더하여 포화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점과 보급의 어려움 등을 들어 포기했고 한국 제 2의 섬 거제도를 포로수용소로 만든다.

1952년 5월 하순, 즉 내가 아이들과 함께 거제를 돌아보던 때로부터 60년을 거슬러 올라간 무렵 거제도 포로수용소 인근에는 일대 철거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군과 한국군이 장비를 동원하여 포로수용소 근처의 민가들을 깡그리 때려 부수고 있었다. 이유는 포로수용소장 ‘황소’ 보트너의 명령이었다. “24시간 내에 민간인들은 외지로 이주하라.” 5월 내내 지속되고 있던 포로수용소 사태에 대한 대책 중 하나였다. 인민군 포로들은 간도 크게도 포로수용소장 돗드 준장을 납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그 후임 콜슨 준장이 포로들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이 그렇게 만만하면 ‘미쿡’이지 미국이 아니다.

미군은 즉시 돗드와 콜슨의 별 견장을 어깨에서 떼내고 대령으로 불명예 제대시켰다. 그리고 투입한 것이 단호하기로 이름난 (북한 포로들 입장에서는 무섭기로 소문난) 황소 보트너였다. 보트너는 무장 병력을 동원하여 반항하는 포로들을 진압하고 휘날리던 인공기를 땅에 팽개쳤으며 인공기를 게양하는 포로들을 사살하기도 했다. 그가 내린 명령 중의 하나는 수용소 인근 민가 철거였다. 북한은 포로수용소 내 친공 포로들에게 제2전선 구축을 명령하고 위장 항복을 통해 끄나풀을 수용소에 진입시키는가 하면 피난민으로 위장한 공작원까지 거제에 침투시켜 포로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보트너는 그에 대한 대책으로 “민가 전부 철거”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1116세대 1600 동의 민가가 며칠 사이에 사라졌다.

하루 아침에 고향 마을을 "24시간 안에 떠나야 했던“ 거제도민들의 아픔을 떠올려 보는 와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덧붙여 떠올라 왔다. 북한 인민군 총좌 (우리 계급으로 하면 준장급) 이학구라는 사람이다. 그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친공포로들의 형식상 수괴였다. 일단 그는 포로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 경로를 보면 그 ‘수괴’ 지목이 자연스럽지만은 않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후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고 인민군들 역시 ‘멘탈 붕괴’에 빠져 허물어지던 그 즈음, 자신이 참모장으로 있던 사단의 사단장을 권총으로 쏘고 남한으로 넘어온다. 아마도 결사항전을 외치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단장에 대한 반항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의 귀순의 의미는 계급도 계급이거니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작전 명령서에서 더 큰 의의를 지닌다. 그 작전 명령서는 6.25가 북한에 의해 촉발된 전면전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미 아군의 사단장을 쏘고 적의 편에 항복한 고위 장교는 왜 또 다시 자신이 등졌던 편을 위해 싸워야 했을까. 우선 그는 한국군 장교로 편입되기를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가 된 마당에 그와 맞바꾸거나 최소한 급이 맞는 포로를 세팅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는 포로로 생활해야 했다. 그런 불만도 있었을 것이고, 혹자는 친공 포로들의 무자비한 협박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거제도 앞바다에는 쏟아붓는 똥통 속에서 나온 사람의 팔다리들이 둥둥 떠다녔다고 하니 협박은 매우 걸쭉하고도 차가왔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지켜 봤던 인사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만 아니라면 매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었던 그는 또 한 번 자신의 지향점을 바꾼다. 물론 실질적인 지령과 조직은 북한에서 파견된 이들이 도맡아 했지만 이학구는 총좌로서 친공포로들의 구심이 된 것이다. 그때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될대로 되라”? “미워도 다시한 번? ” “그래도 내이름은 공산당” ?

이학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송환 포로 명단에 끼었고, 북한으로 돌아가지만 머지않아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조국이었지만 조국은 그에게 따뜻한 곳은 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는 남도 북도 안심하고 찾을 수 없게 된 사람이었다. 사단장을 쏘고 적에게 투항한 참모장을 북한이 어떻게 환영할 것이며, 친공포로들의 수괴를 어찌 대한민국의 품에 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남도 북도 달갑지 않아 제 3국을 택했던 76인의 포로들 틈에도 이학구는 끼지 못했다

1459.5.29 콘스탄티노플의 비정규군

$
0
0
산하의 오역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 함락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동서로 분열되고 또 정황제니 부황제니 팔뚝걷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로마 제국을 통일한 후 천년의 수도 로마를 제쳐 두고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 유럽의 끝이자 아시아의 시작,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제국이 쓰러져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된 뒤에도 로마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의 요새화된 성벽 속에서 천년의 수명을 더하게 된다. 동로마 제국이었다.

그러나 1453년 봄 한때 이탈리아로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지배했던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성벽 안으로 쪼그라들었고 아랍인과 페르시아인과 셀주크 투르크인을 공포에 질리게 했던 중장기병대의 위력은 바람같은 전설이 된지 오래였다. 성벽 밖에는 떠오르는 태양같은 제국 오스만 투르크의 대군이 그 술탄 메메드 2세의 지휘 하에 콘스탄티노플을 들이치고 있었다.

투르크 제국의 기분 나쁜 '관행'대로 왕좌에 오르자마자 자기 동생들부터 없앴던 술탄 메메드는 이번에야말로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지워버리겠다는 듯 작심을 하고 고립된 성을 몰아부쳤다. 자신이 개발한 대표가 견고한 성벽을 부술 수 있노라 자신하는 헝가리 출신의 기독교인이 나타났을 때 메메드는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마몬을 섬기는 것이 분명했던 헝가리인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할만큼의 재물로 그 대포를 확보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메메드의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는 아무래도 배를 산으로 옮긴 일이지 싶다. 콘스탄티노플을 면한 바다의 입구는 빈틈없이 드리운 쇠사슬과 함대들로 수비되고 있었는데 메메드는 황소와 말과 사람을 총동원하여 배들을 끌고 산 넘고 들 지나 쇠사슬의 뒤편 바다에 부려 놓은 것이다.

성벽에 늘어선 몇 안되는 비잔틴 제국의 용사들과 서유럽 용병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이 사수하고자 하는 천년제국의 종말을 직감했다. 저렇게까지 정복욕을 불태우는 젊은 무슬림 군주를 제어할 방법은 예수가 부활하여 천군천사를 이끌고 오는 수 밖에는 없었다.

도시를 완벽하게 포위한 15만의 투르크 대군은 메카를 향해 기도했다. 그 허다한 군상들이 한 방향을 향해 엎드리고 코를 바닥에 박는 모습은 수비군에게는 또 하나의 공포였다. 경건한 침묵은 그 뒤에 다가설 살육의 함성보다 컸고 그들의 일치된 머리 숙임은 칼질보다도 두렵게 눈가를 파고들었다. 메메드 2세가 3일간의 야그마 즉 약탈을 허했다는 것은 이미 수비군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1453년 5월 29일이 온지 얼마 안 되던 한밤중,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어둠과 사람의 바다 앞에 고립된 섬 같은 성벽 앞으로 함성의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그런데 공격의 선봉에 선 이들의 복장과 장비는 좀 특이했다. 그들은 투르크군 특유의 반월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갑옷 같은 것은 쇳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그들은 투르크의 '비정규군' 바슈바조우크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무슬림도 있었지만 그리스부터 독일까지 다양각색의 유럽 국가에서 온 기독교인들도 부지기수였다. 무슨 이유로든지 고향을 떠나야 했던, 자신이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가보다는 눈 앞의 전리품이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었던 이 불우한 군대에게 투르크가 가장 풍족하게 지급했던 무기는 다름아닌 공성용 사다리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헌병 부대를 배치해서 물러서는 바시바조우크들을 가차없이 베어넘겼다.

그들의 임무는 소모전이었다. 생활 용어로 말하면 "적의 총알을 낭비케 하는 총알받이"였다.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다가 화살이나 끓는물의 희생자로 바뀌어 해자를 메우고 적군을 피로하게 하고 무기를 고갈시키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술탄 메메드에게는 아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치러야 하는" 고깃값에 지나지 않았다. 갑옷도 줄 필요가 없고 무기라면 사다리 정도만 지급하면 되는 싸구려 병력은 교대 병력 없이 고군분투하던 비잔틴 수비군의 기세를 약화시키는데 효율만점의 도구였다. 마치 이윤이라는 성벽을 향해 돌격하는 '비정규직' 군단처럼.

메메드가 그들의 희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오늘날 비정규직 부리는 회장님들 생각하면 금새 알 수 있으므로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바시바조우크 부대 뒤에서 돌격 명령을 기다리던 정규군들, 아나톨리아 부대와 술탄 직속의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 부대에게 바시바조우크들의 돌격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하는 점이다. 술탄과 같은 마음으로 "승리를 위해서 저런 건 희생도 아니야."라고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간혹 물러서는 바시바조우크들을 베어 넘겼을까. 아니면 저들이 다 죽으면 이제 내가 죽겠지 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처자를 떠올리며 눈물지었을까. 쟤들은 바시바조우크고 나는 예니체리다~~ 하면서 긍지 서린 어깨를 펴고 방패를 두들기고 있었을까. 결국 술탄의 장기판의 말들에 불과했던 그들은 어떻게 싸웠고,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바시바조우크들의 시체를 넘어 아나톨리아 보병들과 예니체리들의 돌격까지 이어졌고, 투르크군은 미처 수비군이 잠그지 못한 성문 하나를 장악한다. 그것은 한 제국의 몰락의 물꼬와도 같았다. 십자가 깃발 대신 초승달의 깃발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나부끼면서 한 역사가 저물었다.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는 드물게 용감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도시의 창건자와 이름이 같은) 는 마지막까지 칼을 들고 싸우다 시신도 없이 시체더미 중의 하나로 생을 마쳤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메메드를 예니체리들이 호위했고 그들은 거치적거리는 바시바조우크들의 시신들을 발길로 걷어냈다.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었다.

1939.5.30 안공근의 실종

$
0
0
산하의 오역

1939년 5월 30일 안공근의 실종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상징같은 존재라면 단연 안중근 의사다. 침략의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도 사건이려니와, 그 후 재판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격렬한 웅변, 그리고 일본 간수들과 변호인까지 감동시킨 고매한 인격과 뛰어난 경륜은 독립운동가의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이 아니라 황해도 해주 안씨 가문은 독립운동의 명가라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가운데는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 당시 평안도 진남포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동생 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최후 이후 온 가족을 대동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도왔던 빌렘 신부를 따라 독일에 유학함으로써 조선인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 됐고, 무려 6개 국어에 통달한 임시정부의 국제통이자 정보통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김구의 측근이었으며 윤봉길과 이봉창 등을 배출한 한인애국단의 핵심 간부였다. 윤봉길이 한인애국단원으로서 거사를 완수할 것을 선서한 곳이 바로 안공근의 집이었고 태극기 앞에 선 윤봉길의 마지막 사진은 안공근의 아들 안낙생이 찍은 것이었다. 또 그는 여러 무술에 능했던 바, 친일 행각을 벌이는 조선인들을 직접 처단하는 암살 조직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1939년 5월 30일 갑자기 증발했다. 치과에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선 후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시신도 찾지 못했다. 안공근의 딸은 중화민국 주석의 아내 송미령에게 진상을 밝혀 줄 것을 호소했지만 중화민국 정보기관의 수사도 헛되이 안공근은 영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납치 살해한 범인들의 정체는 대개 두 방향으로 모아졌다. 첫째는 상하이에서 암약하던 국제 간첩 나북검의 소행이다. 일제 밀정을 추적하던 안공근이 나북검이 일제 밀정과 만나 정보를 전달하는 현장을 목격했고, 이 사실을 안 나북검이 상해에서 중경까지 추적하여 안공근과 교분이 있던 중국 관리 조웅으로 하여금 안공근을 불러내게 한 후 살해하여 폐광에 버렸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범 김구 또는 임시정부 내 기호계열의 소행이라는 설이다.

기실 백범 김구는 대외가 아닌 독립운동 내부의 다툼에 있어서도 암살 등의 수단을 즐겨 활용한 사람이었다. 소련에서 제공한 공금유용을 이유로 중견 독립운동가를 없앤 것이 김구였고, 그 외에도 임정 내의 반대 세력이나 좌익들과는 피차 살벌한 음모전을 펼치기 일쑤였다. 이 와중에 안공근이 공금을 유용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 김구와 소원해지고, 안공근 또한 김구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는 상황에서 김구의 측군이 먼저 안공근을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김구가 자신의 최측근으로 오래 활동했던 안공근, 개인적으로 사돈간이기까지 한 안공근이 한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기로서니 ‘제거’까지 시켰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김구가 안공근을 크게 힐난했던 것은 중일전쟁 후 일제의 감시가 치열해지면서 안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과 자신의 가족들을 피난시키라고 지시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형의 가족들은 미처 피신시키지 못하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만 모시고 왔던 일에서 비롯된다. 김구는 안공근을 다시 들여보내 안 의사 가족을 모시고 오게 하려 했지만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만 겨우 데리고 탈출했다. 이는 이미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에서의 여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되지만 김구는 의외로 단호했다.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

이로써 안공근은 김구와 결별하게 된다. 김구의 우려가 아주 틀리지는 않았던 것이 일본의 수중에 넘어간 안중근의 가족들은 그대로 ‘내선일체’의 표본으로 이용되어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에 참배를 하며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는, 아버지가 구름을 치며 통곡할 일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안준생은 이 일로 ‘호부의 견자’로 치부된 가운데 한국전쟁통에 쓸쓸히 죽었고, 일본에 투항하기를 종용했던 안중근의 사위 황일청은 해방 후 피살당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939년 5월 30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안공근의 자식들 가운데 3남인 안민생은 평화통일 운동을 하다가 5.16 혁명 후 10년의 징역형을 받았고, 장남 안우생은 김구의 북한 방문 때 함께 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반역과 지조와 좌와 우에 걸쳐진 안중근 가족들의 가족사는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닐는지.

1886.5.31 피어난 배꽃 네번째 배꽃

$
0
0
산하의 오역

1886년 5월 31일 피어난 배꽃 네 번째 배꽃

메리 벤턴이라는 이름에서 얘기를 시작해보자. 1832년 미국 메사츄세츠.주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나이 스물 하나에 결혼하여 스크랜턴이라는 성을 얻는다.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그녀는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은 후 아들 윌리엄 스크랜튼과 함께 일생의 결단을 한다. 예일 의대를 나온 의사 아들과 어머니 모두 선교사가 되어 듣도보도 못한 은자의 왕국 조선으로 향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 스크랜튼의 나이 쉰을 넘긴 때였다.

그녀가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885년이었다. 갑신정변의 회오리가 몰아친 것이 그 전해였고 임오군란의 분노가 터진 것이 3년 전이었다. 조선의 정정은 극히 불안했고 외국인에 대한 눈길은 고운 쪽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많았다. 굳은 각오를 하고 코리아를 찾은 스크랜튼 가족도 일본에 머물며 형세를 지켜볼 정도였으니.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온 믿음의 화신들에게 현해탄은 별 것이 못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한양에 입성한다. 가족이 정착한 것은 서울 주재 외국 공관과 선교사들의 근거지인 정동이었다. 거기서 스트랜튼 부인은 특별한 아이디어 하나를 얻는다.

"그해 10월 정동의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천여평을 매입했다.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달 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 이 애기는 훗 날 이화여전의 교장이 된 앨리스 아펜젤러인데 그날 밤은 어찌나 추웠던지 애기를 자리에 눕히지 못하고 밤새 스크랜턴 부인이 안고 재웠다. 이때 부인은 이렇듯 추운 방에서 고생하 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애기들을 위해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던 것이다" (이화 70년사)

여자는 온전한 사람으로 쳐 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글을 비하해서 여자나 쓰는 글이라 하여 암클이라고 군시렁대던 나라였지 않은가. 그런 세상에서 조선 여자를 그것도 노란머리 푸른눈의 양도깨비 외국인이 가르친다는 것은 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가면.부녀자들은 창문을 닫고 숨었고 아이들은 울며 달아났다." (스크랜튼 부인) 그러던 중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디에든 진취적인 인물이 있어 물꼬를 트는 법, 외국어를 배워 장차 왕비의 통역이 되어 보겠다는 어느 관리의 소실이 학당 문을 두드린 것이다. 1886년 5월 31일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성은 남산에서 돌 던지면 열에 서넛은 맞을 김씨였던 이 '김부인'은 그로부터 오랜 역사를 이어갈 이화학당, 이화학교의 첫 학생으로 기록되지만 3개월만에 병으로 학업(?)을 그만둬 버렸다. 두 번째 학생은 "절대 미국으로 데려가니 않는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하고서야 맡을 수 있었던 가난한 집 딸아이였고 세번째 학생은 버려진 콜렐라 환자들 틈에서 거둬온 모녀 중 딸아이였다. 스크랜튼이 이들을 데려오는 일을 도왔던 인부들은 남편도 버린 모녀를 돕는 스크랜튼 부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삯을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힘겹게 학생들을 모시면서 꾸려가던 이화학당에 네 번째로 피어난 배꽃이 있었다. 이름은 촌스러움의 극치이지만 그 성정은 조선 여성의 장점은 다 갖고 태어난 듯한 김점동이라는 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펜 젤러 선교사의 집에서 잡무를 보던 이였기로 양도깨비들에 대한 공포 없이 열 살의 나이에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영특하고 총명했던 그녀는 금새 외국어를 깨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의 통역 노릇을 하는데 거기서 그녀는 또 한 번의 알깨기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여의사 로제타가 수술로 언청이를 훌륭하게 고쳐내는 것을 목격한 일이었다. 원래는.의술에 큰 관심이 없던 그녀는 이 일로 의학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의사가 되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혼인하는 방식도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조선식 결혼 적령기인 열일곱살에, 김점동은 로제타 선생의 남편인 윌리엄 홀의 일을 돕던 성실한 청년 박유산을 소개 받게 된다. 그런데 김점동의 집에서 박유산의 신분이 낮다고 반대했는데 김점동은 뜻을 굽히지 않고 박유산과 결혼한다. 이 선택이 탁월한 것이었음은 곧 밝혀진다.

김점동은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 공부를 했다. 나이 열 세 살에 세례를 받은 이후 그녀는 본명 김점동보다 세례명 에스더로 즐겨 불리웠고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니 미세스 박, 즉 박에스더가 된 그녀가 의사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의 후원자 로제타 선생의 친정 농장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그를 뒷바라지한다.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박에스더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00년 6월이었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학위를 받기 20여일 전, 1900년 5월 28일 남편 박유산은 고된 노동 끝에 얻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기쁜 일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고, 그 다음으로 기쁜 일은 에스더 당신을 만난 일이라” 하며 묵묵히 일하고 그 돈으로 자신의 공부를 돕던 남편의 죽음 앞에서 김점동이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박에스더는 남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철석같이 했던 것 같다. 안정된 미국의 의사 자리를 마다하고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통역으로 근무했던 보구여관 (최초의 여성 병원) 의사가 되어 병이 들어도 의사에게 보일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을 도왔고, 열 달 동안 3천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 후 역시 로제타 홀이 세운 평양의 기홀 병원으로 옮긴 뒤에는 쉬지 않고 인근의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무료 진료 활동을 펼치는 한편 간호사 양성소를 세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10여년을 보낸 뒤 박에스더는 그녀를 의사로 만들기 위해 농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다가 남편을 쓰러뜨린 바로 그 병마, 결핵에 걸려 세상을 뜬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결핵으로 죽어간 의사 부부를 안타까와하던 로제타 홀의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양성소를 세우는 한편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최초로 발행하게 된다.

1886년 5월 31일 한 배움의 터전이 빈약하게 세워졌고, 가르치려는 사람이 배울 사람을 간청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 네 번째 배꽃은 짧으나 화려하게 피어나 그 이후 100년이 넘는 역사를 비춘다. 언젠가 이화여대에서 “이대의 사위들”이라는 거창한 행사를 기획했을 때 고관대작과 온갖 재벌들과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총출동할 것이라는 기사를 본 바 있는데, 나는 그 모두보다도 박유산의 이름을 앞에 두고 싶다. 아내의 꿈을 위하여 자신을 버린 남자, 그만큼 자랑스런 ‘이화의 사위’가 또 어디 있으려고. 이화여대 창립 126주년에 김점동, 박에스더와 박유산을 생각한다.

1968.6.1 기적, 지상에서 영원으로

$
0
0
산하의 오역

1968년 6월 1일 기적, 지상에서 영원으로

한때 그런 농담이 돌았다. 세계 위인들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키가 작아 장가도 못가고 특정 지역 출신으로 출세는 꿈도 못꾸었을 것이고, 퀴리부인은 여자라서 박사 학위에서 밀려 나이든 조교로 빌빌 매고 있을 것이고 운운의 농담인데, 여기에 헬렌 켈러를 추가해 보자. 헬렌 켈러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평생 장애인 시설에 갇혀 살거나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어요. 나 아니면 저 아이가 어떻게 살겠어요.”라고 울먹이는 부모님의 짐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유력하지만, 용케도 한국에도 앤 설리반 같은 선생님이 계셔서 그녀가 말을 하고 글자를 읽게 되고 대학까지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물론 인간의 불퇴전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서, 전국 곳곳을 누비며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를 부르짖는 명강사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아니오이다. 한국에서 헬렌 켈러가 살아갔다면 그녀는 감옥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국가보안법 을 중대하게 위반한 혐의로 말이다. “동쪽에서 새 별이 떠올랐다. 고통과 괴로움으로 얼룩진 낡은 질서 속에서 새 질서가 태어났다. 전진! 동지들이여 단결하라 전진하라. 아! 혁명의 현장으로 전진하라. 동트는 새벽을 향해 전진하라.” 러시아 혁명을 찬미한 사회주의자가 감옥으로 가지 않으면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우리는 불굴의 의지의 가정교사 앤 설리반이 짐승처럼 돌진하는 헬렌 켈러의 머리에 들이받혀 이빨 서너 개 부러뜨려 가면서 아이를 다잡고, 물을 손바닥에 떨어뜨린 후 Water를 가르치고, 단어 하나 하나를 익혀 가던 기적 같은 감동, 감동의 기적만을 주로 기억한다. 그렇게 언어를 배우고 세상을 알았던 헬렌 켈러가 그 뒤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했다거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앤 설리반이 헬렌 켈러에게 가르쳐 준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앤 설리반은 헬렌에게 조지 웰즈의 <신세계>를 추천했고 헬렌은 그 책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앤 설리반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헬렌도 그를 부인한 바 있지만, 설리반의 남편 존 메이시는 꽤 열정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였다.

1898년부터 1921년까지의 헬렌 켈러는 과격해 보일만큼의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나는 열악한 작업장과 공장,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뉴욕과 워싱턴의 빈민굴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환경이 열악한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물론 나는 그 비참함을 볼 수 없었지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통렬한 외침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공격한다. “왜 그들이 저렇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 답은 사회의 토대가 개인주의, 그리고 정복과 착취의 기조 위에 놓여 전체의 행복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기본 원리 위에 지어진 사회의 구조는 모든 인간들의 발전, 심지어 가장 유능한 이들의 발전마저 지체시키는데 이는 인간의 에너지를 쓸모없는 곳으로 돌려 그 성정을 쉽게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천국 미국 시민들, 그 중에서도 ‘잘나가는’ 시민들이 헬렌 켈러의 이런 말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저 장애를 극복한 영웅, “여러분은 듣고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요? 열심히 일하세요. 행복은 여러분에게 달렸어요.”라고 말하는 연사로서의 역할만 해 주면 좋겠는데 저 따위 수틀리는 소리만 딱딱 하고 있으니 얼마나 고까왔을까.

그들은 헬렌 켈러가 사회주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설리반이나 메이시 같은 사회주의자들에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폄하 비슷한 배려를 통해 헬렌을 무시하려 했다. (하, 이놈의 “너는 이용당하고 있어! 이 불쌍한 것아!” 신공은 동서고금을 통해 유구하다) 헬렌은 여기에도 명확하게 반박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자신들의 선전선동 수단으로 만든 파렴치한 인간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서글퍼한다. 이제 나는 그들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나는 내가 뭘 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1912년 미국 노동운동의 전설이 된 “빵과 장미” 파업인 로렌스 섬유노조 파업에 동참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성인 남녀 1백 명당 36명이 25살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된 참혹한 노동현장에서 임금마저 깎이자 노동자들은 결사적인 파업으로 저항했다., 헬렌 켈러는 북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이 파업 지지 연설을 하고 모금 활동을 벌였다. 구사대가 노동자들을 습격하고 사람까지 죽였지만 파업은 승리했다. 헬렌 켈러는 그 중심에 있었다.

스탈린에 의해 소련 사회주의가 변질되고 미국의 노동운동 조직이 와해되면서 헬렌 켈러도 점차 정치 일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칠 때에도 그녀는 의연하게 과거 사회주의 동지이자 미국 공산당 지도자였던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을 석방하라고 외치는 강단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전쟁 앞에서 일치단결한 미국의 성조기 앞에서도 “여기 미국에서 흑인들이 학살되고 그들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의 지배자들은 민주주의와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우고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부르짖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전 세계를 돌며 장애인 복지와 반전을 외치던 그녀는 1937년 식민지 조선에도 왔었다. 서울에서 강연을 한 후 평양으로 향하는 기차가 개성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 그녀는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강연을 했다. 당시 개성 호수돈 여고 교사 류달영의 회고에 따르면 “'이 세상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며 사랑이 없는 국가와 사회는 퇴보할 뿐”이라는 주제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알멩이도 없고 뼈대도 없이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부르짖는 뜬구름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적대감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빌어 온다.



tag :

1978.6.2 사상 최악의 월드컵 종료

$
0
0
산하의 오역

1978년 6월 2일 사상 최악의 월드컵 종료

올림픽 가운데 정치적으로 이용된 최악의 올림픽이라면 베를린 올림픽을 든다. 5공 시절 김영삼이었던가가, 88 올림픽을 베를린 올림픽에 비교해 올림픽에 목숨 걸던 5공 정권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도 있었다. 월드컵 가운데에도 그런 월드컵이 있었다. 가장 정치적으로 오염되었을 뿐 아니라 , 단순한 정치 권력에 대한 부역을 넘어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치다시피 ...했던 검은 월드컵이 있었다. 1978년 6월 2일 폐막된 아르헨티나 월드컵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호르헤 비델라.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그는 그 이후 지속된 ‘더러운 전쟁’ 즉, 반대파들에 대한 잔인한 숙청과 고문, 학살의 총지휘자였다. 그의 치세에 실종된 이들만 해도 최대 3만명을 헤아리는데 죽이다가 죽이다가 나중에는 마취제를 놓고 비행기에 태워서는 대서양에 내던지기까지 했다니 가히 상상을 절하는 시기였다 하겠다. 이런 나라에서도 월드컵이 열린 것이다. 물론 비델라의 목적은 그 10년 뒤 열릴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의 대머리 지도자의 그것과 같았다. ‘축구(스포츠)를 통한 국민의 정치적 관심 소멸’

처음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은 군 장성이긴 했지만 비델라와는 껄끄러운 사이였다. 비델라는 컬러 티븨의 전면 송출 (아르헨티나 국내외 모두)을 원했는데 조직위원장은 그를 거부했다. 이윽고 조직위원장은 ‘좌익 게릴라’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그 뒤를 이어 조직위원장을 맡은 이는 비델라의 심복이었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어떻게든 우승”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입김과 검은 돈이 그를 위한 레드 카펫을 깔기 시작했다.

첫 경기였던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헝가리 대표팀은 어이없이 두 명이 퇴장을 당했고 아르헨티나는 첫승을 챙겼다. 걸출한 스타 미셸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 팀과도 대결을 벌였는데, 완벽한 찬스에서 아르헨티나 선수가 손으로 프랑스 선수를 잡아채는 상황에서도 멀거니 지켜보는 주심을 두고서야 천하의 플라티니인들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깐깐하기로 소문났던 심판이 주관한 경기에서는 이탈리아에게 일격을 당한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당시 경기 방식은 우리에게 익숙한 토너멘트가 아니라 2차 리그전의 1위가 결승을 치르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년도 우승팀인 서독, 당대 최강팀 네덜란드, 아르헨티나를 꺾은 전력의 이탈리아가 한 조로 몰린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폴란드 페루를 상대했는데 브라질과는 악전고투 끝에 0대0으로 비겼고 폴란드는 물리쳤다. 결국 조 1위는 브라질과 폴란드 전, 아르헨티나 페루 전의 승패와 골득실 여부에서 결정나게 됐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두 경기가 동시간에 벌어져야 하는 것은 상식일진대 브라질과 폴란드의 경기가 ‘먼저’ 벌어지게 된 것이다. 복장터지는 브라질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3대1로 페루를 이겼다. 아르헨티나가 결승에 가려면 네 골 차 이상을 이겨야 했다. 여기서 월드컵 사상 최악의 거래가 일어난다.

아르헨티나는 급거 페루에 곡물 수만톤과 수천만 달러의 현금을 ‘원조’하게 되고 페루팀 골키퍼로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가 전격 기용되는가 하면, 페루의 공격수들은 유난히 헛발질을 벌이고 최종 수비수가 공격진에 가세하는 희한한 포메이션을 보이게 된다. 결과는 6대0이었다. 브라질 사람들 다혈질이라는 거 순 거짓말이다. 한국 같으면 선전포고를 했을 것이다. 브라질은 그렇게 결승행 티켓을 잃었다.

결승 상대는 네덜란드였다. 4년 전 독일에게 당한 뼈아픈 역전패를 딛고 이번에는 우승을 거머쥐겠다고 나선 오렌지 군단이었지만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의 만행에 항의하며 불참한 요한 크루이프도 아쉬웠고 뭣보다 툭하면 반칙 호각을 불어대는 아르헨티나의 열 두 번째 선수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연장까지 간 끝에 아르헨티나는 3대1로 우승을 차지한다. 역대 최악의 월드컵의 종말이었다.



tag :

1946.6.3 정읍에서 터진 폭탄

$
0
0
산하의 오역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터진 폭탄

전라북도 정읍은 그렇게 큰 고장이 아니지만 전라도 다른 고을에 비해서 유명세를 탄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백제 때부터 ‘정읍사’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달하 노피곰 도샤..... 아으 다롱디리. 조선 말엽 동학 운동의 본고장이었고 호남의 교통의 요지였던 이 정읍의 이름은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또 한 번 전국적인 유명세를 탄다.... 어떤 거물이 정읍에 들러서 한 발언이 폭탄처럼 전국을 들쑤셔 놓은 것이다. 그 거물의 이름은 이승만이었다. 1945년 10월 그가 귀국했을 때 그가 한 말은 그 이후 수십년간 ‘대동단결’을 주창하는 이들에게 즐겨 쓰이는 명구였다. “뭉치면 삽네다 흩어지면 죽습네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해방 후 헤아릴 수 없는 단체와 조직들이 범람하여 그 가입 성원 수를 다 합치면 2천만 인구를 훌쩍 뛰어넘던 시절에 그 말은 일종의 복음처럼 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또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한 세기 전 독립협회 시절부터 큰 이름이었다. 해방 후 좌우를 망라한 모든 조직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내지 주석으로 꼽히고 있었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맡기자고 주장하여 임시정부를 발칵 뒤집어놓고 탄핵당한 경력이나 가는 곳마다 분란을 일으켰던 과거와는 별개로 그는 독보적인 민족의 지도자로 꼽혔다. 그에 감동해서일까. 그는 귀국 후 그의 평생 행태로 비추어 믿어지지 않는 말까지 남긴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이걸 카사노바의 순결선언에 비해야 할지 가카의 “가장 도덕적인 정부”론에 비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는 않는데 하여간 그땐 그랬다.

1945년 말, 해방된지 얼마 안된 나라에 5년간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무척 왜곡되었던)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두고 일사불란한 반대 투쟁이 조직되었다가 좌우가 분열되고 극심한 혼란에 접어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후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소련이 삼상결정 반대자들을 배제하라고 요구하고 미국은 이에 반대하여 지리한 입씨름이 벌어지는 가운데 결렬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팻말에 불과했던 38선은 점차 굳어져 가고 있었고 분단이란 꿈에도 생각지 않던 사람들의 가슴에도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거 나라 허리가 잘리는 거 아닌가?”

1946년 5월 미소공위가 교착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고 발언한다. 그의 자율적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는 곧 밝혀진다. 각지를 돌아다니던 이승만이 1946녅 6월 3일 정읍에 도착했을 때 그는 향후 한국 현대사에서 지대한 의미가 있는 말 폭탄을 터뜨린 것이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었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며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입네다.”

이것이 유명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다. 이른바 분단의 첫 단추였다고 지탄받는 정읍 발언이지만, 팩트로만 보면 그건 첫 단추의 오명을 쓰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다. 공개된 구 소련 자료에 따르면 1945년 9월 20일, 일본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북한을 장악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에 이미 스탈린은 이런 지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북조선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미 군정은 공식적으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배척했다, 군정장관 러치가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거품을 물 정도였다. 그리고 최초의 남한 단독 정부론으로서 당시만 해도 분단을 꿈도 꾸지 않던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이승만은 자신의 정읍 발언을 ‘허보’(虛報)라 일컬으며 발을 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그 발언대로 움직인다. 1948년 2월 남북협상파와 이승만이 미국 하지 중장의 주재로 마주했을 때 김규식은 “조국의 분단이 결정되는 이때에 우리가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터이니 염려 말라”고 맞받았던 것이다.

몇 년 전 황학동 골동품 시장을 촬영하는데 한 노점상이 벌인 좌판 위에 낡은 레코드판이 놓여 있었다. 어떤 커버 그림도, 사진도 없는 하얀 표지에는 사인펜으로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이승만 정읍 발언 실황 녹음” 이름 모를 노점상은 빼뚤빼뚤한 글씨로 그 역사적 육성을 담아 놨었다. 꽤 무거운 값을 매겨 놓아 가벼운 지갑으로선 어쩔 수 없었지만 가끔 1946년 6월 3일 정읍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사람들에게 “안되면 남쪽이라도!”를 부르짖던, 그리고 스탈린의 지령과 더불어 남북 분단의 시초를 열었던 이승만 특유의 비음이 귀에 쟁쟁해지기도 한다. 한 번 들어라도 봤다는 듯이.



tag :

1921.6.4 해골이 부른 동맹휴학

$
0
0
산하의 오역

1921년 6월 4일 해골이 부른 동맹휴학

경성의전은 서울의대의 전신이다. 요즘도 내 자식이 서울 의대 다닌다는 사람들 보면 어깨에 뽕이 솟아나는 것이 보이거니와 식민지 조선 경성에서 경성의전생이라 함은 가히 엘리트 중의 초절정 엘리트들이었다. 집안들도 좋았을 것이고 머리는 조선팔도에서 알아주는 수재들만이 모였을터, 그런데 이 경성의전생들이 일치단결하여 1921년 6월 4일 동맹파업을 일으킨다. 발단은 ...5월 26일의 해부학 교실에서 비롯된다. 해부학 강의실이 비좁았던 관계로 학생 전부가 다 들어가지 못하고 특별히 지원하는 사람 중에서 본과 5명 청강생 여자 1명 특별과 4명 함계 10명이 실물 해골을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해부학 교수 구보(久保)가 씩씩거리며 교실로 들이닥친다.

" 해부실에 있는 두개골 한 개가 없어졌다. 이게 웬일이냐 어제 들어갔던 조선 학생들 다 나와!"

아닌밤중에 홍두깨라고 느닷없이 해골 내놓으라고 덤비는 것도 이상한데 그 해골수집가가 조선인 학생들일 것이라 단정짓는 구보에게 어이가 상실되는 판이었다. 그런데 구보의 입에서 잇따라 튀어나오는 말은 학생들의 어처구니에 이어 이성적 판단을 잃어버리게 하기에 넉넉했다.

"너희들 조선 사람은 원래 해부학상으로 야만에 가까울 뿐 아니라 너희의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정녕 너희들 중에서 가져간 게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라면 초절정 엘리트건 두메산골 목동이건 단군의 자손의 입에서는 똑같은 말이 그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뭐 이런 쪽발이 시키가 다 있어! " 경성의전생들도 격노했다. 그래도 경성의전생들은 범생이들답게 당장 교수 멱살을 잡기보다는 대표자를 뽑아 교수실로 들여보내 민족적 모욕행위에 대해 항의하고 사과를 받고자 했다. 그런데 구보 교수는 원래 신경질적인 품성으로 유명했던 바, 나름 당당하게 들어선 조선 학생 대표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제대로 말을 들어주지도 않으니 대표단은 항의 한 마디 제대로 전달 못하고 쫓겨 나오고 말았다. 이 꼴을 본 학생들의 머리속은 분노로 표백되고 말았다. 구보인지 구두짝인지 너 두고 보자.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불거졌다. 경성의전 일본인 학생들이 모임을 가지고 자신들이 해골을 가져갈 이유가 없다고 외치며 조선인들에게 그 혐의를 몰아간 것이다. 드디어 분노에 불이 화악 당겨졌다. 이것들이 선생이나 학생이나 매한가지로 놀고 있어.

조선 학생들도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이 일은 그냥둘수 없고 저것들을 그냥 둘 수 없다. 핏대를 세우려는 판인데 우에다라는 일본인 교수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강당에 들어와 덮어놓고 해산하라고 우겼다. "아니 센세이! 일본 학생들은 맘대로 모여 멋대로 떠드는데 우리는 모이지도 못합니까. 우리가 야만족이라 그렇소?" 그래도 우에다는 막무가내였다. "교수가 나가라면 나가야지 웬 말이 많은가." 마침내 강당은 울부짖는 학생들과 교수들 교직원들이 뒤엉킨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조선 학생들의 기세에 교직원들이 퇴장한 후 조선 학생들은 매우 간단하나 절절한 요구 사항 두 개를 내건다. 1. 구보교수의 말에 조선인은 해부학상으로나 국민성으로나 야만됨을 면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선생은 마땅히 학생 일동에게 그 자세한 연구를 학리상으로 강의하여 들려 줄 것. 그리고 구보교수의 교수는 받지 아니 할 터이니 속히 조치하라는 것이었다. 2가지 조건을 사무실에 제출하고 48시간 안에 가부간 처단이 없으면 일반 조선인 학생은 동맹휴학을 하겠다 하였는데 학교측은 요지부동이었고 마침내 1921년 6월 4일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들은 전면 파업에 들어간다.

그 맹휴 선언문을 보면 울분이 덕지덕지 묻어나고 분통이 글자마다 맺힌다. ."구보박사는 말하기를 부정한 행위를 한 자는 반드시 조선인 중에 있는 것은 의심할 바도 아니다. 그는 조선 민족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그의 역사를 돌아 보더라도 분명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말이 조선인 학생인 생등에게 어떠한 찔림이 되었을지는 사실의 진상을 아는 자는 짐작할 만하다. 생등은 박사가 교수할 때에 걸핏하면 조선 민족은 야만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의 논하는 근거가 박약함에 놀람이 실로 한두 번이 아니었지마는 이는 박사의 천성이 신경질임에 그 허물을 돌리고 생 등은 매우 넓게 생각하여 참고 지내 왔도다.

그 본으로 한 두 가지를 말할진대 일찌기 조선의학회(朝鮮醫學會)에서 조선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과 근육의 발달의 열등임을 증명하여 이것으로써 곧 민족의 야만됨을 단언하다가 어떠한 교수의 반박을 받은 일도 그 하나이오, 또 박사는 겨우 세 명의 조선 사람의 통계로써 교근(咬筋)이 양호한 즉 야만민족이라고 공식으로 의학회상에서 발표하다가 즉석에서 통렬한 질문을 당한 따위도 그 하나이오, 또 해부학상에 문명이라 인정하는 단두(短頭)도 조선인에게 한하여는 야만이라고 하고 소아의 양육상에 관계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어찌 그 근거가 박약하다 이르지 아니 하리오."

요즘은 외국인들에게 장히 모질다 소리 듣고 사는 우리는 90년전 그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생김새의 특징을 들어 야만족이라 낙인찍혔고 표정의 특이함 때문에 인간같지 않은 종족으로 폄하되었고 무엇이 없어지면 당연히 우리 탓으로 돌려지고 그것은 그 미개한 역사로 증거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구보는 없을까


tag :

1949.6.5 국민보도연맹의 탄생

$
0
0
산하의 오역

1949년 6월 5일 보도연맹의 탄생

1949년 6월 5일 명동의 시공관에서는 한 단체의 결성식이 열렸다. 단체를 이끈다는 사람들의 면면은 매우 화려했다. 선우종원, 오제도, 정희택 등 해방 공간과 정부 수립 과정에서 좌익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 온 ‘사상 검사’들이 그 단체를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성 이후 지금의 중앙일보 자리에 번듯한 사무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한 ‘국민보도연맹’은 그럼 무엇을 ...하는 단체였는가. 주도자는 우익 중에서도 울트라 우익이라 할 사상검사들이었고 총재는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효석이었고, 고문으로는 저 유명한 “아침은 개성,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뇌까린 국방장관 신성모가 좌정하고 있었으니만큼 여지없는 우익 관제단체처럼 보였지만, 그 단체가 끌어들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우익이 아니었다.

‘보도’(保導)라는 단어를 살펴 보면 그 뜻은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뜻이다. 국민보도연맹 지도부가 보호하고 지도하고자 했던 이들은 바로 좌익들이었다. 좌익에 빠졌거나 그 물을 튀겼거나 하다못해 좌익의 가족들이거나 우익이 보기에 좌익같아 보이는 모든 이들을 포함한 것이었다. 즉 한때의 실수(?)로 좌익의 대열에 들었던 이들을 보호하고 지도해 올바른 길로 이끌겠다는 포부였다. 물론 속내에는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뿐 아니라 그 인적 인프라를 활용해 지하로 들어간 좌익의 뿌리를 뽑겠다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가입을 하게 되면 함께 활동했던 좌익의 명단을 제출해야 했고, 가입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그 자백 내용을 검열받아야 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좌익 전력자는 정말 재미없을 것이라는 음산한 포고가 낭랑한 가운데 전 남로당원들을 비롯하여 어쩌다 인민위원 감투를 썼던 촌로들, 친구 따라 강남간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가입을 했고, 여기에 공무원들의 성과주의 경쟁이 덧붙여지면서 보도연맹원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빨갱이로 몰린 이은주가 애인 장동건에게 “나는 보리쌀 준다고 해서 가입한 죄밖에 없다.”고 했던 것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공무원들에게는 ‘모집 할당량’이 떨어져 있었고 마치 요즘 교회들의 전도자 자랑처럼 “우리 고장에서는 이렇게 많은 좌익이 보도됐어요.”의 의미로 보도연맹원들을 불려 나갔던 것이다. 불과 1년만에 보도연맹은 연맹원 30만을 헤아리는 거대 조직이 됐다. 그 가운데 진짜배기 좌익 출신은 20 퍼센트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순진하고도 얼뜬 얼굴의 농민들이었다는 것이 보도연맹원 모집책들의 진술이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면서 이 보도연맹원들의 명단은 그대로 처형자 명부로 변해 버렸다. 전쟁 발발 당일 요시찰인물 체포령이 떨어졌고 6월 30일에는 보도연맹원을 소집, 구금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리고 벌어진 것이 보도연맹원 대학살이었다. 좌익의 만행에 대해서야 누누이 가르치고 배우지만 적어도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학살은 남한이 먼저 그 피비린내 나는 선빵을 날린 셈이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에 쫓기면서 경찰과 방첩대는 소집해 놓은 보도연맹원들을 알뜰하게 살해하고 남하했다. 가장 학살의 형태가 심했던 것은 국군의 후퇴 루트였던 충북과 경상도 지역이었다. 경기도에서 경황없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을 미처 해치우지 못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한국군과 경찰은 미군이 경악하여 뜯어말릴만큼 자국민들을 죽여서 묻었다.

몇 년 전 경남 하동에서 사연 많은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평생을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할머니는 온 집안을 쓰레기로 채우며 정신줄을 놓고 계셨다. 아들과 함께 그분을 입원시키고자 별의 별 설득을 다했지만 할머니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은 강제 입원을 시킬 수 밖에 없었는데, 대개 그 모양이 심히 아름답지 못하기에 답답한 가슴으로 응급이송단을 불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와 아들에게는 온갖 쌍욕을 퍼부으며 흙을 끼얹던 할머니가 갑자기 어린 양처럼 양순해진 것이다. “내 가야 됩니꺼? 갈랍니더 갈랍니더.”

어안이벙벙해진 나와 당신의 아들을 제치고 할머니는 오히려 앞장서서 앰뷸런스로 향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 영문을 물어봤을 때 할머니는 “제복 입은 사람들이 가자면 가야지.” 제복의 공포였다. 할머니의 부모는 경남 하동군 보도연맹원이었다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기억나는 건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노는 내를 보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던 생각 밖에 안나요.” 어느 더운 여름날 부모를 데리고 갔던 제복들, 툭하면 대문간을 차고들어와 할아버지를 윽박지르던 제복들을 할머니는 평생의 공포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연신 “아이고 무시라.”하면서 응급이송단들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자기 마음대로 낙인을 찍은 후 그 낙인에 따라 수십만의 생명을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던 범죄의 시발, ‘보도연맹’이 1949년 6월 5일 결성됐다. 전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세력이 그 승리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범죄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인간의 존엄성이 총알에 찢기고 몽둥이에 박살나고 화마에 휩싸였던 보도연맹의 추악한 유령이 배회하는 땅에서 자유민주주의란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한가. 하지만 늬우침은 없다. 운동권 물을 먹기도 많이 먹었던 경기도지사는 거명까지 해 가며 ‘주사파’의 ‘회개’를 요구하고 있고, 또 다른 보도연맹 주도자들의 후예들은 또 다른 보도연맹원들을 양산해내지 못해 안달이다.

보도연맹원 중에 이른바 골수 좌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조차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60년 뒤, 나는 북한에 대해 과도한 편향을 보이는 ‘종북주의자들’을 혐오한다. 그들의 무식함과 부끄러움 모름에 치를 떨고 이 정부의 삽질과 맞먹는 급의 ‘헌신’의 자아도취에 아연해지며,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시대착오적 현실 인식에 동정심마저 품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을 이유로 형벌과 징계와 폭력을 들이밀 권리는 민주공화국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잘못된 사상은 자유로운 공론장에서 추방되고 사멸해가는 것이지 탄압과 왕따로 소멸되는 것이 아님은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석기 이하 통진당 내 종북주의자들 (친북주의자들이 아니다. 친구란 때론 말도 모질게 하고 싸울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럴 깜냥이 없다)을 반대하지만 그들의 사상의 자유가 폭력적으로 짓밟히고, 나아가 보도연맹식으로 그 언저리까지 색깔론의 포화가 작렬할 때 나는 나 스스로 종북주의자의 동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1949년 6월 5일 결성된 보도연맹이 주는 피비린내나는 교훈이다.




tag :

어느 통진당 간부의 글에 기함함.

$
0
0
통진당 당게의 베스트 글 중에서..... 진보고 자시고 민주주의부터 공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노트북을 들고 현장을 다니면서 형님 동생아 친구야 제발 투표좀 해라라고 하소연 하면서 이같은 방식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비밀투표의 원칙에 위반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고 하루바삐 개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누구보다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부정한 선거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뭐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좀 맞아야겠어 급의 논리전개)

내 의견을 말하고 선후배 친구들이 내가 지지하는 사람에게 투표해 주기를
요청했고 바랫지만 강요한적 없습니다.

(--->전두환도 돈 달라고 강요한 적 없음)

가능하다면 최종 클릭하는 순간은 애써 외면 하기도 했습니다 (눈물난다)

정당한 선거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했고 그 판단은 지금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이 사람 머리는 붕어급임. 어떻게 3초 전에 자기가 쓴 글을 까먹나)

 대놓고 자신의 부정선거를 폭로하는 이 용감함을 자학이라고 봐야 되나 자해라고 봐야 되나


tag :

1944.6.6 D데이, 카파의 손도 떨렸다

$
0
0
산하의 오역

1944년 6월 6일 D데이, 카파의 손도 떨렸다

세상 일은 우연의 연속이다. 하지만 1944년 봄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사령부는 도저히 우연이라고는 보기 힘든 사안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바야흐로 도버 해협을 건너 유럽 대륙 본토에서 제 2전선을 일구려는 야심찬 계획이 착착 진행 중이었는데 난데없는 신문 단어 퍼즐 퀴즈가 문제였다. 레너드 도우라는 교사가 출제한 데일리 텔레그래프 신문의 ...단어 퍼즐의 답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들이 5주 연속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유타(미국의 주)” “오마하”(미국 지명) “넵튠” “오버로드” 등이었다. 이 이름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요긴하게 쓰일 비밀명이었고 ‘오버로드’(대왕)은 숫제 작전명이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었다. 독일의 스파이가 작전 상황 일체를 신문 퍼즐을 통해 유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막상 도우를 심문한 이들은 이 사태가 기막힌 우연의 연속이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평범하고 샌님같은 이과 교사였던 도우에게는 아무런 혐의점도 없었고, 자신에게 들이닥친 수사관들 앞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우연이었던 것이다.

독일은 남프랑스에서 덴마크에 이르는 3840킬로미터라는 엄청난 길이의 해변에 ‘대서양 장벽’을 쌓아두고 있었다. 상륙방해 구조물과 지뢰, 포대, 기관총 기지로 무장한 이 대서양 장벽 건설을 주도한 인물은 사막의 여우 롬멜이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로 온다. 그들이 상륙한 후 24시간이 아군에게나 그들에게나 승패를 좌우하는 기나긴 하루가 될 것이다.가장 긴 날이.”라고 훈시한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1944년 6월 6일 문제의 가장 긴 날, 제 위치게 없었다. 하필이면 아내의 생일이 6월 5일이어서 휴가를 받아 독일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우연.

1944년 6월 4일, 연합군은 수십 년만에 최악이라는 날씨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악천후가 계속되었고 이는 상륙을 감행하는데 필수적인 공중 지원과 함포 사격을 불가능하게 했다. 날이 갈수록 치밀한 롬멜의 대서양 방벽은 더 탄탄해질 것이었고, 기밀 유지도 어려울 게 뻔했다. 그때 무뚝뚝한 표정의 영국 공군 대령 스태그가 복음을 가지고 왔다. “한랭전선이 갑자기 발달해서 남쪽으로 뻗고 있습니다. 이 전선이 지나간 후 6월 5일 오후부터 6일까지는 날씨가 괜찮겠습니다. 그 뒤 다시 날씨가 나빠질 겁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받을 때는 허리케인급의 돌풍과 빗줄기가 사령부를 때리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이 몽고메리 영국군 원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루 반의 시간에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것은 섰다판같은 도박이었다. 몽고메리는 간단하게 답한다. “저같으면 고(Go) 하지요.” 아이젠하워 역시 결의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것 밖에는 없다.” 1944년 6월 6일의 D데이는 이렇게 날씨 때문에 정해졌다. 매우 결정적인 우연.

앞서 언급한 유타, 오마하 등은 상륙지점에 대한 암호명이었다. 그 가운데 오마하 해변은 지형상 상륙하기에는 매우 껄끄러운 곳이었다. 대신에 수비병력은 허약하다고 평가됐는데 하필이면 상륙작전 1주일 전에 러시아 전선에서 날고 긴 사단이 배치되어 왔다. 오마하 해변은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그 유명한 전투 장면은 오마하 해변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런데 새벽에 상륙을 개시한 미군들 가운데에는 총 대신 카메라를 든 이가 하나 있었다. 로버트 카파라는 헝가리 출신의 종군 기자였다.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은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기관총 세례에 픽픽 나가 떨어지는 병사들의 시신을 헤치면서 셔터를 눌러댔다. 최초의 상륙정에 타고 있었기에 그는 돌진하는 병사들의 등짝 뿐 아니라 악으로 깡으로 상륙하는 군인들의 얼굴까지도 앵글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뭍에 닿지도 못하고 수천 명이 구멍 뚫린 송장이 되어 죽어가는 현장에서 어지간히 대담했던 그도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깊이 모를 공포가 머리를 얼어붙게 하고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카메라를 찍으려 했지만 찍을 수 없었다. 손의 떨림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되돌아서서 상륙하는 상륙주정을 향해 달렸다. 해안가 쪽을 돌아보려 했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상륙주정에 올라섰을 때 폭발이 일어나 그 배의 부관이 날아갔고 카파는 다시 해안가를 돌아보며 셔터를 누른다. 그렇게 100여 장의 사진을 찍고서 영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기가 막힌 현장 사진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하던 현상 기사가 필름을 서둘러 가열하는 바람에 그만 홀라당 타 버리고 말았다. 남은 건 열 장의 사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러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직업 근성으로 시체가 된 사람들과 시체가 될 사람들 사이에서 찍은 긴박한 사진은 아쉬우나마 그렇게 세상에 남았다.

D데이, 카파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본다. 총알 하나가 삶과 죽음을 가르던 순간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은 카파의 초점 흔들린 사진을 통해서 기억된다. 오마하 해변을 향해 끈질기게 헤엄쳐 가는 얼굴 알아보기 힘든 미군은 과연 살아남았을까. 상륙방해 구조물 뒤에 온몸을 웅크린 채 소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는 살아서 모래사장을 밟았을까. 인명피해는 엄청났다. 29사단 116연대 A중대는 훈련을 마친 후 197명이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사진 속의 96퍼센트가 상륙 후 10분 안에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거대한 작전의 캐터필러는 엉뚱한 우연과 필연의 의지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수많은 이들의 생명과 미래를 짓이기면서 역사 속을 느릿느릿 전진했다. 롬멜이 말한대로 1944년 6월 6일은 20세기에서 가장 긴 날 중의 하루였다


 

1909.6.7 의병장 이인영 체포

$
0
0
산하의 오역

1909년 6월 7일 의병대장 이인영 체포

대전이라는 도시는 원래 조선 500년 내에는 없던 도시다. 충청도의 중심도시는 언제나 충주, 청주 그리고 공주나 홍주 정도였지 대전이라는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한밭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그러나 경부선이 완성되고 교통의 요지가 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09년 쯤에는 일본의 헌병대가 진주해 있었는데 1909년 6월 7일 헌병대에 마...흔 살 가량의 한 사람이 잡혀 들어왔다. 부친 성묫길에 잡혀 왔다는 남자의 이름은 이시영이라 했으나 이미 일본 관헌들은 이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인영이다. 대어를 낚았군”

이인영은 1868년생이다. 태어난 곳은 경기도 여주, 민비의 고향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그는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주로 강원도 지역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수십 차례 싸웠지만 다음 해에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권고를 받고는 의병을 해산한다. 싸우겠다고 일어선 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임금이 해산하라니 기껏 일어선 의병들을 흩어 버리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일어난 의병 대부분이 그랬다. 유인석이 그랬고, 최익현은 진격 도중 진위대와 마주치자 임금의 군대와는 싸울 수 없다며 체포된다. 임금을 거역한다는 것은 하늘이 두쪽나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양반 유생들이었던 것.

그 후 오랫 동안 경상도 문경에 은거하던 이인영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고종의 강제 퇴위 후 강원도 원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 이구채 등이었다. 그들은 이인영에게 자신의 지도자가 되어 주기를 청한다. 이인영의 군사적 재질을 가졌다기보다는 그의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을미의병장 이인영의 이름이. 그런데 이인영은 망설인다. 아버지가 중한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경구를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란 조선의 유학자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구실이었다. 아니 유생뿐이랴. 대원군의 아버지 묘를 도굴하려 들었던 오페르트에 따르면 자기 임무를 방기한 채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던 조선 병사가 마을에 이르러서는 “우리 아버지는 살려 주시오.”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하니 말이다., . 그러나 이은찬은 나흘을 버티며 이인영을 설득한다.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란 그에 비하면 가벼운 일인데 어떻게 공사를 미루겠습니까.”

결국 이인영은 이은찬에게 설득당하여 몸을 일으킨다. 이인영은 관동창의대장의 기치를 올리고 전국은 물론 해외동포에까지 격문을 뿌려 일본에 저항할 것을 호소한다. 그 격문은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전명운 장인환도 이 격문을 읽으며 몸을 떨었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군인을 모조리 없애는 데에 힘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그는 수도 진공 작전을 설파했다. “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孤獨)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데 있은즉, 각도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로 경기 땅을 쳐들어가면 온 천하는 모두 우리 것이 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각 도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하게 되는데 그 중 적지않은 수가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이었다. 즉 당시 대한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의 태반이 가세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인영은 함경도와 평안도에는 격문을 보내지 않았다. 수백년간 서북 사람들을 차별했고 두만강이라면 지구 끝의 오지쯤으로 알고 그곳 사람들을 무시했던 조선 유생들의 몹쓸 관념을 이인영 역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에서는 정봉준이 평안도에서는 방인관이 수십 명씩을 이끌고 양주로 왔다.

그 의기는 가상했으나 이인영은 끝내 자신을 지배했던 옛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찍이 그의 의병 동료였던 유인석이 상놈 의병장이 양반 의병장에게 개긴다고 상놈 의병장의 목을 쳐 버리고, 자신의 부대에 동학군 혐의가 있는 자가 낀 것을 알고는 역시 목을 베어 버린 것처럼, 그는 신돌석같은 용맹하지만 애석하게도 평민인 의병장이 자신과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용인하지 못했고,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부대는 서울 진공 작전에서 배제되고 만다.

그러나 일본군도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군사를 지휘했던 왕산 허위의 300여 병력이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지만 일본군의 반격에 휘말려 뒤돌아 보고 또 돌아보며 짚신발 절며 절며 한많은 망우리 고개를 떠나야 했다. 다시 절치부심 한양 땅을 넘보는 와중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인영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총대장이 3년상을 치러야 한다며 진영을 떠나겠다고 한 것이다. 그 자리에 모인 의병들 가운데 상당수는 처자식이 배를 곯고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늙으신 부모 병들어 오늘 내일 하는 이도 하나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는 쥐뿔만큼도 없지만 그래도 망해 가는 나라 붙들어 보겠다고 화승총 잡고 발 부르터 가면서 산 넘고 물 건너 양주까지 왔는데 총대장은 아버지가 죽었다고 낙향해 버렸다. ““나라에 불충한 자는 어버이에게 불효요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나라에 불충이니, 효는 충이니 하는 것은 그 도가 하나요 둘이 아니니라.”

아버지 3년상 치른 후 의병을 다시 일으키겠다던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체포되고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교수형을 당한다. 그는 끝까지 옛날 사람이었다. 일본인들의 악형 앞에서도 꿋꿋하게 버텨 존경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마지막 요구는 “일본 왕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적국의 왕을 만나 대의명분으로 그를 설득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을까. 이인영의 ‘헌신성’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한 점 의심할 것이 없다. 다만 그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지나치게 예스럽고 고루하며 완고하였을 뿐이다. 그 가치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행동들은 결국 이인영 자신과 그를 따라 몰려든 수천 명의 인생,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을 허무하게 붕괴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세상이 헌신과 진정성만으로 바뀌었다면 삼백 예순 다섯 번도 더 바뀌었을 것이지만, 세상은 헌신과 진정성의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도 냉혹하게 묻는다. 오늘날에는 이인영이 없을까.



tag :
Viewing all 497 articles
Browse latest View live